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월>


소설 <세월> 표지 ⓒ아시아



2014년 4월 16일,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참사가 발생한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탑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했다. 당년 11월에 결국 수색이 종료되었는데, 9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 여가 지난 2017년 3월 22일 드디어 세월호가 인양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참사 3주기가 지난 4월 18일에는 미수습자 9명 수색이 시작되었다.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색은 나라가 바뀌고 있다는 청신호일까? 그 청신호에 맞춰, 아니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많은 관련 책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나왔는데, 세월호의 그늘을 그린 이는 감히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출간한 방현석 소설가의 <세월>은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한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 엄마는 희생자, 아빠와 오빠는 미수습자... 다섯 살 아이만 혼자 살아 돌아왔다. 언론에서 소소하게 다뤄졌을 뿐, 많은 이들이 모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세월>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월호 베트남'으로 검색하면 겨우 몇몇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 실화가, 이 소설로 그늘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히 이 실화가 그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그늘, 베트남 이주민 가족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는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아니다. 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엄마 린의 아버지 쩌우다. 쩌우는 베트남 까마우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딸 린이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그는 마뜩잖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던 일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행동과 결정은 자본주의 물결의 한 갈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탄하고 한탄한다. 


그런 와중, 갑자기 딸 네가 제주도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농사 지으면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런데 그 소식은 곧 여객선 침몰 소식으로 점철된다. 자본주의 물결의 한탄이 자본주의 침몰로 갈 길을 잃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하고, 곧 잘못된 발표고 사실 구조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쩌우는 큰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쩌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축하를 받는다. 딸 린이 일주일 만에 건져 올려졌기에,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받은 축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을 간직한 채 하염 없이 기다릴 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딸이 거기서 죽어야 했는지, 사위와 외손자가 왜 아직도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소설이 주목하는 건,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목해야 하는 건,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겠다. 쩌우는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 가족이다. 기뻐하면서, 비참한 부러움과 기막힌 축하를 받으며, 끔찍한 기다림까지 교차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들은 이주민.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똑같은 목숨일진대, 차별 받는다. 


세월호 참사, 그 다양한 이야기와 진실의 시작


단편에 가까운 중편, 이 짧은 소설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라는 당대 최대 비극이라는 층위 아래, '베트남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더 깊이 들어가 그럼에도 존재할 '차별', 한편으론 한국은 물론 베트남까지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까지. 


각 층위의 갯수와 깊이만큼 스토리의 얼개가 얇고, 그러다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읽힐 여지도 많지만, 던지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고 깊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목적에 충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빨리 읽힐 뿐이다. 그러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층위가 보인다. 


큰 사건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명백한 한 쪽의 잘못과 한 쪽의 명예로움만으로 비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도 계속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오는 게 그 예다. 세월호 참사는 이제 3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세월>이 그 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롯해 일명 '베트남 3부작'을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한국과 베트남'의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우리가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진실이겠다. 마음 졸이는 한편 작가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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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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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몬드>


소설 <아몬드> 표지 ⓒ창비



우리 뇌에는 '아몬드' 모양의 중요 기관이 있다고 한다. 동기, 학습,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편도체'. 그래서 아몬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사실 아몬드가 한자로 '편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아몬드. 


소설 <아몬드>는 작은 편도체와 각성 수준이 낮은 대뇌 피질을 타고난 아이 선윤재의 이야기다. 대신 그에겐 엄마와 할멈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 그런 한편, 선윤재와는 반대로 타고난 아이 곤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에겐 누구에게도 말 못할 어둠의 기억들이 있다. 이 둘의 만남과 성장은 강렬한 한편 눈물겹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치 못했다' 등의 식상한 감상평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 있는데,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간다. 일찍이 영화평론으로 데뷔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계속 단편 영화를 연출해온 '영화통'이다. 


이창동, 유하 등의 작가 출신 영화감독이나 천명관처럼 영화감독으로의 궁극적 꿈을 꾸는 작가는 익히 봐왔지만, 영화감독 출신 작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소설을 더 반기는 추세에 적잖은 이점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은, 안 된다


소설은 날카로운 아픔으로 시작한다. 유일한 혈육들이 피칠갑으로 살인당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나, 윤재. 그러곤 그 유일한 혈육들인 엄마와 할멈과 나의 끈끈하면서도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윤재는 태어나길 감정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마와 할멈은 그에게 좋은 감정을 끝없이 불어넣어준다. 


