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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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아기와 나>


이제 갓 제대한 도일 앞에 있는 건 아기 예준, 그리고 아내가 될 순영.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CGV아트하우스



군대 전역을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도일, 엄마와 아내가 될 순영과 이제 갓 세상에 나온 아기 예준이 있는 집으로 향한다. 고아 출신인 순영이 엄마와 모녀지간처럼 지내는 건 좋은데, 합세해서 날라오는 잔소리는 듣기 힘들다. 도일은 결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가장인 것이다. 


엄마와 순영이 일을 나간 사이 예준이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예준이의 혈액형이 자신과 순영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일은 이 사실을 순영에게 차마 얘기하지 못하지만, 운은 뗀다. 다음날 갑자기 순영이 사라졌다. 전화도 안 되는 건 물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까지 모른댄다.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을 해 예준이를 하루이틀씩 맡기고 도일은 순영을 찾아 삼만리를 감행한다. 순영이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진다. 예준이를 보는 스킬은 늘어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한다. 도일은 순영이를 찾을 수 있을까? 예준이는?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나


세상에 갓 나온 아기, 역시 세상에 갓 나온 얼마전까지 군인이었던 나. 이 조합은? ⓒCGV아트하우스



영화 <아기와 나>는 단편영화계에서 인정 받은 손태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그리고 역시 군대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의 조합이 의미심장하고 또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10여 년 전쯤 나온 장근석 주연의 아기와의 명량동거를 다룬 영화 <아기와 나>, 20여 년 전쯤 나온 부모님을 잃은 주인공이 아기인 동생을 돌보며 일어나는 그린 애니메이션 <아기와 나>가 자연스레 생각나기에, 말 그대로 세상에 아기와 나뿐만 남은 암울한 와중에 현실을 헤쳐나가는 코믹&드라마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영화는 아기와 '함께'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기보다 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이제 갓 군대를 전역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이 '저질러놓은' 일을 자신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엄혹한 현실. 아니, 그건 엄혹한 게 아니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그 이후부턴 수많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현실은 그 선택과 결과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최악의 상황,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최악의 상황에서 맞이한 결혼, 출산, 육아의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CGV아트하우스



영화의 포커스는, 감독의 시선은 도일에게로 맞춰져 있다. 특히 제목과 조금 맞지 않는듯한,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했던 식상한 기대와는 달리, 도일이 사라진 순영을 찾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그 사이에, 그 와중에 예준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게 사실이다. 결국 도일은 예준이를 택하게 될 거라는 결말이 눈에 선하고 말이다. 


흔히,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직접 길러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까. 그만큼 결혼과 출산과 육아가 인간에게 가장 무게감 있게 다가오고 가장 막중한 부담감으로 짓눌려 오거니와 가장 처절하게 힘든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어른이 되는 방법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 힘든 통과의례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어른아이 한 명이 어떻게 헤처나갈 것인지 함께 기대하고 절망하고 응원하고 답답해 하며 보여준다. 확실한 감정이입을 선사하는 동시에, 절대 주인공처럼은 되기 싫거니와 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도 선사한다. 


아기가 없더라도 살아가기 힘든 막막한 현실, 앞날이 창창한 청춘이기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청춘이기에 무섭지 않은 게 없기도 하다. 그 옆에 아기란 차라리 판타지의 영역이다. 자신을 버리고 아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진정 아기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또다른 냉혹한 현실 앞에서 치를 떨며 무릎을 꿇는다.


수작은 아닐지언정 기대감은 들게 한다


기대감을 들게 하는 게 수작이라고 인정받는 것보다 좋을지도? ⓒCGV아트하우스



저예산 독립영화 중에 유난히 수작이라고 평가맞는 것들이 많다. 지극히 감각적이고 시대와 소통하는 작가와 연출자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일 테다. <아기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길이남을 수작, 한 해 또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수작 독립영화라 말할 순 없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감독이나 배우들에게 기대감을 들게 한다.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이 길이남을 명작 한 작품만을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이들은 앞으로도 자주 또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 이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 같은 기대를 주는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장 확실하게 심어준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데, 그 프로페셔널한 롱테이크가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길이남을 큰일로 세상을 이제 막 경험한 이들의 마지막 장면은, 그 뒤에 이어질 수없이 많은 질곡들을 암시한다. 개인적으로 얼마전에 큰일을 저질렀고 누군가의 도움 아닌 도움으로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엄청난 압박이었는데, 실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배운 게 많다. 


