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안개 속 소녀>


영화 <안개 속 소녀> 포스터. ⓒ미디어 마그나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은 사고를 일으킨 채 하얀 셔츠에 피를 묻히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은 정신 감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 플로렌스(장 르노 분)을 부른다. 보겔은 플로렌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의 전말을 들려준다. 


외딴 산골 마을, 성탄절을 이틀 앞둔 새벽 한 소녀가 사라진다. 박수만 몇 번 쳐도 주민들이 나와서 쳐다볼 정도로 조용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정도로 밀접한 동네이기에 그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도시에서 수사를 하러온 형사 보겔은 이 사건이 그냥 묻혀버릴 게 뻔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소녀의 부모와 동네 경찰을 설득해 '쇼'를 시작한다. 그는 언론이 벌 떼 같이 몰려오게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데, 얼마전 테러 사건에서 잘못 이용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만큼 신중하지만 간절하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 소녀를 향한 관심은 보겔의 쇼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하찮은 의심만으로 악마이자 괴물로 전국민에게 찍히게 되는 용의자 교수 마티니(아레시오 보니 분)를 향한 관심으로 어느덧 바뀐다. 


기대 반 걱정 반, 고품격 스릴러 


기대 반 걱정 반,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영화 <안개 속 소녀>는 범죄학과 행동과학 전문가 출신으로 스릴러 소설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했다가 소설로 내놓았고 다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각본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연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부응하는 면이 반이고 걱정을 떨치지 못한 면이 반이었다. 영화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적자임을 천명하다시피 한 원작 작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도나토 카리시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는 에코가 다양한 언어와 학문으로 평생을 천착했던 질문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를 그만의 범류인 범죄학과 심리학적으로 치열하게 접근한다. 


한편 영화는 고품격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며 안개 낀 산골 마을이라는 음울한 분위기와 잡으려는 자, 잡히지 않으려는 자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내보이려 한다. 더불어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복선과 그에 따른 반전 또한 내보이려 한다. 혹자는 문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지만, 종종 과해서 지루하고 비(非)영화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재밌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안개 속 소녀>를 그나마 '재미있게' 보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 내적이 아닌 영화 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굉장히 훌륭한 사례로, 수단으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보겔이 자신의 영위를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는 언론, 언론은 핫한 시청률을 위해 대중영합적인 소재를 부풀려 내보인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일 테지만,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용의자 또는 범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의자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며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작은' 사건에 머물고 말 것이다. 


모두(경찰, 언론,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큰' 사건이 되어야 하기에, 용의자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용의자의 '악마화' 또는 '괴물화'가 시작된다. 감정을 자극하는 피해자의 사례를 내보이는 이유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결국 피해자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안개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는커녕 객체가 되지도 못한 채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 사이 모두의 시선은 경찰과 용의자 간의 싸움으로, 용의자의 신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 후,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채 끝난다. 이쯤 되면,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 경찰과 언론이 진짜 범인이자 가해자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많은 걸 담아낸 영화


많은 걸 담아내려 했지만, 그게 독이 되었을지 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위의 일례가 사건에서 관심이 쏠리지 않는 주요 주체의 치명적이고 슬픈 말로라면, 이제 말하고자 하는 건 사건에서 관심이 과도 하게 쏠리는 주요 주체의 논란적인 말로이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용의자를 향한 과도한 관심, 그로 인해 순식간에 괴물이자 악마가 되어버리는 모습 말이다. 


우린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종종 보아왔다. '알 권리'를 제1의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내세우면서 아무런 꺼리낌 없이 마녀사냥을 시전한다. 영화 <더 헌트>를 보면 더 없이 심도 깊게 또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다 얇고 넓게 비춘다. 


사라진 피해자,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용의자, 사건을 주도하면서 영합하고 대결하는 경찰과 언론, 그리고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안개 속 소녀>는 참으로 많은 걸 내보인다. 


보다 훨씬 디테일하고 유려할 소설에서 메시지와 캐릭터를 최대한 살려 영화에 내보이려 한 것 같은데, 할리우드 문법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영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너무 늘어진다는 느낌이 종종 한없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행간과 자간의 늘어짐이라는 보기 불편한 느낌과 일종의 '여백의 미'라고 볼 수 있을 여유로운 느낌의 경계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 번 보면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 보면 적어도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순 있다. 온전히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적어도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 소설까지 섭렵해야 하겠다. 더할 나위 없는 고품격 스릴러를 한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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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툴리>


영화 <툴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두 아이를 키우는 임산부다. 큰딸은 의젓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기에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고 챙겨주어야 한다. 둘째 아들은 조금 특별하다, 조금 다르다. 예민한 게 정도를 지나칠 때가 많다. 와중에 그녀는 이제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운명이다. 육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가 태어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돌입한다. 큰딸을 최소한으로 챙기고 둘째 아들에게는 여전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정녕 밤낮 없이 셋째 키우기가 계속된다. 와중에 남편은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고는 게임 삼매경이다. 끝이 없을 것 같고 변함도 없을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모든 게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마를로의 오빠는 자신들이 야간 보모의 손에 키워졌다며 마를로에게 야간 보모를 권유한다. 어떻게 되든 아이는 엄마 손에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해 완강히 거절하는 마를로, 하지만 나날이 지쳐가며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오빠의 권유를 받아 들인다.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 분)가 등장한다. 


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가 케어해줄 거라 말한다. 이 당돌함 또는 당당함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점점 믿음직하게 와닿는다. 마를로는 툴리에게 마음을 열고 아이를 맡기며 한껏 여유로운 나날을 만끽한다. 하지만 툴리의 정체는 가히 궁금하다. 그녀는 누구이길래 마를로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를로 본인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것인가? 


끔찍한 현실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끔찍한 현실을 그려내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툴리>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이자 끔찍할 수 있는 현실을 끔찍하리만치 여지없이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했던 그때 D-Day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찬사를 받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육아 전쟁' 편을 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툴리>의 그것이 더 끔찍했다. 


