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 포스터. ⓒ더쿱



'대만영화',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2000년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2010년대 괜찮은 청춘영화가 우후죽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등, 우리나라 감성과 맞닿아 있는 대만 감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진짜' 대만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등. 이들은 1980~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일명 '뉴 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이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지금의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단 대만청춘영화뿐만 아니라. 


최근에 우리를 찾아온 강렬한 영화 <몬몬몬 몬스터> 또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2010년대 대만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이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원작, 각본, 제작을 맡았던 이른바, '대만청춘영화'의 기수 구파도의 신작이다. 젊은 감독의 '청춘' 사랑은 여전하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수단과 방법이 이채롭다. 거기엔 청춘은 물론 공포, 스릴러, 코믹까지 있다. 


괴물 같은 인간과 괴물의 한판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린슈웨이는 런하오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거기에 반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조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피해자 린슈웨이가 아닌 가해자 런하오를 두둔한다. 복도에서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왕따이자 아웃 오브 안중인 여자 학생만 그를 위할 뿐이다.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지만 린슈웨이 또한 그녀를 왕따시키는 학생일 테니, 그녀의 위로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한편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만 사는 곳엔 '괴물 자매'가 산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다고 차에 치이고는 우연히 근처에 있던 런하오 일당에게 붙잡힌다. 그때 거기엔 린슈웨이도 있었다. 그들은 동생 괴물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와서는 하염없이 괴롭힌다. 린슈웨이가 찾아보니 그 괴물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돈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런하오 일당과 언니 괴물은 한판 붙어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괴물과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면서 사람이었던 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와 한없이 괴롭히는 사람. 사람으로서 사람을 응원하지만, 사람이니까 괴물을 응원해야 할 것도 같다. 


장르 폭풍이 선사하는 재미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로만 느낄 수 있을 쾌감 어린 재미는 물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은근 철학적 질문으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 배가시킨다. 우선 재미 요소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이 영화의 장르 폭풍이 있다. 청춘, 코믹, 공포, 스릴러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 흔히 거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있고 다시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거나, 간혹 다른 루트로 본래의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명백한 가해자인 괴물을 상대로 가해자가 된다는 설정이 특이하다. 


괴물이 나오면서 장르는 자연스레 공포와 스릴러로 옮겨간다. 혐오스러운 몰골은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공포를 유발하며,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어린 순간들은 스릴러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다놓게 한다. 


구파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청춘과 더불어 코믹이 빠질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작, 원작, 각본을 맡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코믹이 이 영화에도 살짝살짝 묻어난다. 그런 코믹들이 공인된 청춘 장르는 물론 공포와 스릴러와도 잘 어울리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런하오 일당은 이 영화의 공공의 적이자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이다. 왠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싸그리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에서, 런하오 일당이 린슈웨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또 동생 괴물을 납치해오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겉 아닌 속은 어떨까. 결국 런하오 일당 또한 언젠가 피해자였을 테고 언젠가 피해자가 될 운명이 아닐까. 그들도 이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는 거대한 시스템의 약자 측에 속해 더 절대적 약자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약자들의 세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피눈물 나는 모습들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 정신지체아와 가게를 꾸려 나가는 노인에게 물세례를 맞은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와 경찰의 눈을 피해 더 깊숙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괴물 자매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 자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박스 하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런하오 일당에게 잡히고, 런하오 일당은 린슈웨이를 괴롭히는 한편 함께 하는데, 린슈웨이는 다시 가게의 정신지체아를 향해 폭언을 하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말하려는 이 영화, 런하오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괴물'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린슈웨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하지 못하는 그는, 어찌 보면 정녕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간. 하지만 그는 명백히 런하오 일당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했다. 런하오 일당이 괴물이라면 그도 괴물이 아닌가? 영화가 질문하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의 대상은 런하오 일당이 아닌 린슈웨이다. 그리고 우린 대부분 린슈웨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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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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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오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 에우리피데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를 통해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와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외과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마틴의 집에 갔을 때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스티븐은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마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작은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큰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인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고. 


만약 스티븐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도 죽을 거란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를 거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스티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것인가, 죽인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종교적 운명과 우연적 딜레마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게 될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신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처지를 바꿀 능력 따위는 인간에게 없다. 특히 과학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모습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보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게 그런 것인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인가. 


영화는 운명의 굴레에 종속되어버린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교의 한 면모를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도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운명이 신의 영역이라면 딜레마는 인간의 영역이다. 운명이 선택되어지는 거라면 딜레마는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 찾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이다.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타개하려는 게 그것이다. 영화는 딜레마에 처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종교를 비꼬고 운명을 무시하는 이들도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자, 우리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신의 대리인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였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


이 진중하고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꼼. 


