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인의 사랑>


능력과 의욕 상실의 찌질한 시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랑? ⓒCGV아트하우스



제주도 토박이 시인(양익준 분)은 등단만 했을 뿐 동인 합평회에서 심심찮게 까이는 수준의 재능을 지녔다. 겨우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능력도 없다. 대신 가정을 이끌다시피하는 아내(전혜진 분)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늦은 나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갔는데, 아내의 노산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시인의 정자감소증이 문제가 된다. 급기야 남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과 의욕 상실의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건네준 도넛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다. 환상적인 도넛 맛에 감동을 금치 못한 것, 매일 같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도넛 가게로 달려가 도넛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 힘 덕분일까? 동인 합평회에서 소소한 합격점을 성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넛 가게 화장실에서 도넛 가게 알바생 소년(정가람 분)이 어느 소녀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인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녕 오랜만에 수음도 하고 정자수도 증가했단다. 뭔가를 느낀다. 사랑일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그 대상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소년인 것 같다. 어느 날 술취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함께 소년의 집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일만 하는 엄마 대신 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살피는 소년, 점점 그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껴가는 시인.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까? 아니, 시인이라는 존재가 특별한가? ⓒCGV아트하우스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편은 품고 살고, 누구나 시인을 동경해 마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금지된 사랑에의 욕망을 품고 살 테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평범 이하의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오히려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아니, 이전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일까. 시인이 아니라서 재단할 수 없지만,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특별할 것이다. 즉, 시인도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이겠다. 시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겐 관찰력, 상상력, 집중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사랑 양태는 셋 다 충족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력, 대상으로부터 날갯짓하는 상상력, 대상을 향한 집중력까지. 그렇다면 소년에의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화가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들


영화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의 감정선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잘 소화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자연스러운 '시인의 사랑'을 시인만의 특별함에 가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은 높다. 시인에겐 찌질하게 그지없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시인이 도저히 이끌 수 없는 가정을 대신 이끄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임신한 아내 아닌가. 그녀를 뒤로 하고 소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시인만의 사랑으로서도 용납하기 힘들다.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영화는 벌써부터 복잡한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시인의 사랑과 시인만의 사랑의 층위 위에, 그 자체로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사랑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층위가 겹친다. 동성애 코드는 덤에 불과할 정도다. 영화는 시인에서 시인과 아내, 시인과 소년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옮겨가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나름 훌륭히 소화한다. 


무엇보다 훌륭히 소화하고 또한 훌륭한 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선을 넘지 않고 나아가는 감정선에 있다. 시인과 소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지, 연민하고 이용해먹는 것인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또는 조금은 타파해보고자 잠시잠깐 다녀오는 수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천재가 만든 영화


한끗 차이로 졸작이 아닌 수작으로 '판명'난 <시인의 사랑>, 여러 면에서 가히 천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GV아트하우스



시인의 여성성이라기 보다 여성적인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시인, 다분히 남성적인 역할을 하는 아내와 다르게 성격이든 신체든 섬세하고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기에 한없이 찌질하고 능력없는 이로 보인다. 그런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에게는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다. 남성의 발로일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행보일까. 여기에서도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가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또한 수작과 졸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코드와 층위를 나열할 뿐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해 쓸데없는 상상력만 소진하게 할 뿐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산발한 코드와 층위 사이를 때론 발 빠르게 때론 정면으로 우직하게 지나가며 그것들을 이용해 상상력에 살을 붙여 평범함 위에 특별함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졸작보단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최소한 동성애 코드 위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인'의 사랑이 아닌 '여성적인' 시인의 층위를 입힌 건 아주 참신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빚어낸 코믹과 진지함의 병렬과 긴장감 어린 경계에서의 나아감은 최고의 감각을 선물한다. 얼핏 허술한듯 보이는 전체적 이미지 이면엔 그 어느 영화보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직조된 경계들의 조합이 보인다. 천재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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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공공의 적>


벌써 15년이다. <공공의 적>이라는 최고의 범죄액션영화가 나온 지. 강철중이라는 최고의 캐릭터가 나온 지. ⓒ시네마서비스



한국영화 사상 가장 성공한 캐릭터는 누구일까. 여기에 정교한 조사나 연구는 필요없을 듯하다. 단번에 생각나는 이야말로 진정 기억에 남는 캐릭터일 테니. 개인적으로, 아마 영화 좀 본다 하는 많은 분들이 설경구가 분한 <공공의 적>의 '강철중'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2010년대 들어 <이끼>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재미를 보지 못한 강우석 감독은 1990년대 <투캅스> 시리즈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바 있다. 그는 1990년대를 코미디로 수놓았고, 2000년대 들어 <공공의 적> 시리즈와 <실미도> 등 드라마, 액션, 범죄로 외연을 넓혀갔다. '강철중'이라는 캐릭터는 그 기준 또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설경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1999년 <박하사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는 그에게 강철중과의 조우는 충무로 최고의 배우로 가는 직행열차나 다름없었다. 이후 강철중에 묻히지 않고 과격한 캐릭터 스펙트럼을 선보인, 여전히 선보이고 있는 설경구의 또 다른 얼굴이자 인생 캐릭터가 아닌가. 


'강철중'만이 할 수 있는 수사


<공공의 적>에서 살인마를 집요하게 쫓는 직감적 수사는 오로지 강철중이라는 캐릭터만이 할 수 있다. ⓒ시네마서비스



비리경찰의 낙인을 가까스로 피한 강철중 경장(설경구 분)은 그럼에도 비리에 발 하나를 걸친 채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직속선배는 자살했고 반장님은 쫓겨났다. 새로 부임한 반장은 가차없이 꼼꼼한 성격이라 아주 귀찮을 것 같다. 한편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조규환(이성재 분)은 집에서는 상냥한 남편이자 아버지이지만 실상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그것도 부모님까지 죽이는...