데뷔 후 쉬지 않고 열일 중인 샤를리즈 테론이 세 아이의 엄마 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22kg나 찌우는 투혼을 불살랐던 게 이슈가 되는 와중에, 이 영화의 제작도 한 그녀는 <몬스터>의 에일린,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잇는 대반전 변신 캐릭터로 분했다. 이 영화들에서 그녀가 공통적으로 변신 공력에 맞먹는 연기 공력을 선보였듯, <툴리>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에 얼굴을 비치며 '찌질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론 리빙스턴이 마를로의 남편 드류로 희한하게 중심을 잡는 와중에, 툴리 역의 맥켄지 데이비스는 특유의 저음과 표정으로 샤를리즈 테론과 훌륭한 짝을 이룬다. 


한편 감독 제이슨 라이트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젊은 나이이지만 10대 때 연출 데뷔를 한 만큼 다수의 연출작을 보유한 그는, 우리에게 <주노> <인 디 에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에 특화된 그는, 지극한 현실의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잘 캐치해내어 건드려 내보인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인지하게 되며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은데 <툴리>도 그러하다.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키는 엄마의 모습


엄마의 모습은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킨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남자, 남편으로서 아직 아이는 없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지만 이 영화에서 마를로로 보여지는 엄마의 실질적인 모습들을 보고 참담, 경악, 슬픔의 감정을 복잡다단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쟁 같은 아이들 돌봄의 광경은 참담함을 야기시켰고, 밖으로 드러내기 힘든 엄마의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으며, 반전을 통해 보여준 여자, 엄마, 아내의 복합적인 자장에서는 슬픔이 밀려왔다. 


내 한 몸 온전히 건사하기 힘든 게 세상사는 이치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와 차라리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는 아이와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 세 아이를 온전히 키워낸다는 건 한없이 불가능의 영역에 수렴된다. 매일같이 한시도 쉼없이 똑같은 전쟁을 치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 그 자체이다. 영화의 시작은 참담이다. 


영화는 점차 그 참담함을 들여다본다. 디테일들은 경악이다.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함의 일환일 테다. 그럴수록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경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줄 젓을 짜는 유축기 사용 장면은, 사용자 엄마의 태연하고 하릴 없는 모습과 대비해 충격을 준다. 제때 젖을 짜주지 않아 가슴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도 그렇다. 실로 많은 걸 배운다. 충격과 경악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슬픔을 수반한다. 


이 영화가 주는 슬픔은 말할 수 없는 반전과 함께 온다. 말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면 2/3 지점에서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올 때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바로 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가장 이해되고 가슴에 와닿게 된다. 그러며 세 아이의 엄마가 여자이자 아내라는 걸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치유와 위로의 긍정적 목적


영화는 치유와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의 참담-경악-슬픔의 감정라인은 당사자에겐 치유, 보는 이들에겐 위로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치이다. 당사자인 주인공 마를로, 마를로로 대변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누구한테고 보여주기 힘들다. 거기에 부정이나 긍정, 무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를로는, 샤를리즈 테론은 가감없이 대신해주었다. 그 자체로 치유다.


보는 이들이 이 영화에, 마를로의 모습에 마냥 감동 종류의 감정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그런 현실은 애써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맞대면 했을 때는 나서기 힘들기에 어떤 식으로든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다시피 했지만 '영화'로서의 함의를 잊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의 감정 영역에 들게 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영화가 대신해주는 치유의 역할에 묘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이기적인,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 


사실, 이 영화의 대상은 엄마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엄마에게 이 영화는 또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서 공감 어린 끄덕끄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혹은 끝나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보러 가야 한다. 


반면, 당장의 엄마가 아닌 모든 사람은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실상을 한순간, 한 장면의 디테일을 통해서라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엄마를 보는 시선이. 나아가 아내를 보는 시선이. 궁극적으로 여자를 보는 시선이. 더 이상 '여'전사(女戰士)는 없다. 전사(戰士)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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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리다의 그해 여름>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포스터. ⓒ디스테이션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의 생각과 시선과 행동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내가 아닌 아이들이 바라보고 대하는 무엇에는 관심이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아이는 특별하고 신기한 존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짓게 하기도 하지만 분노를 일으키게 하기도 하는.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들은 참으로 답답할 존재일 것이다.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일삼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동물 아닌 인간인 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이 가능하다. 어른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유추하고 내보인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일까. 


창작 콘텐츠에 한해, 글과 그림 하다못해 사진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인지의 맞고틀림은 차치하고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보여주어야 하는 영상은 가히 힘들다. 아이들을 콘트롤하기 힘든 만큼, 아이들을 통해서 아이들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어른의 시선 아닌 아이의 시선이 주가 되는 영화는 그 존재 자체로 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표현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해냈다. 2016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우리들>도 생각난다. 올해 개봉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 <홈> 등이 아이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발 하나를 걸쳤다. 


엄마 잃은 소녀, 프리다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불꽃놀이가 한창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밤, 여섯 살 난 여자 아이 프리다는 무심한듯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최근 엄마를 잃었다. 아직은 슬픔보다 공허함이 인 듯하다. 곧 엄마의 유언에 따라 시골의 외삼촌네로 간다. 다정하게 맞는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사촌동생 안나, 프리다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한 가족이 된, 셋이 아닌 넷. 셋과 낯설지 않지만 인숙하고 친밀하지도 않은 프리다는 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관심과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는 다정하게 대할 뿐 그 이상의 무엇을 주진 않는다. 또는 못한다. 반면 안나는 당연한듯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공허함 아닌 외로움이 프리다를 장악한다. 


프리다의 외로움은 어느새 외삼촌과 외숙모에서 아빠와 엄마로 불리게 된 그들을 직접적으로 향한다. 통하지 않자 본능적인 시기와 질투를 동반해 안나로 향한다.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방법들. 이 또한 통하지 않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의 시간을 지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엄마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영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아이가 행할 수 있는 감정표현은 많지 않다. 지극히 단편적이고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한 아이의 시선이 지극히 들어 있는, 그래서 짐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보면서도 상당 부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 순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짐작.


