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감정 시대>


<감정 시대> 표지 ⓒ윌북



요즘 어떠냐고 묻는 말에 '괜찮아' 정도의 긍정적 답변을 하기도 듣기도 매우 어렵다. 난 대체로 '불안하다'라고 말하는 편인데, 가족끼리 종종 진지한 자리를 가지는 자리에서도 그런 대답을 자주한다. 문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데 있다. 그저 불안전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할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가 왜 불안할까. 비단 나뿐만 그런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 걸까. '불안'말고 다른 느낌이나 감정은? 역시 부정적일까, 혹은 긍정적일까. EBS 다큐프라임에서 '감정시대'라는 주제로 지금 한국 사회를 떠도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보았고, <감정 시대>(윌북)라는 책으로도 나왔다. 대략 6개로 압축할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부정적인 감정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갑에게 받은 '모멸감', 열심히 살아봐야 소용없다는 '좌절감', 각자도생이 살 길이 돼버린 '고립감', 명백한 인재로 소중한 존재를 잃은 '상실감',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죄책감'까지,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이런 감정들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고 단정한다.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


6가지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대략 살펴보자. 불안감의 원천은 실직과 고용 불안이라 한다. 개인이 직업이 없거나 불안정한 것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모멸감은 주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제 모든 이들이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이 되었다. 우리 모두 어딘가에선 갑으로 모욕을 주며, 어딘가에선 을로 경멸을 받는다. 


가정과 사회에서 기대하는 역할의 무게에 짓눌리는 중년 가장에게서 주로 보이는 고립감 또한 더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도태되고 소외되는 노인 또한 고통을 겪는다. 모든 자유가 통용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모든 실패는 오로지 당사자의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 이들이 결국 맞닥뜨리는 건 '뭘 해도 안 될 거야' 하는 좌절감이다. 


책에서 말하는 상실감과 죄책감은 다른 4가지 감정과 결이 다르다. 한국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이 된 '세월호 참사'에 따른 감정으로, 우린 영원한 상실감과 그에 따른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만 하겠는가. 그 참사에서 친구를 잃고 살아돌아온 이들과 유가족들 말이다. 


(부정적) 감정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마음, 그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긍정 하나 없이 부정적일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수록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은 일면 무책임한 듯하면서도, 일면 무책임을 넘어선 차원의 책임 있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상실감과 죄책감


책에서 말하는 불안과 모멸과 좌절과 고립의 감정, 모두 충분히 공감하고 백배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그 감정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매순간 생각하고 있을 감정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상실과 죄책의 감정이 주는 거대함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분이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더욱 이 사회의 일원으로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상실감' 자체는 인생에서 흔히 직면하는 감정이다. 다들 받아들이고 살아가며 비록 그 흔적이 크게 남는다 하여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돌아온 아이들의 상실감은 차원이 다른 그리움과 아픔과 소외와 책임이 뒤따른다. 그들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굳이 찾는다면, 그들은 친구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 우리 사회는 희생자를 기억하고 생존자를 이해하는 것.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상실감보다 더 치명적인 건 '죄책감'이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인 '생존자 죄책감' 말이다. '내가 끝까지 친구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친구가 살았을지 모른다, 내게 구명조끼를 양보한 그 친구 대신 내가 살았다.' 이 비극적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가 겪는 '방관자 죄책감'도 존재한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이 참사를 두고 '지겹다', '시체 장사 한다'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 전체가 자책과 죄책에 빠져 있는 건 물론 좋지 않지만, 그 출구를 '기억'이 아닌 '아픔의 전가'로 선택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어찌 그럴수가 있겠는가. 


이런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부정적 감정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가 결코 비인간적인 사회로만 가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부정적인 사태에 대면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 사태를 직면해 '그랬어야 했어' '잘 되었네' 따위의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말이 되겠는가. 감정이 무엇이든 들여다보고 내보이려 하자. 그리고 공유하고 공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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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고은 깊은 곳>


<고은 깊은 곳> 표지 ⓒ아시아



편집자 일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시는지요.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께 읽히는 걸 볼 때, 더 자세히는 길거리에서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가 읽으며 지나가는 걸 볼 때. 저한테는 아직 이 두 상황이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러면, 편집자로서 가장 설레는 건 무엇일까요. 위대한 작가의 원고를 책이 나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 저는 이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한대요. 그동안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인도의 대문호 '쿠쉬완트 싱'의 <델리>, 중국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각국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 모음집 <물결의 비밀>, 한국 노동문학의 대부 '방현석'의 <세월>, 그리고 중앙 아시아 고대 신화까지. 이 정도만 해도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저자군이지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할 수 있는 너무 유명한 '고은'


