[리뷰] 짐 자무쉬의 <패터슨>


'거장' 짐 자무쉬의 신작 <패터슨>. 우린 이 영화에서 아마추어 예술가를 만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를 말함에 있어 '짐 자무쉬'를 언급하지 않는 건 결레다. 그렇지만 1982년 <영원한 휴가>로 센세이션한 데뷔를 한 이후 시종일관 '거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 위대한 예술가를 난 잘 모른다.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 정식 개봉한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이유가 이유라면 이유겠다. 


2017년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좋은 영화 중 하나라 만평할 만한 <패터슨>을 빗대어 간단히 언급하자면, 짐 자무쉬는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세계에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삶'에서 예술을 건져올리고 아름다움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시에 사는 버스기사 패터슨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버스기사로 일하면서 아내 로라와 반려견 마빈과 함께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와중에 틈틈이 시(詩)를 쓴다. 그렇다, 그는 아마추어 시인이다. 한편 그의 아내 로라도 집에서 페인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기타를 치고 펜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아마추어 예술가이다. 그 모든 것에 검정과 하양의, 그녀만의 패턴이 있다. 


큰 배신감과 큰 위안과 격려, 그 사이 


영화는 한편 지루해 어떤 느낌도 들지 않을 수 있지만 한편 상당한 위안과 격려를 건넨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시, 버스기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분)은 어김 없이 6시 10분쯤에 잠에서 깬다.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에게 입마추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는 전날 챙겨둔 옷을 입고 걸어서 출근한다. 출근하면서 떠올리고 구상한 시상(詩想)을 버스 운행 전 짧은 시간에 쓴다. 


본격적인 버스 운행, 패터슨은 패터슨시를 돌며 많은 풍경을 감상하고 수없이 오가는 승객들의 면면과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 점심 시간에는 공원에 있는 폭포 앞 벤치에 앉아 아내가 마련해준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 퇴근해서는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빈과 저녁 산책을 나간다. 


산책 도중 바에 들려 맥주 한 잔 들이키며 바텐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홀로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날 아침이 밝는다. 전날과 그 전날, 매일매일 변함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지나간다. 패터슨의 하루는 속절없이 흐르고 변함 없이 똑같으며 아무런 문제도 없다. 


<패터슨>에서 조금이라도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은 없다. 단연코 없다. 영화에서 어떤 종류의 영화적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얻으려고 했다면 '큰'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이다. 반면 영화에서 또 다른 나의 이야기와 같은 공감을 느끼고자 했다면 '큰' 위안과 격려를 얻었을 게 자명하다. <패터슨>은 그런 영화다. 


YOLO 시대정신에 반기를 들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는 이 시대, YOLO 시대. 이 영화는 정확히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일상에서 특별한 걸 찾거나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안정을 찾는 시대가 저물고 YOLO(You Only Live Once)의 시대가 오지 않았는가. <패터슨>은 그런 시대정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나의 하루는 어떠한가. 6시 반쯤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는 아내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아내와 얘기를 나눈다. 7시 20분쯤 집을 나서 8시 40분쯤 회사에 도착한다. 저녁 6시에 어김없이 퇴근해 7시 반쯤 집에 온다. 간단히 씻고 저녁을 먹고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스마트폰을 하던 아내와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12시쯤 잠에 든다. 저녁을 먹고 1~2시간 정도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갈 때도 있다. 


달라지지 않는 하루 루틴의 큰 얼개이다. 패터슨도 다를 바 없겠지만 그에겐 '시'가 있다. 하루 일과의 순간순간, 행간과 자간을 촘촘히 잇는 시상이 그의 하루를 풍성하게 한다, 특별하게 한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시가 되기에 그 특별함은 다시 평범함으로 치환된다.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나에게도 패터슨의 시와 같은 게 있다. 책과 영화, 내 평범한 삶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그것들 또한 어느새 내 삶의 패턴 안에 자리잡아 평범함의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특별할 것이다. 패터슨도 그러할 테고, 영화에서 패터슨이 존경하는 패터슨시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도 그러했을 테다. 그는 평생 의사로 일하면서 역시 평생 시를 썼다. 


자기 계발이 세계 확장


자기 계발보다 세계 확장, 소수 예술보다 만민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버스기사가 시를 쓴다는 설정임에도 너무나 현실적인 이 영화에서도, 심지어 패터슨이 존경에 마지 않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상징주의를 배제한 객관주의로 명성을 떨친 와중에도,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패터슨이라는 캐릭터를 조금만 더 뜯어보면 '시인'이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정확히 정해진 대로의 하루를 살아간다. 전날 아내가 챙겨둔 옷을 입고, 매일 똑같은 아침을 먹고, 산책길 같은 출근길을 걸어가며, 완벽히 정해진 행선지를 돌고 돌며,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산책길 같은 퇴근길을 걸어오고, 아내와 얘기하는 시간을 갖고, 반려견과 저녁 산책을 나가고, 바에 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맥주를 마신다. 


거기에 루틴 안에서 생각할 어떠한 거리도 없다. 그의 몸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며 그의 정신은 모두 '시'로 향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버스를 운전하며 눈으로는 매순간 똑같은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고, 귀로는 그가 천착하는 일상의 언어로 된 대화들을 들을 수 있다. 블루칼라 노동자의 훌륭한 자기 계발이 아닌 세계 확장이다. 


우린 자기 계발이 아닌 세계 확장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다분히 아마추어적으로. 그것이 진정 삶을 풍성하게 하고 결국 행복하게 할 것이다. 패터슨과 로라가 보여주는 아마추어 예술가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격려와 함께 위로를 보내는 것 같다. 


