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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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쇼콜라>


광대극에 혁명을 가져온, 역사상 유명한 두 광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쇼콜라> ⓒ판씨네마



19세기 말 프랑스, 한때 잘나갔던 광대 푸티트는 여지 없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서커스단 합류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단장은 그에게 20세기 관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대를 원한다. 푸티트는 구상에 들어가고, 식인종 연기를 하는 흑인 광대 카낭가를 눈여겨 본다. 설득 끝에 콤비를 이룬 푸티트와 카낭가, 단번에 상종가를 올리며 지방의 소규모 서커스단을 인기 서커스단으로 탈바꿈 시킨다. 


최초의 백인과 흑인 조합 콤비, 단장은 카낭가의 이름을 쇼콜라로 바꾼다. 그렇게 광대극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인기가 수도 파리까지 퍼진듯,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누보 서커스단이 그들을 스카웃한다. 파리 진출도 단번에 성공시키는 그들, 하지만 오직 '광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매진하는 푸티트와는 달리 쇼콜라는 치솟는 인기로 여자와 도박과 사치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다. 


영화 <쇼콜라>는 영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푸티트와 쇼콜라의 시소의자> 실제 주인공 인생 역전을 그린다. '영화'라는 장르의 시작을 함께 할 정도이니 그 엄청난 인기와 명성이 짐작가는 바, 영화는 특히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누리고자 했던 쇼콜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고 다층적이었으며 다변적이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광대' 쇼콜라, 그리고 '흑인' 쇼콜라


푸티트는 '광대'이고 싶었고, 쇼콜라는 '연예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으니... ⓒ판씨네마



영화의 시작은 쇼콜라가 아닌 푸티트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푸티트, 한물 간 스타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패기어린 애송이 같은 이미지다. 영화는 푸티트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티트는 영화에서 '백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사실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제 푸티트 부활 프로젝트의 파트너, 쇼콜라가 나올 차례. 곧 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영화는 푸티트가 아닌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콤비는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결고리 정도일 뿐이다. 


인기와 명성을 얻을 대로 얻은 쇼콜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모든 무대 기획은 푸티트의 몫, 쇼콜라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일은 하되, 밖으로 싸도는 쇼콜라. 영화는 푸티트 또는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아니라 쇼콜라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 같다. 그렇다. '흑인' 쇼콜라와 '광대' 쇼콜라. 


이 콤비 무대의 백미는 '백인' 푸티트가 '흑인' 쇼콜라의 엉덩이를 걷어 차는 것. 이 콤비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행사 관계자들이나 푸티트와 쇼콜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압력을 받고 돌아와 깨달음을 얻은 쇼콜라는 그 행위가 더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대'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광대 이전에 '흑인'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존재 말살의 층위


연예인에서 시작해 광대로 나아가고 자 했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 쇼콜라. 다른 길을 택한다. ⓒ판씨네마



당시 광대라고 하면,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면에서 푸티트는 진정한 광대다. 반면, 쇼콜라는 광대라기보다 광대병에 걸린,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단한 콤비의 한 축이지만, 푸티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다. '광대'라는 층위로 평등하게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푸티트보다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존재 쇼콜라가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더 인기가 많고 더 알려지는 것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쇼콜라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인간 이하의 원숭이로 표현해 비하를 이용한 코미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완전히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누보 서커스단장은 이 완전히 다른 두 층위를 하나로 슬며시 묶어버린다. 시궁창에 있던 너를 건져내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어디냐며, 광대라면 자신을 잊고 대중을 위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쇼콜라는 '광대'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존재 말살의 층위를, '흑인'이라는 절대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존재 말살의 층위와 일치화해야 하는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평등 국가 프랑스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 푸티트가 그와 함께 한 건 광대로서의 쓰임새를 본 것이지만 그 안에도 그런 시각은 있었다. 더욱이 누보 서커스단장이 그를 가져다 쓴 건 다분히 '흑인 광대'로서의 쓰음새를 본 것이겠다. 이 뿌리 깊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틀에 반기를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봐야 할 건 쇼콜라의 '반기'인 것이다. 


혁명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


광대를 넘어, 흑인을 넘어,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하지만 그 비극적인 끝이 예견되어 있는 것 같다. ⓒ판씨네마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층위를 걷어내고 쇼콜라에게 집중해야 할 건, 그의 달라진 생각 이후 행동으로 옮기는 직접적 '반기'다. 아니 '혁명'에 가깝다고 할까. 그 장면은 굉장한 충격과 함께 사이다 같은 속시원함을 선사하는데, 그 어떤 폭력·비폭력 혁명 또는 반기보다 매력적이다. 방법으로 보면 문학적이라고 할까 급수로 보면 고급지다고 할까. 


그의 마지막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당대 흑인이 그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 때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자리는 흑인의 자리가 아니고, 그 인기와 명성은 흑인의 것이 아니다. 아니, 흑인의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혁명의 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줄 뿐이다. 


혁명이란 수많은 실패와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알 것이다.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혁명의 빛이 조금이나마 비출 것이다. 쇼콜라는 그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혔고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잊히고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영화는 그의 '위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벼운 와중에 진중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흑인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을 보일 순 없었거니와 함께 하는 누구도 없었다. 혼자였다. 혼자였기에 완전한 한계에 직면하고 끝없는 방황을 했지만, 나아갔다. 당연한 걸 뒤로 하고 홀로 나아간다는 것,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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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슬로운>


우리에겐 낯선 '총기 규제' 이슈와 '로비스트'의 삶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보여준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자타공인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 최고의 회사를 전격적으로 그만둔다. 거대 권력이 의뢰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 일명 '히튼-해리슨 법' 반대 로비를 슬로운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히튼-해리슨 법 찬성 로비를 맡은 작은 회사로 이직한다. 옛날의 동지가 곧 적이 된 것이다. 