비오는 날에 잠복근무를 하다 어쩔 수 없이 길가에 급변을 보게 된 강철중, 볼일을 끝낸 찰나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조규환과 마주친다. 그때까지는 서로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조규환은 부모님을 죽이고 나오는 길이었다. 일주일 뒤 엄청난 자상으로 숨진 채 자택에서 발견된 조규환의 부모님, 조규환은 유족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는데...


그때 조규환의 행동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하고는 뒤를 캐는 강철중. 급기야 그가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살인마라는 직감적 확신을 갖고 뒤를 쫓는 강철중. 하지만 거기엔 어설프지만 동물적 감각의 심증만 있을 뿐 그를 구속할 아무런 물증도 없다. 강철중만 하고 강철중만 할 수 있고 강철중만 해낼 수 있는 수사가 시작된다. 


<공공의 적>은 절대 용서못할 '공공의 적'을 민중의 지팡이이지만 실상 공공의 적에 가까운 경찰 강철중이 쫓아 일망타진하는 스토리라인, 기본골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 진정한 공공의 적인 조규환을 위시해 강철중과 관련 있는 각종 범죄자들과 경찰 내부 요원들까지, 모두 확고한 개성을 뿜어내는 캐릭터들로 가득 차있다. 


캐릭터로 만들어낸 영화적 재미


강우석 감독이 좇는 '영화적 재미'. 이 영화는 강철중이라는 캐릭터를 그 최상의 요소로 완벽하게 이용했다. ⓒ시네마서비스



이 영화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보다 더욱 우위에 서 있는 건 '영화적 재미'인 것 같다. 그에 맞게 선택된 요소가 바로 '캐릭터'이고. 강철중이 강철중일 수 있었던 배경에 그런 선택과 집중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캐릭터 중심이 아니었다면 강철중은 분명 튀었을 테지만 불운의 캐릭터로 남았을 게 분명하다. 


이에 비견할 만한 영화로 <타짜>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고니와 정 마담의 쌍두마차에 은은한 조연 고광렬과 강력한 조연 아귀까지, 주옥같은 캐릭터들의 나열과 열연이 영화를 그야말로 받들었다. <공공의 적>은 강철중 원탑에 사실상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잊히지 않을 만한 캐릭터성을 선보였다. 


캐릭터가 살기 위해선 절대 평면적이어선 안 된다. 입체적이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아니, 엄청나게 고된 연출과 연기가 필요하다. 이 영화는 웃기지 않은 웃긴 상황연출에, 튀는 듯하면서도 그 연출의 스펙트럼을 벗어나지 않는 계산된 연기가 함께 한다. 허름한듯, 마치 에드리브의 향연인듯 한 느낌이지만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그러며 부모님까지 죽인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엽기적 행각을 보고 있노라면, 상반된 분위기가 동시에 던지는 역설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마냥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 잡힌 연출의 계산된 미학을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캐릭터의 승리이지만, 그 뒤에 연출의 승리가 있다. 


15년 동안 차용하는 '입체적' 캐릭터의 의미


강철중이 가지는 압도적 캐릭터성에 지난 15년 동안 많은 영화들이 기댔다. 이제는 더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 ⓒ시네마서비스



<공공의 적>은 2002년에 나왔다. 자그마치 15년 전의 영화다. 하지만 기시감을 크게 느낄 수 없는 건, 이후 수많은 범죄영화들이 이 영화를 차용한 면이 크다 하겠다. 그건 이 영화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을 보여주는 한편, 한국영화의 질적인 발전이 그만큼 크지 않았다는 반증을 보여주기도 한다. 


'강철중'이라는 캐릭터가 한국영화 캐릭터의 교본과 같을 지라도, 또 다분히 입체적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만드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공의 법칙에서 보면 반드시 따라야만 할 테지만, 강철중은 이미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강철중을 위시한, 이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캐릭터 유형 또한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평면적인 인물로의 회귀도 필요해 보인다. 계속되는 입체적 인물로의 강행군은 더 이상 입체적 인물의 입체를 입체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아무 특징 없는 것 같은 일반적 인물도 사실 얼마나 많은 생각과 행동과 경험이 함께 해왔을 것인가.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연출과 시나리오와 연기에 있지 캐릭터 자체에 있지 않다.


이제는 시대와 조우하고 관객과 소통하고 자본과 협상해야 하는 시대인 만큼, 오로지 영화적 재미만 보고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공공의 적>과 같은 영화 시리즈, '강철중'과 같은 캐릭터를 또 만나고 싶다. 다시 그런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아가고 회귀하고 다시 나아가고 다시 회귀하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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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의 20세기>


'아트버스터'라 부르기 충분한 영화 <우리의 20세기>. ⓒ그린나래미디어㈜



1979년 미국 서부 산타 바바라, 약관 15세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분)는 40살 많은 엄마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분)와 함께 산다. 하숙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20대 애비(그레타 거윅 분)와 40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그들이다. 그리고 매일 같이 제이미 방에 몰래 놀러와 자고 가는, 제이미의 친구 17세 줄리(엘르 패닝 분)가 있다. 


각자 소소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들, 제이미 덕분에 또는 때문에 뭉친다. 제이미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도로시아가 혼자서는 자신이 없으므로 애비와 줄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제이미를 보살펴 주고 가르쳐 주라고 말이다. 즉, 제이미를 함께 키우자는 뜻이었다. 


애비와 줄리는 지극히 열려 있는 여성으로서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제이미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 나이대에 비해선 굉장히 열려 있는 여성인 도로시아가 보기에도 그건 굉장히 급진적이거니와 '잘못된' 방향인 것 같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머리로는 가능한대 가슴으로는 불가능한 세대 간의 간극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기엔 제이미가 전에 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는 어떨까. 우리는 왜 그들의 20세기를 봐야 하는가.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되어버린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21세기도 어언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선 한꺼번에 '옛날'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20세기를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이 영화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한 줄이 그 목적을 말해준다. "난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제이미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거울이었을 게 분명한 만큼, 그의 어머니 즉, 도로시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20세기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들과 함께 배치해 보여주고 설명하는 구조를 택했다. 1920년대생 도로시아, 1940년대생으로 추측되는 윌리엄, 1950년대생 애비, 그리고 1960년대생들인 줄리와 제이미까지. 1979년 당시까지, 오롯이 20세기를 관통하는 세대들이다. 얼핏 다큐멘터리적인 장면들인데, 미장센이 상당히 감각적이라 지루할 새가 없다. 


