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겟 아웃>


2017년을 넘어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 역사에 남을 <겟 아웃>.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UPI 코리아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해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킨다. 그러며 평론가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아마 1999년 <블레어 위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이후 <쏘우> <파라노말 액티비티> <컨저링> <인시디어스> 등의 대표 시리즈를 지나 <케빈 인 더 우드> <맨 인 더 다크> <위자> <라이트 아웃> 등에 이르렀다. 특히 작년이 정점이었던 것 같다. 


올해에도 <겟 아웃>으로 찾아 왔는데, 어김 없이 짧은 러닝타임과 군더더기 없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존과 다른 게 있다면, 시각적으로 무섭다고 할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컨저링>의 메인 홍보 문구였던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타이틀은 <겟 아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생각할 타이밍을 갖는다면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올 게 분명하다.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크리스가 로즈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외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나가!' ⓒUPI 코리아



크리스(다니엘 칼루야 분)와 그의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암스 분)는 함께 로즈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그곳을 크리스는 꺼린다. 자신은 흑인이고 로즈는 백인이기 때문에. 그에 로즈는 반차별주의자로서의 당당함으로 크리스를 이끈다. 그러며 부모님도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진보적 개념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는 일말의 불안감과 로즈를 향한 신뢰감을 간직한 채 부모님을 봰다. 


흑인인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로즈의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 크리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날 손님들이 대거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파티라고 한다. 뻘쭘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크리스, 다들 그를 호감있게 대해서 다행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흑인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그들의 말말이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근사한 상품처럼 대하는 듯한... 그건 이 비극의 서막이다. 


'get out', '나가' 혹은 '꺼져' 정도가 되겠는데 여기선 '나가'라는 뜻이 알맞을 것 같다. 그 집에서, 로즈 부모님의 집에서 당장 나가야 한다는 말이 않을까 싶다. 그건 크리스의 흑인 경찰 친구가 애초부터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로즈를 향한 신뢰감보다 일말의 불안감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단 말이다.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이토록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대놓고 해라. ⓒUPI 코리아



영화는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보여준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반차별주의자들까지도 은연 중에 행하는 뼛속깊은 차별과 흑인 만이 가지는 우월한 육체적 스펙을 향한 선망과 질투의 반작용으로서의 차별이 그것이다. 둘 다 우리가 흔히 인지하고 있는 차별과는 결이 다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에 편승한 영화들의 레토릭과도 결이 다르다. 


사실 크리스와 로즈가 로즈의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도 뼛속깊은 차별과 불길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나와 치어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처참한 몰골이 주는 형상에서 '흑인' 크리스가 느끼는 바를 알 수 있다. 육식동물들에 둘러싸인 초식동물 한 마리랄까... 그 때문에 온 백인 경찰이 운전자 로즈가 아닌 조수석에 앉은 '흑인' 크리스의 신원 조회만 하려는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굳이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그 징조만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맛봐왔던 '무슨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아니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일인가 터질 거라는 걸.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며,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말이다. 결과는 심리적 공포, 즉 '불편'이었다.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고 불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도는 한계를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심리만으로 선사하는 극강의 공포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는 <컨저링>이 아니라 <겟 아웃>이다. 정녕 극강의 심리공포를 맛볼 수 있다. ⓒUPI 코리아



작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두 공포영화가 있는데, <라이트 아웃>과 <맨 인 더 다크>다. 둘 다 '빛'을 이용해 극강의 공포를 선사했는데, 앞엣것이 말그대로 햇빛의 빛을 이용했다면 뒤엣것은 빛을 볼 수 없는 눈 먼 상태와 빛이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공간을 이용했다. 시각적, 감각적인 것들이라 온몸에 반응이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카메라 워킹과 조명과 캐릭터의 액션에 힘을 실었다. 


반면 <겟 아웃>은 오감이 아닌 '심리'만으로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 대사가 주는 일반적 맥락 뒤에 교묘히 숨어 있는 말과 동작과 생각, 들춰진 숨기고 싶은 기억 등이 주요하게 비춰진다. 그렇게 주어진 공포는, 즉각적이지만 지워질 공포가 아닌 영원히 남아 괴롭힐 것만 같은 진한 공포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배경음악과 대사와 캐릭터의 표정, 동작에 힘을 실었다. 


외국(서양)에서 잠깐 살았을 때 몇 번인가 직접적인 인종차별 발언과 행동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는 상상 속에서도 당하기 싫다. 이 뿌리깊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차별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영화적 설정이길 바라지만,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 그들이 백인우월보수꼴통이 아닌 코스프레일지라도 백흑평등진보반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여전히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를 현존하는 가장 핫하지만 일회성인 장르에 접목시키는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코미디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조던 필레 감독의 자그마치 데뷔작이라 하니,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본업으로 돌아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캡틴 언더팬츠> 목소리로 찾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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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대표되는 대만 청춘영화 최신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주)해머픽쳐스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안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사랑과 음악과 시간여행과 반전이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느 나라 태생인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동양인 것만은 분명한데, 한국은 당연히 아니고 일본도 아니거니와 중국도 아닌 것 같다. 홍콩인 듯 태국인 듯하지만, 정답은 대만이다.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주걸륜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으니 사실 알 만도 하다. 