여러 가지 것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와중에 그에 걸맞지 않아 보여 그 비꼼의 수위가 더욱 강해지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시컬한 OST들은 영화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모든 배우들이 발성하는 높낮이 없는 낮고 무성의한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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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티캐스트



영화감독 누구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만한 감독이라는 인정과 함께, 내가 그 감독을 좋아할 거라는 예상의 적중이 내포된 끄덕임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일상적이고 일관적이고 안정적이고 파격적이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일본의 우익화를 극구 비판하는 그의 성향에 빗대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접하진 않았다. 아니, 그의 필모를 들여다볼 때 안 본 게 더 많으니 어디 가서 그의 영화를 잘 안다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영화를 빠짐없이 섭렵하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영화들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데뷔하면서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단연 칸영화제로,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 4수 끝에 <어느 가족>으로 '당연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좀도둑 가족의 기이한 이야기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영화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는데, 가족 영화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흔히 볼 만한 그런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원작 영화의 제목인 '만비키(좀도둑) 가족'에서 알 수 있듯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일본의 수치를 전 세계 만방에 알렸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관람거부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대대적인 흥행을 이룩한 이 영화, 들여다보자.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많이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로 가게를 털고 집으로 향한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디 잡은 집에서 할머니 하츠에, 엄마 노부요, 큰딸 아키가 그들을 당연한듯 반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밖에 혼자 있는 여자 아이가 측은해보여 데리고 온다. 유리라고 하는 그애를 금방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집에서 부모들이 싸우며 유리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 집의 모든 이들이, 즉 가족들 모두가 유리를 반기지만 그들은 이 행동이 엄연한 유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집이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로만 연명되진 않는다. 오사무는 일용노동직으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한다. 그리고 하츠에는 전 남편으로부터 꼬박꼬박 받는 연금으로 이 집이 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알고 보니,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진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이 가족, 연금과 좀도둑질로 연명해야 할 운명인 이 가족. 면면과 외양은 단죄해야 마땅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좀도둑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한 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한편, 가슴 졸이며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과없이 진지하게 던진다. 물론, 나름의 확고한 답을 같고서. 그의 '가족'에 대한 물음은 2008년 <걸어도 걸어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천착해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작금의 일본은 어떤가. 살 만 한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2000년대 잃어버린 20년까지 지났지만, 2010년대가 되어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이 꺼내든 건 일명 '아베노믹스'라 불리는 경기부양책, 화폐가 무제한으로 찍히고 있다. 일어선 건 무너져가던 기업들, 무너진 건 역시 무너져가던 개인들과 개인들이 이룬 가족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가. 


고레에다는 그동안 가족을 말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왔다. 가족의 안팎을 함께 구성하는 것들과의 연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가족>에 이르러 밖으로 확대하려 한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가족,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다. 들여다보면 '돈' 때문일, '진짜' 가족의 폭력으로 버려진 이들의 연대가 이 좀도둑 가족의 실체다. 


'혈연은 천륜이다'라는 가족의 전통적 정의 내지 불문률은 이 영화의 이 가족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비록 그 이유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이성적이지만 서로 간의 필요로 뭉쳤다. 불쌍해서 데려온 유리조차도 '워킹쉐어'라는 이름으로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고레에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또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런 기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와 사회가 하지 못하는 걸 가족이 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나쁜 짓'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반대로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여 진짜 가족이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과 그 무엇을 주었음에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보다 못한 진짜 가족들은 모조리 해체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버려진 이들을 지킬 이 누구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이 좀도둑 가족의 정의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며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버려진 이들'이다. 이 가족에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가족 자체가 국가와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버려졌다는 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 전체의 동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위를 향하고 있는 일본, 저 아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쳐다볼 여력도 없다. 


이 가족이 직면한 건, 그 누구한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 즉 최소한의 사회보장망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막막함과 더불어 자신들을 외양으로만 판단하면서 내면과 진실에 대해선 들여다보고 알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데에서 오는 합리적 차별이다. 


우린 여기서 또 한 번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 기이한 가족를 정의할 때 느꼈던 아득한 혼돈과 이성, 감성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딜레마를 말이다. 이들은 유리를 '유괴'한 걸, 부모가 버린 이를 주워왔다고 표현한다. 유추해보면, 유리와 달리 쇼타는 부모가 '유기'한 걸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이 두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쇼타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유리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부모의 계속된 폭력 밑에서 잘못 컸을 것이다. 적어도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 하에서만이라도, 데려오는 게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진짜 가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 웃음과 현실적 막막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덥치는 이 영화 <어느 가족>,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확대해 나가는 '일본' 현실의 주제는 가히 치명적이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아마도 우리로서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 답을 내릴 때까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리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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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와 극장에서>


영화 <너와 극장에서> 포스터. ⓒ서울독립영화제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아니, 사실 잘 가지 않는 편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진짜 보고 싶은 영화,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좋은 영화는 극장에 잘 걸리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의 원하는 시간에 말이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발품을 팔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몇 번 그렇게 했다가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그곳엔 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이나 벅참이 없었다. 


극장엔 설렘이나 벅참을 동반한 로망이 있기 마련이다.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를 오감만족하게 보여주는 곳이니까. 무엇보다 그곳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객들이 있다. 공기에 퍼지는 공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난 극장을 잘 가지 않는다. 


멀티플렉스는 더 이상 '극장'이 아니다. 극장은 멀티플렉스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대신 그곳엔 영화와 하등 관련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영화는, 극장은 단지 할 것 없어서 시간을 때우려고 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런 곳에 매년 치솟는 가격을 지불하고 갈 이유를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진다. 


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극장에 관한 옴니버스 장편이다. <극장 쪽으로> <극장에서 한 생각.> <우리들의 낙원> 3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각각 유지영 감독, 정가영 감독, 김태진 감독이 맡았다. 서울독립영화제가 2009년부터 격년마다 신인 감독 발굴을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개봉/배급 지원을 해왔는데, 이 영화는 그 다섯 번째이다. 


