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몬몬몬 몬스터>


영화 <몬몬몬 몬스터> 포스터. ⓒ더쿱



'대만영화',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2000년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필두로, 2010년대 괜찮은 청춘영화가 우후죽순 우리를 찾아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 등, 우리나라 감성과 맞닿아 있는 대만 감성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진짜' 대만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대만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들이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등. 이들은 1980~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일명 '뉴 웨이브'의 기수들이다. 이들의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경향이 지금의 대만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비단 대만청춘영화뿐만 아니라. 


최근에 우리를 찾아온 강렬한 영화 <몬몬몬 몬스터> 또한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2010년대 대만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감독이자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원작, 각본, 제작을 맡았던 이른바, '대만청춘영화'의 기수 구파도의 신작이다. 젊은 감독의 '청춘' 사랑은 여전하지만,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수단과 방법이 이채롭다. 거기엔 청춘은 물론 공포, 스릴러, 코믹까지 있다. 


괴물 같은 인간과 괴물의 한판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린슈웨이는 런하오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거기에 반 친구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동조한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도 피해자 린슈웨이가 아닌 가해자 런하오를 두둔한다. 복도에서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왕따이자 아웃 오브 안중인 여자 학생만 그를 위할 뿐이다.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지만 린슈웨이 또한 그녀를 왕따시키는 학생일 테니, 그녀의 위로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한편 노숙자들과 독거노인들만 사는 곳엔 '괴물 자매'가 산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는데,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다고 차에 치이고는 우연히 근처에 있던 런하오 일당에게 붙잡힌다. 그때 거기엔 린슈웨이도 있었다. 그들은 동생 괴물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와서는 하염없이 괴롭힌다. 린슈웨이가 찾아보니 그 괴물들은 원래 사람이었다. 돈을 노린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런하오 일당과 언니 괴물은 한판 붙어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괴물과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면서 사람이었던 괴물을 아무 이유 없이 잡아와 한없이 괴롭히는 사람. 사람으로서 사람을 응원하지만, 사람이니까 괴물을 응원해야 할 것도 같다. 


장르 폭풍이 선사하는 재미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영화 <몬몬몬 몬스터>는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로만 느낄 수 있을 쾌감 어린 재미는 물론,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은근 철학적 질문으로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닌 배가시킨다. 우선 재미 요소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이 영화의 장르 폭풍이 있다. 청춘, 코믹, 공포, 스릴러 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 흔히 거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야기가 있고 다시 가해자가 되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거나, 간혹 다른 루트로 본래의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명백한 가해자인 괴물을 상대로 가해자가 된다는 설정이 특이하다. 


괴물이 나오면서 장르는 자연스레 공포와 스릴러로 옮겨간다. 혐오스러운 몰골은 존재 자체로만으로도 공포를 유발하며,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긴장감 어린 순간들은 스릴러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다놓게 한다. 


구파도 감독의 전매특허인 청춘과 더불어 코믹이 빠질 수 없다. 특히 그가 제작, 원작, 각본을 맡은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의 황당무계한 판타지 코믹이 이 영화에도 살짝살짝 묻어난다. 그런 코믹들이 공인된 청춘 장르는 물론 공포와 스릴러와도 잘 어울리니 더할 나위 없이 잘 빠진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짜 괴물인가


영화 <몬몬몬 몬스터>의 한 장면. ⓒ더쿱



런하오 일당은 이 영화의 공공의 적이자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이다. 왠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싸그리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는 영화에서, 런하오 일당이 린슈웨이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또 동생 괴물을 납치해오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겉 아닌 속은 어떨까. 결국 런하오 일당 또한 언젠가 피해자였을 테고 언젠가 피해자가 될 운명이 아닐까. 그들도 이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는 거대한 시스템의 약자 측에 속해 더 절대적 약자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닐까. 약자들의 세계에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피눈물 나는 모습들을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접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 정신지체아와 가게를 꾸려 나가는 노인에게 물세례를 맞은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와 경찰의 눈을 피해 더 깊숙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가 괴물 자매에게 잡아먹힌다. 하지만 정작 괴물 자매는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박스 하나에 의존한 채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런하오 일당에게 잡히고, 런하오 일당은 린슈웨이를 괴롭히는 한편 함께 하는데, 린슈웨이는 다시 가게의 정신지체아를 향해 폭언을 하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누가 진짜 괴물인가'를 말하려는 이 영화, 런하오 일당이 어떤 식으로든 '괴물'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린슈웨이는? 그 사이를 오가며 자신하지 못하는 그는, 어찌 보면 정녕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리 저리 휘둘리고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인간. 하지만 그는 명백히 런하오 일당에 동조하고 함께 행동했다. 런하오 일당이 괴물이라면 그도 괴물이 아닌가? 영화가 질문하는 '누가 진짜 괴물인가'의 대상은 런하오 일당이 아닌 린슈웨이다. 그리고 우린 대부분 린슈웨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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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컬러의 말>


<컬러의 말> 표지 ⓒ윌북



유독 한 가지 계열의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검정색, 빨강색, 핑크색, 보라색, 노란색 등. 굉장히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들은 '무난한' 색은 아니다. 초록색, 파란색, 갈색, 회색보다는 튀는 색깔이랄까. 여하튼 색은 그 색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누가 회색을 좋아한다면, '회색분자'라 하며 뚜렷하지 않은 성향으로 이도 저도 아닌 성격을 가졌다고 놀리지 않겠나. 


