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프란츠>


파격적 행보를 계속 해왔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 전환점이 될 만한 작품 <프란츠>. ⓒ찬란



프랑수아 오종은 프랑스가 낳은 작금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이다. 갓 20살이 넘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지만 2002년 <8명의 여인들>에 이르러 그 이름을 알렸다. 그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적이 없고, 그 이후로 그의 모든 작품이 국내에 개봉된 사례만 보아도 어림직잠할 수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뛰어 오른 건 아니고, 1990년대부터 비평계에 그 이름을 드높여 왔다. 


그는 매 작품마다 파격적 소재를 기본 장착하고 개성있는 상상력과 풍자를 선사했다. 비평가들이 좋아마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종을 상징하는 건 섹슈얼리티 기반의 욕망이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그의 작품 <스위밍 풀>이 당대를 대표할 만한 섹슈얼 미스터리라는 점도 크게 작용할 것이다.(<8명의 여인들>이 먼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는 <스위밍 풀>의 개봉 이후 그 성공으로 <8명의 여인들>이 개봉했다.) 그 전후로도 그는 섹슈얼리티에 천착했다. 


그런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프란츠>로 우리를 찾아온 건, 영화가 파격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에 또 다른 느낌의 파격으로 다가온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랑과 용서, 거짓말과 진실, 외면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 등에 휩싸인 인간상을 내보인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경력의 전환점과 같다. 


전쟁 미망인 앞에 나타난 비밀스런 적국민 남자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아파하는 안나 앞에 적국민 남자가 찾아온다. 무슨 이유로? ⓒ찬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독일. 안나(폴라 비어 분)는 전쟁으로 약혼자 프란츠를 잃고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들을 잃고서도 그녀를 딸처럼 생각하고 보살핀 프란츠의 부모님 덕분이다. 아니, 프란츠의 부모님이 그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런 독일 한복판의, 그것도 프란츠의 묘지에, 한 프랑스인이 나타난다. 


그는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 분), 전전(戰前)부터 프란츠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프란츠의 마지막도 잘 알고 있는 그는, 프랑스인을 향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부모님의 신뢰를 얻는다. 안나도 그에게 차츰 마음을 연다. 하지만 아드리앵의 눈은 자주 흔들리고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와 함께 있을 때 종종 불안해 한다. 알 길 없는 불안한 연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드리앵은 돌연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다. 그 직전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는 안나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다소 충격적인 그 비밀은, 그가 프란츠의 오랜 친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프란츠를 죽인 독일군 출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아드리앵은 프란츠 부모님과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그만 안나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왕이면 아드리앵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프란츠 부모님은, 안나에게 아드리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비밀을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만 간직한 채 파리로 향한다. 마치 1부가 끝나고 2부로 향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녀와 그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름다운 정적, 영화 전반부


영화의 전반부는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와중에 아름다운 정적이 주를 이룬다. ⓒ찬란



비록 적국이지만, 비록 자식을 죽였을지 모를 적국민이지만, 모두 전쟁이 낳은 피해자들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용서를 넘은 포용이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영화 외적인 요소들이 주를 이루기에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아름다운 슬픔과 역설적인 서정이 주는 감정적 호소가 깊이 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느낄 수 있는 점이지만, 격정적인 후반부의 느낌과 대조를 이루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의 의도가 잔뜩 들어 있는 흑백과 컬러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는 흑백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짧은 순간들만 종종 컬러로 내보이는데, 공통적으로 환희의 순간들이다. 문제는, 그 순간들이 암울한 현실에 비춰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상황 상 현실을 더 암울하게 만들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아드리앵이 흔들리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프란츠와의 거짓된 즐거운 한때를 말하고, 안나가 쓸쓸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프란츠와의 즐거운 한때를 회상한다. 


더불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후반부 연속되는 격정적 사건들의 복선들도 눈에 띈다. 주로 아드리앵의 행동과 눈빛과 대사 등에서 대략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다분히 안나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내고 전에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안나와 일심동체 되는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양한 사건과 격정적 내면, 영화 후반부


안나가 겪는 다양한 사건 중에 내면에 몰아치는 격정들. 영화 후반부를 차지하는 것들이다. 우린 안나와 더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다. ⓒ찬란



안나가 아드리앵을 찾아 파리로 떠나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는,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많은 중요 요소들의 모음이다. 거의 모든 장면, 대사, 행동, 표정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거기에 있고, 영화를 이루는 재미 요소도 거기에 있다. 


아드리앵이 용서를 빌고자 독일을 찾아왔던 전반부는, 안 그래도 정적인 독일이라는 곳에 더해 겉으론 즐겁지만 속은 타들어가는 아드리앵의 정황이 겹쳐 자칫 우울할 정도로 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반부는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최고의 도시에 더해 전승국이라는 프리미엄을 업고 안나가 겪는 다양한 외적 사건들과 오락가락하는 내면에 의해 격정적이기 짝이 없다.


안나가 겪는, 안나가 프란츠와 겼었고 프란츠 부모님과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아드리앵과 겪는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랑, 용서, 거짓, 진실, 회한, 이 모든 걸 이루는 욕망, 그 안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인간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인간. 순간이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순간이다. 


영화는 말한다. 인간이 위대한 건 그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살아갈 이유 따윈 바라지도 않지만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를 찾았음에도 살아 가는 그들. 생각지도 않은 희망을 주었다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절망을 선사해도 살아 가려는 그들. 나도,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안나와 아드리앵, 그리고 프란츠 부모님. 모두 프란츠를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프란츠와만 살아갈 순 없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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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랄발광 17세>


입소문 덕분에, 또는 때문에 DVD로 직행할 운명이었던 <지랄발광 17세>가 개봉해 맹위를 떨쳤다. ⓒ소니 픽쳐스



"선생님, 시간을 뺏고 싶진 않은데 저 자살할 거예요."


네이든이 귀중한 점심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담임 선생님을 찾아와 다짜고짜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담임은 "나도 지금 막 유서를 쓰는 중이었어"라며 네이든을 세차게 나무라는데, 그래도 거기에 사랑이 묻어나 있어 다행이다. 


네이든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당연히 학교를 가기 싫어 했는데, 아빠는 다정하기 그지 없게 그녀를 대해주었던 반면 엄마는 마구잡이였다. 그런 그녀에게 천사같은 친구 크리스타가 다가왔는데, 이후 몇 년간 그녀의 말마따나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아빠의 죽음으로 최악의 나날이 시작된다. 


엄마는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간섭을 일삼지만 사실 가족에겐 관심이 없다. 그저 잘 커준 오빠 데리언에게만 의지할 뿐이다. 데리언은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 하고 착하게 컸다. 반면 네이든은 자신이 너무 싫어한다. 못 생기고 몸매도 별로고 공부는 꽝이고 성격은 개차반이다. 그래도 그녀에겐 크리스타가 있다. 