무지막지한 자금을 앞세워 히튼-해리슨 법 반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거대 권력에 맞서, 이 작은 회사가 통과를 무산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무슨 짓이든'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 슬로운은 로비스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로비스트가 합법화는 물론 활성화까지 되어 있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의 삶과 직업과 윤리와 신념을 제시카 차스테인의 신들린 연기로 보여준다. 우리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특수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의회 공작 활동을 벌이는 게 목적인 직업 '로비스트'와 역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총기 규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자체로 상당히 어렵고 먼 느낌의 영화다. 이 거리감을 무엇으로 좁힐 것인가.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고 타이트한 웰메이드


프로페셔널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제시카 차스테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존 매든 감독이 제대로 된 옷을 입혀줬다. ⓒ메인타이틀픽쳐스



<미스 슬로운>의 마에스트로는 '존 매든'으로, 20여 년 전 화제의 중심이었던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감독이다.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된 웰메이드 영화의 대명사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미스 슬로운>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전문직 로비스트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선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스 슬로운'을 분한 제시카 차스테인의 존재감은 그에 완벽히 부합해 형형히 빛난다. 2000년대 중반에 얼굴을 내민 그녀는, 존 매든 감독의 <언피니시드>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이후 <트리 오브 라이프> <헬프> <제로 다크 서티> <인터스텔라> <마션> 등으로 자신만의 자리를 꿰찼다. 특히 <제로 다크 서티>에서 분한 마야는 그녀에게 가장 잘 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슬로운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직업, 특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직업을 소재로 한 영화가 종종 눈에 띈다. 대략 화려하기 그지 없고 다가가기 힘들거니와 직업에 본인 자체가 투영되는 직업들이다. 우린 덕분에 새로운 '인간 군상'군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스 슬로운>은 어떨까? 화려하고 세련된 직업인으로서의 모습 이면의 아프고 힘든 보통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맞닥뜨릴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이면의 모습조차도 '로비스트'라는 직업인의 한 측면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래서 시종일관 단 한 순간도 한가로울 틈이 없다. 쉴 타이밍 같은 건 없고,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도 존재하지 않으며, 잠깐이라도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로비스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영화도 이해할 수 없다.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이, 다분히 타의에 의해서이지만 타이트하고 정갈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직업, 로비스트


로비스트와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신념', 하지만 로비스트야말로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한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슬로운의 삶은 오직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맞춰져 있다. 정확히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통해 절대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에 맞춰져 있겠다. 오직 승리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그런데 로비스트는 '선'을 넘기가 무척 쉬운 직업이다. 개인의 신념과 직업인의 신념이 부딪힐 때 맞닥뜨리게 되는 선 말이다. 함정은, 슬로운에게 신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로비스트라 하면 통념적 도덕에도 직업윤리에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정당한 전략과 전술이 아닌 뇌물과 협박 등을 일삼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비' 자체가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은밀히 행하는 교섭 아닌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더욱 '신념'이라는 걸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로비스트라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닌 직업이겠는가? 극 중에서 동료들이 최고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슬로운을 멀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로비스트는 직업 특성상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하기에 기본적으로 서로의 신념에 합이 맞아야 한다. '총기 규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일 수 있는 국가적 이슈에 신념보다 돈이 앞설 것인가, 권력이 앞설 것인가, 명예가 앞설 것인가. 슬로운은 돈과 권력이 앞서는 회사를 때려 치우고, 개인적 '승리'의 발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문제는, '오직 승리'가 총기 규제와 관련된 신념 밖에 있는 개념이라는 것. 


총기 규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 때문에 적을 옮긴 것 같은 슬로운이, 점점 총기 규제가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옮겨가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녀가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 다면 총기 규제 법안은 통과될 수도 있다. 그녀가 아니면 이길 수 없으니까. 이 난감한 상황이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딜레마, '총기 규제' 이슈


이 영화의 핵심 이슈는 '총기 규제' 딜레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깊이 파고들수록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이 영화가 맞부딪히는 신념, '총기 규제' 이슈에 가까이 가보자.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50대 50의 절대적 딜레마 중에 하나일 테다. 극 중에 나오는 '히튼-해리슨 법'은 가상이지만, '모든 총기 판매 시 신원 조사 의무화를 명시한 총기 규제 강화 입법안'이다. 아주 강력한 총기 규제 법안이다. 좋다. 


이에 대항하는, 총기 규제 반대 법안을 내 자신의 사익 추구를 일삼으려 하는 거대 권력의 논리는 무엇일까. '수정헌법 2조'다.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 총기 규제보다 더 상위 개념일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다.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정치적 사항들을 차치하고 그 자체로만 바라보자.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총기를 휴대해야 하는가. 이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보다 근본적인 시각에서 기인한다. 정답은 없고 끝 없는 정쟁만 있을 뿐이다. 때와 장소, 사람과 환경, 경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기에 이 '로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개인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총기는 규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총기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평소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도 한몫 할 것이다. 그렇지만, 총기 규제를 한다 해도 음지에서 계속 이어나갈 것이 자명하기에 오히려 총기를 갖추지 못한 이들이 위험에 빠질 요지가 늘어날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한 쪽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겠다. 아무런 신념도 지니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또한 나의 신념뿐 아니라 누구나의 신념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신념 없는 슬로운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신념 없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신념 없는 이들이 용기를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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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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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17세기 중반 일본,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다. 그 한가운데에서 떨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 그의 표정을 보니 흔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의 소식은 끊겨버렸다. 몇 년이 흘렀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인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스승의 부정적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떠난다. 물론 복음 전파의 목적도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의 부정적 소문은 다름 아닌 '배교'였다. 불교로 개종하고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마카오에서 일본인 안내책 키치지로를 만나 함께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철저히 종교적 신념을 숨기며 살아가는 독실한 천주교도들이었다. 모두 일본인으로, 두 신부를 철저히 숨기며 극진히 대접한다. 두 신부의 복음 전파 목적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두고볼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이후 3년 만에 <사일런스>로 신작 나들이를 했다. 러닝타임은 20분이나 줄었지만, 묵직함은 족히 20배는 늘었다. 일본이 낳은 거장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을 원작으로, 스콜세지가 1988년부터 30여 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저 두 거장이 만든 침묵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면 될 일이다. 