난 어떤 한 가지 계열의 색을 좋아하진 않는다. 왠만한 모든 색에 감탄하고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 모든 색들의 '파스텔 톤'을 좋아한다. 원색의, 진하고, 탁해보이는 느낌보다 톤이 다운되고, 흐릿하고, 힘을 뺀 듯한 느낌을 좋아한다. 그런 색들은 보고 있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종종 마치 나를 다른 어딘가로 데려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한다. 


색은 정녕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 어딜 보아도, 그 어떤 풍경 또는 물건을 보아도, 필히 볼 수밖에 없는 게 '색'이다. 그걸 하나하나 보고 느끼고 표현하고 호불호를 말할 수 있는 건 가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출판편집자로서 책을 만들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표지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다름 아닌 색이다. 매일 매일 축복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 축복이 주는 색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걸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컬러의 말>은 <이코노미스트> 미술 분야 전문 편집자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75가지 컬러의 숨은 비밀을 파헤쳐 짧게 기술해 놓은 책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매력적이거나 중요하거나 불쾌한 역사가 깃든 색들인데, 간략한 역사와 성격 묘사 중간 어딘가에 속하는 이야기들이다. 책 그 어딜 펼쳐보아도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뿐이다. 


아이보리는 상아색의 다른 말이다. 상아는 바다코끼리, 일각고래, 코끼리 등 거대 포유류의 엄미를 가리키는데, 오직 특권층을 위해 자라났다고 한다. 몇천 년 동안 고급 장식 재료로 쓰인 상아, 이런 수요 탓에 1800년대만 해도 2600만 마리에 이르렀던 코끼리의 수는 20세기에는 몇십 만 마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야생 코끼리는 머지 않아 멸종할 것이며 바다코끼리 또한 멸종 위기 동물 목록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 한다. 


서양은 파란색을 폄하해왔다고 한다. 로마인들에게 파란색은 야만, 애도, 불운을 상징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파란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파란색의 위상은 12세기 들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신의 색'이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동정녀 마리아가 밝은 파란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는데, 중세에는 옷 색마저 바꿔버렸다고 한다. 


우르두어로 '흙'이라는 뜻의 카키는 군대의 상징과도 같다. 1846년 인도군 이동 수비대를 양성한 해리 럼스덴 경이 처음 고안했다고 여겨지는 카키색 군복은 '흙의 땅에서 병사들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는 혁신적 생각의 작품이다. 몇천 년 동안 군인은 상대를 겁주기 위해 눈을 사로잡는 복식을 차려 입어왔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컬러들 이야기


저자는 익숙한 컬러들뿐만 아니라 난생 처음 들어보는 컬러들 이야기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 컬러들 모두 익히 아는 하양, 노랑, 빨강, 파랑, 초록, 검정 등의 계열에 속해 있음에도 말이다. 몇몇은 아이보리처럼 터무니 없이 고급지고, 몇몇은 파란색처럼 좋지 못한 취급을 받았으며, 몇몇은 카키처럼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과 함께 했다. 


노랑 계열의 인디언 옐로는 18세기 말에 동양에서 유럽에 상륙했다. 이 컬러에는 오줌 비슷한 냄새가 났다. 1880년에 탐험가이자 식물학자인 조지프 후커 경이 나섰다. 인도 사무부의 도움까지 받아서 이 색이 동물 오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으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다. 2002년에 이 의문을 추적해보았지만 허사였다. 현재 인디언 옐로 안료는 희미한 오줌 냄새를 풍기며 큐 왕립식물원 수장고에 남아 있다. 


빨강 계열의 코치닐은 연지벌레라는 아주 작은 생물체로 만들어낸다. 1파운드의 코치닐을 만드는 데 말린 연지벌레 7만 마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부터 써왔다고 한다. 스페인이 그곳을 침공한 후로 금, 은과 더불어 스페인 제국의 확장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게 바로 코치닐이다. 지금도 화장품 및 식품 산업에서 쓰이는 코치닐은 연지벌레에서 추출한다. 


갈색 계열의 머미는 미라 가루이다. 이집트에서 삼천 년 동안 일상적인 장례 절차로 삼았던 그 미라 말이다. 이 진한 갈색의 가루는 만평통치약으로 쓰였고, 화가들의 팔레트에도 자리를 잡았다. 미라 가루는 충격적이지만 20세기까지 쓰였는데, 1810년 문을 연 런던 화구상 C. 로버트슨에서는 1960년대에 남은 머미가 소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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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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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오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 에우리피데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를 통해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와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외과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마틴의 집에 갔을 때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스티븐은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마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작은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큰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인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고. 


만약 스티븐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도 죽을 거란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를 거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스티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것인가, 죽인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종교적 운명과 우연적 딜레마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게 될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신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처지를 바꿀 능력 따위는 인간에게 없다. 특히 과학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모습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보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게 그런 것인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인가. 


영화는 운명의 굴레에 종속되어버린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교의 한 면모를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도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운명이 신의 영역이라면 딜레마는 인간의 영역이다. 운명이 선택되어지는 거라면 딜레마는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 찾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이다.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타개하려는 게 그것이다. 영화는 딜레마에 처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종교를 비꼬고 운명을 무시하는 이들도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자, 우리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신의 대리인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였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


이 진중하고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꼼. 