지난해 혜성처럼 개봉해 '왕대륙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위 대박을 낸 <나의 소녀시대> 또한 대만에서 날아온 청춘영화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지고 있던 대만영화 최고 흥행 스코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새로운 전설이 된 작품인데,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모르게 많은 대만 청춘영화들이 방문했다. 거의 매년 찾아왔는데, 그래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영화는 2, 3년에 하나 정도는 된다.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하다. 가장 최신에 우리를 찾아온 대만 청춘영화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나의 소녀시대> 히로인 송운화의 데뷔작이다. <나의 소녀시대>가 대만에서 대박을 내고 한국에 상륙해 역시 대박을 내니까 비슷한 느낌의 데뷔작을 늦게나마 들여온 것이겠다. 


대만 청춘영화의 최신판 


판타지와 병맛 같은 면모 아래 의외로 슬픔이 깔려 있다. ⓒ(주)해머픽쳐스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는 진중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한 제목과는 다르게 코믹이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나아가 판타지적인 면모도 선사하는 바, 그 면모가 '병맛'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판타지로맨스를 기본 장착하고, 그 뒤로 나온 대만 청춘영화의 면면들을 두루두루 차용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재밌었다.


리 쓰잉(송운화 분)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한다. 어느 날 차에 치일 뻔한 일을 당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이 택우가 있다. 쓰잉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마음에 둔다. 한편, 학교에 이상한 남학생이 있다고 한다.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출몰한다. 쓰잉은 그를 두둔하고 그들은 종종 만나면서 친해진다. 


쓰잉이 일하는 카페엔 사연이 있는 듯한 사람들 투성이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택우와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아토우(브루스 분)를 비롯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카페사장과 여자임이 분명하지만 남자처럼 행세하는 선임 아르바이트생까지. 그 둘은 모두 말수가 적고 음침하기까지 하다. 혹시 이 네 명이 서로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쓰잉을 통해 우리는 네 명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볼 수 있다. 서로 연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끊기고 앞으로도 없을 관계이지만, 조금 다르다. 중요한 건 현재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쓰잉의 눈은 택우를 향해 있기에, 병맛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 이들의 알콩달콩 사랑놀음은 그저 웃기기만 하진 않다. 의외로 슬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 한국에 <나의 소녀시대>에 이어 상륙했다. ⓒ(주)해머픽쳐스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하지만 쓰잉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중 짝사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스토리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슬픔은 거기에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토우가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게 된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고, 쓰잉이 좋아하는 카페 남자가 항상 그 자리에 앉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으며, 카페 사장이 가끔 멍하게 있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다. 심지어 선임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남자처럼 행세하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 소소하게 지나갈 청춘의 통과의례와 같은 사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같은 사연이 없고 같은 기분이 없고 같은 아픔이 없다. 소소할지 모르고 보편적일지 모르나 각자에겐 아주 특별한 사랑의 형태다. 비록 영화에서는 '카페'라는 공간에 모여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대만 청춘영화의 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미 청춘의 시간을 받아들인 바 있는 우리는, 그 시간의 다양한 변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이 영화가 큰 인기를 끌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본 사람이라면 실망을 하진 않을 것이다. 대만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어느 부분을 건드린다. 아마도 청춘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날 '첫사랑'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해석과 영화의 재미


청춘의 시간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달 수 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재밌다. ⓒ(주)해머픽쳐스



한편으론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과거로 눈을 돌린다는 건, 그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려 하는 노력이 아닌 이상 도피 성격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라는 콘텐츠 성격상 있는 그대로의 청춘을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 어느 부분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려 함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대만 청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많은 인기를 끄는 이유에는 현재의 척박함이 반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영화들이 한국에도 건너와 어김 없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한 면이다. 그런 모습이 슬플 것까진 없지만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 없이 그저 보고 재밌으면 그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딛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판타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병맛'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말이다. 그게 B급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의도했다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몇몇 장면은 로맨틱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듯하다. 


이참에 명품 청춘영화들 몇 편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 어느 것은 슬프고 어느 것은 아련하고 어느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편에 속하게 될까? 아마 새로운 챕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코 '명품'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영화일 듯하다. 그 기억에는 언제나 웃음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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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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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버지와 이토씨>


전형적인 일본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이토씨>.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와이드 릴리즈㈜



34세 미혼 여성으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야(우에노 주리 분), 54세 돌싱 남성으로 초등학교에서 급식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토(릴리 프랭키 분)와 동거한다. 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함께 일한 '패배자'인데, 한 번 두 번 여러 번 먹었고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겠지만 당사자들은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듯하다. 


