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화 <버닝>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한국이 자랑스럽게 전 세계에 내놓을 몇 안 되는 영화감독 중 하나인 이창동, 그의 영화는 탄탄하다. 90년대 초반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 이미 주목받는 소설가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던 바, 스토리텔러로서의 역량이 한껏 발휘된 케이스라고 하겠다. 한국 시인계의 총아였던 유하 감독, 영화계와 소설계를 오가는 천명관 작가가 생각난다. 


80년대 초중반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이창동, 그는 영화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주로 해왔던 작업은, 영화로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빈틈 없는 서사와 대표성을 짙게 띠는 캐릭터와 함께. 


그의 8년만의 신작 <버닝>은 그동안의 이창동 영화와 다른 듯하다. 가히 그 대표성 짙게 띠는 캐릭터들이 극을 주도하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여전하지만, 빈틈 없는 서사를 보여주는 대신 문학적 메타포와 영화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보는 사람이 답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종수, 해미, 그리고 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다 군대를 다녀와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복학을 준비 중인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 분)는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카드 빛을 갚지 못해 가출해 행사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전전하는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러며 종수에게 고양이를 부탁하는 것이다.


한편, 종수는 아버지한테 일이 생겨 북한이 눈앞에 잡힐듯 보이는 파주 본가로 이사한다. 여행이 오래 걸릴 것 같았던 해미는 문제가 생겨 금방 돌아온다. 근데 혼자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부자인 것만은 확실한 벤(스티븐 연 분)과 함께다. 그와 그녀는 나이로비 공항에서 며칠간 함께 갇혀 있던 동지란다. 종수는 해미와 어릴 적 동네 친구였고 얼마 전에는 두 번째 만남에 섹스를 했던 사이란 말이다. 


이후 세 명은 벤의 집에서, 종수의 집에서 모임 아닌 모임을 가진다. 종수의 뜻은 반영되지 않은 모임이었고, 종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과 행동이 오갔던 모임이었다. 그 두 번의 모임 이후 해미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종수는 벤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무엇을 감지하고 그를 추적하는 한편 그가 호언장담한 말을 추적하는데...


하루키적 메타포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저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했다. 단순히 그래서일까, 감독이 더더욱 의도한 걸까, 영화 전체가 '하루키적'이다. 영화의 장면장면이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묘사와 대사로 옮겨지고, 영화 전체가 고스란히 하루키만의 소설로 옮겨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소설을 영화로 옮기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마냥 즐기기, 있는 그대로 즐기기 쉽지 않은 영화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볼 수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되는 영화이다. 이창동 감독이 제대로 벼른 것이다. 하루키 특유의 허세를 수직 또는 수평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오그라들어 제대로 들어주기가 민망할 정도의 대사들이 그대로 굉장히 중요한 메타포다. 


종수, 해미, 벤의 세 주인공 자체가 메타포이다. 소설가 지망생임에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비(非) 메타포적인 삶을 영위하는 종수는 눈앞만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을, 번 돈으로 빛을 갚지 않고 메타포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아프리카를 찾는 해미는 길을 잃었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길을 이탈하고 싶은 청춘을, 무위도식의 삶을 살아가는 벤은 끝에 다다른 자가 느끼는 허무함을 표출하는 청춘을 의미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어떤 청춘도 불안하고 불만 있고 불행하다. 평범함이 되어버린 밑바닥은 햇빛이 작렬하는 위를 바라보고 동경하는 것이, 더 이상 내려갈 길이 없어 방황하는 이는 도무지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디기 힘든 것이, 더 이상 올라갈 길 없어 허허로운 이는 채우고 태우고를 반복하는 것이. 


무(無)에의 바람과 몸짓만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영화는 다분히 종수의 시선이다. 겉으로 보여짐은 종수 아닌 해미와 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화자이자 주체는 종수인 것이다. 종수는 가장 평범에 가깝다. 그저 묵묵히 일상을 영위하며 앞을 고민하고 종종 뒤를 돌아본다. 그에게 벤과 해미는 앞과 뒤이고, 미래와 과거이며, 동경의 대상과 부러움의 대상인가. 무엇보다 소설가 지망생인 그에게 그들은 눈앞에 생생히 살아숨쉬는 소설적 메타포가 아닌가. 


이 셋을 두고 혹자는 연대의 희망이 보인다 하였고 혹자는 분노가 보인다 하였다. 셋은 철저히 다른 듯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라는 연대의 희망이? 그러하기에 따로 또 같이 불안과 불만과 불행을 태워버리듯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짓도, 먹고 살자는 몸부림도 사라져버린다, 의미가 없다. 불에 타 재가 되어버리고, 해가 져 어둠에 묻혀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그런 무(無)에의 격렬한 바람과 몸짓만이 보일 뿐이다. 


와중에 홀로 실재하고 있는 듯한 종수는 어떨까. 여기저기 들쑤시며 사라져버린 이의 행적을 찾고, 매일 새벽에 달리고 달리며 사라졌을 것같은 비닐하우스를 찾고, 이 두 증발의 매개체가 될 사람을 추적한다. 어느새 생업을 포기한 종수는 이 추적들을 통해 본인의 또 다른 실존인 소설가로서의 길을 닦는다. 추적이 먼저인지 소설가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그는 나아가는 듯 보인다. 이 모습에서 굳이 희망을 엿보는, 엿보고 싶은 이도 있을 테다. 


그건 또 다른 실재과 실존으로의 나아감인가, 해미나 벤처럼 현실 아닌 곳으로의 도피인가. 우리는 단서를 달고 있지 않은가, 자기 위로를 하고 있지 않은가. 현실이 투박하고 질척이고 두루뭉술할 때 사실은 선명하거나 희미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이다. 거기엔 분노도 희망도 연대도 자리하기 힘들다. 자칫 공허만이 또아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청춘을 잠식하는 거대한 공허이자 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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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탠바이, 웬디>


영화 <스탠바이, 웬디> 포스터. ⓒ판씨네마㈜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베이 에리어 장애인 센터, 그곳을 책임지는 스코티(토니 콜렛 분)는 모든 친구들을 알뜰살뜰 챙긴다. 자폐증세가 심한 웬디(다코타 패딩 분)도 그중 한 명인데, 그녀는 정해진 시간마다 요일마다 장소마다 정확히 해야 할 일만 정해놓고 생활한다. 웬디는 언니 오드리의 집으로 들어가 조카 루비를 보는 꿈과 함께 스타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하는 꿈을 갖고 있다. 


감정조절이 자유롭지 않은 웬디가 과연 아이를 잘 볼 수 있을지, 스코티는 그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오드리는 솔직히 두렵다. 오드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웬디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녀와 함께 살 순 없는 것이다. 한편 웬디는 스타트렉 광팬으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평한다. 그녀는 진정한 팬들만 한다는 창작활동도 하고 있다. 