여러 가지 것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와중에 그에 걸맞지 않아 보여 그 비꼼의 수위가 더욱 강해지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시컬한 OST들은 영화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모든 배우들이 발성하는 높낮이 없는 낮고 무성의한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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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장강명 작가의 <팔과 다리의 가격>


<팔과 다리의 가격> 표지 ⓒ아시아



장강명 작가는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인권 단체에 후원을 하기도 하고, 북한 문제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도 했죠. 일종의 사명감이랄까요. <팔과 다리의 가격>(아시아)는 장강명의 사명감을 가장 잘 표현해낸 첫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전 나온 소설 <우리의 소원은 전쟁>(예담)이 있습니다만, 장강명이 사명감을 갖고 있는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진 않았죠. 


그는 문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전무후무할 네 개의 문학공모전 수상으로 문학계의 ‘적자’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순문학 아닌 장르문학 또는 대중문학에 천착한 ‘서자’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10년 넘게 사회부 기자로 일하며 터득한 건조한 문체에, 그때그때 들여다본 현실을 비판하고 조명하는 데 ‘장르’를 도구로 사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그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궁극적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업작가가 되면서 재미있지만 날카로운 현실 비판 소설을 내놓았고 최근 들어선 더욱 직접적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화두를 던지는 논픽션을 내놓았습니다. 그에게서 ‘조지 오웰’의 스멜(?)이 나는 건 비단 저뿐인가요? 그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길의 종류는 같은 것 같습니다. 


조지 오웰은 풍자와 투철한 비판 정신에 입각해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비판하는 글을 여럿 발표했죠. 르포와 소설과 에세이를 오갔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신문사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글이 나아가는 그 끝엔 ‘전체주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이자 궁극적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장강명 작가의 '북한 문제'


장강명에게 조지 오웰의 '전체주의'는 ‘북한 문제’일까요. 그가 그동안 내놓은 책들, 『표백』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당선, 합격, 계급』 등으로 한국의 기막힌 현실을 다방면으로 비판해왔던 건 ‘빅픽쳐’였던 것일까요. 현실 비판 작가로서의 확고한 자리매김. 비판의 방향을 북한으로 틀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니, 굉장히 영리해 보입니다. 한국 비판=북한 옹호, 북한 비판=한국 옹호의 구도를 생각하기 쉬운데, 그 구도를 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엔 북한 ‘인권’ 문제라는, 인권이 붙고 인권은 곧 ‘인간’이 됩니다. 그가 바라보는 궁극적인 대상은 인간 또는 개인이 되는 것이고, 비판의 대상은 사회 혹은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는 그걸, 즉 북한 문제에 대한 생각을 숨긴 적이 없습니다. <팔과 다리의 가격>에서 대상이 되는 ‘이 사람’ 지성호 씨의 경우, 장강명 작가가 기자 시절 때인 5년 전에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하죠. 그는 북한인권단체이자 북한이탈주민 지원단체 NAUH의 대표로, 북한의 실상과 인권 문제를 알리며 북한이탈주민 구출 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성호의 소년 시절 이야기이자 동시대 ‘고난의 행군’ 실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장강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북한 문제’의 일환이긴 하지만, 거기에 스며있을 수밖에 없는 직접적 정치·이념의 사항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니, 저자 본인이 이 책이 그런 길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히죠. 


제목에서 암시하듯 지성호 씨는 한쪽 팔과 다리가 없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 오직 생존을 위해 기차에서 석탄을 훔치고는 제때 뛰어내리지 못하고 전봇대에 부딪친 결과라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이 낳은 피해를 떠앉고 진정한 고난으로 나아간 모습이랄까요. 저자가 묘사한 그때 그곳에서의 소년 지성호의 처참한 모습은 치가 떨리고 모골이 송연합니다. 


'고난의 행군'과 소년 지성호의 이야기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고난의 행군 당시 소년 지성호와 가족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아닙니다. 그들의 여정, 특히 소년 지성호의 여정을 통해 본 ‘고난의 행군’, 나아가 고난의 행군을 통해 본 ‘북한 실상’이죠. 그래서 책의 성격이 조금 특이합니다. 인물 논픽션이자 실상을 파헤치는 르포이기도 한 것이죠. 


저자는 소년을 소개하고, 소년이 당한 사고를 소개하기 전에 ‘…… 대하여’ 3탄을 준비합니다. 마치 소년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고, 소년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야기하려는 게 부가적인 것 인양 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들은 ‘굶을 때 생기는 일’ ‘탄광마을의 삶’ 그리고 ‘미공급 사태’입니다. 보편적 실상, 북한의 실상, 고난의 행군 실상을 차례로, 그리고 점점 더 디테일하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다름 아닌 보편적 실상, 굶을 때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매우 배가 고파지는 현상에서 시작해 먹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필히 죽고 마는... 고난의 행군, 즉 미공급 사태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최소 33만 명 이상이 죽은 이유가 바로 굶어 죽은 것, 아사(餓死)였던 것이죠. 


탄광마을의 삶은 소년 지성호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한편 1990년대 북한의 생생한 실상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은 실상을 내보입니다. 특권계층에 속한 소년의 장래 희망은 노동당 간부가 아니라 군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공산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라죠. 일상 전체가 잿빛은 아니었던 바, 착하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의 추억은 보편을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미공급 사태는 수많은 이들이 눈앞에서 굶어죽는 상상초월의, 상상불가의, 상상불허의 현장입니다. 완벽한 통제, 감시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은, 통제와 감시만이 선사하는 최악의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조금의 자유라도 있었다면 절대까지는 아니라도 그 정도의 죽음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었을 테죠. 모든 걸 떠나서 너무나도 안타깝고 치가 떨리는 죽음입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기 


장강명 작가가 주목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에 대해서, 그때의 참혹함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잘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요. 저자는 말하죠.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겐 국가적, 사회적, 개인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그에 맞춰 관심을 가지는 반면, 눈앞에서 굶어 죽어간 동포들에겐 어떻게 이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느냐고요. 동포 아닌 인류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이죠. 