이번에는, 이 저자군의 품격을 단번에 올려줄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의 작품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자타공인 '국민시인' 고은 시인과 김형수 작가의 대담집, <고은 깊은 곳>입니다. 끝없는 설렘과 부담감을 품은 채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선생님들의 빠르고 정확한 피드백 덕분에 작업을 일단락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 유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린 그 대상에 무지한 경향이 있지요. 고은 시인도 그런 경향을 피해갈 순 없었을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삶에 있지만 우린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알고 있을 뿐이죠. 이 책에는 김형수 작가에 의한 그런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결코 길지 않은 책인데요. 충분히 고은 시인의 '깊은 곳'까지 다다랐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고은 시인을 잘 알고 또 누구보다 사려깊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할 줄 아는 김형수 작가가 함께 대담을 진행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두 어른의 대담에서 정서적으로 실용적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김형수 작가와는 지난 2014년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와 2015년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의 '작가 수업' 시리즈로 작업을 했었습니다. 3탄을 준비 중인데, 공교롭게도 위 책들을 낸 후 더 바빠지셔서 늦어지고 있네요.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건 물론 기대도 됩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믿음 덕분이죠. 


고은 시인의 삶과 시, 그 깊은 곳


사실 이 두 분의 대담이 책으로 엮어 나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자그마치 5년 전에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한길사)이 나와 많은 이들의 눈을 밝혀주었었죠.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만이 가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두 세기의 달빛>이 1930~50년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반면, 또 같은 출판사의 <바람의 사상>이 고은 시인의 일기를 중심으로 1970년대를 다루고 있는 반면, <고은 깊은 곳>은 고은 시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두루 다루며 '고은' 그 자체의 깊은 곳을 다루고 있지요. 


이를, 김형수 작가는 고은 시인과 대담하는 내내 그 파동이 울려나오는 곳에 닿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죠. 그곳이 다름 아닌 '고은 깊은 곳'이며 '고은의 시를 끝없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958년에 데뷔해 내년이면 시(詩)력 60년이 되는 '시인 고은'의 삶과 시, 이 책 하나면 충분할 것입니다.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에 대해, 이 또한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모국어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문학, 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을 조망하죠. 고은의 시적 근원에 자리한 '모국어'라는 존재의식의 장벽을 넘는 행위입니다. 고로, 무엇보다 모국어 한글의 축복이죠. 


<고은 깊은 곳>을 읽는 것은 곧 고은의 시를 읽는 것


고은 시인을 지칭하는 말은 비단 '국민시인'뿐만 아닙니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오로지 시와 함께 하는 그의 삶은 네 번에 걸친 치열한 자살 시도와 10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거쳐,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현실에 대한 시야를 습득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앞장서 현실문제에 대응하며 자연스럽게 따라온 상상을 초월하는 심신의 고달픔을 뒤로 하고 '살아남아' 시를 쓰는 고은 시인,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감히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독자분께서 이 영광스러운 작업의 수혜를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시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소설을 압도적으로 즐기는 편이죠. 그런 가운데 '시인 고은'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또 좋았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로 시에 입문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에게서 시를 빼앗으면 나는 뱀 허물이고 거미줄에 걸린 죽은 풍뎅이 껍질'이라고 말하는 고은 시인의 '삶'은 곧 '시'일 것입니다. 그의 삶을 읽는, 즉 <고은 깊은 곳>을 읽는 누군가는 곧 그의 시를 읽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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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악의 해부>


<악의 해부> 표지 ⓒ에이도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생각나는 건 단연 '홀로코스트'다. 통칭으론 대학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있어 왔지만, 이토록 어마어마한 전쟁과 대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건 일찍이 없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각은, '왜'와 '어떻게'로 쏠린다. 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자행했는가.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인사들을 향한 관심도 있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아이히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비롯 나치는 그렇게 '악마'가 된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게 한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악마여야 한다. 여기서 '왜'는 충분히 설명되어 진다. 그러면 '어떻게'가 남고, 잔인함을 넘은 악마적 학살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린 그 방법들을 전해듣고 그저 치를 떨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누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진다. 위에 명명된 이름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개인이라기보다 악마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나치에 속한 수많은 조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나치를, 제2차 세계대전을,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최선일까?


나치 전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악'


정신의학자가 치밀하게 돌아본 '악마'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악의 해부>(에이도스)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나치 전범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수용한 룩셈부르크 아쉬칸 포로수용소에서 시작된다. 앤드러스 대령 교도소장과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켈리, 그리고 나치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 등장한다. 


