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플립>


북미 개봉 폭망 이후, 7년 만에 압도적인 지지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플립>. ⓒ팝엔터테인먼트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소식이다. 영화 <플립>의 북미 개봉 7년 만에 국내 개봉(재개봉이 아니다)이 그것인데, 그동안 국내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봉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북미에서의 압도적인 폭망 때문일 텐데, 2010년 개봉 당시 1400만 불이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이고서 1/10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으니, '북미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밥먹듯이 써먹는 배급사들 입장에선 들여올 이유가 없을 만도 하다. 더욱이 압도적인 지지로 이미 DVD 등으로 볼 사람은 다 봤을 거란 계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리스트에서 종종 봐왔으니. 감독 롭 라이너는 올해로 70세가 되었다. 2010년에도 이미 60대였던 건데, 어쩜 이런 달달하고 귀엽고 풋풋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의 필모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적지 않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일단 2007년의 <버킷리스트>를 차치하고서라도,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이 그의 작품이다. 


로코의 시초가 만든 첫사랑 로맨스의 전형


롭 라이너 감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로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런 그의 첫사랑 로맨스가 기대되지 않는가? ⓒ팝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에 속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전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만들어낼 것이다. 롭 라이너가 1989년 내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태초의 전형이다. 이후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물론 2010년대까지 영화세계를 주름잡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초이다. 


그야말로 감각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해당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영화 <플립>은 그의 감각적인 노련함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전형적이다' '식상하다'라는 말을 들을 요지가 있을지언정 그 사랑스러움으로 모든 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마냥저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길 건너에 이사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7살 여자아이 줄리. 특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브라이스는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런 관계가 자그마치 6년이나 계속된 가운데, 브라이스는 어떻게든 줄리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노력한다. 대놓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그녀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저버린다. 뭐든 함께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저버리는 건 일상이다. 


어느 날부터 줄리가 암탉을 키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달걀을 감당하지 못하고 브라이스네로 매일 같이 가져다주었다. 실은 브라이스를 보기 위해서 였지만, 아무튼 브라이스는 이 달걀들을 받는 족족 버렸다. 그녀가 닭을 키우는 곳이 더럽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 모습을 줄리에게 들키고 만다. 이후 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부터 였나, 브라이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 줄리가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로도 한두 번 줄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양새가 더 커진다. 역시 그때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신경 쓰는 모양새도 더 커지고.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를 쫓아다닐 때다. 첫사랑의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사랑 로맨스를 대하는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첫사랑 대명사, <클래식< <건축학개론>. 여기에 <플립>은? ⓒ팝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에서 첫사랑 로맨스의 대명사들이 있다. 2003년작 <클래식>과 2012년작 <건축학개론>이 그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에서 아련하고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생 생각하게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리우드에는 물론 수많은 첫사랑 로맨스의 정석들이 있겠지만, 최신작 중에 우리들에게 <플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첫사랑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와닿는 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비교해도 손색없음을 말하고 싶다. 


이들의 첫사랑은 시기가 훨씬 빠르다. 10대를 전후 하기에,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마냥 풋풋하고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론 좌충우돌, 갈등과 오해와 증오와 사과가 계속된다. 그건 어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이것들을 푸는 과정과 결과에 있다. 


우리는 채 풀지 못하고 여전히 오해와 어느 정도의 증오가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건 때로 단순 아픔을 넘어 한으로 남는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반면, 이들은 가차 없이 풀어버린다. 한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잘 들여다보면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미비한 개연성과 결말 부분에서 정작 해결하지 못한 자잘한 것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첫사랑 로맨스가 더 현실적인 것이다. 


로맨스 그리고 인생 성장 메시지


북미의 경우인지, 이 영화만의 경우인지, 첫사랑 로맨스에 로맨스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첫사랑 연령의 성장도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오직 로맨스에 천착하기 십상인 우리네 첫사랑 영화와는 다르게 이들이 잊지 않고 넣는 게 있다면, 어리디 어린 이들을 위한 인생 성장 메시지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안 사정인데,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해 브라이스네는 잘 살고 줄리네는 잘 못산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른 듯, 브라이스네는 브라이스가 배울 만한 게 없고 줄리네는 줄리가 배울 만한 게 넘쳐난다. 물론 그건 왠만한 학교 공부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정형화된 배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배움이다. 줄리는 아버지에게서, 작은 아버지에게서, 오빠들에게서, 엄마에게서, 심지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닭들에게서도 배운다. 


그녀는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가 누구도 보기 힘든 세상을 보았고, 직접 닭을 키우며 손수 달걀을 얻어 돈을 주고 팔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고, 지체장애인인 작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생의 또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잘하는 오빠들에게서는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품을 엿보았고,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만드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과 이후의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대응을 통해 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플립>은 마냥 첫사랑 로맨스 영화만은 아니다.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과 성장이 사이좋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미국보다 훨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참에 '인생영화' 리스트에 <플립>도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 후회는 없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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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봉준호 감독의 <옥자>


'거장' 봉준호 감독이 4년 만에 들고온 영화 <옥자>. 개봉한 지 열흘 가량 지났지만, 몇 달은 지난 느낌이다. ⓒ넷플릭스



봉준호 영화는 대체로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지닌다. 확실한 목표가 거기에 있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곳에 다다르고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 자체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대, 영화를 통해 가장 재밌게 대리만족 또는 대리경험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드벤쳐적 요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관객을 끌어모으고는, 봉준호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야기다. 


봉준호처럼 필모에서 흑역사가 없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2000년의 시작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현실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고는, 에누리 없이 3~4년에 한 번씩 작품을 들고 왔다. 여전히 그는 현실을 그리고, 가감없는 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흩뿌리며, 누군가에게는 실험적일 수 있는 풍자를 선보인다. <옥자>라고 다르지 않을 텐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가 '봉준호 영화'라서 좋다. 


문제는 그의 영화에서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사건은 이해하기 쉽고, 등장인물은 따로 또 같이 개성과 조화를 두루 갖췄으며, 메시지는 도처에서 두루두루 양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영화를 영화적으로도 현실적(영화 외적)으로도 비평하기가 너무 힘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땐 '봉준호 영화'가 싫다. 