그 대상이 ‘북한’이기에,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내려와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 ‘북한이탈주민’이기에, 남한의 보수와 정치·이념 지향점이 맞닿을 수밖에 없기에, 관심을 가질 수 없던 이들이 많았을 테고 관심을 가졌어도 내색할 수 없던 이들이 많았을 테며 관심을 가지기 싫었던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자의 바람과는 별개로 솔직히 정치·이념적으로 생각의 물꼬가 자연스레 터지지 않기가 힘듭니다. 우리 모두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죠.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 사회의 정치·이념 지형에서 북한 문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진영 간 정쟁 소재로 소모되다가 갈피를 잃지 않나요. 


다만,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그런 길을 걷지 않는다면,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 속절없이 굶어 죽어간 인민들의 존엄만을 생각하는 데만 그 몫을 다한다면, 우리 한국 사회는 비로소 바람직한 사회로 진입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회, 우리 모두가 바라지만 너무나도 진입하기 힘든 사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팔과 다리의 가격>은 이 남북 해빙 시기에 오히려 더 많이 읽혀야 할 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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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티캐스트



영화감독 누구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만한 감독이라는 인정과 함께, 내가 그 감독을 좋아할 거라는 예상의 적중이 내포된 끄덕임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은 일상적이고 일관적이고 안정적이고 파격적이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건, 일본의 우익화를 극구 비판하는 그의 성향에 빗대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좋아하지만 많이 접하진 않았다. 아니, 그의 필모를 들여다볼 때 안 본 게 더 많으니 어디 가서 그의 영화를 잘 안다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앞으로 그의 영화를 빠짐없이 섭렵하려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감히 다다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영화들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장편영화 연출에 데뷔하면서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단연 칸영화제로,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심사위원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8년 4수 끝에 <어느 가족>으로 '당연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좀도둑 가족의 기이한 이야기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영화 <어느 가족>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는데, 가족 영화다. 그런데 어디에서나 흔히 볼 만한 그런 '어느'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원작 영화의 제목인 '만비키(좀도둑) 가족'에서 알 수 있듯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다. 일본의 수치를 전 세계 만방에 알렸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관람거부 사태에까지 이르렀지만 대대적인 흥행을 이룩한 이 영화, 들여다보자. 


아빠 오사무와 아들 쇼타는 많이 해본 듯한 익숙한 솜씨로 가게를 털고 집으로 향한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디 잡은 집에서 할머니 하츠에, 엄마 노부요, 큰딸 아키가 그들을 당연한듯 반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밖에 혼자 있는 여자 아이가 측은해보여 데리고 온다. 유리라고 하는 그애를 금방 데려다 주려고 했지만, 집에서 부모들이 싸우며 유리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소리치는 말을 듣고는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 집의 모든 이들이, 즉 가족들 모두가 유리를 반기지만 그들은 이 행동이 엄연한 유괴라는 걸 인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집이 오사무와 쇼타의 좀도둑질로만 연명되진 않는다. 오사무는 일용노동직으로 일하고, 노부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아키는 유흥업소에서 일한다. 그리고 하츠에는 전 남편으로부터 꼬박꼬박 받는 연금으로 이 집이 연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알고 보니,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진 이는 단 한 명도 없는 이 가족, 연금과 좀도둑질로 연명해야 할 운명인 이 가족. 면면과 외양은 단죄해야 마땅한 측면이 다분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은 이 좀도둑 가족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한 이 가족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한편, 가슴 졸이며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여과없이 진지하게 던진다. 물론, 나름의 확고한 답을 같고서. 그의 '가족'에 대한 물음은 2008년 <걸어도 걸어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천착해왔다. 그렇게 얻은 답은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작금의 일본은 어떤가. 살 만 한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2000년대 잃어버린 20년까지 지났지만, 2010년대가 되어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이 꺼내든 건 일명 '아베노믹스'라 불리는 경기부양책, 화폐가 무제한으로 찍히고 있다. 일어선 건 무너져가던 기업들, 무너진 건 역시 무너져가던 개인들과 개인들이 이룬 가족들. 이들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인가. 


고레에다는 그동안 가족을 말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왔다. 가족의 안팎을 함께 구성하는 것들과의 연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 대해서 말이다. <어느 가족>에 이르러 밖으로 확대하려 한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이미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가족,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본다. 들여다보면 '돈' 때문일, '진짜' 가족의 폭력으로 버려진 이들의 연대가 이 좀도둑 가족의 실체다. 