1980년대 이전, 진정한 '자유'의 시대


그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20세기는 1980년대 이전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도 나오지만 1979년은 적어도 미국에 한해서 '소비와 환락의 시대'의 마지막이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대적인 연설로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출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말하는 '20세기'란 1979년까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 이후 다섯 사람의 행보를 간략히 들어보면, 모두 마치 한 사람인 양 획일화된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1980년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며 '너희의 20세기'란 제목을 붙여도 되겠다 싶었다. 사회문화비평적으로 상당한 소구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영화에도 그런 소구점들이 눈에 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페미니즘'으로, 원제가 '20TH CENTURY WOMEN'인 만큼 세 여성의 생각이 얽히고 부딪히고 맺어지는 부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사이 사이 세대와 문화와 환경에서 비롯된 여러 차이들이 산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키움을 당하는 제이미뿐만 아니라 키움을 행하는 도로시아, 애비, 줄리도 모두 이 거스르기 힘든 차이들로 혼란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건 1979년까지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 20세기 덕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순 없어도 인정할 준 알았다. 거기에 편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장치들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이 영화를 수놓는데, 하나같이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각종 장치들이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상징하는 중요 요소들과 함께 다큐멘터리적으로, 그러나 감각적으로 보여준 게 가장 큰 장치라 하겠다. 오히려 시대가 아닌 개인이 보이고 기억에 남는 훌륭한 의도적 역효과를 일으켰다. 


여기에 자주 선보이며 항상 같은 느낌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에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몽환적 음악 등이 있다. 이 장치들을 한 번에 선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현실에서 벗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을 묘사할 때다. 누가 보아도 인상적일 텐데, 누군가에겐 최고의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평생 몇 번 느껴볼까 말까한 진정한 자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린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저 '20세기'라고 통칭하는 20세기도 이토록 수많은 점점들로 나눌 수 있고 수많은 시대들로 나눌 수 있을진대, 21세기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러한 면면들이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당대는 모른다. 아직 역사의 한 모퉁이로 진입하지 않았기에. 나는 바란다. '우리의 21세기'에 한순간이라도 진정한 무엇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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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비저블 게스트>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영화에서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얻게 해준 <인비저블 게스트> ⓒ㈜더블앤조이픽쳐스



성공한 젊은 사업가 아드리안은 불륜녀 로라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몰린 상황이다. 아드리안은 극구 부인하지만, 로라가 살해된 호텔방에는 아드리안밖에 없었고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거나 나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드리안은 완벽한 승률을 자랑하는 변호사 버지니아를 선임해 난관을 타개하고자 한다. 


버지니아는 오자마자 심각한 사항을 들이민다. 검사가 사건을 반전시킬 만한 증인을 확보했고 3시간 안에 출두해 증언을 할 거란 얘기였다. 아드리안은 진실을 말했다고 하며 아무 문제 없을 거라 주장하지만, 그녀는 더 자세하고 진실된 얘기를 원한다. 아드리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모든 걸 이미 알고 왔다는 듯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곤 아드리안에게 압박을 가하며 감옥에 가기 싫거든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아드리안은 비로소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로라와의 3개월 전 교통사고로 은폐하려 한 살인사건과 연관지으려 한 것이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미스터리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Like 고전추리소설


그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고전추리소설이다. ⓒ㈜더블앤조이픽쳐스



<인비저블 게스트>는 정통고전추리소설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스토리의 영화다. 영화의 시작을 장식하는 '밀실 살인'은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비밀>, 존 딕슨 카의 <세 개의 관> 등의 대표적 밀실살인사건 추리소설의 외형과 분위기를 허술하지 않게 따오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더해진 감각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의 연출은, 클래식한 반석 위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급격한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이 영화 앞에 '웰메이드'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겠다. 고전추리소설 따라쟁이 혹은 반전 영화 따라쟁이가 될 수 있는 위기를 기회로 다잡은 것이다. 


배경과 의상과 음악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큰 변화가 없는 배경, 화려하지 않고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칙칙한 느낌의 의상, 잔잔하지만 긴장의 요소가 다분한 음악. 심지어 배우들도 캐릭터를 위한 연기가 아닌 영화를 위한 연기를 한 듯했다. 이 또한 연출의 한 부분이기에, 연출자에게 심심한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거짓말에 집중하다


진실이 아닌 거짓말에 집중한다. 그렇게 얻는 건 '이야기' ⓒ㈜더블앤조이픽쳐스



영화는 '진실'이 아닌 '거짓말'에 집중한다. 진실을 말하라고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토리 외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진실을 말하라고 하는 건 '진실'에 담긴 목소리에 집중하게 만들지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건 '거짓말'에 단긴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우린 당연히 아드리안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게 벌어졌던 이야기들을 심각하게 전하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변호를 위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변호사에 의해 거짓말임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다. 자신의 똑똑함을 아주 잘 아는 아드리안이기에, 버지니아에게 완벽히 이 일을 맡길 수 있는지 떠 보기 위해 거짓말을 자유자재로 써먹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는 '한 편'과 밀고 당기는 두뇌싸움이 이 영화의 백미다. 만약 이 자리가 재판정이었거나, 상대가 한 편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자유자재의 거짓말을 써먹을 순 없었을 것이다. 즉, 이토록 재미있는 반전의 연속을 구경할 순 없었다는 말이다. 


스토리도 스토리이지만, 판 자체를 짠 능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시험해보는 상황 하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반전들인 것이다. 