극장의 만남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극장 쪽으로'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아침엔 우유와 주스, 그리고 토스트로 떼우고 출근해서 점심시간엔 오무라이스를 먹는 선미. 그녀는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한국감정원 인포데스크에서 일한다. 타지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6시, 오오극장에서 만나요. 기다릴게요!'라는 쪽지가 전달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향한 오오극장, 하지만 그곳엔 설레는 일은 찾아볼 수 없고 막막하고 기가 막힌 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극장 쪽으로>는 극장을 향하는 보편적 설렘과 이와는 별개로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유지영 감독이 말하는 바가 두루 입혀져 있다. 아침 점심 저녁 변치 않고 똑같은 생활을 하는 선미가 정말 특별히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극장이다. 그곳엔 비단 영화뿐만이 아닌 '새로운 만남 '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극장에서만의 영화라는 점과 새로운 만남의 설렘이 주는 시너지랄까. 


한편 영화는 선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설상가상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오오극장에 처음 가보는 그녀이니 만큼, 더군다나 골목에서 담배를 피려다 아이들에게, 할머니에게 쫓겨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도망간 것이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긴 힘들고,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핸드폰도 없어진 것 같고. 그녀가 대구에 내려온 이상 대구에서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은 것처럼, 이 오오극장 옆 골목길에서도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극장의 존재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극장에서 한 생각.'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토요일 아침, 영화 <극장살인사건> GV 시간에 정가영 감독과 사회를 맡은 임선미 기자가 있고 관객석엔 드문드문 관객들이 있다. 관객들의 질문과 감독의 답변이 오간다. 멜로만 찍던 감독님이 왜 스릴러를 찍게 되었냐, 앞으로 다시 멜로 찍을 생각이 있냐, 멜로를 더 좋아하냐 스릴러를 더 좋아하냐. 와중에 정가영 감독은 고백한다, 유부남을 사랑했던 적이 있다고. 어느 관객이 이 사실로 질문을 하고 물고 늘어지는데...


<극장에서 한 생각.>은 진짜 GV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고 긴장감 어리다. 영화는 단순한 관객 질문과 감독 답변으로 이어지는 듯한데, 실상은 극장에 대한 솔직담백한 의견 제시다. 비관적인 의견. 영화 감독임에도 극장을 잘 가지 않고, 불법다운로드를 즐기며, 극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심 없다. 


우리나라 영화산업, 즉 극장산업이 나날로 번창하는 것과 동시다발적으로 성행하는 게 다름 아닌 불법다운로드 시장일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IPTV 또는 포털 다운로드로 영화를 편하게 즐기는 이들 또한 많아지고 있다. 독립, 예술영화들 입장에서, 즉 영화의 다양성 추구 측면에서 이는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닐까? 


극장이란 게 영화를 보는 방법의 하나로 존재해야만 하지, 영화를 보는 방법의 전부로 극장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그런 극장조차 대기업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점은 심해지고 관객은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닌 봐야 하는 영화를 보게 된다. 언젠가는 영화계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극장의 추억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우리들의 낙원'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반장 은정은 직장에게서 민철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회사를 나오지 않은 민철이 출납리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정은 수소문 끝에 민철의 학교 친구였던 정우네 부부의 도움을 받는다. 민철이 소싯쩍부터 유명한 영화광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가 있을 만한 곳이 몇몇 짐작된다는 것. 그들은 영화 잡지 기자까지 만나 '클래식 특별전' 마지막날 서울극장으로 향하는데... 


<우리들의 낙원>은 민철을 찾아, 민철의 낙원 '극장'으로, 민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우리들의 낙원>이 상영되는 서울극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여정을 그린다. 은정에겐 힘들고 의미없고 지난한 여정일지 모르지만, BJ로 활동하는 정우네 부부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콘텐츠이고 그곳 위에 서 있는 서로가 모델이며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우리는 <극장 쪽으로>에서 선미가 느끼는 '새로운 만남'에의 설렘을 함께 느끼는 것과는 다른, 온전히 '극장 영화'를 본다는 설렘의 발로를 느낄 수 있다. 더불어 그들이 향하는 곳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대기업 소유 멀티플렉스가 아닌 전통의 서울극장이다. 그곳은 '추억'이라는 또 다른 설렘의 원동체가 생생히 살아 숨쉬는 공간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도 이곳에선 영화를 보게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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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 루시!>


영화 <오 루시!> 포스터. ⓒ엣나인필름



일본 도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중년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 분)는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 분)의 부탁으로 영어 회화 교실을 다니게 된다. 일단 무료체험을 하겠다고 나선 길,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학원 내부의 한 교실로 안내된 세츠코는 그곳에서 선생님 존(조쉬 하트넷 분)을 만난다. 


그는 미국식 영어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별 거 없는 영어와 함께 과장된 몸짓과 포옹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녀는 루시(lucy)라는 영어이름으로 불린다. 금발머리 가발과 함께. 가발을 돌려주러 갔을 때 다케시(야쿠쇼 코지 분) 즉, 톰을 만난다. 존에게 영어를 배우러 온 그였다. 루시는 그때 존과 깊은 포옹을 하고 남다른 기분을 느낀다. 사랑?