그들 앞에 74세 홀몸으로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아야 아버지(후지 타츠야 분)가 나타난다. 오빠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쌍둥이 아이들의 중학교 입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새언니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아야 네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더니 기겁 하고 토를 하고 소리도 지르는 새언니 상태를 보니 다른 문제가 있는 듯도 하다. 여하튼 20살씩 차이가 나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는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조합의 가족이 동거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조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족 형태는 아니다. 먼저 34세 미혼 여성과 54세 돌싱 남성의 동거부터 비상싱적으로 비추기 쉬운데, 거기에 74세 아버지가 느닷없이 끼어든 꼴이라니. 더욱이 그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윗대까지 거들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최선은 고사하고 최악에 가깝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잔잔한 와중에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주로 문제점들만을 들여다보기에 날카롭게 다가올 수 있겠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일본 사회의 여러 부분을 건드린다. 30대, 심지어 50대까지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 특별하다고만 할 수 없을 정도다. 정규직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야는 '당연히' 아르바이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30대 중반임에도 당연히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아르바이트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거기에 50대인 이토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는 건, 그것도 아무런 자괴감 없이 당연한 듯 생각하는 건, 차라리 충격에 가깝다. 


동양 보편적 문제 중 하나인 노부모 봉양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 사회적으로 피해갈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특히 홀몸이 된 부모, 그중에서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없다고 여겨지는) 홀아버지가 문제다. 여기에 아르바이트로 자기 한몸 겨우 건사하는 자식이 있다면 방법을 찾기란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점점 당연하게 되어 가기에 걱정이다.


이제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단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각자 자신 한몸이나마 건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찌 저찌 살아가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인 듯하지만, 아야와 이토는 아야 아버지와 계속 같이 사는 게 곤란하다. 그렇다고 다시 오빠 네로 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급기야 아버지는 가출하는데, 옛집으로 가 있는 아버지를 일가족이 찾아가 회유해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둘 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혼자 살 게 할 수도 없다. 누구도 나서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데, 이토가 나서서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싸늘하게 말하며 어서 결론을 내라고 다그친다. 그러는 한편 그는 아야를 달래 아야 아버지와 함께 살 준비도 한다. 그의 정체가 뭔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만드는 결정이 아닌가. 


폐쇄적인 가족을 이토가 돕다


폐쇄적인 가족, 이방인의 터치를 받지 않으려 하지만 곪아가고 있다. 그런 가족을 이토가 도우려 정리한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은 하염 없이 낮을 수 있다. 아야 아버지 봉양 문제가 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가족이 아닌 이토가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하다. 나서서 조언이라도 할라 치면 '니가 뭔데 나서냐' '남의 일이라고 아무말 하냐' 하며 무안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상태와 상황이 너무 하다. 내부에서 누구라도 나서서 정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외부에서라도 나서야 하는 것일까. 


이토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나서서 조금씩 정리한다. 아야 아버지와 공통의 관심거리로 친해지고, 아야에게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하고 아야의 의문과 걱정을 덜어준다. 40살 차이가 나는 구세대 아버지와 신세대 딸의 불협화음을 가운데에서 적절히 맞추고 때론 바깥에서 지휘한다. 


'가족'이라 하면 사실 굉장히 폐쇄적일 수 있다. 그런 만큼 당사자들은 모르는 폐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럴 때 가족 아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걸 생각할 수 없다. 영화는 그렇지만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처럼 보이는 이토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또 비중이 높은 이유다. 


이토는 50대로 경륜은 굉장할지 모르지만 보기에 굉장히 허름하고 또 아르바이트로 연명할 정도로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와 사귀기 전에 아야가 '패배자'로 명명한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의 '은은함'과 '강하지 않음'이야말로 오히려 폐쇄적인 가족의 단단함을 뚫고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의 잔잔함과 엽기


잔잔한 와중에 특별함을 선사한 영화로 기억에 은은히 남을 것 같다. ⓒ와이드 릴리즈㈜



내가 생각하는 일본 영화의 특징이 있는데, 잔잔함과 엽기 또는 특이함을 공존시킨다는 것이다. 별 갈등 없이 흐르다가 갑자기 쉬이 생각하기 힘든 장면이나 대사가 튀어나오거나 특정 캐릭터성이 발현되는데, 이 영화도 그런 특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잔잔함은 영화 내내 계속되었고, 엽기 또는 특이함은 제목대로 아야 아버지와 이토에게서 발현되었다. 