와중에 파라마운트사에서 스타트렉 대본 공모전을 실시한다.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웬디는 열심히 대본을 완성하였는데, 그만 제출 날짜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자폐증세가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대기하라(stand by)'를 되새기며 가라앉히고 생각해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파라마운트사가 있는 LA까지 직접 대본을 들고 가기로 결심한다. 아무 도움 없이 반려견 피트와 함께 600km의 대장정에 오른다. 


웬디의 위대한 걸음걸음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스탠바이, 웬디>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밖에 없는 웬디의 세상을 향한 걸음걸음에 대한 영화이다. 유일한 혈육인 오드리조차 그녀를 케어할 수 없고, 그녀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스코티의 눈조차 마주치기 힘든 그녀다. 그런 그녀가 그 먼 여정을 혼자, 아니 보호가 필요한 피트와 함께 떠났다는 것 자체가 정녕 위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위대한 내디딤이랄까. 


영화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으로 제28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특별상을 타는 등 당대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서 사랑을 받은 바 있는 벤 르윈 감독의 작품이다. <세션>은 소아마비로 전신을 사용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섹스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섹스 테라피스트와 함께 이뤄나가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았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그 '위대함'은 신선하다 못해 장엄했다. 


이 영화도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도무지 할 수 없을 것만 갖은 일을 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건 성장이라는 테마의 인간 승리를, 또는 허무맹랑한 판타지에 가까운 예쁜 동화 이야기를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다. <스탠바이, 웬디>는 어느 쪽일까. 


웬디와 <스타트렉>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현실에 기반한 허무맹랑 판타지에 가깝다는 말이다. 실상은 웬디처럼 자폐증세를 가진 이들, 나아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의 홀로서기가 과연 가능한가? 특히,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자폐증에 있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겠다. 


그래서, 영화는 <스타트렉>이라는 기가 막힌 소재를 가져온다. <스타트렉>이 무엇인가. 단순히 우주 배경의 SF 시리즈인가? 아니, 이 시리즈는 미 개척지 우주 탐험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종의 지구인과 외계인의 갈등과 이해를 중점으로 다룬다. 다양한 군상들의 '관계'를 통해 인간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 포인트인 것이다. 


웬디가 다름 아닌 <스타트렉> 대본 공모전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키는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불문율을 스스로 깨고 가본 적도 없거니와 가볼 생각도 못했던 600km의 대장정을 떠나는 건, 그야말로 여러 모로 기가 막힌 대비 설정이다. <스타트렉>을 향한 오마주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철저한 판타지에 가까운 <스탠바이, 웬디>는, <스타트렉>이 갖는 철저한 현실세계 지향성도 갖는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판타지나 공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고, 이 영화는 자폐아의 대장정이 아닌 남들과 다름 없는 평범한 삶 즉, 친언니네로 들어가 조카를 보며 함께 사는 삶에의 진짜 목표가 있다. 


사랑스러운 대장정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한 장면. ⓒ판씨네마㈜



괜찮은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장 마크 발레가 연출하고 리즈 위더스푼이 원 톱으로 이끈 영화 <와일드>에서 정말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진 주인공은 홀로 대장정을 떠나며 무언가를 건져올리려 한다. 그 아무리 험한 장정이라해도 그녀가 겪었던 일보단 덜한 것 같다. 과정에 역점이 있다. 


<스탠바이, 웬디>에서 주인공의 대장정은 절대적인 목표가 수반되어 있다. 과정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누구는 못살게 굴고 누구는 살게 군다. 물론 대부분이 관심조차 두지 않지만.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 아니 이 세상에서 유이하게 그녀에게 무한한 관심을 두는 두 여인이 그녀를 쫓는다. 


스코티와 오드리가 그들이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이 과정에서 깨닫는 게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믿음' '신뢰'를 웬디에게 보내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 웬디도 충분히 홀로서기를 할 수 있구나, 누군가를 돌보는 게 충분히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도 함께.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 여느 하이틴 영화 같은 말랑말랑함이 가미된, 단순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이 영화는 사실 굉장히 잘 직조된 세밀한 섬유 같은 영화였던 것이다. 반드시 행복한 엔딩을 맞보길 바라면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웬디와 피트의 여정과 함께 하길. 그리고 그들을 응원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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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디트로이트>


영화 <디트로이트>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지난 2010년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허트 로커>의 캐서린 비글로우가 아카데미 82년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상을 차지하였는데, 인류 역사상 최고의 흥행 역사를 쓴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을 제치고 얻은 수확이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오래 전 한때 영화감독으로보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내로 더 명성이 높았다. 


그녀는 1981년에 장편 데뷔를 하여 지금까지 35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작 1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대단한 과작인데, 90년대 초반 <폭풍 속으로>를 찍고 주가가 폭등한 뒤 내놓은 대작들을 연달아 실패하고 참으로 오랫동안 영화를 내놓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거다. 하지만 필모를 들여다보면, 그냥 과작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예전부터 선 굵은 액션과 압도적인 분위기를 세심하게 연출하는 데 정평이 나 있는 감독이다. 최근 들어서 그녀가 내놓은 영화들을 보면, 그런 면모에 있어서 현존 최고의 여성 감독 아니,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는 게 명백하다. 최근이라고 해봤자 2010년의 <허트 로커>와 2013년의 <제로 다크 시티>가 있을 뿐이지만. 


차별이 만연한 폭력 현장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그녀가 5년 만에 돌아왔다.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작에 이어 그녀가 선택한 실화는 1967년 7월 닷새 동안 미국을 강타한 디트로이트 소요 사태이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이 사태의 전반을 들여다보기보다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사건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 든다. 명백한 메시지와 압도적인 연출.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1967년 7월 23일 시내 술집에서 흑인들 파티가 새벽까지 벌어졌다. 경찰이 무허가 술집 단속을 이유로 이곳을 덮쳐 손님 전원을 체포한다. 지나가는 흑인들이 모여들어 항의하자, 경찰차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누군가가 인근 가게를 턴다. 겉잡을 수 없을 폭동이 시작된다. 엄청난 수의 군까지 투입된다. 


7월 27일 밤, 알제 호텔에서 총성이 울린다. 어느 흑인 투숙객이 장난감 총을 쐈던 것. 근처에 있던 경찰과 군인들은 알제 호텔에서 쏜 저격수의 총성이라 단정 짓고 알제 호텔을 급습한다. 그렇게 잡혀온 6명의 남자 흑인과 2명의 여자 백인, 장난감 총을 쏜 장본인은 탈출하려다 죽임을 당한다. 