비록 패터슨의 하루가 최적의 조건으로 꽉 짜여 있다고 해도, 우리 손에는 그런 조건이 쥐어지지 않는다 해도, 예술은 일상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누구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패터슨>을 보며 삶이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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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 표지 ⓒRHK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출판 콘텐츠 중에 '퇴사'가 소소하게 눈에 띈다. 퇴사를 꿈꾸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이를 위로하거나, 퇴사를 해도 잘 살아갈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보라거나, 회사가 전부가 아니니 너무 의존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라거나.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고 가슴속 깊이 받아들이지만 결코 쉽게 하지 못할 퇴사. 


'퇴근', '퇴사',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그 설레는 말 이면엔 회사에선 설레는 일 따위는 없다는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만 회사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가장 쉬운 방편이 아닌가. 맡은 일을 하여 성과를 내고 그에 맡는 돈을 받는 것, 설레는 일 따위 없어도 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이상의 것을 얻어갈 수 있다. 


결국 다시 회사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회사에서의 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회사든 집이든 어디든 그곳에 있는 '나'다. 나는 중심을 잡고 남을 해하려 하지 않으며 나를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그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은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소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RHK)로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쓰무라 기쿠코 소설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휩쓴, 일본 대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일본 최고 권위 문학상을 받고도 오랫동안 작가와 회사 일을 병행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직장과 일상의 어려움과 소소함을 공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소설들로 많은 이들에게 인기와 찬사를 얻었고 얻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또한 그녀가 사방면으로 바라본 직장과 일상의 이야기들 중 하나다. 


갑질의 희생자들


소설은 건축회사에 다니는 시게노부와 디자인회사에 다니면서 프리랜서 기자를 부업으로 하는 나카코를 주인공으로, 기본적으로 소소하지만 때론 격렬함이 따르는 회사와 일상을 내보인다. 그들은 집에선 인간 이하의 삶을, 출근길에선 인간 아닌 삶을 살며, 회사에 와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에 다니기 싫은 건 매한가지다. 그런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날 시게노부에게 걸려온 낯선 남자의 항의 전화, 공사 소리도, 시멘트 냄새도, 작업자들의 이야기 소리도, 창문을 열면 보이는 방진망도, 그 틈새로 먼지가 날아오는 것도 불편하단다. 시게노부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사과하지만 상대방은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이후에도 몇날 며칠 계속 말이다. 시게노부는 진저리가 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 낯선 남자의 꿍꿍이는 뭘까. 


나카코는 프리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시노즈카 씨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프리스쿨 신입생 모집 팸플릿 작업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하고 또 해도 일이 되돌아온다. 수정할 때마다 뭔가 불만스러운 점이 하나씩 되돌아왔고, 그것을 다시 수정하면 또 한두 가지의 지적 사항이 돌아왔다.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작업을 잘하고 말고의 능력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노즈카 씨의 꿍꿍이는 뭘까. 


시게노부와 나카코는 자신에게도, 자신이 속한 회사에게도 아닌, 외부의 누군가로부터 시달림을 당한다. 대상은 내가 속한 회사가 아닌 '나'이지만, 내가 하는 행위란 모두 '회사'에 속한 나로 귀결되기에,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다.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것이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울 수 있는 '갑질'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회사와 일상을 모두 지키는 방법


회사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청춘들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지금, 당연히 회사와 관련된 콘텐츠에서 회사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회사원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설혹 회사원이 되었더라도, 가까스로 들어왔기에 회사에 종속되어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도 그 범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도 이 소설이, 이 작가가 결이 조금 다른 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을 만한 건, 회사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회사 밖 일상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생각보다 회사에서의 일을 크나크게 부풀리지 않고, 일상으로까지 가지고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도 무사무탈하게 하루를 보내고 제때에 퇴근해 맛있는 저녁을 먹고 편안히 쉬는 게 잘못된 일일까.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 그런 생각은 잘못되었다고들 한다. 회사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열심히 해야 비로소 내가 나일 수 있다고들 한다. 아니다, 그건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다른 생각이어야 한다. 회사는 인간 삶의 한 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란 말이다. 


아주 치기 어린 철 모르는 생각이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그런 '반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을 회사에서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갈림길이다. 나는 나를 지킬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한편으론 내가 속한 회사에 최선을 다할 권리와 의무 또한 있다. 모두 할 순 없을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나와 회사 모두를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 내가 무너지면 회사에게 타격이 심대하고, 회사가 무너지면 나에게 타격이 심대하다. 회사와 일상을 양립시키는 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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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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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메이징 메리>


오랜만에 힘뺀 마크 웹 감독이 역시 오랜만에 힘뺀 크리스 에반스를 주축으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어메이징 메리>로 돌아왔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몸에서 힘을 빼면 더 좋은 연기를 선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알듯 말듯한 조언이 있다. 비단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통용되는 조언이겠다. 이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텐데, 진짜로 힘을 잔뜩 들인 것들만 맡다가 가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것을 맡기도 한다. 분위기 전환이랄까, 쉬어가는 시간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일까. 


마크 웹 감독은 데뷔작 <500일의 썸머>로 또 하나의 현대판 클래식 주인이 되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특유의 감각으로 특별함을 끄집어 냈다. 그런 그를 할리우드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바, 그만의 감각만 쏙 빼어내 블록버스터를 만들게 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 2>다. 극히 나쁘진 않았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어메이징 메리>라는 작품으로 데뷔적의 감성과 감각을 다시 선보이려 한다. 조만간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로맨스 영화로 또 한 번 더 찾아온다고 하니, 그 전초전이라고 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히어로 영화들로 근육질을 뽐내며 미국을 지켜내느라 진땀 흘리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도 함께다. 둘이 나란히 힘 뺀 와중에, 연기파 배우 두 명과 천재 아역배우 한 명이 자리를 지킨다. 


