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미스 프레지던트>


평범한 '박사모'를 들여다본다. ⓒ인디플러그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세대에게 옛날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 당신들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그보다 살 만해졌지만 엄청난 고생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후자의 끝은 박정희 또는 전두환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추모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흠모의 기운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또 하나 명백했던 건, 모두 평범하다는 것. 


작년 이맘때 축제 같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갔었다. 한번은 너무 일찍 도착해 시청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르신들의 행진에 휩쓸릴 뻔했다. 박사모 집회였던 것 같은데, 어느 어르신께서 아내와 나에게 박근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우린 당황했지만 그분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평범해 보였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쓰러진 10월 26일에 개봉해 시작부터 모종의 의미부여를 행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박사모 회원 세 명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는 알고 싶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은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이 진정 바뀌고자 한다면 알아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 


박정희와 육영수를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는 그들


평범한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신다. ⓒ인디플러그



그들은 청주에 사는 조육형 씨와 울산에 사는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박정희 사진에 절을 올리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가난을 철퇴하여 지금에 이를 수 없었다는 생각, 자신으로 하여금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가난 철퇴 선봉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고마움, 박정희를 향한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도리다.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도 박정희를 향한 마음이 조육형 씨와 같다. 배고픔을 해결해준 고마운 분, 인간답게 살게해준 감사한 분. 육영수를 향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천사같은 모습에 천사같은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천사같은 행동들은 그때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 그 자체다. 총탄에 쓰러진 두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 누가 뭐라 하든 박정희와 육영수는 마음속 영원한 은인이다. 


그들에게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 박근혜는 한 가족이나 다름 없다. 가족이라면 그 어떤 일을 저질러도 편이 되어줄 수 있거니와 편이 되어야 한다는 정서의 일환으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박근혜를 편든다. 거기에 어떤 고뇌나 갈등도 없다. 그건 일종의 종교,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는 숭배의 대상, 박근혜는 한가족이자 동정의 대상이다. 


미스 프레지던트. myth, mis, miss


제목 <미스 프레지던트>는, 박정희 신화와 잘못한 나쁜 대통령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디플러그



박정희는 한국근현대사의 절대적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그 그늘이 한국에 드리우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화적(myth)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박정희 신화는 그가 죽은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린 끊임없이 그 신화를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우상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분명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그의 후광을 업고 당선되었던 박근혜, 수많은 불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치명적으로 배신한,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두 번째다. 그들은 나쁜(mis)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그리워(miss)한다. 박근혜가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려지고 구속 수감 중임에도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향한 그리움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를 향한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변한다는 건, 곧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박정희와 육영수를 숭배하고 그들과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잘못된 대통령을 뽑아 잘못을 저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모두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들을 진정 숭배한다기보다 그 험난한 시절을 헤쳐나온 자신들의 업적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세대들도,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의 의미


아무 개입없이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디플러그



영화엔 어떤 입장도 없어 보인다. 감독이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를 연출해 풍자의 끝을 보여준 김재환 감독이기에 상당히 의아하다. 감독이 보기에 이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주인공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풍자의 대상으로 택한 이들은 미디어, 현직 대통령, 교회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했기에 풍자를 했던 게 아닐까. 


반면, 조육형 씨와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물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겠지만, 미디어, 대통령, 교회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일 테다. 다만, 앞서 내놓았던 작품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란이 예상된다. 


힘있는 자들을 향한 명백한 풍자는,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 또는 당사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우려가 있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예견된 수순이다. 반면, 이 영화처럼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는 행위는 자못 이해가 안 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받거니와 모두에게 지탄을 받을 게 자명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잘 알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속깊이 들어보고 들여다봄으로써 거대한 통합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국을 위해 한몸 희생한(?) 김재환 감독. 그렇지만, 이 영화 하나로 그 갈등의 골이 얕아지기는커녕 더 깊어질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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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단조로운 내레이션에 숨은 어려운 삶에의 철학이 돋보이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싸이더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아버지조차 말도 못 할 아기 시절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내가 기억할리는 없다. 그런 할머니가 나는 익숙하고 그런 할머니의 형상이 그려지는 건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었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아버지한테 전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모두 정확할리 만무하다. 머릿속 어딘가엔 정확한 기억이 있지만 능력 상 꺼내지 못하는 것이든, 애초에 걸러서 기억하거나 어느 한 순간 또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것이든, 원본의 기억이 아닌 편집본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마치 역사와 같지 않은가. 사실도출에의 노력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기억의 취사선택과 기억의 이어짐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제를 가장 앞에 둔다. 여기에 역시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관계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주제를 따르게 한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순간을 눈앞에 실증적으로 불러내는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잔잔한 이야기에 심심한 파동을 일으켜 많은 주제들의 추상이 형상화된다.


인간 홀로그램


인간 형상의 홀로그램에 기억을 심어 마치 그때 그 사람과 얘기하는 듯한 느낌.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다. ⓒ싸이더스



여든다섯의 할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 곁에는,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홀로그램이 있다. '그'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월터(존 햄 분)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하고 있다. 기억을 심어주면 영원히 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할 그는, 기억을 되살리거나 기억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주는 친구 또는 대체자로서 완벽한 존재다. 


