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겟 아웃>


2017년을 넘어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 역사에 남을 <겟 아웃>.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UPI 코리아



할리우드 저예산 공포영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해마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찾아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킨다. 그러며 평론가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아마 1999년 <블레어 위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이후 <쏘우> <파라노말 액티비티> <컨저링> <인시디어스> 등의 대표 시리즈를 지나 <케빈 인 더 우드> <맨 인 더 다크> <위자> <라이트 아웃> 등에 이르렀다. 특히 작년이 정점이었던 것 같다. 


올해에도 <겟 아웃>으로 찾아 왔는데, 어김 없이 짧은 러닝타임과 군더더기 없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존과 다른 게 있다면, 시각적으로 무섭다고 할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컨저링>의 메인 홍보 문구였던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 타이틀은 <겟 아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생각할 타이밍을 갖는다면 그 어느 공포영화보다 공포스럽게 다가올 게 분명하다.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해!


크리스가 로즈의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외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나가!' ⓒUPI 코리아



크리스(다니엘 칼루야 분)와 그의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암스 분)는 함께 로즈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그곳을 크리스는 꺼린다. 자신은 흑인이고 로즈는 백인이기 때문에. 그에 로즈는 반차별주의자로서의 당당함으로 크리스를 이끈다. 그러며 부모님도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진보적 개념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스는 일말의 불안감과 로즈를 향한 신뢰감을 간직한 채 부모님을 봰다. 


흑인인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로즈의 부모님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낸 크리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날 손님들이 대거 찾아온다는 게 아닌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파티라고 한다. 뻘쭘하게 여기저기 오가는 크리스, 다들 그를 호감있게 대해서 다행인 것 같다. 그 와중에 흑인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그들의 말말이 거슬린다. 마치 자신을 근사한 상품처럼 대하는 듯한... 그건 이 비극의 서막이다. 


'get out', '나가' 혹은 '꺼져' 정도가 되겠는데 여기선 '나가'라는 뜻이 알맞을 것 같다. 그 집에서, 로즈 부모님의 집에서 당장 나가야 한다는 말이 않을까 싶다. 그건 크리스의 흑인 경찰 친구가 애초부터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로즈를 향한 신뢰감보다 일말의 불안감에 초점을 맞췄어야 했단 말이다.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이토록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대놓고 해라. ⓒUPI 코리아



영화는 비열하고 악랄한 인종차별 수법을 보여준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반차별주의자들까지도 은연 중에 행하는 뼛속깊은 차별과 흑인 만이 가지는 우월한 육체적 스펙을 향한 선망과 질투의 반작용으로서의 차별이 그것이다. 둘 다 우리가 흔히 인지하고 있는 차별과는 결이 다르다. 또한 할리우드에서 불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에 편승한 영화들의 레토릭과도 결이 다르다. 


사실 크리스와 로즈가 로즈의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도 뼛속깊은 차별과 불길한 낌새를 느낄 수 있다.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튀어 나와 치어 죽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처참한 몰골이 주는 형상에서 '흑인' 크리스가 느끼는 바를 알 수 있다. 육식동물들에 둘러싸인 초식동물 한 마리랄까... 그 때문에 온 백인 경찰이 운전자 로즈가 아닌 조수석에 앉은 '흑인' 크리스의 신원 조회만 하려는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영화는 굳이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지 않아도, 그 징조만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맛봐왔던 '무슨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아니다.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흑인 인종차별에 관한 일인가 터질 거라는 걸.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며,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말이다. 결과는 심리적 공포, 즉 '불편'이었다. 견딜 수 없이 기분이 더러웠고 불편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도는 한계를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심리만으로 선사하는 극강의 공포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는 <컨저링>이 아니라 <겟 아웃>이다. 정녕 극강의 심리공포를 맛볼 수 있다. ⓒUPI 코리아



작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두 공포영화가 있는데, <라이트 아웃>과 <맨 인 더 다크>다. 둘 다 '빛'을 이용해 극강의 공포를 선사했는데, 앞엣것이 말그대로 햇빛의 빛을 이용했다면 뒤엣것은 빛을 볼 수 없는 눈 먼 상태와 빛이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공간을 이용했다. 시각적, 감각적인 것들이라 온몸에 반응이 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카메라 워킹과 조명과 캐릭터의 액션에 힘을 실었다. 


반면 <겟 아웃>은 오감이 아닌 '심리'만으로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 대사가 주는 일반적 맥락 뒤에 교묘히 숨어 있는 말과 동작과 생각, 들춰진 숨기고 싶은 기억 등이 주요하게 비춰진다. 그렇게 주어진 공포는, 즉각적이지만 지워질 공포가 아닌 영원히 남아 괴롭힐 것만 같은 진한 공포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배경음악과 대사와 캐릭터의 표정, 동작에 힘을 실었다. 