시작부터 예고된, 홀로된 윤재. 어린 그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이 없기에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그의 곁으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 다가온다. 엄마와 친하게 지냈다던 건물주 심박사를 비롯해, 풍부한 감정을 지녔지만 어둠의 기억들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곤이, 그리고 윤재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본인 도라. 


우린 이들의 모습에서 무감정이 주는 '편리함'과 감정이 주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윤재의 무감정과 무표정이 부럽고 따라하고 싶어 진다.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넘겨 집으려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윤재가 오히려 소통과 공감을 울부짖는 이 시대에 일종의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고 또 알고자 하고 느끼고자 하는 지금, 이 감정과다의 시대에 '무감정'과 '무관심'이 나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감정이 없는 게 편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해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일까. 결국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일까.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한도 끝도 없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결국 무감정과 무관심이 우리를 좀먹는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다


소설은 다분히 '성장 소설'로서의 콘셉트다. 전체적 느낌은, 성장 소설의 대명사 <데미안>보다는 또 다른 대명사 <호밀밭의 파수꾼>에 가깝다. 세상의 표준과는 너무도 다른 주인공, 그는 혼자다. 하지만 그에겐 빛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 덕분에 세상의 표준과 가까워진다. 아니, 표준과 다른 것도 표준의 하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아몬드>는 또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뜬금없다고 할 만한 마무리도 닮았다. 다름 아닌 빛과 같은 존재와의 해후, 그리고 변화. 한 단계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곁에 두고 가끔씩 다시 읽어도 하등 지루할 것 없는 전개와 읽는 이의 마음을 영원히 어루만져줄 것 같은 따스함은 조금 엹다. 


우린 아마 풍부한 감정을 가졌을 거다. 그래서 제대로 감정을 '배운' 적이 없을 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윤재가 감정을 배우는 모습이었는데, 굉장한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상당히 불쾌하기까지 했다. 책장을 덮으면서 그런 마음은 거의 없어졌다. 감정을 배우진 않더라도, 감정을 소중히 여기며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인간은 머리가 온전히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만, 가슴이 머리를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린 내 감정은 물론 남의 감정도 잘 다루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잘 못 다루기도 한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는 것이다. 윤재의 무감정이 부러웠다가, 감정을 배우는 윤재가 부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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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쇼콜라>


광대극에 혁명을 가져온, 역사상 유명한 두 광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쇼콜라> ⓒ판씨네마



19세기 말 프랑스, 한때 잘나갔던 광대 푸티트는 여지 없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서커스단 합류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단장은 그에게 20세기 관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대를 원한다. 푸티트는 구상에 들어가고, 식인종 연기를 하는 흑인 광대 카낭가를 눈여겨 본다. 설득 끝에 콤비를 이룬 푸티트와 카낭가, 단번에 상종가를 올리며 지방의 소규모 서커스단을 인기 서커스단으로 탈바꿈 시킨다. 


최초의 백인과 흑인 조합 콤비, 단장은 카낭가의 이름을 쇼콜라로 바꾼다. 그렇게 광대극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인기가 수도 파리까지 퍼진듯,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누보 서커스단이 그들을 스카웃한다. 파리 진출도 단번에 성공시키는 그들, 하지만 오직 '광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매진하는 푸티트와는 달리 쇼콜라는 치솟는 인기로 여자와 도박과 사치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다. 


영화 <쇼콜라>는 영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푸티트와 쇼콜라의 시소의자> 실제 주인공 인생 역전을 그린다. '영화'라는 장르의 시작을 함께 할 정도이니 그 엄청난 인기와 명성이 짐작가는 바, 영화는 특히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누리고자 했던 쇼콜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고 다층적이었으며 다변적이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광대' 쇼콜라, 그리고 '흑인' 쇼콜라


푸티트는 '광대'이고 싶었고, 쇼콜라는 '연예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으니... ⓒ판씨네마



영화의 시작은 쇼콜라가 아닌 푸티트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푸티트, 한물 간 스타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패기어린 애송이 같은 이미지다. 영화는 푸티트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티트는 영화에서 '백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사실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제 푸티트 부활 프로젝트의 파트너, 쇼콜라가 나올 차례. 곧 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영화는 푸티트가 아닌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콤비는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결고리 정도일 뿐이다. 