'믿음'과 '배신'의 아이콘, 그저 '인간'일 뿐


'믿음'의 로드리게스 신부. 하지만 그는 끝없이 의심한다. 침묵하는 신의 존재를. 그것도 응답의 일종일까. ⓒ메인타이틀 픽쳐스



영화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출현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두 신부, 그들이 찾고자 하는 페레이라 신부를 제외하면 전부 일본인이다.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 그 중에서도 로드리게스 신부와 키치지로가 극 전체를 이끈다. 절대적 믿음의 아이콘 로드리게스, 배신의 아이콘 키치지로. 


이 둘의 모습은 예수와 베드로 또는 유다를 연상시킨다. 정작 우리가 그들을 통해 보게될 인상 깊은 모습은 '믿음'과 '배신'이 아니다. 로드리게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지옥에서 믿음 못지 않은 의심을 품는다.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키치지로는 오직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신을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한다. '신부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그들에겐 '인간'의 본능이 선한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걸 볼 수 없다. 천주교 박해의 중심에 있는 일본인 총독은 로드리게스는 놔둔 채 일본인 신자들만 죽인다.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로드리게스의 신의 부정. 즉, 일본인 신자들은 로드리게스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일본인 신자들 옆에서 간단히 신을 부정하고 살아서 도망치는 키치지로. 그 나름대로 마음 속에선 끊임없는 신을 향한 의지가 불타지만 겉으로는 살기 위해 신을 부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무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죽고 싶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세상이었다. 삶이 곧 지옥이 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가길 원할 뿐이다.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의 가학적 충돌


참으로 무섭다.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믿음과 믿음, 신념과 신념이 충돌하는 모양이. 그 모양새란 게 정말 잔인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로드리게스를 분한 앤드류 가필드의 열연이 돋보인다. 지난 2월 22일에 개봉한 <핵소 고지>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교에 입각한 기적의 신념을 보여준 데스몬드 의무병을 연기한 그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이들 앞에서 데스몬드는 자신 한 몸을 던지는 의지를 선보이고, 로드리게스는 신을 찾아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린다. 


영화는 박해 받는 천주교도의 여러 군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장황한 설명보다 직접적인 행동과 나름의 생각들을 앞세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이들, 그들은 현세의 지옥보다 사후의 천국을 원한다. 불교 행세를 하는 독실한 신자들,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자신의 믿음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키치지로를 위시한 배교·배신과 복귀·믿음을 반복하는 자들. 적어도 완전한 배교·배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조금 거슬리는 부분인 바, 어떻게 한 명도 완전한 배교·배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지? 키치지로가 가롯 유다를 상징하는 거라면, 그는 회개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후회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베드로를 상징하는 거라면, 후회가 아닌 회개가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애매하게 보여주었기에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당시 일본의 국교인 불교에 대해선 로드리게스의 통역관과 총독이 그야말로 장황하게 설명을 가한다. '우리는 우리만의 종교가 있다. 왜 여기에 너네 종교를 퍼트리려 하느냐.' '일본 땅에 천주교를 선교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일본인들이 죽어가는데, 그걸 바라느냐.' 등이다. 이 또한 절대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믿음과 믿음의 충돌. 단순히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건 국가적 신념에 어긋나는 일. 불가능하다. 어떤 신념이 옳고 어떤 신념이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그저 그렇게 사람이 죽어갈 뿐이다. 


의아한 모습들, 그럼에도 침묵에 응답하려는 신앙의 위대함


논란의 요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지만, 신앙인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위대하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천주교 미화 영화로 비춰질 요지가 다분하다. 신의 침묵에 의심을 품고, 신의 침묵을 질타하고,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신은 다 괜찮다고 말한다. 그 모든 게 다 신이 그린 큰 그림 안에 있다. 이 지옥보다 더 한 고통과 절망, 죽음조차도 말이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의아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적어도 기독교 입장에서는 말이다. 예수가 그려진 판은 밟지만 마리아가 그려진 판에는 침을 뱉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는 모습. 일본인 신자들이 신부를 보자 환호하며 그를 마치 신처럼 떠받드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오로지 신부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모습. 


그럼에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숭고하다. 모든 의구심과 논란을 뒤로 하고, 로드리게스 신부에 집중해보자. 신앙인이 아닌 이도 '신앙'이 같는 위대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신앙을 갖는 '신앙인'의 위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믿음의 근본인 신이 '침묵'함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에조차 충실히 '응답'하려는 의지 말이다. 침묵에 대한 응답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록 거기에 끝모를 '의심'이 함께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은 대단한 영화, 또 보긴 싫다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어느 한 쪽으로만 생각을 치우칠 수 없게 만드는 바, 만든 이들의 숙고와 노력이 각인되어 오래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대단한 '의미'를 동반한 반면, 대단한 '재미'는 동반하지 못했다. 완벽한 배경과 연기와 연출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영화가 되진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언제든 다시 보고 영화에 대해 꺼리낌 없이 말하고 계속해 재해석할 수 있는 영화이다. 