아야 아버지의 차마 말로 하기 힘든 비밀과 영화 마지막에서의 특별한 결정, 그리고 이토의 막말 비슷하지만 아야네 가족 나아가 영화 전체의 분기점이 되는 대사 한 방.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34세 미혼 여성 아르바이트생과 54세 돌싱 남성 아르바이트생의 동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엽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 모습이 결코 엽기적이지만은 않은, 아니 평범하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아야 역의 우에노 주리와 아야 아버지 역의 후지 타츠야는 세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더욱이 역할 자체에 개성이 다분해 충분히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반면 그 중간에 위치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양쪽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이토 역의 릴리 프랭키는 비교불가의 고도 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 결과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그 가장 큰 비결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외모와 완벽히 상충되는 중후한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믿음이 가는 목소리, 외모와 상충되는 만큼 믿음의 강도가 높아지는 듯하다. 그 덕분에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특성을 두루 가지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듯하다. 과하지 않은, 그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극중 역할에 충실한 듯한 그의 모습이 한동안 맴돌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를 향해 뛰는 아야,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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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운더>


전세계 최고이자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맥도날드'의 설립 비하인드 이야기를 다룬 <파운더>. ⓒ크리픽쳐스



고백하건대, 프랜차이즈 중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가장 선호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욕하면서도 가는 곳이다. 가장 상업적이기 때문일 텐데, 또 가장 대중적이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 일단 다른 어느 곳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적정 수준의 '가격'도 한몫 한다. 어딜 가든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보다 '버거킹'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버거킹'은 엄청 비싸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두 회사의 공통점은 또 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 맥도날드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레이 크룩'과 스타벅스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하워드 슐츠' 말이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시작'한 이들이 아니다. 본래 운영되고 있던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는 바, 아마 일반인들에겐 비하인드 스토리가 될 것이고 경영인들에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영의 산 보고'일 것이다. 자본과 경쟁의 양대축으로 지탱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선 과정은 그야말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추진력과 끈기를 비롯,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까지 배울 수 있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맥도날드 형제? 레이 크룩?


영화는 '맥도날드의 진짜 설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는 의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크리픽쳐스



영화 <파운더>는 맥도날드의 시작이 아니라 레이 크룩(마이클 키튼 분)의 맥도날드가 시작되는 때를 이야기한다. 맥 맥도날드(존 캐럴 린치 분)와 딕 맥도날드(닉 오퍼맨 분)가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너디노에서 시작한 '맥도날드'. 1954년, 밀크쉐이크 기계를 팔러 다니는 레이 크룩이 그 가게에 한 눈에 반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다. 맥도날드 형제에게 모든 권리가 있으면서 꼬박꼬박 로얄티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레이 크룩에도 로얄티가 지불된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시도 끝에 혁명적인 '스피디 시스템'을 안정화 시킨 맥도날드 형제, 그 위에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미국의 교회'처럼 상징화 시키겠다는 야망의 레이 크룩. 이들은 이후 사사건건 부딪힌다. 원칙주의자로서 돈보다 안정화, 그리고 가족을 우선시 한 맥도날드 형제, 반면 레이 크룩은 위험이 따르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넓혀가고자 한다. 


새롭게 투자한 점주들이 자기 마음대로 운영을 하고, (레이 크룩 입장에서) 터무니 없이 낮은 로얄티를 받는 계약 때문에 겉만 번지르르한 빈털털이가 될 위기에 처하는 등 레이 크룩은 가정을 등한시 하면서까지 위기를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맥도날드 형제와의 충돌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 끝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레이 크룩은 엄청난 금액을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고 '맥도날드'를 사들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레스토랑을 시작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관여해 혁명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맥도날드 형제인가. 레스토랑을 만들지도 시스템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지역을 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만방에 떨치게 한 레이 크룩인가. 


레이 크룩의 성공, 그만의 것인가?


결국 맥도날드는 레이 크룩의 손으로 넘어가고 또한 그의 손에 의해 이만큼 컸지만, 과연 온전히 그만의 것인지 의문이 든다. ⓒ크리픽쳐스



<파운더>는 전후(戰後) 미국의 엄청난 경제호황 하에서의 아메리카 드림을 현실로 옮긴 레이 크룩의 성공기를 뼈대로 한다. 52세의 한물 간 세일즈맨, 접이식 탁자를 비롯해 휴지, 밀크쉐이크 기계까지 온갖 것들을 팔아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레이 크룩.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급이 있어야 수요가 있다'를 골자로 하는 이론을 앞세워 진지한 태도로 끈기 있게 설득한다. 잘 팔리진 않지만. 