'혈연은 천륜이다'라는 가족의 전통적 정의 내지 불문률은 이 영화의 이 가족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비록 그 이유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이성적이지만 서로 간의 필요로 뭉쳤다. 불쌍해서 데려온 유리조차도 '워킹쉐어'라는 이름으로 쇼타에게 좀도둑질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고레에다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고 또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인가? 이런 기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와 사회가 하지 못하는 걸 가족이 한다는 이유로 이들의 '나쁜 짓'들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반대로 '진짜' 가족에게 버려진 이들이 모여 진짜 가족이 주지 못한 관심과 사랑과 그 무엇을 주었음에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보다 못한 진짜 가족들은 모조리 해체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버려진 이들을 지킬 이 누구인가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이 좀도둑 가족의 정의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며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버려진 이들'이다. 이 가족에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 가족 자체가 국가와 사회와 기업으로부터 버려졌다는 걸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와 사회 전체의 동시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로지 위를 향하고 있는 일본, 저 아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쳐다볼 여력도 없다. 


이 가족이 직면한 건, 그 누구한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경제적 어려움 즉 최소한의 사회보장망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막막함과 더불어 자신들을 외양으로만 판단하면서 내면과 진실에 대해선 들여다보고 알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데에서 오는 합리적 차별이다. 


우린 여기서 또 한 번 딜레마에 직면한다. 이 기이한 가족를 정의할 때 느꼈던 아득한 혼돈과 이성, 감성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딜레마를 말이다. 이들은 유리를 '유괴'한 걸, 부모가 버린 이를 주워왔다고 표현한다. 유추해보면, 유리와 달리 쇼타는 부모가 '유기'한 걸 오사무와 노부요가 주워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이 두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쇼타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유리를 이들이 데려오지 않았다면 부모의 계속된 폭력 밑에서 잘못 컸을 것이다. 적어도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 하에서만이라도, 데려오는 게 '인간적'으로 '올바른' 처사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이 가족에게 진짜 가족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 웃음과 현실적 막막함이 동시다발적으로 덥치는 이 영화 <어느 가족>, '가족'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확대해 나가는 '일본' 현실의 주제는 가히 치명적이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아마도 우리로서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 답을 내릴 때까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리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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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와 극장에서>


영화 <너와 극장에서> 포스터. ⓒ서울독립영화제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다. 아니, 사실 잘 가지 않는 편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내가 진짜 보고 싶은 영화, 내가 생각하기에 진짜 좋은 영화는 극장에 잘 걸리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곳의 원하는 시간에 말이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발품을 팔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몇 번 그렇게 했다가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그곳엔 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렘이나 벅참이 없었다. 


극장엔 설렘이나 벅참을 동반한 로망이 있기 마련이다.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를 오감만족하게 보여주는 곳이니까. 무엇보다 그곳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객들이 있다. 공기에 퍼지는 공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난 극장을 잘 가지 않는다. 


멀티플렉스는 더 이상 '극장'이 아니다. 극장은 멀티플렉스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대신 그곳엔 영화와 하등 관련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영화는, 극장은 단지 할 것 없어서 시간을 때우려고 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런 곳에 매년 치솟는 가격을 지불하고 갈 이유를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진다. 


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극장에 관한 옴니버스 장편이다. <극장 쪽으로> <극장에서 한 생각.> <우리들의 낙원> 3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각각 유지영 감독, 정가영 감독, 김태진 감독이 맡았다. 서울독립영화제가 2009년부터 격년마다 신인 감독 발굴을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개봉/배급 지원을 해왔는데, 이 영화는 그 다섯 번째이다. 


극장의 만남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극장 쪽으로'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아침엔 우유와 주스, 그리고 토스트로 떼우고 출근해서 점심시간엔 오무라이스를 먹는 선미. 그녀는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와 한국감정원 인포데스크에서 일한다. 타지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6시, 오오극장에서 만나요. 기다릴게요!'라는 쪽지가 전달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향한 오오극장, 하지만 그곳엔 설레는 일은 찾아볼 수 없고 막막하고 기가 막힌 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극장 쪽으로>는 극장을 향하는 보편적 설렘과 이와는 별개로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유지영 감독이 말하는 바가 두루 입혀져 있다. 아침 점심 저녁 변치 않고 똑같은 생활을 하는 선미가 정말 특별히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극장이다. 그곳엔 비단 영화뿐만이 아닌 '새로운 만남 '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극장에서만의 영화라는 점과 새로운 만남의 설렘이 주는 시너지랄까. 


한편 영화는 선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설상가상적으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오오극장에 처음 가보는 그녀이니 만큼, 더군다나 골목에서 담배를 피려다 아이들에게, 할머니에게 쫓겨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도망간 것이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긴 힘들고,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핸드폰도 없어진 것 같고. 그녀가 대구에 내려온 이상 대구에서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은 것처럼, 이 오오극장 옆 골목길에서도 영영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다. 


극장의 존재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극장에서 한 생각.'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토요일 아침, 영화 <극장살인사건> GV 시간에 정가영 감독과 사회를 맡은 임선미 기자가 있고 관객석엔 드문드문 관객들이 있다. 관객들의 질문과 감독의 답변이 오간다. 멜로만 찍던 감독님이 왜 스릴러를 찍게 되었냐, 앞으로 다시 멜로 찍을 생각이 있냐, 멜로를 더 좋아하냐 스릴러를 더 좋아하냐. 와중에 정가영 감독은 고백한다, 유부남을 사랑했던 적이 있다고. 어느 관객이 이 사실로 질문을 하고 물고 늘어지는데...


<극장에서 한 생각.>은 진짜 GV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현실감 넘치고 긴장감 어리다. 영화는 단순한 관객 질문과 감독 답변으로 이어지는 듯한데, 실상은 극장에 대한 솔직담백한 의견 제시다. 비관적인 의견. 영화 감독임에도 극장을 잘 가지 않고, 불법다운로드를 즐기며, 극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심 없다. 