실망을 했다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앤드류 가필드에 대한 호감도는 상승했고, 그들의 차기작도 기대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이 정도로 찍고 연기할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견(一見)을 권하진 못하겠다. 완벽한 연출과 연기와 배경보다 신앙과 종교가 더 많이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다름 아닌 그 부분이 거슬릴 요지가 다분하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콘텐츠엔 '장르'가 존재하지만, 거기에 종교와 신앙이 앞세워지면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린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는 엄연히 장르를 구분하는 용어가 아니다. 소재를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전쟁'이 모든 걸 흡수해버린다. 정확히는 액션, 드라마 정도일 것이다. 종교와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이 영화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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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멜 깁슨의 <핵소 고지>


10년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멜 깁슨. <핵소 고지>는 상타려고 만든 영화이자, 그의 영화관이 집약되어 있는 영화다. ⓒ판씨네마



멜 깁슨이 10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손꼽으며 기다리는 정도는 아니나 일정 정도 이상의 기대는 하는 감독이다. 특히 이번 작품 <핵소 고지>는 그의 전작들이 가졌던 장점들만 모아놨다는 평을 듣는 전쟁영화인 바, 기대가 더 높아졌다는 걸 인정한다. 더불어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가 스파이더맨 이미지가 굳혀질 것 같을 때 선택한 두 영화(<사일런스> <핵소 고지>) 중 하나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멜 깁슨의 행보는 특이하고 영리하다. 1980~90년대 <매드 맥스> <리썰 웨폰> 시리즈 등으로 명성을 떨치고 많은 돈을 모으더니 돌연 연출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1993년에 데뷔해 25년 가까이 5편을 연출한 된 베테랑 감독이기도 한데, 그동안 많은 논란을 뿌리면서도 탁월한 리얼리즘 액션과 고민하는 개인 심리 그리고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메시지 전달은 변치 않았다. 


어렸을 때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당시에는 멜 깁슨이 연출과 감독 모두를 맡은 사실을 알 수 없었다)를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특히 장활한 연설 끝에 '프리덤!'을 외치며 엄청난 포스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달려가는 모습 말이다. 이번에도 이성을 잠식시키는 감성적인 명장면을 마음을 흐트러놓을까?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 영화관의 종지부


멜 깁슨이 그동안 만든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신념, 종교, 리얼리즘이 깔려 있었다. 이번 영화에 모조리 때려부었다. ⓒ판씨네마



어린 시절 있었던 일련의 일들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적인 이유로(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데스몬드 토마스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비폭력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도스는 또래들도 다 입대하고 할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원입대 한다. 누구보다 체력이 좋은 그, 하지만 군인이라면 절대적인 '집총'을 '거부'한다. 개인의 절대적인 신념에 의한 것. 종교가 전부는 아닌 듯하다. 


미군은 이 초유의 명령볼복종인 집총거부를 인정할까? 징병제이니까 군에서 쫓아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군대에 남아서 사람을 살리는 의무병이 되어야겠다는 또 다른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는 도스다. 그렇게 전쟁에 출전하게 된 도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가 주전장이다. 


그는 절대 굽히지 않았던 집총거부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비폭력과 활인(活人)을 견지할 수 있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도스 개인의 신념 형성과 고민과 견지를 다룬다. 남은 절반에는 신념의 실천을 다루니,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영화이자 종교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비단 도스의 신념뿐 아니라, 도스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 클로버(샘 워싱턴 분)의 신념과 간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오는 '악마' 일제의 대장의 신념도 살짝이지만 강렬하게 비춰준다. 멜 깁슨은 아무래도 이 영화로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을 버무린 영화관에 종지부를 찍을 모양인 것 같다. 


보통 수준의 전쟁신, 전쟁영화들이 생각난다


전쟁이 주된 테마 중 하나인만큼, 전쟁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여러 전쟁영화가 생각나는 보통 수준. ⓒ판씨네마



영화는 잔인하다는 평이 은근 많은 것 같다. 폭력의 수위가 다소 높다는 의견과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는 의견이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라서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사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 또는 보통의 수준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족히 20년은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해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인간성 상실의 상황에, 오로지 살리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뛰어든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대비가 극명하면 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겠다. 모두가 살인을 할 때 홀로 활인을 외치고 실제에 옮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나왔던 전쟁영화들에서 각종 장면을 차용한 것 같다. 초중반을 할애하는 전쟁 이전의 이야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전쟁에 출전하기 전의 훈련병 내무반 생활 장면은 <풀 메탈 자켓>을,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벙커 탈환의 소소한 작전은 <신 레드 라인>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홀로 적진으로 향하는 모습은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게끔도 했다. 


그러니 전쟁영화를 섬렵하다시피 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길지 않은 전투 장면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30분, 도스가 신념을 실현하는 모습에 있겠다. 


무리 없는 수작, 정이 가진 않는다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영화 자체로는 딱히 욕할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멜 깁슨이 다음에 또 이런 영화를 만든다면 보지 않을 것이다. ⓒ판씨네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전체적인 내용을 일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대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도스라는 '전쟁 영웅'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의 신념은 뒤로 하고 전쟁영화에서 비춰지는 영웅은 굉장한 위험이 뒤따른다.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에서 이긴 것 뿐인 역사의 승리자를 미화하며, 무엇보다 폭력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격이 다르다. 전쟁 영웅을 다루지만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절대적인 비폭력을 실행하니,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엄연히 실화이니 도식적이니 가식적이니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뒤로 한 신념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빚겨갈 순 없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한 개인의 신념을 지켜주었고 또 그 신념의 처절한 실천에 합당한 대우를 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 부분들에 지극한 드라마를 가미했다. 각종 논란거리를 일삼는 트럼프 정부를 향한 '미국은 이래야 한다!'는 일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수차례 인종 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멜 깁슨이니만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무리가 있겠다. 