영화는 최선을 다한다. 아이의 시선을 따르며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유추하고 짐작하려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프리다의 얼굴만을 비춘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무표정하다. 그때마다 아주 미묘한 감정선이 흐른다. 그때마다 영화 밖으로 나와 프리다를 연기한 라이아 아르티가스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프리다가 바라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지고 그녀의 생각 갈래가 어디로 퍼져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핵심에 가닿아 있는 부분인데, 아이의 시선과 여러 감정들에의 짐작과 유추가 시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아이가 지켜보는 모습을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카메라는 프리다의 뒷모습을 흔들리며 쫓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표정을 알 수 없고 감정선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작디작은 뒷모습, 그 뒷모습을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되는 핸드헬드로 비출 때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프리다의 어린 나이와 작은 모습이 거대한 슬픔에 안으로부터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이 영화를 반드시 끝까지 지켜보고는 바로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프리다를, 아니 영화에 보여진 프리다의 감정선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아!' 하는 감탄사는 우리를 영화의 처음으로 이끌 것이다. 비로소 영화를, 프리다를, 아이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면에서 '출중'하고는 거리가 먼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서 '가장' 출중한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 중점을 두는 건 보는 이의 자유지만, 감독은 후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 면에는 절대적으로 '아이'가 있다. 프리다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아이가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 부분도 이 영화의 '출중'에 큰 몫을 차지한다. 


프리다와 대면하는 외삼촌과 외숙모, 프리다가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프리다가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거나 친밀하지 않다. 그들도, 즉 어른들도 시간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다. 영화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로보면서도 어른의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한정적인듯 참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부디 최대한 많은 것들을 찾아내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길. 아이, 어른, 아이와 아이, 아이와 어른, 어른과 어른까지, 그 치밀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관계들에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그 감정들의 앙상블이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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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완벽한 타인>


영화 <완벽한 타인>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성형외과 의사 석호(조진웅 분)와 정신과 의사 예진(김지수 분)은 속도위반으로 낳은 딸이 스무 살이 되면서 빚어진 남자친구 문제로 소소한 갈등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석호의 40년 지기 친구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성공적으로 치러야만 한다. 


왁자지껄, 화기애애, 7명이서 너나 없이 한 마디씩 한다. 와중에 석호는 우리들 사이에 비밀은 없다며 우정을 자랑하고, 예진은 믿을 수 없다며 게임을 제안한다. 지금부터 7명 모두 각자의 전화, 문자, SNS, 이메일을 여과없이 공개·공유하자는 것. 꺼림칙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부인 속옷도 간섭하는 보수의 화신 변호사 태수(유해진 분)와 세 아이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남편 태수까지 모시고 사는 와중에도 문학적 감수성을 유지하는 수현(염정아 분) 부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잘 나가는 사업가로 딱 봐도 바람둥이의 강한 캐릭터 준모(이서진 분)와 준모만 바라보며 준모를 한없이 믿는 세경(송하윤 분) 부부. 그리고 이혼 후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으려는 영배(윤경호 분)까지. 


40년 지기의 화기애애한 식탁이 불안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은 있다지만, 그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지만, 막상 내보이는 건 그것도 비밀이 없을 것 같은 비밀이 없어야 하는 친구들한테 내보이는 건 파국에의 전조나 다름 아니다. 이 집들이의 끝이 벌써부터 섬뜩하고 서늘하게 궁금하다.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비밀을 공개하고 공유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핸드폰, 왠지 비밀이 없어도 비밀이 생길 것 같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한정된 공간에서 최소한의 인원 사이에 최대한의 비밀이 퍼지는 연극톤의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를 단계를 밟아간다. 밝은 것도 밝은 거지만 이제는 한 가닥씩 하는 삶을 살게 된 그들 삶의 겉은 화려해 보인다. 특히 성형외과와 정신과 의사 부부인 석호와 예진 부부는 딸의 소소한 사정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집들이가 시작되며 몇몇만 알아차릴 수 있는 금이 가는 느낌이 다음 단계이다. 집들이 선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친구들 아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뼈 있는 한 마디들이 소소한 '빠직'들을 형성한다. 


핸드폰을 공개하면서 비록 한 단계를 넘어갈 뿐이지만 그 폭이 전에 없이 커진 느낌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말을 이런 걸 두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정작 크나큰 암초는 미지의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서사 단계와 메시지 단계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말한다. 40년 지기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도 '타인'이라고 말이다. 그것도 '완벽한' 타인. 사실 완벽한 비밀은 없다. 비밀은 반드시 누군가와 공유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나와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이와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완벽한 타인>는 서사 단계에 빚대어 메시지의 단계도 이어진다. 양파 껍질을 벗기든. 서사 단계보다 메시지의 단계가 이 영화를 향한 평과 흥행을 좌우하는 요소일 터, 얼마나 흥미를 끌고 얼마나 긴장 어리고 얼마나 기대에 미칠 것인가. 


처음에는 단연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 현대인의 지극히 '비밀스러운' 개인주의이다. 핸드폰 하나에 나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이 세태, 가면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핸드폰, 불안을 유지하고 불만을 직조하고 불쾌가 오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단계는 핸드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지극히 사적인 비밀의 줄기가 각지로 퍼져나간다. 여기서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그 줄기들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끌게 되면 불호가 될 요량이 크고, 객체가 되어 서사를 뒷받침하게 되면 호가 될 요량이 큰 것이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볼 때는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그 줄기들이 주체가 되어 서사를 이끌고 있구나 하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만 했을 뿐, 각자의 사정들이 주는 긴장감과 재미가 쏠쏠해서 자세하게 느끼고 분석할 새가 없었다. 혼자 봤으면 그럴 새가 있었겠지만, 영화관에서 많은 관객들과 함께 보니 분위기에 쏠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겠다. 