외국(서양)에서 잠깐 살았을 때 몇 번인가 직접적인 인종차별 발언과 행동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는 상상 속에서도 당하기 싫다. 이 뿌리깊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차별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일까. 영화적 설정이길 바라지만,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는 건 그들이 백인우월보수꼴통이 아닌 코스프레일지라도 백흑평등진보반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여전히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를 현존하는 가장 핫하지만 일회성인 장르에 접목시키는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코미디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조던 필레 감독의 자그마치 데뷔작이라 하니,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본업으로 돌아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캡틴 언더팬츠> 목소리로 찾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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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말할 수 없는 비밀>로 대표되는 대만 청춘영화 최신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주)해머픽쳐스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안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사랑과 음악과 시간여행과 반전이 조화를 이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어느 나라 태생인지 아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동양인 것만은 분명한데, 한국은 당연히 아니고 일본도 아니거니와 중국도 아닌 것 같다. 홍콩인 듯 태국인 듯하지만, 정답은 대만이다.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스타 주걸륜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으니 사실 알 만도 하다. 


지난해 혜성처럼 개봉해 '왕대륙 신드롬'을 일으키며 소위 대박을 낸 <나의 소녀시대> 또한 대만에서 날아온 청춘영화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가지고 있던 대만영화 최고 흥행 스코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새로운 전설이 된 작품인데,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모르게 많은 대만 청춘영화들이 방문했다. 거의 매년 찾아왔는데, 그래도 이름 한 번 들어본 영화는 2, 3년에 하나 정도는 된다.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정도는 한 번쯤 들어봤음직하다. 가장 최신에 우리를 찾아온 대만 청춘영화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나의 소녀시대> 히로인 송운화의 데뷔작이다. <나의 소녀시대>가 대만에서 대박을 내고 한국에 상륙해 역시 대박을 내니까 비슷한 느낌의 데뷔작을 늦게나마 들여온 것이겠다. 


대만 청춘영화의 최신판 


판타지와 병맛 같은 면모 아래 의외로 슬픔이 깔려 있다. ⓒ(주)해머픽쳐스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는 진중하다 못해 진지하기까지 한 제목과는 다르게 코믹이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나아가 판타지적인 면모도 선사하는 바, 그 면모가 '병맛'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판타지로맨스를 기본 장착하고, 그 뒤로 나온 대만 청춘영화의 면면들을 두루두루 차용한 듯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재밌었다.


리 쓰잉(송운화 분)은 부푼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한다. 어느 날 차에 치일 뻔한 일을 당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이 택우가 있다. 쓰잉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마음에 둔다. 한편, 학교에 이상한 남학생이 있다고 한다.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출몰한다. 쓰잉은 그를 두둔하고 그들은 종종 만나면서 친해진다. 


쓰잉이 일하는 카페엔 사연이 있는 듯한 사람들 투성이다.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택우와 비키니를 입고 배추를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아토우(브루스 분)를 비롯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카페사장과 여자임이 분명하지만 남자처럼 행세하는 선임 아르바이트생까지. 그 둘은 모두 말수가 적고 음침하기까지 하다. 혹시 이 네 명이 서로 얽혀 있는 게 아닐까?


쓰잉을 통해 우리는 네 명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어볼 수 있다. 서로 연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끊기고 앞으로도 없을 관계이지만, 조금 다르다. 중요한 건 현재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한다는 것. 하지만 쓰잉의 눈은 택우를 향해 있기에, 병맛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 이들의 알콩달콩 사랑놀음은 그저 웃기기만 하진 않다. 의외로 슬픔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 한국에 <나의 소녀시대>에 이어 상륙했다. ⓒ(주)해머픽쳐스



아토우가 쓰잉을 좋아하지만 쓰잉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중 짝사랑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스토리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지만 슬픔은 거기에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토우가 이상한 차림으로 다니게 된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고, 쓰잉이 좋아하는 카페 남자가 항상 그 자리에 앉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으며, 카페 사장이 가끔 멍하게 있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다. 심지어 선임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남자처럼 행세하는 이유에도 슬픈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 소소하게 지나갈 청춘의 통과의례와 같은 사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같은 사연이 없고 같은 기분이 없고 같은 아픔이 없다. 소소할지 모르고 보편적일지 모르나 각자에겐 아주 특별한 사랑의 형태다. 비록 영화에서는 '카페'라는 공간에 모여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대만 청춘영화의 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되돌려 지금의 우리 앞에 놓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미 청춘의 시간을 받아들인 바 있는 우리는, 그 시간의 다양한 변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이 영화가 큰 인기를 끌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본 사람이라면 실망을 하진 않을 것이다. 대만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어느 부분을 건드린다. 아마도 청춘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날 '첫사랑'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해석과 영화의 재미


청춘의 시간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을 달 수 있지만, 그저 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재밌다. ⓒ(주)해머픽쳐스



한편으론 '청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과거로 눈을 돌린다는 건, 그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려 하는 노력이 아닌 이상 도피 성격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라는 콘텐츠 성격상 있는 그대로의 청춘을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 어느 부분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려 함이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대만 청춘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또 많은 인기를 끄는 이유에는 현재의 척박함이 반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런 영화들이 한국에도 건너와 어김 없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한 면이다. 그런 모습이 슬플 것까진 없지만 씁쓸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 없이 그저 보고 재밌으면 그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에 발을 디딛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판타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위에서 '병맛'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말이다. 그게 B급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의도했다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몇몇 장면은 로맨틱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바,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듯하다. 