그런 그를 마조리의 딸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는 싫어한다. 자신보다 그를 더 찾고 그에게 더 의지하는 엄마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을 아주 잘 대체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면, 테스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마조리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아주 좋은 친구가 아닌가.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잃어버린 형상들과 기억들 때문에 괴로웠던 마조리의 마지막 나날들은 다분히 월터의 홀로그램 덕분에 치유받는다. 월터의 형상이 눈앞에 있고 월터와 함께 했던 화려한 젊은날의 기억 또한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월터에게 날조된 기억, 사실이지만 기분 좋은 기억과 사실이 아닌 기분 좋은 기억을 심어준 덕분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기억은 아예 심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조리가 세계 8위의 테니스 선수 대신 월터를 선택했다고 거짓말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아예 전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 영화의 핵심, 기억


인간 형상 홀로그램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라면, 기억과 관계는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싸이더스



영화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굉장히 정적이다.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이 기거하는 집안이며, 역시 90% 이상의 장면이 그들 중 2인 또는 3인의 대화이다. 그들의 대화가 즉 영화이기에, 대화를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우린 '기억' '관계' 등의 핵심 주제를 찾아 엿볼 수 있다. 


존은 기억이란 뇌 안의 퇴적층과 같아서 기억하지 못할 뿐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꺼내어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를 옹호하며, 그로 하여금 마조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거나 마조리의 기억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다. 


반면 테스는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복사본의 복사본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는 홀로그램 월터의 존재가 마조리 기억을 되살리거나 생생하게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아마도, 테스의 주장 또는 이론이 맞을 것이다. 기억은 점점 쇠퇴해 언젠가는 소실할 거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모두들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존의 말을 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서랍장에 기억을 보관하고 언제든 꺼내 눈앞에 놓고 싶단 말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 천재 아인슈타인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관계, 그리고 기억


모든 건 기억에서 비롯된다. ⓒ싸이더스



관계는 기억과 함께 한다. 기억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관계 또한 사라진다. 마조리로부터 받은 한없이 작은 사랑, 마조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시피한 사랑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테스이지만 마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기억이 아닌 서로 간의 기억이야말로 사실상 그(그녀)와 나의 전부다. 


시간을 어김없이 흐르고, 기억은 쇠퇴하여 사라지고, 생명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홀로그램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이다. 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영화가 좀 더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앞서 테스가 아닌 존의 말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그동안 글, 그림, 사진, 영상 등으로 전해져왔다. 이젠 홀로그램이 가능해진 시대, 그 누군가를 눈앞에 데려와 함께 기억을 직접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미래형 SF적 요소가 있지만 SF영화라 칭할 수 없다. 인류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억, 기록을 남기는 데 전력을 다한다. 


비단 월터 홀로그램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마조리, 존, 테스의 홀로그램이 다른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나에겐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월터 홀로그램과 '얼마나 좋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니'라고 말하는 마조리 인간, 그리고 마조리 홀로그램의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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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카오스 멍키>


<카오스 멍키> 표지 ⓒ비즈페이퍼



'소설처럼 재미있다'는 말이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만큼 잘 어울리지 않고 통용되지 않는 장르도 드물 것이다. 아무리 읽기 쉽게 변형을 가한다고 해도, 기본이자 본질이 되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건 언제나 교훈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은 이야기가 아닌 사례에서 파생된다. 이야기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과 다르게, 사례는 그 자체로 수단이 되어 교훈에 목적이 있다.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혁신'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장르의 책들은 절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뜻의 혁신을 행하지 않는다, 못한다. 온갖 혁신적인 사례와 교훈을 들먹이며 혁신의 찬가를 불러대도 말이다. 


여기 '혁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명색이 경제경영서이지만, 저자 자신의 삶과 저자가 몸담았던 월가 및 실리콘밸리의 민낯을 말그대로 낱낱이 파헤쳐 까발린 책 <카오스 멍키>(비즈페이퍼)다. 신기하고 특이하게도 이 책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왠만한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보다 더 진득한 교훈이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마 사실이겠지만,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매일같이 몇 시간이고 매달리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지는 실리콘밸리는 '똥구덩이'다. 그동안 수없는 내부고발로 이미 똥구덩이인 줄 잘 알고 있는 정치판이나 금융계완 달리 IT업계는 순수한 이들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저자의 삶으로 들여다보는 IT업계의 속살


책은 저자의 직업 일대기를 따라 진행된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삶을 내보이며 자신이 속했던 직업계의 모습모습들로 완벽한 '재미'를 주고 나름의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버클리라는 초일류는 아니지만 충분히 일류에 속하는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국제금융시장을 대표하는 투자은행 겸 증권회사 골드만삭스에 취업한다. 저자는 기업신용파생상품부에서 가격결정을 담당하는 퀀트였다. 


이 똥구덩이에서 여러 개새끼들과 함께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일을 해왔던 저자는, 우연히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애드케미'라는 회사에 지원해 입사하게 된다. 그곳은 수학을 이용한 광고 최적화 프로그램 개발사였다. 무너져 내리는 자본주의의 격랑 한복판인 월가에서 나름 격리되어 있고 외떨어진 IT업계야말로 최후까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기에 애드케미 또한 똥구덩이인 건 마찬가지, 얼마 못 버티고 엔지니어 두 명과 함께 스타트업 회사 애드크로크를 창업하며 그곳을 나온다. 그들은 실리콘밸리 최고 최대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와이 콤비네이터의 우산 아래에서 회사를 시작하고 이끌어간다. 그야말로 모든 걸 내팽겨친 채 회사에만 매달려 열심히 하고 잘 하고자 그들에게 '트위터'가 접근한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했던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제시하지 않는 트위터와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페이스북에도 제안을 하고, 페이스북은 저자의 동료들이 아닌 한 명만 입사하길 원한다. 이에 애드크로크는 트위터에 인수당하고, 저자는 페이스북의 광고팀에 입사한다. 황당하기 그지없고 앞뒤 없는 무례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모습이란다. 이쯤에서 다시 나오는 똥구덩이...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하는 인간쓰레기들