<옥자> 간략 스캔


'미자의 옥자 되찾아 오기 여정'이 주를 이루는 영화 <옥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설국 열차>를 어느덧 4년 전으로 뒤로 하고, 그보다 더 많은 말과 탈을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 <옥자>를 들여다볼 때다. 상황 논리에 따라 봉준호 영화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라고밖에 운을 뗄 수 없는 리뷰 초입을 뒤로 하고, 영화를 간략히 스캔해보자.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회사를 환경친화적인 기업으로 변화시키고자 거대 프로젝트인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26개국에 슈퍼돼지를 분양하고 잘 키워진 슈퍼돼지를 10년 후에 데려오는 것이다.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미자(안서현 분)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옥자'가 바로 그 슈퍼돼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이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간다. 


미자는 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뒤 볼 것도 없이 옥자를 끌고 가는 이들을 쫓는다. 두메산골에서 내려와 미란도 한국 지부에 쳐들어가고,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는 트럭에 매달리는 등 위험천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옥자를 이용해 그들만의 작전을 벌이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와의 협치, 그리고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협박과 회유로 미자는 뉴욕에서 옥자와의 재회를 꿈꾼다. 


하지만, 그 사이 옥자는 ALF의 대의명분과 미란도의 탐욕, 나아가 한때 동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미란도의 하수인이 된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진렌할 분)의 광기로 당해서는 안 될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당한다. 과연, 미자는 옥자와 함께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옥자는 '돼지고기'로 전락하지 않을 것인가?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 <옥자>


여러모로 봉준호가 생각나는 영화다. 봉준호 스타일 구축에서 봉준호 월드 창조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넷플릭스



<옥자> 역시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였다. 자연스레 봉준호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동시에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흐름과 사건과 캐릭터와 카메라워킹과 미장센과 메시지였다.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과 고심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능력을 만천하에 영화 내외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떨침에 여한이 없었다.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는다. '영화'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기대치가 아닌 최대한의 기대치에 근접한 퀄리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봉준호 영화가 아닌 봉준호 스타일인 것 같다. 처절하게 와닿는 비판이나 작정하고 비꼬는 풍자가 아닌, 다분히 상업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보여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는 점점 이슈는 늘어나고 논의는 적어진다. 


또 봉준호 영화는 그 안에서 다른 요소들에 비해 직선적이고 단편적인 스토리 라인을 띄고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메시지에서 비롯되는데, 덕분에 사건 진행은 산만해지고 캐릭터는 소모되며 영화 내적 재미가 아닌 영화 외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줄어든다. 


신념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ALF의 위상과 존재 의의,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운전기사로 잠시 잠깐 얼굴을 비춰 약간의 추임새로 자본주의의 대명사 대기업과 현대사회 젊은이의 우환을 드러낸 김군이 아닌 배우 최우식의 쓰임새, 연관되어 '초호화 캐스팅'과 '사건 진행과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많은 주연급 배우들의 소모 등.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입장에선 안타깝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해가 간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지, '스타일'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거시적으로나마 또는 거시적으로밖에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또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봉준호 영화는 <설국열차> 이전에 이미 모든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월드'를 구축하지 못한 게 또 마음에 걸린다. 


봉준호 영화를 본다


누가 뭐라해도, 봉준호 영화가 나오면 보지 않을 수 없다. <옥자> 또한 최소한 몇 번은 볼 것 같다. ⓒ넷플릭스



그럼에도 우린 봉준호 영화를 본다. 그는 자타공인 지금, 아니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다. 그를 만나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기 힘들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건 수많은 이들에게 축복인 것이다. 영화의 총본산 할리우드와 영화의 본고장 유럽에서 인정하고 찬양하는 봉준호다. 


한편 드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하필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게 그에게는 결코 축복이 아닐 거라는 거다. 할리우드였다면 그는 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 이상 가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일본이었다면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지난 <설국열차>, 이번 <옥자>를 접하고 더욱 확고해진 생각이다. 


<옥자>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보였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과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그것이다. 둘다 지금의 봉준호를 있게 한 요소들인데, 천착과 스타일은 자칫 울궈먹기와 흐르지 않는 물로 변형·고착될 수 있다. 우린 여지없이 <옥자> 전체와 부분들에서 자본주의 비판적 요소를 볼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이나 단역급 캐릭터에게서 봉준호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봉준호가 파격의 길을 서슴없이 가길 바란다.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한 '영화'를 내놓은 그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하길 바란다. 나는 봉준호의 예술작품이 아닌 영화를 보길 원하지만, 그가 샛길로 빠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자가 옥자를 기어코 데리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미자와 옥자의 여정이 봉준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로 점철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처럼 비춰지지 않길 바라며, 무엇보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속깊은 의도를 넘겨짚지 않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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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워 머신>


브래드 피트의 플랜 B와 넷플릭스의 만남,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로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영화 <워 머신>. ⓒ넷플릭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한복판, 세계 중심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미국 정부는 이를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한 사건이라 규정,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경고, 탈레반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함락한다. 이어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미국은 2003년엔 이라크를 침공해 역시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을 이어간다. 


전쟁이 8년 차로 접어든 2009년, 스탠리 맥크리스털 4성 장군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해 최소화를 강조하며, 병력 증원에 통해 전쟁을 종결시킬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와의 마찰과 각종 구설수로 1년여 만에 경질된다. 


다분히 문제적 인물인 이 사령관과 문제적 구도의 이야기를 《롤링스톤》지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논픽션 <디 오퍼레이터스>로 훌륭하게 풀어냈다. 다름아닌 그 책을 브래드 피트의 플랜 B가 영화 <워 머신>으로 제작했다. 거기에 봉준호 감독의 <옥자>처럼 넷플릭스로 공개했다. 주인공 글렌 맥마흔 장군은 브래드 피트가 직접 열연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퓨리>를 잇는 전쟁, <머니볼>을 잇는 리더십, <빅쇼트>를 잇는 미국 풍자를 총집합시켰다. 과연 구슬을 잘 꿰매었을지.


'완벽한' 승리를 원하는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 장군은 완벽하다. 완벽한 만큼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 자신 우스꽝스럽고 부하들은 일을 못하며 결정적으로 대통령에 반한다. ⓒ넷플릭스



대략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구슬을 그리 잘 꿰매진 못한 것 같다. 대신 각 구슬들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이 영화가 기본 골자로 말하고자 하는 미국 풍자 블랙코미디 부분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선사한다. 그건 다름 아닌 브래드 피트가 분한 글렌 막마흔 장군에서 시작해 끝난다. 