악의 본성과 악을 퇴치하는 자


영화는 이야기로만 풀어가진 않는다. 악의 한 면을 보여주며 목소리도 내려 한다. ⓒ㈜더블앤조이픽쳐스



이 영화의 거대한 판, 전체적 이야기, 세밀한 조각들을 아우르는 건, 필연 또는 우연의 부정적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나는 한 인간의 악의 본성이다. 영화는 그 악의 본성이라는 것이 가진 게 많고 쌓아올린 게 높아 잃을 게 많은 인간에게 쉽게 찾아온다고 말한다. 직접적으로 보여지진 않지만, 그만큼 가지는 동안 악도 함께 차곡차곡 쌓인 게 아닐까. 그리고 한 번 감싼 악은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런 악을 퇴치할 수 있는 건 한낫 경찰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악이 찾아와 들러붙은 인간이 하지 못할 건 없다. 대대로 영화에서 악을 퇴치하는 건 지극한 개인의 지극한 복수였다. 이 영화에서도 과연 복수의 슬프고 씁쓸한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까. 마지막 끝의 끝까지 알 수 없다. 


사회가 무너진지, 믿음의 울타리가 무너진지, 개인의 방패막이 허물어진지 오래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의 치밀하고 다분히 서스펜스를 장착한 스토리와 명민한 반전은 그 의미가 퇴색된다. 대신 스토리가 이어지며 사이사이 보이는 분노, 슬픔, 위태위태함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를 진정 구성하는 것인지 모른다.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대부분이 스토리와 반전에 시선을 둘 것이다. 그게 편하고 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내려두고 다른 방법으로 영화를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런 층위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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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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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 퍼펙트 데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의 유머스럽고 황망한 하루. ⓒ마노엔터테인먼트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이 끝난 1995년 발칸반도의 어느 곳, 내부인과 외부인 콤비가 차를 이용해 우물에 빠진 시체를 끌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시체의 육중한 무게로 밧줄이 끊어지면서 실패한다. 이내 동료들이 당도하는데, 그들도 밧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밧줄이 없으면 시체를 건지지 못하고, 24시간 안에 시체를 건져 우물을 청소하지 못하면 마을의 유일한 식수가 완전히 오염될 것이었다. 그들은 튼튼한 밧줄이 필요하다. 한편, 더 이상의 오염을 막기 위해 시체를 건져낼 때까지 우물을 막아야 한다. 그건 UN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4명인 그들은 2명씩 짝지어 각각 밧줄을 구하기 위해, UN의 도움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사실 하등 어려울 것 없는 일들이다. 튼튼한 밧줄 하나 없을까? 24시간 안에 그런 거 하나 못 구할까? 그런데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인다. 시체 때문에 마을 유일의 식수가 오염되었으니 우물을 막아야 한다는 너무나도 합당한 논리로 UN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너무 쉬운 일인 듯 느껴진다. 하지만 이 또한 황당한 원칙주의를 앞세운 UN의 비논리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정말 좋지 않은 의미로 완벽한 날이다. 


유머에서 시작해 유머로 끝난다


영화는 절대 유머를 놓치 않는다. 아니, 유머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출연진들이다. 대가의 반열에 오른 베니치오 델 토로와 팀 로빈스가 각각 팀의 리더와 베테랑 요원으로 분해 극의 중심을 확실히 잡는다. 올가 쿠릴렌코, 멜라니 티에리가 허리를 든든히 받치는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다름 아닌 팀 로빈스가 가장 눈에 띄는 이유는 '유머'에 있다. 


인류사에 길이남을 '인종청소'로 유명한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을 겪은 직후라는 배경에 마을 유일의 식수가 완전히 오염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 겹치는 지극히 일촉측발의 하루를 보여줌에도, 영화는 팀 로빈스가 분한 B를 앞세워 유머를 최우선적으로 내보이려 한다. 


심각한 상황임에 분명함에도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한 유머를 주로 선보이는데, 그럼으로써 전쟁이라는 비극이 촉발한 끔찍한 사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전쟁, 그것도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난 내전의 참모습이겠지만 그럼에도 유머가 계속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유머는 한편 인간성을 포기한 이 내전에 휴머니티, 즉 인간성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이건 비단 B뿐만이 아닌 마을 사람들의 태생이 그러하다고 말하면서 영화 전체로 이어진다. 그리고 종국엔 제목과 지극히 반(反)하는 하루의 상황이 주는 아이러니한 유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유머에서 시작해 유머로 끝난다. 제목 <어 퍼펙트 데이>가 주는 아이러니함도 그 자체로 유머가 아닌가. 


전쟁의 직설적이고 모순적 끔찍함


주인공들이 놓인 상황은 내전의 막바지다. 즉, 전쟁의 한가운데인 것이다. ⓒ마노엔터테인먼트



밧줄을 찾으러 간 B의 팀에게 리더가 요청한 게 또 하나 있다. 다름 아닌 '공'. 리더의 팀이 UN의 도움을 얻기 위해 가던 길에 한 아이(니콜라)가 또래 불량 소년들에게 공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았다. 리더는 불량 소년들에게 공을 달라고 했지만, 그들이 총으로 위협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는 어느새 이 요원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지만, 이 영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의 직설적 끔찍함과 모순적 끔찍함을 모두 상징하는 게 니콜라인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데, 전쟁 때문에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빠, 엄마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다. 


내전으로 니콜라 같은 아이들은 너무 많이 양산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다시 태어난 것이나 다름 없는데, 불과 20여 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라곤 믿을 수 없는 양상이다. 여기서 더욱 끔찍한 건 '내전'이라는 전쟁이 주는 모순이다. 그 모순의 한복판에 니콜라의 가족이 있었고, 니콜라 가족의 집이 있었다. 


밧줄과 공을 찾으러 급기야 니콜라의 옛집을 찾은 요원들, 그들은 여러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한다. 집의 어느 곳엔 지붕이 없었는데, 니콜라 가족들이 달아난 사이 이웃사람이 와서 폭발시켜버렸다는 것이었다. 니콜라의 부모님이 서로 내전에서 적과 적으로 있는 계였기 때문이었다. 이웃사람들은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달아날 곳은 없었다. 니콜라의 부모님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원칙을 위한 원칙,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의 황망함


전쟁보다 더한 치명적 상황은, 원칙과 시스템에 목매인 원칙과 시스템이다.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방면은 원칙을 위한 원칙,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의 황망함이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게 사람의 목숨이거늘, 그러하기에 유일한 식수가 오염된 상황에서 처해야 할 행동은 당연히 그 원인을 제거하고 또 제거하기 전까지 임시로라도 막아놓은 것임이 당연한 것임을, UN은 그보다 원칙과 시스템을 따르고자 한다. 