정식으로 등록하러 갔을 때 존은 떠나고 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세츠코가 대신 수업을 듣는 대신 내준 60만 엔을 들고서. 그 사실을 안 미카의 엄마이자 세츠코의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 분)는 세츠코에게 60만 엔을 돌려주고, 이를 다시 세츠코가 아야코에게 돌려주려 하면서 미카가 있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가겠다고 한다. 아야코가 동행한다. 이 동상이몽 여정의 끝은?


신인 감독과 베테랑 배우들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오 루시!>는 일본의 젊은 신인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가 자신이 만든 단편 <오 루시!>를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단편의 장편영화화에 일본 최고 베테랑 배우들과 할리우드 스타가 합류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배우 반열에 오른 테라지마 시노부와 야쿠쇼 코지, 일본 내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나미 카호, 말이 필요 없는 조쉬 하트넷까지. 


초짜 감독의 그냥저냥 멜로 로맨스 영화에 이런 배우들이 모여들리 없다. 이 영화에는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섬뜩한 지하철 투신 자살 사건으로 시작하는 영화, 가족 간에 회사동료 간에 친구 간에 일절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보이는 세츠코, 고작 포옹 한 번에 미국까지 날아가는 세츠코, 언니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세츠코. 


세츠코의 기이한 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퍼즐 맞추듯 해보면 뭔가가 보일 듯하다. 영화 시작에서 보이는 투신 자살 사건이 비단 그 한 번으로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일면을 보이는 것 같고, 세츠코의 면면은 다름 아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흔하다면 흔한 병리자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심지어 이 영화가 겉으로 내보이는 멜로 로맨스 즉, 세츠코의 사랑조차 이 병리의 일환 같다. 결정적으로, 세츠코라는 자아와 루시라는 자아의 분리. 


개인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1인 가구의 폐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인 가구는 더 이상 특별한 현상 내지 양상이 아니다. 이미 전 인구에서 30%에 육박했고 머지 않아 1/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 모습은 '문제'인가. 문제라고 하면 문제다. 의료발달로 수명은 점점 늘 것인데 반해 결혼과 출산은 점점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를 문제라고 하기 전에 다른 의미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개개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도 있다. <오 루시!>는 사회적 아닌 개인적으로 1인 가구의 폐해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혼삶을 사는 이가 모두 세츠코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들 대다수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연대하며 살아간다. 삶의 형식이 둘 이상이 아닌 혼자일 뿐이다. 와중에 혼삶의 객체적 문제가 드러난다. 1인 가구가 지닌 병리적 모습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 '사회적'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 최악의 경우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이. 


세츠코의 경우, 가장 크게 다가오거니와 원초적인 사건이자 병리적 모습의 원인은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언니 아야코와 미카의 존재다. 그녀는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지금의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며 자연스레 이 사회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는 비록 이유도 현상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관계들의 집합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세츠코가 존을 사랑하게 된 또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존의 다가옴이었다. 존이 다가와서 포옹을 했고 세츠코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사랑'이라 자신있게 말하리라. 그런데 세츠코라는 사람이 사람과의 소통이 불능한 상태이기에, 관계에 있어 최상에 위치한 '사랑'을 한순간에 느끼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사랑이 아닌 병리적 모습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존은 세츠코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한 아야코의 딸과 함께 도망친 사람이 아닌가. 세츠코에게 한처럼 남아 있는 그 일에 대비해볼 때, 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갈망과 집착과는 완연히 다른 복수의 일면일 수 있다. 세츠코에게 남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 형상이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의 현대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1인 가구가 된 게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1인 가구의 혼삶을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세츠코의 이야기는, 그 면면이 혼삶의 병리적 모습을 띄고 있기에 복합적으로 보여지고 다가온다. 뭔가 알 만한 그림이 그려질 듯한 퍼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외롭고 초조하고 기이하고 단순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반면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단순명쾌하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충분한 효과를 보인다. 진심 어린 포옹. 내 몸의 절반과 상대방 몸의 절반을 오롯이 맞대는 행위. 거기엔 사람 대 사람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이 주고 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이겨낼 수 없는 병리를 초월한 관계 형성이다. 분리되어버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아도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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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홈>


영화 <홈>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열네 살 준호는 축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는 그리 예쁨을 받진 못하는 것 같다. 준호에게는 어린 동생 성호가 있다. 귀엽고 똘망똘망한 동생을 돌볼 때면 이런저런 시름을 잃는다. 아빠는 없는 듯하고 엄마 선미는 있다. 보험일에 치여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런 엄마마저도 준호와 성호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다. 그녀와 함께 사고를 당한 이는 그녀가 바람핀 유부남 강원재의 부인이다. 원재는 보살펴줄 이 없는 성호를 딸 지영이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성호는 준호와 성호의 엄마와 강원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준호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준호다. 선미는 상태가 좋지 않고, 원재는 준호를 보살필 법적 의무는 없다. 심적 의무는 더욱 없어보인다. 하지만, 성호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당분간만 함께 살고자 한다. 점점 가족의 형태를 띄어가는 그들이지만, 선미만 세상을 떠나고 강원재의 부인은 살아날 기미를 보이며 더 이상 영위해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원재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 준호의 앞날은 어떨까. 