6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절반쯤 도착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페이스북에서의 치열하고 황당하고 비열하고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현재 전 세계 최고의 기업이자 가장 유명한 기업이자 누구나의 생활 속에 이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업이 있을 수 없을 만큼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업 페이스북.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2013년 전까지 페이스북의 수익은 한심할 정도였고 광고규모는 놀라우리만큼 작고 매력 없었으며 기성 관리 툴은 버그로 가득해서 쓰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사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금융계와 IT업계에서만 쓸 법한 수많은 단어들의 향연, 당연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읽고 큰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건 우리 모두가 알 만한 기업 페이스북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 만한 IT업계의 다양한 이름들 덕분이겠다. 물론 저자의 거침없는 풍자와 자학,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할 정도의 실랄한 내부고발과 실명비판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소시오패스론'이다. 


애플 창업 초기 핵심 동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을 비롯 직원들을 등쳐먹고 끝까지 착취했던 스티브 잡스, 경쟁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 IBM에 Dos를 납품했던 빌 게이츠, 쌍둥이 형제의 아이디어를 훔쳐 비록 수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족히 수백억 달러를 버는 지금의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까지. 이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카오스 멍키'다. 카오스 멍키는 서버가 늘어선 데이터센터에서 원숭이가 케이블을 뽑고 서버를 부숴 난장판을 만들듯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일부러 프로세스와 서버를 다운시킴으로써 그러한 공격에서 성능 저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실험하는 내부 결함 테스팅 툴로 넷플릭스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그 자신이 카오스 멍키나 다름 없는데, 책은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를 포함,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과 회사들은 하나같이 '쓰레기'들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이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를 이끌며 떠받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혁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아마 내부동력으로는 영원히 바꿀 수 없지 않을까. 


이들은 우리 모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우리 자신과 하등 관련이 없다. 단순 물리적으로도 너무 먼 존재이고, 살아생전 절대 만날 수 없을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배우듯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듯, 실리콘밸리 신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형태가 그들로 인해 바뀌어 왔지 않은가. 단순히 그들의 대외적인 모습만을 숭배하며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의 대내적인 모습을 면밀히 검토하고 받아들일지 말 것인지 결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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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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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제목만으로도 힐링을 주는, 흔치 않은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이수C&E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서의 뜬구름 잡는 희망섞인 대화에서, 썩어가는 포도와 출근 준비를 하는 찌든 얼굴의 남자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좁은 사무실에 우루루 모여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들까지. 아오야마는 홀로 도쿄에 올라와 자취를 하며 오랜 취업활동 끝에 영업사원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상사에 의한 일방적인 갈굼, 당연히 수당을 받을 리 없는 야근, 한밤중까지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로 더 이상 살아갈 마음이 없다.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던 그, 너무 힘들어서 쓰러진 것인지 자살하려고 했던 것인지 지하철이 들어오던 찰나 선로로 떨어지려 한다. 간발의 차이로 그를 살려내는 이, 야마모토. 다짜고짜 만면의 웃음을 띄며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란다. 그러며 한잔 하러가 서로를 알아간다. 그것도 모자라 아오야마가 쉬는 날을 이용해 아오야마의 고루한 외모를 세련되게 바꿔준다. 이후 일이 잘 풀리는 듯한 아오야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계약건을 거의 다 끝내놓고도 마지막에 가서 황당하고 어이없기 그지 없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급기야 부장의 명령에 의해 그 계약건은 에이스인 이가라시에게 맡겨진다. 한편 야마모토가 성가신 아오야마인데, 우연히 길을 가던 야마모토의 평소답지 않은 우울한 모습에 전격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다름아닌 그가 3년 전에 자살했다는 기사를 접한다. 이게 무슨?


힘겨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란?


'제로'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는 시대에 '희망'이란 존재할까. 있다는 그건 무엇일까. ⓒ이수C&E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삶의 면면, 특히 취업을 다루는 콘텐츠가 정녕 부지기수다. 사실 2008년 전세계 금융 위기가 있고 나서 몇 년 후인 2010년대 초반에 절정으로 유행했기에 이젠 조금 시들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취업시장에서 회사로까지 침투했으니,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그 이야기다. 


물론 회사에서 힘든 이야기는 비단 지금뿐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위기 시대가 아닌 성장일로 시대 때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노동자는 성장을 위해 한몸 바쳐 희생하는 조직체였다. 지금의 객체적 개념과는 천지 차이다. 그래서 '나때는 말이지-' '요즘 젊은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장광설이 나오는 것일 테다. 


지금은 제로성장, 아니 마이너스성장 시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까스로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금, 육체적 고통 이전에 정신적 고통이 기본적으로 수반된다. 압박을 하고 압박을 당하는 모양새가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어떠냐고? 절대적 강도가 줄어들었을 뿐, 여러모로 발전된 현대사회의 기준과 일치하진 못한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사는 게 뭐냐는 질문에 희망을 갖는 거라고 대답하는 대화로 영화가 시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게 어떤 성격일까. 더 나은 회사원이 될 거라는 희망? 더 나은 인간이 될 거라는 희망? 부디 후자이길 바래본다. 


치가 떨리게 공감되는, 회사의 악랄한 일들


영화는 신입사원이 겪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회사 상사의 술수를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후반에 있을 감동 코드를 배가시키고자 한다. ⓒ이수C&E



영화는 아오야마가 야마모토 덕분에 보다 밝게 바뀌어가는 만큼 회사에서의 일로 더욱 힘들어 한다. 그러며 한순간 눈물 쏙 빼놓는 감동도 선사하는 걸 잊지 않는다. 전형적이리만치 일본적인, 즉 밝은 것이든 악랄한 것이든 감동적인 것이든 극단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중 가장 와닿는 건 단연 회사에서 겪는 악랄한 일들이다. 