이참에 명품 청춘영화들 몇 편을 다시 찾아 봐야겠다. 어느 것은 슬프고 어느 것은 아련하고 어느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편에 속하게 될까? 아마 새로운 챕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결코 '명품'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영화일 듯하다. 그 기억에는 언제나 웃음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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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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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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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아버지와 이토씨>


전형적인 일본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와 이토씨>.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와이드 릴리즈㈜



34세 미혼 여성으로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아야(우에노 주리 분), 54세 돌싱 남성으로 초등학교에서 급식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토(릴리 프랭키 분)와 동거한다. 그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함께 일한 '패배자'인데, 한 번 두 번 여러 번 먹었고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겠지만 당사자들은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듯하다. 


그들 앞에 74세 홀몸으로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아야 아버지(후지 타츠야 분)가 나타난다. 오빠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쌍둥이 아이들의 중학교 입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새언니 정신 상태가 이상해서 아야 네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더니 기겁 하고 토를 하고 소리도 지르는 새언니 상태를 보니 다른 문제가 있는 듯도 하다. 여하튼 20살씩 차이가 나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는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영화 <아버지와 이토씨>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조합의 가족이 동거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조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족 형태는 아니다. 먼저 34세 미혼 여성과 54세 돌싱 남성의 동거부터 비상싱적으로 비추기 쉬운데, 거기에 74세 아버지가 느닷없이 끼어든 꼴이라니. 더욱이 그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윗대까지 거들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최선은 고사하고 최악에 가깝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잔잔한 와중에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주로 문제점들만을 들여다보기에 날카롭게 다가올 수 있겠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는 일본 사회의 여러 부분을 건드린다. 30대, 심지어 50대까지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 특별하다고만 할 수 없을 정도다. 정규직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아야는 '당연히' 아르바이트라고 말하는 것이다. 30대 중반임에도 당연히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아르바이트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거기에 50대인 이토가 아르바이트로 생활하고 있는 건, 그것도 아무런 자괴감 없이 당연한 듯 생각하는 건, 차라리 충격에 가깝다. 


동양 보편적 문제 중 하나인 노부모 봉양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 사회적으로 피해갈 수 없는 필수 요소이다. 특히 홀몸이 된 부모, 그중에서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없다고 여겨지는) 홀아버지가 문제다. 여기에 아르바이트로 자기 한몸 겨우 건사하는 자식이 있다면 방법을 찾기란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그 상황이 점점 당연하게 되어 가기에 걱정이다.


이제는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단절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각자 자신 한몸이나마 건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어찌 저찌 살아가는 아야와 이토와 아야 아버지인 듯하지만, 아야와 이토는 아야 아버지와 계속 같이 사는 게 곤란하다. 그렇다고 다시 오빠 네로 가는 것도 여의치 않다. 급기야 아버지는 가출하는데, 옛집으로 가 있는 아버지를 일가족이 찾아가 회유해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둘 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혼자 살 게 할 수도 없다. 누구도 나서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데, 이토가 나서서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싸늘하게 말하며 어서 결론을 내라고 다그친다. 그러는 한편 그는 아야를 달래 아야 아버지와 함께 살 준비도 한다. 그의 정체가 뭔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만드는 결정이 아닌가. 


폐쇄적인 가족을 이토가 돕다


폐쇄적인 가족, 이방인의 터치를 받지 않으려 하지만 곪아가고 있다. 그런 가족을 이토가 도우려 정리한다. ⓒ와이드 릴리즈㈜



영화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은 하염 없이 낮을 수 있다. 아야 아버지 봉양 문제가 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가족이 아닌 이토가 할 수 있는 건 없다시피 하다. 나서서 조언이라도 할라 치면 '니가 뭔데 나서냐' '남의 일이라고 아무말 하냐' 하며 무안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상태와 상황이 너무 하다. 내부에서 누구라도 나서서 정리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외부에서라도 나서야 하는 것일까. 


이토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나서서 조금씩 정리한다. 아야 아버지와 공통의 관심거리로 친해지고, 아야에게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하고 아야의 의문과 걱정을 덜어준다. 40살 차이가 나는 구세대 아버지와 신세대 딸의 불협화음을 가운데에서 적절히 맞추고 때론 바깥에서 지휘한다. 


'가족'이라 하면 사실 굉장히 폐쇄적일 수 있다. 그런 만큼 당사자들은 모르는 폐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럴 때 가족 아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걸 생각할 수 없다. 영화는 그렇지만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처럼 보이는 이토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또 비중이 높은 이유다. 


이토는 50대로 경륜은 굉장할지 모르지만 보기에 굉장히 허름하고 또 아르바이트로 연명할 정도로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와 사귀기 전에 아야가 '패배자'로 명명한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그런 존재의 '은은함'과 '강하지 않음'이야말로 오히려 폐쇄적인 가족의 단단함을 뚫고 잘 스며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의 잔잔함과 엽기


잔잔한 와중에 특별함을 선사한 영화로 기억에 은은히 남을 것 같다. ⓒ와이드 릴리즈㈜



내가 생각하는 일본 영화의 특징이 있는데, 잔잔함과 엽기 또는 특이함을 공존시킨다는 것이다. 별 갈등 없이 흐르다가 갑자기 쉬이 생각하기 힘든 장면이나 대사가 튀어나오거나 특정 캐릭터성이 발현되는데, 이 영화도 그런 특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잔잔함은 영화 내내 계속되었고, 엽기 또는 특이함은 제목대로 아야 아버지와 이토에게서 발현되었다. 


