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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살인자, 그 섬뜩한 마지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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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영하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


25년 전쯤 살인을 그만두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일흔의 늙은 살인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병수로 프로페셔널 살인자였다. 살인 충동이나 변태 성욕 따위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쾌감을 위해 살인을 해왔다. 그리고 뒤처리도 아주 깔끔해서 열여섯에 처음 살인을 한 후 수십 명을 죽였지만, 경찰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런데 자꾸 넘어지고 실수하고 잊어먹는다. 딸 은희의 권유로 병원에 가 보았다. 검사를 하니 알츠하이머라고 한다. 치매란 말이다. 그렇게 점점 기억이 사라지고 혼란이 찾아온다. 그 혼란 속에서 동네에 여대생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제발 우리 은희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살인자의 기억법> ⓒ 문학동네

알고 보면, 섬뜩하기 그지없는...

소설가 김영하의 신작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늙은 살인자가 벌이는 사투를 그린다. 1인칭이기 때문에 사투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극 중에서 다른 인물들이 보기엔, 치매 걸린 노인이 정신 못 차리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다. 

이 소설이 아주 잘 읽히고 또 비록 싸늘하지만 웃음 짓게 하는 농담이 곳곳에 있어 재밌게 생각됨에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1인칭이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기억을 잃고 혼란에 빠진 노인의 심정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한테만 찾아오는 끝없는 고독의 심연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한편, 김병수는 딸 은희 주변을 맴도는 한 사람 박태주를 알게 된다. 김병수의 눈엔 그가 여지없는 연쇄살인범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마 후 은희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박태주를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살인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김병수는 그가 이유 없이 싫었다. 낯이 익은데 말이다. 

이제 김병수는 점점 더 기억을 잃어간다. 마당에 알짱거리는 똥개가 옆집 개인지 우리 집개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 있는지 조차 모를 때가 많다.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어떤 일을 하든지 기록을 하는 습관을 들여놨는데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살인자로 살다보니 안 그래도 작아진 나의 세계가, 점점 더 작아지는 걸 느낀다. 

반면, 방금 기억과 최근 기억은 홀라당 까먹어도 옛날 기억들은 더욱 생생해진다. 특히 젊은 시절을 수놓았던 살인의 추억. 미래는 아예 사라지고, 현재는 뒤죽박죽, 과거는 눈앞에서 벌어진 듯 생생하다. 살인을 해서 다행인건가? 이렇게 생생하고 강렬한 과거의 기억을 눈앞으로 불러와주니? 살인자가 기억하는 건 살인밖에 없는가 보다. 그게 살인자의 기억법인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살인자?

이 소설은 장편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어색할 정도로, 굉장히 짧은 분량을 자랑한다. 뒷부분의 해설을 제외하고 나면 140쪽 안팎에 불과하다. 또한 기록들 사이의 공간을 제외하면 많아야 120쪽 안팎일 것이다. 분량만 치자면, 잘 쳐줘야 경장편이고 중편 내지 단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한 것이, 이 살인자의 뒤죽박죽 띄엄띄엄 기억의 파편들과 그가 읽은 책의 잠언들이 아주 짜임새 있게 서사적으로 들어맞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분량으로는 절대 장편 소설이 될 수 없음에도, 그 서사적 짜임새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주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가 살인자이니까 당연히 살인이 제일 많이 나올 테고, 알츠하이머 환자이니까 기억도 많이 나올 테다. 의외로 농담이란 단어가 눈에 많이 띈다.(김병수가 직접 말하고 생각하는 농담 즉, 독자로 하여금 웃게 만드는 농담과 김병수가 어느 때에 맞이하는 농담 같은 상황) 초반에는 살인에 관련한 농담이 주를 이루고, 후반으로 갈수록 기억에 관련한 농담이 주를 이룬다.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는 비단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농담 중에 김병수가 직접 말하고 생각하는 농담, 즉 독자로 하여금 웃게 만드는 농담은 사실 유머에 가깝다. 극 중에서 그는 분명 유머 감각이 출중하다. 그리고 이를 인지하는 것 자체가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닌가 싶다. 살인자에게 유머 감각이 있다니?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노인에게 유머 감각이 있다니? 

섬뜩함과 유머의 앙상블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섬뜩하다. 겉으로 보면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살인자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해하려 하는 다른 살인자를 죽이려 한다는, 살인의 관점을 적용한 아주 간단한 내용이다. 그것만 본다면 이 소설은 단언컨대 그냥 재미있고 잘 읽히는 소설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기억의 섬뜩함이 존재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 기억이 없어지고 세계가 없어지고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해설에서는 무너져 내린다고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엔 소멸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김병수는 그 사실을 인지한 후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 극 중에서도 김병수가 말하지 않는가.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본문 속에서)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거기에는 분명 김병수의 성격이 작용하고 있다. 사실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는 이 늙은 노인의 독백. 그 시크하고 냉랭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포커페이스가 웃길 때가 있듯이. 

나이가 먹어갈수록 무뎌지는 그의 악(惡)이, 과거의 전유물이 되고 지금은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섬뜩함을 잃어버린 그의 시크한 말투와 생각들은 반대급수의 재미를 양산한다. 이빨 빠진 호랑이를 보고 조소를 보내는 것과도 조금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 김병수 개인이 갖고 있었던 섬뜩함을,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표출했던 섬뜩함을 이제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그만이 철저히 느끼게끔. 1인칭임에도 독자는 그가 느끼는 철저한 고독감과 두려움, 허탈감을 느낄 수 없다. 다만 섬뜩함을 느낄 뿐이다. 처음 읽을 때는 유머를, 두 번째 읽을 때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떤 느낌이 찾아갈 지 직접 읽어보시길...


살인자의 기억법 - 10점
김영하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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