물론 그들이 내세운 이유도 사람의 목숨이다. 시체로 오염된 우물 말고도 근처에 2개의 우물이 더 있는데, 그곳엔 지뢰가 설치되어 있고 아직 제거하지 않은 상태다. UN은 시체로 오염된 우물보다 지뢰 제거가 우선이라는 원칙 하에서 확고히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물론 지뢰 폭발은 당면한 눈에 보이는 최고 최악의 위기다. 무엇보다 빨리 해치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식수 오염이라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광범위하게 지대한 위기를 줄 것이 뻔한 사태보다 시급할까. 그들에게는 '식수 오염'으로 죽는 사람보다 '지뢰'로 죽는 사람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의 목표는, 그들이 하달받은 목숨에, 그들이 지켜야할 사람에, '식수 오염' 관련된 조항은 전혀 없다. 그럼 끝인 것이다. 더 이상 거들떠볼 것도 없다. 


진정 전쟁보다 더 황망한 게 이런 모습들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영위하고 전쟁 덕분에 살아가는 것들도 다름 아닌 이런 모습이다. 정녕 그들의 유연성 없고 고지식하며 완벽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면에서 그리 완벽하고, 모든 순간에 그리 완벽하면, 우리네 사는 인생의 하루하루가 어찌 완벽하지 않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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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베이비 드라이버>


완벽한 운전 실력과 비례하는 완벽한 음악 선곡 실력의 베이비. 흥이 난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완벽한 운전실력 하나로 거대 범죄 프로젝트 집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는 '베이비'(안셀 엘고트 분). 그는 범죄 행위에 직접적으로 가담은 하지 않고 오로지 차로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소싯적에 범죄 프로젝트 기획자 '박사'(케빈 스페이시 분)에게 진 빛을 다 갚을 때까진 계속 이어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그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는다. 


한편 베이비에게 절대적인 게 하나 있다. 본격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 전 그에 맞게 아이팟으로 음악을 시전하는 것. 그리고 가지각색의 아이팟을 기분에 따라 바꾸는 것. 선글라스는 기본으로 따라오는 소품이다. 하루종일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어릴 때 당한 사고로 이명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여자 '데보라'(릴리 제임스 분)가 나타난다. 살아생전 엄마가 일했던 가게를 자주 찾는 베이비인데, 그곳에 새로 들어온 종업원이다.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어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된 음악과 더불어, 운명의 여신이 점 찍어준 인연이 될 것임에 분명한 데보라가 그의 모든 것이 될 것이었다. 


음악과 액션, 그리고 캐스팅


베이비에 의한 음악, 그리고 영화의 주를 이루는 액션, 화룡정점을 찍는 캐스팅. ⓒ소니픽쳐스코리아



<베이비 드라이버>는 음악과 액션의 리듬이 완벽한 합을 이룬 초반 압도적인 아우라가 영화 전체를 지탱한다. 범상치 않은 패션과 분위기의 강도 세 명이 은행을 털고 베이비는 그저 기다리며 음악을 듣고 리듬을 탈 뿐이다. 그리고 시작되는 대탈출 드라이브, 생각은 소멸되고 장면과 음악만 남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운명인가.


영화는 얼핏 주옥같은 음악들 빼곤 할 말도 할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인다. 익히 알려진 감독의 4년 간 플레이리스트 선곡 작업으로, 영화 내적 외적 상황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치밀하게 직조한 음악들의 나열과 배열은 전무후무, 최소한 영화사에 남을 것만은 분명하다. 그 유명한 <라라랜드>가 많이 거론되는 이유이다. 


여기에 액션이 추가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것도 급이 다른 선곡된 음악들과 함께 하는 액션. 급이 확 올라가는 것이다. 오로지 자동차로만 액션이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의 오프닝씬을 뒤로 하고, 오밀조밀하면서 은근한 날 것의 액션도 뒤따른다. 유머와 드라마는 덤이지만 나쁘지 않은 수준. 자동차 액션으로만 보면 <분노의 질주> 수준은 아닌 듯하다. 


정말 화끈한 건 캐스팅이다. 케빈 스페이시와 제이미 폭스라는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믿음을 심어주고, 어린 배우들과 베테랑 배우들이 마음껏 뛰어노는 형세다. 사실 요즘 왠만한 영화에 이만한 캐스팅이 아닌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만, 이건 대놓고 킬링타임용 오락영화가 아닌가. 물론 시간만 죽이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도 죽이지만. 


베이비를 들여다보자


이 영화를 더 즐기려면, 베이비를 좀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이쯤에서 주인공 '베이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에겐 사연도 있거니와 사연이 생길 예정이고, 영화의 주요 분곡점에 그가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몇몇 주조연의 베이비와 관련된 행동변화 또한 이 영화에서 은근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베이비는 어릴 때 눈앞에서 엄마아빠가 처참하게 죽는 사고를 당한다. 그것도 서로 악다구니 쓰며 싸우다가 말이다. 사고 당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던 그는 그 사고로 귀가 울리는 이명증을 앓게 된다. 그는 어째서 운전을 하게 되었고 왜 그리 운전을 잘하게 되었는가는 이 부분에 연유가 있지 않은가 싶다. 그가 항상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이유도. 


트라우마가 생겼을 법한대 오히려 그 반대인 건 그때 그 사건을 잊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끊임없이 선곡된 음악을 들으며 귀에 울리는 소리를 지워버리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운전과 음악은 한몸인 거다. 이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가 투영된 결과라고 해도 무방하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한 에드가 라이트 감독.