같은 회사원으로 공감을 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아오야마를 위로하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오직 상사만을 위해 야근까지 완료한 후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 그저 쉬고 싶고 자고 싶고 내일 따위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여기서 가장 악랄한 건 업무시간 이후에 걸려오는 상사의 전화다. 


믿기 힘든 실수로 중요한 계약건이 날아간 아오야마에게 내려진 명령, 에이스 이가라시에게 계약을 통째로 넘겨라. 그리고 사무실 직원 모두에게 무릎 꿇고 진심으로 사과하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여기선 인격살인과도 같은 사과 방식보다 몇 개월 동안 공들인 계약건이 성사 직전 통째로 넘겨졌다는 게 더 악랄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아오야마가 자살을 생각하는 건 그리 와닿진 않는다. 극의 전개상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반면, 다음날 기다리고 있을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생각하느라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말하면서도 잘 수 없는 아오야마의 잠자리는 치가 떨리게 공감된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잘 수 없고, 벌떡벌떡 일어나고, 괴로워 미칠 것 같은...


전형적인 현실공감판타지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론으론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건... ⓒ이수C&E



우린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야마모트를 쫓아가 들여다봐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도 아마 아오야마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게다. 그가 아오야마에게 건네는 별 거 아니지만 그 어떤 말보다 진실된 말들에서 행간을 읽어볼 여지가 있다. '무슨 일 있니?' '잠은 잘 자니?' '밥은 잘 챙겨먹고?'


저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은 아마 가족, 또는 가족 같은 사이뿐이지 않을까. 영화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 가족의 소중함으로 이어진다. 이어서 회사원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까지. 전체적으로 본연의 맛을 잃고 조금 삐그덕대는 느낌이 들지만, 한순간에 짧고 굵은 감동의 눈물로 어느 정도 상쇄가 된다. 


아오야마의 선배이자 팀 에이스 이가라시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불만과 불안 등이 일찌감치 겉으로 표출되어 갈등이 이어졌으면 단순히 신입사원의 이야기가 아닌 회사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영화 전체적으로 더욱 입체감이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러기엔 이 영화의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데 있긴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는 아오야마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목처럼 쉽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에 긍정적 공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현실공감판타지. 영화를 보는 순간이나마 공감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테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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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표지 ⓒ현암사



지난 10월 5일 발표된 2017년 노벨문학상, 그 영광은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에게로 돌아갔다. 그 직전까지 매년 치르는 한바탕 소동을 이번에도 되풀이 했는데,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겠다. 다름 아닌 고은 시인 덕분이다. 지난 2002년부터 장장 15년 간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고 있는 그 아닌가. 이미 많은 국제적 문학상을 수상해오며 그 문명(文名)을 전 세계에 알린 그가, 아이러니하게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로 가치 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도대체 노벨문학상이 뭐길래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인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이긴 할 테지만 그밖에도 저명한 문학상이 많지 않을까 싶다. 또, 우린 우리나라 사람이 후보에 오르내리지 않은 문학상에 대해선 일절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작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뽑히는 부커 국제상에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선정되면서 국내에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올해는 물론 그 전까지 누가 그 상을 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안다.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다. 문학상은 분명 그중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옥석을 가린 측면이 있기에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유명 문학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일본에서 건너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현암사)으로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세계 유수 8대 문학상을 들여다보다


책은 세계 유수 문학상 중 8개를 뽑았다. 자타공인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뽑히는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공쿠르상을 비롯 퓰리처상, 카프카상, 예루살렘상,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이 그것들이다. 다분히 일본의 입장에서 고른 것이니 만큼, 일본의 2대 문학상인 나오키상과 아쿠타가와상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상했던 카프카상과 예루살렘상이 있다는 게 특이할 만한 점이지만 거기에 불만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밖에도 개인적으로 아는 유수 문학상들에 국제더블린문학상, 펜포크너상, 전미도서상, 노이슈타트국제문학상 등과 중국의 마오둔문학상, 일본의 일본서점대상, 한국의 이상문학상 등도 있음을 알리며, 책에서 말하는 8개 문학상 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작가, 어떤 작품, 어느 나라의 어느 작풍이 주로 수상의 영광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가장 유명한 '노벨문학상', 책은 이 상이 세계의 문학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실은 유럽에 상당히 치우친 상이라고 말하며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와 터키의 오르한 파묵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비디아다르 나이폴을 소개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먼로보다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더 어울리며 파묵보다는 야샤르 케말이 더 어울린다. 나이폴의 경우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인도계 영국인으로 '국민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쿠타가와상은 순문학 쪽, 나오키상은 대중문학 쪽에서 뽑는 걸로 알려져 있고 또 알고 있다. 거기에 영압하는 분위기인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다는 거로 저자들이 밝혀내어 해부한다. 영국의 맨부커상은 프랑스의 공쿠르상에 대항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노벨문학상을 뛰어넘는 최고의 문학상이라고 치켜세운다. 그해에 나온 영어권 작품 중 반드시 최고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이 책으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면, 맨부커상을 향한 기대와 믿음의 확실성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미국의 퓰리처상, 체코의 카프카상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들이지만 아무래도 지역적인 특색이 강하다. 아니, 강했었다. 점점 최근으로 올수록 수상 목록에서 보이는 세계화가 눈에 띈다. 오히려 노벨문학상의 지역적 특색이 상대적으로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상은 카프카상, 세르반테스상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거쳐가는 이미지가 강한데, 세계 유수 문학상 중 괜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만의 문학상 리스트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작가와 더불어) 24권 중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읽어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작품과 작가가 태반을 차지했다. 일본과 한국의 문학적 취향의 차이이기도 할 테고, 문학상 또는 전문가와 대중의 시선 차이이기도 할 테다. 상마다 3명의 전문가가 각각 한 작품씩 3 작품을 소개하는데, 역시 모두 알고 있는 건 노벨문학상이 유일했다. 작품을 접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름이라도 익히 들었던 기준으로. 