마지막 반전, 비록 티나게 특정 영화에서 대놓고 그대로 가져온 클리셰가 심히 걸리긴 하지만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덕분에 영화 중반 이후의 서사와 메시지의 따로 노는 자못 어설픈 느낌이 한순간 풀어졌다. 비단 탁월한 선택이 영화의 탁월함으로 이어지진 않았을지언정 최소한의 짜임새를 선사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막장의 아우라는 '역시'라는 생각을 비껴가지 못한다. 여기서 영화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할 수 있는데, 그 아우라가 거대하게 느껴지면 영화는 그저 그런 막장 코미디가 될 것이고 그 아우라가 그저 영화가 말하는 수많은 메시지 중의 하나이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느껴지면 영화는 웰메이드 블랙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면에서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 개인적으로 경계를 오가는 미묘함 자체가 긴장감과 재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선 이 영화이 맞이하는 여러 위기들이 의미가 없어진다. 막장이든 웰메이드이든, 사적인 비밀들의 줄기가 객체가 되든 주체가 되든. <완벽한 타인>을 본 대부분의 관객들은 거기에 천착하게 될 것이고, 고로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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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체실 비치에서>


영화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줄리언 반스와 더불어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현존 작가 이언 매큐언, 데뷔한 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초창기의 그는 특이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특이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전하길 즐겼다. 독보적인 방식으로 명성을 쌓은 그는 스타일을 바꾼다.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오기 시작한 것. 


그 절정에 이른 작품이 소설 제목으로는 <속죄>로, 영화 제목으로는 <어톤먼트>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가히 그 묘사와 문체와 구조와 반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시기적으로 절대 오래된 작품이 아니지만, 이미 영국의 고전 중 하나로 칭송받고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들은 1990년부터 10편이나 영화화되었다. 이번에 한국에도 소개되어 천천히 은은하게 사랑받고 있는 <체실 비치에서>는 그의 2007년 작으로 출간 10년 만에 영화화되었다. 가장 평범하고 무난한 이야기를 가져온 대표적 소설이기도 한대, <속죄>처럼 압도적이지 않는 와중에도 고전적 매력을 발산한다. 


서투른 처음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1962년 영국, 에드워드(빌리 하울 분)와 플로렌스(시얼샤 로넌 분)는 결혼 직후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함께 해변을 걷고 호텔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사소한 다툼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러고는 신혼여행지에서의 첫날을 보내려 침대로 향한다. 하지만 둘의 첫날은 순조롭지 않다. 


그들은 우연히 반핵 운동 모임에서 첫눈에 반한다. 영국 굴지의 명문 대학인 옥스퍼드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플로렌스, 그녀의 집안은 전기회사 사장 아버지에 철학교수 어머니의 중상류층이다. 반면, 비록 수석이지만 런던 칼리지에 '불과한' 에드워드는 초등학교 교장 아버지에 정신 이상자 미술가 어머니의 상대적으로 하류층이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연애 결혼에 골인한 에드워드와 플로렌스, 그들은 서투른 자신과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헤어져 그 길로 각자만의 삶으로 가버린다. 왜 가장 행복했던 신혼여행 첫날을 순조롭게 보내지 못한 것도 모자라 헤어지기까지 했어야 했을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오고 누구나 서투를 때가 있는 법 아닌가. 


인간의 나약함과 슬픈 운명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원작 소설의 첫문장이다. 1960년대 초 아직 전 세계를 휩쓸 총체적 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영국, 모든 면에서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그 분위기와 체제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보면 한없이 찌질하고 너무나 안타까워 한편으로 나무라지만 한편으로 비웃게 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메타포가 되기도 한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그 시대 영국의 가장 정직한 일원, 플로렌스가 보다 지극히 영국적이고 에드워드가 보다 덜 영국적이라 하더라도 '행위적 성(SEX)'에 있어서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경험이 없었을 그들, 아니 경험이 없어야만 했을 그들의 처음은 당연히 파국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또는 소설은 일면의 체제 비판을 문학적 아쉬움으로 승화시킨다. 보는 이들은 그 지점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헤어짐은 체제와 분위기에 순응한 결과라고 하지만, 한편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초세밀한 심리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엔 어쩔 수 없는 나약함과 그에 따른 슬픈 운명이 있다. 


'지금'에 끌리는 이유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우리의 신혼여행을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다. 극초반의 신혼 시절을 생각한다. 신혼 직후의 지금을 생각한다. 거기엔 수많은 처음들이 있고, 사실은 자신을 향한 것일 서로를 향한 끝없는 질타가 있으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사랑의 쉼표가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감정들이 있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한 결과에 따른 비판이나 수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문학적 승화보다, 이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더욱 끌리는 건 '지금'이라는 단어다. 영화는 끝없이 옛날을 보여준다. 신혼여행에선 연애 시절을 보여주고, 사실 신혼여행 자체도 옛날 옛적 이야기다. 그 모든 게 결국 회한이 아닌가. 


항상 지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행복했어도 나중의 언젠가 불행할 때 그에 반추해 지금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행복도 불행의 연장선상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문학적 아쉬움도 그 순간의 서투르고 섣부른 선택이 부른 불행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평생을 좌우할 선택.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때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누군가의 마음이라도 절대적으로 슬프고 그래서 문학적으로 훌륭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회한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감탄만 하고 깨닫지 않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지 않으려 문학과 영화를 접한다. 그래도 쉽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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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양의 나무>


영화 <양의 나무> 포스터. ⓒ영화사 오원



내세울 건 사람들도 좋고 생선도 맛있는 것뿐인 평화롭고 작은 어촌 마을 우오부카, 6명의 낯선 이들이 신규로 전입온다. 시청 직원 츠키스에(니시키도 료 분)는 상사의 지시로 거주지도, 근무지도 정해져 있는 그들의 정착을 돕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정체를 의심을 품게 된 그는 상사에게서 여러모로 충격적인 사실을 듣는다. 


지자체가 고용과 주거를 보장하면 신원보증인 없이 수감자들을 가석방시킬 수 있게 정책이 바뀌면서, 인구 과소의 어촌 마을 우오부카가 이를 받아들였고 그들은 최소 10년간 우오부카 소속의 시민이 되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갖가지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이었다는 사실...