치졸한 법정 공방, 그래도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가족끼리 벌이는 법정 공방, 참으로 치졸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메리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플로리다의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에서 배를 고치며 살아가는 프랭크(크리스 에반스 분), 그에겐 여자 아이 한 명이 있다. 다름 아닌 여조카 메리(멕케나 그레이스 분)인데, 그녀는 불과 7살 짜리 수학 천재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를 영재 학교가 아닌 평범한 학교에 보낸다. 메리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소소할 수도 심각할 수도 있는 사건을 일으킨 메리는 쫓겨날 위기 또는 영재 학교로 갈 기회를 갖지만, 프랭크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이 평범한 학교에 메리가 계속 다닐 수 있게 한다. 얼마 후 메리의 외할머니이자 프랭크의 어머니 에블린(린제이 던컨 분)이 찾아온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로, 메리 역시 수학자로 크길 바란다. 


에블린과 프랭크는 메리의 앞날을 두고 대립하고 급기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다. 그 대립 사이에는 에블린의 작은딸이자 프랭크의 여동생인 천재 수학자 다이앤의 자살이 있다. 에블린은 다이앤이 못다 이룬 수학자의 꿈을 메리가 이어 받게 하려는 것이고, 프랭크는 다이앤의 불행한 삶과 죽음이 메리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학 천재 메리를 둘러싼 할머니 에블린과 삼촌 프랭크의 치졸해 보이는 법정 공방이 기본 골자인 이 영화는, 더 많은 시간을 메리를 향한 두 혈육의 보다 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진심어린 걱정과 고뇌에 투자한다. 물론 거기에는 각자 자신의 상황과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향한다. 마크 웹의 감각이 이를 보좌한다. 


마크 웹이 선사하는 소중하고 예쁜 순간들


마크 웹이 <500일의 썸머>에서 보여주었던 순간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선보인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와 가족들 간의 치졸한 공방, 힘든 과거에 기인한 현재의 방향성 다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를 평범하게 만드는 이런 소재들이야말로 마크 웹이 감각적으로 잘 다룰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인데, 쉽게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잘 포착할 줄 안다. 


메리는 그 나이대에 걸맞게 놀며 플로리다의 자연과 벗하는 허허벌판과 해변도 좋아하지만, 수학 천재로서의 기지를 한껏 뽐내며 보스턴의 최첨단과 최신식이 주는 멋스러움과 세련미도 좋아한다. 그처럼 프랭크 또는 에블린과 함께 하는 시간은 메리에게도 소중하고 예쁘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소중하고 예쁜 순간을 선사한다. 


그러며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들은 다름 아닌 프랭크와 에블린의 생활과 생각의 연유다. 프랭크는 메리만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플로리다 구석에서 지내고 있다. 그에게도 그만을 위한 생활이 필요한 법, 마크 웹은 그 순간들에 <500일의 썸머> 감성과 감각을 살짝살짝 녹여 놓는다.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일상. 


한편, 에블린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 오직 딸 다이앤의 과거와 손녀 메리의 현재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뿐이다. 역시 천재였지만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한 아들 프랭크에겐 그래서 아무런 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보다 공에 자신의 인생을 쏟은 에블린의 대를 이은 공적 투신 열망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 


중도적 방향과 방법, 그리고 기본


메리의 인생은 누구도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리디 어린 본인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럴 땐 중도와 기본이 필요하겠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너무 어린 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어른들의 메리를 향한 진심어린 일편단심 또는 그것을 빙자한 자신의 삶을 향한 인정에의 열망에 따라 휘둘리고, 결국 법원의 판결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찾아야 할 방법은 '중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녀와 같은 천재의 사회적 공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양쪽 모두를 열망하고, 앞으로도 열망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외로운 천재의 내재적 비극, 또는 외톨이 천재의 외부적 비극 모두의 안타까움을. 영화는 천재의 삶을 공적, 사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의 앞서 선행되어야 할 삶의 기본이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뜻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 가족이라는 끈 하나로 자신의 모든 걸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뭐든지 일방적으로 몰아가서 후회가 남을 수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등 말이다. 


여러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한 가지 길로만 평생 갈 수도 있고, 수많은 길들을 오갈 수도 있으며, 길 아닌 곳을 헤치며 갈 수도 있다. 아니, 멈춰서서 관망할 뿐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 우리 어메이징한 메리에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그녀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뭐든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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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다가오는 것들>


50대에 접어든 중년 여성의 일상. 프랑스는 다르지 않을까? 영화는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네 50대 어머니이다. ⓒ찬란



30대 남자로서 50대의 여자를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패턴으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어머니 나이대이기에 의외로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도 똑같이 대응하며 살아갈까,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는 떠나보내며 멀어지는 삶을 살아갈까. 대부분은 다가오는 것들에도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무던히 대응하며 살지 않을까.  

프랑스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50대에 접어들어 이룰 것을 다 이루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한 여성의 일생을 그녀의 일상을 통해 들여다본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이자 작가라는 안정된 직업의 외적인 면과,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본 후에 받게 되는 충격 아닌 충격들이 은근히 긴장감 있게, 심심치 않게 진행된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네 50대 어머니의 일상이자 일생이다. 


'멀어지는' 것들의 다가옴


'다가오다'는 분명 좋은 의미로 비친다. 그러나 좋은 것들만 다가오진 않는다. 특히 중년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별의별 것들이 다가오지 않을까. 그 중엔 '멀어짐'도 있을 거다. ⓒ찬란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는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그러며 책도 쓰는 '지식인'이다. 그러는 한편 자신을 존경해 불성실한 학생에서 성실한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한 제자도 있다. 화목한 듯한 가족도 있고, 좋은 집에, 번듯한 별장까지 갖추었다. 그 나이대에 그 정도면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결코 쉽지 않은 안정적인 삶의 양식이다. 


