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월>


소설 <세월> 표지 ⓒ아시아



2014년 4월 16일,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참사가 발생한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탑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했다. 당년 11월에 결국 수색이 종료되었는데, 9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 여가 지난 2017년 3월 22일 드디어 세월호가 인양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참사 3주기가 지난 4월 18일에는 미수습자 9명 수색이 시작되었다.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색은 나라가 바뀌고 있다는 청신호일까? 그 청신호에 맞춰, 아니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많은 관련 책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나왔는데, 세월호의 그늘을 그린 이는 감히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출간한 방현석 소설가의 <세월>은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한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 엄마는 희생자, 아빠와 오빠는 미수습자... 다섯 살 아이만 혼자 살아 돌아왔다. 언론에서 소소하게 다뤄졌을 뿐, 많은 이들이 모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세월>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월호 베트남'으로 검색하면 겨우 몇몇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 실화가, 이 소설로 그늘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히 이 실화가 그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그늘, 베트남 이주민 가족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는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아니다. 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엄마 린의 아버지 쩌우다. 쩌우는 베트남 까마우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딸 린이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그는 마뜩잖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던 일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행동과 결정은 자본주의 물결의 한 갈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탄하고 한탄한다. 


그런 와중, 갑자기 딸 네가 제주도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농사 지으면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런데 그 소식은 곧 여객선 침몰 소식으로 점철된다. 자본주의 물결의 한탄이 자본주의 침몰로 갈 길을 잃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하고, 곧 잘못된 발표고 사실 구조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쩌우는 큰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쩌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축하를 받는다. 딸 린이 일주일 만에 건져 올려졌기에,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받은 축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을 간직한 채 하염 없이 기다릴 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딸이 거기서 죽어야 했는지, 사위와 외손자가 왜 아직도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소설이 주목하는 건,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목해야 하는 건,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겠다. 쩌우는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 가족이다. 기뻐하면서, 비참한 부러움과 기막힌 축하를 받으며, 끔찍한 기다림까지 교차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들은 이주민.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똑같은 목숨일진대, 차별 받는다. 


세월호 참사, 그 다양한 이야기와 진실의 시작


단편에 가까운 중편, 이 짧은 소설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라는 당대 최대 비극이라는 층위 아래, '베트남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더 깊이 들어가 그럼에도 존재할 '차별', 한편으론 한국은 물론 베트남까지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까지. 


각 층위의 갯수와 깊이만큼 스토리의 얼개가 얇고, 그러다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읽힐 여지도 많지만, 던지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고 깊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목적에 충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빨리 읽힐 뿐이다. 그러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층위가 보인다. 


큰 사건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명백한 한 쪽의 잘못과 한 쪽의 명예로움만으로 비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도 계속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오는 게 그 예다. 세월호 참사는 이제 3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세월>이 그 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롯해 일명 '베트남 3부작'을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한국과 베트남'의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우리가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진실이겠다. 마음 졸이는 한편 작가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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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몬드>


소설 <아몬드> 표지 ⓒ창비



우리 뇌에는 '아몬드' 모양의 중요 기관이 있다고 한다. 동기, 학습,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편도체'. 그래서 아몬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사실 아몬드가 한자로 '편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아몬드. 


소설 <아몬드>는 작은 편도체와 각성 수준이 낮은 대뇌 피질을 타고난 아이 선윤재의 이야기다. 대신 그에겐 엄마와 할멈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 그런 한편, 선윤재와는 반대로 타고난 아이 곤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에겐 누구에게도 말 못할 어둠의 기억들이 있다. 이 둘의 만남과 성장은 강렬한 한편 눈물겹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치 못했다' 등의 식상한 감상평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 있는데,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간다. 일찍이 영화평론으로 데뷔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계속 단편 영화를 연출해온 '영화통'이다. 