오래지 않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해 무대가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진다. 와중에 독일노동전선 수장 로베르트 레이와 반유대주의자 신문 《데어 슈튀르머》 편집자 율리우스 스트라이허가 소개된다. 그리고 대망의 나치 부총통 루돌프 헤스. 또 한 명은 더글러스 켈리와 치열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 대결을 펼칠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다. 켈리와 길버트에 의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이 시작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의 길 또한 열린다. 이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책의 한 축을 이루며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들이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나치 전범 네 명에 대한 케리와 길버트의 심리 분석. 이 악마들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먼저 로베르트 레이,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전쟁 중에 행한 활동을 뉘우치기도 한 복잡다다한 인물이었다. 전범 중 유일하게 뇌를 부검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뇌에 손상이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그의 악을 손상된 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돌프 헤스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병명으로 하면 '편집성 조현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 당시 기억상실증도 겪었다고 하지만 꾀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정신병은 인정되어 사형당하지 않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의 '악'은 말그대로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반면 헤르만 괴링은 '진정한' 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연합국 측에 모욕을 안기고 순교하려는 의도였을 정도다. 그는 사과도 변명도 일절 하지 않았고, 재판에서 외려 연합국 측과 치열하게 공방해 일말의 승리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호감형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율리우스 스트라이허는 어땠을까.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쁜 남자'라 칭하는 그는, 여기서 소개한 여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게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완전하게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쁜 거였다. 같은 편조차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치 전범은 악의 화신인가,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는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더글라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거니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야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은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 주장의 핵심이다. 


반면 구스타브 길버트는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 악마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그들의 악은 특수한 악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치 전범들이 악이라는 명제를 모든 주장의 전제에 놓았다. 사실 길버트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인 대세였다.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 전범들을 일반인과 같은 평범의 범주 안에 놓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길버트가 가난한 유대인 망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객관적 대신 주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당대에는 비주류였지만 추후 심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켈리의 주장에 가 닿아 있다.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악에 대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해석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연구 네 건이 이 관점의 함의들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다. 


먼저 한나 아렌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더 없이 유명한 그녀의 '악의 평범성'은 켈리의 주장을 정통으로 잇는 연구다. 그녀는 이에 '악은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곰팡이 같은 것. 그것에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다'고 말했다.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타인이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보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행위의 책임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 달리와 빕 라타네의 '방관자 무관심' 실험도 켈리를 잇는다. 1964년 3월 뉴욕 시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 세계를 뒤흔든다. 38명이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어느 목격자가 다른 목격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강행한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낸다. 사회적 맥락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저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의 뒤를 이은 주장은? 켈리의 주장 전통에는 빈 서판으로 세상에 태어나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빈 서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기본값이 훨씬 더 어두운 쪽에 치우쳐 있다면? 사이코패스, 즉 나쁜 뇌, 병든 뇌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아니 정확히는 나치 전범의 심리를 분석한 켈리와 길버트가 남긴 것들로는 진정한 '악'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저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생각 끝에 켈리와 길버트 모두가 옮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켈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약간씩의 어둠을 찾아냈고, 길버트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어둠을 찾아냈다는 것. 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섬뜩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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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꿀벌과 천둥> 표지 ⓒ현대문학



중2 음악 시간, 선생님께서 종종 수업 대신으로 영화 한 편을 보여주셨다. 족히 20년은 흐른 지금까지도 개인적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아마데우스>를 그때 처음 보았고, 여전히 뒷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절정의 영화 <파리넬리>도 그 시간을 통해 처음 보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다뤘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클래식은 나의 조그마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유독 그때 그 음악 시간은 클래식 음악 숙제가 많았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대표곡들을 듣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직접 오페라 콘서트 실황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등.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였을까.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건 리코더나 멜로디언 정도였고, 나머진 사실 글쓰기 과제였던 거다. 


음악 감상의 느낌을 글로 쓰는 건 고역이었다. 머리가 훨씬 큰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예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감정이 팔팔한 그 나이대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묘사가 태반을 차지한다는 걸 알고 일본 만화에서 참조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한창 <미스터 초밥왕>을 열독했었는데, 거기엔 무수히 다양한 묘사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신의 물방울>이 이어받았으려나. 하여튼 일본 음식 만화가 답이었다.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절정


일본이 자랑하는 온다 리쿠 작가의 신작 <꿀벌과 천둥>(현대문학)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굴지의 피아니스트 콩쿠르 오디션의 전초전 격인 일본의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일명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정점이다. 뭐랄까, 오그라들다 못해 민망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진지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랄까.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소설은 일본 소년 성장 만화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았다 못해 낳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슬램덩크>를 필두로 하는 천재와 둔재의 성장과 경쟁의 한 시절, <신의 물방울>을 필두로 하는 민망하지만 헤어나오지 못하는 묘사의 절정이 모두 이 한 소설에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 여지없이 모두 천재적이고 구구절절 사연이 있고 확고한 캐릭터성이 있다.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떠도는 10대 중반의 최연소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이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의 추천서와 절대적인 자유로움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 다른 세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경쟁을 벌인다. 


천재 중 천재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무대를 떠났다고 부활의 날개짓을 하는 소녀 에이덴 아야, 완벽 그 자체로 모두를 압도하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 소년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그리고 어렸을 때 음악을 전공했었지만 악기점 점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20대 후반의 최고령 다카시마 아카시까지.