독립영화 제작사 아토ATO의 야심작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홈>은 지난 2016년 <우리들>과 2017년 <용순>에 이은 관계&성장 3부작의 마지막이다. 한국 최고의 독립영화 제작사로 우뚝 서고 있는 '광화문시네마'와는 다른 시선의 독립영화를 내놓고 있는 '아토ATO'의 세 번째 야심작이기도 하다. 아토ATO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끼리 합심해 만든 광화문시네마처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기획 전공 출신 프로듀서들이 모여 만든 제작사라고 한다. 


김종우 감독은 이 영화 이전의 두 단편을 통해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이야기를 내보였다. 소외된 이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 독립영화 계보에서 가장 특출난 이야기를 양산해내는 소재와 주제가 바로 소외이다. <홈> 또한 끔찍한 상황에 처한 소외된 이의 이야기일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아토ATO가 내놓은 작품들은 모두 관계와 성장을 주요 테마로 내세웠다. <홈>도 그 범주 안에 있는데, <우리들>이 '권력'을 <용순>이 '심리'를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한 것처럼 <홈>은 '가족'을 또 하나의 주요 테마에 상정했다. <우리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그에 반해 <용순>에 실패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홈>은 어떨까? 


아이들과 어른들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정을 콘텐츠화시켜 보여줄 때는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다. 


영화 <홈>은 열네 살 준호가 주인공으로 그의 순수한 두 동생들과 함께 천진난만한 세계를 구축하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가정을 영위하려 한다. 엄마 선미의 무관심에 가까운 행태에도 성호를 잘 보살펴온 준호다. 그런 그에게 우유부단하지만 착한 면이 있는 원재, 그리고 동생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선미는 결혼해 준호를 낳았고 바람을 펴 원재와의 사이에서 성호를 낳았고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지영을 낳았다. 준호의 아빠는 떠났고 선미 혼자 준호와 성호를 키우는 와중 원재의 부인이 찾아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도중 동반 교통사고가 나 의식불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원재와 준호와 성호와 지영은 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이 'house' 아닌 'home'이라는 점에 어떤 방점이 찍히는 것일까? 단순한 객체로서의 '집'이 아닌 가족이 사는 주체로서의 '집' 말이다. 막장과 천진난만함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준호가 아닌,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끈으로서의 준호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가족도, 이런 집도 있는 법이다. 


관계와 가족


영화 <홈>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어른들과 아이들, 가족과 가족, 학교와 집, 준호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맴돌 뿐이다. 열네 살이라는 어른도 아닌 아이도 아닌 나이, 죽어가는 엄마 선미 하나로 이어질 뿐인 가족의 끈, 자기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와 자기가 보살펴야 하는 동생들이 있는 집. 그 경계에서 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란 준호라는 경계인이 겪는 사면초가 상황에서의 끔찍한 관계 형성인 것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 외의 또 다른 메인 테마인 '가족'은 막장이라는 지반 위에 또는 막장 뒤에 숨겨진 천진난만함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 가족의, 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분명 희극처럼 보일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희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희극의 장본인인 이 아이들이야말로 비극의 씨앗인 것이다.


비극의 씨앗이 두루두루 잉태한 불행한 가족, 하지만 이 가족은 겉으로는 또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자 행복이다. 희극이자 행복은 천진난만의 아이들의 것이어야 하고, 비극과 불행은 막장의 어른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 경계에 있는 준호라고 하지만, 최소한 그에게 어른들이 비극과 불행의 끄트머리에라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조금이라도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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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라비, 이것이 인생!>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 포스터 ⓒ디스테이션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에서였다. 19세기 말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의 대중영화를 상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니 한참 전부터 전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는 건 단연 미국이다. 마치 영화의 진정한 시작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라고 다시금 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뤼미에르 형제 이전에 미국의 에디슨과 딕슨이 이미 영화용 카메라와 활동사진 감상 기구를 발명하였고 영화 스튜디오와 영화 제작사를 차렸다. 


하지만 시네필이라면 미국 아닌 프랑스를 동경한다. 세상이 자본주의로 획일화되어 영화 또한 그에 흡수되기 전에는 프랑스 영화야말로 '진정한' 영화의 기준이자 척도였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던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그 답을 더 이상 줄 수 없게 된 건 한참 전이다. 


프랑스 영화는 종종 상업적으로 미국 할리우드를 위협하거나 또는 훌륭하게 종속되거나 해왔다. 감독으로는 뤽 베송이나 미셸 공드리, 배우로는 마리옹 코티야르나 뱅상 카젤 등이 유명하다. 물론 레오 카락스 감독이나 이자벨 위페르 배우 등 미국에 진출하지 않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도 많다. 


특별한 결혼식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프랑스는 극강의 예술영화를 지나 범죄, 액션, 스릴러, 코미디 등의 장르 상업 영화에 도드라지는 형태를 보여왔다. 그중에 한국에는 2012년에 선보여 생각지도 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 <언터처블: 1%의 우정>이다. 전신불구의 상위 1% 귀족남과 무일푼의 하위 1% 흑인백수의 기막힌 동거를 코미디와 감동 어린 드라마 조합으로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모든 작품을 함께 연출하는 올리비에르 나카체·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네 번째 작품이거니와 그들의 출세작이다. 