아야 아버지의 차마 말로 하기 힘든 비밀과 영화 마지막에서의 특별한 결정, 그리고 이토의 막말 비슷하지만 아야네 가족 나아가 영화 전체의 분기점이 되는 대사 한 방.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34세 미혼 여성 아르바이트생과 54세 돌싱 남성 아르바이트생의 동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엽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 모습이 결코 엽기적이지만은 않은, 아니 평범하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아야 역의 우에노 주리와 아야 아버지 역의 후지 타츠야는 세대를 대표하는 국민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더욱이 역할 자체에 개성이 다분해 충분히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었다. 반면 그 중간에 위치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양쪽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역할을 떠맡은 이토 역의 릴리 프랭키는 비교불가의 고도 연기를 선보여야 했다. 그 결과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그 가장 큰 비결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외모와 완벽히 상충되는 중후한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믿음이 가는 목소리, 외모와 상충되는 만큼 믿음의 강도가 높아지는 듯하다. 그 덕분에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특성을 두루 가지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듯하다. 과하지 않은, 그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극중 역할에 충실한 듯한 그의 모습이 한동안 맴돌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를 향해 뛰는 아야,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토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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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민음사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세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본문 9쪽)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첫 단락이다. 이 소설의 축약이자 주인공 김지영 씨의 이때까지 삶의 축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세른네 살 전후의 일반적 여성 삶의 축약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데, 점점 평범하기조차 쉽지 않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를 반추해볼 때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 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삶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삶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삶을 배제하고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읽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김지영 씨의 삶에 교집합 하나는 있을 거고, 공감 하나쯤은 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무시한다.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던 소설 문법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다. <82년생 김지영>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또는 보고서 같다. 소설 같진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사교양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10년 동안 일한 경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김지영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증세가 계속되자 결국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를 정신과에 데리고 간다. 김지영 씨의 삶을 돌아본다. 비로소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누군가가 김지영 씨의 삶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니 소설 자체가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콘셉트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연히 이 점을 인지했을 터, 김지영 씨의 삶이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못박아 두려는 의도다. 사실 굳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아도 김지영 씨의 삶은 수많은 보편들의 합집합이다. 마치 <전원일기>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사실감도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사랑을 받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김지영 씨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여성의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궤적에서 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다. 김지영 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 '남'동생과의 차별이고, 삶에서의 수많은 그때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대답을 삼키고 그만두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고 특수한 상황이어야 하지만, 우린 굉장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저 '우리 이야기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구나' 하며 공감어린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 긴장 없이 읽기가 너무 쉽고 다음다음이 예측되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이 소설을, 딱 그만큼만 문제의식을 지니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할 게 더 많다. 그녀의 삶에서 특수한 부분을 많이 느낄수록 이 사회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이 더 옭아맨다


김지영 씨는 치료를 잘 받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은 부정한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피력한다는 것 자체를, 그런 시대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다. 소설은 끝나지만, 여전히 김지영 씨는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했다. 그러고는 아마 꼭꼭 숨겨놓았던 말, 여자로서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상징성이다.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찾으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게 뻔하다. 반면, 이대로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하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변화에 큰 일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마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가 껄끄럽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게...


그녀가 다른 누군가로 빙의해서 하는 말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의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의 엄마가 그러한대, 시댁에 가서 김지영 씨에게 빙의한 그녀의 엄마가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라고 말하고 곧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김지영 씨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엄마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소설이 그 방도를 생각해내진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으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보다 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여기까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방법을 생각해내는지는 수많은 김지영의 몫일 것이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도 방도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변하는 듯해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변형된 형태로 폐해가 잔존하는 것 같다. 수많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대현이 해야 할 일도 물론 많다. 많은 남성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김지영 씨 담당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어설픈 페미니즘을 지니고 있을 줄 안다. 어설플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아니면 제대로 동조를 하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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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운더>


전세계 최고이자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맥도날드'의 설립 비하인드 이야기를 다룬 <파운더>. ⓒ크리픽쳐스



고백하건대, 프랜차이즈 중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가장 선호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욕하면서도 가는 곳이다. 가장 상업적이기 때문일 텐데, 또 가장 대중적이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 일단 다른 어느 곳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적정 수준의 '가격'도 한몫 한다. 어딜 가든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보다 '버거킹'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버거킹'은 엄청 비싸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두 회사의 공통점은 또 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 맥도날드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레이 크룩'과 스타벅스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하워드 슐츠' 말이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시작'한 이들이 아니다. 본래 운영되고 있던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는 바, 아마 일반인들에겐 비하인드 스토리가 될 것이고 경영인들에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영의 산 보고'일 것이다. 자본과 경쟁의 양대축으로 지탱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선 과정은 그야말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추진력과 끈기를 비롯,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까지 배울 수 있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맥도날드 형제? 레이 크룩?