하지만 데리언이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연 어느 날 크리스타와 눈이 맞는다. 이보다 더 최악이 있을까. 더해 네이든은 소년원을 다녀온 노는 오빠에게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지는데 거들떠도 안 본다. 자주 찾아가 상담을 받을라치면 매몰차게 대꾸하는 담임은 어떻고? 정말 살 맛 안 난다. 가장 끔찍한 건 오빠 데리언과는 정반대의 이런 외모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어야겠다. 


우리나라에선 찾기 힘든 할리우드 하이틴 영화


우리나라에선 이제 더이상 하이틴 영화를 찾기 힘들다. 반면 할리우드에선 매년 찾아온다. <지랄발광 17세>는 할리우드에서도 찾기 힘든 수작 하이틴 영화다. ⓒ소니 픽쳐스


매년 빠지지 않고 찾아오는 장르 중 하나가 '하이틴'이다. 10대 후반쯤에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어 흥미와 공감을 이끄는 데 목적이 있다 하겠다. 하지만 요근래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씨가 말랐고, 할리우드에서는 흥행과 비평에 망조가 낄 것 알면서도 개봉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우리나라엔 수입되기 힘든 것이다. 


와중에 <지랄발광 17세>라는 파격 제목의 하이틴 영화가 찾아왔다. 북미에서는 작년에 개봉했으니 반년 이상의 시간차로 개봉한 것인데, 아마 우여곡절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7년 만에 개봉한 <플립>과 영화 외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원해서 개봉에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이 영화는 그럼에도 흔한 하이틴 영화의 서사 방식과 캐릭터 구성을 따른다. 재기발랄하고 톡톡 튀는 주인공, 코미디 요소가 적절한 좌절을 겪고 감동적인 코드가 다분한 성장을 완성한다. 그 사이, 모든 게 해결되기 직전에 상당히 극단적인 선택과 그에 따른 위기가 함께 한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의 판타지 


'공감'이 최종 목표일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상당히 판타지적이다. 이 영화는 그 부분들이 예쁘다. ⓒ소니 픽쳐스



네이든의 담임 브루너가 네이든을 좋아하는 어윈의 존재가 눈에 띈다. 네이든이 심심하면 찾아가 시비를 거는듯 노는듯 고민을 상담하는 대상인 담임. 대개 성장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문답이 오가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문답은 선문답 내지 동문서답에 가깝다. 여타 하이틴 영화에 비해 비현실적인 모습에 가까운데, 공감을 목적으로 하지만 결국 판타지에 가까운 하이틴 영화에 맞는 것 같다. 


어윈 또한 네이든의 깨달음과 성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도 무지막지하게 좋고 공부도 잘 하는데 친구도 많고 만화도 잘 그리고 영화제에 출품도 할 정도의 실력 있는 감독이기도 한... 그런 어윈이 별 것 없는 네이든을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그런 어윈도 네이든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 그 나이에는 고민과 사랑이 전부라는 것. 


네이든의 좌절과 성장과 깨달음은 하나에서 파생된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지랄발광'을 하며 다녔는데,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걸 담임과 어윈에게서, 그리고 극단적인 경험을 하고서 깨닫는다. 평범함의 진리가 주는 성장, 평범함이야말로 특별함이 모여 평균을 이룬 집합체라는 깨달음,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고민을 떠앉고 있다는 눈물겨움.


평범함의 진리를 깨닫는 씁쓸함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평범함의 진리. 평균이 가장 보기 좋다는 주장. 틀린 말은 아니나 씁쓸하다. ⓒ소니 픽쳐스



무진장 재미있고 상당한 깨달음과 먹먹한 감동이 함께 한 <지랄발광 17세>, 이 영화가 주는 깨달음과 감동에 동의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우리가 누구나 거쳐야 할 통과의례야 한다는 게 슬프기까지 하다.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아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다는 사실, 나만의 고민과 깨달음이 사실 모두 하고 있고 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와 비로소 세상을 겪게 되었을 때의 환희도 존재하겠지만, 반드시 세상에 편입되어야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게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 그거야말로 세상을 구성하고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진리라는 것이 더욱 슬프다. 


어렸을 땐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줄 알았고, 당연히 특별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특별하기는커녕 평범하기조차 힘들다는 걸 깨달았고, 언제부턴가 평범해지는 게 꿈이 되었다. 대표적인 성장 소설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이 모두 평범함으로의 나아감을 모토로 한다.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한다. 남들을 본받고 남들을 따라하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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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나오는 작품마다 끝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충족하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몇 안 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분명 그의 영화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명명백백하게 담겨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 중 하나로서, 놀란은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에는, 특히 그가 단독으로 각본을 맡은 영화들은 사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다. 대신 그 빈자리를 제대로 된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한다. 배경, 촬영, 음악, 음향, 편집, 캐릭터, 상황 등 영화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 않은가. 놀란은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드시 무엇 하나를 던진다. 절대 장황하지 않게, 아주 짧은 한 문장 정도의 물음이나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영화 내적일 때가 더 많기에, 우린 정확히 놀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 열광한다. 그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전쟁에서 '철수'는 곧 '패퇴'다.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생각했을 때 정녕 위대한 철수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는 그의 19년 경력 동안 불과 10번째 작품이다. 동시에 <미행>과 <인셉션>에 이은 3번째 단독 각본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1번째 실화 바탕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전작들에서 어떤 작품에서도 비슷한 결을 찾을 수 없지만, 그나마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비슷하다 하겠다. 인간 존재를 훨씬 초월하는 상황에서의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영국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덩케르크>는 이 작전을 기반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은 꽤 오래 대치만 한다. 그러던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만에 속아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혀 포위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항구들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영화는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에서 처절한 철수작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자그마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자그마치 34여 만 명이 남은 상황, 어떻게 해서든 영국으로 철수해야 한다. 이제 곧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절대 철수가 불가능한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직후 했다고 한다. 


놀란은 이 작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을 게 분명하지만, 다름 아닌 이 연설에서 영화의 얼개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영프 연합군 보병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육지 해안에서의 일주일, 영국 어부들의 목숨 건 연합군 철수 도움을 그린 바다에서의 하루, 영국 공군의 독일 공군과의 필사적인 전투를 그린 하늘에서의 한 시간. 영화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라본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쟁과 재난의 상관 관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꼴을 한 재난영화다. 전쟁 자체가 재난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재난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역수단이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음직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다'. 누구보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의 눈에도 완벽한 재난생존영화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제해 눈에 보이고 예상이 가능한 위협을 주는 상황 하에 놓인 여러 인간 군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니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전쟁' 그 자체를 논하거나. 