누구나 이렇게 살아간다. 겪고 겪고 또 겪으면서. 그 와중에 뭐라도 얻으면 좋으련만 대부분 남는 건 상처 뿐이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건, 그 자체가 성장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수작(秀作)이 아니라도 좋다. 이 영화는 나에게 손수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해보지 못할 경험을 건네준 수작(手作)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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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안생과 칠월, 두 소녀의 14년 우정의 나날을 그린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안생과 칠월, 열세 살에 우정이 시작된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칠월과 달리 집안은 잘 살지만 외로움에 떨며 빗나가기 일쑤인 안생이다. 그래서 안생은 칠월의 집에 자주 놀러가고 칠월의 엄마 아빠는 안생을 친딸처럼 생각한다. 3년이 지나 칠월은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안생은 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그들의 인생이 갈린다. 그리고 열일곱에 칠월은 가명에게 첫사랑을 느낀다.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모범생 가명은 모범생 칠월보다 자유분방하고 털털한 안생에게 끌린다. 이성으로서 끌리는 것인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자유와 행할 수 없는 분방함을 향한 열망인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이 되어 안생이 고향을 떠나 북경으로, 밖으로 향할 때 칠월은 알게된 듯하다. 칠월과 가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 4년을 떨어져 지낸다. 서로 자신들의 현재를 자랑하다가 지루해 하다가 낙심하다가 절망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난다. 가명이 칠월을 떠나고, 안생이 칠월에게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성인,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의 삶이 너무나 달랐던 걸,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비하하기 쉬워졌다. 소울메이트의 비참한 말로인가, 다들 그렇게 되는 것인가.


두 소녀의 아름다운 연대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국영화로는 믿기 힘든 포스를 뿜는다.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도둑들>에서 조니 역을 맡는 등 많은 작품에서 얼굴을 선보여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배우 증국상의 연출작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두 소녀의 아름다운 연대기다.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인 증지위의 아들로도 유명한 증국상의 이 작품은, 중국영화로 믿기지 않는 포스를 시종일관 내뿜는다. 


특히 인물들 간의 미묘한 심리 표현, 복잡한듯 중심 잡힌 각본, 세련된 촬영 등에서 빛이 발하는데, 캐나다 유학파 출신의 감독과 현존 중국 최고의 청춘 작가의 원작에 두 여주인공의 상반된 삶을 대변하기 위해 투입된 4명의 여성작가들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확실히 담보된 대중성에, 최대치로 끌어올리고자 한 작품성이 더해진 것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의 인물들(조연)이 출연하는 이 작품에 두 주인공 안생과 칠월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데, 그 둘만으로도 영화가 전혀 비어 보이지 않는 건, 허전해 보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도 대단하다. 나름 남주인공 가명이 이 둘 간에 일어날 사건사고들의 도구나 소품처럼 쓰이고 있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덕분에 시종일관 세련된 멋을 풍기는 화면이 때론 더 빛나고 때론 그 힘을 캐릭터와 스토리에 실어준다. 그들의 대단한듯 별거 아닌듯 청춘의 순간순간들이 이 멋스러운 화면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서양 영화를 따라하는 듯한 느낌을 다분히 풍기지만, 조악한 측면은 없고 잘 배워 잘 따라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진정한 여성주의


정반대의 삶과 생각을 가진 듯한 안생과 칠월. 진정한 여성주의는 그 둘의 합이 아닐까.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분히 여성주의적이다. 영화의 핵심인 두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우며 고전적인 여성상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사실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소울메이트로 굉장히 입체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칠월은 중산층의 안정적인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며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으로 자란다. 그렇게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 지극히 고전적인 여성상을 지닌 채 말이다. 반면, 안생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며 어딘가 삐뚤어진, 그러나 생각이 깊은 이로 자란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손과 발로 모든 걸 체험한다. 그녀에겐 남성, 여성의 나눔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얼핏 칠월의 인생이 재미없고 지루해 별볼일 없을 정도로 느껴진다. 반면, 안생의 인생은 스펙터클하고 화려해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삶을 부러워한다. 우리네 인생은 그들 사이의 어디쯤엔가 일 텐데, 영화가 이처럼 양극단을 보여주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정한 여성주의란 안생이나 칠월의 양극단에 있지 않다. 그들이 한몸과 같은 소울메이트인 것처럼, 여성주의란 여성으로서의 모든 삶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때 반드시 맞게될 파국은 안생과 칠월만의 것이 아닌 모든 여성의 것이다.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그리다


영화는 안생과 칠월을 통해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단순한 로맨스 영화도, 치밀한 심리 영화도, 루즈한 인생 연대기 영화도, 청춘의 아름다운 한때를 그린 영화도 아닌, 수많은 여성의 인생 그 한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러면서도 감각적으로 그려낸 영화가 이 영화이다. 누구도 안생과 칠월, 그들의 인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청춘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시작되고 그들의 청춘 끝자락에서 끝난다. 어쨌든 외형은 청춘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점, 그 이후의 인생을 알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그들의 청춘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 고마웠다. 청춘은 완성되지 못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은 그 절정이었다. 