모두 백인 남자로 이루어진 경찰과 군인들은 본격적인 추궁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저격수가 쏜 총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했다. 반면 잡혀온 이들은 총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과 장난감 총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이들 뿐이다. 진짜 총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근처 가게에서 경비로 일하는 흑인 한 명이 가세한다. 총의 정체를 둘러싸고, 죽음의 협박을 가하는 가해자와 사실을 말할 뿐인 피해자 그리고 그 모든 걸 보고만 목격자까지 함께 하는 차별이 만연한 폭력 현장이다. 


차별의 반복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흑인에게 행해지는 백인의 무차별하고 다양한 폭력을 통해, 차별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기도 시기였거니와, 장소도 장소였고, 분위기도 분위기였다. 토끼굴에 불을 지펴 토끼로 하여금 뛰쳐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뛰쳐나온 토끼는 잡히지 않게 도망가거나 발악을 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일방적인 구도를 영화는 알제 모텔에서의 미시적 구도로 끌고 온다. 그곳에서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들은 그저 벽을 보고 백인 남자들의 일방적인 죽음에의 협박에 떨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차별의 철퇴는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또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 


백인 남자들이 전부인 경찰과 군인들은 그런 구도가 당연한 듯하다. 인간 대 인간이라는 구도 하에서 하물며 강력한 범죄용의자라고 해도, 심지어 범죄자라고 해도, 자신을 변호할 권리나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을진대 이건 막무가내다. 그들이 단지 흑인폭동이 한창인 곳에 있는 흑인들이라는 이유로, 그런 흑인들과 함께 놀고 있던 여자라는 이유로. 이 족쇄는 피부색이나 성(性)에만 채워져 있는가 보다. 


알제 호텔 1층 로비에서 펼쳐지는 단순 구도 하에 반복되는 협박과 무지에서 오는 당연한 반박의 시퀀스는, 영화 내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면 연출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차별의 반복' 메시지의 핵심을 이룬다. 그들은 '차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낸다. 그렇게 구분하고 적을 만들고 군림한다. 


인간 군상


영화 <디트로이트>의 한 장면ㅁ. ⓒ㈜팝엔터테인먼트



떡 하니 '인종 차별'이라고 붙여 놓은 듯한 확고한 구도에서, 피해자 측의 여자 백인과 가해자 측의 백인 군인 그리고 목격자 측의 남자 흑인 경비가 눈에 띈다. 이들은 이 구도 하에서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피해자, 인종적 선의만 있을 뿐 차별 본질의 선의는 없는 방관자, 정녕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목격자이다.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일대일 구도에서 당사자가 아닐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고 여자도 아니기에, 이들 중 어느 위치와도 맞닿아 있지 않다. 그러하기에 쉽게 생각하고 말하고 재단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에 있어서, 차별을 행하고 차별에 당하는 당사자들보다 더 중요한 건 그래서 차별의 바운더리 밖이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경계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바운더리 안에 있는 이들이 쉽게 하면 안 되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쉽게 할 수밖에 없거나 쉽게 할 수 있거나 쉽게 하고 싶은 것과는 다르게, 바운더리 밖에 있는 이들은 쉽게 하면 안 되는 생각이나 행동들을 말 그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디트로이트>이 보여주는 인종차별 양상의 일대일 구도와 더불어 기타 등등의 인물들 행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군상들, 그 축소판이기도 한데, 그 다양성의 본질이 다름 아닌 다양성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차별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차별의 세계엔 역설적으로 '차별도 존재한다'는 다양성 또는 상대성 대신 '차별은 절대 안 돼'는 획일성 또는 절대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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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보리 vs 매켄로>


영화 <보리 vs 매켄로> 포스터. ⓒ㈜엣나인필름



승부를 봐야 하는 스포츠계엔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존재한다. 현존하는 스포츠계 최고의 라이벌은 축구의 메시와 호날두일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의 남자 축구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 상을 5번씩 나눠가졌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3회 수상이 최다인 역사에서 5회면 역대 최고의 독재체제나 다름 없지만, 이들은 동시대에 이룩했다. 


남자 테니스로 눈을 돌려보자. 2010년대 세계 테니스엔 독주 체제가 없는, 그렇다고 확고한 라이벌 구도도 없는 춘추전국 시대 또는 'BIG N'에 가깝다. 2000년대엔 단연 로저 페러더와 라파엘 나달이었다. 이들은 2010년대에도 여전히 탑 오브 탑 클래스이다. 1990년대는 누가 뭐래도 피터 샘프라스와 안드레 애거시의 시대였다. 


1968년 테니스 프로화 시대, 이른바 '오픈 시대'가 시작되면서 오픈 시대 전 최강자 로드 레이버가 켄 로즈웰과 세계 테니스계를 양분했다. 그리고 대망의 1970~80년대다. 이때야말로 테니스의 전성기로 지미 코너스, 비외른 보리, 존 매켄로, 이반 렌들이 따로 또 같이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했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는 이 레전드들 중 두 명인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의 1980 윔블던 결승전을 중심으로 그리는데, 세계 최초로 윔블던 5연패를 노리는 최강자 비외른 보리에게 떠오르는 강자 존 매켄로가 도전하는 형국이었다. 모든 이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이다.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경기, 1980 윔블던 결승전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수많은 테니스 대회 중에서도 메이저로 뽑히는 4개 오픈, 윔블던, US, 프랑스, 호주, 그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오픈의 1980년이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내리 4연패를 달성한 당대 최강자 스웨덴의 비외른 보리(스베리르 구드나손 분)이 단연 우승후보, 거기에 수많은 강자들이 도전한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강자 존 매켄로(샤이아 라보프 분)이 눈에 띈다. 


이 둘은 너무나도 상반된 이미지와 경기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보리는 차갑게 절제되고 침착하며 냉정한 분위기에 후방 공격형, 매켄로는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신사적 분위기에 자신만만한 전진 공격형이다.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보리와 매켄로는 당대를 넘어서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 둘의 결승전은 당연한듯, 어떤 경기가 펼쳐질까?


영화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결승전 경기 실화를 고스란히 다룬다. 당시를 완벽히 되살린 건 물론이다. 생김새, 행동, 복장, 분위기, 실력까지 말이다. 이는 야누스 메츠 패더슨 감독의 공이 큰 듯한데, 일찍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극사실주의로 담아낸 다큐멘터리 <아르마딜로>로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 주간대상을 받으며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남자 테니스 전설 비외른 보리와 존 매켄로에 천착하다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종종 나오는 스포츠 영화들, 배우들이 해당 스포츠를 무리 없이 완벽히 소화해내는 것부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들은 경기 또는 선수보다 스포츠를 통해 다른 걸 보여주려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몇 없는 테니스 소재 영화 중 하나인 <윔블던>처럼 로맨틱 코미디인 경우도 있다. 


