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임으로 난 그녀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트고, 말도 트고, 술도 트고. 당연히 친해진 게 아닌가?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녀의 방으로 직행했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우린 같은 8층에 있었다. 그 대학 기숙사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남녀 공용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게 아니라, 같은 건물을 썼다.) 그런데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지체없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주 친근하게.
"어디 있니? 너네 방에 왔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돌아온 문자는 뜻밖이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예? 아, 저 시내 서점에 왔는데요. 그런데... 왜 오셨어요?"
왜 오셨다니? 이 무슨... 우리 어제 친해지지 않았나? 이 반응을 보니, 나만의 착각이었나 싶기도 했다.
"어,,, 그게,,, 그냥 심심해서~ 주말이기도 하니까 같이 놀자고~"
"예? 제가 왜 오빠랑 놀아야,,, 아, 이따가 오후에 돌아갈 거니까 그때 뵈요~"
"그래^^ 재밌고 놀다가 와~ 이따가 보자!"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보기로 했으니까 일단 안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문자가 올 때까지 전전긍긍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돌아다녔다. 평소 같으면 후배들이랑 탁구도 치고 게임도 하고 군것질 먹으면서 얘기도 할 텐데, 그날만은 모든 제의를 뿌리치고 혼자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며 자신감이 수직 하강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시내 가서 사온 차 한 잔 대접할 테니 오라고 말이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녹차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 여유로워 보였다. 중국어도 그렇게 잘 하지는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벌써 혼자 시내에 다녀오다니. 나와는 달리 그녀는 모든 면에서 자신감에 가득 차 보였다.
그녀가 타준 녹차. 그건 일찍이 내가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너무 썼다. 녹차가 이렇게 쓸 수 있나. 중국 녹차는 원래 이렇게 쓴가? 너무 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녹차 따위가 쓰다고 마시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색 하지 않고 잘 마셨다.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한마디는 꽤 강력했다. 그 엉뚱함이란... 이 아이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의외였고, 그녀가 더욱 좋아졌다.
"헉, 그걸 다 마셨어요? 저는 너무 써서 거의 못 마셨는데요~"
나를 시험한 건가? 아니면 보기와는 다르게 허당이었나? 그건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거였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차를 마신 시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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