무엇 하나 모자랄 게 없는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다름 아닌 '엄마'다. 혼자 있으면 불안증에 몸서리치며 딸을 찾는 엄마.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의 연락을 받으며 시달린다. 급기야 엄마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녕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진다. 남편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통보. 무심하게 내뱉는 한마디. '다른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이랑 살 거야.'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마디 한다. '평생 나만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남편의 소식을 포함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모두 다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멀어지는' 일 자체가 다가왔다는 게 맞겠다. 이후로도 그녀에겐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멀어지는' 일들이 다가온다. 그녀는 전에 없이 외로워질까, 전에 없이 자유로워질까. 그건 그녀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프랑스인 삶, 프랑스식 삶


그래도 프랑스는 프랑스다. 프랑스인의 삶과 프랑스식 삶이 존재한다. 영화는 꼼꼼히 프랑스를 들여다본다. 하나하나 짚어보는 맛이 있다. ⓒ찬란



영화는 프랑스 중년 여성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프랑스인의 일반적인 삶이자 프랑스식 삶의 일반적인 모습을 들여다본다. 프랑스식 간식이나 식사, 프랑스식 집 꾸미기(인테리어), 프랑스식 옷 스타일(패션), 프랑스식 장례, 프랑스식 여행, 그리고 프랑스식 교육까지. 프랑스인의 일상을 스케치하듯, 나름 정밀하게 들여다본 느낌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프랑스식 교육이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고등학교 교사다보니 교육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몇 번이나 교육 장면이 나올 때까지 고등학교 교사가 아닌 대학교 교수인 줄 알았는데, 굉장히 수준높은 내용과 함께 야외에서 자유로운 자세로 토론하는 모습, 무엇보다 학교 앞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들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대학생이나 되어야 가능할까 하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다른 모습들은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교육만큼은 크게 다른 듯하다. 그녀의 일상과 일생이 곧 프랑스인 중년 여성 일상과 일생의 표준이라고 할 때, 그리고 그녀의 일상과 일생에서 교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 영화는 그녀를 따라가며 프랑스를 들여다보는 것과 다름 없다. 


한편 <다가오는 것들>은 영화만이 가지는 다양한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먼발치에서 보며 가끔 그녀의 뒤를 따라갈 뿐이다. 중요한 순간에도 클로즈업 등을 통해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폭풍 OST로 감성을 끌어올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별 것 없으면 없는 대로 지켜볼 뿐이다. 영화가 그녀를 휘두르지 않는 것이다.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따라간다. 왠지 이 또한 프랑스식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배경이 프랑스가 아니어도, 배우가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프랑스 말을 쓰지 않아도, '프랑스 영화'라는 건 알았을 듯하다. 


그저 보여줄 뿐


이 영화는 참 영화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같지도 않다. 뭐랄까. 그냥 삶? ⓒ찬란



힐링 영화도 아니고, 교훈 영화도 아니고, 할리우드식 감성팔이 영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잔잔하게 마음을 훑는 영화도 아니고, 감정이 이입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게 마음을 움직인다. 여운을 남긴다. 진하지 않다. 잔잔하다는 느낌도 아니다. 대신 오래 갈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순간 순간 생각날 것 같은. 


영화는 결론이 나지 않고 다시 시작되는 끝맺음을 하는데, 그게 또한 인생 그 자체 아닌가. 인생에서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한 결론이 어디 있겠는가. 끊임없는 시작만 있을 뿐.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다가갈지도, 누군가에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루하게 다가갈 이에게 더욱 필요한 영화같다. 그들에겐 힐링도 되고 교훈도 주고 잔잔하게 마음도 훑고 감정도 이입될 것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들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탈리이지만, 과감하게 탈피해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가려는 모습도 보인다. 다가오는 것들을 멀리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패는 계속된다. 멀리하고 싶은 것들을 멀리하지 못할 때의 기분이란. 


그런 것들이 미래를 보고 앞으로 가려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법이다. 다가오는 것들을 선별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다가왔던 것들이 계속 괴롭히면? 멀리했던 것들이, 떠났던 것들이, 다가와서 내 품에 안았던 것들이 괴롭히면? 그러나 그 또한 인생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인생을 이루는 정수인 것이다. 다가오는 것들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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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표지 ⓒ달


벌써 5주기다.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신지 벌써 5년이다. 세월이 쏜살 같음을 새삼 느낀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다작 작가기도 하거니와 영원한 현역 작가일 것 같은 그의 소설을 더 이상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박완서라는 이름은 친숙하고 정겹기까지 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친숙하다. 그의 사후 그의 작품, 그에 관한 작품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세월이 쏜살 같다고 느꼈던 이면에는, 그가 우리 곁은 떠난 걸 인지하기 힘들 정도로 그의 작품과 그에 관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 있다. 독자에게 그는 여전히 현역 작가이다. 


소설가의 소설(글)은, 소설가의 사상을 대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말은 무엇을 대변할까? 아마도 소설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글)이 외부를 향한다면 말은 내부를 향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박완서 작가는 그동안 수많은 소설을 써왔다.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봐왔다. 종종 그의 말을 들어왔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고 소설로 말을 대신해 왔다고 생각했다.  


박완서, 그는 살아 생전 어떤 말을 했을까


이제 떠나고 없는 그의 말이 듣고 싶던 찰나, 소설가 박완서의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문학동네)이 나왔다. 살아 생전 그는 어떤 말을 했을까. 그의 소설과 일맥상통할까. 아니면 소설에서와는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말과 그의 소설은 일맥상통한 면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1980년부터 2010년까지, 데뷔 10년부터 영면에 들기 바로 전 해까지의 생각 또한 일맥상통했다. 