반면 이 영화는 도무지 예측불가능하고 예외없이 무차별적이며 상황은 미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상황에 처한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등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재난재해의 무서움을 역설한다. 보병들의 육지 해안에서의 생존 투쟁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재난재해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을 수단으로 재난을 보여주고, 다시 재난을 역수단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처한 말단 병사들의 생각(집에 가고 싶다)과 행동(그저 살고 싶을 뿐)이 재난재해에 처한 사람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국의 일반인 어부가 목숨을 걸어가면서 지옥이 펼쳐지는 덩케르크로 향하여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들의 향연, 자칫 감상적인 전쟁으로서의 역주행 가능성을 놀란은 한스 짐머의 음악으로 완전히 급반전 시킨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귀는 물론 가슴을 꾸준히 묵직하게 짓누르는 음악으로 생존 투쟁과 죽음의 한복판의 전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는 전쟁의 한 가운데다'라는 걸 깊이 새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음악들, 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인간적인 숭고함


결국 '인간'이다.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함을 더하는 인간이란... <덩케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 게 <덩케르크>의 목표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수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연합군 병사들의 겉모습과 툭툭 던지는 말엔 한없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들은 자타공인 패전병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총소리, 대포소리, 폭탄소리로만 대변될 뿐 그 모습조차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재난재해에 빗댈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힘없는 연합군에 반해 당시 최강최악의 힘을 자랑하는 독일군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철수하는 자의 비참함과 살고 싶어하는 자의 비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극대화된 모순의 자장 안에서 '철수'가 '패퇴' 아닌 '생존'으로 이어진다. 곧 '감성'이 '이성'으로 '감성적인 승화'를 이룩하는 순간이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생존 투쟁을 한 이들이 아닌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그런 사실상의 사면초가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건 위대한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면들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친절하다면 친절하게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더욱 비인간적인 무기와 역시 철두철미하게 비인간적인 작전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숭고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런 인간성들을 곳곳에 뿌리째 박아 놓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많은 이들을 생존으로 이끈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우리의 오감은 오롯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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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상식 밖의 무리를 이끄는 부자(父子)의 여러모로 필수적인 듯보인다. 자신처럼 되었으면 아들, 그리고 아들은 그 아들이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여기 상식 밖의 무리가 있다. 그들은 외곽에서 캠핑카에 생활하며 국가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채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 그 한 가운데에는 콜비(브렌단 글리슨 분)가 있다. 모든 걸 부정한 채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마치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행동한다. 모두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낄 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거니와 그곳이 아닌 곳에선 살 수 없다. 


콜비가 이 무리의 정신적 지주라면, 그의 아들 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는 이 무리의 실질적 리더다. 비록 그 또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그래서 글조차 모르지만, 예의 타고난 카리스마와 대범함은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 도움이란 다름 아닌 절도 행각이다. 콜비에 의해서 '우리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기 위한 대항 행위'라고 명명된 그 범죄는, 실상 이 무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 버팀목이다.


채드는 이제 그 짓거리를 그만두고 싶다. 콜비가 차기 리더로 키우고 싶어하는 그의 손자이자 채드의 아들 타이슨의 미래를 위해서이다. 비록 학교 교육을 받고 있는 타이슨이지만, 콜비의 '교육'으로 채드의 뒤를 잇기에 충분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중이다. 즉, 미래의 범죄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채드는, 비록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지만 범죄를 계속 저지른다. 배운 게 그것 뿐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면초가. 타이슨만은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범죄밖에 없기에 타이슨이 배우는 건 자연스레 범죄일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그가 잡혀들어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는 범죄의 프로이기 때문에 절대 잡혀들어가지 않는다. 그것 또한 그가 뼛속 깊이 배운 것. 그는 '잘못된' 교육과 본능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


이 영화를 보며 평소 하기 힘든 고민들을 해보았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것들 같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아버지와 아들, 시스템, 교육, 권리, 가족, 부정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저 멀리 놓아두곤 하는 몽상가적이고 감성적인 고민을 여기 앞으로 데려다 놓는다. 현실이 끼어들 자리는 일말도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 찌들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들인 걸 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우린 누구나 꿈꾸지 않는가? 히피, 집시의 생활을, 영원히 자유로울 것 같은 그들의 환상적인 일상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의 기적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점점 속박되어 지는 자유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삶은 정녕 꿈이다. 


한편, 영화는 할리우드의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철저함을 자랑하는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으로도 충분한 믿음을 준다. 연기를 빼면 왠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범죄 행각을 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조직 보스와 같은 포스와 표정과 리더로서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할 줄 아는 브렌단 글리슨의 출현은 영화의 중심을 잡아줌은 물론 영화로 자연스레 들어가게 만든다. 패스벤더가 정말 열심히 연기한다는 느낌을 주는 반면, 글리슨은 거기에 원래부터 있었던 듯하다. 


줄기 하나, 가족의 독립


가족에서 또 다른 가족이 탄생해 독립하는 건 숙명이다. 이 영화는 그 숙명을 따르려는 자와 거스르려는 자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묘하디 묘하다. 아들이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아버지이지만, 아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새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들이라면, 아버지라면 최소한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성애 못지 않게 부성애 또한 인류의 가장 숭고한 사랑의 종류 중 하나이다. 


영화에서 이 관계가 지니는 파워는 절대적이다. 세상을 등진 채 한 무리를 이끌며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따르고 콜비, 자연스레 무리에게 강요하고 무엇보다 아들 채드와 손자 타이슨에게 강요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 아이러니는 아니다. 여기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채드는 자신의 삶이 제대로이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 타이슨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해,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하고 고로 아버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아이러니. 정녕 위대하다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독립영화 <똥파리>가 겹쳐진다. 끝없이 이어질 고리를 끊기 위해, <똥파리>는 영화적 차원에서 희생을 보여주었고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영화 속에서 희생을 택했다. 여기서 줄기 하나는 '가족'으로 빠진다. 


무리에 속한다는 건 독립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가족을 이루어 독립해 살아야 한다. 콜비가 세상을 등진 채 '독립'해 무리를 이끌며 살아가듯이, 채드도 무리를 등지고 '독립'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엔 갈등과 문제가 뒤따른다. 채드는 물론 타이슨도 마찬가지다. 채드는 이 모든 고리를 끊고 타이슨에게 가족을, 독립을, 삶을 선사한다. 


줄기 둘, 시스템과 교육


현 시대 문명을 지탱하는 시스템과 교육이 반드시 올바른 건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콜비가 행하는 반시스템과 반교육적 방법도 결코 옳지 않다.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줄기는 시스템과 교육으로도 이어진다. 시스템의 중요성을 말하진 않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무리는 거대 시스템을 부정하고 반하면서도 '잘' 살아간다. 채드는 수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절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시스템이 가진 반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해 머릿속에 인지시키고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반시스템에 대한 일종의 정신적, 육체적 훈련이 완벽한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은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보다. 콜비가 아버지의 말씀이라며 무리를 이끄는 절대적 규범을 세우고, 되도 않는 기독교적 지식들을 버무려 사이비종교처럼 만들어 세뇌시키지만, 그건 절대로 교육이 될 수 없다. 거기엔 기본도 없고 도리도 없고 이성도 없고 기준도 없다. 채드가 그걸 깨달은 건 기적에 가깝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에서 가족 무리를 이끄는 아버지이자 '캡틴' 벤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혹독한 교육을 실시한다. 학교에서 받는 교육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앞서는 듯 보인다. 물론 반시스템적이지만 말이다. 우린 그 방법론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벤은 결국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그의 교육은 방과 후에. 