어느 날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 새로 전입 온 6명이 살인범이었다는 걸 유이하게 아는 츠키스에는 그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대놓고 야쿠자인 스기야마를 제외하곤 5명 모두 지금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을 죽였던 이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흥미로운 설정, 기대되는 변주


영화 <양의 나무>의 한 장면. ⓒ영화사 오원



좋은 원작을 가지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 왔던 일본의 믿을 만한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2006년에 장편을 데뷔한 그의 작품들은 2010년 4번째부터 국내에도 꾸준히 소개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은 <종이 달>, 199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를 훌륭하게 변주해내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드라마를 기본으로 그 위에 다양한 장르를 덧씌우고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설정과 자유자재 변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시킨 그의 신작 <양의 나무>가 국내에 상륙했다. 이 영화 역시 기본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어떤 변주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6명의 평범한(?) 살인범 수감자가 가석방되어 들어오는데 얼마 안 가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설정,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들을 향한 다양한 형태의 시선들, 마을 전설과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변주. 


현대사회적 문제들, 그리고 인간 심리의 근간


영화 <양의 나무>의 한 장면. ⓒ영화사 오원



영화는 일본의 현대사회적 문제들인 가석방, 지방의 인구 과소, 고령화 등을 터치하며 기본 설정을 정하는 동시에 이목을 끌고, 그 반석 위에서 인간 심리의 근간을 과감히 터치하며 궁극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그들을, 살인범들을 믿을 수 있겠냐고. 용서를 하고 안 하고가 아닌, 믿을 것인지 믿지 못할 것인지의 질문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살인범을 용인하고 용서하는 것과 용인하지 못하고 용서할 수 없는 건 상대적으로 가능하기 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절대적으로 어렵다.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한 후에도, '믿음'을 주는 건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범이 아닌 평범한 사람과도 믿음을 주고 받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는 누구나가 아주 절실히 잘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살인범'이라는 낙인은, 그가 살인과는 전혀 상관 없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실수를 했을 때도 '역시 살인범이야. 살인범인 이유가 다 있지. 괜히 살인을 했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믿음'과는 하등 멀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악독한 범죄인 살인을 저지른 살인범을 향해, 인간이 가장 컨트롤하기 힘든 믿음과 불신이라는 절대적 반대의 입장이면서도 한끗 차이로 경계에서 오가는 두 개념 중 하나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인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라면 어떻게 할 수밖에 없을까.


헐거운 용두사미


영화 <양의 나무>의 한 장면. ⓒ영화사 오원



츠키스에가 우리를, 평범한 인간을 대변한다. 그는 분명 선해 보이는 사람이다. 더불어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마을 사람, 아버지까지 최대한의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지만 그 자신이 관련된 건 객관적이기 힘든 것 같다. 그와 별개로 일어날 사건은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란 절대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하길 바라서도 안 된다는 걸 시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츠키스에를 중심으로, 6인끼리의 대면이나 얽힘이 아닌 츠키스에와의 대면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영화가 질문을 던지는 대상이 츠키스에를 내세운 평범한 인간들, 즉 영화 밖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영화 자체도 그 때문인지 뒤로 갈수록 실망의 길로 가는 것 같다. 


우리가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알고 싶었던 건 우리가 아닌 살인범들이었을 테다.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보이 A>가 훌륭하게 보여준 감성 말이다. 거기에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더해져 얽히고 설킨 와중에 아픈 감성들의 부딪힘이 극에 다다르면 더할 나위 없는 서스펜스 스릴러 드라마가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두고 '용두사미'라는 사자성어와 '헐겁다'라는 형용사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무리 평범한 스릴러의 틀에서 벗어나 스릴러 앞에 '심리'를 붙이며 새로운 스타일 변주를 시도했다고 하나, '빵' 터져야 할 후반이 오히려 전반보다 헐거운 아쉬움이 너무 컸다. 그래도, 전반이 적어도 설정에서는 용에 비견될 정도로 괜찮은 건 그 자체로 이 영화를 볼 만한 충분한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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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대배우들의 굴욕 배역


대배우라 일컫는 이들이라면 대작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다. 유명세를 떨치고 돈과 명예를 얻으며 계속될 차기작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완벽한 영화는 존재하기 힘드니, 이왕이면 괜찮은 수준의 영화에 이왕이면 눈에 띄는 배역에 출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건 한국&동양 영화이다. 


여기 영화 고르는 안목이 좋기로 소문난 배우가 있다. 필모를 전부 들여다보아도 크게 흠 잡을 영화가 거의 없다. 여기 영화 '캐릭터'의 귀재가 있다. 연기는 물론 잘하고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두루두루 출연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맡은 배역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여기 '세기의 배우'가 있다. 그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기억 저편을 아련하게 헤집는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필모에서 절대 지울 수 없지만 절대 지우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많은 영화들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캐릭터를 연기한 그들이, '격'에 맞지 않은 굴욕 배역을 연기했다. 기억하기 싫은 걸 끄집어내려니 찾기도 쉽지 않고 괴롭지만, 반면교사로 삼는 셈 치고 앞으로 그럴 일이 없길 바란다. 



<협녀, 칼의 기억>의 '유백' 역 이병헌과 '월소' 역 전도연




'할리우드 스타' 이병헌과 '칸의 여왕' 전도연은 1999년 영화 <내 마음의 풍금>으로 함께 했다. 당시 이병헌은 아직 뜨기 전이었고, 전도연은 제1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16년 후 <협녀, 칼의 기억>으로 재회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최고의 배우들 자리에 오른 그들이기에, 최고의 영화여야만 했고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 자명했다. 


적어도 2015년 최고의 영화여야 했을 <협녀, 칼의 기억>은 당시는 물론 한국 역사상에서도 최악의 영화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뽑는다. 눈 씻고 찾아야 흑역사 한두 편 겨우 보이는 이병헌과 전도연 두 배우에게 가장 큰 흑역사로 남을 영화가 된 것이다. 