영화는 '맥도날드의 진짜 설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는 의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크리픽쳐스



영화 <파운더>는 맥도날드의 시작이 아니라 레이 크룩(마이클 키튼 분)의 맥도날드가 시작되는 때를 이야기한다. 맥 맥도날드(존 캐럴 린치 분)와 딕 맥도날드(닉 오퍼맨 분)가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너디노에서 시작한 '맥도날드'. 1954년, 밀크쉐이크 기계를 팔러 다니는 레이 크룩이 그 가게에 한 눈에 반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다. 맥도날드 형제에게 모든 권리가 있으면서 꼬박꼬박 로얄티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레이 크룩에도 로얄티가 지불된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시도 끝에 혁명적인 '스피디 시스템'을 안정화 시킨 맥도날드 형제, 그 위에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미국의 교회'처럼 상징화 시키겠다는 야망의 레이 크룩. 이들은 이후 사사건건 부딪힌다. 원칙주의자로서 돈보다 안정화, 그리고 가족을 우선시 한 맥도날드 형제, 반면 레이 크룩은 위험이 따르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넓혀가고자 한다. 


새롭게 투자한 점주들이 자기 마음대로 운영을 하고, (레이 크룩 입장에서) 터무니 없이 낮은 로얄티를 받는 계약 때문에 겉만 번지르르한 빈털털이가 될 위기에 처하는 등 레이 크룩은 가정을 등한시 하면서까지 위기를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맥도날드 형제와의 충돌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 끝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레이 크룩은 엄청난 금액을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고 '맥도날드'를 사들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레스토랑을 시작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관여해 혁명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맥도날드 형제인가. 레스토랑을 만들지도 시스템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지역을 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만방에 떨치게 한 레이 크룩인가. 


레이 크룩의 성공, 그만의 것인가?


결국 맥도날드는 레이 크룩의 손으로 넘어가고 또한 그의 손에 의해 이만큼 컸지만, 과연 온전히 그만의 것인지 의문이 든다. ⓒ크리픽쳐스



<파운더>는 전후(戰後) 미국의 엄청난 경제호황 하에서의 아메리카 드림을 현실로 옮긴 레이 크룩의 성공기를 뼈대로 한다. 52세의 한물 간 세일즈맨, 접이식 탁자를 비롯해 휴지, 밀크쉐이크 기계까지 온갖 것들을 팔아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레이 크룩.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급이 있어야 수요가 있다'를 골자로 하는 이론을 앞세워 진지한 태도로 끈기 있게 설득한다. 잘 팔리진 않지만. 


그는 '준비된 인재'였던 거다. 단지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뿐. 맥도날드는 그와 운명의 단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의 기막힌 성공 만을 비추지 않는다. 그가 성공으로 다가갈수록 빈털털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맥도날드 형제가 구축한 세계를 파괴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가정 파괴가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데, 그는 가정을 등한시 하며 앞으로도 계속 등한시 할 것이라 한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룩을 통해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엿볼 수 있다. 엄청난 노력으로 이루어낸 혁신과 그 즉시 시행되는 보수화, 한편 끝없는 야망과 체계적인 듯 임기응변식인 듯 어떻게든 무마하는 철면피와 돌파하는 불도저. 이 두 큰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미국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조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말하고자 할 때 잘하는 수법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대체로 '국뽕'이라 할 만한 요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런 면까지 보이진 않는다. 대신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지극한 성공의 모습과 그 이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공존시키며, 균형을 맞추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관객들에게 미루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이 크룩의 성공은 온전히 그만의 것인가?'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


영화 배우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 같다. <파운더> 또한 큰 자리를 차지할듯. ⓒ크리픽쳐스



1970년대 후반 드라마로 데뷔한 후 1980년대 초반 영화로 데뷔한 '마이클 키튼'. 1988년에 <유령 수업>으로 팀 버튼과 함께 하고는 이듬해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중론, 하지만 영화는 대대적으로 흥행하여 80년대를 대표할 정도가 된다. 키튼은 역대 최고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1992년에도 팀 버튼과 <배트맨 2>를 찍어 성공을 이어 나간다.


이후 그럭저럭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출현해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는 키튼, 어느새 잊혀진 히어로가 된 듯하다. 그러던 2014년 키튼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 <버드맨>으로 완전히 부활한다. 아니, 비로소 그는 완연한 배우가 된 듯하다. 다음해에는 <스포트라이트>에 주연으로 활약한다. 그야말로 2014, 2015년 당해 최고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파운더>다. 이 영화의 레이 크룩도 어느 정도 키튼 본인이 투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편안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걸까?


사실상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었는데, 하등 빈 곳이 없어 보였다. 이전 두 작품에서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이번엔 그에 비해 그에게 쏠린 무게가 엄청나 보였다. 왕년의 초특급 스타가 경험과 연륜이 완연하면 이 정도 무게감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끔 하는 키튼의 연기 스펙트럼. 