출중한 경력, 꾸준하고 철저한 자기관리, 부하를 살피는 세심함, 최고의 자리에 걸맞는 겸손함까지 갖춘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가졌다. 모두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그만 유독 튄다. 그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오래토록 의미 없이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아무 탈 없이 이대로 진행하다가 '흐지부지' 끝내고 싶다. 자신과 결을 완전히 달리 하다시피 하는 부시 전 정권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어쨌든 맥마흔은 그런 미국 정부의 의중을 대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저 생각 없이 지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현지 주민 피해의 최소화와 더불어 충분한 병력 증강을 통한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그는 주지했다시피 많은 걸 갖춘 '완벽한' 사령관이다. 그런 그는 우습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일 못하는 부하들도, 완벽한 승리와 현지 주민의 최소화라는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한 단면이다. 


맥마흔이라는 미국의 단면, 또 다른 단면


맥마흔이 미국의 한 단면이라지만, 그와 반하는 미국 정부도 당연히 한 단면이다. 그들 모두 터무니 없다. ⓒ넷플릭스



미국의 또 다른 단면이 여기에 있다. 세계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세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는 비뚤어진 책임감, 그리고 세계 모두가 지켜보는 데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비겁하고 무능한 짓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면모 말이다. 그건 실명이 거론되는 오바라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의 맥마흔 장군 조종과 그에 따른 대처에서 나타난다.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지만 엄연히 유럽까지 총괄하는 엄청난 힘과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동안 대통령을 한 차례 화상으로 만났을 뿐이다. 대개 현지에 대통령 대리로 와 있는 안보위원과 대사와 협의할 뿐이다. 그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대통령이 수시로 직접 대면은 못할 망정 화상 대면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난해부터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던 국정논란 때 알려진 사실들이 있다. 대통령과 사전 면담 신청을 통한 독대가 없었다는 정무수석과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비서실장. 물론 영화와 현실의 이 둘을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고의로 인한 무능과 그 자체로의 무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무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맥마흔 본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맥마흔을 뽑아 배치한 건 미국 정부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만큼 집단적 의견의 출중함으로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완벽한 대응과 잘 짜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것 같은 미국이 결국은 터무니 없는 일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허상에 터무니 없는 진지함으로 임하는 맥마흔, 그런 자를 뽑아놓고 피하는 미국.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직시하다


공교롭게 영화의 배경이 2009년이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미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어가는 느낌이다. ⓒ넷플릭스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미국 정부와 대립하는 우스꽝스러운 진지충 맥마흔의 터무니없는 리더십을 보여주며 미국의 역설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작지만 핵심적일 수 있는 모순들, 예를 들면 현지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며 반란군를 괴멸시키면서도 반란군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현지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 또한 반란군을 괴멸시키면서도 현지인 희생이 없어야 하는데, 현지인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쟁'을 한다는 게 일반인 피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게 아닌지? 애초에 왜 전쟁을 하는 것인지? 왜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는 미국의 역설이기도 하고, 맥마흔의 역설이기도 하다. 결국 미국으로 수렴되는 바,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미리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이미 미국은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영화의 배경이되는 2009년은 그 수렁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다. 거기에 현대 미국이 행한 가장 큰 헛발질이라고 할 만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니, 답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브래드 피트의 행보가 가히 신선하다. 넷플릭스를 택하면서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며,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제작에 뛰어든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런 면에서 <워 머신>은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이슈들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지 않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한참이고, 이제는 자기 살길 찾아 가기 바빠졌다. 많은 비난이 뒤따르고 있지만, 현실은 전면적 각자도생의 길에 도달했다. 사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혼란 속에 수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불길하지만 현실적인 예감뿐이다. 많은 영화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답을 던져주고 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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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컴, 투게더>


최소 2017년 상반기 최고의 독립영화 <컴, 투게더>. ⓒ비아신픽처스



오랜만에 한국 독립영화를 본다. 세상을 보는 온전한 하나의 눈, 상대적으로나마 누군가의 입맛에 종속되거나 손질되지 않은 날것의 묘미, 그 안에서 일관된 무엇을 발견할 때의 희열, 모두들 거기가 문제라고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보여지는 건 다르게 손질되고 마는구나 생각할 때의 씁쓸함. 나는 그런 독립영화를 사랑한다. 


일찍이 그 맛을 알아 독립영화의 맥을 짚어 보려 노력했고 그중에서 괜찮은 작품을 골라 소개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에는 이전보다 저조했다. 독립영화 자체가 저조했던 건지, 나의 관심과 반응이 저조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2월에 <장기왕> 정도를 소개했을 뿐이다. 작년 하반기만 해도 <최악의 하루> <여고생> <혼자> 신작 영화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저조했던 게 아닌가 하는 반문으로 위로해본다. 


그럼에도, 올해 상반기에 독립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 소개도 하지 않았음에도 <컴, 투게더>는 올해 상반기에 발견한 최고의 독립영화로 평할 만하다. 6개월이 지나 올해가 끝나도 여전히 최고의 독립영화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쪽에선 잔뼈가 굵은 신동일 감독이 8년 만에 연출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가족 개개인의 말 못할 고군분투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회 문제의 연장선을 이 영화는 탈피한다. ⓒ비아신픽처스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 범구(임형국 분)는 18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잘려 한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집에서 쉬다가 윗층의 층간소음 때문에 인연을 맺게된 호준, 그가 쿵쿵대는 건 천장에 머리를 닿고자 하는 행위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닿았는데 언젠가부터 닿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그 차이가 아주 조금이란다. 


어머니 미영(이혜은 분)은 각종 편법을 써 가며 힘들게 실적 2위를 유지하고 있다. 회사 창립 8주년을 기념해 실적 1위에게 주어지는 태국 가족 여행 티켓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쉽지 않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고객이 변심해 취소하고 동료가 가로채가고 편법이 상부에 걸린다. 그래도 계속 해야지 어쩌겠는가. 