우리나라 영화산업, 즉 극장산업이 나날로 번창하는 것과 동시다발적으로 성행하는 게 다름 아닌 불법다운로드 시장일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IPTV 또는 포털 다운로드로 영화를 편하게 즐기는 이들 또한 많아지고 있다. 독립, 예술영화들 입장에서, 즉 영화의 다양성 추구 측면에서 이는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닐까? 


극장이란 게 영화를 보는 방법의 하나로 존재해야만 하지, 영화를 보는 방법의 전부로 극장이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그런 극장조차 대기업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점은 심해지고 관객은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닌 봐야 하는 영화를 보게 된다. 언젠가는 영화계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극장의 추억


영화 <너와 극장에서> 중 '우리들의 낙원'의 한 장면. ⓒ서울독립영화제



반장 은정은 직장에게서 민철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회사를 나오지 않은 민철이 출납리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정은 수소문 끝에 민철의 학교 친구였던 정우네 부부의 도움을 받는다. 민철이 소싯쩍부터 유명한 영화광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가 있을 만한 곳이 몇몇 짐작된다는 것. 그들은 영화 잡지 기자까지 만나 '클래식 특별전' 마지막날 서울극장으로 향하는데... 


<우리들의 낙원>은 민철을 찾아, 민철의 낙원 '극장'으로, 민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우리들의 낙원>이 상영되는 서울극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여정을 그린다. 은정에겐 힘들고 의미없고 지난한 여정일지 모르지만, BJ로 활동하는 정우네 부부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콘텐츠이고 그곳 위에 서 있는 서로가 모델이며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우리는 <극장 쪽으로>에서 선미가 느끼는 '새로운 만남'에의 설렘을 함께 느끼는 것과는 다른, 온전히 '극장 영화'를 본다는 설렘의 발로를 느낄 수 있다. 더불어 그들이 향하는 곳은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대기업 소유 멀티플렉스가 아닌 전통의 서울극장이다. 그곳은 '추억'이라는 또 다른 설렘의 원동체가 생생히 살아 숨쉬는 공간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도 이곳에선 영화를 보게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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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맹>


<문맹> 표지 ⓒ한겨레출판



살아생전 스위스에 거주하며 프랑스어로 창작활동을 했던 헝가리인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 우리나라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번역된 세 권의 시리즈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이 세 권을 포함 9권의 책을 썼는데, 우리나라엔 이 세 권을 포함한 5권만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녀 자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바, 그녀가 쓴 작품들에 그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삶이. 그녀는 어쩌다가 헝가리에서 스위스에 와 살게 되었고, 왜 프랑스어로 창작활동을 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코스다운 코스를 밟아보지 못했을 것 같지 않은가. 


2004년 그녀는 자전적 소설 <문맹>을 내놓았다. 2000년대 들어 처음 내놓은 작품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택한 것이다. 70대에 들어선 그녀가 온전한 작품 속에 자신을 투영하는 게 아닌, 자신이 자신임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이 작품은 아주 짧고 단순명료하지만, 그녀의 여타 작품들처럼 처절하다. 그래서 인상 깊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과 언어


그녀는 1935년에 태어나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인 네 살 때부터 인쇄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시작이다. 읽기는 말하기로 옮겨가고 말하기는 쓰기로 옮겨갔다. 그녀는 그녀가 지은 이야기를 말하는 걸 즐겼다. 열네 살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절대 침묵을 해야 하는 학습실로 간다. 그녀는 모든 것을 적고 계속 읽는다. 문장들이 태어난다. 


누구나와 같이 그녀에게도 당연히 태초에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홉 살 때 인구의 4분의 1이 독일어를 쓰는 국경 도시로 이사를 했다. 1년 후 러시아 군인들이 헝가리를 점령했을 때 러시아어가 의무화되었다. 스물한 살 때는 혁명의 여파를 피해 정치적으로 연류된 남편과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이주했다. 우연히 정착하게 된 그곳 뇌샤텔은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이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말한 지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실수를 하고 사전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프랑스어 또한 독일어와 러시아어처럼 적의 언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읽고, 말하고, 쓰는' 행위가 가장 중요하기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뇌샤텔에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 프랑스어로 말을 하지만 읽지는 못한다.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던 그녀는 다시 문맹이 된 것이다. 그녀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시작해 2년 후 훌륭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할 것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프랑스어로 글을 써 작가가 되게 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택하지 않았다. 운명, 우연, 상황에 의해 그녀에게 주어진 언어이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쓰는 건 영원한 도전이다. 


생존과 생존 이후 설계를 위한 문맹 탈출


아주 짧게 간추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인생을 훑어볼 수 있는 책, <문맹>이다.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이라기보다 부제처럼 자전적 이야기에 가깝다. 그녀 인생 중심엔 '언어'가 있다. '언어 자서전'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헝가리어에서 독일어로 러시아어로 프랑스어로 의무화된 언어가 바뀌는 과정이 곧 인생이다. 