키튼은 2017년에만 기대작 두 편에 출현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아메리칸 어쌔신>. 두 작품 다 핫한 신세대 스타 톰 홀랜드와 딜런 오브라이언을 사실상 원톱 주연으로 내세운 바, 키튼은 다시 조력자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 역할은 그렇지 않은 듯,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나오며 미치 랩과 함께 활동하며 미치 랩만큼 중요한 스탠 헐리로 분할 예정이다. 


60대 중반이 지나는, 적지 않은 나이의 키튼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 부활은커녕 사람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일쑤인데, 키튼은 어떻게 보면 행운아일지 모르겠다. 부디 지금 이대로 경험과 연륜으로 좋은 작품에 출현해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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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 여름>


소설 <그 여름> 표지 ⓒ아시아



'동성애'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난 4월 25일 4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확고한 대답에 대선 주요 이슈를 넘어 사회 전체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지만, 동성애 차별은 반대한다는 대답. 


감히 말하지만, 위 세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 동성애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거나 반대하거나 반대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 내에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성애 차별 또한 동성애를 특별 취급한 말이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는 대답이 맞지 않은가, 싶다. 동성애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봐왔다. 특히 영화와 소설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 동성애 반대나 혐오를 반대하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성애가 이슈화되지 않는, 동성애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콘텐츠를 봤으면 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낸, 데뷔 4년차 신인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 소설 <그 여름>. 


소설은 두 주인공 김이경, 이수이의 신(新)고전적 서사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다. 이들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이지만, 우린 어느새 이들이 그런 관계라는 걸 잊고 만다. 그리곤 그저 이들의 사랑을, 청춘을, 서사를 따라갈 뿐이다. 그 기점은 이들의 사랑이 확고해지는 시점이다.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본문 28, 30쪽)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우연한 사고로 처음 만난다.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의 얼굴이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까지 났고, 그들은 함께 양호실과 안경점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이경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수이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둘은 서로 강렬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선이 갔고 몸이 반응했다. 


스무 살이 되며 둘은 서울로 갔다. 이경은 서울 중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수이는 서울 외곽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변함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단단한 사랑은 이경의 예감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언젠가 수이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예감. 그 기저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수이에 대한 이경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경에게 은지가 다가온다. 아니, 이경이 은지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이경이 생전처음 사랑을 해본 이는 다름 아닌 수이, 하지만 생전처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 당사자는 은지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이 당연하듯 다가왔듯이, 이경과 은지의 끌림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이다. 다만 소설에서 남자를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성인이 되어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수이가 남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랑의 당사자일 뿐이다. 


갈 길 먼 인식의 변화, 이 소설로 시작


단편에 메시지가 있기는 쉬운 반면, 서사와 분위기가 존재하긴 힘들다. 구현해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여름>은 서른넷의 이경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의 '그' 여름을 시작으로 십삼 년 전까지의 일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형식을 띄기에 서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서사 덕분에 이들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특별한 동성애'적 사랑이 '평범한' 사랑으로 치환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과 평범한 사랑의 만남이 있다. 이경이 느끼는 사랑, 거기엔 누구나의 사랑도 있고 이경 만의 사랑도 있다.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을.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문 106쪽)


급기야 '내'가 겪었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환희를 느끼고 아프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포함한, 이경과 수이와 은지를 포함한, 누구나의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이 동성애적 요소로 동성애가 아닌 '애(愛)'를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고, 나아가 그 선택을 문학적 실력으로 잘 살려나갔다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인다운 패기가 아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번뜩였다. 


그럼에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나라의 인식은, 시대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쟁 거리가 될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동성애인데, 첨예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한심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앞으로도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동성애적 요소가 점철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우선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름>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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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니어스>


'편집자'와 '천재 작가'라니,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되는 영화 <지니어스>. ⓒ라이크콘텐츠



난 출판편집자다. 주로 소설을 많이 다루었는데, 결코 '잘 나가는' 편집자가 되진 못한다. 내가 만든 책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해 출판사와 저자를 기쁘게 해준 적이 없다. '유능한' 편집자라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괜찮은 책조차 되지 않을 형편 없는 원고를, 괜찮은 책으로는 만들어낸 경험이 다수 있으니까. 


그럼 '좋은' 편집자라면? 답하기가 어렵다. 먼저 좋은 편집자가 뭔지 아직 잘 모르니까 말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저자의 삶과 나아가 세상까지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원고(책)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편집자. 유명한 저자와 함께 하면서도, 무명의 저자를 들여다볼 줄 아는 편집자. 무엇보다 독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집자. 


영화 <지니어스>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 굴지의 출판사 스카라이브너스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 분)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 문학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압도적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을 편집한 이다. 영화는 그런 그에게 뉴욕 전역의 출판사에서 거절 당한 토마스 울프(주드 로 분)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맥스는 울프의 원고를 읽고는 바로 울프와 계약한다. 


'유명 편집자'의 삶은?