전체적으로 무리 없는 수작으로 볼 수 있는 <핵소 고지>, 하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멜 깁슨이 또다시 이런 류의 영화를 내놓는다면 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진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최대한 살린 영화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거기에 어떤 논란거리를 얹혀놓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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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빌리 엘리어트>


우리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천재 신화의 기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무엇일까? ⓒ팝엔터테인먼트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가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에 안착하는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되풀이 되는 이야기 구조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기 힘들기에,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하겠다. 굳이 보지 않고도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또는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정작 자신은 모른다. 우연히 눈을 뜨고 그를 이끄는 선생님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끌려서 시작하고, 점점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지 않아 역경이 닥친다. 태생적으로 불우한 환경, 주위 사람들의 반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철회. 


어느새 다시 끌리고 결국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반대했던 주위 사람들이 가장 믿음직한 서포터가 된다. 모두의 기대와 믿음을 한 몸에 받고, 또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우뚝, 다시 찾아보기 힘든 성공을 쟁취한다. 우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스토리 라인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다. 


'천재'가 아닌 천재를 둘러싼 '환경'을 조명하다


무수히 많은 천재 이야기들, 분명 거기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계속 양산 되는 듯. 반면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천재의 환경에 집중했다. 그곳엔 무수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것엔 분명 다른 무엇이 있을 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엘리어트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를 둘러싼 것들을 보아야 한다. 


1984년 영국 탄광촌, 대규모 파업으로 동네는 마비 상태다. 아빠와 형 모두 광부인 빌리 엘리어트네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빌리는 춤을 좋아하는데, 아빠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 못해 권투를 배우러 다닌다. 


어느 날 함께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수업단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곧 그의 눈은 그곳에 못박혀 움직일 줄 모르고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한다. 선생님은 한 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발레를 배울 것을 중용한다. 하지만 그에겐 상남자 아빠와 형이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가 발레를 하는 건 잘못된 거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당시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익히 알만 할듯. 빌리는 과연?


영화는 '천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천재의 성장과 고민, 천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형상화 시키는 요소들, 즉 춤과 행동과 음악들에 집중한다. 그렇게 감독은 지극히 식상한 스토리를 지극히 개념있는 영화적 스토리로 탈바꿈 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 


상승과 하강, 이 영화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키워드


이 영화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면, 상승과 하강의 기막힌 대비에서 보여지는 천재의 이면이다. 절대적 공감의 끝엔,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다름 아닌 '파업'이다. 정확하게는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실'이겠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천재는 다분히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이상'이 아니겠는가. 천재, 아니 한 아이의 성장 그 이면에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능력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빌리의 점프 장면이 계속된다. 중반부쯤, 빌리가 멋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할 때면 전에 없이 극렬해지는 파업 현장이 비친다. 마지막에 빌리의 점프 장면이 다시 나오는데, 그 직전엔 다시 땅굴로 내려가는 아빠와 형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한 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빌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시종일관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다. 당연히 상승은 성공과 이상을 하강은 시련과 현실을 뜻하겠다. 빌리가 이상에 가까이 갈수록 아빠와 형은 현실로 향한다. 빌리의 기막힌 재능이라는 씨앗도 아빠와 형의 헌신이라는 거름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 이토록 극렬한 대비를 이토록 유려하게 표현해내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이자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와호장룡>에서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한 상승과 하강의 절묘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오로지 상승을 목표로 살아왔던 용, 하강이 갖는 부드러운 강함의 경지를 체득한 리무바이. 영화의 마지막, 용이 끝없는 안개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빌리 엘리어트>가 선사하는 바가 이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지만, 충분히 빛나고 빛나는 성취다.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시대,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빌리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상하고 진부하고 고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팝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빌리가 아닌 빌리의 가족,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그들에게서 우리 윗세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구어 '개천에서 용 난다'를 가문의 단 하나의 목표로 삼고 될 성 싶은 잎 한 명을 골라 그만을 지원했다. 다른 이들은 현실의 무거운 짐을 일찌감치 지고 평생을 희생했다. 


빌리의 아빠와 형은 파업으로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지만, 빌리를 위해선 자신이 자신일 수 없었다. 그 소박한 이상조차 버리고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땅굴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윗세대에서 '용'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겪었을 이야기다. 


이제는 희생으로라도 엮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된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참조한 식상한 이야기는, 그래서 또 다른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욱더 응원하게 된다. 식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식상하더라도 좋으니 꼭 성공하라고 말이다.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까봐 두렵다. 부디 많은 이들이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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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의 쾌거를 올렸다. 더욱이 사상 최초로 남여조연상을 흑인이 휩쓸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다. ⓒ오드(AUD)



지상 최대 영화 '축제'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난 2월 26일 미국 LA에서 열렸다. 언제나처럼 쟁쟁한 후보들을 앞세운 사전 마케팅이 활개를 쳤는데, 이번엔 싱겁게 끝나버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다름 아닌 <라라랜드> 때문인데, 일찍이 골든글러브 6관왕으로 역대 최다 수상을 하였고 아카데미에도 14개 노미네이트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바 싹쓸이가 예상되었었다. 제목 'la la land'도 아카데미의 성지 LA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였으니. 하지만 고작(?) 6관왕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메인 상 중 감독상과 여우주연상만 탔다. 