피아노 연주를 글로 표현해내는, 이 소설의 백미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작품임에도 헤어나오기 힘든 흡입성을 보이는 건 이미 일본 현지에서 입증되었다. 제156회 나오키상과 제14회 서점대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하는 영예를 받은 것. 둘 다 지극히 대중성과 거리가 가까운 상들인데, '읽히는 소설'을 쓰는 온다 리쿠 앞에서 작품성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게 된다. 나아가 작품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중간하면, 욕하면서 시간때우기용으로 적당히 볼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취급을 받을 줄 알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 <꿀벌과 천둥>은 그걸 넘어선 듯하다. 피아노라는 예술의 한 면을 다뤄서가 아니라, 이쯤 되는 캐릭터와 묘사에의 열정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량이 워낙 길기도 했고, 1차 예선이니 2차 예선이니 해서 구분도 되어 있고, 주인공마다 챕터가 확연히 갈라져 있어, 중간 중간 쉬면서 다른 책들도 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봤음에도 그때마다 주인공들이 확연히 되살아날 정도였다. 굳이 책을 앞에서 다시 일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그 형상이 잡혀 지워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자칫 가소로워 보이는 캐릭터들을 얼마나 연구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글로 표현해낸 부분들이라 하겠다. 몇 쪽에 걸쳐 펼쳐지는 각종 묘사의 향연은 솔직히 한 번 웃지 않고 지나갈 사람 없을 만한 민망함을 깔고 있지만, 작가가 소설을 통해 연주를 표현한 것처럼 '비범하고 환상적이다'. 그때만큼은 '소설의 신'이 내려온 것 같다... 종종 온다 리쿠를 찾을 것 같다. 매일 건강에 좋지만 맛은 그다지 없는 음식만 먹을 순 없으니, 종종 한없이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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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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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선자본주의공화국>


<조선자본주의공화국> 표지 ⓒ비아북



북한 핵 위협, 일명 '북핵'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끝없는 질주. 그를 둘러싸고 최소 한, 중, 일, 미, 러 5개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일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북한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에. 대내외적으로 '우린 아직 건재하다' '우리에게 관심을 줘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북핵에 대한 관심은 일반인에게서만큼은 멀어져 간다. 수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핵 실험에 마음을 졸였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그저 북한이 '또' 미사일 발사했네, '또' 핵실험을 감행했네 정도의 관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북한 자체에 대한 관심 또한 멀어져 간다. 그동안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위협'과 동일어였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북한에 대해 알게 되는 통로인 언론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실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북핵만 보도할 뿐이다. 종종 기획보도로 실상을 알리고자 하지만, 이미 독자의 입장에서 안중에도 없어졌다. 우리는 북한의 실상, 북한의 일반 주민 생활을 알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이후 북한의 실상


우리나라에서 북한은 오랫동안 가장 금기시된 단어이고 가장 알아선 안 되지만 한편으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궁금하다. 군대에 있을 때도 북한 주민은 '적'이 아니라고 배웠다. 헌법상 한반도 전역이 대한민국 영토인 만큼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겠는가. <조선자본주의공화국>(비아북)의 출간이 반갑게 다가왔다. 


영국 출신의 두 수재 기자이자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과 다니엘 튜더가 전해주는 북한의 실상을 담았다. 최소한 내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희귀하고 독특하고 소중한 저작물인데,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사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접해 왔던 북한은 대부분 '정부'였고, 그 '사회'는 여지없이 굶주리고 헐벗고 무기력한 이들의 집합소였다.


이런 생각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처럼 저자는 북한 사회가 굉장히 역동적이거니와 북한 주민도 우리만큼 일상적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북한도 한국처럼 '재벌과 대기업의 나라'가 되어 간다는 충격적인 말도 전한다. 1990년대 중반에 북한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꾼 대기근 때문이라는 것. 최소 수십 만 명이 희생된 대참사 이후 북한 주민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송두리째 바뀐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족히 수백 만 명은 희생되었을 게 분명한 그 참사 이후 조선 백성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라는 더이상 버팀목일 수 없었다. 대기근 이후 북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더이상 '공산주의체제'가 가지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주민들은 유사 자본주의체제의 시장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기근 이후 변한 북한의 실상을 스캔하는 입문서로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우리를 흔드는 북한의 충격적 변화들


지금은 당연한 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 말은 이제 북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돈이면 안 되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법 위에 돈이 있다'는 것이다. 명백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진입, 아니 거기에 허울상의 무너져가는 체제일지라도 '봉건주의제 왕조국가'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맞겠다. 


이 거대한 충격적 변화 속에 자잘한 충격적 변화들이 우리를 흔든다. 더이상 정부가 완벽한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장려하다 못해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 시장경제체제로의 길을 닦는 건 충격에 들지도 못한다. 정부가 아닌 일개 개인이 사업을 한다든지, 외국 TV와 영화를 시청하고 컴퓨터와 휴대폰과 USB는 물론 초소형 SD카드와 태블릿까지 사용하며, BB크림을 바르고 스키니진을 입고 다니며 성형수술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나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자잘한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하면 그 충격이 오히려 사그라들 것 같아 말을 아낀다. 충분히 충격일 줄 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역학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다. 2017년을 기해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이 취임했다. 내년이면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5년 중임제 국가주석에 새롭게 연임하게 될 것이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어 아베 신조의 교체가 유력시되고 있다. 