100억짜리 영화가 50만 명도 넘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장이모우 감독의 무협 스타일을 따라하면서 <와호장룡> 느낌을 차용했지만 제대로 따라하지조차 못했으며, 억지 막장과 황당 결말 스토리로 한국 최고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도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전도연은 두 차례나 멜로 영화를 찍으며 서로 윈윈했던 좋은 기억 때문에 박흥식 감독의 첫 사극에 의리로 출연한 것일까? 이병헌은 전도연이라는 대배우와 16년 만에 재회해 영광을 함께 하려 출연한 것일까?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게 그나마 이병헌의 연기다. 전도연의 연기조차도 이 엄청난(?) 스토리와 액션에 묻혀버렸다. 그러하기에 더 이해할 수 없고 더 안타깝다. 이병헌은 그 좋은 연기력을 왜 이 영화에 써버렸고, 전도연은 그 좋은 연기력을 왜 이 영화에서 써보지도 못했나. <남한산성> 제작보고회 때 사회가 이병헌에게 말하길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정말 오랜만에 사극으로 돌아왔고 했는데, 이에 이병헌이 중간에 <협녀, 칼의 기억>도 있었다고 말했다는 슬픈 영화...



<은행나무 침대 2 - 단적비연수>의 '적' 역 설경구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설경구는 한국 영화계에 여러 가지 의미로 금자탑을 쌓았다. <박하사탕> <공공의 적> <오아시스>로 한국의 모든 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야말로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영화들로 추앙받고 있다. 거기에 설경구가 주연 중의 주연으로 출연한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그뿐이랴? 네 영화의 김영호, 강철중, 홍종두, 강인찬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철중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로 손꼽힌다. 그 사이사이 <송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심지어 <광복절 특사>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단적비연수>가 왠 말이랴...




<은행나무 침대> 신드롬에 힘입어 강제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대형 프로젝트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단, 적, 비, 연, 수로 캐스팅했다. 차례로 김석훈, 설경구, 최진실, 김윤진, 이미숙. 그들 모두의 흑역사일 테지만, 영화는 은근 흥행에 성공한 축에 속한다. 물론 손익분기점을 따진다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겠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느낌의 한국형 판타지/액션/멜로 <비천무>가 역대 최악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단적비연수>는 그보다 더 못한 평가를 받으며 그보다 훨씬 못한 영향력과 유명세를 발휘했고 발휘하는 중이다. 설경구로서는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영화판에서 물오른 연기력을 발휘했을 테지만 영화 고르는 안목이 연기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가장 잘 나갔던 시기 바로 직전의 유일한 치명타였지만 그때의 설경구라면 이해가 간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의 '무천도사' 역 주윤발




'드래곤볼' 네 글자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만화이자 가장 유명한 만화임에 분명하다. 일본에서 처음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마니아가 많고 여전히 후속작이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 있다. '주윤발' 세 글자를 들어보지 않은 한국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1980~90년대 최고의 대스타, <와호장룡>이라는 불후의 명작에도 출연했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해 좋은 성적도 냈다.


드래곤볼과 주윤발이 만났다.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이다. 다만, 만들어진 시기가 2009년으로 언제적 드래곤볼이고 주윤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인 게 걸렸고 원작이 워낙 유명한 것도 걸렸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진짜 문제는 영화 그 자체. 그야말로 전 세계 영화 역사상 독보적인 흑역사다. 그런 영화에 주윤발이 주요 역으로 나오다니... 20세기폭스가 배급하고 주성치가 프로듀서를 맡았다는 사실도 충격이다. 




사실 주윤발이 이 영화에서 한 건 많지 않다. 다행히도(?) 그저 폼을 잡고 움직임을 가졌을 뿐이다. 물론 대사도 했고. 기자회견에서 말한 아내가 돈 벌어오라고 등 떠밀어서 출연했다는 획기적인 이유가 서글프다. 영화는 모든 면에서 평범한 아마추어 수준 이하의 아동용이라고 해도 욕 먹을 수준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원작 '드래곤볼'에 대한 이미지도 엄청나게 추락했을 것이다.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공식적으로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생각해달라"라고 말할 정도로 치가 떨릴 만큼 형편없었는데, 주윤발이 2000년대 이후 영화 고르는 행태를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는 <와호장룡>으로 2000년대를 화려하게 열어젖힌 후, 바로 <방탄승>으로 이후 계속될 졸작 대열을 예고했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형편없는 영화에 출연하는 걸 많이 봐왔다. 아마 앞으로도 자주 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그런 영화에서 좋은 연기력을 선보여도 서글프고 막대기처럼 서 있어도 서글프다. 그들만의 이유로 출연하게 되었겠지만, 정작 그들은 개의치 않아 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조바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좋은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좋은 배역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는가? 가끔은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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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는 여기에 없었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살인 청부업자 조(호아킨 피닉스 분)는 수시로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수시로 시도를 하는데, 봉지로 얼굴을 덮어 숨을 못 쉬게 하거나 칼을 입속으로 넣어 찌르려 하거나 철로에 떨어질 것처럼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하다 못해 칼로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한다. 모든 건 무표정 위에 어린 복잡한 심정으로 행한다. 


그가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기억들이 있다. 어린 시절인 듯 학대의 기억들, 전쟁인 듯 당한 기억과 행한 기억들, 그리고 오래 되지 않은 가해의 기억들까지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자살을 할 수 없는 건 늙은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다. 인정사정없는 살인 청부업자이지만 어머니한테는 다정다감한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에게 의뢰가 들어온다. 차기 주지사로 유력한 상원 의원 알버트가 딸 니나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지체없이 소굴로 가 니나를 구출한 조, 하지만 머지 않아 알버트가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곧이어 정체불명의 이들에게 니나를 빼앗긴다. 조는 다시 한 번 니나를 구출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차기 거장 과작 감독의 신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영국 출신의 여성 감독 린 램지는 1999년 장편 데뷔 후 20여 년 동안 4편밖에 내놓지 않은 과작 감독이다. 내놓는 작품마다 비평 면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며 차기 거장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지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와중에 2011년 작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를 뿌렸다. 사랑할 수 없는 아들과 사랑하기 힘든 엄마의 치명적 심리 스릴러로,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모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비틀기를 시도해 반향을 일으켰다. 


틸다 스윈튼이라는 명배우와 함께 시너지를 냈던 <케빈에 대하여>에 이어 6년 만에 장편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들고 온 린 램지 감독은, 이번에는 명배우 호아킨 피닉스를 낙점했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비틀어 내보인다. 