누구에게나 눈부시게 찬란했던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영원하진 못하는 법, 빛 한 점 느끼지 못할 만큼 처절하게 힘들었던 날도 있다. 인생은 그런 날들의 무한반복이다.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고 하는 게 아닐까. 멈춰 있지 않으니까, 끊임없이 나아가니까. 그러면서도 멈춰서 주위를 살피고 뒤를 돌아보기도 하니까. 더할 나위 없다. 


안생과 칠월은 서로를 부러워하지만, 난 안생과 칠월이 부럽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분신으로, 서로 자신을 온전히 줄 수 있지 않은가.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온전히 자신을 버릴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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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배드 지니어스>


태국에서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놀랍다. ⓒ(주)팝엔터테인먼트



태국영화하면 '장르'가 떠오른다. 매년 우리나라에도 한 편 이상 개봉될 정도로 많은 나쁘지 않을 퀄리티를 자랑하는 공포물, 2000년대 중반 '옹박' 신드롬을 일으켰던 액션 등이 그렇다. 거기에 작년말에는 <선생님의 일기>라는 괜찮은 로맨스도 선보였다. 적어도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배드 지니어스>는 태국영화의 손꼽히는 행보, 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역시 태국영화답게 장르적 특성을 살린 '스릴러' 장르로, 세계 영화산업을 선도하는 할리우드 영화 장르 중에서도 가장 할리우드적인 '케이퍼 무비'를 선보인다. 치밀한 각본과 기민한 촬영기술을 앞세워야 하는 만큼 어려운 작업이다. 


영화는 여러 가지 의미로 탈 태국을 표방한다. 나아가 탈 아시아까지 성공하는데, 지금까지 보여왔던 태국영화의 다분히 태국적인 특성-지역석 특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게 큰 몫을 했다. 소재부터가 얼마나 보편적인가. 더불어 말하려는 주제 또한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 한번 들여다보자. 


참신한 커닝 범죄 케이퍼 무비


커닝을 이용한 범죄라는 참신함에만 기댄 것이 아닌 할리우드적 케이퍼 무비다. ⓒ(주)팝엔터테인먼트



선생님이었던 홀로된 아빠를 둔 린은 뛰어난 학업성적을 자랑하는 천재소녀다. 아빠의 성화를 못이겨 공짜로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공부 못하는 금수저 그레이스와 친해져 시험 때 100점 답안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얼마후 만나게 된 그레이스의 남자친구이자 금수저 이상의 집안 자제 팻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다. 


린의 뛰어난 학업성적을 바탕으로 공부 못하는 금수저들을 모아 시험 때마다 집단 커닝을 실시하는 것이다. 과목당으로 엄청난 돈을 받고 말이다. 린은 공부를 잘하지만 유학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금수저들은 돈이 남아돌지만 좋은 시험성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린과 성적 수위를 다투는 뱅크에게 들켜 망하고 만다. 


자숙하면서 시간이 흘러 모두들 평범하게 지내고 있는 와중, 그레이스가 팻의 부모님에게 오해를 받아 미국 대학 입학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린에게 부탁을 청하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업을 제안한다. 시차를 이용한 대규모 커닝, 린이 미국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짧은 시간 안에 태국에 전달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이 사업, 린 일행은 뱅크에게 제안하고 뱅크는 엄청난 돈 앞에서 굴복한다. 두 천재라면 힘들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얘기만 들어도 심장이 쫄깃한 시차를 이용한 커닝, 어떻게 될까? 성공? 실패? 영화는 케이퍼 무비의 핵심인 시종일관 긴장 상태를 절대적으로 지키며, 보는 이들에게 무자비한 두근두근 폭격을 가한다. 