각국 지도자의 변화에 따라 북한에 대한 대응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결코 덮어두고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게 있겠다. 북한의 진짜 모습, 북한의 밑바닥부터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실상을 말이다. 이 책은 현 시점으로선 그에 대한 가장 완벽한(가장 최신은 아니지만) 정보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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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의 1960년대>


<나의 1960년대> 표지 ⓒ돌베개



대학, 정치,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학생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을 일컫는 '학생운동'.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1980년대를 꼽는다. 물론 1960년 419 혁명도 학생의 손에 이룩한 것이니,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활동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생운동에는 단연코 '68혁명'을 이끌어낸 프랑스학생운동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뒤흔든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일본학생운동도 이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양산해냈다는 측면에서는 단연 최고일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전공투'나 '연합적군'은 많은 문화콘텐츠를 통해 소개·소비되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1Q84> 등 소설로 이것들을 다뤄 알게 된 측면도 크다. 그 자신이 1960년대 전공투 세대였던 것이다. 


일본학생운동, 전공투 하면 생각나는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과격함'이다. 1970년대 변질되어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각목을 든 채 화염병을 던지며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이미지가 강한 것이다. 그 시작은 어땠을까. 매스컴이 만들어냈을 게 분명한 그 이미지 이면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나의 1960년대>(돌베개)는 전공투를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자 일본 전공투를 상징하는 이들 중 하나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재야 과학사가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일본 전공투 운동사이다. 그런 한편, 전공투가 궁극적으로 반대하고 투쟁했던 메이지 유신 이래 국책으로 추진되어 온 일본의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인문과학비평서이기도 하다. 얼핏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일본 전공투와 일본 과학기술, 이 둘을 하나로 엮어 흔하디 흔한 '옛 이야기' 따위를 타파한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 회상


전공투,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약칭이다. 저자가 속했던 도쿄대와 니혼대, 즉 일본 최고 최대의 국립 사립 대학이 주축이 되었고, 역사에 길이남을 투쟁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1968년에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이전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인지 대학 입학 직후인 1960년 '안보 투쟁'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1960년대 당시 일본의 비상식적 '풍요사회', 그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투쟁은 계속되어 62년 대학관리법 반대 투쟁, 66년 베트남반전회의 활동, 68년 미군 야전병원 철거 투쟁, 그리고 68년 대망의 도쿄대 투쟁까지 이어진다. 반미, 반대학, 반전을 거쳐 '반체제'까지 다다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학의 학생들이 펼치는 '반체제' 투쟁의 파급력은 남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공투운동은 이전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 전술적 움직임으로 긴 투쟁을 예고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저자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야스다강당 점거 봉쇄 투쟁'이다. 야스다강당은 도쿄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대학 입장에서는 절대 그대로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1968년 6월에 시작된 야스다강당 투쟁은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지만, 결국 대학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무너진다. 그렇게 도쿄대 전공투는 해체되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전공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는 어느 정도는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고 이 책이 아닌 어디에라도 조금만 찾아보면 나올 내용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 커진다. 그들이 그런 투쟁을 한 이유 말이다. 그건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과 그를 뒷받침한 과학기술의 이면과 큰 관련이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과도 결코 적지 않은 연관성을 띈다. 아니,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름 아닌 지금이겠다. 작금 일본의 모습과 나아가려는 방향이 50년 전 그때를 연상시키고도 남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


일본의 과학기술 찬양은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선진문물에 충격을 받고 '양이'를 기치로 내세운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다. 저자는 이후에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와 전후 1960년대가 과학기술 찬양의 붐이 일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시기는 그렇다 치고, 1960년대가 문제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하지만 터무니 없는 면모가 추악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임에도 제대로 된 반성 따윈 없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로 돌렸다다. 다만 전쟁 직후에 그런 기조를 드러내놓고 펼칠 순 없어 은근슬쩍 시행에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1960년대 과학기술 붐이 인다. 곧 경제성장에 직결되고, 평화니 민주주의니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전후 세계적 기조를 채택해 진짜 모습을 가린다. 저자는 다름 아닌 그런 기조의 최전선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어온 도쿄대 이학부 학생이었던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자는 더 들어가 일본 과학기술의 이면까지도 파헤치는데, 거기에 '군(軍)'이 있었다. 사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일본의 과학기술은 '군에 의해서' 만들어지다시피 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 시기를 지나 전후 시기가 왔음에도, 군에 의한 과학기술은 여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1960년대는 경제성장의 시대이니 만큼, 자본주의 첨병인 기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즉, 군산학 합동 메커니즘이다. 