이들은 2005년 데뷔 후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는데 모두 코미디였다. 최근에는 감동 어린 드라마를 적절하고 훌륭히 조합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듯하다. 2017년 프랑스에서 선보여 엄청난 인기를 끌고 올해 한국에 상륙한 <세라비, 이것이 인생!>이 최신작으로, 변치 않는 프랑스식 입담과 코미디와 드라마를 선보인다. 


웨딩플래너 업체를 이끄는 맥스는 17세기 고성에서의 특별한 결혼식을 준비한다. 유독 까다롭고 예민한 클라이언트 신랑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그날따라 불만 많고 불안하기 짝이 없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연발하는 직원들 뒤치다꺼리가 힘들다. 요즘 부쩍 일 하기가 힘들어 회사를 넘길까도 생각 중이다. 


이뿐이랴? 믿고 맡겨야 할 넘버 2 아델은 땜빵으로 온 밴드 리더 제임스와 욕지거리를 주고 받으며 싸우질 않나, 맥스와 공공연한 내연 관계에 있는 조지앙은 부인과 매듭을 짓지 않고 시간을 끄는 맥스 보란 듯이 젊은 직원을 꼬시며 속을 뒤집어 놓질 않나, 처남이랍시고 내치지 않고 봐주고 있는 줄리앙은 잠옷 차림으로 출근해 한때 동료였던 신부에게 들이대려고 하질 않나... 과연 이 결혼식은 잘 끝날까?


일과 사람들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영화는 17세기 고성을 배경으로 하객과 웨딩플래더 업체 직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결혼식 하루 나절의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는 단연 사장 맥스가 있고, 그가 처리하는 복잡다단한 일의 단면들이 전부다. 거기에는 정녕 개성 만점 인간군상들이 자리잡고 있다. 


개인적으로 작지 작은 회사에서 관리자급으로 일하고 있는데, 일이라는 게 한번 몰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거니와 정녕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성격의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터진다.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 할 때는 정신 차리고 중심을 잡기가 힘들다. 그때 드는 가장 주된 생각은, 각각의 일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일이 아닌 사람들 말이다. 그럼 참 편할 텐데...


<세라비, 이것이 인생!>은 잡은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 이런 바람을 역으로 살려 극대화시키며 재미를 끌어낸 것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일들, 그 어려움은 사실 그 일들의 주체인 사람들에 있다는 공감. 내가 그 자리에 있긴 싫지만, 그 자리를 구경하는 건 정녕 재밌는 일 아닌가. 예를 들면 경험해보지 못한 '전쟁'을 대리 경험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맞아, 꼭 저런 일이 있지. 꼭 저런 사람이 있어.' 하는 공감 경험. 


더불어 '사람'들에서 이 감독들이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있으니, 적정하고 유려하게 내놓는 사회 비판이다. 거기엔 인종의 용광로인 프랑스의 특성이 잘 배어 있어 더더욱 흥미롭다. 전작 <언터처블: 1%의 우정>과 <웰컴, 삼바>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물리적 아닌 화확적 화합으로 나아가는 특성을 지닌다. 


이 영화를 즐기는 법


영화 <세라비, 이것이 인생!>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맥스의 회사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수준이다. 이왕이면 작아보이고 싶어서일까. 불법으로 보이는 일, 즉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현찰로 정직원 아닌 알바 또는 계약직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상당수가 백인 아닌 인도 쪽(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사람인 듯보이고, 역으로 그쪽 사람들은 모두 불법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 선진국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자행되는 불법, 그런데 맥스는 국세청에서 찾아온 듯한 사람한테 가서 이실직고 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역설한다. 걸리면 어차피 다 죽을 거, 하지만 걸릴까봐 두려워 불법을 자행하지 않아도 다 죽을 판이다. 


"우린 영세업체지만 일손이 부족해요. 정직원만 쓰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죠. 급여 100유로당 200유로를 손해보니까요. 그러니 급여를 현찰로 주고 쓰죠. 정부 지원이 없으면 어쩔 수 없어요. 정직원을 많이 쓰면 회계 감사도 받잖아요. 신규 채용 급여세 면제는 왜 안 하죠? 다들 실업률 증가네 어쩌네 떠들지만 문제 해결엔 관심이 없어요."


이 영화의 재미와 감동은 단연 인간의 다양성 그리고 자연스레 수반되는 상황의 다양성에서 온다. 하지만 서사 흐름 속 위기 또한 다름 아닌 바로 그 다양성에서 기인한다. 살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회사와 먼 곳의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에 뛰어든 이들의 공공연한 합의라는 다양성의 일환이든, 뜬금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로맨스라는 다양성의 일환이든, 외국인 불법 노동자들 간의 자국어 대화로 엿보는 프랑스 셀프 디스라는 다양성의 일환이든 말이다. 다름 아닌 이들이 문제를 얼추 해결하기도 하는 다양성의 일환도 흥미롭다. 