사실 여기서 소개하는 모든 상의 수상작가 작품을 적어도 하나씩은 읽어 봤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맨부커상의 윌리엄 골딩이나 살만 류수디, 공쿠르상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우엘벡, 나오키상의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나 온다 리쿠, 아쿠타가와상의 무라카미 류나 메도루마 슌, 무라타 사야카, 카프카상의 필립 로스나 옌렌커, 예루살렘상의 이언 매큐언이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정녕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작품들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이용되고, 문학상을 통해 인생이 역전되기도 하며, 간혹 문학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작가이자 작품이지만 하필이면 함께 수상을 겨루었던 작가와 작품들이 역대급일 때 수상한 사례가 있다. 이는 문학상뿐만 아니라 많은 종류의 '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 소견과 책에서 소개하는 전문가의 소견을 합쳐 책에서 소개한 작가들 중 각 문학상의 only one을 뽑자면 오르한 파묵, 메도루마 슌, 후나도 요이치, 마거릿 애트우드, 미셸 우엘벡, 줌파 라히리, 필립 로스, 이언 매큐언이다. 누가 읽어도 절대 후회하진 않을 만한 작가들이다. 


책에서 따로 정리를 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리스트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주류'인데, 다양성, 외부의 시선, 낮은 곳에서, 문학상 취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작품들이다. 대담 주체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리스트가 신선했고 의미있게 다가왔다. 모든 문학상의 모든 수상자와 수상작을 알 필요가 없는 만큼, 또 너무나도 유명한 책들을 따로 알아내려 애쓸 필요가 없는 만큼, 이 책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를 통해 색다르지만 수준높은 문학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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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메이징 메리>


오랜만에 힘뺀 마크 웹 감독이 역시 오랜만에 힘뺀 크리스 에반스를 주축으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어메이징 메리>로 돌아왔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몸에서 힘을 빼면 더 좋은 연기를 선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알듯 말듯한 조언이 있다. 비단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통용되는 조언이겠다. 이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텐데, 진짜로 힘을 잔뜩 들인 것들만 맡다가 가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것을 맡기도 한다. 분위기 전환이랄까, 쉬어가는 시간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일까. 


마크 웹 감독은 데뷔작 <500일의 썸머>로 또 하나의 현대판 클래식 주인이 되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특유의 감각으로 특별함을 끄집어 냈다. 그런 그를 할리우드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바, 그만의 감각만 쏙 빼어내 블록버스터를 만들게 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 2>다. 극히 나쁘진 않았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어메이징 메리>라는 작품으로 데뷔적의 감성과 감각을 다시 선보이려 한다. 조만간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로맨스 영화로 또 한 번 더 찾아온다고 하니, 그 전초전이라고 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히어로 영화들로 근육질을 뽐내며 미국을 지켜내느라 진땀 흘리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도 함께다. 둘이 나란히 힘 뺀 와중에, 연기파 배우 두 명과 천재 아역배우 한 명이 자리를 지킨다. 


치졸한 법정 공방, 그래도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가족끼리 벌이는 법정 공방, 참으로 치졸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메리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플로리다의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에서 배를 고치며 살아가는 프랭크(크리스 에반스 분), 그에겐 여자 아이 한 명이 있다. 다름 아닌 여조카 메리(멕케나 그레이스 분)인데, 그녀는 불과 7살 짜리 수학 천재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를 영재 학교가 아닌 평범한 학교에 보낸다. 메리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소소할 수도 심각할 수도 있는 사건을 일으킨 메리는 쫓겨날 위기 또는 영재 학교로 갈 기회를 갖지만, 프랭크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이 평범한 학교에 메리가 계속 다닐 수 있게 한다. 얼마 후 메리의 외할머니이자 프랭크의 어머니 에블린(린제이 던컨 분)이 찾아온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로, 메리 역시 수학자로 크길 바란다. 


에블린과 프랭크는 메리의 앞날을 두고 대립하고 급기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다. 그 대립 사이에는 에블린의 작은딸이자 프랭크의 여동생인 천재 수학자 다이앤의 자살이 있다. 에블린은 다이앤이 못다 이룬 수학자의 꿈을 메리가 이어 받게 하려는 것이고, 프랭크는 다이앤의 불행한 삶과 죽음이 메리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학 천재 메리를 둘러싼 할머니 에블린과 삼촌 프랭크의 치졸해 보이는 법정 공방이 기본 골자인 이 영화는, 더 많은 시간을 메리를 향한 두 혈육의 보다 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진심어린 걱정과 고뇌에 투자한다. 물론 거기에는 각자 자신의 상황과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향한다. 마크 웹의 감각이 이를 보좌한다. 


마크 웹이 선사하는 소중하고 예쁜 순간들


마크 웹이 <500일의 썸머>에서 보여주었던 순간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선보인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와 가족들 간의 치졸한 공방, 힘든 과거에 기인한 현재의 방향성 다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를 평범하게 만드는 이런 소재들이야말로 마크 웹이 감각적으로 잘 다룰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인데, 쉽게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잘 포착할 줄 안다. 