반면 콜비 무리에겐 교육 이전에 철학 비스무리한 것도 없다. 우린 거기에서 그 어떤 긍정적인 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 반시스템, 반교육적 생각의 틀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반시스템, 반교육을 외치면 외칠수록 말이다. 


이들 무리는, 무리의 수장 콜비는 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이 국가, 이 사회, 이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채드는 그들(자신들)을 침범하는 것들이 다름 아닌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고? 남에게 강요하고 피해를 주는 행위가 그 기준이다. 그 행위의 결과는 다른 어디도 아닌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결국 내가 나를 침범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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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플립>


북미 개봉 폭망 이후, 7년 만에 압도적인 지지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플립>. ⓒ팝엔터테인먼트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소식이다. 영화 <플립>의 북미 개봉 7년 만에 국내 개봉(재개봉이 아니다)이 그것인데, 그동안 국내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개봉을 하지 않았었다. 이유는 북미에서의 압도적인 폭망 때문일 텐데, 2010년 개봉 당시 1400만 불이라는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이고서 1/10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렸으니, '북미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밥먹듯이 써먹는 배급사들 입장에선 들여올 이유가 없을 만도 하다. 더욱이 압도적인 지지로 이미 DVD 등으로 볼 사람은 다 봤을 거란 계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은 이들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흔히 말하는 '인생영화' 리스트에서 종종 봐왔으니. 감독 롭 라이너는 올해로 70세가 되었다. 2010년에도 이미 60대였던 건데, 어쩜 이런 달달하고 귀엽고 풋풋한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의 필모를 잠깐만 들여다봐도 적지 않게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일단 2007년의 <버킷리스트>를 차치하고서라도,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이 그의 작품이다. 


로코의 시초가 만든 첫사랑 로맨스의 전형


롭 라이너 감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로코' 장르를 개척했다. 그런 그의 첫사랑 로맨스가 기대되지 않는가? ⓒ팝엔터테인먼트


'전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단어에 속하는데, 여기서 태초의 '전형'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누군가는 만들어낼 것이다. 롭 라이너가 1989년 내놓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 태초의 전형이다. 이후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는 물론 2010년대까지 영화세계를 주름잡는 장르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초이다. 


그야말로 감각적인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도 해당 장르를 개척하다시피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영화 <플립>은 그의 감각적인 노련함이 극대화된 작품으로, '전형적이다' '식상하다'라는 말을 들을 요지가 있을지언정 그 사랑스러움으로 모든 걸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마냥저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길 건너에 이사온 브라이스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7살 여자아이 줄리. 특히 그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첫만남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브라이스는 달갑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치다. 그런 관계가 자그마치 6년이나 계속된 가운데, 브라이스는 어떻게든 줄리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 노력한다. 대놓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그녀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저버린다. 뭐든 함께 하자는 그녀의 요청을 저버리는 건 일상이다. 


어느 날부터 줄리가 암탉을 키우게 되었는데, 무수히 많은 달걀을 감당하지 못하고 브라이스네로 매일 같이 가져다주었다. 실은 브라이스를 보기 위해서 였지만, 아무튼 브라이스는 이 달걀들을 받는 족족 버렸다. 그녀가 닭을 키우는 곳이 더럽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 모습을 줄리에게 들키고 만다. 이후 줄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부터 였나, 브라이스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 줄리가 신경 쓰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후로도 한두 번 줄리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그때마다 줄리가 브라이스를 피하는 모양새가 더 커진다. 역시 그때마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신경 쓰는 모양새도 더 커지고.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를 쫓아다닐 때다. 첫사랑의 풋풋하고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첫사랑 로맨스를 대하는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우리나라의 첫사랑 대명사, <클래식< <건축학개론>. 여기에 <플립>은? ⓒ팝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에서 첫사랑 로맨스의 대명사들이 있다. 2003년작 <클래식>과 2012년작 <건축학개론>이 그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에서 아련하고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가,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평생 생각하게 된다는 공식이 생겼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할리우드에는 물론 수많은 첫사랑 로맨스의 정석들이 있겠지만, 최신작 중에 우리들에게 <플립>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첫사랑 로맨스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와닿는 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비교해도 손색없음을 말하고 싶다. 


이들의 첫사랑은 시기가 훨씬 빠르다. 10대를 전후 하기에, 아픔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제3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겠지만, 마냥 풋풋하고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물론 좌충우돌, 갈등과 오해와 증오와 사과가 계속된다. 그건 어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이것들을 푸는 과정과 결과에 있다. 


우리는 채 풀지 못하고 여전히 오해와 어느 정도의 증오가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건 때로 단순 아픔을 넘어 한으로 남는다. 그리고 신파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반면, 이들은 가차 없이 풀어버린다. 한 점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잘 들여다보면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미비한 개연성과 결말 부분에서 정작 해결하지 못한 자잘한 것들이 눈에 띈다. 우리의 첫사랑 로맨스가 더 현실적인 것이다. 


로맨스 그리고 인생 성장 메시지


북미의 경우인지, 이 영화만의 경우인지, 첫사랑 로맨스에 로맨스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거기엔 첫사랑 연령의 성장도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오직 로맨스에 천착하기 십상인 우리네 첫사랑 영화와는 다르게 이들이 잊지 않고 넣는 게 있다면, 어리디 어린 이들을 위한 인생 성장 메시지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집안 사정인데,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해 브라이스네는 잘 살고 줄리네는 잘 못산다. 


그렇지만 속사정은 많이 다른 듯, 브라이스네는 브라이스가 배울 만한 게 없고 줄리네는 줄리가 배울 만한 게 넘쳐난다. 물론 그건 왠만한 학교 공부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정형화된 배움이 아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배움이다. 줄리는 아버지에게서, 작은 아버지에게서, 오빠들에게서, 엄마에게서, 심지어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닭들에게서도 배운다. 


그녀는 크나큰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가 누구도 보기 힘든 세상을 보았고, 직접 닭을 키우며 손수 달걀을 얻어 돈을 주고 팔고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았고, 지체장애인인 작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인생의 또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또 잘하는 오빠들에게서는 세상의 다양하고 넓은 품을 엿보았고, 브라이스네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을 만드며 편견과 고정관념을 저버려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과 이후의 합리적이고 사랑스러운 대응을 통해 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플립>은 마냥 첫사랑 로맨스 영화만은 아니다.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사랑과 성장이 사이좋게 한 발씩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에선 이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미국보다 훨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참에 '인생영화' 리스트에 <플립>도 추가하는 게 어떠신지? 후회는 없을 거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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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봉준호 감독의 <옥자>


'거장' 봉준호 감독이 4년 만에 들고온 영화 <옥자>. 개봉한 지 열흘 가량 지났지만, 몇 달은 지난 느낌이다. ⓒ넷플릭스



봉준호 영화는 대체로 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을 지닌다. 확실한 목표가 거기에 있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곳에 다다르고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그 자체로도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대, 영화를 통해 가장 재밌게 대리만족 또는 대리경험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드벤쳐적 요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단 관객을 끌어모으고는, 봉준호는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야기다. 