언어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나의 실체를 구성하는 게 단순히 몸과 마음, 즉 육체와 정신이라고 한다면,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있는 게 '언어' 아니겠는가.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글, 내가 보는 모든 것이 언어, 그것도 모국어에 기반한다. 다른 언어로 그러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고 상상도 안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처럼 언어가 특별한 사람일수록, 다른 무엇보다 언어와 가깝고 언어가 중요한 사람일수록, 다른 언어의 의무화는 치명적이다. 그녀에게 '문맹'이라는 건, '문맹'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건, 도전 너머 전쟁이다. 생존을 위해, 생존 이후 설계를 위해,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는 때문인지, 그녀의 글엔 깊이가 없다. 단순하고 단편적이고 단조롭다. 하지만 그건 문체(文體)다. 문신(文神)에서는 깊이가 전해진다. 이면을 살피고 여백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곳에 어린 그녀의 전쟁 같은 언어와의 사투를 느껴야 한다. 느껴지지 않으면 당장 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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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구병모 소설가의 <네 이웃의 식탁>


소설 <네 이웃의 식탁> 표지. ⓒ민음사



나라에서 젊은 부부 대상으로 마련한 꿈미래실험공동주택, 편의 시설 하나 없는 고즈넉한 산속에 지은 열두 세대 규모의 작은 아파트로 깨끗하고 구조도 좋고 평수도 적당했다. 까다로운 입주 조건에 20여 종의 서류 항목을 갖추어야 했고, 경쟁률은 20:1에 달했다. 서류 항목엔 자필 서약서도 있었는데, 이곳에 들어갈 유자녀 부부는 자녀를 최소 셋 이상 갖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효내가 보기에 공동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강조되는 느낌이 큰 반면 실험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로 아이까지 돌보느라 너무 바빴다. 한편 요진은 홀로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데, 약사인 육촌 언니가 차린 약국에서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 교원은 집에서 전업주부로 '일'하며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단희는 천성으로 장착된 활발함도 그렇고 이것저것 섬세하게 살피거나 돌보기를 즐기는 부녀회장 스타일이었다. 


이들 네 이웃, 정확하게는 네 아내의 크고 작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부부, 아이, 이웃, 공동체, 자연... 단희의 남편 재강이 접촉 사고로 차를 센터에 맡기고 당분간 요진과 함께 카풀로 출근하면서 일어나는 일, 겉에서 보는 일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차이가 너무나도 큰 효내의 경우, 제 몫으로 주어지고 대부분 스스로 선택했던 모든 일과 그것의 결과들에 환멸을 느끼는 교원의 이야기가 뒤따른다. 


공동체의 허위


소설 <네 이웃의 식탁>(민음사)은 데뷔 10년 차에 불과함에도 10권의 책을 쏟아낸 다작 소설가이자 판타지적인 이야기에 시니컬한 문체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 구병모의 신작이다. 소설은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를 폭로한다. 이 지극한 현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하게 만드는 동시에 서늘하게 만들 것이다. 


언젠가부터 공동체를 향한 로망이 생긴 것 같다. 행복지수가 한 없이 낮아진 데 대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지역주의 팽배가 급부상하고 그 대안으로 공동체가 떠오른 이유 때문이리라. 더욱이 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30%에 육박한 상황에서 공동체를 향한 선망은 더해갔다. 시민, 지역, 마을, 교육 등의 수많은 종류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잘 운영되고 있다. 


세상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들에 반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공동체라는 개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예전부터 자연스레 존재해왔지만 이젠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유로 시작되어 선순환을 계속하고 있지만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파고드는 건 바로 그 지점, 공동체의 단점 또는 약점과 개인주의의 장점 또는 강점이 만나는 지점이다. 


공동체에는 서로 간의 의무와 유대가 필수이고 공동으로 공유해야 할 이해관계 또한 필수이다. 그렇지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성향과 성격과 환경이 다르기에 조율이 힘들 때가 다분하다. 그중 많은 것들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 즉, 의무와 유대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건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재활용품 수거 차량이 왔을 때 한 군데 안 흩어지게 잘 모아서 담아 놓는 '공동의 일'을 함에 있어 누구는 하고 누구는 하지 않는다. 그것도 몇 번이나. 이럴 때 한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결코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다. 


여성 삶의 본위


소설은 나아가 여성 삶의 실제를 낱낱이 파고든다. 소설가 구병모 자신이 두 아이의 엄마인데,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은 유자녀 부부만 입주할 수 있다. 고로 이곳에 들어와 있는 모든 부부에게는 자녀가 있고, '당연히' 자녀는 엄마의 손에 키워진다. 그런데 이곳의 네 아내 중 두 아내는 경제적 일도 하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엄연한 '일'이다. 


여성의 삶은 곧 육아이다. 소설은 거기에 다름 아닌 공동체를 붙인다.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네 부부 모두 서로의 아이들 부모가 되어 육아 전쟁을 치른다. 이 얼마나 환희로운 생각이고 광경인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실체적이거니와 많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공동체의 의미를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이 규현해내는 육아 공동체의 실체는 마냥 환희롭지 않다. 99%를 만족시켰다고 해도 1%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피해를 준다면 그건 과연 옳은 걸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훨씬 다수가 만족하였으니 괜찮을 걸까? <네 이웃의 식탁>이 주목하는 건 공동체에 속하게 된 개개인의 사정이다. 그건 개인주의도 이기주의도 아닌, 살다 보니 처하게 된 사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육아라는 건 아마도 인간이 행하는 일 중 가장 고되고 어려운 일일 터, 더군다나 인간 한 사람이 지니는 성향이 모두 다른 만큼 개개인에 맞는 방법이 모두 다를 터, 공동 육아 또는 육아 공동체는 그 사랑과 책임의 강도가 훨씬 더 강하지 못할 시 가장 심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공동체의 허위와 여성 삶의 본위는 이렇게 만나 뒤엉킨다. 