메리는 그 나이대에 걸맞게 놀며 플로리다의 자연과 벗하는 허허벌판과 해변도 좋아하지만, 수학 천재로서의 기지를 한껏 뽐내며 보스턴의 최첨단과 최신식이 주는 멋스러움과 세련미도 좋아한다. 그처럼 프랭크 또는 에블린과 함께 하는 시간은 메리에게도 소중하고 예쁘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소중하고 예쁜 순간을 선사한다. 


그러며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들은 다름 아닌 프랭크와 에블린의 생활과 생각의 연유다. 프랭크는 메리만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플로리다 구석에서 지내고 있다. 그에게도 그만을 위한 생활이 필요한 법, 마크 웹은 그 순간들에 <500일의 썸머> 감성과 감각을 살짝살짝 녹여 놓는다.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일상. 


한편, 에블린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 오직 딸 다이앤의 과거와 손녀 메리의 현재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뿐이다. 역시 천재였지만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한 아들 프랭크에겐 그래서 아무런 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보다 공에 자신의 인생을 쏟은 에블린의 대를 이은 공적 투신 열망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 


중도적 방향과 방법, 그리고 기본


메리의 인생은 누구도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리디 어린 본인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럴 땐 중도와 기본이 필요하겠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너무 어린 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어른들의 메리를 향한 진심어린 일편단심 또는 그것을 빙자한 자신의 삶을 향한 인정에의 열망에 따라 휘둘리고, 결국 법원의 판결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찾아야 할 방법은 '중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녀와 같은 천재의 사회적 공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양쪽 모두를 열망하고, 앞으로도 열망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외로운 천재의 내재적 비극, 또는 외톨이 천재의 외부적 비극 모두의 안타까움을. 영화는 천재의 삶을 공적, 사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의 앞서 선행되어야 할 삶의 기본이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뜻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 가족이라는 끈 하나로 자신의 모든 걸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뭐든지 일방적으로 몰아가서 후회가 남을 수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등 말이다. 


여러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한 가지 길로만 평생 갈 수도 있고, 수많은 길들을 오갈 수도 있으며, 길 아닌 곳을 헤치며 갈 수도 있다. 아니, 멈춰서서 관망할 뿐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 우리 어메이징한 메리에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그녀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뭐든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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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응웬 옥 뜨의 <미에우 나루터>


응웬 옥 뜨 소설집 <미에우 나루터> 표지 ⓒ아시아



벌써 10년 전입니다. 2007년, 베트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설 한 편이 한국에 상륙합니다. 2005년 출간한 소설집 <끝없는 벌판>으로 베트남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응웬 옥 뜨의 <끝없는 벌판>(아시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베트남 소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었죠.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90년대에 출간되었다가 2012년에 아시아 출판사에서 재출간), 반 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응웬 반 봉의 <하얀 아오자이> 정도의 이름 있는 베트남 소설이 눈에 띕니다. 여하튼 <끝없는 벌판>은 베트남에서처럼 국내를 응웬 옥 뜨 열풍으로 몰아넣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적어도 '베트남 소설' 하면 <끝없는 벌판>이 생각나게끔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3쇄를 찍고 절판을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찾는 분들이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14년에 사라진 <끝없는 벌판>, 1년여 후 결국 저자, 번역자와 여러 단편 소설을 추가해 개정증보판을 만들자는 합의를 보았죠. 


<끝없는 벌판> 10년 만에 나온 <미에우 나루터>


명색이 '아시아' 출판사인데 베트남 최고의 소설을 이대로 져버릴 순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출판계가 힘들다 하더라도, 아무리 소설 시장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제3세계 문학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걸 상쇄할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고 판단했죠. 그렇게 2년이 흘렀습니다.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께서는 개정증보판에 추가할 예정인 단편 소설의 면면이 예전 것들이라 크게 여의치 않아 하셨습니다. 번역가로서는 이미 한 번 번역해 내놓은 책에 역시 번역하여 계간지를 통해 소개한 작품들을 더하는 작업이기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래 전에 했던 작업들이라 거의 다시 번역하다시피 하셨죠. 오히려 처음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번역되어 있는 걸 다시 번역하다시피 하는 작업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저희 출판사로서는 솔직히 손과 눈과 귀가 잘 향하지 않게 되더군요. 이 소설을 '아시아 문학선' 시리즈에 편입시키고자 마음 먹은 와중에 2년 사이 시리즈를 계속 내왔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도 했고요. 애초에 베트남 문학은커녕 아시아 문학으로의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증거와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각자가 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바쁜 와중에도 저자와 번역자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저희 출판사의 판매보다 중요한 의미부여가 책을 나오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정확히 <끝없는 벌판> 10년 만에 응웬 옥 뜨 소설집 <미에우 나루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네와 맞물려 있는 작품들


이 소설집에는 중편소설 '끝없는 벌판'을 필두로 '꺼지지 않는 등불' '뜻대로의 삶' '까이야' '아득한 인간의 바다' '미에우 나루터'의 단편 소설 5편과 '낯선 사람'이라는 산문 한 편이 있습니다. 모두 저자가 '끝없는 벌판' 전후에 썼던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오래되었다면 오래된, 최근이라고 하면 최근인 시기이죠. 


작품들은 단연코 잘 읽히지 않습니다. 글을 잘 못 써서? 번역이 안 좋아서? 문체가 나빠서?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모두 절대 아닙니다. 모두 가히 빼어난 수준이죠. 그나마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가 맞을 수도 있겠네요. 진짜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와 정서가 수십 년 전 우리네 이야기, 정서와 너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헤쳐나왔다고 생각해 다시는 돌아가고 싶은 않은 그때 그 시절을 상기시켜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엔 너무 아픈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이 처절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베트남 사람들의 다분히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 뼈가 다 아플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우린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하층민적 동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됩니다. 