그는 '준비된 인재'였던 거다. 단지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뿐. 맥도날드는 그와 운명의 단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의 기막힌 성공 만을 비추지 않는다. 그가 성공으로 다가갈수록 빈털털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맥도날드 형제가 구축한 세계를 파괴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가정 파괴가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데, 그는 가정을 등한시 하며 앞으로도 계속 등한시 할 것이라 한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룩을 통해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엿볼 수 있다. 엄청난 노력으로 이루어낸 혁신과 그 즉시 시행되는 보수화, 한편 끝없는 야망과 체계적인 듯 임기응변식인 듯 어떻게든 무마하는 철면피와 돌파하는 불도저. 이 두 큰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미국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조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말하고자 할 때 잘하는 수법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대체로 '국뽕'이라 할 만한 요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런 면까지 보이진 않는다. 대신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지극한 성공의 모습과 그 이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공존시키며, 균형을 맞추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관객들에게 미루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이 크룩의 성공은 온전히 그만의 것인가?'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


영화 배우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 같다. <파운더> 또한 큰 자리를 차지할듯. ⓒ크리픽쳐스



1970년대 후반 드라마로 데뷔한 후 1980년대 초반 영화로 데뷔한 '마이클 키튼'. 1988년에 <유령 수업>으로 팀 버튼과 함께 하고는 이듬해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중론, 하지만 영화는 대대적으로 흥행하여 80년대를 대표할 정도가 된다. 키튼은 역대 최고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1992년에도 팀 버튼과 <배트맨 2>를 찍어 성공을 이어 나간다.


이후 그럭저럭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출현해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는 키튼, 어느새 잊혀진 히어로가 된 듯하다. 그러던 2014년 키튼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 <버드맨>으로 완전히 부활한다. 아니, 비로소 그는 완연한 배우가 된 듯하다. 다음해에는 <스포트라이트>에 주연으로 활약한다. 그야말로 2014, 2015년 당해 최고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파운더>다. 이 영화의 레이 크룩도 어느 정도 키튼 본인이 투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편안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걸까?


사실상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었는데, 하등 빈 곳이 없어 보였다. 이전 두 작품에서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이번엔 그에 비해 그에게 쏠린 무게가 엄청나 보였다. 왕년의 초특급 스타가 경험과 연륜이 완연하면 이 정도 무게감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끔 하는 키튼의 연기 스펙트럼. 


키튼은 2017년에만 기대작 두 편에 출현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아메리칸 어쌔신>. 두 작품 다 핫한 신세대 스타 톰 홀랜드와 딜런 오브라이언을 사실상 원톱 주연으로 내세운 바, 키튼은 다시 조력자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 역할은 그렇지 않은 듯,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나오며 미치 랩과 함께 활동하며 미치 랩만큼 중요한 스탠 헐리로 분할 예정이다. 


60대 중반이 지나는, 적지 않은 나이의 키튼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 부활은커녕 사람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일쑤인데, 키튼은 어떻게 보면 행운아일지 모르겠다. 부디 지금 이대로 경험과 연륜으로 좋은 작품에 출현해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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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니어스>


'편집자'와 '천재 작가'라니,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되는 영화 <지니어스>. ⓒ라이크콘텐츠



난 출판편집자다. 주로 소설을 많이 다루었는데, 결코 '잘 나가는' 편집자가 되진 못한다. 내가 만든 책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해 출판사와 저자를 기쁘게 해준 적이 없다. '유능한' 편집자라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괜찮은 책조차 되지 않을 형편 없는 원고를, 괜찮은 책으로는 만들어낸 경험이 다수 있으니까. 


그럼 '좋은' 편집자라면? 답하기가 어렵다. 먼저 좋은 편집자가 뭔지 아직 잘 모르니까 말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저자의 삶과 나아가 세상까지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원고(책)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편집자. 유명한 저자와 함께 하면서도, 무명의 저자를 들여다볼 줄 아는 편집자. 무엇보다 독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집자. 


영화 <지니어스>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 굴지의 출판사 스카라이브너스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 분)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 문학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압도적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을 편집한 이다. 영화는 그런 그에게 뉴욕 전역의 출판사에서 거절 당한 토마스 울프(주드 로 분)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맥스는 울프의 원고를 읽고는 바로 울프와 계약한다. 


'유명 편집자'의 삶은?


유명한 베테랑 편집자가 우리 시대엔 존재할까? 20세기 초 미국이라면 가능하겠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이크콘텐츠



유명 소설가의 삶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소설가가 있다면 반드시 편집자가 있어야 하는 법, 그런데 '유명 편집자'의 삶은? 아니, 편집자가 애초에 유명해질 수가 있나 싶다. 여기서 '유명'은 출판계 내부가 아닌 대중적으로 그러냐는 말이다. 창작만큼 코디와 편집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여러 콘텐츠를 통해 편집자가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도 그에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열정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엄연히 초짜 소설가인 울프를 베테랑 편집자 맥스가 다잡아 나간다. 과한 열정이 불러일으킨, 또는 개인적 스타일일 수도 있는 과도한 수사를 과감히 쳐내 독자들에게 읽힐 만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울프는 그대로 따르고 책은 대박이 난다. 하지만, 맥스의 아내 루이스(로라 리니 분)와 울프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 분)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맥스와 울프를 느낀다. 