다분히 프랑스식 유머와 프랑스에서만 통용될 문화가 곳곳에 배어 있는 이 영화는 사실 온전히 100% 즐기기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수많은 캐릭터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기억에 남을 만한 사연들, 범보편적 공감을 살 만한 상황들이 완벽할 수 없는 이해와 더불어 프랑스 영화라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한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고 배신감을 느끼고 힘들어 하고 좌절을 느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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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화 <버닝>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한국이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내놓을 몇 안 되는 영화감독 중 하나인 이창동, 그의 영화는 탄탄하다. 90년대 초반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이미 주목받는 소설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던 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한국 시인계의 총아였던 유하 감독, 영화계와 소설계를 오가는 천명관 작가가 생각난다. 


80년대 초중반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이창동, 그는 영화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주로 해왔던 작업은, 영화로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빈틈 없는 서사와 대표성을 짙게 띠는 캐릭터와 함께. 


그의 8년만의 신작 <버닝>은 그동안의 이창동 영화와 다른 듯하다. 가히 그 대표성 짙게 띠는 캐릭터들이 극을 주도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여전하지만, 빈틈 없는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문학적 메타포와 영화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보는 사람이 답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종수, 해미, 그리고 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와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을 준비 중인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 분)는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카드 빛을 갚지 못해 가출해 행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전하는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러며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하는 것이다.


한편, 종수는 아버지한테 일이 생겨 북한이 눈앞에 잡힐듯 보이는 파주 본가로 이사한다. 여행이 오래 걸릴 것 같았던 해미는 문제가 생겨 금방 돌아온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부자인 것만은 확실한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다. 그와 그녀는 나이로비 공항에서 며칠간 함께 갇혀 있던 동지란다. 종수는 해미와 어릴 적 동네 친구였고 얼마 전에는 두 번째 만남에 섹스를 했던 사이란 말이다. 


이후 세 명은 벤의 집에서, 종수의 집에서 모임 아닌 모임을 가진다. 종수의 뜻은 반영되지 않은 모임이었고, 종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과 행동이 오갔던 모임이었다. 그 두 번의 모임 이후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종수는 벤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무엇을 감지하고 그를 추적하는 한편 그가 호언장담한 말을 추적하는데...


하루키적 메타포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저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했다. 단순히 그래서일까, 감독이 더더욱 의도한 걸까, 영화 전체가 '하루키적'이다. 영화의 장면장면이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묘사와 대사로 옮겨지고, 영화 전체가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소설로 옮겨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냥 즐기기, 있는 그대로 즐기기 쉽지 않은 영화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는 영화이다. 이창동 감독이 제대로 벼른 것이다. 하루키 특유의 허세를 수직 또는 수평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오그라들어 제대로 들어주기가 민망할 정도의 대사들이 그대로 굉장히 중요한 메타포다. 


종수, 해미, 벤의 세 주인공 자체가 메타포이다. 소설가 지망생임에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비(非) 메타포적인 삶을 영위하는 종수는 눈앞만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을, 번 돈으로 빛을 갚지 않고 메타포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를 찾는 해미는 길을 잃었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길을 이탈하고 싶은 청춘을,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가는 벤은 끝에 다다른 자가 느끼는 허무함을 표출하는 청춘을 의미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어떤 청춘도 불안하고 불만 있고 불행하다. 평범함이 되어버린 밑바닥은 햇빛이 작렬하는 위를 바라보고 동경하는 것이,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없어 방황하는 이는 도무지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디기 힘든 것이, 더 이상 올라갈 길 없어 허허로운 이는 채우고 태우고를 반복하는 것이. 


무(無)에의 바람과 몸짓만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다분히 종수의 시선이다. 겉으로 보여짐은 종수 아닌 해미와 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화자이자 주체는 종수인 것이다. 종수는 가장 평범에 가깝다. 그저 묵묵히 일상을 영위하며 앞을 고민하고 종종 뒤를 돌아본다. 그에게 벤과 해미는 앞과 뒤이고, 미래와 과거이며, 동경의 대상과 부러움의 대상인가. 무엇보다 소설가 지망생인 그에게 그들은 눈앞에 생생히 살아숨쉬는 소설적 메타포가 아닌가. 


이 셋을 두고 혹자는 연대의 희망이 보인다 하였고 혹자는 분노가 보인다 하였다. 셋은 철저히 다른 듯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라는 연대의 희망이? 그러하기에 따로 또 같이 불안과 불만과 불행을 태워버리듯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짓도, 먹고 살자는 몸부림도 사라져버린다, 의미가 없다.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리고, 해가 져 어둠에 묻혀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그런 무(無)에의 격렬한 바람과 몸짓만이 보일 뿐이다. 


와중에 홀로 실재하고 있는 듯한 종수는 어떨까. 여기저기 들쑤시며 사라져버린 이의 행적을 찾고, 매일 새벽에 달리고 달리며 사라졌을 것같은 비닐하우스를 찾고, 이 두 증발의 매개체가 될 사람을 추적한다. 어느새 생업을 포기한 종수는 이 추적들을 통해 본인의 또 다른 실존인 소설가로서의 길을 닦는다. 추적이 먼저인지 소설가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나아가는 듯 보인다. 이 모습에서 굳이 희망을 엿보는, 엿보고 싶은 이도 있을 테다. 