봉준호처럼 필모에서 흑역사가 없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2000년의 시작에서 <플란다스의 개>로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현실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고는, 에누리 없이 3~4년에 한 번씩 작품을 들고 왔다. 여전히 그는 현실을 그리고, 가감없는 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흩뿌리며, 누군가에게는 실험적일 수 있는 풍자를 선보인다. <옥자>라고 다르지 않을 텐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영화가 '봉준호 영화'라서 좋다. 


문제는 그의 영화에서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사건은 이해하기 쉽고, 등장인물은 따로 또 같이 개성과 조화를 두루 갖췄으며, 메시지는 도처에서 두루두루 양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영화를 영화적으로도 현실적(영화 외적)으로도 비평하기가 너무 힘드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럴 땐 '봉준호 영화'가 싫다. 


<옥자> 간략 스캔


'미자의 옥자 되찾아 오기 여정'이 주를 이루는 영화 <옥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넷플릭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설국 열차>를 어느덧 4년 전으로 뒤로 하고, 그보다 더 많은 말과 탈을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 <옥자>를 들여다볼 때다. 상황 논리에 따라 봉준호 영화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라고밖에 운을 뗄 수 없는 리뷰 초입을 뒤로 하고, 영화를 간략히 스캔해보자. 


글로벌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분)는 회사를 환경친화적인 기업으로 변화시키고자 거대 프로젝트인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26개국에 슈퍼돼지를 분양하고 잘 키워진 슈퍼돼지를 10년 후에 데려오는 것이다. 강원도 두메 산골에 살고 있는 미자(안서현 분)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옥자'가 바로 그 슈퍼돼지인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이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간다. 


미자는 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뒤 볼 것도 없이 옥자를 끌고 가는 이들을 쫓는다. 두메산골에서 내려와 미란도 한국 지부에 쳐들어가고,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 가는 트럭에 매달리는 등 위험천만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옥자를 이용해 그들만의 작전을 벌이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와의 협치, 그리고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협박과 회유로 미자는 뉴욕에서 옥자와의 재회를 꿈꾼다. 


하지만, 그 사이 옥자는 ALF의 대의명분과 미란도의 탐욕, 나아가 한때 동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미란도의 하수인이 된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진렌할 분)의 광기로 당해서는 안 될 잔인하고 잔혹한 짓을 당한다. 과연, 미자는 옥자와 함께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옥자는 '돼지고기'로 전락하지 않을 것인가?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 <옥자>


여러모로 봉준호가 생각나는 영화다. 봉준호 스타일 구축에서 봉준호 월드 창조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넷플릭스



<옥자> 역시 전형적인 봉준호 영화였다. 자연스레 봉준호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동시에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흐름과 사건과 캐릭터와 카메라워킹과 미장센과 메시지였다. 오랫동안 고심한 흔적과 고심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길 수 있는 능력과 능력을 만천하에 영화 내외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떨침에 여한이 없었다.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는다. '영화'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최소한의 기대치가 아닌 최대한의 기대치에 근접한 퀄리티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봉준호 영화가 아닌 봉준호 스타일인 것 같다. 처절하게 와닿는 비판이나 작정하고 비꼬는 풍자가 아닌, 다분히 상업영화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보여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는 점점 이슈는 늘어나고 논의는 적어진다. 


또 봉준호 영화는 그 안에서 다른 요소들에 비해 직선적이고 단편적인 스토리 라인을 띄고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 전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질수록 독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닌 메시지에서 비롯되는데, 덕분에 사건 진행은 산만해지고 캐릭터는 소모되며 영화 내적 재미가 아닌 영화 외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줄어든다. 


신념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며 대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ALF의 위상과 존재 의의,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운전기사로 잠시 잠깐 얼굴을 비춰 약간의 추임새로 자본주의의 대명사 대기업과 현대사회 젊은이의 우환을 드러낸 김군이 아닌 배우 최우식의 쓰임새, 연관되어 '초호화 캐스팅'과 '사건 진행과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많은 주연급 배우들의 소모 등.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입장에선 안타깝지만, 그의 입장에선 이해가 간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 '예술'을 만드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지, '스타일'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다. 이처럼 거시적으로나마 또는 거시적으로밖에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또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부분이다.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봉준호 영화는 <설국열차> 이전에 이미 모든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월드'를 구축하지 못한 게 또 마음에 걸린다. 


봉준호 영화를 본다


누가 뭐라해도, 봉준호 영화가 나오면 보지 않을 수 없다. <옥자> 또한 최소한 몇 번은 볼 것 같다. ⓒ넷플릭스



그럼에도 우린 봉준호 영화를 본다. 그는 자타공인 지금, 아니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다. 그를 만나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기 힘들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그가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건 수많은 이들에게 축복인 것이다. 영화의 총본산 할리우드와 영화의 본고장 유럽에서 인정하고 찬양하는 봉준호다. 


한편 드는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하필 한국에서 태어나 영화를 하게 된 게 그에게는 결코 축복이 아닐 거라는 거다. 할리우드였다면 그는 단연코 크리스토퍼 놀란 이상 가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일본이었다면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지난 <설국열차>, 이번 <옥자>를 접하고 더욱 확고해진 생각이다. 


<옥자>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이 보였는데, '비판을 위한 비판'과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그것이다. 둘다 지금의 봉준호를 있게 한 요소들인데, 천착과 스타일은 자칫 울궈먹기와 흐르지 않는 물로 변형·고착될 수 있다. 우린 여지없이 <옥자> 전체와 부분들에서 자본주의 비판적 요소를 볼 수 있었고, 찰나의 순간이나 단역급 캐릭터에게서 봉준호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봉준호가 파격의 길을 서슴없이 가길 바란다. 언제나 빈틈없이 완벽한 '영화'를 내놓은 그가 이제는 '세계'를 창조하길 바란다. 나는 봉준호의 예술작품이 아닌 영화를 보길 원하지만, 그가 샛길로 빠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자가 옥자를 기어코 데리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미자와 옥자의 여정이 봉준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로 점철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처럼 비춰지지 않길 바라며, 무엇보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속깊은 의도를 넘겨짚지 않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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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워 머신>


브래드 피트의 플랜 B와 넷플릭스의 만남,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로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영화 <워 머신>. ⓒ넷플릭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한복판, 세계 중심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미국 정부는 이를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한 사건이라 규정,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경고, 탈레반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함락한다. 이어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미국은 2003년엔 이라크를 침공해 역시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을 이어간다. 


전쟁이 8년 차로 접어든 2009년, 스탠리 맥크리스털 4성 장군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해 최소화를 강조하며, 병력 증원에 통해 전쟁을 종결시킬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와의 마찰과 각종 구설수로 1년여 만에 경질된다. 