상당한 분량의 첫 책, 그리고 대성공. 울프는 톨스토이라도 되어볼 심상인지 자그마치 5000매 짜리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들고 나타난다. 이대로는 절대 책으로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한 맥스는, 울프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가멸차고 냉정한 편집을 가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들더라도 좋은 책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더욱 일에 열정을 퍼부으면서 그들 곁에 있는 여인들은, 특히 엘린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울프의 도를 넘은 과도한 열정은 파멸적 비극을 예견하고,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맥스의 마음과 자주 충돌하며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런가 하면, 맥스가 울프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엘린은 도무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한편, 맥스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충실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가족과는 가깝지 못한다. 


조화롭기 힘든 조합의 기막힌 조


냉철하고 대쪽 같은 베테랑 편집자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초보 소설가의 조합은,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라이크콘텐츠



맥스의 대사를 통해 형상화되는 진정한 편집자의 자세는 대체로 정석적이다. '나는 이 글이 좋아. 하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독자들이 읽었을 때 좋아야 해.'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뒤에서 조력할 뿐이야.' 등. 반면 울프는 열정적인 예술가의 표본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지 못하면 더 이상 소설가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를 거야.' 등. 


맥스와 울프의 조합은 현실과 이상의 기막힌 조화를 상기시킨다. 물과 불, 진보와 보수만큼 조화롭기 힘든 조합 아닌가. 그래서 우린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완벽함'을 보고 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남은 작가와 편집자, 편집자와 작가.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아쉽게도 이 둘의 행복한 시절만을 그리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대상들이 감수해야 할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울프의 연인 엘린이 그 표상인 바, 그러나 영화에 긴장을 조성하기 위함으로만 껴넣은 인물인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녀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영화의 만듦새까지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한 영화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들어가야 할 인물이자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편집자와 소설가의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사랑에 죽고 못 사는 감정적이고 퍼스널한 관계를 대비시켰으니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게 당연하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행해야 할 스텝


'편집자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출판사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이크콘텐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황홀해 마지 않는 시대 1920년대 프랑스 파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당대를 넘어 역사상 길이 남을 예술가들을 본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거투루드 스타인, 피카소까지. 보는 관객 또한 황홀해 마지 않았을 면면들. 우린 <지니어스>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미국 뉴욕이라면, 대공황의 한가운데일 터. 모든 출판사들이 경제, 사회 서적을 앞다투어 펴냈을 것이다. 즉, 돈이 될 만한 책 말이다. 문학은 뒷전일 수밖에 없을 테고, 울프 같은 초짜에 과도한 열정을 책에 고스란히 옮기는 예술가 나부랭이는 안중에도 없었을 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또 한 번의 방점을 찍는다. 일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할까. 


유명 작가들의 책을 낸 편집자와 출판사는 부지기수다. 돈 뿐만 아니라 그게 편집자와 출판사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기도 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진정 명망을 높이는 일은 아무도 찾지 않고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분명 보석인 게 분명한 이를 발굴해 제대로 키워내는 것일 테다. 거기엔 말 못할 정도의 노력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안주와 모험은, 하나가 시작되면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보고 의식하며 발 맞추어 나가야 하는 동지다. 이 영화는 여러 관계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스텝을 일깨우고 알려준다. 베테랑 편집자 맥스는 천재 소설가 울프를 끌어올린 천재 편집자가 아닌, 그릇이 넓은 관계의 천재였던 것이다. 모든 편집자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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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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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쇼콜라>


광대극에 혁명을 가져온, 역사상 유명한 두 광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쇼콜라> ⓒ판씨네마



19세기 말 프랑스, 한때 잘나갔던 광대 푸티트는 여지 없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서커스단 합류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단장은 그에게 20세기 관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대를 원한다. 푸티트는 구상에 들어가고, 식인종 연기를 하는 흑인 광대 카낭가를 눈여겨 본다. 설득 끝에 콤비를 이룬 푸티트와 카낭가, 단번에 상종가를 올리며 지방의 소규모 서커스단을 인기 서커스단으로 탈바꿈 시킨다. 


최초의 백인과 흑인 조합 콤비, 단장은 카낭가의 이름을 쇼콜라로 바꾼다. 그렇게 광대극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인기가 수도 파리까지 퍼진듯,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누보 서커스단이 그들을 스카웃한다. 파리 진출도 단번에 성공시키는 그들, 하지만 오직 '광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매진하는 푸티트와는 달리 쇼콜라는 치솟는 인기로 여자와 도박과 사치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다. 