웰메이드 태국영화의 현주소


그야말로 웰메이드 태국영화의 현재가 아닌가 싶다.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가히 천재소녀 린에 의해 거의 모든 게 진행된다. 특히 모든 긴장감은 오로지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 우선 그녀는 천재소녀답게(?) 음(音)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데, 그걸 첫 번째 집단 커닝에 접목시킨다. 사지선다 정답을 피아노 선율을 치는 손가락 움직임으로 치환시킨 것이다. 그래야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다. 


커닝의 성공과 실패는 병가지상사, 그 발상이 기발하고 그 과정이 참신하다. 도덕성 여부를 차치하고 그들의 커닝 여정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 번 이상은 커닝을 해본 역사가 있기 때문일까. 그건 전 세계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대표적 보편 중 하나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케이퍼 무비에서 우린 그런 느낌을 받는다. 손을 맞잡고 땀을 흘리며 제발 걸리지 말라고. 성공한 대표적 케이퍼 무비들, <오션스 일레븐> <나우 유 씨미> <베이비 드라이버> <범죄의 재구성> <도둑들> 등을 봤을 때 느꼈음직한 걸 이 영화 <배드 지니어스>에서도 느끼는 것이다. 가히 웰메이드 태국영화의 산증인이다.


지나치지 않는 사회비판적 요소


이 영화가 웰메이드라고 생각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회비판적 요소다. ⓒ(주)팝엔터테인먼트



이 영화가 웰메이드의 표본과 가깝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에는, 역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한 몫 한다. 애초에 실화를 참고해서 만들었다는 각본이니만큼, 영화의 주를 이루는 집단 커닝 사건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즘 '악당'들은 모두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어 사건을 저지른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이들인 린과 뱅크는 흙수저 또는 흙수저에 가까운 출신인 반면, 이 사건의 후원자이자 수혜자들인 그레이스와 팻을 비롯 수많은 이들은 금수저이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는 흙수저와 갖고 있는 게 돈밖에 없는 금수저의 거래는 얼핏 합당하고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인다. 


케이퍼 무비로서의 재미를 출중히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씁쓸함을 깊숙이 느끼는 모순이 영화 보는 맛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생각해야 하는 건, 이 사건의 당사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적인 사회 다수다. 그들을 생각하면 하지 말아야 할 건 분명히 보인다. 


모든 이들에겐 모두에게 해당하는 고충이 있다. 그 고충들을 해결하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특정 간 서로의 고충을 서로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건 하등 잘못된 경우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당사자들 말고 다른 이들의 인생이 걸려 있는 경우나 다른 이들에게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경우나 다른 이들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등, 즉 사회정의를 헤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 영화가 건드리는 부분이 그런 부분들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의 내외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야기에도 다양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영화라면 언제고 환영이다. 단순한 킬링타임용 이상의 영화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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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프레지던트>


평범한 '박사모'를 들여다본다. ⓒ인디플러그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세대에게 옛날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 당신들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그보다 살 만해졌지만 엄청난 고생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후자의 끝은 박정희 또는 전두환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추모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흠모의 기운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또 하나 명백했던 건, 모두 평범하다는 것. 


작년 이맘때 축제 같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갔었다. 한번은 너무 일찍 도착해 시청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르신들의 행진에 휩쓸릴 뻔했다. 박사모 집회였던 것 같은데, 어느 어르신께서 아내와 나에게 박근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우린 당황했지만 그분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평범해 보였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쓰러진 10월 26일에 개봉해 시작부터 모종의 의미부여를 행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박사모 회원 세 명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는 알고 싶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은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이 진정 바뀌고자 한다면 알아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 


박정희와 육영수를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는 그들


평범한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신다. ⓒ인디플러그



그들은 청주에 사는 조육형 씨와 울산에 사는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박정희 사진에 절을 올리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가난을 철퇴하여 지금에 이를 수 없었다는 생각, 자신으로 하여금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가난 철퇴 선봉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고마움, 박정희를 향한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도리다.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도 박정희를 향한 마음이 조육형 씨와 같다. 배고픔을 해결해준 고마운 분, 인간답게 살게해준 감사한 분. 육영수를 향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천사같은 모습에 천사같은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천사같은 행동들은 그때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 그 자체다. 총탄에 쓰러진 두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 누가 뭐라 하든 박정희와 육영수는 마음속 영원한 은인이다. 


그들에게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 박근혜는 한 가족이나 다름 없다. 가족이라면 그 어떤 일을 저질러도 편이 되어줄 수 있거니와 편이 되어야 한다는 정서의 일환으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박근혜를 편든다. 거기에 어떤 고뇌나 갈등도 없다. 그건 일종의 종교,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는 숭배의 대상, 박근혜는 한가족이자 동정의 대상이다. 