여기, 좋은 '아시아 문학'이 있습니다


아시아 문학은 그동안 엄청난 '발전'을 해왔죠. 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발전이라는 건 무엇이 기준이었을까요. 아마도 서양 문학과 서양 문학을 곧 세계 문학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기준이었겠죠. 저도 거기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선 아시아 문학은 결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아시아 문학에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명백히 아시아에 속해 있고,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 중 하나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이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세계로 나아가는 데 아시아가 큰 걸림돌이 되는 그런 시대에 살아 왔고 아마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테죠. 


그런 시대성을 타파하고 아시아를 그 자체로 한 '세계'로 격상하자는 등의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할 마음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이 지구상에는 서양 문학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아시아 주요 나라의 문학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의 문학도 그 이상가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고 우리를 설레게 할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은 겁니다. 


응웬 옥 뜨의 <미에우 나루터>는 그에 충분하다고 넘칠 만한 능력을 갖춘 책입니다. 굳이 추천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그 진가를 알아줄 분들이 소수나마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 소수를 위해 이 책을 내놓고, 이 시리즈를 이어가고, 이 출판사가 계속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지나가다 보시면 아는 체라도 한 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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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주키퍼스 와이프>


제목과 포스터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비해 엄중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 ⓒ영화사 빅



흔한 소설의 구성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또는 '기-승-전-결'을 소설을 위시한 콘텐츠들에서 그대로 발현하는 건, 이제 식상하다 못해 능력의 부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롭고 참신한 걸 원하는 이 시대에 형식의 파괴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보수(변하지 않는 것)에 가깝고 보수가 편한 인간의 성향에 부합하는 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구성과 형식이다.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최고의 화두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는 샛길로 새면 안 되는 성역이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열연한 <주키퍼스 와이프>는 동물을 향한 무한애정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비당사자이지만 가장 위험하게 관련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통적인 구성방식을 정확히 따른다. 평화-위기-위기 속 평화-파멸에 가까운 상황의 연속-모든 걸 되돌려 놓은 결말. 


홀로코스트 당시의 위대한 이야기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당시 300명의 유대인을 숨겨주고 탈출시킨 자빈스키 부분의 위대한 실화를 다룬다. ⓒ영화사 빅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운이 조금씩 감돌며 전쟁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직전이다. 바르샤바 동물원을 운영하는 안토니나 자빈스키(제시카 차스테인 분)와 얀 자빈스키(요한 헬덴베르그 분) 부부, 정녕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동물을 향한 한없는 애정과 구성원들을 향해 불어넣는 활기와 자비가 함께 한다. 


어느 날, 감지는 하고 있었지만 무서운 현실로 다가온 전쟁. 동물원은 파괴되고 동물들이 도망가거나 죽는다. 가까스로 재건하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물학자 루츠 헤크 박사(다니엘 브륄 분)가 히틀러 수석 동물학자의 신분으로 바르샤바 동물원에 온다. 동물원을 무기고로 사용하려니 희귀동물들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루츠가 장기적 '적'이 될 것이 확실한 가운데 모든 유대인들을 게토로 강제이주시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개 중에는 물론 자빈스키 부부와 마음을 나눈 친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 명만 지하실에 숨겨놓기로 하지만, 유대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들은 돼지 사육장을 차린 후 게토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돼지에게 준다는 명목 하에 게토로 들어가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300여 명의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탈출시켜준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빈스키 부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진 '쉰들러'의 위대한 이야기가 단번에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에서는 동물을 향한 사랑과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과 페미니즘이 함께 한다. 


그동안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시선


유대인 이전에 동물을 향한 무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치의 참화를 이겨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사 빅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수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주제다. 그걸 영화로 치환하면, 안타깝게도 '클리셰'가 되기 일쑤이다. 어디서 본듯한...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은 보고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는 적어도 나에게 그때그때 다른 소회를 남긴다. 끔찍함,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포 등. 분명 클리셰 '이상의' 진부함을 선사하지만, 클리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맥락에 서 있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주키퍼스 와이프>에서의 홀로코스트는 참으로 담담하다. 영화 전체의 잔잔함을 뛰어 넘는 담담함인데, 그저 유대인이 아닌 핍박받는 유대인을 향한 위로의 차원이다. 하지만 강제이주 당해 죽음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유대인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땐, 그 잔잔함과 담담함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이는 곧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과 불의를 향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핀다. 


동물이 곧 가족이고, 가족이 곧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곧 핍박받는 모든 이들의 대변자라고까지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미친다. 그 자비의 손길은 모든 것에 뻗치는데, 그 시작이 다름 아닌 동물이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보아 왔던 홀로코스트와 상당히 다른 결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동물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까지


영화는 주인공 자빈스키 부인을 매개로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영화사 빅



영화는 이와 함께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동물원이 주배경인 만큼 동물이 주된 소재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자체로 그리 중요한 소재는 아니다. 루츠 박사가 자빈스키 부부, 특히 안토니나에게 접근하는 도구 정도로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안토니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구 정도. 


심지어 동물은 페미니즘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까지 쓰인다. 희귀 물소의 암컷과 수컷을 강제로 교미를 시켜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루츠 박사의 우생학 발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당연한듯 버려지는데, 안토니나가 자신의 불안정한 안위에도 챙겨준다. 