아이를 가진 부부 간의 공동체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여성이 주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그곳에서 여성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질 수 있는 법, 피폐의 여파는 공동체의 균열로 이어지고 그 원인을 다시 여성에게 돌리는 순환. 공동체를 만능이라고 우러를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부터 그 구조적인 문제와 스스로를 옭아매게 되는 순환을 해결해야 한다. 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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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 루시!>


영화 <오 루시!> 포스터. ⓒ엣나인필름



일본 도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중년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 분)는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 분)의 부탁으로 영어 회화 교실을 다니게 된다. 일단 무료체험을 하겠다고 나선 길,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학원 내부의 한 교실로 안내된 세츠코는 그곳에서 선생님 존(조쉬 하트넷 분)을 만난다. 


그는 미국식 영어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별 거 없는 영어와 함께 과장된 몸짓과 포옹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녀는 루시(lucy)라는 영어이름으로 불린다. 금발머리 가발과 함께. 가발을 돌려주러 갔을 때 다케시(야쿠쇼 코지 분) 즉, 톰을 만난다. 존에게 영어를 배우러 온 그였다. 루시는 그때 존과 깊은 포옹을 하고 남다른 기분을 느낀다. 사랑?


정식으로 등록하러 갔을 때 존은 떠나고 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세츠코가 대신 수업을 듣는 대신 내준 60만 엔을 들고서. 그 사실을 안 미카의 엄마이자 세츠코의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 분)는 세츠코에게 60만 엔을 돌려주고, 이를 다시 세츠코가 아야코에게 돌려주려 하면서 미카가 있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가겠다고 한다. 아야코가 동행한다. 이 동상이몽 여정의 끝은?


신인 감독과 베테랑 배우들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오 루시!>는 일본의 젊은 신인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가 자신이 만든 단편 <오 루시!>를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단편의 장편영화화에 일본 최고 베테랑 배우들과 할리우드 스타가 합류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배우 반열에 오른 테라지마 시노부와 야쿠쇼 코지, 일본 내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나미 카호, 말이 필요 없는 조쉬 하트넷까지. 


초짜 감독의 그냥저냥 멜로 로맨스 영화에 이런 배우들이 모여들리 없다. 이 영화에는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섬뜩한 지하철 투신 자살 사건으로 시작하는 영화, 가족 간에 회사동료 간에 친구 간에 일절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보이는 세츠코, 고작 포옹 한 번에 미국까지 날아가는 세츠코, 언니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세츠코. 


세츠코의 기이한 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퍼즐 맞추듯 해보면 뭔가가 보일 듯하다. 영화 시작에서 보이는 투신 자살 사건이 비단 그 한 번으로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일면을 보이는 것 같고, 세츠코의 면면은 다름 아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흔하다면 흔한 병리자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심지어 이 영화가 겉으로 내보이는 멜로 로맨스 즉, 세츠코의 사랑조차 이 병리의 일환 같다. 결정적으로, 세츠코라는 자아와 루시라는 자아의 분리. 


개인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1인 가구의 폐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인 가구는 더 이상 특별한 현상 내지 양상이 아니다. 이미 전 인구에서 30%에 육박했고 머지 않아 1/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 모습은 '문제'인가. 문제라고 하면 문제다. 의료발달로 수명은 점점 늘 것인데 반해 결혼과 출산은 점점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를 문제라고 하기 전에 다른 의미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개개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도 있다. <오 루시!>는 사회적 아닌 개인적으로 1인 가구의 폐해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혼삶을 사는 이가 모두 세츠코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들 대다수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연대하며 살아간다. 삶의 형식이 둘 이상이 아닌 혼자일 뿐이다. 와중에 혼삶의 객체적 문제가 드러난다. 1인 가구가 지닌 병리적 모습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 '사회적'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 최악의 경우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이. 


세츠코의 경우, 가장 크게 다가오거니와 원초적인 사건이자 병리적 모습의 원인은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언니 아야코와 미카의 존재다. 그녀는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지금의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며 자연스레 이 사회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는 비록 이유도 현상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관계들의 집합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세츠코가 존을 사랑하게 된 또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존의 다가옴이었다. 존이 다가와서 포옹을 했고 세츠코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사랑'이라 자신있게 말하리라. 그런데 세츠코라는 사람이 사람과의 소통이 불능한 상태이기에, 관계에 있어 최상에 위치한 '사랑'을 한순간에 느끼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사랑이 아닌 병리적 모습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존은 세츠코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한 아야코의 딸과 함께 도망친 사람이 아닌가. 세츠코에게 한처럼 남아 있는 그 일에 대비해볼 때, 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갈망과 집착과는 완연히 다른 복수의 일면일 수 있다. 세츠코에게 남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 형상이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의 현대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1인 가구가 된 게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1인 가구의 혼삶을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세츠코의 이야기는, 그 면면이 혼삶의 병리적 모습을 띄고 있기에 복합적으로 보여지고 다가온다. 뭔가 알 만한 그림이 그려질 듯한 퍼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외롭고 초조하고 기이하고 단순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반면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단순명쾌하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충분한 효과를 보인다. 진심 어린 포옹. 내 몸의 절반과 상대방 몸의 절반을 오롯이 맞대는 행위. 거기엔 사람 대 사람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이 주고 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이겨낼 수 없는 병리를 초월한 관계 형성이다. 분리되어버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아도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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