미스 프레지던트. myth, mis, miss


제목 <미스 프레지던트>는, 박정희 신화와 잘못한 나쁜 대통령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디플러그



박정희는 한국근현대사의 절대적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그 그늘이 한국에 드리우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화적(myth)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박정희 신화는 그가 죽은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린 끊임없이 그 신화를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우상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분명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그의 후광을 업고 당선되었던 박근혜, 수많은 불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치명적으로 배신한,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두 번째다. 그들은 나쁜(mis)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그리워(miss)한다. 박근혜가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려지고 구속 수감 중임에도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향한 그리움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를 향한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변한다는 건, 곧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박정희와 육영수를 숭배하고 그들과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잘못된 대통령을 뽑아 잘못을 저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모두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들을 진정 숭배한다기보다 그 험난한 시절을 헤쳐나온 자신들의 업적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세대들도,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의 의미


아무 개입없이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디플러그



영화엔 어떤 입장도 없어 보인다. 감독이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를 연출해 풍자의 끝을 보여준 김재환 감독이기에 상당히 의아하다. 감독이 보기에 이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주인공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풍자의 대상으로 택한 이들은 미디어, 현직 대통령, 교회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했기에 풍자를 했던 게 아닐까. 


반면, 조육형 씨와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물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겠지만, 미디어, 대통령, 교회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일 테다. 다만, 앞서 내놓았던 작품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란이 예상된다. 


힘있는 자들을 향한 명백한 풍자는,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 또는 당사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우려가 있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예견된 수순이다. 반면, 이 영화처럼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는 행위는 자못 이해가 안 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받거니와 모두에게 지탄을 받을 게 자명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잘 알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속깊이 들어보고 들여다봄으로써 거대한 통합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국을 위해 한몸 희생한(?) 김재환 감독. 그렇지만, 이 영화 하나로 그 갈등의 골이 얕아지기는커녕 더 깊어질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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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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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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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으로도 힐링을 주는, 흔치 않은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이수C&E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서의 뜬구름 잡는 희망섞인 대화에서, 썩어가는 포도와 출근 준비를 하는 찌든 얼굴의 남자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좁은 사무실에 우루루 모여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들까지. 아오야마는 홀로 도쿄에 올라와 자취를 하며 오랜 취업활동 끝에 영업사원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상사에 의한 일방적인 갈굼, 당연히 수당을 받을 리 없는 야근, 한밤중까지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로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다.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던 그, 너무 힘들어서 쓰러진 것인지 자살하려고 했던 것인지 지하철이 들어오던 찰나 선로로 떨어지려 한다. 간발의 차이로 그를 살려내는 이, 야마모토. 다짜고짜 만면의 웃음을 띄며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러며 한잔 하러가 서로를 알아간다. 그것도 모자라 아오야마가 쉬는 날을 이용해 아오야마의 고루한 외모를 세련되게 바꿔준다. 이후 일이 잘 풀리는 듯한 아오야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계약건을 거의 다 끝내놓고도 마지막에 가서 황당하고 어이없기 그지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급기야 부장의 명령에 의해 그 계약건은 에이스인 이가라시에게 맡겨진다. 한편 야마모토가 성가신 아오야마인데, 우연히 길을 가던 야마모토의 평소답지 않은 우울한 모습에 전격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다름아닌 그가 3년 전에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한다. 이게 무슨?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란?


'제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시대에 '희망'이란 존재할까. 있다는 그건 무엇일까. ⓒ이수C&E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삶의 면면, 특히 취업을 다루는 콘텐츠가 정녕 부지기수다. 사실 2008년 전세계 금융 위기가 있고 나서 몇 년 후인 2010년대 초반에 절정으로 유행했기에 이젠 조금 시들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취업시장에서 회사로까지 침투했으니,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그 이야기다. 


물론 회사에서 힘든 이야기는 비단 지금뿐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위기 시대가 아닌 성장일로 시대 때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 한몸 바쳐 희생하는 조직체였다. 지금의 객체적 개념과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나때는 말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장광설이 나오는 것일 테다. 