<보리 vs 매켄로>는 다른 곳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보리와 매켄로에게 천착한다. 당대를 충실히 재연했을 뿐 그렇게 재연한 당대를 통해 무엇을 전하거나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감동? 감동은 이 둘의 결승전 재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1980년 당시의 보리와 매켄로가 어떤 심리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본인에게 철저한 감수를 받아 실화를 완벽하게 옮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이니 만큼 보고 납득이 가면 되는 것이다. 윔블던 4연패라는 위업을 이미 달성했지만 보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5연패를 하지 못하면 그저 잊힐 거라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테니스 역사상 최초의 윔블던 5연패가 아닌 차갑고 견고한 영웅의 처참한 패배일 거라고. 


매켄로는 예의 그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는 비신사적인 행위 때문에 '코트의 악몽'이라는 별명뿐만 아니라 '알 카포네 이후 최악의 미국인'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테니스란 신사가 하는 예의 바른 스포츠가 아닌가. 그는 매 경기마다 상대방 선수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 그리고 엄청나게 쏟아지는 야유의 관중들과 싸워야만 했다. 거기에 그는 당시만 해도 보리에 비해 터무니 없는 애송이였다. 


보리와 매켄로의 삶


영화 <보리 vs 매켄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보리와 매켄로의 현재보다 과거를 더 많이 오간다. 그들이 어떻게 테니스를 시작하게 되어서 어떤 성적을 올리고 어떤 고난을 극복해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가 아닌, 그들이 어떤 심리 상태로 테니스를 해왔는지 말이다. 또는 어떤 심리 상태가 그들의 삶을 지배해 왔는지. 


'스포츠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리 vs 매켄로>는 그 지점을 정확히 캐치해 영화 내내 지독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절대 겉으로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듯한 보리는 물론, 경기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과 싸우고 있는 매켄로조차 들여다보면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영화 초반, 테니스 전설 안드레 애거시의 명언이 보인다. "테니스는 인생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드밴티지, 서비스, 폴트, 브레이크, 러브... 그래서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수많은 맞는 말이 있겠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테니스가 곧 인생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이다. 테니스 경기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핏 보리와 매켄로가 붙은 1980 윔블던 결승전일 테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보리와 매켄로의 삶이고 인생이 아닌가. 경기를 즐기는 입장에서 그들은 '도구'일지 모르지만, '도구'의 입장에서 그들 스스로는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다. 도구와 목적 사이에서 고민하고 싸우는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다. 


우리는 모두 목적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도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볼 시간도 없지만 그럴 용기도 부족하다. 거기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영화에서 보리와 매켄로는 외부에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다,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명승부가 연출되었던 것일까. 자신과 비슷한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우리네 인생에도 한 번쯤 명승부가 연출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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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델과 어니스트>


<에델과 어니스트>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영화 한 편으로 한 방면이나마 역사를 훑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굉장히 거시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주요 사건들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아야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 <벤자민 버튼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국제시장>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이 생각난다. 


한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온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굉장히 평범하거나 굉장히 특출나다. 하지만 접근 방법은 같다. 이들 모두는 우리와 다름 없는 삶을 살았거나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을 사랑했고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대체로 동질감을 느꼈다. 


자전적 애니메이션 <에델과 어니스트>는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라 하겠다. 1920~60년대 영국의 지극히 평범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의 20세기 초중반 40년을 훑는 작업 말이다. 우린 이 영화로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영국의 20세기 초중반을 지탱한 가치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는 영국의 세계적인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그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지극히 평범한 부모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때는 1928년 런던, 가정부 에델과 우유배달부 어니스트는 사랑에 빠져 짧은 연애 끝에 결혼한다. 에델은 가정부를 그만두고, 그들은 25년 대출상환으로 집을 장만한다.


결혼하고서 집안살림을 하나둘 장만하는 평범한 나날들, 하지만 결혼 2년이 지나서도 아이를 갖지 못하자 37살 많은 나이의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그 사이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에델과 어니스트는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한편, 곧 임신을 하고는 남자 아이를 낳은 에델, 하지만 나이가 많아 더 이상의 아이를 가질 순 없다. 


아이는 자라고, TV가 시작되고, 히틀러가 전쟁태세에 돌입하고, 에델과 어니스트와 레이먼드 가족은 전쟁을 대비한다. 급기야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이는 대피령에 따라 안전한 시골로 가고 집에는 에델과 어니스트만 남아 그들만의 전쟁을 치른다. 섬나라 영국까지 침공한 나치독일의 공습에 이들은 무사할까? 레이먼드도 그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게 될까?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건들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의 큰 줄기는 주로 어니스트가 읽고 들어 에델에게 얘기해주는 신문과 라디오에 있다. 히틀러가 언제 집권해 언제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언제 전쟁태세에 돌입했고 언제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을 취득했는지 언제 프라하에 했고 언제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지 말이다. 


한편, 언제 TV가 시작되었고 1930년을 전후한 당시 영국의 빈곤선 상위층이려면 주당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언제 인류가 달에 갔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물을 5인치밖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직후 노동당이 집권했으며 고속도로가 뚫렸고 어떤 당이 집권하든 식량 배급량은 계속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에델과 어니스트가 직접적으로 겪은 사건이 있는 반면 대다수가 이처럼 간접적으로 겪은 것들인데, 우리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역사의 한복판에서 크고 작은 사건과 변화의 당사자로 살아가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과 변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촛불 혁명을 직접 참여했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반면 계속 오르기만 하는 물가와 집값, 스마트폰의 보급 등은 물론 요동치는 세계 경제와 정치와 정세 등은 우리를 직간접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것들이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규정하진 못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규정하기에 결국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사람 사는 아름다움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는 일면 그런 생각을 체화시킨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같다. 신문이나 라디오, 그리고 TV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는 어니스트와 집안일에 몰두하며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또는 둘 수 없는 에델의 모습이 구도화되어 영화 내내 비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에델인가? 당장의 집안일과 당장의 남편 혹은 아들의 일을 챙기며 보수적일 수밖에 없게 된 에델을? 그건 아닌 듯하다. 어니스트를 통해서 세상일에 관심 없는 사람을 비판하는 반면, 에델을 통해서 당시 평배해 있는 남녀 차별 또는 남녀 구분의 당연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흥행 3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제시장>도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국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영화인데, 이런 비슷한 시선조차 담지 않고 하나같이 나라 발전에 일조한 이야기와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신파 어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오히려 이 같은 이야기가 훨씬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겠지만 그 이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거기엔 사람은 없고 사건만 있다. 