딸 한나(채빈 분)는 재수로 고려대학교를 들어가고자 하지만 예비번호 18번에 머물러 있다. 최종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한 명씩 빠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더 피를 말리게 한다. 그런 와중에 예비번호 8번 후배 소식을 듣게 되고 만난다. 그러고는 은연중 진심을 내비친다. "내 앞 예비번호 누구라도 죽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영화는 한나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가족 한 명 한 명의 현 상황을 보여주고는 식사 자리에 둘러 앉은 가족의 모습을 비춘다. 예비번호 18번에 머물러 있는 한나로 인해 큰소리가 오가는 식사 자리, 그리고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말 못할 일들을 겪는다. 그래서 가족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개인의 고군분투 이야기다. 


개인과 가족과 사회 문제는 하나다


영화는 개인, 가족, 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비아신픽처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가족을 돌아본다. 결혼하고 분가한 후로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닌 듯 연락도 거의 하지 않지만, 문제는 한 지붕 아래 살았을 때조차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화목하지 않거나 문제가 있거나 했던 건 아니다. 그런 모습에서 유추하는 문제의식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척 위하는 척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 


여하튼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개인과 가족과 사회의 유기적인 인과 관계에서 유추하는 문제를 향한 비판 형식을 취하는 여타 영화와는 다른 결을 보인다. 개인과 가족과 사회의 문제가 한 눈에 보인다. 한 쪽에서 촉발한 문제가 다른 문제로 번지거나 원인이 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통합적인 문제다.


범구가 실업자가 된 건 이 사회의 가장 극심한 문제 중 하나이자 한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자 개인적으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 유발의 문제이다. 미영이 신용불량자임에도 아둥바둥 신용카드를 파는 것도, 한나가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알아주는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한 곳에서만 촉발한 문제도 아니고, 어느 한 곳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어느 한 곳에서만 책임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감독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 그 시작을 가족으로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쉽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들 세 명은 각자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연을 맺는다. 그런데 연을 이어가기가 너무 어렵고, 그들과의 꼬인 실타래를 풀기가 너무 힘들다. 그들이 없어졌으면 하기도 하지만, 막상 없어지면 울부짖으며 찾기도 한다. 반대로 함께 하고 싶지만,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다시 모여 다시 시작하자


극단적 비극으로 문제의식을 극단적으로 전달해 파급력을 실현시키려는 여타 독립영화와는 다른 희망적인 결이다. ⓒ비아신픽처스



적어도 내가 봐 왔던 독립영화의 결은 두 가지였다. 젋은 세대이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려내거나, 사회에 만연한 가해불가역성을 피해자에게 투영하여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내는 사회를 묵직하고 날카롭고 아프게 그려내거나.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도 완연히 다른 결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텐데' 또는 자신이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하게 괴롭히는 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내가 아는 독립영화의 결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저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러고는 속죄하고 도망가고 괴롭힘 당하고 피폐해지고 결국 자신 또한 죽고 만다. 이 사회가 만든 거대한 덫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자 끝없이 되풀이되는 굴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빈 손으로 다시 모인다. 


그 아래에는 감독이 촘촘히 구성해 놓은 구조가 있다. 비록 아프고 힘들고 비참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을 만한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컴팩트하게 시작한다. 그러곤 지뢰를 하나씩 심어놓는다. 더 큰 무엇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자 복선이고, 하이라이트를 향한 전개 방식이다. 그러곤 각자 겪게 되는 극치의 경험과 한 데 뭉쳐 겪게 되는 최악의 경험을 동반한다. 이 지점에서 끝낼 것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하는 건 감독의 몫일 것이다. 영화는 후자를 선택했다. 일장일단이 있을 텐데, 영화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올바른 선택이지만 영화의 파급력 면에선 조금 아쉬울 수 있다. 


<컴, 투게더>는 영화를 보고 공감하고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힘이 느껴졌다. 각본의 힘이자, 연출의 힘이자, 연기의 힘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힘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을 하게 만든, 주인공들의 모습을 봐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 사회 말이다. 밝디 밝은 영화를 봐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볼 맛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날은 언제일까. 그럼에도 그런 사회가 오고 있다는 걸 믿는다. 함께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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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겟 아웃>


2017년을 넘어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 역사에 남을 <겟 아웃>.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UPI 코리아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해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킨다. 그러며 평론가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아마 1999년 <블레어 위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이후 <쏘우> <파라노말 액티비티> <컨저링> <인시디어스> 등의 대표 시리즈를 지나 <케빈 인 더 우드> <맨 인 더 다크> <위자> <라이트 아웃> 등에 이르렀다. 특히 작년이 정점이었던 것 같다. 


올해에도 <겟 아웃>으로 찾아 왔는데, 어김 없이 짧은 러닝타임과 군더더기 없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존과 다른 게 있다면, 시각적으로 무섭다고 할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컨저링>의 메인 홍보 문구였던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타이틀은 <겟 아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생각할 타이밍을 갖는다면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올 게 분명하다.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크리스가 로즈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외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나가!' ⓒUPI 코리아



크리스(다니엘 칼루야 분)와 그의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암스 분)는 함께 로즈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그곳을 크리스는 꺼린다. 자신은 흑인이고 로즈는 백인이기 때문에. 그에 로즈는 반차별주의자로서의 당당함으로 크리스를 이끈다. 그러며 부모님도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진보적 개념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는 일말의 불안감과 로즈를 향한 신뢰감을 간직한 채 부모님을 봰다. 


흑인인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로즈의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 크리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날 손님들이 대거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파티라고 한다. 뻘쭘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크리스, 다들 그를 호감있게 대해서 다행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흑인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그들의 말말이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근사한 상품처럼 대하는 듯한... 그건 이 비극의 서막이다. 


'get out', '나가' 혹은 '꺼져' 정도가 되겠는데 여기선 '나가'라는 뜻이 알맞을 것 같다. 그 집에서, 로즈 부모님의 집에서 당장 나가야 한다는 말이 않을까 싶다. 그건 크리스의 흑인 경찰 친구가 애초부터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로즈를 향한 신뢰감보다 일말의 불안감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단 말이다.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이토록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대놓고 해라. ⓒUPI 코리아



영화는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보여준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반차별주의자들까지도 은연 중에 행하는 뼛속깊은 차별과 흑인 만이 가지는 우월한 육체적 스펙을 향한 선망과 질투의 반작용으로서의 차별이 그것이다. 둘 다 우리가 흔히 인지하고 있는 차별과는 결이 다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에 편승한 영화들의 레토릭과도 결이 다르다. 