지금은 제로성장, 아니 마이너스성장 시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금, 육체적 고통 이전에 정신적 고통이 기본적으로 수반된다. 압박을 하고 압박을 당하는 모양새가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어떠냐고? 절대적 강도가 줄어들었을 뿐, 여러모로 발전된 현대사회의 기준과 일치하진 못한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사는 게 뭐냐는 질문에 희망을 갖는 거라고 대답하는 대화로 영화가 시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게 어떤 성격일까. 더 나은 회사원이 될 거라는 희망?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희망? 부디 후자이길 바래본다. 


치가 떨리게 공감되는, 회사의 악랄한 일들


영화는 신입사원이 겪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회사 상사의 술수를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후반에 있을 감동 코드를 배가시키고자 한다. ⓒ이수C&E



영화는 아오야마가 야마모토 덕분에 보다 밝게 바뀌어가는 만큼 회사에서의 일로 더욱 힘들어 한다. 그러며 한순간 눈물 쏙 빼놓는 감동도 선사하는 걸 잊지 않는다. 전형적이리만치 일본적인, 즉 밝은 것이든 악랄한 것이든 감동적인 것이든 극단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중 가장 와닿는 건 단연 회사에서 겪는 악랄한 일들이다. 


같은 회사원으로 공감을 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오야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오직 상사만을 위해 야근까지 완료한 후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 그저 쉬고 싶고 자고 싶고 내일 따위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여기서 가장 악랄한 건 업무시간 이후에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다. 


믿기 힘든 실수로 중요한 계약건이 날아간 아오야마에게 내려진 명령, 에이스 이가라시에게 계약을 통째로 넘겨라. 그리고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하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여기선 인격살인과도 같은 사과 방식보다 몇 개월 동안 공들인 계약건이 성사 직전 통째로 넘겨졌다는 게 더 악랄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오야마가 자살을 생각하는 건 그리 와닿진 않는다. 극의 전개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반면, 다음날 기다리고 있을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생각하느라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말하면서도 잘 수 없는 아오야마의 잠자리는 치가 떨리게 공감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잘 수 없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전형적인 현실공감판타지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론으론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건... ⓒ이수C&E



우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야마모트를 쫓아가 들여다봐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도 아마 아오야마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게다. 그가 아오야마에게 건네는 별 거 아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실된 말들에서 행간을 읽어볼 여지가 있다. '무슨 일 있니?' '잠은 잘 자니?' '밥은 잘 챙겨먹고?'


저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마 가족, 또는 가족 같은 사이뿐이지 않을까. 영화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 가족의 소중함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회사원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까지. 전체적으로 본연의 맛을 잃고 조금 삐그덕대는 느낌이 들지만, 한순간에 짧고 굵은 감동의 눈물로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팀 에이스 이가라시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불만과 불안 등이 일찌감치 겉으로 표출되어 갈등이 이어졌으면 단순히 신입사원의 이야기가 아닌 회사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영화 전체적으로 더욱 입체감이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러기엔 이 영화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데 있긴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는 아오야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처럼 쉽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긍정적 공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 영화를 보는 순간이나마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테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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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어메이징 메리>


오랜만에 힘뺀 마크 웹 감독이 역시 오랜만에 힘뺀 크리스 에반스를 주축으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어메이징 메리>로 돌아왔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몸에서 힘을 빼면 더 좋은 연기를 선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알듯 말듯한 조언이 있다. 비단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통용되는 조언이겠다. 이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텐데, 진짜로 힘을 잔뜩 들인 것들만 맡다가 가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것을 맡기도 한다. 분위기 전환이랄까, 쉬어가는 시간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일까. 


마크 웹 감독은 데뷔작 <500일의 썸머>로 또 하나의 현대판 클래식 주인이 되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특유의 감각으로 특별함을 끄집어 냈다. 그런 그를 할리우드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바, 그만의 감각만 쏙 빼어내 블록버스터를 만들게 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 2>다. 극히 나쁘진 않았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어메이징 메리>라는 작품으로 데뷔적의 감성과 감각을 다시 선보이려 한다. 조만간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로맨스 영화로 또 한 번 더 찾아온다고 하니, 그 전초전이라고 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히어로 영화들로 근육질을 뽐내며 미국을 지켜내느라 진땀 흘리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도 함께다. 둘이 나란히 힘 뺀 와중에, 연기파 배우 두 명과 천재 아역배우 한 명이 자리를 지킨다. 