결국 일본의 전쟁 DNA는 전후 1960년에도 계속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겉을 과학기술, 경제성장, 평화, 민주주의 따위로 칠해 진짜 모습을 알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당시 전공투가 문제 삼은 건 다름 아닌 일본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건 그 진짜 모습을 지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인 도쿄대 학생 자신들을 부정함에 다름 없었다. 나라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까지 부정하는 건 그 얼마나 어렵고 두렵고 외로운 일이겠는가. 


50년이 지나 반복되는 총력전체제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움직임이 그때 그 시절을 연상케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른바 일본 전체를 끌어들이는 '총력전체제'를 다시금 가동하려는 것이다. 밑바닥에 다다른 경제 상황을 빗대 경제성장을 말하고, 한편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말함과 동시에 전쟁을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결정적으로 3.11 대참사가 일어났음에도 반성 없이 그 원인을 낮은 과학기술로 돌릴 뿐인 것이다. 이쯤 되면 데자뷔 현상이다. 


아무리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의 한 편에 다름 아닌 '전쟁 특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항이겠다. 일본은 다시금 그 길로 나아가려는 것인가? 


저자는 일본의 작금 모습을 살피고는 '그렇다'고 판단했다. 그러곤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50년 전 전공투 이야기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투쟁한 이유를 상세히 펼쳐놓는다. 한편 과학사가로서의 특기와 이점을 잘 살려 투쟁 이유와 맞물린다. 우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는 한편, 자신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주장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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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물들의 인간 심판>


<동물들의 인간 심판> 표지 ⓒ책공장더불어



어렸을 때 집에는 놀 만한 게 없었다. 엄마가 직접 나와 저녁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친구들과 놀 건 정말 많았는데, 우리집에서 조금만 가면 얕은 산을 낀 공원이 있어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러곤 매미, 잠자리, 사마귀, 메뚜기, 개미 등의 곤충을 잡았고, 잡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죽어가는 곤충이 있는 반면 잡아 괴롭히는 데 온 정성을 쏟는 곤충이 있었다.  


그 행위는 우리들에겐 흔한 놀이였고, 어른들에겐 자연 학습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자연과 덜 친숙한 지금,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그건 그 무엇보다 학습적인 놀이이다. 물론 그 곤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나 여지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 곤충은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런 짓이 생태계 파괴에 일조하는 거라고 왜 그땐 몰랐을까.


<동물들의 인간 심판>(책공장더불어)은 동물을 향해 호모 사피엔스(인간)이 저지른 하찮고 작은 행동부터 엄청나고 크나큰 행동들, 그로 인해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많이 접해왔던 계몽서 느낌이라고? 천만에. 이 책은 전적으로 동물들의 시점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재판에 올려 법정을 여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 죄는 동물들에 대한 비방과 중상, 학대, 그리고 대량학살이다.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죄


생태계에는 양육강식 법칙이 존재한다. 이른바 생존 게임, 먹잇감을 두고 경쟁도 하고 발톱을 세우고 독을 뿜으며 사냥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과 상대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도 양육강식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의 양육강식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말 아래, 존중이고 규칙이고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같은 인간과 온갖 창조물을 헐뜯어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 열중하는 걸 뜻한다. 인간은 인간을 욕할 때 하필이면 동물을 빗대는데, 그 자체로 이유없이 동물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이다. '개의 새끼'는 천하의 나쁜놈을 뜻하고, '숫염소'는 성(性)에 관한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다. '닭의 대가리'나 '금붕어'는 멍청하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뱀'은 교활하다는 뜻이고... 정녕 끝이 없다. 


인간의 두 번째, 세 번째 죄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에 개봉해 많은 이슈를 뿌렸던 영화 <옥자>가 이 두 죄를 한 번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동물에 개, 돼지, 소, 말, 고양이 정도가 있다. 이중 개와 고양이는 반려의 대상이 되고, 소는 젖을 주고 밭을 갈며, 말은 유흥의 대상이다. 하지만 돼지는? 내가 알기론 오로지 식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돼지는 태어나서 인간의 식용 대상으로 키워질 뿐이다.


옥자가 전 세계 각지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양질의 고기를 위해서다. 책에서 법정의 증인으로 나온 돼지 장브누아르의 증언은 정녕 끔찍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러운' 돼지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곧 식용 돼지로의 과정이다. 그들은 비좁고 더럽기만한 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먹기만 할 뿐이다. 그러곤 곧 도살장으로 향해 죽어간다. 옥자가 달랐던 건 '더 맛있는 고기'를 위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은 환경에서 자란 돼지였을 뿐, 그 끝이 도살장에서의 죽음, 그리고 식탁 위인 건 똑같다. 