사실 크리스와 로즈가 로즈의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도 뼛속깊은 차별과 불길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나와 치어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처참한 몰골이 주는 형상에서 '흑인' 크리스가 느끼는 바를 알 수 있다. 육식동물들에 둘러싸인 초식동물 한 마리랄까... 그 때문에 온 백인 경찰이 운전자 로즈가 아닌 조수석에 앉은 '흑인' 크리스의 신원 조회만 하려는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굳이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그 징조만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맛봐왔던 '무슨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아니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일인가 터질 거라는 걸.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며,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말이다. 결과는 심리적 공포, 즉 '불편'이었다.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고 불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도는 한계를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심리만으로 선사하는 극강의 공포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는 <컨저링>이 아니라 <겟 아웃>이다. 정녕 극강의 심리공포를 맛볼 수 있다. ⓒUPI 코리아



작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두 공포영화가 있는데, <라이트 아웃>과 <맨 인 더 다크>다. 둘 다 '빛'을 이용해 극강의 공포를 선사했는데, 앞엣것이 말그대로 햇빛의 빛을 이용했다면 뒤엣것은 빛을 볼 수 없는 눈 먼 상태와 빛이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공간을 이용했다. 시각적, 감각적인 것들이라 온몸에 반응이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카메라 워킹과 조명과 캐릭터의 액션에 힘을 실었다. 


반면 <겟 아웃>은 오감이 아닌 '심리'만으로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 대사가 주는 일반적 맥락 뒤에 교묘히 숨어 있는 말과 동작과 생각, 들춰진 숨기고 싶은 기억 등이 주요하게 비춰진다. 그렇게 주어진 공포는, 즉각적이지만 지워질 공포가 아닌 영원히 남아 괴롭힐 것만 같은 진한 공포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배경음악과 대사와 캐릭터의 표정, 동작에 힘을 실었다. 


외국(서양)에서 잠깐 살았을 때 몇 번인가 직접적인 인종차별 발언과 행동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는 상상 속에서도 당하기 싫다. 이 뿌리깊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차별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영화적 설정이길 바라지만,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 그들이 백인우월보수꼴통이 아닌 코스프레일지라도 백흑평등진보반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여전히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를 현존하는 가장 핫하지만 일회성인 장르에 접목시키는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코미디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조던 필레 감독의 자그마치 데뷔작이라 하니,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본업으로 돌아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캡틴 언더팬츠> 목소리로 찾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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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대표되는 대만 청춘영화 최신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주)해머픽쳐스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안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사랑과 음악과 시간여행과 반전이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느 나라 태생인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동양인 것만은 분명한데, 한국은 당연히 아니고 일본도 아니거니와 중국도 아닌 것 같다. 홍콩인 듯 태국인 듯하지만, 정답은 대만이다.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주걸륜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으니 사실 알 만도 하다. 


지난해 혜성처럼 개봉해 '왕대륙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위 대박을 낸 <나의 소녀시대> 또한 대만에서 날아온 청춘영화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지고 있던 대만영화 최고 흥행 스코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새로운 전설이 된 작품인데,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모르게 많은 대만 청춘영화들이 방문했다. 거의 매년 찾아왔는데, 그래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영화는 2, 3년에 하나 정도는 된다.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하다. 가장 최신에 우리를 찾아온 대만 청춘영화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나의 소녀시대> 히로인 송운화의 데뷔작이다. <나의 소녀시대>가 대만에서 대박을 내고 한국에 상륙해 역시 대박을 내니까 비슷한 느낌의 데뷔작을 늦게나마 들여온 것이겠다. 


대만 청춘영화의 최신판 


판타지와 병맛 같은 면모 아래 의외로 슬픔이 깔려 있다. ⓒ(주)해머픽쳐스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는 진중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한 제목과는 다르게 코믹이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나아가 판타지적인 면모도 선사하는 바, 그 면모가 '병맛'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판타지로맨스를 기본 장착하고, 그 뒤로 나온 대만 청춘영화의 면면들을 두루두루 차용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재밌었다.


리 쓰잉(송운화 분)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한다. 어느 날 차에 치일 뻔한 일을 당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이 택우가 있다. 쓰잉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마음에 둔다. 한편, 학교에 이상한 남학생이 있다고 한다.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출몰한다. 쓰잉은 그를 두둔하고 그들은 종종 만나면서 친해진다. 


쓰잉이 일하는 카페엔 사연이 있는 듯한 사람들 투성이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택우와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아토우(브루스 분)를 비롯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카페사장과 여자임이 분명하지만 남자처럼 행세하는 선임 아르바이트생까지. 그 둘은 모두 말수가 적고 음침하기까지 하다. 혹시 이 네 명이 서로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쓰잉을 통해 우리는 네 명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볼 수 있다. 서로 연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끊기고 앞으로도 없을 관계이지만, 조금 다르다. 중요한 건 현재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쓰잉의 눈은 택우를 향해 있기에, 병맛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 이들의 알콩달콩 사랑놀음은 그저 웃기기만 하진 않다. 의외로 슬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 한국에 <나의 소녀시대>에 이어 상륙했다. ⓒ(주)해머픽쳐스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하지만 쓰잉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중 짝사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스토리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슬픔은 거기에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토우가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게 된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고, 쓰잉이 좋아하는 카페 남자가 항상 그 자리에 앉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으며, 카페 사장이 가끔 멍하게 있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다. 심지어 선임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남자처럼 행세하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 소소하게 지나갈 청춘의 통과의례와 같은 사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같은 사연이 없고 같은 기분이 없고 같은 아픔이 없다. 소소할지 모르고 보편적일지 모르나 각자에겐 아주 특별한 사랑의 형태다. 비록 영화에서는 '카페'라는 공간에 모여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대만 청춘영화의 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미 청춘의 시간을 받아들인 바 있는 우리는, 그 시간의 다양한 변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이 영화가 큰 인기를 끌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본 사람이라면 실망을 하진 않을 것이다. 대만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어느 부분을 건드린다. 아마도 청춘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날 '첫사랑'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해석과 영화의 재미


청춘의 시간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달 수 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재밌다. ⓒ(주)해머픽쳐스



한편으론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과거로 눈을 돌린다는 건, 그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려 하는 노력이 아닌 이상 도피 성격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라는 콘텐츠 성격상 있는 그대로의 청춘을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 어느 부분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려 함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대만 청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많은 인기를 끄는 이유에는 현재의 척박함이 반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영화들이 한국에도 건너와 어김 없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한 면이다. 그런 모습이 슬플 것까진 없지만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 없이 그저 보고 재밌으면 그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딛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판타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병맛'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말이다. 그게 B급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의도했다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몇몇 장면은 로맨틱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듯하다. 