인기와 명성을 얻을 대로 얻은 쇼콜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모든 무대 기획은 푸티트의 몫, 쇼콜라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일은 하되, 밖으로 싸도는 쇼콜라. 영화는 푸티트 또는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아니라 쇼콜라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 같다. 그렇다. '흑인' 쇼콜라와 '광대' 쇼콜라. 


이 콤비 무대의 백미는 '백인' 푸티트가 '흑인' 쇼콜라의 엉덩이를 걷어 차는 것. 이 콤비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행사 관계자들이나 푸티트와 쇼콜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압력을 받고 돌아와 깨달음을 얻은 쇼콜라는 그 행위가 더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대'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광대 이전에 '흑인'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존재 말살의 층위


연예인에서 시작해 광대로 나아가고 자 했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 쇼콜라. 다른 길을 택한다. ⓒ판씨네마



당시 광대라고 하면,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면에서 푸티트는 진정한 광대다. 반면, 쇼콜라는 광대라기보다 광대병에 걸린,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단한 콤비의 한 축이지만, 푸티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다. '광대'라는 층위로 평등하게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푸티트보다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존재 쇼콜라가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더 인기가 많고 더 알려지는 것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쇼콜라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인간 이하의 원숭이로 표현해 비하를 이용한 코미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완전히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누보 서커스단장은 이 완전히 다른 두 층위를 하나로 슬며시 묶어버린다. 시궁창에 있던 너를 건져내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어디냐며, 광대라면 자신을 잊고 대중을 위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쇼콜라는 '광대'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존재 말살의 층위를, '흑인'이라는 절대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존재 말살의 층위와 일치화해야 하는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평등 국가 프랑스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 푸티트가 그와 함께 한 건 광대로서의 쓰임새를 본 것이지만 그 안에도 그런 시각은 있었다. 더욱이 누보 서커스단장이 그를 가져다 쓴 건 다분히 '흑인 광대'로서의 쓰음새를 본 것이겠다. 이 뿌리 깊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틀에 반기를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봐야 할 건 쇼콜라의 '반기'인 것이다. 


혁명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


광대를 넘어, 흑인을 넘어,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하지만 그 비극적인 끝이 예견되어 있는 것 같다. ⓒ판씨네마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층위를 걷어내고 쇼콜라에게 집중해야 할 건, 그의 달라진 생각 이후 행동으로 옮기는 직접적 '반기'다. 아니 '혁명'에 가깝다고 할까. 그 장면은 굉장한 충격과 함께 사이다 같은 속시원함을 선사하는데, 그 어떤 폭력·비폭력 혁명 또는 반기보다 매력적이다. 방법으로 보면 문학적이라고 할까 급수로 보면 고급지다고 할까. 


그의 마지막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당대 흑인이 그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 때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자리는 흑인의 자리가 아니고, 그 인기와 명성은 흑인의 것이 아니다. 아니, 흑인의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혁명의 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줄 뿐이다. 


혁명이란 수많은 실패와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알 것이다.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혁명의 빛이 조금이나마 비출 것이다. 쇼콜라는 그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혔고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잊히고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영화는 그의 '위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벼운 와중에 진중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흑인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을 보일 순 없었거니와 함께 하는 누구도 없었다. 혼자였다. 혼자였기에 완전한 한계에 직면하고 끝없는 방황을 했지만, 나아갔다. 당연한 걸 뒤로 하고 홀로 나아간다는 것,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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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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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단 아이돌론>


<문단 아이돌론> 표지 ⓒ한겨레출판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이 자랑하는 자타공인 전 세계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지명되며 대중적 인기와 함께 비평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다. 지난 2월 24일 일본 현지에서 출간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인기에 완벽히 부합하며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초판 인쇄 부수만 자그마치 130만부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다. 


1979년에 데뷔해 데뷔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여전히 남녀노소 불문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하루키론'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건 물론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번 상반기가 가기 전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하는데, 그에 맞춰 하루키를 다룬 하루키론 책들이 나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나올 것 같다.  