반면 <에델과 어니스트>는 단조롭기 짝이 없고 눈물 쏙 빼는 이야기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이보다 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할 게 분명하다. 


거기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네'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저 그렇게 살다간, 인류 역사를 이루는 99% 이상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에델과 어니스트는 그대로 김씨와 이씨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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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루비 스팍스>


영화 <루비 스팍스> 포스터. ⓒ(주)팝엔터테인먼트



10년 전에 전설의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다음 책을 내놓지 못한 채 슬럼프에 빠진 천재 작가 캘빈 웨어필드(폴 다노), 여자는커녕 사람 자체를 만나지 않고 지낸다. 그저 친형과 자주 만나고 정신과 의사를 자주 찾아가며 아빠와 사별한 후 재혼한 엄마를 아주 가끔 볼 뿐이다. 10년 전에 내놓은 베스트셀러로 가끔 독자와 출판 관계자를 만난다. 


그가 요즘 어느 여자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야말로 꿈에나 그릴 그런 이상형의 여자 말이다. 그녀의 이름은 루비 스팍스(조 카잔 분). 캘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에 대해 하나하나 창조하며, 그녀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밤낮 없이 쓰기 시작한다. 


와중에 집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최근에 여자를 들인 기억이 없는 혼자 사는 집에 하이힐이 있질 않나 브래지어, 팬티가 있질 않나. 그러곤 어느 날 아침엔 급기야 루비가 집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막 일어난 차림으로 시리얼을 먹으면서  '어젯밤엔 혼자 잤잖아'라고 말하며. 캘빈은 이제 자신이 미쳐버렸다고 단정한다. 그녀는 진짜일까? 가짜가 분명해 보이는데? 도무지, 절대, 믿을 수 없다. 


6년 만에 국내 지각 개봉


영화 <루비 스팍스>의 한 장면.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루비 스팍스>는, 괴짜 가족의 좌추우돌 로드 무비 <미스 리틀 선샤인>으로 전 세계 영화비평계를 강타하고, 영화 내외적으로 한층 성숙한 면모를 선보인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로 돌아왔던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부부 감독의 '오래된 신작'이다. 이 영화는 북미에서 2012년에 개봉했지만 우리나라엔 6년 만에 개봉했다. 


한때(지금도) 재개봉이 대대적으로 유행해 수많은 명작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 왔다. 지각 개봉은 재개봉과 결을 같이 하는 듯한데, 작년에 7년 만에 한국을 찾아와 35만 명이 넘는 기대 이상의 흥행 성적을 기록한 <플립>이 대표적이다. 이번 5월 30일에 개봉할 <라이크 크레이지>도 7년 만에 지각 개봉하는 작품이다. 


이들 지각 개봉 작품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로맨스'. 그리고 국내에 개봉하지 않았을 뿐 여러 경로로 국내 관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이미 받았었고 받아 왔다는 점. 하지만 <플립>의 경우 관객들의 절대적 지지에 '못 이겨' 강제로 지각 개봉한 측면이 없지 않기에, 이후 지각 개봉한 작품들은 그 인기에 기댄 후발 주자 측면이 없지 않다. 


판타지에서 현실로


영화 <루비 스팍스>의 한 장면.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특이하게 시작된 특별한 사랑의 모습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랑의 모습과 비교 비유되는 양상을 보인다. 꿈 속 여인이 소설로 옮겨지고 급기야 현실화되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하지만 판타지는 곧 급격히 현실이 된다. 즉, 현실적인 커플의 모습을 띄는 것이다. 


흔하디 흔한 커플의 모습은 어떤가. 급격히 가까워져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맥 없이 식어버린 열정은 한순간에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제목처럼 여자 루비가 아닌 찌질한 남자 캘빈의 시선을 내보인다. 그는 루비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되,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 놀았으면 한다. 또 너무 활기차지도, 너무 우울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의 입맛대로, 극단적이지 않은, 이미지화 시켜놓은 대상이 거기에서 벗어나면 무시하고 떠나버리는, 그야말로 판타지적인 완벽함을 바라는 것이다. 영화는 캘빈의 모습을 남자 특유의 찌질함으로, 그 남자의 찌질함을 말도 안 되는 판타지로 병렬시킨다. 결국 그 판타지는 캘빈이 쓰는 소설의 내용대로 현실의 루비가 바뀌는 판타지로 대치되는 것이다. 


자칫 위험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영화 <루비 스팍스>의 한 장면. ⓒ(주)팝엔터테인먼트



<루비 스팍스>는 흥미로운 소재와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남녀 관계의 비공개적인 정석의 발판 위에 있음에도, 위험하고 재미없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찌질한' 남자라는 도식화, '완벽한 이상형' 여자라는 대상화, 그리고 그런 남녀 간의 만남과 헤어짐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라는 재단화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우린 알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이의 흑역사 중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위험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상(象)의 정립이 아니고. 그럼에도 6년 만에 지각 개봉을 하면서까지 우리 앞에 소환시킨 이유는 뭘까. 적어도 영화 내적인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지극히 공식적이고 전형적인 신파 로맨스로 하찮은 눈물을 몇 방울 훔치는 영화보다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영화 외적인 이유는 몇몇 눈에 띈다. 이 영화로 실제 연인이 되었다는 주인공 폴 다노와 조 카잔, 그리고 이 둘의 6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지도 상승, 또 작년 개봉해 좋은 평을 들었던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감독의 숨겨진 로맨스 작품이었다는 점 등 말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 볼 만한' 영화라고조차 해주지 못하겠다. 다만, 이들과 같은 이유로 남녀관계에 힘들어 하고 있는 이들에겐 적확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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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도영화 <당갈>


인도영화 <당갈> 포스터 ⓒNEW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 분)은 오래 전에 아버지의 반대와 권유로 레슬링을 그만두었다. 국가대표급 선수였던 그에게 레슬링은 존경과 명성은 주었지만 돈은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에서 비인기 종목인 레슬링, 국가의 지원은 없었다. 포갓은 이제 곧 태어날 아이로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아들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넷째도 아들은 나오지 않았다. 실망을 금치 못하는 포갓, 이 시골 동네에서 여자가 레슬링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와 둘째가 동네 남자 친구들을 묵사발 만든 걸 보고 그 둘을 레슬링 선수로 키울 것을 결심한다. 당사자는 물론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곧바로 특훈 돌입.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아이들은 아빠 포갓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까? 포갓은 어떻게 여자아이들을 최고의 레슬러로 키워낼 수 있을까? 그들이 가야할 길은 너무 멀고 험난하고 구불구불하다. 수많은 장애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미르 칸의 혁명적인 시선을 동력 삼다


인도영화 <당갈>의 한 장면 ⓒNEW



영화 <당갈>은 인도 국민배우 중 하나이자 우리에게도 친숙한 발리우드 스타 아미르 칸이 제작하고 주연했다. 그는 할리우드 스타이자 사회운동가로 명성을 높은 마크 러팔로처럼 영화계 일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전작 <지상의 별처럼> <세 얼간이> <피케이: 별에서 온 얼간이> 등도 그 일환처럼 느껴진다. 소수자를 어루만지고, 고정관념 타파의 혁명적인 시선을 동력으로 삼는다. 