치졸한 법정 공방, 그래도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가족끼리 벌이는 법정 공방, 참으로 치졸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메리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플로리다의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에서 배를 고치며 살아가는 프랭크(크리스 에반스 분), 그에겐 여자 아이 한 명이 있다. 다름 아닌 여조카 메리(멕케나 그레이스 분)인데, 그녀는 불과 7살 짜리 수학 천재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를 영재 학교가 아닌 평범한 학교에 보낸다. 메리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소소할 수도 심각할 수도 있는 사건을 일으킨 메리는 쫓겨날 위기 또는 영재 학교로 갈 기회를 갖지만, 프랭크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이 평범한 학교에 메리가 계속 다닐 수 있게 한다. 얼마 후 메리의 외할머니이자 프랭크의 어머니 에블린(린제이 던컨 분)이 찾아온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로, 메리 역시 수학자로 크길 바란다. 


에블린과 프랭크는 메리의 앞날을 두고 대립하고 급기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다. 그 대립 사이에는 에블린의 작은딸이자 프랭크의 여동생인 천재 수학자 다이앤의 자살이 있다. 에블린은 다이앤이 못다 이룬 수학자의 꿈을 메리가 이어 받게 하려는 것이고, 프랭크는 다이앤의 불행한 삶과 죽음이 메리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학 천재 메리를 둘러싼 할머니 에블린과 삼촌 프랭크의 치졸해 보이는 법정 공방이 기본 골자인 이 영화는, 더 많은 시간을 메리를 향한 두 혈육의 보다 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진심어린 걱정과 고뇌에 투자한다. 물론 거기에는 각자 자신의 상황과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향한다. 마크 웹의 감각이 이를 보좌한다. 


마크 웹이 선사하는 소중하고 예쁜 순간들


마크 웹이 <500일의 썸머>에서 보여주었던 순간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선보인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와 가족들 간의 치졸한 공방, 힘든 과거에 기인한 현재의 방향성 다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를 평범하게 만드는 이런 소재들이야말로 마크 웹이 감각적으로 잘 다룰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인데, 쉽게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잘 포착할 줄 안다. 


메리는 그 나이대에 걸맞게 놀며 플로리다의 자연과 벗하는 허허벌판과 해변도 좋아하지만, 수학 천재로서의 기지를 한껏 뽐내며 보스턴의 최첨단과 최신식이 주는 멋스러움과 세련미도 좋아한다. 그처럼 프랭크 또는 에블린과 함께 하는 시간은 메리에게도 소중하고 예쁘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소중하고 예쁜 순간을 선사한다. 


그러며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들은 다름 아닌 프랭크와 에블린의 생활과 생각의 연유다. 프랭크는 메리만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플로리다 구석에서 지내고 있다. 그에게도 그만을 위한 생활이 필요한 법, 마크 웹은 그 순간들에 <500일의 썸머> 감성과 감각을 살짝살짝 녹여 놓는다.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일상. 


한편, 에블린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 오직 딸 다이앤의 과거와 손녀 메리의 현재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뿐이다. 역시 천재였지만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한 아들 프랭크에겐 그래서 아무런 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보다 공에 자신의 인생을 쏟은 에블린의 대를 이은 공적 투신 열망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 


중도적 방향과 방법, 그리고 기본


메리의 인생은 누구도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리디 어린 본인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럴 땐 중도와 기본이 필요하겠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너무 어린 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어른들의 메리를 향한 진심어린 일편단심 또는 그것을 빙자한 자신의 삶을 향한 인정에의 열망에 따라 휘둘리고, 결국 법원의 판결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찾아야 할 방법은 '중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녀와 같은 천재의 사회적 공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양쪽 모두를 열망하고, 앞으로도 열망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외로운 천재의 내재적 비극, 또는 외톨이 천재의 외부적 비극 모두의 안타까움을. 영화는 천재의 삶을 공적, 사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의 앞서 선행되어야 할 삶의 기본이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뜻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 가족이라는 끈 하나로 자신의 모든 걸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뭐든지 일방적으로 몰아가서 후회가 남을 수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등 말이다. 


여러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한 가지 길로만 평생 갈 수도 있고, 수많은 길들을 오갈 수도 있으며, 길 아닌 곳을 헤치며 갈 수도 있다. 아니, 멈춰서서 관망할 뿐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 우리 어메이징한 메리에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그녀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뭐든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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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주키퍼스 와이프>


제목과 포스터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비해 엄중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 ⓒ영화사 빅



흔한 소설의 구성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또는 '기-승-전-결'을 소설을 위시한 콘텐츠들에서 그대로 발현하는 건, 이제 식상하다 못해 능력의 부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롭고 참신한 걸 원하는 이 시대에 형식의 파괴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보수(변하지 않는 것)에 가깝고 보수가 편한 인간의 성향에 부합하는 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구성과 형식이다.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최고의 화두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는 샛길로 새면 안 되는 성역이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열연한 <주키퍼스 와이프>는 동물을 향한 무한애정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비당사자이지만 가장 위험하게 관련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통적인 구성방식을 정확히 따른다. 평화-위기-위기 속 평화-파멸에 가까운 상황의 연속-모든 걸 되돌려 놓은 결말. 