그중 하나가 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한겨레출판)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나왔으니 15년이나 지난 책인데, 그것도 책의 주제가 1980~90년대 일본 문단의 주요 작가라는 점을 볼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상륙에 맞춘 출간이라고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책이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뜬금없다고 느낄 순 있을지언정 허투루 별 것 아닌 책을 낸 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독특한 해석과 유머러스함이 빛을 바란다. 많은 책을 낸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엔 2006년에 나온 <취미는 독서>라는 책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나마 그 책도 절판되었단다. 소설, 소설가, 문단, 문화, 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만한 저자이다. 


RPG 게임을 연상시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


저자가 소개하는 문단의 아이돌들은 모두 8명. 그중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들은 5명 정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이들은 2명 정도다. 다름 아닌 '두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다. 저자는 하루키를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 시기에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를 냈던 작가 중 하나로, 류를 '작가'라는 틀을 넘어 폭넓은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펼쳐온 지식인 중 하나로 보았다. 


사실 하루키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단 아이돌'의 핵심이다.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잘 논해지는 작가이기 때문일 테다. 저자는 하루키의 판매량 수수께끼는 제외하고 '왜 그토록 잘 논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롤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킨다. '하루키 퀘스트'. 하루키 작품은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키가 작품에 그런 요소들을 숨겨놓고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저자는 하루키 작품 해석을 게임에 맞춰 소개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 또는 비평가의 레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벨 1은 분위기 비평이다. '나는 이 문체가 좋아, 이 세계관이 좋아'라며 어린아이처럼 써 내려가는 것. 레벨 2는 퍼즐 풀기다. 하루키 월드에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기에 그에 대한 해설을 써야 한다는 것. 쓸데없이 복잡한 '본격적 비평 시대'의 시작이다. 레벨 3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수수께끼 풀이 기계 같은 사람이 비평 아닌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 레벨 4는 공략본의 출현이다. 비평이 아닌 해석에만 매달린 이가 써내려간 하루키 퀘스트의 공략본이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매 작품마다 그렇다. 사실 가장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은 이런 면에선 가장 덜 궁금증을 자아낸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알 법한 하루키 월드의 진정한 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 팬들은 이 소설들을 읽으며 'RPG 게임'을 해왔던 거다.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교당하는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 우리나라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그 인기가 확실히 떨어진다. 단적으로 서점에서 이름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하루키 관련 책이 200여 권 정도인 반면 류 관련 책이 100여 권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현재 절대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비슷하다), 단지 '무라카미'라서 비교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일본 현지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하루키 월드뿐만 아니라 '류 월드'도 확연히 존재한다. 그 특징은 '조잡 파워'와 '와이드 쇼'로 정리할 수 있단다. 아마추어리즘의 힘으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켜 특별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대중적인 텔레비전 뉴스의 시대를 읽는 센서와 시대를 읽는 센서가 특출나게 발달했다는 것.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진단한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빨리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루키와의 비교는 일본에서 엄청나게 오랜 시간 계속 되어 오고 있는데, 저자는 두 무라카미의 비교론을 의심스러워 한다. 만약 둘 중 하나의 이름이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정도까지 비교를 했을까? 그리고 의외로 무라카미 비교론자들은 모두 결국엔 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루키에 비해선 류의 작품에 비평적인 요소가 더 잘 소화되어 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이항 대립의 도식은 하등 의미 없고 소모적일 수 있다는 것. 


하루키와는 다르게 류의 작품을 거들떠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영화로 옮겨진 소설 <69>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는 정도? 아마 저자의 말처럼 류를 보는 시선이, 단순히 소설가 이상의 그 무엇, 지식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일까.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1980년대의 일본, 우린 지금도 따라가고 있다