한편 8개 노미네이트 <문라이트>와 <컨택트>가 뒤를 따랐는데, 둘 중에는 <문라이트>가 압승을 거두었다. 수상 개수를 떠나,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탔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 세계 영화제에서 <라라랜드>를 저멀리 따돌리는 수의 상을 탔는데, 한때 158관왕으로 많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급기야 아카데미 3관왕으로 175관왕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실상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각축전이었던 거다. 


여기엔 '흑과 백'이라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라라랜드>가 백인의 꿈을 티끌없이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을 어둡고 아픈 아름다움으로 그려냈다. 둘 다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다만 그 방식이 완연히 다른 바, 머리는 <라라랜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가슴은 <문라이트>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듣고 <문라이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담다


평균 이하의 짧은 러닝타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담았다. 한 시기의 순간순간을 담았을 뿐인데 오롯이 담았다고 느껴진 이유는, 그 순간에 담긴 모습이 완벽히 그 시기를 담아냈다는 것일 테다. ⓒ오드(AUD)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미국이 결코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론의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을 상징하는 별명들이다. '호모새끼'라고 놀림을 받는 한 작고 힘 없는 흑인 아이, 리틀. 여전히 놀림 받는 힘 없는 소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샤이론. 과거를 청산하고 빈민가 출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블랙.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면을 볼 순 없다. 그건 영화 사상 성장의 시간을 가장 완벽히 담아 냈던 <보이 후드>도 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만들고, 깨닫고, 변화하는 장면들만 볼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영화라서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약쟁이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리틀', 오직 케빈이라는 친구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작고 힘 없는 아이는 호모라고 놀림 받는다. 도망가다가 마약 소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후안이 발견한다. 그는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 기댈 곳 없는 리틀은 엄마 대신 후안과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후 리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후안. 빈민가 흑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넌 지금 세상 한 가운데 있어'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나도 엄마가 싫었지. 하지만 지금은 미칠듯이 그리워' 등 주옥같은 명대사를 리틀에게 전하는 후안. 상당히 도식적인 전개와 장면이지만, 꾸밈없이 다가오니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워야 빛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니지 않은가. 어둠을 뚫고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둠과 빛은 한 몸인 것이다. 후안도, 리틀도 어둠이자 빛이다.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다


희망도, 슬픔도 없는 공허로운 눈의 샤이론.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이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를 어찌하나. ⓒ오드(AUD)



리틀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에겐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가 민망하다. 소외라는 단어에 함축된 엄청난 무게를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과 격리, 스스로에 대한 포기 등이 소외를 뜻하는 거라 한다면, 그는 소외의 모든 걸 지니고 있다 하겠다. 집안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고, 무력감과 공허함과 혼란과 무의미가 몸을 휘감으며,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없다.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엔 슬픔도 없다.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다가오고, 순간이 영원같을 때가 있다. 리틀이 비로소 샤이론이 되는 순간, 샤이론은 인생의 지침이 된 후안의 '달빛 아래선 흑인도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한다.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그때만큼은 난 껍데기의 내가 아닌 본질적 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 샤이론은 본질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고 또 다른 껍데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이제 '샤이론'이라는 샤이론의 본모습은 아주 단단한 껍데기에 몇 겹이고 둘러싸여 절대 밖으로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블랙'으로 살아간다. 그가 아는 가장 단단한 껍데기 후안의 모습을 하고서. 


그렇지만 머지 않아 그의 본질이 다시금 도전을 받을 위기에 직면한다. 그의 본질을 일깨워준 순간과의 조우, 그의 얼굴엔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 비추고 자신감 없고 움츠러든 표정과 말 본새가 드러나며 슬픔조차 찾기 힘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는, 다시금 달빛 아래서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또는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해낼 영화가 있을까? ⓒ오드(AUD)



영화는 상당 부분 헤르만 헤세의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현대 성장 소설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 <데미안>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장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이 뚫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다 말하기도 힘들거니와 늘어놓는다해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절대 잊히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그 '두 눈'.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지 느껴질 만한 세 사람의 놀라운 싱크로율은 뒤로 하고서라도, 세 사람의 시기에 따른 두 눈의 공허함은 가히 치명적이다. 아무런 감정을 찾을 수 없는 두 눈은 모든 걸 말해준다. 이건 '경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연기는 처음 본다. 


순간을 이끄는 색감과 OST는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했다. 특히 색감은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블랙톤에 가까운 파스텔 톤의 색들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다. 블랙을 돋보이게도, 그렇다고 블랙을 묻히게도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우린 이 영화의 포스터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일정한 톤의 OST도 역시 중요한 순간을 일깨우는데, 안정감보단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영화적 장치,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에 색깔을 입혔다. 


<와호장룡>은 '무협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철퇴를 내렸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무협이 있다니. 무협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문라이트>는 '흑인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징벌을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내게 주었다. 누구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말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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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


<족구왕>의 히트로 <걷기왕>이 개봉했는데, 이젠 <장기왕>까지 나왔다. 독립영화계의 한 지류를 담당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과연? ⓒ하준사


2014년 <족구왕>의 성공으로 2016년 <걷기왕>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그리고 2017년 초 급기야 <장기왕: 가락시장 레볼루션>(이상 '장기왕')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는데, 독립영화계의 한 축을 이루는 듯하다. 비단 제목뿐만 아니라, 제목에서 풍겨져 나오는 코미디 요소를 듬뿍 품은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우중충하고 직설적으로 사회 고발을 하는 기존의 독립 영화와 다른 면모를 선보인다.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장기'와 '가락시장'과 '레볼루션'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이 이 영화의 제목을 이루는데, 아마 그대로 영화를 구성할 듯하다. 아마 주인공은 장기를 엄청나게 잘 둘 것이고, 배경은 가락시장일 것이며, 일상의 소소한 혁명을 이루며 끝날 것이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엔 일단 성공, 끝까지 잘 이어나갈 수 있을까?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인듯


가락시장에서 장기왕을 꿈꾸는 한 젊은이로부터 시작해 여러 파편화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각자의 피곤한 이야기들이 있다. 잘 만든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좋은 영화인듯? ⓒ하준사



내년이면 서른인 두수는 가락시장에서 일한다. 밤 12시에 출근해 다음날 아침 10시에 출근하는 고된 일이지만, 이 시대에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냐 하는 고마움과 왠만한 중소기업보다 많은 급여를 받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체 게바라의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명언을 간직하고 있다. 