박완서 작가는 1970년 사십이라는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다고 한다. 지각생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늦게 데뷔했는데, 이후 왕성한 활동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확고한 작가적 위치를 굳히며 대표 작가로 주목 받았다. 이 책에 실린 9개의 대담에서 그의 데뷔작 <나목>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늦은 나이에 그것도 주부가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이 문단에 상당한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그가 사십에 데뷔하기 전까지 주부로서의 삶을 산 것이 다 문학수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체험과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 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말이다. 


박완서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6·25다. 특히 대부분의 6·25 관련 작품들이 남성들의 체험을 남성들의 시각으로 그리곤 했는데, 박완서는 여성들의 체험을 여성의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박완서는 남다른 그 경험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글로 씀으로써 기억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그는 하고 싶은 일, 글로 기억하는 일을 했고 그게 바로 6·25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그는 여성에 천착했다. 6·25와 여성, 일상 등 그가 천착한 키워드들을 들여다보면 별다를 게 없다. 솔직히 재미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의 글은 참으로 잘 읽히고 재밌다. 생각에 막힘이 없고 시원시원하게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 안을 제대로 집어내기 때문에 공감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대담 중에서 추리고 추린 이 핵심 대담집을 통해 박완서를 알 수 있고, 박완서의 소설을 알고 싶어졌다. 


박완서를 제대로 만나게 해주었다


솔직히 말해 박완서의 소설을 그리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다. 주요 작품들 몇 편만 접해봤을 뿐인데, 그건 아마도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들 때문일 것이다. 그가 너무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다는 것,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 여성에 천착한 소설을 썼다는 생각, 별 것 없는 일상을 잘 풀어내기만 했을 거라는 편견, 6·25에 너무 편중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등이다.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그것들이 크게 작용했다. 


이 대담집은 그런 점들을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간에서 말하길, 이러 저러 하더라. 이에 그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결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했고 이렇게 썼다고 말한다. '이웃들의 삶 속에 존재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었고, <미망>에서 좋은 의미의 자본주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참으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박완서를 다시 만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좋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를 기리고 헌정하는 그런 책. 하지만 나에겐 다르게 다가왔다. 박완서를 잘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은 박완서를 다시 생각하는 게 아닌, 박완서를 제대로 보고 만나고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책의 기획 단계에서 그것까지 인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이 책은 나에게 정녕 좋은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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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바닷마을 다이어리>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포스터 ⓒ(주)티캐스트


20세기 일본 최고의 걸작 만화 <바나나 피쉬>. 큰 스케일과, 하드보일드적인 측면, 탄탄한 구성과 스토리, 그리고 완벽한 캐릭터까지. 거장 요시다 아키미의 대표작이다. 필생의 대작은 한 편으로 족할 것을, 그는 21세기에 또 다른 걸작을 들고 왔다. 2006년부터 연재 중인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 작품은 2013 '만화대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77년에 데뷔해 올해로 40년이 된 요시다 아키미의 그칠 줄 모르는 질주다. 그 질주는 또 다른 거장에 의해 다른 영역으로 옮겨진다. 


또 다른 거장은 다름 아닌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감독이다. 1995년에 데뷔해 20년을 넘긴 그는 누구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감독으로, 세계가 인정하고 좋아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요시다 아키미의 팬을 자처하는 그는, <바닷마을 다이어리> 원작을 읽는 순간 꼭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상의 순간들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만화를 보면 영화가, 영화를 보면 만화가 보고 싶어질 것이다. 


네 자매 이야기


'네 자매 이야기'라고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세 자매로 시작된다. 한 지붕에 세 자매만 살고 있는데, 첫 등장부터 각자 확고한 캐릭터가 보인다. 첫째 사치는 믿음직하고 깐깐하지만 속이 깊고, 둘째 요시노는 사랑에 목 마른 차도녀 스타일이지만 천방지축인 면이 있으며, 셋째 치카는 마냥 좋고 걱정 없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한 장면 ⓒ(주)티캐스트



이들은 15년 전 자신들과 엄마를 버리고 집을 떠나 다른 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을 찾는다. 그곳에서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 스즈를 만난다. 그녀는 나이에 맞지 않게 믿음직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심에 차 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이복동생이었다. 왠지 모르게 스즈에게 마음이 쓰이는 세 자매. 서로 말은 안 해도 알고 있다. 더구나 스즈는 홀로 남아 계모(세 자매와 스즈의 아버지는 3번 결혼했던 것이다.), 이복동생과 같이 살아야 했던 것이다. 헤어지기 직전, 사치는 스즈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 


"스즈, 우리랑 같이 살래?"

"네."


이렇게 세 자매는 '네 자매'가 되고, 영화는 비로소 온전히 시작된다. 도쿄에서 50k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세계인 양 독특한 분위기의 바닷마을 카마쿠라에서 말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단연 네 자매가 있고, 그 중에서도 첫째 사치와 넷째 스즈가 주를 이룬다. 속 깊은 사치와 스즈이기에 할 이야기도 숨겨진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요시노와 치카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처럼 허전할 것이다. 그들은 네 자매가 함께 여야 한다. 


완벽하게 전달되는 '일상'


일상을 이야기하고 특별한 순간을 잡아내고 아름답게 풀어나가는 건 언뜻 봐서 쉬울 것 같다. 일단 '일상' 이라는 단어가 주는 당연함과 편안함이 작용할 테고, 그만큼 공감 시키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이야말로 제일 단순하고 알맹이가 없기 쉽다. 또한 보는 입장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래봤자 다 똑같은 이야기인데 뭐가 다르겠는가 하고 말이다. 