이창동, 유하 등의 작가 출신 영화감독이나 천명관처럼 영화감독으로의 궁극적 꿈을 꾸는 작가는 익히 봐왔지만, 영화감독 출신 작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소설을 더 반기는 추세에 적잖은 이점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은, 안 된다


소설은 날카로운 아픔으로 시작한다. 유일한 혈육들이 피칠갑으로 살인당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나, 윤재. 그러곤 그 유일한 혈육들인 엄마와 할멈과 나의 끈끈하면서도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윤재는 태어나길 감정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마와 할멈은 그에게 좋은 감정을 끝없이 불어넣어준다. 


시작부터 예고된, 홀로된 윤재. 어린 그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이 없기에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그의 곁으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 다가온다. 엄마와 친하게 지냈다던 건물주 심박사를 비롯해, 풍부한 감정을 지녔지만 어둠의 기억들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곤이, 그리고 윤재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본인 도라. 


우린 이들의 모습에서 무감정이 주는 '편리함'과 감정이 주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윤재의 무감정과 무표정이 부럽고 따라하고 싶어 진다.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넘겨 집으려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윤재가 오히려 소통과 공감을 울부짖는 이 시대에 일종의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고 또 알고자 하고 느끼고자 하는 지금, 이 감정과다의 시대에 '무감정'과 '무관심'이 나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감정이 없는 게 편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해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일까. 결국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일까.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한도 끝도 없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결국 무감정과 무관심이 우리를 좀먹는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다


소설은 다분히 '성장 소설'로서의 콘셉트다. 전체적 느낌은, 성장 소설의 대명사 <데미안>보다는 또 다른 대명사 <호밀밭의 파수꾼>에 가깝다. 세상의 표준과는 너무도 다른 주인공, 그는 혼자다. 하지만 그에겐 빛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 덕분에 세상의 표준과 가까워진다. 아니, 표준과 다른 것도 표준의 하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아몬드>는 또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뜬금없다고 할 만한 마무리도 닮았다. 다름 아닌 빛과 같은 존재와의 해후, 그리고 변화. 한 단계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곁에 두고 가끔씩 다시 읽어도 하등 지루할 것 없는 전개와 읽는 이의 마음을 영원히 어루만져줄 것 같은 따스함은 조금 엹다. 


우린 아마 풍부한 감정을 가졌을 거다. 그래서 제대로 감정을 '배운' 적이 없을 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윤재가 감정을 배우는 모습이었는데, 굉장한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상당히 불쾌하기까지 했다. 책장을 덮으면서 그런 마음은 거의 없어졌다. 감정을 배우진 않더라도, 감정을 소중히 여기며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인간은 머리가 온전히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만, 가슴이 머리를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린 내 감정은 물론 남의 감정도 잘 다루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잘 못 다루기도 한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는 것이다. 윤재의 무감정이 부러웠다가, 감정을 배우는 윤재가 부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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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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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단 아이돌론>


<문단 아이돌론> 표지 ⓒ한겨레출판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이 자랑하는 자타공인 전 세계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지명되며 대중적 인기와 함께 비평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다. 지난 2월 24일 일본 현지에서 출간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인기에 완벽히 부합하며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초판 인쇄 부수만 자그마치 130만부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다. 


1979년에 데뷔해 데뷔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여전히 남녀노소 불문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하루키론'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건 물론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번 상반기가 가기 전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하는데, 그에 맞춰 하루키를 다룬 하루키론 책들이 나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나올 것 같다.  


그중 하나가 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한겨레출판)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나왔으니 15년이나 지난 책인데, 그것도 책의 주제가 1980~90년대 일본 문단의 주요 작가라는 점을 볼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상륙에 맞춘 출간이라고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책이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뜬금없다고 느낄 순 있을지언정 허투루 별 것 아닌 책을 낸 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독특한 해석과 유머러스함이 빛을 바란다. 많은 책을 낸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엔 2006년에 나온 <취미는 독서>라는 책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나마 그 책도 절판되었단다. 소설, 소설가, 문단, 문화, 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만한 저자이다. 


RPG 게임을 연상시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


저자가 소개하는 문단의 아이돌들은 모두 8명. 그중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들은 5명 정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이들은 2명 정도다. 다름 아닌 '두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다. 저자는 하루키를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 시기에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를 냈던 작가 중 하나로, 류를 '작가'라는 틀을 넘어 폭넓은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펼쳐온 지식인 중 하나로 보았다. 