십수 년 전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로 데뷔해 10년 전 <뜨거운 녀석들> 정도의 기억나는 작품을 남기고 서서히 잊히고 있던 에드가 라이트는 그야말로 베이비로 현신한듯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완벽히 보여주었다. 베이비를 들여다보면 에드가 라이트가 보인다. 


이유 있는 액션, 괜찮은 영화


액션 그 자체로는 크게 튀는 맛이 없다. 하지만 액션까지의 과정을 보면, 충분히 그 자체로 튄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여기에 베이비가 트러블메이커 뱃츠(제이미 폭스 분)에게 행하는 일격, 베이비와 뭔가가 맞는 것 같았지만 연인을 잃자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버디(존햄 분)와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았지만 베이비의 진정한 사랑에의 열의를 보고 한순간 희생모드로 돌변하는 박사의 급격한 변화는 전부 액션을 위한 액션이 아닌 마음을 위한 액션이다. 즉, 이유 있는 액션이랄까. 


이유 없는 액션만큼 허무한 게 없지만, 또 그만큼 시간을 훌륭히 죽이는 거리도 없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런 액션을 찾고 즐기며, 그에 맞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감독과 제작자들은 그런 액션을 잘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와중에, 나름 출중한 액션을 선보이는 와중에 이유까지 따지는 것이다. 


아무리 이 영화의 내용이 내용이랄 것까지도 없다 하지만, 초반을 제외하곤 크게 기억에 남는 액션이 없는 것 같지만, 에드가 라이트의 스타일이 뒤로 갈수록 부담스러워지는 것 같지만, 그밖에 거의 모든 것들에 이만큼 신경을 쓰고 이만큼 완벽하리만치 이룩해내고 있으니 어찌 를 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괜찮은 영화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는 만큼 엄청난 기대를 안은 채 영화를 봤을 때 격게될 실망 아닌 실망의 두서없는 강약에는 책임지기 싫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진 않고 대체적으로 호평 속에 'not bad' 이상의 수준이 예상되는데, 'good' 'very good' 이상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치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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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스터 콜>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 <몬스터 콜>. ⓒ롯데엔터테인먼트



2년 전 개봉해 찬사를 받은 명품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무스타파라는 현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와 사랑 이야기를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최대한의 시너지로 풀어내었다.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향연이 90여 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내내 계속되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현자 같은 이(몬스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애니메이션화되어 이해를 도우며 결국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생각나게 하는 <몬스터 콜>은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다. 현재를 기반으로 하되 다분히 판타지, 그것도 다크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이를 가능케 한다. 


'성장'과 '가족'을 주요 키워드로, 인생과 작별과 마음 등의 키워드가 뒤를 받힌다. 데인 드한이 생각나게 하는 연기를 펼친 루이스 맥더겔이 주인공 코너를, 익숙한 이름들인 펠리시티 존스와 시고니 위버가 코너의 엄마, 할머니 역을 맡아 영화의 품격을 높혔다. 무엇보다 목소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리암 니슨은 CG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몬스터에 확실한 활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진실 뒤에 찾아오는 거대한 슬픔과 깨달음


어린 나이, 하지만 너무도 힘든 삶의 코너.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통이자 통과의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사정없이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코너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또래와는 뭔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 한가운데의 큰 나무가 몬스터로 변해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서는 코너보고는 진실된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코너에게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외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코너를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딸에게 큰 가망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코너는 그게 너무나 싫다. 엄마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다. 아니 그는 엄마가 금방 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밤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코너의 일상과 묘한 병렬을 이룬다. 코너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걸까. 몬스터는 진짜일까 그저 꿈 속의 환상일까. 코너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코너일까. 그런 와중에 엄마의 병은 악화되고 코너는 점점 엇나간다. 할머니는 물론 이혼한 아빠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코너를 이끄는 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몬스터다. 코너도 그걸 느꼈는지 몬스터를 만날 12시 7분을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시계를 돌려 몬스터를 억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코너는 결국 네 번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거기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후에 찾아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어마어마한 불행이 덮치려 한다. 헤어나올 수 없다. 마주볼 수 있을까? 마주보아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불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자체로 나타난다. 우린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 놓고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곤 곧 불행을 덮어둔 채 시선은 불행이 덮친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다. 불행한 나일 뿐이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우선 불행을 마주보아야 한다. 나중에야 이미 불행한 나로 시선을 향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불행이 덮치면 모든 게 달라지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화는 말한다.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며 공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기쁨은 함께 하고 슬픔은 나누라는 말일 테다. 어렵기는커녕 지극히 쉬운 이 명제를 영화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그렇지만 유치하지 않게 그려낸다. 코너가 대화해야 하고 대화하게 되는,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들이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 어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코너가 말해야 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뭔가 크나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기가 막힌 비밀일까. 불행과 슬픔, 모순적 마음, 성장에 관련된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은 코너만의 비밀이라고만 말해둔다. 당연히 죽어가는 엄마와 항상 불안에 떨고 불편하고 불만에 차 있는 코너의 표정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리라


불행은 곧 작별이다. 작별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저래도 '삶'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너의 엄마는 죽어 간다. 죽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도 알고 코너의 할머니도 알고 코너도 안다. 즉, (죽음에 의한) 영원한 작별이 멀지 않다는 걸 다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누군가와의 작별을 해봤을 게 분명한 어른들도, 누군가와의 작별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반드시 당면하게 될 건 다름 아닌 '작별'이다. 분신과도 같은 사람과의 작별이라도 그건 명백한 진실, 하지만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진실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그 모든 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린 사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과정까지도 모두 꿰뚫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꿰뚫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이 변주되고 은유로 표현되는 장면 장면들은 이 영화의 것만도 코너의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잔잔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 현재 삶의 결이 영화 주인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잊지 않고 좋은 일 슬픈 일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곳엔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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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최승호 감독의 <공범자들>


최승호 감독이 그동안 천착해왔던 탐사 보도의 장점들을 최대한 발휘해 재밌고도 의미있는 작업을 해냈다. ⓒ엣나인필름



지난 9월 4일, KBS와 MBC 노조는 공영방송을 회복하기 위한 파업에 돌입했다. 실질적 목표는 고대영 KBS 사장과 MBC 김장겸 사장의 퇴진, 그리고 불공정 보도 시정 등이겠다. 대한민국에 큰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이전보다 좋은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와중에 대대적인 언론 총파업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뭣 모르고 봤을 땐 KBS와 MBC 모두 공영방송인 만큼 정부에 반하는 파업이기 때문이다. 