영화 <쇼콜라>는 영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푸티트와 쇼콜라의 시소의자> 실제 주인공 인생 역전을 그린다. '영화'라는 장르의 시작을 함께 할 정도이니 그 엄청난 인기와 명성이 짐작가는 바, 영화는 특히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누리고자 했던 쇼콜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고 다층적이었으며 다변적이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광대' 쇼콜라, 그리고 '흑인' 쇼콜라


푸티트는 '광대'이고 싶었고, 쇼콜라는 '연예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으니... ⓒ판씨네마



영화의 시작은 쇼콜라가 아닌 푸티트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푸티트, 한물 간 스타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패기어린 애송이 같은 이미지다. 영화는 푸티트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티트는 영화에서 '백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사실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제 푸티트 부활 프로젝트의 파트너, 쇼콜라가 나올 차례. 곧 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영화는 푸티트가 아닌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콤비는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결고리 정도일 뿐이다. 


인기와 명성을 얻을 대로 얻은 쇼콜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모든 무대 기획은 푸티트의 몫, 쇼콜라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일은 하되, 밖으로 싸도는 쇼콜라. 영화는 푸티트 또는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아니라 쇼콜라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 같다. 그렇다. '흑인' 쇼콜라와 '광대' 쇼콜라. 


이 콤비 무대의 백미는 '백인' 푸티트가 '흑인' 쇼콜라의 엉덩이를 걷어 차는 것. 이 콤비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행사 관계자들이나 푸티트와 쇼콜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압력을 받고 돌아와 깨달음을 얻은 쇼콜라는 그 행위가 더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대'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광대 이전에 '흑인'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존재 말살의 층위


연예인에서 시작해 광대로 나아가고 자 했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 쇼콜라. 다른 길을 택한다. ⓒ판씨네마



당시 광대라고 하면,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면에서 푸티트는 진정한 광대다. 반면, 쇼콜라는 광대라기보다 광대병에 걸린,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단한 콤비의 한 축이지만, 푸티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다. '광대'라는 층위로 평등하게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푸티트보다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존재 쇼콜라가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더 인기가 많고 더 알려지는 것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쇼콜라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인간 이하의 원숭이로 표현해 비하를 이용한 코미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완전히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누보 서커스단장은 이 완전히 다른 두 층위를 하나로 슬며시 묶어버린다. 시궁창에 있던 너를 건져내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어디냐며, 광대라면 자신을 잊고 대중을 위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쇼콜라는 '광대'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존재 말살의 층위를, '흑인'이라는 절대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존재 말살의 층위와 일치화해야 하는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평등 국가 프랑스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 푸티트가 그와 함께 한 건 광대로서의 쓰임새를 본 것이지만 그 안에도 그런 시각은 있었다. 더욱이 누보 서커스단장이 그를 가져다 쓴 건 다분히 '흑인 광대'로서의 쓰음새를 본 것이겠다. 이 뿌리 깊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틀에 반기를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봐야 할 건 쇼콜라의 '반기'인 것이다. 


혁명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


광대를 넘어, 흑인을 넘어,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하지만 그 비극적인 끝이 예견되어 있는 것 같다. ⓒ판씨네마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층위를 걷어내고 쇼콜라에게 집중해야 할 건, 그의 달라진 생각 이후 행동으로 옮기는 직접적 '반기'다. 아니 '혁명'에 가깝다고 할까. 그 장면은 굉장한 충격과 함께 사이다 같은 속시원함을 선사하는데, 그 어떤 폭력·비폭력 혁명 또는 반기보다 매력적이다. 방법으로 보면 문학적이라고 할까 급수로 보면 고급지다고 할까. 


그의 마지막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당대 흑인이 그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 때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자리는 흑인의 자리가 아니고, 그 인기와 명성은 흑인의 것이 아니다. 아니, 흑인의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혁명의 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줄 뿐이다. 


혁명이란 수많은 실패와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알 것이다.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혁명의 빛이 조금이나마 비출 것이다. 쇼콜라는 그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혔고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잊히고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영화는 그의 '위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벼운 와중에 진중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흑인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을 보일 순 없었거니와 함께 하는 누구도 없었다. 혼자였다. 혼자였기에 완전한 한계에 직면하고 끝없는 방황을 했지만, 나아갔다. 당연한 걸 뒤로 하고 홀로 나아간다는 것,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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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슬로운>


우리에겐 낯선 '총기 규제' 이슈와 '로비스트'의 삶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보여준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자타공인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 최고의 회사를 전격적으로 그만둔다. 거대 권력이 의뢰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 일명 '히튼-해리슨 법' 반대 로비를 슬로운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히튼-해리슨 법 찬성 로비를 맡은 작은 회사로 이직한다. 옛날의 동지가 곧 적이 된 것이다. 