다분히 문제적 인물인 이 사령관과 문제적 구도의 이야기를 《롤링스톤》지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논픽션 <디 오퍼레이터스>로 훌륭하게 풀어냈다. 다름아닌 그 책을 브래드 피트의 플랜 B가 영화 <워 머신>으로 제작했다. 거기에 봉준호 감독의 <옥자>처럼 넷플릭스로 공개했다. 주인공 글렌 맥마흔 장군은 브래드 피트가 직접 열연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퓨리>를 잇는 전쟁, <머니볼>을 잇는 리더십, <빅쇼트>를 잇는 미국 풍자를 총집합시켰다. 과연 구슬을 잘 꿰매었을지.


'완벽한' 승리를 원하는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 장군은 완벽하다. 완벽한 만큼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 자신 우스꽝스럽고 부하들은 일을 못하며 결정적으로 대통령에 반한다. ⓒ넷플릭스



대략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구슬을 그리 잘 꿰매진 못한 것 같다. 대신 각 구슬들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이 영화가 기본 골자로 말하고자 하는 미국 풍자 블랙코미디 부분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선사한다. 그건 다름 아닌 브래드 피트가 분한 글렌 막마흔 장군에서 시작해 끝난다. 


출중한 경력, 꾸준하고 철저한 자기관리, 부하를 살피는 세심함, 최고의 자리에 걸맞는 겸손함까지 갖춘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가졌다. 모두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그만 유독 튄다. 그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오래토록 의미 없이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아무 탈 없이 이대로 진행하다가 '흐지부지' 끝내고 싶다. 자신과 결을 완전히 달리 하다시피 하는 부시 전 정권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어쨌든 맥마흔은 그런 미국 정부의 의중을 대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저 생각 없이 지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현지 주민 피해의 최소화와 더불어 충분한 병력 증강을 통한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그는 주지했다시피 많은 걸 갖춘 '완벽한' 사령관이다. 그런 그는 우습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일 못하는 부하들도, 완벽한 승리와 현지 주민의 최소화라는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한 단면이다. 


맥마흔이라는 미국의 단면, 또 다른 단면


맥마흔이 미국의 한 단면이라지만, 그와 반하는 미국 정부도 당연히 한 단면이다. 그들 모두 터무니 없다. ⓒ넷플릭스



미국의 또 다른 단면이 여기에 있다. 세계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세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는 비뚤어진 책임감, 그리고 세계 모두가 지켜보는 데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비겁하고 무능한 짓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면모 말이다. 그건 실명이 거론되는 오바라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의 맥마흔 장군 조종과 그에 따른 대처에서 나타난다.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지만 엄연히 유럽까지 총괄하는 엄청난 힘과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동안 대통령을 한 차례 화상으로 만났을 뿐이다. 대개 현지에 대통령 대리로 와 있는 안보위원과 대사와 협의할 뿐이다. 그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대통령이 수시로 직접 대면은 못할 망정 화상 대면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난해부터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던 국정논란 때 알려진 사실들이 있다. 대통령과 사전 면담 신청을 통한 독대가 없었다는 정무수석과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비서실장. 물론 영화와 현실의 이 둘을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고의로 인한 무능과 그 자체로의 무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무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맥마흔 본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맥마흔을 뽑아 배치한 건 미국 정부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만큼 집단적 의견의 출중함으로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완벽한 대응과 잘 짜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것 같은 미국이 결국은 터무니 없는 일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허상에 터무니 없는 진지함으로 임하는 맥마흔, 그런 자를 뽑아놓고 피하는 미국.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직시하다


공교롭게 영화의 배경이 2009년이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미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어가는 느낌이다. ⓒ넷플릭스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미국 정부와 대립하는 우스꽝스러운 진지충 맥마흔의 터무니없는 리더십을 보여주며 미국의 역설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작지만 핵심적일 수 있는 모순들, 예를 들면 현지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며 반란군를 괴멸시키면서도 반란군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현지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 또한 반란군을 괴멸시키면서도 현지인 희생이 없어야 하는데, 현지인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쟁'을 한다는 게 일반인 피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게 아닌지? 애초에 왜 전쟁을 하는 것인지? 왜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는 미국의 역설이기도 하고, 맥마흔의 역설이기도 하다. 결국 미국으로 수렴되는 바,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미리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이미 미국은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영화의 배경이되는 2009년은 그 수렁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다. 거기에 현대 미국이 행한 가장 큰 헛발질이라고 할 만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니, 답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브래드 피트의 행보가 가히 신선하다. 넷플릭스를 택하면서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며,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제작에 뛰어든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런 면에서 <워 머신>은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이슈들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지 않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한참이고, 이제는 자기 살길 찾아 가기 바빠졌다. 많은 비난이 뒤따르고 있지만, 현실은 전면적 각자도생의 길에 도달했다. 사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혼란 속에 수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불길하지만 현실적인 예감뿐이다. 많은 영화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답을 던져주고 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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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컴, 투게더>


최소 2017년 상반기 최고의 독립영화 <컴, 투게더>. ⓒ비아신픽처스



오랜만에 한국 독립영화를 본다. 세상을 보는 온전한 하나의 눈, 상대적으로나마 누군가의 입맛에 종속되거나 손질되지 않은 날것의 묘미, 그 안에서 일관된 무엇을 발견할 때의 희열, 모두들 거기가 문제라고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보여지는 건 다르게 손질되고 마는구나 생각할 때의 씁쓸함. 나는 그런 독립영화를 사랑한다. 


일찍이 그 맛을 알아 독립영화의 맥을 짚어 보려 노력했고 그중에서 괜찮은 작품을 골라 소개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에는 이전보다 저조했다. 독립영화 자체가 저조했던 건지, 나의 관심과 반응이 저조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2월에 <장기왕> 정도를 소개했을 뿐이다. 작년 하반기만 해도 <최악의 하루> <여고생> <혼자> 신작 영화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저조했던 게 아닌가 하는 반문으로 위로해본다. 


그럼에도, 올해 상반기에 독립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 소개도 하지 않았음에도 <컴, 투게더>는 올해 상반기에 발견한 최고의 독립영화로 평할 만하다. 6개월이 지나 올해가 끝나도 여전히 최고의 독립영화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쪽에선 잔뼈가 굵은 신동일 감독이 8년 만에 연출한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가족 개개인의 말 못할 고군분투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회 문제의 연장선을 이 영화는 탈피한다. ⓒ비아신픽처스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 범구(임형국 분)는 18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잘려 한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집에서 쉬다가 윗층의 층간소음 때문에 인연을 맺게된 호준, 그가 쿵쿵대는 건 천장에 머리를 닿고자 하는 행위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닿았는데 언젠가부터 닿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그 차이가 아주 조금이란다. 