이참에 명품 청춘영화들 몇 편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 어느 것은 슬프고 어느 것은 아련하고 어느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편에 속하게 될까? 아마 새로운 챕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코 '명품'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영화일 듯하다. 그 기억에는 언제나 웃음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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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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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버지와 이토씨>


전형적인 일본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이토씨>.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와이드 릴리즈㈜



34세 미혼 여성으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야(우에노 주리 분), 54세 돌싱 남성으로 초등학교에서 급식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토(릴리 프랭키 분)와 동거한다. 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함께 일한 '패배자'인데, 한 번 두 번 여러 번 먹었고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겠지만 당사자들은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듯하다. 


그들 앞에 74세 홀몸으로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아야 아버지(후지 타츠야 분)가 나타난다. 오빠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쌍둥이 아이들의 중학교 입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새언니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아야 네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더니 기겁 하고 토를 하고 소리도 지르는 새언니 상태를 보니 다른 문제가 있는 듯도 하다. 여하튼 20살씩 차이가 나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는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조합의 가족이 동거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조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족 형태는 아니다. 먼저 34세 미혼 여성과 54세 돌싱 남성의 동거부터 비상싱적으로 비추기 쉬운데, 거기에 74세 아버지가 느닷없이 끼어든 꼴이라니. 더욱이 그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윗대까지 거들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최선은 고사하고 최악에 가깝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잔잔한 와중에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주로 문제점들만을 들여다보기에 날카롭게 다가올 수 있겠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일본 사회의 여러 부분을 건드린다. 30대, 심지어 50대까지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 특별하다고만 할 수 없을 정도다. 정규직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야는 '당연히' 아르바이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30대 중반임에도 당연히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아르바이트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거기에 50대인 이토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는 건, 그것도 아무런 자괴감 없이 당연한 듯 생각하는 건, 차라리 충격에 가깝다. 


동양 보편적 문제 중 하나인 노부모 봉양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 사회적으로 피해갈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특히 홀몸이 된 부모, 그중에서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없다고 여겨지는) 홀아버지가 문제다. 여기에 아르바이트로 자기 한몸 겨우 건사하는 자식이 있다면 방법을 찾기란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점점 당연하게 되어 가기에 걱정이다.


이제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단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각자 자신 한몸이나마 건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찌 저찌 살아가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인 듯하지만, 아야와 이토는 아야 아버지와 계속 같이 사는 게 곤란하다. 그렇다고 다시 오빠 네로 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급기야 아버지는 가출하는데, 옛집으로 가 있는 아버지를 일가족이 찾아가 회유해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둘 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혼자 살 게 할 수도 없다. 누구도 나서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데, 이토가 나서서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싸늘하게 말하며 어서 결론을 내라고 다그친다. 그러는 한편 그는 아야를 달래 아야 아버지와 함께 살 준비도 한다. 그의 정체가 뭔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만드는 결정이 아닌가. 


폐쇄적인 가족을 이토가 돕다


폐쇄적인 가족, 이방인의 터치를 받지 않으려 하지만 곪아가고 있다. 그런 가족을 이토가 도우려 정리한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은 하염 없이 낮을 수 있다. 아야 아버지 봉양 문제가 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가족이 아닌 이토가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하다. 나서서 조언이라도 할라 치면 '니가 뭔데 나서냐' '남의 일이라고 아무말 하냐' 하며 무안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상태와 상황이 너무 하다. 내부에서 누구라도 나서서 정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외부에서라도 나서야 하는 것일까. 


이토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나서서 조금씩 정리한다. 아야 아버지와 공통의 관심거리로 친해지고, 아야에게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하고 아야의 의문과 걱정을 덜어준다. 40살 차이가 나는 구세대 아버지와 신세대 딸의 불협화음을 가운데에서 적절히 맞추고 때론 바깥에서 지휘한다. 


'가족'이라 하면 사실 굉장히 폐쇄적일 수 있다. 그런 만큼 당사자들은 모르는 폐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럴 때 가족 아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걸 생각할 수 없다. 영화는 그렇지만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처럼 보이는 이토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또 비중이 높은 이유다. 


이토는 50대로 경륜은 굉장할지 모르지만 보기에 굉장히 허름하고 또 아르바이트로 연명할 정도로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와 사귀기 전에 아야가 '패배자'로 명명한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의 '은은함'과 '강하지 않음'이야말로 오히려 폐쇄적인 가족의 단단함을 뚫고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의 잔잔함과 엽기


잔잔한 와중에 특별함을 선사한 영화로 기억에 은은히 남을 것 같다. ⓒ와이드 릴리즈㈜



내가 생각하는 일본 영화의 특징이 있는데, 잔잔함과 엽기 또는 특이함을 공존시킨다는 것이다. 별 갈등 없이 흐르다가 갑자기 쉬이 생각하기 힘든 장면이나 대사가 튀어나오거나 특정 캐릭터성이 발현되는데, 이 영화도 그런 특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잔잔함은 영화 내내 계속되었고, 엽기 또는 특이함은 제목대로 아야 아버지와 이토에게서 발현되었다. 