홀로코스트 당시의 위대한 이야기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당시 300명의 유대인을 숨겨주고 탈출시킨 자빈스키 부분의 위대한 실화를 다룬다. ⓒ영화사 빅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운이 조금씩 감돌며 전쟁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직전이다. 바르샤바 동물원을 운영하는 안토니나 자빈스키(제시카 차스테인 분)와 얀 자빈스키(요한 헬덴베르그 분) 부부, 정녕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동물을 향한 한없는 애정과 구성원들을 향해 불어넣는 활기와 자비가 함께 한다. 


어느 날, 감지는 하고 있었지만 무서운 현실로 다가온 전쟁. 동물원은 파괴되고 동물들이 도망가거나 죽는다. 가까스로 재건하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물학자 루츠 헤크 박사(다니엘 브륄 분)가 히틀러 수석 동물학자의 신분으로 바르샤바 동물원에 온다. 동물원을 무기고로 사용하려니 희귀동물들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루츠가 장기적 '적'이 될 것이 확실한 가운데 모든 유대인들을 게토로 강제이주시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개 중에는 물론 자빈스키 부부와 마음을 나눈 친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 명만 지하실에 숨겨놓기로 하지만, 유대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들은 돼지 사육장을 차린 후 게토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돼지에게 준다는 명목 하에 게토로 들어가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300여 명의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탈출시켜준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빈스키 부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진 '쉰들러'의 위대한 이야기가 단번에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에서는 동물을 향한 사랑과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과 페미니즘이 함께 한다. 


그동안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시선


유대인 이전에 동물을 향한 무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치의 참화를 이겨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사 빅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수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주제다. 그걸 영화로 치환하면, 안타깝게도 '클리셰'가 되기 일쑤이다. 어디서 본듯한...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은 보고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는 적어도 나에게 그때그때 다른 소회를 남긴다. 끔찍함,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포 등. 분명 클리셰 '이상의' 진부함을 선사하지만, 클리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맥락에 서 있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주키퍼스 와이프>에서의 홀로코스트는 참으로 담담하다. 영화 전체의 잔잔함을 뛰어 넘는 담담함인데, 그저 유대인이 아닌 핍박받는 유대인을 향한 위로의 차원이다. 하지만 강제이주 당해 죽음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유대인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땐, 그 잔잔함과 담담함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이는 곧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과 불의를 향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핀다. 


동물이 곧 가족이고, 가족이 곧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곧 핍박받는 모든 이들의 대변자라고까지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미친다. 그 자비의 손길은 모든 것에 뻗치는데, 그 시작이 다름 아닌 동물이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보아 왔던 홀로코스트와 상당히 다른 결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동물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까지


영화는 주인공 자빈스키 부인을 매개로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영화사 빅



영화는 이와 함께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동물원이 주배경인 만큼 동물이 주된 소재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자체로 그리 중요한 소재는 아니다. 루츠 박사가 자빈스키 부부, 특히 안토니나에게 접근하는 도구 정도로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안토니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구 정도. 


심지어 동물은 페미니즘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까지 쓰인다. 희귀 물소의 암컷과 수컷을 강제로 교미를 시켜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루츠 박사의 우생학 발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당연한듯 버려지는데, 안토니나가 자신의 불안정한 안위에도 챙겨준다. 


'밖'에서 피말리는 작업을 하는 얀이, '안'에서 쉬운 일이나 하며 루츠와 놀아나기까지 하는 안토니나를 구박하는 모습에서도 페미니즘 목소리의 단 면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급한 시기에 안과 밖을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이며, 밖 못지 않게 안에서도 피말리는 작업이 계속 되거니와 안토니나가 루츠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얀도 어쩌지 못하는 루츠의 강력한 뒷배가 있지 않은가.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생각거리 또는 소재와 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화해 선보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성공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몇몇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보여줌으로 그칠 용의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에 부정적 시선을 던질 이유도 없고 빈틈도 없다. 최고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악과도 거리가 먼 한없이 보통에 가까운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그저 보고 그저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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