이밖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 '우에노 지즈코', '다치바나 다카시' 등도 거론된다. 대부분 저자의 빼어난 촌철살인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히 '지식의 거인'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광으로만 알고 있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여성차별을 위시한 '여성과 어린이 문제'는 상당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여성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차치하고,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한 축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대에만 10여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저자는 이 역시 날카롭기 그지 없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녀를 두고, '남자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음에도 남자 사회 내에서 앉을 자리를 확보했으며, '인텔리=양갓집 자제'를 위한 담론을 생산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고지식한 영감들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점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은 분명 작가 비평, 문예 비평의 성격을 띠지만, 1980년대 일본 사회 자체를 비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큰 틀에서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1부에서는 '거품 경제'를, 우에노 지즈코를 위시한 2부에서는 '페미니즘'을, 무라카미 류를 위시한 3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를 좆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호황과 불황, 페미니즘 유행, 지적 권위주의 파괴 라는 일련의 주제들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본 1980년대 일본은 그대로 1990~2010년대 한국이다. 전례 없는 호황이 지나 기나긴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되고 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시대, 여지 없이 지적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그림자를 따라기기 바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걸었던 길이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인 것인가.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도 한 번쯤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비평을 수단 삼아 우리가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갈 길을 목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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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슬로운>


우리에겐 낯선 '총기 규제' 이슈와 '로비스트'의 삶을 절묘하게 결합시켜 보여준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자타공인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분), 최고의 회사를 전격적으로 그만둔다. 거대 권력이 의뢰한 총기 규제 강화 법안, 일명 '히튼-해리슨 법' 반대 로비를 슬로운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히튼-해리슨 법 찬성 로비를 맡은 작은 회사로 이직한다. 옛날의 동지가 곧 적이 된 것이다. 


무지막지한 자금을 앞세워 히튼-해리슨 법 반대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거대 권력에 맞서, 이 작은 회사가 통과를 무산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도 '무슨 짓이든'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 슬로운은 로비스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로비스트가 합법화는 물론 활성화까지 되어 있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의 삶과 직업과 윤리와 신념을 제시카 차스테인의 신들린 연기로 보여준다. 우리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특수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의회 공작 활동을 벌이는 게 목적인 직업 '로비스트'와 역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총기 규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자체로 상당히 어렵고 먼 느낌의 영화다. 이 거리감을 무엇으로 좁힐 것인가.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고 타이트한 웰메이드


프로페셔널한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제시카 차스테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존 매든 감독이 제대로 된 옷을 입혀줬다. ⓒ메인타이틀픽쳐스



<미스 슬로운>의 마에스트로는 '존 매든'으로, 20여 년 전 화제의 중심이었던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감독이다.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된 웰메이드 영화의 대명사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미스 슬로운>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전문직 로비스트를 잘 표현해내기 위해선 고급지고 수려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스 슬로운'을 분한 제시카 차스테인의 존재감은 그에 완벽히 부합해 형형히 빛난다. 2000년대 중반에 얼굴을 내민 그녀는, 존 매든 감독의 <언피니시드>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이후 <트리 오브 라이프> <헬프> <제로 다크 서티> <인터스텔라> <마션> 등으로 자신만의 자리를 꿰찼다. 특히 <제로 다크 서티>에서 분한 마야는 그녀에게 가장 잘 맞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슬로운이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직업, 특히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직업을 소재로 한 영화가 종종 눈에 띈다. 대략 화려하기 그지 없고 다가가기 힘들거니와 직업에 본인 자체가 투영되는 직업들이다. 우린 덕분에 새로운 '인간 군상'군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스 슬로운>은 어떨까? 화려하고 세련된 직업인으로서의 모습 이면의 아프고 힘든 보통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맞닥뜨릴 수 있을까. 


영화는 그 이면의 모습조차도 '로비스트'라는 직업인의 한 측면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래서 시종일관 단 한 순간도 한가로울 틈이 없다. 쉴 타이밍 같은 건 없고, 바늘 하나 들어갈 구멍도 존재하지 않으며, 잠깐이라도 눈을 돌려선 안 된다. 그랬다가는 로비스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영화도 이해할 수 없다. 덕분에 지루할 틈도 없이, 다분히 타의에 의해서이지만 타이트하고 정갈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직업, 로비스트