일상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주입 시키려 하면 안 된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달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런 일상도 있어. 그냥 한 번 봐봐.'하고 전달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상황이나 사건이 주를 이루는 것보다 사람이 주가 되어야 하고, 만약 상황이나 사건이 주를 이룬다고 하여도 사람이 거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휴머니티가 있는 일상을 전달해준다면,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한 장면 ⓒ(주)티캐스트



이 영화는 완벽에 가깝다. 네 자매의 일상을 그저 전달해줄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잔잔한 파문이 계속 인다.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그에 따라 어머니 또한 집을 나간 상황, 이복동생을 데려와 같이 살게 된 상황의 기본 배경이 사실 결코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아름다운 게 아름답다면 당연한 거지만, 그러지 못한 게 맞는 게 아름답다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지 않겠는가? 네 자매의 보이지 않는 아픔이, 보여주지 않는 아픔이 그들을 아름답게 만든다. 오히려 그리도 씩씩하고 밝게, 웃음과 유머가 끊이지 않을 수 있다니. 영화는 이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위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이 한 몫 했음은 당연하다. 중세의 군사·정치 도시로 맹위를 떨치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정점을 찍은 가마쿠라는,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한촌으로 전락한 역사가 있다. 이후 다시 관광 도시로 활기를 되찾았고, 지금은 도쿄와 매우 가깝지만 전혀 다른 세계로 유명하다. 단순히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하기 뭣한 것이, 정녕 신비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고층빌딩도 없고 네온사인도 없다. 동, 북, 서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만 만을 향해 트여 있다. 산과 바다의 완벽한 구도를 자랑한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한 장면 ⓒ(주)티캐스트



이곳에서 촬영을 결심한 감독의 탁월한 심미안은, 이 영화에 완벽히 들어맞았고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이곳에서 촬영을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반은 성공한 것이리라. 더불어 극 중에서 '낡고 오래된 집'으로 통칭 되는 네 자매의 집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식물들과 같이 살아가는 전통 가옥. 그런 곳에 꼭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네 자매 이야기다. 나머지는 그들을 위한 것일 테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모든 인물들과 소품들을 챙긴다. 그리고 네 자매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환한 미소로 모든 걸 받아준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영화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데 꽤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장례식, 제사, 묘지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오고, 집에서 계속해서 죽은 사람을 위한 공양을 한다. 어떤 종교임을 떠나서, 그런 모습이 좋은 의미로 비춰졌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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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정은문고



참으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항상 뛰어다닌다. 걸어다니는 건 열정이 없는 것이고 무능한 것이며 '반역'에 가까운 것이다. 이 시대에서 변화 그리고 빠름이란 진리이자 지상 최대 목표가 되었다. "따라올테면 따라와봐"라며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런 와중에 '느림'을 말하고 '옛 것'을 입에 올리면 지리멸렬한 보수주의자 딱지를 맞기 십상이다.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건 당연지사이다. 지식인이라면 응당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옛 것이나 전통을 말하고 있나니 한심해 보일 만하다.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정은문고)에서 보여지는 저자 나가이 가후의 모습이 딱 그렇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그는 20세기 초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하는 도쿄를 '어슬렁어슬렁' 산책한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게다(나막신 같이 생겼다)를 신고, 지팡이 대용인지 모를 박쥐우산(우산을 펼치면 박쥐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을 든 채. 


당대 최고의 탐미주의 문학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조우하다


나가이 가후는 당대 최고의 탐미주의 문학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더 유명한 건 화류계 여인을 사랑했다는 이력이다. 예술가의 기질이 다분해서 인지, 미를 탐하는 탐미주의자로서의 모습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단지 그런 모습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 아쉬운 측면이 있다. 책 한 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책이 지어진 공간적 배경은 주지 했다시피 일본 도쿄이고, 시간적 배경은 1915년 전후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동아시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 수많은 나라들의 역사에서 온갖 치욕으로 깊이 아로새겨질 시기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다시피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유례 없는 번영과 평화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1915년을 전후한 도쿄는 철도가 개통되어 넓어졌고, 컬러 영화가 개봉하고 대형 백화점이 개장해 풍요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 기차역까지 들어섰다. 그야말로 추후 100년 동안 도쿄를 지탱할 것들이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 변혁의 시기 한복판에 탐미주의 문학가의 최고봉 나가이 가후가 살았다. 그에게 빠르게 변화하는 도쿄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변화하는 도쿄를 비판적으로, 그럼에도 소소한 것들에는 사랑을


먼저 말해두고 싶은 건 100년 전의 위와 같은 변화가 지금의 변화보다 그 폭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지금의 변화, 그 빠르기와 폭이 인류 역사 전체의 변화의 그것보다 더 하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 변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상태이다. 반면 19~20세기의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가이 가후도 그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저자는 변화하는 도쿄를 그리 좋게 바라보고 있지 않다. 아니, 비판적으로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공장이니 다리니 건물이니 철도니 하는 현대적인 것들. 100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에서도 여전히 많은 것들을 지워버리며 현대적인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전선을 잇는 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길가의 나무를 베고, 사랑받아온 풍광이든 유서 깊은 나무든 전혀 개의치 않고 붉은 벽돌집을 높다랗게 지어버리는 오늘날 작태는 실로 자국의 특색과 예부터 계승해온 문명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난폭한 행위다." (본문 속에서)


그러며 한편으로는 일상의 소소한 측면들을, '훅'하고 지나가 버릴 작고 볼 품 없는 것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당이니 나무니 절이니 골목이니 석양이니 하는 옛 것들. 불과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것들인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어 유적 같이 되어 버렸다. 


"순수하면서도 미천하기 그지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습관은, 남사당패의 익살스런 탈춤이나 수수께끼 혹은 에마 속 서투른 그림처럼 한없이 내 마음을 위로한다." (본문 속에서)

부디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길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는 데에 현대 문명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기여했다. 그러하기에 현대 문명을 비난하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내가 선 이곳의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누워서 침 뱉기 격이 아닌가. 


하지만 어릴 적 소중했던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내 부모님 세대를 형성했던 것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부정하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려는 것 또한 나를 부정하는 처사가 아닌지? 그렇다면 어느 것 하나 홀대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닌지?