다만, 전작이 관계와 서사의 심리를 중점에 둔 반면 이번에는 개인과 기억의 은유에 중점을 두어 보다 스타일리시해졌지만 다소 난해가 구석이 많을 수 있겠다. 그런 만큼 관객이 해야 할 게 많아졌다. 


폭력에 대하여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기본적 스토리 라인은 여러 영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뤽 베송의 <레옹>,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 심지어 한국 영화 <아저씨>까지 연상되는 것이다. 암울한 과거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유령 남자가 여 아이를 구하면서 구원된다는 이야기. 하지만 <너는 거기에 없었다>는 이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결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여자를 구하는 걸 본인 구원의 상징으로 치환한다. 여자가 구원되는 것도, 여자를 구하는 게 남자를 구원하는 방법의 하나가 되는 것도 된다. 또한 그들의 관계 형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남자 주인공 내면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똥파리> <파수꾼>을 비롯한 한국 독립영화의 일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조가 니나를 구출하는 장면이 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영화였으면 얼마나 스타일리시하게 또는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는지 신세계적인 액션을 보여주려 하였다면, 이 영화는 망치 하나로 일망타진하는 폭력적인 이야기와 장면을 CCTV 화면과 다분히 편집된 이야기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에서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를 꺼려하고 있다. 


또 다른 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조가 괴로워하는 플래시백들이다. 현실의 폭력과 폭력 이후를 보여주는 방식과 정반대로, 극히 짧은 시간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플래시백들이 굉장히 직접적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날 것의 피가 난무하는 폭력보다 폭력 이후만을 보여준다. 상상하게 만드는 폭력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여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조는 폭력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어머니라는, 삶의 이유이자 폭력의 굴레에서의 쉼터가 있지만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다. 영화는 조의 이유이자 쉼터를 어머니에서 니나로 옮기는데, 그건 과연 죽음일까 부활일까 구원일까. 이 역시 영화는 판단을 감독의 몫도 배우의 몫도 아닌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결국엔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사라지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누군가한테 죽임을 당하든, 스스로 죽든. 그 지점에서 구원의 양상이 영화마다 제각각인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죽음-부활-구원의 라인을 택한 듯하지만, 아무것도 택하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택한 것도 같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건 ‘너는 여기에 없어야 한다’로 읽힌다. ‘너’는 조 자신일 수도 있고, 니나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의 사업 파트너일 수도 있고 그에게 원수진 수많은 이들일 수도 있다. 그를 죽이러 온 이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라는 공간과 시간을 통합하는 철학적 개념이 이 영화를 주되게 관통하기도 한다. 


액션은커녕 말도 거의 없거니와 딱딱 끊기는 OST는 영화를 한없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한다. 다름 아닌 주인공 조의 내면과 기억 속으로. 그러면서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라면 그 암담함과 조용한 긴박감을 견뎌내야 한다. 감히 재미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감히 참고 견디며 한 번쯤 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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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대관람차>


영화 <대관람차> 포스터. ⓒ무브먼트



오사카에 출장 온 선박회사 대리 우주(강두 분), 출장 마지막 날 낮에는 덴포산 관람차를 타고 저녁에는 일본 쪽 담당자 스즈키와 저녁을 먹는다. 스즈키와 헤어진 후 술에 취한 채로 핸드폰도 팽개치고는 선배인 과장 대정을 닮은 사람을 보고 무작정 쫓아간다. 우주는 선박 사고로 실종된 대정을 대신해 오사카에 출장을 왔었다. 


자전거 탄 사람을 쫓는 건 역시 무리, 놓치고는 근처의 고즈넉한 바 '피어 34'를 찾아들어간다. 이곳은 '대정'이라는 곳이란다. 익숙한 이름이다. 맥주 한 잔을 걸치고 뻗어버린 우주는 다음 날 깨어난다.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시간을 놓쳐버렸다. 주인장의 말 때문인지 평소 생각 때문인지 대정과의 진지한 대화 때문인지 그저 홧김인지, 우주는 회사를 그만둔다. 무작정 피어 34로 찾아가 대정을 찾을 때까지 지내기로 한다. 


대정은 음악을 하고 싶어 했고 우주는 음악을 했었고 피어 34에서 주인장 스노우의 소개로 만나게 된 하루나는 음악을 하고 있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피어 34는 예전엔 공연을 자주 하고 관객도 많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곳이 되었다. 우주는 한편 대정을 찾는 한편, 부인과 함께 음악을 했었지만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인을 잃고 음악을 놓아버렸다는 하루나 아버지의 사정을 듣고 공연을 기획하는데... 


오직 한 명을 위한 음악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영화 <대관람차>는 '더 자두'로 익숙한 강두가 처음으로 영화 주연을 맡은 것, 적지 않은 대사의 90% 이상을 일본어로 선보인 것, 일본 오사카 현지 올로케이션, 한국영화인지 일본영화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감성, 강두의 목소리로 듣는 루시드폴의 음악 등 독립영화로선 상상하기 힘든 즐길 거리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 양국의 21세기 가장 큰 비극인 세월호 참사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음악과 노래로 따로 또 같이 위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음악 영화를 표방하지만 일반적인 음악 영화와 결이 조금 다르다. 


들어줄 이 없는 개인의 음악은 그 영향력이 본인을 포함해 몇몇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뮤지션들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오직 한 명을 위한 음악을 선보이는 데 중점을 둔다. 그 한 명은, 그 한 명이 겪은 아픔은 만인을 대변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영화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점점 어려워졌다.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음악을 하고 싶어 회사를 때려친 우주의 방황과 나아감과 깨달음을 아픔, 성장, 사랑 등의 키워드와 함께 적절히 접목시킨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철학적이기 그지 없다. 연고 없는 해외에 와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미아가 된 우주, 언어유희적으로 '우주 미아'가 된 그는 더욱이 멘토와 같았던 회사 선배 대정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우주는 대정의 실존을 찾는 대신 대정의 꿈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곧 자신의 실존인 것처럼. 


하루나는 어떨까. 본인은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두 음악을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아예 음악을 놔버렸고 하루나는 기타만 칠 뿐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음악을 되찾는 게 곧 자신의 음악을 되찾는 것이고 곧 그들의 실존을 되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알고 있더라도 그녀로서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들의 실존을 압도하는 거대한 아픔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에. 