인간의 부유함은 곧 다른 동물의 가난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증언하는 내용은 상상 이상의 끔찍함을 동반한다. 동시에 생각하기 힘든 역발상과 인간이 제대로 마주칠 수 없는 인간의 본 모습도 제공하는데, 그 모든 게 실랄하게 정확해 보인다. 동물들은 인간이 절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원한다고 말한다. 그건 '소유 게임'이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경제'라고 부르며,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얻는 걸 목적으로 몇 가지 점수를 정확히 매겨서 계층을 나눈다. 그 기준은 '돈'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가지려고 하는 다양한 게임은 모두에게 재앙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은 제한적인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70억 명의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가졌는지'를 결정하는 거대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가 70억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더 가지면 분명 우리(동물)는 당연히 덜 갖게 되니까요. 물도, 깨끗한 공기도, 식량도, 살 공간까지 줄어드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부유함은 곧 우리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192쪽)


우리는, 인간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결국에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파멸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인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내 세대만, 종국에는 인간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인간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이 간악한 마인드에 다른 종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되고 나아진다고들 하지만 사실 퇴보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 이상 글러먹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내려질 판결이 궁금하다. 물론 법정인 만큼 희대의 범죄자 인간에게도 변호인이 있는바, 적어도 동물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런 인간도 대다수가 아닌 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비록 늦었지만 깨달음의 꾸준한 나아감일까,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소수의 현인적 깨달음의 반복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온다 해도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일단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네 죄를 네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인간 심판, 그 처벌의 모양새도 그 일환이겠다. 진짜 끔찍한 건 수많은 동물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 수많은 끔찍한 죄들을 다시금 저지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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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아무것도 아니야>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표지 ⓒ현암사



"의미 있는 건 없어. 나는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야."(분문 7쪽)


의미 있는 건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안톤은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는 마을 자두나무에 걸터앉아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에게 설파했다. 의미나 가치 있는 건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아이들은 안톤의 말에 흔들렸다. 그가 던진 그 무엇이 한참 앞에 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가 되어야 했고, 누군가가 되어야 했다. 가치 있는 무언가, 의미 있는 누군가. 


그렇게 그들은 무언가를 하기로 한다.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버려진 목공소를 아지트로 삼고 각자 의미가 있는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데니스의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세바스티안의 낚싯줄, 리샤르트의 검은색 축구공, 로라의 아프리카 앵무새 귀걸이, 아그네스의 초록색 샌들... 아그네스는 급기야 게르다에게 작은 햄스터 오스카리틀을 지목한다. 


본격적으로 처절하고 잔혹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안톤을 나무에서 내려오게 하여 자신들이 맞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의미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그 어떤 것도 묵살되어 버린다. 거기엔 신앙, 생명, 순결, 신체까지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안톤의... 


진리를 알아버린 비성숙한 이들의 비극


자신들보다 한참을 앞서 나가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를 깨달아 버린 이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애써 눈감는 그리고 눈감아야 하는 바이고, 대상은 불과 열네 살 아이들이다. 이제 막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자 눈을 뜬 나이다. <아무것도 아니야>(현암사)는 그들의 안타까운 비극을 그린다. 여기서 안톤은 안톤이 아니라, 진리의 화신이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없다는 것, 즉 세상도 나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누구나 겪게 될 진리다. 결국 사람은 죽을 테고 세상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이 고답적이고 고차원적이지만 회의적이고 치명적인 진리는, 사실 그리 고깝게 받아들여지진 못한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데 부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게 자명하기 때문인데, 교육은 받았지만 원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우선 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은 교육에 기반한 거다. 세상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게 없을 수 없다는 것. 그들은 그걸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지탱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보인 생각과 행동은 교육에서 원숙하지 못한 본성 또는 본능으로 나아간다. 시스템적 교육과 자연적 교육, 개인과 집단의 조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그들 만의 세상으로 숨어들어갔다. 


비극의 잉태는 예견된 수순이 아닌가. 우린 비성숙한 아이들의 집단이 저지른 수많은 비극을 익히 알고 있다. 그 비극은 비성숙이라는 이유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시선이 옮겨간다. 그 연유나 과정이 아닌 결과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 연유는 분명 안톤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안톤이 그렇게 된 연유를 찾아야 마땅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잘해봐야 그들의 비극의 과정과 결과가 보여준 끔찍하고 잔혹한 면면만 살필 것이다. 


다른 세상, 다른 진리도 있다는 교육이 필요하다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극의 과정 즉 아이들의 '의미 있는 물건 더미 쌓기'는 매우 흥미진진하고 스릴까지 있다. 의미 있는 물건의 '의미'가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아이들의 본성이 살아나고 그럴수록 사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하고만 있다는 것. 사이사이 보이는 어른들의 시선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잘 알고 잘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고립된 아이들. 


이 소설을 통해 들여다보아야 할 건, 가치나 의미의 진정한 의미, 가치나 의미 따위는 없다는 진리, 아이들의 교육과 본성이 아니다. 그들이 그들하고만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된 모습이다. 거기엔 안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한 교육과 세상, 그리고 안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지은 교육과 세상이 있다. 