어머니 미영(이혜은 분)은 각종 편법을 써 가며 힘들게 실적 2위를 유지하고 있다. 회사 창립 8주년을 기념해 실적 1위에게 주어지는 태국 가족 여행 티켓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쉽지 않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고객이 변심해 취소하고 동료가 가로채가고 편법이 상부에 걸린다. 그래도 계속 해야지 어쩌겠는가. 


딸 한나(채빈 분)는 재수로 고려대학교를 들어가고자 하지만 예비번호 18번에 머물러 있다. 최종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한 명씩 빠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더 피를 말리게 한다. 그런 와중에 예비번호 8번 후배 소식을 듣게 되고 만난다. 그러고는 은연중 진심을 내비친다. "내 앞 예비번호 누구라도 죽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영화는 한나의 뒷모습으로 시작해 가족 한 명 한 명의 현 상황을 보여주고는 식사 자리에 둘러 앉은 가족의 모습을 비춘다. 예비번호 18번에 머물러 있는 한나로 인해 큰소리가 오가는 식사 자리, 그리고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말 못할 일들을 겪는다. 그래서 가족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개인의 고군분투 이야기다. 


개인과 가족과 사회 문제는 하나다


영화는 개인, 가족, 사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비아신픽처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가족을 돌아본다. 결혼하고 분가한 후로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닌 듯 연락도 거의 하지 않지만, 문제는 한 지붕 아래 살았을 때조차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화목하지 않거나 문제가 있거나 했던 건 아니다. 그런 모습에서 유추하는 문제의식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척 위하는 척 가면을 쓰고 대하는 게 문제가 아닌가. 


여하튼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개인과 가족과 사회의 유기적인 인과 관계에서 유추하는 문제를 향한 비판 형식을 취하는 여타 영화와는 다른 결을 보인다. 개인과 가족과 사회의 문제가 한 눈에 보인다. 한 쪽에서 촉발한 문제가 다른 문제로 번지거나 원인이 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통합적인 문제다.


범구가 실업자가 된 건 이 사회의 가장 극심한 문제 중 하나이자 한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이자 개인적으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 유발의 문제이다. 미영이 신용불량자임에도 아둥바둥 신용카드를 파는 것도, 한나가 어떻게 해서든 한국에서 알아주는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한 곳에서만 촉발한 문제도 아니고, 어느 한 곳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어느 한 곳에서만 책임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감독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연대가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 그 시작을 가족으로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이 높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쉽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들 세 명은 각자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연을 맺는다. 그런데 연을 이어가기가 너무 어렵고, 그들과의 꼬인 실타래를 풀기가 너무 힘들다. 그들이 없어졌으면 하기도 하지만, 막상 없어지면 울부짖으며 찾기도 한다. 반대로 함께 하고 싶지만,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다시 모여 다시 시작하자


극단적 비극으로 문제의식을 극단적으로 전달해 파급력을 실현시키려는 여타 독립영화와는 다른 희망적인 결이다. ⓒ비아신픽처스



적어도 내가 봐 왔던 독립영화의 결은 두 가지였다. 젋은 세대이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려내거나, 사회에 만연한 가해불가역성을 피해자에게 투영하여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내는 사회를 묵직하고 날카롭고 아프게 그려내거나.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도 완연히 다른 결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한다.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그 자리에 있을 텐데' 또는 자신이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하게 괴롭히는 저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내가 아는 독립영화의 결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저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러고는 속죄하고 도망가고 괴롭힘 당하고 피폐해지고 결국 자신 또한 죽고 만다. 이 사회가 만든 거대한 덫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자 끝없이 되풀이되는 굴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빈 손으로 다시 모인다. 


그 아래에는 감독이 촘촘히 구성해 놓은 구조가 있다. 비록 아프고 힘들고 비참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을 만한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컴팩트하게 시작한다. 그러곤 지뢰를 하나씩 심어놓는다. 더 큰 무엇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자 복선이고, 하이라이트를 향한 전개 방식이다. 그러곤 각자 겪게 되는 극치의 경험과 한 데 뭉쳐 겪게 되는 최악의 경험을 동반한다. 이 지점에서 끝낼 것인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하는 건 감독의 몫일 것이다. 영화는 후자를 선택했다. 일장일단이 있을 텐데, 영화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올바른 선택이지만 영화의 파급력 면에선 조금 아쉬울 수 있다. 


<컴, 투게더>는 영화를 보고 공감하고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힘이 느껴졌다. 각본의 힘이자, 연출의 힘이자, 연기의 힘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역설적으로 이 사회의 힘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을 하게 만든, 주인공들의 모습을 봐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이 사회 말이다. 밝디 밝은 영화를 봐도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볼 맛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날은 언제일까. 그럼에도 그런 사회가 오고 있다는 걸 믿는다. 함께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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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겟 아웃>


2017년을 넘어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 역사에 남을 <겟 아웃>.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UPI 코리아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해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킨다. 그러며 평론가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아마 1999년 <블레어 위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이후 <쏘우> <파라노말 액티비티> <컨저링> <인시디어스> 등의 대표 시리즈를 지나 <케빈 인 더 우드> <맨 인 더 다크> <위자> <라이트 아웃> 등에 이르렀다. 특히 작년이 정점이었던 것 같다. 


올해에도 <겟 아웃>으로 찾아 왔는데, 어김 없이 짧은 러닝타임과 군더더기 없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존과 다른 게 있다면, 시각적으로 무섭다고 할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컨저링>의 메인 홍보 문구였던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타이틀은 <겟 아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생각할 타이밍을 갖는다면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올 게 분명하다.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크리스가 로즈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외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나가!' ⓒUPI 코리아



크리스(다니엘 칼루야 분)와 그의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암스 분)는 함께 로즈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그곳을 크리스는 꺼린다. 자신은 흑인이고 로즈는 백인이기 때문에. 그에 로즈는 반차별주의자로서의 당당함으로 크리스를 이끈다. 그러며 부모님도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진보적 개념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는 일말의 불안감과 로즈를 향한 신뢰감을 간직한 채 부모님을 봰다. 


흑인인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로즈의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 크리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날 손님들이 대거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파티라고 한다. 뻘쭘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크리스, 다들 그를 호감있게 대해서 다행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흑인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그들의 말말이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근사한 상품처럼 대하는 듯한... 그건 이 비극의 서막이다. 


'get out', '나가' 혹은 '꺼져' 정도가 되겠는데 여기선 '나가'라는 뜻이 알맞을 것 같다. 그 집에서, 로즈 부모님의 집에서 당장 나가야 한다는 말이 않을까 싶다. 그건 크리스의 흑인 경찰 친구가 애초부터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로즈를 향한 신뢰감보다 일말의 불안감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단 말이다.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이토록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대놓고 해라. ⓒUPI 코리아



영화는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보여준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반차별주의자들까지도 은연 중에 행하는 뼛속깊은 차별과 흑인 만이 가지는 우월한 육체적 스펙을 향한 선망과 질투의 반작용으로서의 차별이 그것이다. 둘 다 우리가 흔히 인지하고 있는 차별과는 결이 다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에 편승한 영화들의 레토릭과도 결이 다르다. 