피어 34와 주인장 스노우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느낌의 아픔이 있는 것 같다. 피어 34는 한때 수많은 공연과 수많은 관객으로 잘 나갔지만 이제는 동네 단골만 찾는 바가 되었고, 스노우는 멀리 캐나다로 보트를 타고 떠나고 싶지만 보트가 말을 듣지 않는다. 피어 34를 두고 떠날 수 없는 걸까, 피어 34가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


영화 <대관람차>의 한 장면. ⓒ무브먼트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게 힘이 쎄다. 우주는 해야 했던 일을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훨씬 더 월등한 능력을 선보인다. 그런 우주 덕분에 하루나와 스노우는 본인들 마음속 깊은 곳에 묵혀두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들과의 끈이, 하루나는 아버지 때문에 끊어져 있었거나 보이지 않았고 스노우는 현실에 안주하고 그러면서도 과거를 향수하는 것 때문에 그러했다. 우주야말로 하루나와 스노우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에게 대정이라는 존재는 선구자와 다름 아니었다. 


선구자라는 존재의 부재는 두 가지 극단적인 행동을 수반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찾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그 자리에 다가가려는 수고, 또는 소극적으로 침참하면서 좌절과 자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고수. 


미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게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영화는 알려주려 하지 않고 보여주며 보여주려 하지 않고 들려준다. 잘 알아들을 수 있었고 잘 느낄 수 있었고 잘 간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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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 포스터. ⓒ이수C&E



사랑을 표현할 때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글자 그대로 사랑을 하면 능력이 뛰어나지고 훌륭해지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우리 인류가 지금에 이르게 된 결정적 이유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좋은 쪽으로 가게 된다면 갈 수 있다면 그 가장 큰 이유가 다름 아닌 사랑 덕분일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사람이 여기 있다. 그(그녀)는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이 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다. 그럴 땐 '혼자'만 아니면 된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게 될지 모른다. 내가 함께 하는 우리가 아닌 우리에 속한 내가 되는 것이다. 반면 사랑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른 우리가 된다. 


사랑을 할 때 혼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혼자 있을 때도 정신적으로 함께하고, 정신적으로 혼자 있을 때는 육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함께하지 않을 때도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사랑이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너와 내가 함께 우리가 된다.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는 그런 이야기다. 


긴 항해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의 한 장면. ⓒ이수C&E



남태평양 한 가운데 타히티섬, 자유로운 영혼 태미(쉐일린 우들리 분)와 바다를 사랑하는 리처드(샘 클라플린 분)가 우연히 만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는 흔하디 흔한 절차를 따른다. 눈이 가고, 눈에 남고, 밥을 먹고, 서로를 알아가고, 데이트를 하고,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바다를 닮고 바다를 사랑하는 이들답게 긴 항해를 시작한다. 


한편, 태미와 리처드가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워 가는 동시에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뒤집히다시피 한 보트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태미가 고군분투하는 표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하지만 그녀 옆에 리처드가 보이지 않는다. 곧 근처에 떠다니는 리처드를 발견하고 건저내지만 그는 이미 심하게 다친 상태이다. 


꿈의 섬 타히티에서의 달달하고 환상적인 로맨스를 즐기는 태미와 리처드, 동시에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버티고 버티는 태미와 리처드. 영화는 사랑과 생존이라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을 것 같은 두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며, 사실은 두 모습이 다르지 않다고 하나라고 말한다. 


사랑과 생존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의 한 장면. ⓒ이수C&E



생존은 치열하다. 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야만 한다. 평소의 내가 아닌, 그곳엔 다른 내가 또는 진짜 내가 존재한다. 사랑은 어떨까. 사랑도 치열하다. 나보다 네가 더 중요하고, 그런 너를 위해 보다 나은 내가 되려 한다. 역시 그곳엔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존재한다. 너로 인해 더 특별해진 내가 말이다. 


그뿐이랴. 생존의 상황처럼 사랑의 상황도 특별하다. 생존만을 위한 상황에 처하는 건 일생에 있어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처할 때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말로는 뭘 못하랴 하겠지만, 치열한 생존에의 사투를 이겨 지나오는 것에는 진짜 나를 알게 되는 특별함이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보편적 상황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진짜 사랑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그건 진짜 사랑을 아무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와중에 사랑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면, 단언컨대 그 자체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사랑과 생존에의 치열하고 특별한 모습들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혹자는 교차편집으로 이 영화의 로맨스 깊이가 옅어졌고 산만해졌다고 했지만, 난 다름 아닌 이 교차편집 덕분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과 생존의 수평적 등가 대치가 훌륭히 보여졌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은 생존만큼 치열하고 특별하다. 


당당함과 나아감


영화 <어드리프트: 우리가 함께한 바다>의 한 장면. ⓒ이수C&E



교차편집의 한 장면인 로맨스는 다른 장면인 생존 표류에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긴장 어린 가슴 떨림은 설렘으로 수평적이게, 망망대해의 막연함과 외로움은 함께 하는 우리에의 감사한 기억으로 역변적이게 치환된다. 


생존 표류는 로맨스에의 달달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영화적 힘을 얻는다. 추상적이고 전체적인 사랑에의 모양이 아닌, 구체적이고 순간적인 사랑에의 모습들이 생각나 오직 그 기억들로만으로도 살아가게 된다. 


한편 영화는 35년 전 실제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여주인공 태미의 주체적인 모습을 곳곳에 담았다.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계획하고 실천한다. 거기엔 지금은 물론 당시엔 더더욱 여자로서 그런 모습으로 하기 힘들었을 사랑과 생존의 당당함이 있다. 


사랑과 생존은 그 자체로서 수평적 등가의 모습을 주고 받지만, 한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모습으로 다가가서 그녀에 의해서 동일하게 나아간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태미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생존에의 나아감은 종반의 반전으로 사랑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합일된다. 반전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스릴을 선물하는 대신, 슬프고 가슴 아프고 얼얼하다. 그럼에도 태미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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