아야 아버지의 차마 말로 하기 힘든 비밀과 영화 마지막에서의 특별한 결정, 그리고 이토의 막말 비슷하지만 아야네 가족 나아가 영화 전체의 분기점이 되는 대사 한 방.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34세 미혼 여성 아르바이트생과 54세 돌싱 남성 아르바이트생의 동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엽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 모습이 결코 엽기적이지만은 않은, 아니 평범하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아야 역의 우에노 주리와 아야 아버지 역의 후지 타츠야는 세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더욱이 역할 자체에 개성이 다분해 충분히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반면 그 중간에 위치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양쪽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이토 역의 릴리 프랭키는 비교불가의 고도 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 결과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그 가장 큰 비결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외모와 완벽히 상충되는 중후한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믿음이 가는 목소리, 외모와 상충되는 만큼 믿음의 강도가 높아지는 듯하다. 그 덕분에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특성을 두루 가지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듯하다. 과하지 않은, 그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극중 역할에 충실한 듯한 그의 모습이 한동안 맴돌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를 향해 뛰는 아야,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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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운더>


전세계 최고이자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맥도날드'의 설립 비하인드 이야기를 다룬 <파운더>. ⓒ크리픽쳐스



고백하건대, 프랜차이즈 중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가장 선호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욕하면서도 가는 곳이다. 가장 상업적이기 때문일 텐데, 또 가장 대중적이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 일단 다른 어느 곳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적정 수준의 '가격'도 한몫 한다. 어딜 가든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보다 '버거킹'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버거킹'은 엄청 비싸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두 회사의 공통점은 또 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 맥도날드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레이 크룩'과 스타벅스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하워드 슐츠' 말이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시작'한 이들이 아니다. 본래 운영되고 있던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는 바, 아마 일반인들에겐 비하인드 스토리가 될 것이고 경영인들에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영의 산 보고'일 것이다. 자본과 경쟁의 양대축으로 지탱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선 과정은 그야말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추진력과 끈기를 비롯,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까지 배울 수 있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맥도날드 형제? 레이 크룩?


영화는 '맥도날드의 진짜 설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는 의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크리픽쳐스



영화 <파운더>는 맥도날드의 시작이 아니라 레이 크룩(마이클 키튼 분)의 맥도날드가 시작되는 때를 이야기한다. 맥 맥도날드(존 캐럴 린치 분)와 딕 맥도날드(닉 오퍼맨 분)가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너디노에서 시작한 '맥도날드'. 1954년, 밀크쉐이크 기계를 팔러 다니는 레이 크룩이 그 가게에 한 눈에 반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다. 맥도날드 형제에게 모든 권리가 있으면서 꼬박꼬박 로얄티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레이 크룩에도 로얄티가 지불된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시도 끝에 혁명적인 '스피디 시스템'을 안정화 시킨 맥도날드 형제, 그 위에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미국의 교회'처럼 상징화 시키겠다는 야망의 레이 크룩. 이들은 이후 사사건건 부딪힌다. 원칙주의자로서 돈보다 안정화, 그리고 가족을 우선시 한 맥도날드 형제, 반면 레이 크룩은 위험이 따르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넓혀가고자 한다. 


새롭게 투자한 점주들이 자기 마음대로 운영을 하고, (레이 크룩 입장에서) 터무니 없이 낮은 로얄티를 받는 계약 때문에 겉만 번지르르한 빈털털이가 될 위기에 처하는 등 레이 크룩은 가정을 등한시 하면서까지 위기를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맥도날드 형제와의 충돌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 끝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레이 크룩은 엄청난 금액을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고 '맥도날드'를 사들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레스토랑을 시작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관여해 혁명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맥도날드 형제인가. 레스토랑을 만들지도 시스템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지역을 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만방에 떨치게 한 레이 크룩인가. 


레이 크룩의 성공, 그만의 것인가?


결국 맥도날드는 레이 크룩의 손으로 넘어가고 또한 그의 손에 의해 이만큼 컸지만, 과연 온전히 그만의 것인지 의문이 든다. ⓒ크리픽쳐스



<파운더>는 전후(戰後) 미국의 엄청난 경제호황 하에서의 아메리카 드림을 현실로 옮긴 레이 크룩의 성공기를 뼈대로 한다. 52세의 한물 간 세일즈맨, 접이식 탁자를 비롯해 휴지, 밀크쉐이크 기계까지 온갖 것들을 팔아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레이 크룩.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급이 있어야 수요가 있다'를 골자로 하는 이론을 앞세워 진지한 태도로 끈기 있게 설득한다. 잘 팔리진 않지만. 


그는 '준비된 인재'였던 거다. 단지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뿐. 맥도날드는 그와 운명의 단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의 기막힌 성공 만을 비추지 않는다. 그가 성공으로 다가갈수록 빈털털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맥도날드 형제가 구축한 세계를 파괴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가정 파괴가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데, 그는 가정을 등한시 하며 앞으로도 계속 등한시 할 것이라 한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룩을 통해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엿볼 수 있다. 엄청난 노력으로 이루어낸 혁신과 그 즉시 시행되는 보수화, 한편 끝없는 야망과 체계적인 듯 임기응변식인 듯 어떻게든 무마하는 철면피와 돌파하는 불도저. 이 두 큰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미국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조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말하고자 할 때 잘하는 수법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대체로 '국뽕'이라 할 만한 요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런 면까지 보이진 않는다. 대신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지극한 성공의 모습과 그 이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공존시키며, 균형을 맞추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관객들에게 미루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이 크룩의 성공은 온전히 그만의 것인가?'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


영화 배우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 같다. <파운더> 또한 큰 자리를 차지할듯. ⓒ크리픽쳐스



1970년대 후반 드라마로 데뷔한 후 1980년대 초반 영화로 데뷔한 '마이클 키튼'. 1988년에 <유령 수업>으로 팀 버튼과 함께 하고는 이듬해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중론, 하지만 영화는 대대적으로 흥행하여 80년대를 대표할 정도가 된다. 키튼은 역대 최고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1992년에도 팀 버튼과 <배트맨 2>를 찍어 성공을 이어 나간다.


이후 그럭저럭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출현해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는 키튼, 어느새 잊혀진 히어로가 된 듯하다. 그러던 2014년 키튼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 <버드맨>으로 완전히 부활한다. 아니, 비로소 그는 완연한 배우가 된 듯하다. 다음해에는 <스포트라이트>에 주연으로 활약한다. 그야말로 2014, 2015년 당해 최고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파운더>다. 이 영화의 레이 크룩도 어느 정도 키튼 본인이 투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편안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걸까?


사실상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었는데, 하등 빈 곳이 없어 보였다. 이전 두 작품에서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이번엔 그에 비해 그에게 쏠린 무게가 엄청나 보였다. 왕년의 초특급 스타가 경험과 연륜이 완연하면 이 정도 무게감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끔 하는 키튼의 연기 스펙트럼. 