사실 크리스와 로즈가 로즈의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도 뼛속깊은 차별과 불길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나와 치어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처참한 몰골이 주는 형상에서 '흑인' 크리스가 느끼는 바를 알 수 있다. 육식동물들에 둘러싸인 초식동물 한 마리랄까... 그 때문에 온 백인 경찰이 운전자 로즈가 아닌 조수석에 앉은 '흑인' 크리스의 신원 조회만 하려는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굳이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그 징조만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맛봐왔던 '무슨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아니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일인가 터질 거라는 걸.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며,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말이다. 결과는 심리적 공포, 즉 '불편'이었다.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고 불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도는 한계를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심리만으로 선사하는 극강의 공포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는 <컨저링>이 아니라 <겟 아웃>이다. 정녕 극강의 심리공포를 맛볼 수 있다. ⓒUPI 코리아



작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두 공포영화가 있는데, <라이트 아웃>과 <맨 인 더 다크>다. 둘 다 '빛'을 이용해 극강의 공포를 선사했는데, 앞엣것이 말그대로 햇빛의 빛을 이용했다면 뒤엣것은 빛을 볼 수 없는 눈 먼 상태와 빛이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공간을 이용했다. 시각적, 감각적인 것들이라 온몸에 반응이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카메라 워킹과 조명과 캐릭터의 액션에 힘을 실었다. 


반면 <겟 아웃>은 오감이 아닌 '심리'만으로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 대사가 주는 일반적 맥락 뒤에 교묘히 숨어 있는 말과 동작과 생각, 들춰진 숨기고 싶은 기억 등이 주요하게 비춰진다. 그렇게 주어진 공포는, 즉각적이지만 지워질 공포가 아닌 영원히 남아 괴롭힐 것만 같은 진한 공포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배경음악과 대사와 캐릭터의 표정, 동작에 힘을 실었다. 


외국(서양)에서 잠깐 살았을 때 몇 번인가 직접적인 인종차별 발언과 행동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는 상상 속에서도 당하기 싫다. 이 뿌리깊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차별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영화적 설정이길 바라지만,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 그들이 백인우월보수꼴통이 아닌 코스프레일지라도 백흑평등진보반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여전히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를 현존하는 가장 핫하지만 일회성인 장르에 접목시키는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코미디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조던 필레 감독의 자그마치 데뷔작이라 하니,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본업으로 돌아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캡틴 언더팬츠> 목소리로 찾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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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대표되는 대만 청춘영화 최신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주)해머픽쳐스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안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사랑과 음악과 시간여행과 반전이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느 나라 태생인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동양인 것만은 분명한데, 한국은 당연히 아니고 일본도 아니거니와 중국도 아닌 것 같다. 홍콩인 듯 태국인 듯하지만, 정답은 대만이다.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주걸륜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으니 사실 알 만도 하다. 


지난해 혜성처럼 개봉해 '왕대륙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위 대박을 낸 <나의 소녀시대> 또한 대만에서 날아온 청춘영화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지고 있던 대만영화 최고 흥행 스코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새로운 전설이 된 작품인데,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모르게 많은 대만 청춘영화들이 방문했다. 거의 매년 찾아왔는데, 그래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영화는 2, 3년에 하나 정도는 된다.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하다. 가장 최신에 우리를 찾아온 대만 청춘영화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나의 소녀시대> 히로인 송운화의 데뷔작이다. <나의 소녀시대>가 대만에서 대박을 내고 한국에 상륙해 역시 대박을 내니까 비슷한 느낌의 데뷔작을 늦게나마 들여온 것이겠다. 


대만 청춘영화의 최신판 


판타지와 병맛 같은 면모 아래 의외로 슬픔이 깔려 있다. ⓒ(주)해머픽쳐스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는 진중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한 제목과는 다르게 코믹이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나아가 판타지적인 면모도 선사하는 바, 그 면모가 '병맛'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판타지로맨스를 기본 장착하고, 그 뒤로 나온 대만 청춘영화의 면면들을 두루두루 차용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재밌었다.


리 쓰잉(송운화 분)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한다. 어느 날 차에 치일 뻔한 일을 당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이 택우가 있다. 쓰잉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마음에 둔다. 한편, 학교에 이상한 남학생이 있다고 한다.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출몰한다. 쓰잉은 그를 두둔하고 그들은 종종 만나면서 친해진다. 


쓰잉이 일하는 카페엔 사연이 있는 듯한 사람들 투성이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택우와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아토우(브루스 분)를 비롯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카페사장과 여자임이 분명하지만 남자처럼 행세하는 선임 아르바이트생까지. 그 둘은 모두 말수가 적고 음침하기까지 하다. 혹시 이 네 명이 서로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쓰잉을 통해 우리는 네 명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볼 수 있다. 서로 연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끊기고 앞으로도 없을 관계이지만, 조금 다르다. 중요한 건 현재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쓰잉의 눈은 택우를 향해 있기에, 병맛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 이들의 알콩달콩 사랑놀음은 그저 웃기기만 하진 않다. 의외로 슬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 한국에 <나의 소녀시대>에 이어 상륙했다. ⓒ(주)해머픽쳐스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하지만 쓰잉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중 짝사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스토리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슬픔은 거기에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토우가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게 된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고, 쓰잉이 좋아하는 카페 남자가 항상 그 자리에 앉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으며, 카페 사장이 가끔 멍하게 있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다. 심지어 선임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남자처럼 행세하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 소소하게 지나갈 청춘의 통과의례와 같은 사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같은 사연이 없고 같은 기분이 없고 같은 아픔이 없다. 소소할지 모르고 보편적일지 모르나 각자에겐 아주 특별한 사랑의 형태다. 비록 영화에서는 '카페'라는 공간에 모여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대만 청춘영화의 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미 청춘의 시간을 받아들인 바 있는 우리는, 그 시간의 다양한 변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이 영화가 큰 인기를 끌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본 사람이라면 실망을 하진 않을 것이다. 대만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어느 부분을 건드린다. 아마도 청춘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날 '첫사랑'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해석과 영화의 재미


청춘의 시간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달 수 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재밌다. ⓒ(주)해머픽쳐스



한편으론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과거로 눈을 돌린다는 건, 그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려 하는 노력이 아닌 이상 도피 성격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라는 콘텐츠 성격상 있는 그대로의 청춘을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 어느 부분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려 함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대만 청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많은 인기를 끄는 이유에는 현재의 척박함이 반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영화들이 한국에도 건너와 어김 없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한 면이다. 그런 모습이 슬플 것까진 없지만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 없이 그저 보고 재밌으면 그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딛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판타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병맛'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말이다. 그게 B급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의도했다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몇몇 장면은 로맨틱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듯하다. 


이참에 명품 청춘영화들 몇 편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 어느 것은 슬프고 어느 것은 아련하고 어느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편에 속하게 될까? 아마 새로운 챕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코 '명품'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영화일 듯하다. 그 기억에는 언제나 웃음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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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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