로비스트와 가장 거리가 먼 것 같은 '신념', 하지만 로비스트야말로 '신념'을 가장 가까이 해야 한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슬로운의 삶은 오직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맞춰져 있다. 정확히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을 통해 절대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에 맞춰져 있겠다. 오직 승리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그런데 로비스트는 '선'을 넘기가 무척 쉬운 직업이다. 개인의 신념과 직업인의 신념이 부딪힐 때 맞닥뜨리게 되는 선 말이다. 함정은, 슬로운에게 신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로비스트라 하면 통념적 도덕에도 직업윤리에도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이다. 정당한 전략과 전술이 아닌 뇌물과 협박 등을 일삼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비' 자체가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은밀히 행하는 교섭 아닌가.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더욱 '신념'이라는 걸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로비스트라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닌 직업이겠는가? 극 중에서 동료들이 최고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슬로운을 멀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로비스트는 직업 특성상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하기에 기본적으로 서로의 신념에 합이 맞아야 한다. '총기 규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일 수 있는 국가적 이슈에 신념보다 돈이 앞설 것인가, 권력이 앞설 것인가, 명예가 앞설 것인가. 슬로운은 돈과 권력이 앞서는 회사를 때려 치우고, 개인적 '승리'의 발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문제는, '오직 승리'가 총기 규제와 관련된 신념 밖에 있는 개념이라는 것. 


총기 규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 때문에 적을 옮긴 것 같은 슬로운이, 점점 총기 규제가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옮겨가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그녀가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주위 사람을 괴롭게 하지 않는 다면 총기 규제 법안은 통과될 수도 있다. 그녀가 아니면 이길 수 없으니까. 이 난감한 상황이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대한 딜레마, '총기 규제' 이슈


이 영화의 핵심 이슈는 '총기 규제' 딜레마다.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깊이 파고들수록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메인타이틀픽쳐스



이 영화가 맞부딪히는 신념, '총기 규제' 이슈에 가까이 가보자.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50대 50의 절대적 딜레마 중에 하나일 테다. 극 중에 나오는 '히튼-해리슨 법'은 가상이지만, '모든 총기 판매 시 신원 조사 의무화를 명시한 총기 규제 강화 입법안'이다. 아주 강력한 총기 규제 법안이다. 좋다. 


이에 대항하는, 총기 규제 반대 법안을 내 자신의 사익 추구를 일삼으려 하는 거대 권력의 논리는 무엇일까. '수정헌법 2조'다. '규율을 갖춘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 정부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가 침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 총기 규제보다 더 상위 개념일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이다.  

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정치적 사항들을 차치하고 그 자체로만 바라보자. 총기를 규제해야 하는가, 총기를 휴대해야 하는가. 이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보다 근본적인 시각에서 기인한다. 정답은 없고 끝 없는 정쟁만 있을 뿐이다. 때와 장소, 사람과 환경, 경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기에 이 '로비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개인의 경험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총기는 규제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총기 사건이 있지 않았는가. 평소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도 한몫 할 것이다. 그렇지만, 총기 규제를 한다 해도 음지에서 계속 이어나갈 것이 자명하기에 오히려 총기를 갖추지 못한 이들이 위험에 빠질 요지가 늘어날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한 쪽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겠다. 아무런 신념도 지니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건 '옳지 못하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또한 나의 신념뿐 아니라 누구나의 신념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신념 없는 슬로운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신념 없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신념 없는 이들이 용기를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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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급생>


소설 <동급생> 표지 ⓒ열린책들



예술에 있어 '소품'과 일명 '작은 걸작'은 한 끗 차이다.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면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으며 2016년 최고의 영화로 우뚝선 <문라이트>는 제작비가 불과 5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품이 아닌, 작은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971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7년에 재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프레드 울만의 작은 소설 <동급생>(열린책들)이 재출간 40년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작은 판형임에도 13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소설은 어떨까. 그 자리에서 완주가 가능하기에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품을 가장한 작은 걸작이다. 


한스와 콘라딘의 꿈 같은 우정, 최선의 행복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을 다니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 슈바르츠, 1932년 2월에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소년이 전학온다. 저명한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 뭔가 '다른' 그 소년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는데, 함부로 다가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한스는 콘라딘이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한스에게 콘라딘은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한스는 콘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문학과 체육이라는 극점에 있는 것에서 말이다. 이내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 무엇도 그들의 우정을 방해할 순 없었다. 벽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표식이 나타났다든가 유대계 시민이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들겨 맞았다든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보였다. 


화가 출신 작가는 이들의 우정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표현해낸다. 암울했을 당시 독일과 대비되는 자연 풍경은 한스로 하여금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황홀함을 선사한다. 


