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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노예 12년> 수많은 강렬함들이 부딪히는 놀라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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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노예 12년>


영화 <노예 12년> ⓒ폭스 서치라이트



영화 <노예 12년>은 매우 아름다운 미장센을 자랑한다. 때 묻지 않은 아메리카 대륙의 진면목을 어김없이 보여준다. 특히 중요 사건들의 전환 사이에 뜬금없어 보이는 풍경을 배치하곤 한다. 이는 주인공의 삶의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네 삶이 굉장히 의미가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감독 스티브 맥퀸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출신이다. 그는 1999년 영국 최고의 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은 바 있다. 터너상은 1984년 제정된 현대미술상으로, 매해 가장 뛰어난 젊은 미술가를 선정한다. 영국 현대미술은 터너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스티브 맥퀸은 이를 계기로 2002년에는 대영제국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영화를 찍었다 하면, 어떤 미장센을 선보였을 것인가?


감독이 미장센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


<노예 12년>은 그런 감독의 미장센과 배우들의 연기가 깊이 있는 앙상블을 이룬다. 영화는 초반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배경에서 우울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사와는 상관없이 영화적 시간이 갈수록 배경이 점점 밝아진다. 그리고 노예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질 때 배경은 이와 완전한 대조를 이루어 쾌청하고 밝다. 그럴수록 주인공의 살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커진다. 감독은 아티스트 출신 답게 주인공의 심리를 미장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의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감독의 아티스트적 미장센,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이다. 특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남자(노예와 노예의 주인)의 연기. 이들의 연기를 논하기 위해서는 간략한 줄거리 소개가 필수이다. 


노예제 하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


1776년 독립한 미합중국은 1807년에 <노예수입금지법>과 같은 해 <영국 노예무역법>을 통해 공식적으로 노예의 수입을 금지한다. 하지만 이 법이 지하 세계까지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흑인 노예를 구하기 위한 불법 납치, 구금, 고문, 노역은 계속되고 심화되었던 것이다. <노예 12년>은 그런 와중에 1841년 솔로몬 노섭의 납치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는 불법으로 납치되어서 12년 동안 노예로 살다가 풀려났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자유인 솔로몬 노섭. ⓒ폭스 서치라이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은 뉴욕에서 자유로운 신분의 음악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 모를 두 백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술자리를 거나하게 갖게 된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그에게 씌어진 무거운 족쇄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새 신분인 조지아주(1865년 링컨에 의해 노예가 완전히 금지되기 전까지 미국에는 자유주와 노예주가 존재했다. 조지아주는 노예주 중에 하나이다.)에서 온 '노예'. 그는 그렇게 '플랫'이라는 새 이름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 되어 누군가에게 팔리는 신세가 된다. 


그의 첫 주인은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포드는 폭력도 쓰지 않고 플랫의 능력을 인정하며 바이올린까지 건네주는 착한 주인이다. 하지만 그의 백인 일꾼들의 시샘 때문에 플랫이 사고를 치고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겨 살아나자, 후일을 두려워 하며 플랫을 죽이지 않고 망나니 같은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일을 감행한다. 그는 체제순응적인 소시민에 불과했던 것이다. 솔로몬 노섭의 12년 노예 생활 중 최악의 인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맞이하게 될 망나니보다도 말이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자유인에서 한 순간에 노예가 된 솔로몬 노섭. ⓒ폭스 서치라이트



플랫이 두 번째로 맞이하게 된 주인은 망나니와도 같은 에드윈 앱스(마이클 패스벤더 분)이다. 그는 노예들의 능력에 확실한 차등을 두고 폭력을 일삼으며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제 하에서의 전형적인 백인 모습을 대표한다. 그는 심지어 성경을 자기 맘대로 해석해 흑인 노예에 대한 백인의 폭력을 정당화 시킨다. 


그리고 그런 앱스에게 고용되어 일을 하는 떠돌이 노동자 베스(브래드 피트 분). 그는 앱스에게 노예 제도의 부당함을 설파한다.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논리로 말이다. 그러며 솔로몬 노섭의 부탁을 받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노섭이 풀려나게끔 도와준다.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이 영화의 주연급 캐릭터들은 모두 확실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착하지만 체제순응적인 소시민인 '포드', 잔인하고 폭력적인 망나니 '에드윈 앱스', 가난하지만 확실한 신념의 소유자 '베스', 일을 누구보다 잘하고 또 앱스에게 사랑을 받지만 앱스의 부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인 그래서 매 순간 죽고만 싶은 '팻시', 그리고 인간성을 말살 당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는 노예가 된 자유인 '솔로몬 노섭'까지.  


이를 연기한 배우들은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인간성을 비우고 해당 역에 맞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완벽한 연기를 해냈다. 그 어디에서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이들의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내공 있는 연기는 감독의 완벽한 미장센과 한 화면에서 불꽃 튀는 대결을 벌인다. 흔히 '연기 대결'이라고 표현하는데 반해, 이 영화는 '연기와 미장센의 대결'이었다. 한 화면에 전혀 다른 종류의 두 큰 객체가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미장센 앙상블. ⓒ폭스 서치라이트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과정의 미학


영화는 제목에서 이미 그 끝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노예 생활이 12년으로 끝을 맺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포인트는 그 12년 간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는 가에 있다.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결과를 알고 있는 만큼 과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이를 충실히 따른다.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 가와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서 가족들과 재회하는 모습 등은 아주 간략하게 보여주고, 노예 생활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의 미학을 살필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다가온 장면들이 몇몇 있다. 2~3번 정도 나오는 노예들의 죽음 장면이다. 죽을 고생을 하며 열심히 노동을 착취 당한 노예가 어느 순간 쓰러져 죽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해 주인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동료 노예들에게 시켜 땅에 묻게 하는 것 뿐이다. 또한 도망치다 걸린 노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모습. 노예는 인간이 아닌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은 결코 '슬픔'이나 '동정'이 아니었다. '공감'이자 '동질성'이었던 것이다. 그 노예에게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우리'의 모습까지도. 부품이 망가지거나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된다는 현실. 노동 현장에서 나를 대체할 사람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과정의 미학은 딱 여기까지이다. 감독은 여기에 어떤 주장이나 견해를 덧붙이지 않는다. 보여줄 뿐이다. 아름다운 배경과 극렬하게 대조 되는 잔인함을 통해서. 그 대조가 어떻게 비춰서 관객들에게 다가갈지는 미지수이다. 자칫 그 잔인함 또한 아름답게 비춰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제86회 아카데미 작품상 등 3관왕(작품상, 각색상, 여우 조연상)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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