사실 하루키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단 아이돌'의 핵심이다.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잘 논해지는 작가이기 때문일 테다. 저자는 하루키의 판매량 수수께끼는 제외하고 '왜 그토록 잘 논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롤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킨다. '하루키 퀘스트'. 하루키 작품은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키가 작품에 그런 요소들을 숨겨놓고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저자는 하루키 작품 해석을 게임에 맞춰 소개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 또는 비평가의 레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벨 1은 분위기 비평이다. '나는 이 문체가 좋아, 이 세계관이 좋아'라며 어린아이처럼 써 내려가는 것. 레벨 2는 퍼즐 풀기다. 하루키 월드에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기에 그에 대한 해설을 써야 한다는 것. 쓸데없이 복잡한 '본격적 비평 시대'의 시작이다. 레벨 3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수수께끼 풀이 기계 같은 사람이 비평 아닌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 레벨 4는 공략본의 출현이다. 비평이 아닌 해석에만 매달린 이가 써내려간 하루키 퀘스트의 공략본이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매 작품마다 그렇다. 사실 가장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은 이런 면에선 가장 덜 궁금증을 자아낸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알 법한 하루키 월드의 진정한 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 팬들은 이 소설들을 읽으며 'RPG 게임'을 해왔던 거다.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교당하는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 우리나라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그 인기가 확실히 떨어진다. 단적으로 서점에서 이름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하루키 관련 책이 200여 권 정도인 반면 류 관련 책이 100여 권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현재 절대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비슷하다), 단지 '무라카미'라서 비교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일본 현지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하루키 월드뿐만 아니라 '류 월드'도 확연히 존재한다. 그 특징은 '조잡 파워'와 '와이드 쇼'로 정리할 수 있단다. 아마추어리즘의 힘으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켜 특별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대중적인 텔레비전 뉴스의 시대를 읽는 센서와 시대를 읽는 센서가 특출나게 발달했다는 것.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진단한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빨리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루키와의 비교는 일본에서 엄청나게 오랜 시간 계속 되어 오고 있는데, 저자는 두 무라카미의 비교론을 의심스러워 한다. 만약 둘 중 하나의 이름이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정도까지 비교를 했을까? 그리고 의외로 무라카미 비교론자들은 모두 결국엔 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루키에 비해선 류의 작품에 비평적인 요소가 더 잘 소화되어 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이항 대립의 도식은 하등 의미 없고 소모적일 수 있다는 것. 


하루키와는 다르게 류의 작품을 거들떠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영화로 옮겨진 소설 <69>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는 정도? 아마 저자의 말처럼 류를 보는 시선이, 단순히 소설가 이상의 그 무엇, 지식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일까.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1980년대의 일본, 우린 지금도 따라가고 있다


이밖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 '우에노 지즈코', '다치바나 다카시' 등도 거론된다. 대부분 저자의 빼어난 촌철살인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히 '지식의 거인'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광으로만 알고 있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여성차별을 위시한 '여성과 어린이 문제'는 상당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여성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차치하고,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한 축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대에만 10여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저자는 이 역시 날카롭기 그지 없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녀를 두고, '남자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음에도 남자 사회 내에서 앉을 자리를 확보했으며, '인텔리=양갓집 자제'를 위한 담론을 생산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고지식한 영감들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점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은 분명 작가 비평, 문예 비평의 성격을 띠지만, 1980년대 일본 사회 자체를 비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큰 틀에서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1부에서는 '거품 경제'를, 우에노 지즈코를 위시한 2부에서는 '페미니즘'을, 무라카미 류를 위시한 3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를 좆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호황과 불황, 페미니즘 유행, 지적 권위주의 파괴 라는 일련의 주제들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본 1980년대 일본은 그대로 1990~2010년대 한국이다. 전례 없는 호황이 지나 기나긴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되고 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시대, 여지 없이 지적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그림자를 따라기기 바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걸었던 길이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인 것인가.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도 한 번쯤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비평을 수단 삼아 우리가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갈 길을 목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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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동급생>


소설 <동급생> 표지 ⓒ열린책들



예술에 있어 '소품'과 일명 '작은 걸작'은 한 끗 차이다.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면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으며 2016년 최고의 영화로 우뚝선 <문라이트>는 제작비가 불과 5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품이 아닌, 작은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971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7년에 재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프레드 울만의 작은 소설 <동급생>(열린책들)이 재출간 40년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작은 판형임에도 13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소설은 어떨까. 그 자리에서 완주가 가능하기에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품을 가장한 작은 걸작이다. 