한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그 시절은 횔덜린의 아름다운 시로밖에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다. 시에 일가견이 있는, 시인이 인생의 꿈이기도 한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횔덜린이기도 한대,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귀향>의 일부)와 같은 구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선의 행복을 표현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 정도였고, 한스의 가슴 속에 맺힌 행복의 이슬이 이 정도였다. 


마지막 한 줄로 위대한 소설이 되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종말이 코앞에 와 있었다는 걸.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종말의 전조들이었다는 걸. 1930년대 독일에서 독일 귀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독일을 당연히 조국이라 생각하고 그에 충성을 다하며 자연스레 '독일인'이어도,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졸지에 '독일을 망치고 있는 유대인'이 된 한스, 콘라딘과의 불가항력적인 멀어짐도 비슷한 이유였다. 급기야 콘라딘을 피하기 시작한 한스,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있어 미국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한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화한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산화한 동찰들 리스트를 읽어내리는 한스, 그곳에서 더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전체가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수렴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 한 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러곤 지체없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줄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다. 


한 층위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우정 또는 사랑의 총량이 이리도 엄청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다른 층위를 '동성애'라는 코드로 풀어내 더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이 소설 <동급생>은 어떨까. 한 층위는 비슷한 수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층위가 주는 수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다. 자신과 가족과 시대까지도 뛰어 넘는, 즉 모든 걸 뛰어 넘는 우정의 총량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 한 줄로 그 어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뛰어 넘거니와, 위대한 콘텐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홀로코스트 작품보다 큰 울림


이 소설이 어줍잖게 홀로코스트를 끼워넣었다면, 명백한 소품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동급생>과 굉장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비록 슬프고 아름답고 충분히 위대한 감동과 역설을 선사하지만 '작은 걸작'이 아닌 '소품'이라고해도 무방하다.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에서는, 생각보다 그 울림이 작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급생>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충격을 주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홀로코스트'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래픽노블 <쥐>,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위대한 작품들이 생각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파급력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더 심도 있고 치열한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동급생>은 홀로코스트를 작품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끔찍히도 와 닿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더 깊은 우정을 통해 많은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홀로코스트가 주는 절망감을 더 절절하게 전달하여, 더욱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랬다면 마지막 한 줄에서 받는 충격이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 그건 작품이 갖는 위치는 격하시키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였기에 이 작품이 위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탁월한 솜씨와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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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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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발자크의 식탁>


<발자크의 식탁> 표지 ⓒ이야기나무


이런 책, 좋다. 치열한 연구, 오타쿠적이기까지 한 관심과 열정, 종횡무진 오가며 확대재생산시키는 와일드함으로 무장한 책. 일단 뿌리 부분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겠다. 그에 못지 않게 가지나 잎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바, 보는 입장에선 얻을 게 무궁무진하다. 지식은 물론, 앎에서 오는 재미도 한가득이다.


앙카 멀스타인의 <발자크의 식탁>(이야기나무)이라는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뿌리 부분은 다름 아닌 '발자크'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소설가,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 말이다. 90편이 넘는 개별 소설들을 통해 당대를 완벽히 그려낸 방대한 소설 <인간 희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세계는 <인간 희극>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다. 여기에 '식탁'이라니. 발자크의 음식 사랑을 탐구하는 책인가, 싶다. 


막상 읽어 보면, 발자크가 아닌 발자크의 소설을 들여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 희극>을. 솔직히 말해, 발자크를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나 유명한 <고리오 영감> 정도? 하지만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럼에도 책에 손이 가고 글에 눈이 가는 이유는, (읽어보지 못한) 위대한 소설가와 음식의 만남 때문이다.