유명한 베테랑 편집자가 우리 시대엔 존재할까? 20세기 초 미국이라면 가능하겠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이크콘텐츠



유명 소설가의 삶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소설가가 있다면 반드시 편집자가 있어야 하는 법, 그런데 '유명 편집자'의 삶은? 아니, 편집자가 애초에 유명해질 수가 있나 싶다. 여기서 '유명'은 출판계 내부가 아닌 대중적으로 그러냐는 말이다. 창작만큼 코디와 편집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여러 콘텐츠를 통해 편집자가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도 그에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열정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엄연히 초짜 소설가인 울프를 베테랑 편집자 맥스가 다잡아 나간다. 과한 열정이 불러일으킨, 또는 개인적 스타일일 수도 있는 과도한 수사를 과감히 쳐내 독자들에게 읽힐 만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울프는 그대로 따르고 책은 대박이 난다. 하지만, 맥스의 아내 루이스(로라 리니 분)와 울프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 분)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맥스와 울프를 느낀다. 


상당한 분량의 첫 책, 그리고 대성공. 울프는 톨스토이라도 되어볼 심상인지 자그마치 5000매 짜리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들고 나타난다. 이대로는 절대 책으로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한 맥스는, 울프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가멸차고 냉정한 편집을 가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들더라도 좋은 책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더욱 일에 열정을 퍼부으면서 그들 곁에 있는 여인들은, 특히 엘린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울프의 도를 넘은 과도한 열정은 파멸적 비극을 예견하고,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맥스의 마음과 자주 충돌하며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런가 하면, 맥스가 울프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엘린은 도무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한편, 맥스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충실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가족과는 가깝지 못한다. 


조화롭기 힘든 조합의 기막힌 조


냉철하고 대쪽 같은 베테랑 편집자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초보 소설가의 조합은,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라이크콘텐츠



맥스의 대사를 통해 형상화되는 진정한 편집자의 자세는 대체로 정석적이다. '나는 이 글이 좋아. 하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독자들이 읽었을 때 좋아야 해.'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뒤에서 조력할 뿐이야.' 등. 반면 울프는 열정적인 예술가의 표본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지 못하면 더 이상 소설가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를 거야.' 등. 


맥스와 울프의 조합은 현실과 이상의 기막힌 조화를 상기시킨다. 물과 불, 진보와 보수만큼 조화롭기 힘든 조합 아닌가. 그래서 우린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완벽함'을 보고 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남은 작가와 편집자, 편집자와 작가.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아쉽게도 이 둘의 행복한 시절만을 그리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대상들이 감수해야 할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울프의 연인 엘린이 그 표상인 바, 그러나 영화에 긴장을 조성하기 위함으로만 껴넣은 인물인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녀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영화의 만듦새까지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한 영화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들어가야 할 인물이자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편집자와 소설가의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사랑에 죽고 못 사는 감정적이고 퍼스널한 관계를 대비시켰으니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게 당연하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행해야 할 스텝


'편집자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출판사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이크콘텐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황홀해 마지 않는 시대 1920년대 프랑스 파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당대를 넘어 역사상 길이 남을 예술가들을 본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거투루드 스타인, 피카소까지. 보는 관객 또한 황홀해 마지 않았을 면면들. 우린 <지니어스>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미국 뉴욕이라면, 대공황의 한가운데일 터. 모든 출판사들이 경제, 사회 서적을 앞다투어 펴냈을 것이다. 즉, 돈이 될 만한 책 말이다. 문학은 뒷전일 수밖에 없을 테고, 울프 같은 초짜에 과도한 열정을 책에 고스란히 옮기는 예술가 나부랭이는 안중에도 없었을 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또 한 번의 방점을 찍는다. 일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할까. 


유명 작가들의 책을 낸 편집자와 출판사는 부지기수다. 돈 뿐만 아니라 그게 편집자와 출판사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기도 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진정 명망을 높이는 일은 아무도 찾지 않고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분명 보석인 게 분명한 이를 발굴해 제대로 키워내는 것일 테다. 거기엔 말 못할 정도의 노력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안주와 모험은, 하나가 시작되면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보고 의식하며 발 맞추어 나가야 하는 동지다. 이 영화는 여러 관계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스텝을 일깨우고 알려준다. 베테랑 편집자 맥스는 천재 소설가 울프를 끌어올린 천재 편집자가 아닌, 그릇이 넓은 관계의 천재였던 것이다. 모든 편집자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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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웨스 앤더슨 컬렉션>


<웨스 앤더슨 컬렉션> 표지 ⓒ윌북



2014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영화 한 편이 나왔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 역사상 '가장 예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어느 누구도 한 번 보면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을. 엄청난 감독들이 많지만, 그는 단연코 눈에 띈다. 


나는 웨스 앤더슨 영화를 얼마 전 <문라이즈 킹덤>으로 처음 접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았다. 그의 최근작 두 편을 본 셈인데, 어쩐지 그 이전 작들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너무나도 예쁜 영화들이지만, 모두 비슷하게 너무나도 예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 한 권으로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그의 모든 작품(20년 동안 불과 8편이다!)을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이 유일하게 모든 걸 드러냈다는 책, 웨스 앤더슨을 가장 잘 아는 평론가로 유명한 매트 졸러 세이츠가 일종의 인터뷰어가 되어 이끌었다는 책, <웨스 앤더슨 컬렉션>(윌북)이다. 