다른 무엇보다 슬프고 공허할 것 같다. 새로움이 뿜어내는 활기와 열정, 그것에 대한 설렘도 크게 다가오지만,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못 견딜 때가 있다. 너무 그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다. 저자의 생각과 시선은 그런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며 대변해준다. 부디 따뜻한 감성과 날카로운 이성이, 옛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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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도서관 옆 철학카페>


<도서관 옆 철학카페> ⓒ어크로스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이 들어간 책이 쏟아져 나왔다. 2008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경제·경영 서적이 붐을 이루었고, 이후에 자기계발 시대가 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위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힐링이 찾아 왔다. 동시에 인문학도 붐을 이루었다. 


처음의 인문학에는 힐링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른바 인문학을 통한 힐링. 그러다가 자기계발적 요소가 다분히 투여되기 시작했다. 인문학을 통한 자기계발. 그야말로 여기저기에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여기에 최대 수혜자들은 인문학자가 아니라 실용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철학을 쉽게 풀어 전달하다


철학도 인문학의 일종인지라 엄청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철학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던 바, 학문 본연의 길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런 가운데 '철학카페'라는 제목을 단 책이 대박을 쳤다.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라는 책이다. 문학과 철학의 콜라보를 통해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기획이었다. 이 책은 아직 인문학 열풍이 불기 훨씬 전에 나와 독보적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 와중에 안광복 교사는 철학을 쉽게 풀어 전달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철학을 통해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물이 <도서관 옆 철학카페>(어크로스)라는 야들한 제목의 책이다. 에세이 풍의 제목에 걸맞게 소소한 주제와 소재 그리고 문체를 선보인다. 하지만 소소한 현실 문제라는 것이 당면한 이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아프고 괴로운 만큼, 뜯어보면 마냥 야들하지 만은 않다. 


책은 총 35권의 책을 통해 35개의 현실 문제를 다룬다. 서평 모음집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하고 정통 철학서라고 할 수는 없다. 교양 철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보기 좋고 읽기 좋게 포장된, 흔하디 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을 만한 책이다. 부제에 '삶을 바꾸는 철학의 지혜'라는 문장이 있는 만큼 자기계발적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겠다. 


거북한 주장과 기억에 남는 부분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굉장히 빠르게 잘 읽히는데, 그건 아마도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 만큼 쉽다. 그렇지만 가끔씩 묵직한 사회적 쟁점을 다루기도 해서 마냥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한편 전체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당수의 챕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면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리고 거북한 주장이라고 느끼는 부분들도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본다. 


저자는 유난히 '고통'을 옹호하며 고통을 통해야만 성장할 수 있고 심지어는 고통이 빨리 끝나기 만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면한 현실 문제 앞에서 '위대한 문제의식'을 꺼내는 이유도 모르겠다. 그러며 탄탄한 직장과 안정된 시스템이 되레 독이 되기도 하고, 비정규직인 걸 한탄하기 전에 자신이 하는 일이 '소명'인가 '생업'인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소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생업'을 하고 있는 바를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게 단언하는 건 문제가 있는 발언으로 보인다. 


화를 내지 말고 한 발 물러서 무조건적인 용서를 하라는 저자. 그러면 어느덧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말한다. 이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지 않은가. 용서를 할 때도 그 범위가 허용 하에 있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만약 세상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짓을 나에게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저자에게 묻고 싶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지. 경험을 해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물론 기억에 남는 부분들도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몇 부분 만으로 이 책은 할 일을 다했다고 본다. 그 부분들은 이렇다. 


저자는 자크 아탈리의 말을 빌려 '세상엔 잉여인간 이란 없다'라고 단언한다. 노동의 의미를 달리 봐서, 상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일자리를 잃고 재교육을 받는 것도 노동이다. 진료를 받았기에 의사는 일자리를 유지하게 되고, 교육을 받았기에 교사들은 수당을 받게 된다. 세상이 굴러가는 데 일정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고, 이는 곧 '노동'이다. 


'존중'과 '배려'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하게 필요한 것이어서 말하기가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할 때가 있다. 성실하고 우직한 사람이 승리를 거머쥐어야 마땅하지만 이것이 곧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승리는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꼼수와 편법에 능할지라도 능력이 월등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럴 때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고 우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평소에 충분히 존중해줘야 한다. 노력과 능력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해답은 없지만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저자는 '삶을 바꾸는 것은 감미로운 토닥임이 아니라 쓰디쓴 해답이다'라는 명제를 두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현실 문제를 그리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위로가 아닌 해답을 같이 고민해보고자 했다. 물론 그 해답은 현실보다 더 암울하곤 하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욱'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자가 일부러 세게 지른 것 같다. 문제는 그게 너무 들쑥날쑥해서 전체적인 톤(제목과는 물론)과 맞지 않는 듯하다는 것과, 거기에 '경험'과 피부에 와 닿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를 늘어놓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저자가 꼭 그렇게 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건 챕터의 결말 부분의 미진함과 서로 이어진다. 쓰디쓴 해답을 원했지만, 몇몇 챕터를 통해서는 미지근한 고민조차 얻지 못했다. 기획 방향의 미진함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분명 섬세하면서도 따끔했던 것 같은데, 이 둘이 서로를 품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철학을 풀어낸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 문제를 두고 하나의 책에서 뭔가를 끄집어 내 이토록 짧고 굵게 풀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덕분에 머리를 싸매지 않고 현실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기회를 얻었다. 철학이 고상한 책상머리 학문이 아닌 '현실의 문제와 싸워 이기게 하는 무기'여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 앞으로도 꾸준히 '일상에서 철학하기'를 통해 소통해주길 바란다. 