세상은 그들에게 하나의 세상을 알려주었을 뿐, 또 다른 세상의 존재와 세상과 세상의 대립과 충돌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그건 스스로 깨우쳐야만 알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 알려준다고 온전히 깨우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다른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교육이 횡행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건 틀린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걸 알 길 없는 아이들이 그 끝에 비극적으로 도달할지 희극적으로 도달할지 알 수 없다. 


안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세상도, 아그네스를 위시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세상도 궁극적으로 모두 틀리지 않다. 결론적으로 봐서 아이들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시작은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안타깝다. 그들이 대립하게 된 이유를 제공한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른들이 무능하고, 그들이 한 짓을 보고도 터무니 없고 황당한 짓거리만 일삼은 어른들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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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한 이웃>


<선한 이웃> 표지 ⓒ은행나무



민주화 30주년의 2017년 6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시점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 6월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민주화 영령들이 불려 나왔다. 그중엔 당연히 소설도 있는 바, 이정명 작가의 <선한 이웃>(은행나무)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선과 악의 대립 또는 선과 악의 모호함 등의 소재, 이정명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픽션적 뒷이야기들. 


세종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를 집현전 학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풀어내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과 관계의 뒷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으로 풀어냈으며,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뒷이야기를 검열관 죽음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등 이정명의 소설은 구미를 당기는 무엇이 있다. 나는 앞의 두 책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은 재밌게 읽었는데, 뒤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인 '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 책 <선한 이웃>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좋던 나쁘던 기존의 이정명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실존 인물을 참조했겠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이 나오진 않는다. 유명한 사건의 뒷이야기를 그만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핵심인물들에 천착하는 건 여전하지만, 조금 더 서사에 집중했다는 데서 사건과 인물에 집중했던 이전 작품보다 고전적이 된 것 같다. 고전적 의미로 더욱 소설가다워졌지만, 소설로서는 재미가 많이 반감되었다.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잘 짜인 소설


신출귀몰 용의주도 얼굴 없는 운동가 최민석을 잡기 위해 김기준 팀장을 위시한 정보요원팀이 출동한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추적을 비웃듯 눈앞에서 놓치고, 관리관에 의해 김기준 팀은 해체되고 모두 좌천된다. 한편 극작가 이태주는 <줄리어스 시저>로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마지막 공연에서 대사가 문제시 되어 정보당국에 잡혀간다. 그를 제외하고 모두 고문을 받고, 극단주와 주연배우는 구속된 반면 그는 풀려난다. 


변절자로 낙인 찍힌 이태주는 삼류 에로극 주연 여배우 김진아와 연인이 된 후 함께 <엘렉트라의 변명>을 힘들게 준비한다. 김진아는 알고 있다, 이태주가 이 연극으로 세상에 맞서려고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를 진정 사랑하기에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좌천당하고서도 여전히 최민석에게 심히 집착하는 김기준, 관리관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김기준은 여러 후보군을 추려 <엘렉트라의 변명> 연출자 이태주를 최민석으로 점찍고 공작에 들어간다. 그는 이태주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하고 정교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등장인물들을 옭아매는지 모를 정도로 잘 짜인 소설 <선한 이웃>.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소설의 절정에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건 없다. 앞으로 계속 생각하게 될, 생각해야 할 개념이 생겼을 뿐이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의 악


이전 작품보다 서사의 흐름과 상징의 모호함에서 오는 깨달음을 더 절실하게 전하며 새로움을 선사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정명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특출한 캐릭터성을 엿볼 수 있다.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그리고 관리관까지. 이들이 얽히고 설킨, 물리고 물린, 복잡다단한 관계와 자기 신념들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악한 이의 악이 아니라 선한 이웃의 악이다'를 대변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거기엔 일면의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인 면이 도사린다. 1980년대 서슬퍼런 독재 정권 시대, 어쩔 수 없이 악에 부역하며 그렇지만 자신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들이 있다. 아주 많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본래 평범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범하고 힘없는 이가 악을 행하면서 '나는 악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지옥이다. 


사실 이는 식상하기 그지 없는 개념이자 도식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아이히만의 '나는 맡겨진 일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말을 빗대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만든지 오래다. 이후 수많은 콘텐츠에서 이 개념은 인용되고 변주된다. 이 책의 제목인 '선한 이웃'도 사실 '악의 평범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식상한 변주가 있다. 명백한 악을 행하고서도, 심지어 그것이 악인 줄 잘 알면서도, 그걸 행한 자신을 평범하다고 성실하다고 신념화 시킨다면 여지 없이 '악의 평범성' 개념을 꺼내들어 변주해야 한다. 물론 '잘' 해야 한다는 단서는 있다. 그런 면에서 <선한 이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쉽지 않은 소재와 주제를 풀어나가고자 정공법을 택했는데, 고대 그리스 배경을 위주로 한 연극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가져와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이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고대 그리스 배경이 주는 생소함과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인간 자체에 대한 비유와 상징들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잘 뒷받침해준다. 작가가 한탄하는 것처럼 3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만 있지 변한 게 없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이정명 작가는 달라지는 것 대신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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