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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금기를 깨고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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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명품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프랑스 명품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엣나인필름



우리나라의 언어 활동 중에서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용이다. 예를 들어, '너와 나는 달라'가 아니라 '너와 나는 틀려'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온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뜻이 비슷해서 일까, 발음이 비슷해서 일까. 아니면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게 된 우리나라 특유의 민족성 때문일까. 혹시 모든 면에서 양극화되어 가는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상징일까.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나라만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프랑스 동화(애니메이션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 속 세계는 완벽히 둘로 나뉘어져 있다. 지상의 '곰' 나라와 지하의 '쥐' 나라. 이 두 나라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기며 교류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다르게 생기고 다른 문화를 지니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환영 받지 못하는 이들의 조우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꼬마 쥐 셀레스틴은 금기시되는 생각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엣나인필름



꼬마 쥐 셀레스틴은 이런 '다름'의 성질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다. 그녀는 "쥐는 왜 곰하고 친구가 되면 안 되는 거지?"라는, 쥐 나라에서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며 주위에서 치과의사가 되라고 촉구하는 것도 무시한 채, '곰' 그림을 그린다. 주입식 교육으로 제도화 된 세계에서 혼자만 튀면 어떻게 되는지 그녀의 모습이 잘 보여준다. 그녀는 매일 같이 '틀린 생각'은 그만하라고 꾸지람을 듣고 왕따를 당하기까지 한다. 


한편, 곰 나라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이가 있다. 거리 음악가 '어네스트'. 그는 가난하게 살면서 돈이 궁할 때면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며 구걸한다. 그러다가 경찰에 의해 악기들을 압수 당하기 일쑤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고, 급기야 남의 것을 훔치기까지 한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과연 그만의 잘못일까?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곰 어네스트는 가난한 거리 음악가로,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엣나인필름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가까워진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은 엄연히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세계에서는 서로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정확히는 셀레스틴이 개의치 않았고, 어네스트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셀레스틴의 진심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간의 진심 어린 소통은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속한 전체로 퍼지기에 이른다. 


이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법


이는 영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방면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모더니즘 세계에서는 문화와 문화 사이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서로 간에 폐쇄성이 깊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간에 확실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난다. 엄격한 구분을 파기하고 서로 간의 벽을 넘나들며 혼합하고 차용하고 합병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 속 세계가 작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도 시청이 가능하다. 점점 계층화, 양극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의 기멸찬 현상에 대한 반발로 말이다. 그 반발이 셀레스틴의 사례를 통해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순수하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고, 어네스트의 사례를 통해 사회가 미쳐 발견하지 못했거나 무심코 지나치거나 짓밟아버린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동화적 상상력과 한 없이 여리고 귀여운 그림체로 말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 감정이 이입 되고 있는 것이다. 기막힌 연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곰 어네스트와 쥐 셀레스틴은 세계공통적 금기를 깨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엣나인필름



여하튼 그들은 세계공통적 금기를 깨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일종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 사회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건, 단순히 정치 세력이 바뀜에 따라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의 통념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이 발현되어야 할까. 영화 속에서처럼, 어떤 이가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영화가 행하는 것처럼,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저에 감춘 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어떻게든 실행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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