이 영화도 그 맥을 잇고 그 결을 함께 한다. 인도의 비인기 스포츠 종목 레슬링, 남자와 여자의 개념이 너무도 명백히 구분되어 있는 즉, 남녀 차별이 심한 하르야나 주라는 배경, 그 와중에 여자가 레슬링을 그것도 본인의 의견이 아닌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하게 되었다는 점 등에서 엿보인다. 


이런 메시지들을 전달하는 방식이 인도영화적이면서도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는 게 특이할 만한 점이다. 인도영화, 즉 발리우드의 가장 큰 특징은 노래와 춤을 중심에 두고 코미디와 로맨스와 액션 등의 온갖 장르를 버무린 것인데, <당갈>은 최소한의 노래와 춤이 나오고 역시 최소한의 장르들이 조합될 뿐이다. 레슬링이 노래와 춤과 액션 등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상당히 변화시킨 각본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너무나도 철저히 맞춰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법적으로 사라졌지만 사실상 여전히 존재하는 카스트 제도의 나라 인도이니 만큼, 이 정도의 내용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와중에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인도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흥행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다분히 제작자이자 주연을 맡은 아미르 칸의 의도가 들어 있지 않나 싶다. 


주요 대사들로 주요 메시지를 전달하다


인도영화 <당갈>의 한 장면 ⓒNEW



영화는 인도영화 특유의, 인도영화만이 발산하는, 인도영화가 추구하는 '재미'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거의 3시간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와중에도 주요 길목마다 감동을 수반한 주요 메시지들이 굉장히 직접적으로 은근한 파격을 선보이는데, 여성인권, 관료주의, 부녀관계 등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주로 대사로 보여진다. 


"적어도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생각하잖아. 우리에게는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가사일을 하게 해. 14살이 되면 혼인시켜 짐을 벗어버리지. 생전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넘겨주는 거야. 아이를 낳고 기르게 만들어. 여자는 그게 다야.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자식으로 생각하고 온 세상과 싸우면서 그들의 비웃음을 묵묵히 참고 있잖아. 너희 둘은 미래와 삶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고 말이야."


"내일 이기면 너 혼자 이기는 게 아냐. 수백만의 여자애들이 너와 함께 이기는 거다. 그건 모든 여자들의 승리야. 남자보다 열등시 당하고 가사 노동을 강제로 하고 자식을 낳기 위해 시집 보내지는 여자들 말이다. 내일 시합은 아주 중요한 거다. 왜냐하면 내일 너는 상대방 선수뿐만 아니라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인도가 메달을 못 따는 이유는 당신 같은 관리가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오... 인도 연방은 그런 흰개미들 온상이야. 그들이 스포츠를 망쳤어. 체육인에 대한 지원은 없어. 이기지 못하면 욕만 하지. 메달리스트는 나무에서 열리는 게 아냐. 그들을 키워내야지. 사랑으로, 성실로, 열정으로."


"난 언니를 굳게 믿어. 하지만 아빠의 언니에 대한 믿음엔 비교가 안 돼. 아빠와 한번 얘기해 봐, 아빠잖아. 최악의 경우라도 무슨 일이 있겠어? 꾸중이나 하시겠지. 그걸 받아들여. 아빠의 질책이 항상 우리에게 도움이 됐어."


'인도영화'를 엿보자


인도영화 <당갈>의 한 장면 ⓒNEW



오글거리거지만 충분히 명대사라 할 만한, 그렇지만 상당히 아마추어적인 영화적 대사기법을 차용해 명백한 메시지들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당갈>은 '인도영화'라는 한계 및 특성을 직시했을 때 더할 나위 없는 빛을 발한다. 그야말로 인도영화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의 혁신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명백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평이하다 못해 모든 것이 예상되는 해피엔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쉽다.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 점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기에 오히려 불편한 점이 없었고 여타 전형적인 영화보다 아쉬운 점이 덜했다. 


온갖 할리우드 히어로가 판치는 작금의 전 세계 영화계에 진정한 의미에 가까운 발리우드 히어로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내디딘 채 더 나은 현실로 나아가기 위해 온 세상과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누구보다 인도라는 나라를 위하고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도를 구성하고 있는 폐습과 악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보자. 그리고 과감히 응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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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수성못>


영화 <수성못> 포스터. ⓒ인디스토리



대구 수성구 수성유원지 수성못에서 오리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 공부를 병행하는 오희정(이세영 분), 그녀는 집안의 도움 없이 홀로 치열하게 분투한다.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손님도 없고 해서 쏟아지는 잠을 감당 못하는 사이 중년 남성 한 명이 무단으로 오리배를 탈취해 수성못으로 나아간다. 그러곤 곧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희정은 오리배 담당자로서 당연히 지급해야 했던 구명조끼를 조느냐고 깜빡했다는 걸 사장이 알게 되면 잘리게 된다는 사실에 질겁한다. 당일 야밤에 몰래 구명조끼를 수성못에 버리려다가 때마침 촬영을 하고 있던 차영목(김현준 분)에게 들킨다. 그는 자살시도자들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 영목은 희정의 비밀을 빌미로 그녀를 자살센터로 끌어들여 자살시도자 촬영을 도우게 한다. 


한편, 희정에겐 오빠 오희준(남태부 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며 희정에게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 좋겠다'고 푸념한다. 그는 자살충동에 못이겨 정신병원을 다니고 있는데,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수작 같기도 하고 군대를 못 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KAFA 출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 <수성못>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수성못>은 한국의 영화 사관학교라 불리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유지영 감독 장편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KAFA의 2017년 장편데뷔작 기획전에 출품되었는데, 장편제작연구과정 9기의 대표 완성작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이 과정의 기획전 대표작들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2010년엔 개인적으로 2000년대 한국 독립영화 중 최고라 할 만한 <파수꾼>이, 2013년엔 <잉투기>와 <들개>가, 2015년엔 <소셜포비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선보였다. 출중한 데뷔작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는(못하는) 감독들이 상당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KAFA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하진 않는다. 


<아기와 나> 등과 함께 2017년에 선보인 <수성못>. 3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시선과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두루뭉술한듯 선명하고 식상한듯 신선하다. 청춘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의 치열함, 지방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등의 주제가, 수성못이라는 소재로 집결하고 수성못이라는 소재에서 비롯된다. 