도서관 옆 철학카페 - 8점
안광복 지음/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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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닭털 같은 나날>


<닭털 같은 나날> ⓒ밀리언하우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곤 한다. 매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면서, 절대 부모님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설마 그렇게 살게 될까 하며 지나가 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 재미없고 단순하며 천편일률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나을 거 없는 다를 거 없는 삶이란 말이다. 


반면 부모님 세대의 다음 세대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대학을 나왔고 지식의 함량이 출중하다. 생각하는 것도 웅대하진 않아도 소시민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부모님 세대와는 다른 삶을 그리고 더 나은 삶을 당연하게 기대한다. 이는 부모님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자녀 세대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고 자부하는 당신들이다. 


그런데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대학을 나와도 지식 함량이 커져도 경쟁력이 월등해져도 살아가는 건 여전히 지리멸렬하다. 굳이 부모님 세대와 비교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보이는 나날들이 같고 생각이 같고 인생이 같다. 중국 작가 류전윈의 <닭털 같은 나날>은 베이징에 사는 한 부부의 일상을 통해 이런 현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대학을 나왔고, 성취욕 또한 강했다. 열심히 학업에 매진했고, 웅대한 이상도 품고 있었다. 관공서의 처장이나 국장, 사회의 크고 작은 기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몇 년 후,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문 중에서)


남편 린은 새벽부터 국영 상점에 줄을 서서 두부를 사곤 한다. 언제 한 번은 밤에 계량기가 돌지 않을 정도로 살짝 수도꼭지를 열어 양동이에 몰래 물을 받은 적도 있다. 또한 몇 년 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집에 살다가 빈민촌으로, 임시 가옥으로, 옮겼다가 결국 지금의 방 하나 있는 집을 얻었다. 그렇다. 그는 가난한 소시민 가정의 가장이다. 


아내 리는 출퇴근 시간만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일 자체는 편하기 그지 없지만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 남편 린은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해 수를 쓴다. 회사의 부국장에게 부탁해 그의 동창생이 인사 책임자로 있는 회사에 아내를 소개 시키려고 계획이다. 그런데 린은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부탁하러 가면서 '코카콜라' 한 박스라는 웃지 못할 선물을 들고 가기도 한다. 


소설은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고 계속 되며 빠르게 전개 된다. 우리네 일상이 지리멸렬함 속에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 사고들의 연속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순간 순간 다가오는 소소한 문제들을 생각하고 처리하다 보면,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는 이상(理想)만이 판치는 비현실적인 세계일 뿐이다. 현재는 오직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가기 위해 뭐든 해야 하지 않는가?


모든 것에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참을 수 없는 것은 '두부가 상하는 것' 같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다. 과거에는 처자식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농민의식이라고 비판했지만, 사실 처자식을 돌보지 않으면 누구를 돌보겠는가? 그리고 처자식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누가 날마다 따뜻한 잠자리를 보장할 수 있겠는가? 아내와 아이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과거에는 웅대한 이상을 품어도 양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치하고 성숙하지 않아, 사물의 발전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기 위해 먹기만 하겠는가. 먹기 위해 사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쇼핑도 하고 소풍도 즐기며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매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과정은 어떻든 간에 결과가 좋으면 되는 거라는 생각만 하며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이런 생각은 현실의 장벽 앞에 슬며시 사라지고 만다. 


어느 날 린의 집에 손님이 찾아온다. 그는 린의 은사로서 린에게 매우 잘 대해주던 분이셨다. 그런데 린에게는 선생님을 모실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은 물이나 얻어 마시고, 오히려 참기름 두 통을 린에게 선물로 준 뒤 나가야 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가정부가 하나 있었는데, 돈을 아끼는 방편으로 쫓아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리의 출퇴근 문제가 해결되었다. 회사에서 통근 버스를 리의 집 근처까지 배정해준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리에 있지 않았고 사장 처제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모욕을 받은 느낌까지 들었다. 결국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다는 자기 합리화로 어물쩡 넘어가고 만다. 


이어서 비슷한 느낌의 일이 터진다. 딸 아이가 A 회사에서 운영하는 좋은 유아원에 가길 원하는데, 그곳은 가기가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회적 급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포기하고 있던 찰나, 앞집에서 손을 써주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앞집 아이가 잘 울어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린과 리의 아이를 짝지어서 들여보낸 것이었다. 결국 이 또한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다는 자기 합리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생각으로 넘어가고 만다. 


"사실 세상일이란 게 참 간단한 거야. 하나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에 따르면, 삶이 흐르는 물처럼 순탄하거든.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면 아주 편해. 세상이 편해지면 지구도 그에 따라 추웠다 더웠다 하는 거라고." (본문 중에서)


살아가기 위해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존심을 버리고 꿈도 꾸지 않는 이들을 비웃을 사람을 없다. 그들을 나무라거나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한테도 있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그럴 권리도 있고 나아가 의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꺼려지는 이유는, 생존과 이상(꿈) 사이에서 고민하게 될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생존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나 하나는 괜찮지만 최소한 나의 가족에게는 따뜻한 밥 한 끼와 따뜻한 잠자리를 주어야 하기에. 소설 제목처럼 닭을 잡은 뒤에 피와 털이 난무하는 비참한 현실이나 허섭쓰레기 같은 일상이 내 삶을 온전히 지배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이상을 선택한 사람들은 정녕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들은 현실의 토대 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범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현실에 두 발을 붙이고 이상까지 떠 받들며 살아가는 이들은? 이들이야말로 위대한 이들이 아닐까?


퇴근길 버스 안에서 집에 쌓아둔 배추더미를 널어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하루 종일 그를 상심하게 했던 선생님의 일은 기억 저편으로 묻히고 말았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었으니, 더 생각해봐야 소용이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역시 배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배추를 다 정리하면 아내가 전자레인지로 닭을 구워줄 것이고 맥주를 내줄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아무 불만이 없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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