키튼은 2017년에만 기대작 두 편에 출현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아메리칸 어쌔신>. 두 작품 다 핫한 신세대 스타 톰 홀랜드와 딜런 오브라이언을 사실상 원톱 주연으로 내세운 바, 키튼은 다시 조력자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 역할은 그렇지 않은 듯,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나오며 미치 랩과 함께 활동하며 미치 랩만큼 중요한 스탠 헐리로 분할 예정이다. 


60대 중반이 지나는, 적지 않은 나이의 키튼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 부활은커녕 사람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일쑤인데, 키튼은 어떻게 보면 행운아일지 모르겠다. 부디 지금 이대로 경험과 연륜으로 좋은 작품에 출현해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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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니어스>


'편집자'와 '천재 작가'라니,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되는 영화 <지니어스>. ⓒ라이크콘텐츠



난 출판편집자다. 주로 소설을 많이 다루었는데, 결코 '잘 나가는' 편집자가 되진 못한다. 내가 만든 책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해 출판사와 저자를 기쁘게 해준 적이 없다. '유능한' 편집자라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괜찮은 책조차 되지 않을 형편 없는 원고를, 괜찮은 책으로는 만들어낸 경험이 다수 있으니까. 


그럼 '좋은' 편집자라면? 답하기가 어렵다. 먼저 좋은 편집자가 뭔지 아직 잘 모르니까 말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저자의 삶과 나아가 세상까지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원고(책)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편집자. 유명한 저자와 함께 하면서도, 무명의 저자를 들여다볼 줄 아는 편집자. 무엇보다 독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집자. 


영화 <지니어스>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 굴지의 출판사 스카라이브너스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 분)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 문학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압도적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을 편집한 이다. 영화는 그런 그에게 뉴욕 전역의 출판사에서 거절 당한 토마스 울프(주드 로 분)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맥스는 울프의 원고를 읽고는 바로 울프와 계약한다. 


'유명 편집자'의 삶은?


유명한 베테랑 편집자가 우리 시대엔 존재할까? 20세기 초 미국이라면 가능하겠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이크콘텐츠



유명 소설가의 삶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소설가가 있다면 반드시 편집자가 있어야 하는 법, 그런데 '유명 편집자'의 삶은? 아니, 편집자가 애초에 유명해질 수가 있나 싶다. 여기서 '유명'은 출판계 내부가 아닌 대중적으로 그러냐는 말이다. 창작만큼 코디와 편집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여러 콘텐츠를 통해 편집자가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도 그에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열정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엄연히 초짜 소설가인 울프를 베테랑 편집자 맥스가 다잡아 나간다. 과한 열정이 불러일으킨, 또는 개인적 스타일일 수도 있는 과도한 수사를 과감히 쳐내 독자들에게 읽힐 만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울프는 그대로 따르고 책은 대박이 난다. 하지만, 맥스의 아내 루이스(로라 리니 분)와 울프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 분)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맥스와 울프를 느낀다. 


상당한 분량의 첫 책, 그리고 대성공. 울프는 톨스토이라도 되어볼 심상인지 자그마치 5000매 짜리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들고 나타난다. 이대로는 절대 책으로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한 맥스는, 울프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가멸차고 냉정한 편집을 가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들더라도 좋은 책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더욱 일에 열정을 퍼부으면서 그들 곁에 있는 여인들은, 특히 엘린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울프의 도를 넘은 과도한 열정은 파멸적 비극을 예견하고,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맥스의 마음과 자주 충돌하며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런가 하면, 맥스가 울프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엘린은 도무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한편, 맥스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충실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가족과는 가깝지 못한다. 


조화롭기 힘든 조합의 기막힌 조


냉철하고 대쪽 같은 베테랑 편집자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초보 소설가의 조합은,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라이크콘텐츠



맥스의 대사를 통해 형상화되는 진정한 편집자의 자세는 대체로 정석적이다. '나는 이 글이 좋아. 하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독자들이 읽었을 때 좋아야 해.'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뒤에서 조력할 뿐이야.' 등. 반면 울프는 열정적인 예술가의 표본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지 못하면 더 이상 소설가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를 거야.' 등. 


맥스와 울프의 조합은 현실과 이상의 기막힌 조화를 상기시킨다. 물과 불, 진보와 보수만큼 조화롭기 힘든 조합 아닌가. 그래서 우린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완벽함'을 보고 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남은 작가와 편집자, 편집자와 작가.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아쉽게도 이 둘의 행복한 시절만을 그리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대상들이 감수해야 할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울프의 연인 엘린이 그 표상인 바, 그러나 영화에 긴장을 조성하기 위함으로만 껴넣은 인물인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녀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영화의 만듦새까지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한 영화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들어가야 할 인물이자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편집자와 소설가의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사랑에 죽고 못 사는 감정적이고 퍼스널한 관계를 대비시켰으니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게 당연하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행해야 할 스텝


'편집자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출판사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이크콘텐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황홀해 마지 않는 시대 1920년대 프랑스 파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당대를 넘어 역사상 길이 남을 예술가들을 본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거투루드 스타인, 피카소까지. 보는 관객 또한 황홀해 마지 않았을 면면들. 우린 <지니어스>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미국 뉴욕이라면, 대공황의 한가운데일 터. 모든 출판사들이 경제, 사회 서적을 앞다투어 펴냈을 것이다. 즉, 돈이 될 만한 책 말이다. 문학은 뒷전일 수밖에 없을 테고, 울프 같은 초짜에 과도한 열정을 책에 고스란히 옮기는 예술가 나부랭이는 안중에도 없었을 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또 한 번의 방점을 찍는다. 일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할까. 


유명 작가들의 책을 낸 편집자와 출판사는 부지기수다. 돈 뿐만 아니라 그게 편집자와 출판사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기도 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진정 명망을 높이는 일은 아무도 찾지 않고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분명 보석인 게 분명한 이를 발굴해 제대로 키워내는 것일 테다. 거기엔 말 못할 정도의 노력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안주와 모험은, 하나가 시작되면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보고 의식하며 발 맞추어 나가야 하는 동지다. 이 영화는 여러 관계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스텝을 일깨우고 알려준다. 베테랑 편집자 맥스는 천재 소설가 울프를 끌어올린 천재 편집자가 아닌, 그릇이 넓은 관계의 천재였던 것이다. 모든 편집자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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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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