두수가 일하는 청과물 가게의 사장이 어느 날 가게에서 내기 장기를 두고 있었다. 훈수를 두는 두수, 이를 고깝게 본 사장은 두수와 장기 한 판을 둔다. 손쉽게 사장을 이겨버린 두수, 이때부터 두수의 장기왕 레이스가 시작된다. 가락동 일대를 제압, 탑골공원에 진출한다. 그는 불가능한 꿈을 장기로 이룰 수 있을까.


한편 그에겐 누나가 한 명 있다. 힘들게 일하고 매일 같이 성추행을 당하지만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그에겐 친한 친구도 한 명 있다. 배우지망생으로 열심히 데뷔를 준비하지만 여의치 않아 중국집 배달을 하고 있는... 그에겐 짝사랑하던 첫사랑 친구도 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휴가로 한국에 와서 노숙자들을 돕고 있다는... 이 불완전한 청춘들은 한데 뭉쳐 꿈을 이루려 한다. 


두서가 없는듯 이야기들이 파편화되어 여기저기 흩어진듯, 그렇지만 '장기'라는 소재를 끝까지 밀고나가며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추려는 노력이 예쁘다. 엄밀히 말해서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영화인 것 맞다. 잘 만들지도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영화가 많은데,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흩어져 있는 작은 힘들이 모여 소소한 혁명을 일으킨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티끌 모아 태산?' 다만, 극을 잘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것뿐. 그래도 가능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준사



'장기'는 바둑이나 체스, 하다 못해 오목보다도 더 비주류의 보드게임이다. 당연히 더 비활성화가 되어 있고, 손쉽게 다가가기도 힘들며, 주위에서 흔히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장기'를 주요 소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창 잘 나가는 바둑을 소재로 차용해 '바둑왕'이라 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을 텐데 말이다. 


장기가 가진 비주류적이고 소외된 이미지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락시장이라는, 젊은이라면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곳에서 일하는 주인공 두수. 회사에서의 상사에 의한 추행이라는, 어디 가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짓을 당하지만 회사를 다닌다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누나 두희. 언젠가 반드시 영화에 출현해 배우로 성공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중국집 배달원인 주인공의 친구 낙훈. 소외당하고 보호받지도 못할 노숙자들을 데리고 연극을 준비하려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민주.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돕고자 하는 노숙자들까지. 


공통적으로 '소외'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이들끼리 뭉쳐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주인공이 '장기'로 여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적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적절하게 쓰인 것 같진 않다. 영화 초반에 흥미로운 소재로 등장해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장기는, 후반부엔 그 빛을 급격히 잃는다. 대신 주인공의 여자친구 민주의 급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역시 급작스러운 등장인물들의 결합이 장기를 대신해 '레볼루션'을 향해 간다. 장기보단 연극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해 보인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힘들이 모여 소소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것이다. 그 구심점이자 소재로 장기를 택한 것이고. 하지만 그 연결고리가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다. 영화 <족구왕>이 준 스토리적 감동을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러닝타임이 90분이 채 되지 않는데, 연결고리에 시간을 더 할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면 등장인물들의 흩어진 이야기들을 조금 더 빨리 주워담았으면 어땠을까. 


감동 대신 재미, 감동 대신 씁쓸함


분명 감동을 추구했을 텐데, 감동이 없다. 아니 애초에 감동이 없을 수도 있었겠다. 대신 재미가 있고, 씁쓸함이 있다. 매력도 있고. ⓒ하준사



감동을 받을 만한 주제임에도 감동을 받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흩뿌려 놓았을 뿐이기 때문인데, 대신 적정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순 있었다. 그건 순수하게 연기에서 비롯된 바, 특히 주인공 두수와 주인공의 친구 낙훈의 천연덕스러움은 발군이었다. 이 시대가 낳은 불행한 청춘들의 상징과도 같은 그들이지만, 주눅들지 않고 한껏 유쾌함을 발산하는 모습에 슬픈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애드리브가 상당했을 것 같다. 


얼핏 어설퍼 보이지만 능력껏 발휘한 영화적 스킬도 재미의 한 요소였다. 기본적으로 장기두는 모습이 상당히 나오기 때문에 그 모습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데, 만화 <고스트 바둑왕>의 장면들이 연상케 했다. 오마주이자 패러디인듯, 귀엽게까지 느껴져 영화를 매력있게 보이는 데 한몫했다. 


어쩌면 애초에 감동을 느낄 수 없는 영화였을지 모른다. 그들의 소소한 혁명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꾸기는커녕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처절한 좌절을 겪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래서, 두수는 가락시장을 벗어났을까? 두희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을까? 낙훈은 영화배우가 되었을까? 민주와 노숙자들은?