'밖'에서 피말리는 작업을 하는 얀이, '안'에서 쉬운 일이나 하며 루츠와 놀아나기까지 하는 안토니나를 구박하는 모습에서도 페미니즘 목소리의 단 면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급한 시기에 안과 밖을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이며, 밖 못지 않게 안에서도 피말리는 작업이 계속 되거니와 안토니나가 루츠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얀도 어쩌지 못하는 루츠의 강력한 뒷배가 있지 않은가.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생각거리 또는 소재와 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화해 선보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성공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몇몇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보여줌으로 그칠 용의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에 부정적 시선을 던질 이유도 없고 빈틈도 없다. 최고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악과도 거리가 먼 한없이 보통에 가까운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그저 보고 그저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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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여배우는 오늘도>


18년차 한국 대표 여배우 문소리가 연출, 각본, 주연을 '꿰찬'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메타플레이



모든 콘텐츠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 그녀, 그들, 우리, 너도 모두 '나'이다. 그래서 창의적이고 참신하고 독특하고 전에 없던 이야기들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놀랍도록 황홀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보편타당'을 지향하는 것이다. 아니, 굳이 지향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거기에서 출발해 거기로 나아간다. 


글쓰기의 기본이라 하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는 '일기'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끝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정도가 될까? 이를 영화로 옮겨보면 어떨까. 연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부분을 영화로 만드려 할 것이다. 


올해로 18년차 '여'배우 문소리, 한국을 넘어 세계에 자랑하는 연기파 배우다. 하지만 본인의 말대로 200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20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선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다. '여배우'의 숙명일까, '엄마'로서의 한계에 직면한 것일까, '영화계'의 변화 때문일까. 그녀가 직접 연출, 각본, 주연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준 <여배우는 오늘도>를 통해 들어보자. 


여배우, 생활인, 영화인 문소리


문소리 배우를 통해 보는 여배우, 생활인, 영화인의 3막. ⓒ메타플레이



영화는 세 개의 단편을 1막, 2막, 3막으로 나눠서 보여준다. 먼저 '여배우' 문소리 편. 친구들과 북한산 등반을 하는 문소리 배우는 우연히 한 제작사 대표를 만난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려와 막걸리 한잔 하는데 또 만난 제작사 대표 일행. 그녀에게 무작위로 쏟아지는 '여배우'에 대한 생각 없는 질문들, 벅차다. 


다음으로 '생활인' 문소리 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갈 뿐인 문소리 배우. 그녀는 어느 역할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거기엔 항상 유명인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든 걸 뒤로 하고 도망가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영화인' 문소리 편. 유명하지 않은 감독의 빈소에 가게 된 문소리 배우. 단촐한 빈소를 뒤로 하고 나오려는 찰나 누군가가 부른다. 그녀와 함께 쓰레기 같은 이 감독의 옛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남자 배우다. 흑역사와 자리를 함께 하려니 짜증부터 난다. 그런 와중에 젊은 여자가 빈소를 찾더니 오열을 하는데...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


영화는 짜임새 있게 여성, 여배우, 그리고 영화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메타플레이



'문소리'를 구성하는 것들을 여러 시각으로 나눠서 바라보았다. 자신의 다른 모습을 봐달라는 호소,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바에 대한 공감에의 바람, 영화계를 향한 폭로 또는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영화인' 문소리가 아니었을까. 문소리는 영화가 가장 잘 맞고 영화를 가장 좋아할 게 분명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자로서 살아가는 영화배우 또는 영화배우가 여자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고찰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배우로서 예뻐야 하는 게 좋은지, 매력이 있어야 하는 게 좋은지. 데뷔 때부터 주연으로만 살아온 그녀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연급으로 하향조정되고 있는 게 '여배우'이기 때문이 아닌지.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그녀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명명된 삶의 모양새가 있다. 집에 오면 여배우가 아닌 여성이 된다. 엄마 노릇, 딸 노릇, 아내 노릇, 며느리 노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노릇 노릇 사이에 공인된 여배우의 역할이 겹쳐진다. 각종 노릇을 하기에도 여배우 노릇을 하기에도 벅찬데, 혼용되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하니 죽을 맛이다. 술을 끊을 도리가 없다. 


그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을 듯. 그래서 다분히 노골적인 폭로성의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렇다고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의 비현실적인 천상의 메시지를 선보이는 것도 아닌, 충분히 설득력 있으면서 조금의 자학과 자기반성과 자신으로의 스포트라이트성 메시지를 담은 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다. 


이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


영화 내외적으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들이 있다. ⓒ메타플레이



얼핏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어쨋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선보이든, 누군가가 겪었던 일을 선보이든,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을 선보이지 않았는가. 그 자체로 우리완 하등 상관없는 세계다. 하지만 문소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편을 보나 영화인이 아닌 사람이 나오고 문소리 배우를 포함한 영화인들과 엮인다. 결국 모든 영화인이 향하는 곳은 관객을 포함한 대중이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와 지대한 상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건 특별한 존재인 영화배우와 평범한 일반인이 모두 살아가는 게 비슷하지 않겠냐는 시각과 또다른 동질성의 시각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개인으로서의 삶의 정리 또는 대중과의 소통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건, 가장 공을 들인 게 분명한 마지막 3막에 있다. 지극히 영화인으로서의 시각과 의견을 담고 있는 3막은 누가 봐도 홍상수로 대표되는 양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계와 영화인을 향한 수준 있고 강도 높은 비판과 영화를 향한 진정성 어린 연민을 담고 있다. 


문소리 배우의 오랜 팬으로서 또는 문소리라는 이름을 오래도록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특별하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일단 보면, 문소리의 팬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배우는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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