일단 이런 류의 '콜라보레이션'을 좋아한다. '딱'하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들의 만남은 많은 재미를 준다. 더군다나 관심은 지대하지만 막상 대한 적은 없는 발자크 아닌가. 발자크와 음식, 둘 다 따로따로 놔둬도 관심이 가는데 둘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그것도 지금의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배경 아닌가.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 희극>, 미식의 도시 파리가 보인다


저자는 발자크가 장갑과 돈과 음식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중 뜻밖의 것이 음식인데, 그는 미식가도 아니었거니와 제대로 된 식습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당대의 사회상을 짚기 위해서 였다. 그에게 음식은 영양 섭취 대상이나 미식적 대상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들에는 여지 없이 음식이 등장하는데, 인간 군상의 성격이나 재력, 집안 내력까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기 전, 파리에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 자체가 그다지 훌륭한 식생활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한 시기에 으레 그렇듯 신흥 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란한 시기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부를 함부로 과시할 수 없었기에, 도망간 황족들이 남겨두고 간 궁전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을 은근한 부의 과시 장소로 택한다. 프랑스 파리에 비로소 식산업다운 식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식의 도시 파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저자는 발자크가 이런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발빠르게 알아차리고 소설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가 <인간 희극> 속 등장인물들을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부터 가장 싸구려 레스토랑까지 찾아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 희극>은 파리 사회와 미식 문화에 대한 실용적인 보고서나 다름 없다. 발자크 소설이 곧 19세기 프랑스 파리였고,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곧 발자크 소설이었다. 저자는 발자크와 발자크 소설과 프랑스 파리를 종횡무진 누비며, 발자크를 읽고 싶게 만들고 나아가 파리를 여행하며 온갖 음식들을 먹고 싶게 만든다.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저자는 본격적으로 <인간 희극>에 뛰어 든다. 특별한 날,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그리고 침대까지. 들여다보면, <인간 희극>을 예로 드는 건지 당대 프랑스 파리를 예로 드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그만큼 발자크가 당대를 완벽히 파악하고 재연해낸 것이리라. 저자의 철저한 치밀한 연구도 한 몫 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음식과 함께 특별한 연회가 있어야 함은 상식이다. 하지만 당대, 특별한 음식과 연회(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막 '야만'의 식생활에서 벗어난 신흥 부자들이 뭘 알겠냐는 것이다. 그건 발자크도 마찬가지. 갓 습득한 예의범절과 겉치레는 음식과 술이 섞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발자크는 가장의 권위와 취향, 야망에 탐구를 바탕으로 특별한 날의 음식과 연회를 글로 옮겼다. 다분히, 인간 군상 중 하나인 '가장'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의 평범한 일상은?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의외로 <인간 희극>을 통해 프랑스의 중심인 파리 사람들의 음식 이야기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 사람들이 열정 없이 음식을 먹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음식보다 사업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정보를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자크가 생각한 이상적인 미식은 신선한 재료를 쓰고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에 있다며, 평범한 식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시골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발자크에게 돈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와 음식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는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가 지나치면 살을 위협한다는 발자크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너무 잘 챙겨 먹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아버지의 지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를 구분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등장인물에게 엄격한 심판의 철퇴를 내렸는데, 악인이 아니라 해도 스스로 만들어 낸 집착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가 생각한 미식의 천국은,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이상적인 미식이듯 어머니의 손길로 만들어진 과도함 없는 디저트였다.


매력적인 창작 도구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자크는 음식을 소설로 옮겨왔다. 저자는 이를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데, 반면 발자크 이후에는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프루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식의 세계를 소설에 담았다고 한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굴의 맛을 감상하고 싶다면 모파상을, 노란 크림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꿈꾼다면 플로베르를, 소고기 아스픽을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럽다면 프루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석영중 교수가 지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 중 고골은 엄청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로 글쓰기 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이었다고 한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의 코드에 의존해 범속한 일상을 전달하려 했다고 하고 푸슈킨은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음식을 탐하지는 않아 그 소박한 식성이 소설 문체와 분위기, 주제와 소재로 나타났다고 하니, 발자크와의 접점이 보인다. 그들에게 음식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물 또는 살아가는 데 가장 자주 접하는 욕망 중 하나가 아닌, 그야말로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아니었을까. 


발자크에게 음식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었다면, 저자에겐 역사적 인물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는 것 같다. 전기 문학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 저자 앙카 멀스타인은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프루스트, 로스차일드, 메디치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되었다. 근래 출간 예정인 <프루스트의 서재>가 심히 기대된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창조 도구라고 해두자. 나와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 '책과 영화'다.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을 책과 영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내는 '음식과 공부'일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일 테고, 누군가는 사랑일 테며, 누군가는 더 디테일한 하위 개념의 무엇일 테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걸 '어떻게' '어떤 이유'로 사용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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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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