'삶'도 '죽음'도, '치열하지 않음'도 치열한 청춘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정녕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정, 돈도 열심히 벌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다. 이 시대, 바로 지금 가장 청춘다운 청춘의 모습이다. 그녀에게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보면, 지방과 여성이 보인다. 지방에선 성공할 수 없다는, 즉 이곳에서 살아선 안 된다는 열망과 함께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즉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합쳐진다. 일반적인 청춘의 치열함보다 더 목적적이다. 


영목이 자살시도자를 촬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알고보니 사회봉사의 일환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동반자살클럽회장으로, 동반자살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다. 정녕 '죽음'을 치열하게 치르려는 영목이다. 그 치열함에서 희정의 치열함이 떠오른다. '그들'의 '목적적'인 치열함 말이다. 그들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든, 지긋지긋한 '이곳'을 떠나 '그곳'으로 가려 한다. 


장강명 작가의 히트작 <한국이 싫어서>(민음사)가 겹쳐진다. '헬조선'을 탈출해 호주로 가려는 청춘들, 하지만 호주도 또 다른 '헬'일 뿐이라는 교훈 아닌 교훈을 던진다. 이 소설이 주로 탈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반면, <수성못>은 주로 탈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든 죽음이든 정녕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 영화는 그 모습을 수성못에 떠 있는 오리배라고 보았다. 하염없이 떠 다니지만, 절대 수성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오리배들 말이다. 그 어떤 치열함으로도 대구를,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그렇다면, '치열하지 않음'을 치열하게 내보이는 희정 오빠 희준은 어떨까. 우리 안에 희정과 영목의 결이 다른 치열함이 공존할 텐데, 당연히 희준의 치열하지 않음의 치열함도 존재할 것이다. 희정과 영목이 애처로운 개인들의 형상이라면, 희준은 그 개인들에게 있는 또 다른 형상이 아닐까. 혹은 있으면 하고 바라는 형상. 


광범위하게 그저 보여준다


영화 <수성못>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는 삶과 죽음,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하라고 가르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선언하지도 않으며 판단하지도 재단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때론 우스꽝스러움 속의 진지함으로, 때론 흐리멍덩함 속의 적나라함으로. 


그 모든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 주위의 모습이고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게 맞다. 그래서 이 영화 <수성못>은, 독립영화가 흔히 추구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작가적 시점으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의외로 꽤나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파괴적인 영화적 재미에선 조금 떨어질 우려가 있는데, 자살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극초반에 벌어진 자살미수 사건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흥미 유발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대체로 적절하고 적정하고 적재적소한 이 영화, 감독의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더욱 기억에 남는 영화를 남기기 위해선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이었던 적절함과 적정함을 버리고 한 곳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데뷔한 감독한테 흔히 보이는 패기 대신 노련함이 엿보이는 유지영 감독, 오히려 다음 작품에서 패기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더 기대가 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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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원더스트럭>


영화 <원더스트럭>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1980년대, 20대 중반이 나이로 일찍 데뷔해 첫 번째 장편영화로 전 세계 독립영화계의 총본산인 선댄스 영화제를 석권한 천재 감독 토드 헤인스. 1990~2000년대 주로 활동하며, <벨벳 골드마인> <파 프롬 헤븐> <아임 낫 데어> 등의 좋은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2015년, 8년 만에 영화감독으로 돌아온 그는 <캐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작을 선사했다. 


토드 헤인스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그는 스토리텔러 내지 구성주의자라기보다 비쥬얼리스트에 가깝다. 물론 앞에 나열한 수작들 모두 그가 연출뿐 아니라 각본까지 담당한 걸로 보아, 절대 이야기를 중시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영화들이 시각적으로 더 결정적이게 다가올 뿐이다. 


<캐롤>은 그의 필모에서 처음으로 각본에 참여하지 않고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이다. 결과는 전에 없는 대성공이었다. 2년만에 돌아온 <원더스트럭> 또한 연출로만 참여한 작품으로, <캐롤>의 성공을 이어가려 한 의도가 다분하다. 과연 성공했을까.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두 소년 소녀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1977년 미네소타 건플린트,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어느 날 우연히 '원더스트럭'이라는 책을 접한다. 거기엔 생전 본 적도 없는 아빠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었는데, 그는 벼락을 맞아 청각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의지를 꺾지 않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 있는 킨케이드 서점으로. 


1927년 뉴저지 호보큰,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몬스 분)는 선천적으로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아빠에 의해 집에서 감옥 같이 지낸다. 그녀는 뉴욕에서 영화배우로 살고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청각 장애인 교육을 강제하는 아빠의 강요에 반발해 집을 나와 뉴욕으로 향한다. 


정확히 5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청각 장애를 가진 두 소년 소녀는 각각 아빠와 엄마를 찾아 뉴욕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필연과 우연으로 자연사 박물관을 향한다. 벤은 아빠를 찾을 수 있을까? 로즈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무성영화, 그리고 모든 것이 분출된 예술적 표현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실험적이다. 비쥬얼만큼 구성이 중요하다. 1920년대 시점과 1970년대 시점을 나눠, 각각 무성영화의 특징과 예술적 표현을 극도로 살린 특징을 고스란히 투영시켰다. 너무나도 극명하게 갈려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은 두 시공간은, 극단은 이어진다는 비논리의 논리에 따라 왠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게 한다.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는 소녀 로즈의 1927년은, 그래서 노랫말조차 없는 OST만으로 모든 걸 전달할 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로즈가 되어 답답함을 호소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관객을 위해 마련한 '상황에 맞는 OST의 변화무쌍함'을 즐겁게 맛본다. 그 자체로 무성영화이다. 


한편 197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68 혁명 직후이자 통제와 절제의 시대 80년대 직전이다. 모든 것이 분출되던 그 시대를 영화는 소년 벤의 1977년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려하다기보다 진한 느낌의 색감과, 남녀노소는 물론 모든 인종이 한데 모여 소용돌이치는 뉴욕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볼 만한 영화


영화 <원더스트럭>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두 시공간의 병렬은 자못 예술적 총합처럼 다가온다. 예술이라 하면 다분히 '개성'이 생각나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예술은 개성과 개성의 총합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독이 진정 영화를 사랑하여 영화가 당대 가장 꽃피웠던 두 시절을 되살려 동시에 내보이고 있다고 충분히 느낄 만하다. 


그러면서도 영화 내적으로 소소한 감동과 반전의 서사를 놓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청각 장애에 의한 '불통'의 기반 위에 감동과 반전이 출현한다. 말이 아닌 표정과 행위에의 소통, 힘든 소통으로도 피어나는 웃음꽃, 결국 느끼고 체험할 수밖에 없는 소통의 위대함, 그리고 소통의 탄생에 대한 은유까지. 