한꺼풀만 벗겨보면 알 수 있다. 두 방송국의 현 사장이 전 정권의 하수인이었다는 걸.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언론의 자유를 묵살하고 통제해왔는데, 정부가 바뀌고서도 그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이젠 현 정부의 언론 자유 불가침을 이용해 스스로가 권력의 정점이 되어 전횡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챙겨보는 프로그램을 못보는 건 불편한 게 사실이지만,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더 크다. 


이실직고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실 때인 대학생 시절까지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밝지 못했다. 다른 이들만큼 취업에 목 맸던 것도 아니었는데, 대신 주말엔 알바를 하고 평일엔 학교를 오가기 바빴다는 정도만 말해두련다. MB 시대 한복판에 난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와 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공영방송 문제 시작이 그때이고, 지금의 막장 한국 시작이 그때라는 걸 그때는 왜 알지 못했을까. 


더할 나위 없는 이명박근혜 시대 언론 투쟁기


이명박근혜 시대에 공영방송에 어떤 일이 있었나... ⓒ엣나인필름



작년 <자백>를 히트시키고는 올해 초 <7년-그들이 없는 언론>에서 조금 삐끗한 최승호 감독, 쉼 없이 <공범자들>을 들고 나왔다. 시대에 순응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콘텐츠들, 이제는 시대를 이끌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앞의 두 작품에서 작품성을 별개로 큰 감흥을 받진 못했다. 관심이 가지 않는 주제 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주제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하여 <공범자들>에도 자연히 눈과 귀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었다'. MBC와 KBS를 비롯한 한국 방송사의 '이명박근혜' 생존투쟁기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어느새 역사가 되어 버린 그 시절은 한편으론 위대하고 한편으론 서글프다. 


우리 손으로 뽑은 두 명의 대통령, 그들은 뭐가 그리 찔리는 게 많았는지 정부를 향해 울리는 북을 찢어 더 이상 북소리가 나지 않게 만들었다. 대신 자신들이 직접 만든 소리나지 않는 무(無)피막 북을 배치했다. 그렇게 북소리가 나지 않는 북처럼 언론은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독립의 기치 하나로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온 언론인들에게 그건 존재 말살과 다름 없었다. 두 발 딛고 선 땅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저항했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징계를 받았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저항에 따른 불합리적이고 부당한 처사였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도 그런 저항-징계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공범자들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속한 공영방송이 다름 아닌 나라를 망친 자들의 공범자들이었다고. ⓒ엣나인필름



정부, MB 정부의 언론 장악 시작은 2008년 이명박 취임식 당일 장관 임명자를 향한 비판적 날선 보도로 당사자로 하여금 자진 사퇴하게 만든 KBS 사장 정연주 해임 및 체포였다. 그 자리에는 낙하산을 내리고 정부에 비판적인 시사 프로그램을 폐지시켰으며 탐사보도팀은 사실상 해체시켜버린다. 


이후 YTN을 간단히 제압하고는 쇠고기 수입 문제를 집중 보도한 MBC 장악에 나선다. MBC를 대표하는 주요 프로그램의 주인공들을 차례로 낙마시키고는 엄기영 사장까지 해임시켜버린다. 그 자리에는 그 유명한 김재철 사장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 정부의 언론 장악이 사실상 완료된 것이리라. 


저항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2012년 MBC로부터 시작된 언론 노조 총파업 대결기, 그 결과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았다. 사장이 퇴진해도 이사회가 물갈이 되도, 그 자리에 또 다른 정부의 하수인이 들어올 뿐이었다. 


그리고 세월호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다. '이게 나라냐'의 결정적 한 방들이었지만, KBS와 MBC는 제대로된 보도는커녕 다분히 의도적인 오보로 수많은 생명을 지켜내지 못하고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공범자들'이었다고 당시 그들에 속해 있던 이들이 말한다. 


좌우 없이 팩트만이 존재하는 언론을 위해


자유와 독립이라는 권리와 팩트 추구라는 의무를 다한다면, 그게 언론이다. ⓒ엣나인필름



영화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을 인터뷰하고 인터뷰하려 시도한다.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고자 권력에 저항했고 저항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통제하려는 권력이었거나 권력의 끄나풀이었던 이들. 후자의 경우, 공통적으로 말을 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다. 


그들 모두가 '팩트'로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언론인일텐데 어찌 하나같이 팩트를 전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언론인이기를 포기한 지 이미 오래인 이들이겠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의 본분을 다하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크나큰 소용돌이들이다. 언론이 대상으로 하는 건 권력과 일반대중이다. 권력만이 대상이 아닌 것이다. 


언론이 권력만을 대상으로 여길 때 언론은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필시 그 질문이라는 것이 권력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거나 대답을 하기 싫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이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를 구성하는 한 축인 일반대중이 진짜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게 되고 모든 걸 소수의 권력이 주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결과, 우리나라는 지난해 한 번 망했다. 아니, 이미 2008년에 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며 그래도 다행이라고 느낀 건 그것들을 부당하다 느끼고 안팎에서 계속 저항하는 구성원들이다. 끝없는 저항과 역시 끝없이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징계에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는, 최승호 감독은 KBS와 MBC에 대해 거센 비판을 쏟아내지만 그만큼 짙은 애정을 보낸다. 결국 그들이 원 상태로, 언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에 좌우가 없듯이, 언론에도 좌우가 없다. 모두 하나하나가 독립된 개체이고 자유로운 영혼이다. 하지만 그걸 보장받지 못했을 때 그만큼 크나큰 타격을 받고 그에 연결된 수많은 것들이 근본적인 피해를 받는다. 언론을 없앨 순 없으나 언론의 본분을 망각한 언론을 없앨 순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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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러의 보디가드>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의 만남이자 두 영화 2편의 사전 맛보기라 할 수 있겠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저급하리만치 돼먹지 못한 말들의 향연에 의한 코믹, 지극한 사실성과 과도한 잔인성을 앞세워 오히려 현실감 없이 재밌게만 느껴지는 액션의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조합의 영화가 최근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킹스맨>과 2016년 <데드풀>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B급의 메이저화 또는 메이저의 B급화이겠다. 