한스와 콘라딘의 꿈 같은 우정, 최선의 행복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을 다니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 슈바르츠, 1932년 2월에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소년이 전학온다. 저명한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 뭔가 '다른' 그 소년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는데, 함부로 다가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한스는 콘라딘이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한스에게 콘라딘은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한스는 콘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문학과 체육이라는 극점에 있는 것에서 말이다. 이내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 무엇도 그들의 우정을 방해할 순 없었다. 벽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표식이 나타났다든가 유대계 시민이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들겨 맞았다든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보였다. 


화가 출신 작가는 이들의 우정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표현해낸다. 암울했을 당시 독일과 대비되는 자연 풍경은 한스로 하여금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황홀함을 선사한다. 


한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그 시절은 횔덜린의 아름다운 시로밖에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다. 시에 일가견이 있는, 시인이 인생의 꿈이기도 한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횔덜린이기도 한대,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귀향>의 일부)와 같은 구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선의 행복을 표현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 정도였고, 한스의 가슴 속에 맺힌 행복의 이슬이 이 정도였다. 


마지막 한 줄로 위대한 소설이 되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종말이 코앞에 와 있었다는 걸.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종말의 전조들이었다는 걸. 1930년대 독일에서 독일 귀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독일을 당연히 조국이라 생각하고 그에 충성을 다하며 자연스레 '독일인'이어도,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졸지에 '독일을 망치고 있는 유대인'이 된 한스, 콘라딘과의 불가항력적인 멀어짐도 비슷한 이유였다. 급기야 콘라딘을 피하기 시작한 한스,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있어 미국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한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화한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산화한 동찰들 리스트를 읽어내리는 한스, 그곳에서 더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전체가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수렴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 한 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러곤 지체없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줄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다. 


한 층위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우정 또는 사랑의 총량이 이리도 엄청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다른 층위를 '동성애'라는 코드로 풀어내 더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이 소설 <동급생>은 어떨까. 한 층위는 비슷한 수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층위가 주는 수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다. 자신과 가족과 시대까지도 뛰어 넘는, 즉 모든 걸 뛰어 넘는 우정의 총량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 한 줄로 그 어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뛰어 넘거니와, 위대한 콘텐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홀로코스트 작품보다 큰 울림


이 소설이 어줍잖게 홀로코스트를 끼워넣었다면, 명백한 소품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동급생>과 굉장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비록 슬프고 아름답고 충분히 위대한 감동과 역설을 선사하지만 '작은 걸작'이 아닌 '소품'이라고해도 무방하다.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에서는, 생각보다 그 울림이 작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급생>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충격을 주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홀로코스트'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래픽노블 <쥐>,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위대한 작품들이 생각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파급력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더 심도 있고 치열한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동급생>은 홀로코스트를 작품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끔찍히도 와 닿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더 깊은 우정을 통해 많은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홀로코스트가 주는 절망감을 더 절절하게 전달하여, 더욱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랬다면 마지막 한 줄에서 받는 충격이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 그건 작품이 갖는 위치는 격하시키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였기에 이 작품이 위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탁월한 솜씨와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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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발자크의 식탁>


<발자크의 식탁> 표지 ⓒ이야기나무


이런 책, 좋다. 치열한 연구, 오타쿠적이기까지 한 관심과 열정, 종횡무진 오가며 확대재생산시키는 와일드함으로 무장한 책. 일단 뿌리 부분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겠다. 그에 못지 않게 가지나 잎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바, 보는 입장에선 얻을 게 무궁무진하다. 지식은 물론, 앎에서 오는 재미도 한가득이다.