영화는 후반에 가서 갑자기 스토리텔링적 반전으로 선회하여 강점인 비쥬얼적인 측면과 구성적인 측면을 버리다시피하며, 힘을 잃어버렸다. 영화 초반 내보였던 명언 '우리는 모두 시궁창 속에 있지만 그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 영화의 스토리텔링 중심에 위치해 있는데, 후반에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원더스트럭>은 충분히 볼 만한 영화이다.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깊은 여운을 남길 것 같진 않지만, 탄성을 자아낼 만한 스토리 내지 구성 내지 비쥬얼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최소한 이 모든 방면에서 후회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적당한 기대감으로 접하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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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태나>


영화 <몬태나> 포스터. ⓒ판씨네마



1892년 미국 뉴멕시코주, 한적한 동네에 백인 가족이 살고 있다. 그들 앞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디언 코만치족은 말을 얻기 위해 일가족을 몰살시켜 버리고 집을 불사른다. 그 와중에 퀘이드 부인(로자먼드 파이크 분)만 살아남는다. 


한편, 대 인디언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블로커 대위(크리스찬 베일 분)는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임무로 원수 같은 옐로우 호크 추장(웨스 스투디 분) 일가를 그들의 고향인 몬태나까지 무사히 돌려보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인디언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던 바, 미군에게 있어서 재앙이자 도살자와도 같은 옐로우 호크를 살려서 무사히 돌려보내는 임무는 인디언에게 있어서 재앙이자 도살자와도 같은 블로커 대위에겐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지만 군인다운 마지막과 이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은 출발 후 얼마 안 가 퀘이드 부인을 만나 함께 한다.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을 조합의 일행, 그들은 도중에 백인을 도살하는 코만치족을 만나고 인디언을 학살하는 백인도살자들도 만나며 대통령의 명령도 무시하는 무자비한 백인 땅주인도 만난다. 그들은 수많은 희생 위에 오래된 증오와 폭력을 초월하는 화해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알아가는데...


미국, 정착민과 원주민의 증오와 화해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크레이지 하트> <아웃 오브 더 퍼니스> <블랙 매스> 등의 묵직한 영화를 내놓으며 고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스콧 쿠퍼 감독의 최신작 <몬태나>, 이 영화 역시 묵직하다. 영화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랫동안 치열하게 치러진 '미국 인디언 전쟁' 종료 직후 미국 백인 정착민과 미국 원주민의 증오와 화해를 그린다. 


15세기 말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위시한 집단의 아메리카 대륙 '재발견' 이후 백인 정착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정착민과 원주민은 때론 협조하며 때론 반목하며 공존해 살아가는 와중 전쟁도 벌인다. 17세기 초반 이들의 전쟁이 본격화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립과 국력 확대와 더불어 원주민의 멸망으로 수렴된다. 


전쟁은 1890년 말에 일어난, 이전에는 '운디드니 전투'였던 '운디드니 학살 사건'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다. <몬태나>의 배경은 그 직후인 1892년이니 만큼 여전히 폭력과 증오의 기억이 모든 이를 지배하고 있었던 때인 것이다. 더군다나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극에 달하는 이들의 여정, 역설적으로 극적인 화해로의 길은 만들어져 있다. '왜'는 정복자인 미국 대통령의 명령 한마디에 집어삼켜지고, '어떻게'가 남았을 뿐이다. 


난감하고 불편한 '화해'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영화는 오래된 반목과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캐릭터와 소집단으로 함축해 보여준다. 미국의 영웅 블로커 대위, 인디언의 영웅 옐로우 호크 일가, 인디언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퀘이드 부인, 인디언 가족 학살의 가해자 윌스 병장. 이 조합은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빛이자 그림자이다. 끝없는 반목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절대 이룩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일행과 조우하는 백인 학살자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백인, 유아독존 땅주인 백인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실 백인 정착민이고 원주민이고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죽여버리는 무법자이다. 그런 만큼 반목과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뒤로 하고 화해의 역사로 나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희생'의 실행자들이다. 이들 덕분에(?) 그들은 한데 뭉칠 수 있게 되었다. 즉, 영화에서 이들은 공공의 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화해는 장엄하고 위대하고 감동적이다. 그 어떤 화해라고 해도 말이다. 그 얼마나 실행에 옮기기 힘든 일인가. 하지만 이 경우, 난감하고 불편하다.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대학살로 막을 내린 기나긴 전쟁의 승리자가 대외적 이미지를 위한 유화정책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영화에선 그런 이미지적 화해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담보로 한 진정한 화해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조차 들여다보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면서 '전우'로서의 우애나 존경심이 밑바탕되어 있는 화해라고 무방할 정도이다. 전쟁의 영웅들인 블로커 대위나 옐로우 호크 추장의 입장에서 보면, 인종만 달라졌을 뿐 이제는 떠나간 전우들을 대체할 새로운 전우를 얻은 것일 뿐이다. 


'미국인'은 누구인가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장엄한 대 여정의 서사시, 와중에 적절히 등장하는 액션과 드라마 그리고 역사적 개인적 심리, 확고한 개성과 신념과 경험을 가진 캐릭터들, 캐릭터들의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 반목에서 화해로 가는 길, 끝없는 희생으로 쌓아올려진 길 위에 남은 이들. 영화는 이런 것들을 복잡하지 않게 단편적이면서 수평적으로 내보이며 상당한 퀄리티를 선보인다. 


중심에는 단연 블로커 대위로 분한 크리스찬 베일과 옐로우 호크 추장으로 분한 웨스 스투디가 있다. 그들은 단편적이고 수평적인 여정이 중심이 되는 영화에 출중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서로를 향한 목숨을 건 인종적 적대감에서 서로를 향한 목숨을 건 인간적 호감으로 변화발전하는 과정을, 거의 이들의 열연에 힘입은 캐릭터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을 통해 미국이란 무엇인가,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영국의 문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말한 한 구절이 보여진다. 미국인에 대한 촌철살인의 그 말은 "미국인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냉정하고, 고립적이며, 절제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살인자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누그러진 적이 없다."로, 인간다움이 파괴되는 현실을 비판해왔던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이 구절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가 말하는 '미국인'은 누구일까. 블로커 대위와 퀘이드 부인으로 대변되는 미국 백인 정착민일까, 이들을 포함한 미국이라는 나라 혹은 아메리카 대륙에 어떤 식으로든 거주하게 된 모든 이들일까.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겠는데, 필자가 보기엔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반목, 폭력, 증오, 화해 모두 절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조화와 통합의 기치 하에 있고 그런 개념의 반석 위에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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