공교롭게도, 아니 의도한 것이겠지만 두 영화에서 극단적 조합에 결정적 역할을 한 두 배우가 한 영화에서 뭉쳤다. 제목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킬러의 보디가드>. <킹스맨>의 라이언 레이놀즈와 <데드풀>의 사무엘 L. 잭슨이 그들인데, 성공적 캐릭터를 거의 그대로 가져 왔다. 


백인과 흑인의 버디 케미 코믹 액션은 1980~90년대 <리셀웨폰> 시리즈, 1990~2000년대 <러시아워> 시리즈로 상종가를 쳤다. 자신의 한계를 완벽히 깨닫고 그 한계 내에서 자기 위치성을 뽐내며 시대가 원하는, 즉 대중이 원하는 입맛에 취합하기도 하고 오히려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다. <킬러의 보디가드> 역시 다분히 킬링타임용 일회성 무비라 칭하겠지만 가히 역대급의 자기 위치성을 뽐냈다. 현재 비슷한 시기에 나와 훨씬 월등한 위용을 뽐내는 <청년 경찰>과 비교해보는 것도 한 재미겠다. 


복잡한듯, 단조로운


내용은 뭐, 적당히 꼬아서 적당히 마무리 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내용은 복잡한듯 단조롭다. 가타부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바로 인물의 사연과 함께 캐릭터성을 선보인다. 자칭 '트리플 A'급 보디가드 마이클 브라이스(라이언 레이놀즈 분)는 특급 고객을 지키지 못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마약에 쩔은 변호사 보디가드나 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재판석에 앉게 된 벨라루스 대통령이자 독재자 두코비치(게리 올드만 분), 그는 악행을 증언하려는 증인들을 계속 암살해 무죄로 풀려나고자 한다. 그 와중에 인터폴은 아내의 사면을 조건으로 내밀며 사상 최고 최악의 킬러 다리우스 킨케이드(사무엘 L. 잭슨 분)를 증인으로 내세우고자 한다. 하지만 역시나 두코비치의 표적이 되어 재판이 열리는 국제형사재판소로 향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 


이에 킨케이드 운반 책임자이자 브라이스의 옛 연인 아멜리아는 브라이스의 트리플 A급 복귀를 돕겠다는 조건으로 브라이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브라이스와 킨케이드는 30번 가까이 서로를 죽이고자 했었던 철천지 원수지간,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유일하게 서로인 만큼 실력 하나는 최고인 사이. 과연 이들은 모든 악연을 뒤로 하고 서로를 지키며 안전하게 국제형사재판소로 가서 두코비치를 끌어내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의 다양한 합(合), 케미


모든 게 완전히 다른 두 주인공의 합(合)이 영화의 모든 걸 이룬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화는 브라이스와 킨케이드의 합(合)으로 거의 모든 걸 처리한다. 전작에서 엄청난 말빨을 선보였던 그들의 녹슬지 않은 욕의 향연의 합, 길지 않았지만 절정 고수들인 그들간의 맨몸 액션의 합, 정반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른 성격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극단끼리 통하는 합, 그리고 절묘하진 않지만 적어도 삐그덕거리지는 않는 시나리오의 합까지. '케미'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중에서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결정적 이유는 다름 아닌 시종일관 쉬지 않고 나불대는 말 대결에 있다. 한마디 한마디 절대로 빠지지 않는 쌍욕은 덤이다. 그리고 그에 상반되는 느낌의 액션도 중요하다. 모든 액션이 다 그렇진 않지만, 상당히 진중하고 굉장히 사실적이다. 잔인하다는 얘기다. 


<킹스맨>과 <데드풀>은 이 지점에서 다시금 불려나온다. 관객은 이 두 영화 덕분에 수많은 전작에서 로맨틱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선사한 이 두 영화배우가 이토록 코믹하고 잔인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하등 기시감을 느끼지 못한다. 아주 친근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둘은 여자와의 관계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돕는다. 악의 화신이라 할 만한 킨케이드는 사랑의 화신이고, 고객을 지키는 게 일인 브라이스는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한다. 이 영화를 이루는 여러 모순적 재미들의 모습이 여기에도 통용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B급 정서가 다분한 '바퀴벌레'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들만의 사랑 방정식이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그렇다면, 여러 의미로 살인마(?)들인 이들이 꼼짝 못하는 여인들은 영화에서 어떻게 비춰질까? 죽음과 함께 하는 '바깥' 일을 하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죽음과 함께 한다. 즉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비록 영화 전체적으로는 조력자에 불과하지만, 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단 있는 모습을 비롯해 좌중을 압도하는 모습도 선보인다. 


전쟁 중에도 사랑은 꽃핀다고 했던가. 자칫 증언 허락 시간에 늦어 두코비치가 풀려날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브라이스나 두코비치의 암살자들이 맹렬히 쫓아오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브라이스의 속마음을 전해주는 킨케이드의 모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어이없음을 전해주기보다 은은한 웃음꽃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사랑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특히 킨케이드 부부의 사랑은 다분히 영화의 병맛적인 느낌을 극도로 살리기 위한 장치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얼굴이 찌뿌려지지 않고 박장대소에 가까운 웃음이나마 보낼 수 있는 건, 우리 모두 사랑을 향한 열망이 그만큼 크고 사랑을 대하는 방식과 눈이 그만큼 유하다는 반증이겠다. 


이 영화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이 영화를 통해 내 안의 무엇을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놓고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게 욕이든, 웃음이든, 환희든, 살인 충동이든, 사랑 열망이든,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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