과연 바뀐 게 있을지? 그들의 소소한 혁명은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었을지? 물론 최소한의 변화는 있을 것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에서 감동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결코 오지 않을 크나큰 변화를 말이다.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소소한 변화조차 꿈꾸기 힘든 세상이라고, 그 정도로도 위대한 진척이라고. 그들의 코믹한 모습을 보니 왠지 더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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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킹>


지난 한 해 계속된 '시국영화', <더 킹>은 그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묵직하지만 가볍게, 직설적이지만 풍자적으로. 감독의 전작을 다 괜찮게 본 입장에서, 과연 이 영화는 어떨지? ⓒNEW



지난 2015년 11월 개봉한 <내부자들>부터 시작된 일명 '시국영화'. 사실 이 시국엔 어떤 영화가 나와도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시국을 그린 영화든, 시국을 비판한 영화든, 시국을 위로해줄 영화든 말이다. 2017년에도 변함없이 이어나갈 예정인 듯하다. 아니, 그 강도는 그 어느 해보다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한재림 감독의 <더 킹>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될 것인데, 가히 그 수위가 어느 영화보다 높다. 블랙 코미디로 무장한 직접적인 실명 거론과 패러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최순실 게이트'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어,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했고 한편으론 영화를 너무 날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17년 1월이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건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일 터,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한재림 감독의 능력에 관심이 쏠린다.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니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뿐만 아니라 제작한 두 개의 영화 모두 본 게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 감독은 이어서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을 연출했고, <연애의 온도> <특종: 량첸살인기>를 기획, 제작했다.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 모두 그가 각본, 각색에 참여했다는 것.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 타기


영화는 '개천에서 용 난' 한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으로의 험난하지만 할 만한 길을 보여준다. 그건 곧 한국 현대사의 추악한 일면. ⓒNEW



영화는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분)의 내레이션에 따라 진행된다. 초반엔 오로지 태수의 성장과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양아치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는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검사'의 힘을 보고 미친듯한 공부 신공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다. 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휘말린 태수는 군대에 끌려들어가고 제대를 하고선 단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된다. '샐러리맨 검사'의 시작이다. 


태수가 바랐던 검사는 권력의 정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검사다. 그가 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때가,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른 삼류 건달 아버지를 단번에 제압한 진짜 '힘'의 검사를 보고 나서이지 않은가. 태수는 곧 정의를 버리고 권력의 라인으로 향한다. 검사 권력의 핵심인 전략부의 양동철 검사(배성우 분)와 전략부장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 라인이 그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주무르는 실세. 


한편 목포 최대 조폭 조직인 들개파의 2인자 최두일(류준열 분)은 어린 시절 박태수의 친구였다. 홀연히 나타난 그는 박태수가 처리하지 못하는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개'가 된다. 대신 한강식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태수는 두일의 뒤를 봐주고 두일은 곧 강남의 1인자가 된다. 검사와 조폭이라는 상극이 한통속으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최대 '라인', 그렇지만 라인의 생태라는 게 정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는 법, 정점이란 곧 대통령을 말하는데 그들 또한 대선이 있는 5년마다 라인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력이란 이길 것 같은 라인을 잘 고르는 능력과 비록 진 라인에 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는 능력이다. 언제까지 계속 라인을 잘 탈 수 있을까? 천하 권력을 누리는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을까?


'이게 나라냐'의 지경으로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리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게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나라를 몇몇의 개인들이 좌지우지 하다니. 물론 현실은 더 막장이지만, 이들 또한 그에 큰 역할을 했음이 자명하다. ⓒNEW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지난 몇 달 동안 전국을 강타했는데, 결코 영화 유행어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울분의 토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도래.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거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하거나 고대부터 예견된 지구 멸망을 목도하는 것만큼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민간인의 나라 사유화. 모르긴 몰라도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는 깊디 깊을 것이다. 


<더 킹>은 그런 작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린다. 그러기 위해서 차용한 것이 '한국 현대사 일별'. 이 영화를 보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대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를 볼 수 있다. 자칫 영화는 안 보이고 한국 현대사만 잘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의도가 그러한듯. 이를 알고 보면 재밌게 볼 수 있다.  


2014년 말에 개봉해 큰 사랑을 받았던 '국뽕'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 현대사 연대기가 생각나게끔 하는 바, 하지만 <더 킹>은 국뽕과는 전혀 반대되는 면모를 보인다. '이게 나라냐'에 대해 참으로 영화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국까' 영화는 아닌듯,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사람이다.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권력의 정점, '더 킹'이라 칭한다. 그들을 권력의 노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폭주시키며 나라를 망칠 동안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일면 '더 킹'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기대를 웃도는 퀄리티, 차기작을 기다린다


영화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심각하기 그지 없는 소재들에 묻히지 않고 감독의 본연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그게 괜찮게 어울리니, 상당히 좋았다. 차기작이 기대된다. ⓒNEW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전작들을 모두 접한 이상 한 감독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시국에 편승한 그렇고 그런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내부자들>류의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괜찮네' '참신한대?' '기대 이상이네' '참 영화답게 잘 만들었네'를 연발했다. 다 보고는 '재밌었어'를 합창했고. 


한 감독은 그동안 연출한 모든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약간의 사회고발, 지극한 리얼리즘, 은근한 코미디, 영화로만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요소를 보여주었는데 <더 킹>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현대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화려한 블랙 코미디와 영화시각적 요소로 가지고 놀듯이 보여준 모습들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몇몇 장면들, 한강식 라인의 승리 자축 파티 장면들에선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연상되었는데, 아무래도 오마주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희대의 사기극을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광란의 파티 장면을 차용해 쓰면서, 그들의 자축 파티 또한 사기극 못지 않은 희대의 범죄를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한재림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감독이 많지 않은데, 그런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 힐링을 주는 법이다. 그야말로 영화로만 얻을 수 있는 힐링 말이다. <더 킹>도 힐링을 주었나? 단연코 힐링을 주었다. 하지만 씁쓸함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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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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