무지막지한 자금을 앞세워 히튼-해리슨 법 반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거대 권력에 맞서, 이 작은 회사가 통과를 무산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무슨 짓이든'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 슬로운은 로비스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로비스트가 합법화는 물론 활성화까지 되어 있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의 삶과 직업과 윤리와 신념을 제시카 차스테인의 신들린 연기로 보여준다. 우리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특수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의회 공작 활동을 벌이는 게 목적인 직업 '로비스트'와 역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총기 규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자체로 상당히 어렵고 먼 느낌의 영화다. 이 거리감을 무엇으로 좁힐 것인가.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고 타이트한 웰메이드


프로페셔널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제시카 차스테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존 매든 감독이 제대로 된 옷을 입혀줬다. ⓒ메인타이틀픽쳐스



<미스 슬로운>의 마에스트로는 '존 매든'으로, 20여 년 전 화제의 중심이었던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감독이다.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된 웰메이드 영화의 대명사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미스 슬로운>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전문직 로비스트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선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스 슬로운'을 분한 제시카 차스테인의 존재감은 그에 완벽히 부합해 형형히 빛난다. 2000년대 중반에 얼굴을 내민 그녀는, 존 매든 감독의 <언피니시드>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이후 <트리 오브 라이프> <헬프> <제로 다크 서티> <인터스텔라> <마션> 등으로 자신만의 자리를 꿰찼다. 특히 <제로 다크 서티>에서 분한 마야는 그녀에게 가장 잘 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슬로운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직업, 특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직업을 소재로 한 영화가 종종 눈에 띈다. 대략 화려하기 그지 없고 다가가기 힘들거니와 직업에 본인 자체가 투영되는 직업들이다. 우린 덕분에 새로운 '인간 군상'군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스 슬로운>은 어떨까? 화려하고 세련된 직업인으로서의 모습 이면의 아프고 힘든 보통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맞닥뜨릴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이면의 모습조차도 '로비스트'라는 직업인의 한 측면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래서 시종일관 단 한 순간도 한가로울 틈이 없다. 쉴 타이밍 같은 건 없고,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도 존재하지 않으며, 잠깐이라도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로비스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영화도 이해할 수 없다.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이, 다분히 타의에 의해서이지만 타이트하고 정갈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직업, 로비스트


로비스트와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신념', 하지만 로비스트야말로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한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슬로운의 삶은 오직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맞춰져 있다. 정확히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통해 절대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에 맞춰져 있겠다. 오직 승리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그런데 로비스트는 '선'을 넘기가 무척 쉬운 직업이다. 개인의 신념과 직업인의 신념이 부딪힐 때 맞닥뜨리게 되는 선 말이다. 함정은, 슬로운에게 신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로비스트라 하면 통념적 도덕에도 직업윤리에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정당한 전략과 전술이 아닌 뇌물과 협박 등을 일삼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비' 자체가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은밀히 행하는 교섭 아닌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더욱 '신념'이라는 걸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로비스트라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닌 직업이겠는가? 극 중에서 동료들이 최고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슬로운을 멀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로비스트는 직업 특성상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하기에 기본적으로 서로의 신념에 합이 맞아야 한다. '총기 규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일 수 있는 국가적 이슈에 신념보다 돈이 앞설 것인가, 권력이 앞설 것인가, 명예가 앞설 것인가. 슬로운은 돈과 권력이 앞서는 회사를 때려 치우고, 개인적 '승리'의 발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문제는, '오직 승리'가 총기 규제와 관련된 신념 밖에 있는 개념이라는 것. 


총기 규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 때문에 적을 옮긴 것 같은 슬로운이, 점점 총기 규제가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옮겨가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녀가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 다면 총기 규제 법안은 통과될 수도 있다. 그녀가 아니면 이길 수 없으니까. 이 난감한 상황이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딜레마, '총기 규제' 이슈


이 영화의 핵심 이슈는 '총기 규제' 딜레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깊이 파고들수록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이 영화가 맞부딪히는 신념, '총기 규제' 이슈에 가까이 가보자.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50대 50의 절대적 딜레마 중에 하나일 테다. 극 중에 나오는 '히튼-해리슨 법'은 가상이지만, '모든 총기 판매 시 신원 조사 의무화를 명시한 총기 규제 강화 입법안'이다. 아주 강력한 총기 규제 법안이다. 좋다. 


이에 대항하는, 총기 규제 반대 법안을 내 자신의 사익 추구를 일삼으려 하는 거대 권력의 논리는 무엇일까. '수정헌법 2조'다.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 총기 규제보다 더 상위 개념일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다.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정치적 사항들을 차치하고 그 자체로만 바라보자.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총기를 휴대해야 하는가. 이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보다 근본적인 시각에서 기인한다. 정답은 없고 끝 없는 정쟁만 있을 뿐이다. 때와 장소, 사람과 환경, 경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기에 이 '로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개인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총기는 규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총기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평소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도 한몫 할 것이다. 그렇지만, 총기 규제를 한다 해도 음지에서 계속 이어나갈 것이 자명하기에 오히려 총기를 갖추지 못한 이들이 위험에 빠질 요지가 늘어날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한 쪽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겠다. 아무런 신념도 지니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또한 나의 신념뿐 아니라 누구나의 신념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신념 없는 슬로운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신념 없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신념 없는 이들이 용기를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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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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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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