그건 또 다른 실재과 실존으로의 나아감인가, 해미나 벤처럼 현실 아닌 곳으로의 도피인가. 우리는 단서를 달고 있지 않은가, 자기 위로를 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투박하고 질척이고 두루뭉술할 때 사실은 선명하거나 희미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이다. 거기엔 분노도 희망도 연대도 자리하기 힘들다. 자칫 공허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청춘을 잠식하는 거대한 공허이자 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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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탠바이, 웬디>


영화 <스탠바이, 웬디> 포스터. ⓒ판씨네마㈜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베이 에리어 장애인 센터, 그곳을 책임지는 스코티(토니 콜렛 분)는 모든 친구들을 알뜰살뜰 챙긴다. 자폐증세가 심한 웬디(다코타 패딩 분)도 그중 한 명인데, 그녀는 정해진 시간마다 요일마다 장소마다 정확히 해야 할 일만 정해놓고 생활한다. 웬디는 언니 오드리의 집으로 들어가 조카 루비를 보는 꿈과 함께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하는 꿈을 갖고 있다. 


감정조절이 자유롭지 않은 웬디가 과연 아이를 잘 볼 수 있을지, 스코티는 그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오드리는 솔직히 두렵다. 오드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웬디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녀와 함께 살 순 없는 것이다. 한편 웬디는 스타트렉 광팬으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평한다. 그녀는 진정한 팬들만 한다는 창작활동도 하고 있다. 


와중에 파라마운트사에서 스타트렉 대본 공모전을 실시한다.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웬디는 열심히 대본을 완성하였는데, 그만 제출 날짜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자폐증세가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대기하라(stand by)'를 되새기며 가라앉히고 생각해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파라마운트사가 있는 LA까지 직접 대본을 들고 가기로 결심한다. 아무 도움 없이 반려견 피트와 함께 600km의 대장정에 오른다. 


웬디의 위대한 걸음걸음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스탠바이, 웬디>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밖에 없는 웬디의 세상을 향한 걸음걸음에 대한 영화이다. 유일한 혈육인 오드리조차 그녀를 케어할 수 없고, 그녀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스코티의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그녀다. 그런 그녀가 그 먼 여정을 혼자, 아니 보호가 필요한 피트와 함께 떠났다는 것 자체가 정녕 위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위대한 내디딤이랄까. 


영화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으로 제28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특별상을 타는 등 당대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서 사랑을 받은 바 있는 벤 르윈 감독의 작품이다. <세션>은 소아마비로 전신을 사용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섹스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섹스 테라피스트와 함께 이뤄나가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 '위대함'은 신선하다 못해 장엄했다. 


이 영화도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도무지 할 수 없을 것만 갖은 일을 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건 성장이라는 테마의 인간 승리를, 또는 허무맹랑한 판타지에 가까운 예쁜 동화 이야기를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다. <스탠바이, 웬디>는 어느 쪽일까. 


웬디와 <스타트렉>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현실에 기반한 허무맹랑 판타지에 가깝다는 말이다. 실상은 웬디처럼 자폐증세를 가진 이들, 나아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의 홀로서기가 과연 가능한가? 특히,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자폐증에 있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겠다. 


그래서, 영화는 <스타트렉>이라는 기가 막힌 소재를 가져온다. <스타트렉>이 무엇인가. 단순히 우주 배경의 SF 시리즈인가? 아니, 이 시리즈는 미 개척지 우주 탐험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종의 지구인과 외계인의 갈등과 이해를 중점으로 다룬다. 다양한 군상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 포인트인 것이다. 


웬디가 다름 아닌 <스타트렉> 대본 공모전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키는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불문율을 스스로 깨고 가본 적도 없거니와 가볼 생각도 못했던 600km의 대장정을 떠나는 건, 그야말로 여러 모로 기가 막힌 대비 설정이다. <스타트렉>을 향한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철저한 판타지에 가까운 <스탠바이, 웬디>는, <스타트렉>이 갖는 철저한 현실세계 지향성도 갖는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판타지나 공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고, 이 영화는 자폐아의 대장정이 아닌 남들과 다름 없는 평범한 삶 즉, 친언니네로 들어가 조카를 보며 함께 사는 삶에의 진짜 목표가 있다. 


사랑스러운 대장정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괜찮은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장 마크 발레가 연출하고 리즈 위더스푼이 원 톱으로 이끈 영화 <와일드>에서 정말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진 주인공은 홀로 대장정을 떠나며 무언가를 건져올리려 한다. 그 아무리 험한 장정이라해도 그녀가 겪었던 일보단 덜한 것 같다. 과정에 역점이 있다. 


<스탠바이, 웬디>에서 주인공의 대장정은 절대적인 목표가 수반되어 있다. 과정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누구는 못살게 굴고 누구는 살게 군다. 물론 대부분이 관심조차 두지 않지만.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 아니 이 세상에서 유이하게 그녀에게 무한한 관심을 두는 두 여인이 그녀를 쫓는다. 


스코티와 오드리가 그들이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 과정에서 깨닫는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믿음' '신뢰'를 웬디에게 보내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 웬디도 충분히 홀로서기를 할 수 있구나, 누군가를 돌보는 게 충분히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도 함께.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 여느 하이틴 영화 같은 말랑말랑함이 가미된, 단순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이 영화는 사실 굉장히 잘 직조된 세밀한 섬유 같은 영화였던 것이다. 반드시 행복한 엔딩을 맞보길 바라면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웬디와 피트의 여정과 함께 하길. 그리고 그들을 응원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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