먼저 책의 외관과 디자인적 요소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웨스 앤더슨 책 아니랄까봐 완벽하게 짜 맞춰진,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예쁨'을 선사한다. 책이 아니라 아트 상품이라고 생각되는데, 진정 '폼 난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지 디자인도 장마다 철저하게 통제된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미(美)'를 선사한다. 누가 봐도 웨스 앤더슨 책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제외한 웨스 앤더슨의 일곱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논하는데, <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넌바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다즐링 주식회사> <판타스틱 Mr. 폭스> <문라이즈 킹덤>이 그것이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개봉조차 되지 않아, 팬이 아니라면 익히 들어보지 못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앤더슨과 세이츠는 절반 이상 알지 못할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앤더슨의 작품 세계와 스타일과 개인 이야기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화 역사, 감독, 음악가, 미술가, 작가는 물론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 방대한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다. 그럼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건, 팬들에게는 앤더슨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좋을 것이고 그냥 책이 예뻐서 집어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는' 웨스 앤더슨 월드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닌, 앤더슨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던 사실들을 수정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그를 오해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한 치의 오차 없이 웨스 앤더슨의 철저한 통제 하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 영화를 본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데, 앤더슨은 책을 통해 그 오해 아닌 오해를 해명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겠다. 


웨스 앤더슨 曰 "이 사건이 이렇게 벌어지면 더 슬프겠군, 혹은, 여기에서는 한 번에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군, 이렇게 하면 관객한테 효과를 줄 수 있겠어, 지금이 몇 월인지 알리는 것뿐 아니라 10월은 파란색 커튼에 나오고 그래서 이런 분위기라는 걸 알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알리고, 그러면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관객을 스토리에 끌어올 수 있겠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종의 추상화 같은 겁니다. 일부러 관객을 밀어 넣는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걸 느끼겠지' 하고 직갑하는 거죠." (본문 118쪽)


매트 졸러 세이츠 曰 "웨스 앤더슨 영화들을 보면 사람들이 만든다는 걸 늘 느낄 수 있죠. 작은 카메라워크 하나까지.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카메라가 팬 할 때에도 로봇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는 않아요. 사람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죠. 줌을 쓸 때에도 옛날 스타일로 기계를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정확히 계산된 게 아닙니다." (본문 259쪽)


앤더슨 월드의 정점


세이츠는 이 책에 소개된 7편의 영화 중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와 <문라이즈 킹덤>이 가장 좋다고 엄지를 치켜드는 것 같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앤더슨과 대화한다. 그렇지만, 정작 웨스 앤더슨 월드와 스타일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파트는 <판타스틱 Mr. 폭스>다. 영화 자체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거니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대화를 나눈다. 즉, <판타스틱 Mr. 폭스> 파트만 읽어도 앤더슨에 대해 상당 부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건 다른 말로 이 애니메이션이 앤더슨 월드의 한 정점이라는 뜻이다. 


<판타스틱 Mr. 폭스>는 웨스 앤더슨의 8개 작품 중 6번 째에 해당하는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다. 그가 구축해온 세계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명랑함, 장식적 디자인, 야한 유머, 세세한 것들로 가득한 구성,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시나리오와 연출, 음악으로 힘을 얻는 표현, 당당한 피날레. 그야말로 앤더슨 감수성의 끝이다. 세이츠는 이 작품을 두고,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용어로 감독의 형식과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앤더슨 학파의 입문서다'라고 평한다.


<문라이즈 킹덤> 파트도 또 다른 핵심을 찌른다. 다른 무엇보다 '영화'에 천착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의외인데, 앤더슨은 수많은 영화 감독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 고전인데 오손 웰스, 사티야지트 레이, 알프레드 히치콕, 프랑수와 드뤼포, 장 뤽 고다르 등이다. 이 파트에서는 <문라이즈 킹덤>에, 나아가 앤더슨 월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와 감독들을 깊이 있게 논한다. 상당히 깊이 있고 전문적이다. 


더불어 앤더슨 월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도 심도 깊게 논해진다. 책 전체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음악 논의인데, 웨스 앤더슨 영화 하면 카메라와 화면과 캐릭터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평가되는 부분일 테지만 사실 음악이야말로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 책 <웨스 앤더슨 컬렉션>을 두고 나는 '모두가 이해하거나 즐길 순 없는 용어로 감독의 형식과 주제뿐만 아니라 그 이면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앤더슨 월드의 모든 것'이라고 평하련다. 혹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빠져 있어서 섭섭하거나 아쉬움을 느낀다면 '웨스 앤더슨 컬렉션' 시리즈 1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윌북)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이 책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몸과 영혼을 모두 취할 수 있다. 


이제 고작 가장 최신의 두 편을 보았을 뿐이니, 곧 <판타스틱 Mr. 폭스>를 시작으로 앤더슨 월드를 여행해 보리. 고퀄리티를 자랑하는 8편 뿐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 예상한다.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세계로 가보심이 어떠신지? 후회는 절대 없을 것이다. 대신 황홀한 여운만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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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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