앙카 멀스타인의 <발자크의 식탁>(이야기나무)이라는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뿌리 부분은 다름 아닌 '발자크'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소설가,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 말이다. 90편이 넘는 개별 소설들을 통해 당대를 완벽히 그려낸 방대한 소설 <인간 희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세계는 <인간 희극>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다. 여기에 '식탁'이라니. 발자크의 음식 사랑을 탐구하는 책인가, 싶다. 


막상 읽어 보면, 발자크가 아닌 발자크의 소설을 들여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 희극>을. 솔직히 말해, 발자크를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나 유명한 <고리오 영감> 정도? 하지만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럼에도 책에 손이 가고 글에 눈이 가는 이유는, (읽어보지 못한) 위대한 소설가와 음식의 만남 때문이다.


일단 이런 류의 '콜라보레이션'을 좋아한다. '딱'하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들의 만남은 많은 재미를 준다. 더군다나 관심은 지대하지만 막상 대한 적은 없는 발자크 아닌가. 발자크와 음식, 둘 다 따로따로 놔둬도 관심이 가는데 둘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그것도 지금의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배경 아닌가.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 희극>, 미식의 도시 파리가 보인다


저자는 발자크가 장갑과 돈과 음식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중 뜻밖의 것이 음식인데, 그는 미식가도 아니었거니와 제대로 된 식습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당대의 사회상을 짚기 위해서 였다. 그에게 음식은 영양 섭취 대상이나 미식적 대상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들에는 여지 없이 음식이 등장하는데, 인간 군상의 성격이나 재력, 집안 내력까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기 전, 파리에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 자체가 그다지 훌륭한 식생활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한 시기에 으레 그렇듯 신흥 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란한 시기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부를 함부로 과시할 수 없었기에, 도망간 황족들이 남겨두고 간 궁전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을 은근한 부의 과시 장소로 택한다. 프랑스 파리에 비로소 식산업다운 식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식의 도시 파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저자는 발자크가 이런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발빠르게 알아차리고 소설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가 <인간 희극> 속 등장인물들을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부터 가장 싸구려 레스토랑까지 찾아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 희극>은 파리 사회와 미식 문화에 대한 실용적인 보고서나 다름 없다. 발자크 소설이 곧 19세기 프랑스 파리였고,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곧 발자크 소설이었다. 저자는 발자크와 발자크 소설과 프랑스 파리를 종횡무진 누비며, 발자크를 읽고 싶게 만들고 나아가 파리를 여행하며 온갖 음식들을 먹고 싶게 만든다.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저자는 본격적으로 <인간 희극>에 뛰어 든다. 특별한 날,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그리고 침대까지. 들여다보면, <인간 희극>을 예로 드는 건지 당대 프랑스 파리를 예로 드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그만큼 발자크가 당대를 완벽히 파악하고 재연해낸 것이리라. 저자의 철저한 치밀한 연구도 한 몫 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음식과 함께 특별한 연회가 있어야 함은 상식이다. 하지만 당대, 특별한 음식과 연회(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막 '야만'의 식생활에서 벗어난 신흥 부자들이 뭘 알겠냐는 것이다. 그건 발자크도 마찬가지. 갓 습득한 예의범절과 겉치레는 음식과 술이 섞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발자크는 가장의 권위와 취향, 야망에 탐구를 바탕으로 특별한 날의 음식과 연회를 글로 옮겼다. 다분히, 인간 군상 중 하나인 '가장'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의 평범한 일상은?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의외로 <인간 희극>을 통해 프랑스의 중심인 파리 사람들의 음식 이야기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 사람들이 열정 없이 음식을 먹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음식보다 사업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정보를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자크가 생각한 이상적인 미식은 신선한 재료를 쓰고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에 있다며, 평범한 식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시골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발자크에게 돈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와 음식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는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가 지나치면 살을 위협한다는 발자크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너무 잘 챙겨 먹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아버지의 지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를 구분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등장인물에게 엄격한 심판의 철퇴를 내렸는데, 악인이 아니라 해도 스스로 만들어 낸 집착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가 생각한 미식의 천국은,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이상적인 미식이듯 어머니의 손길로 만들어진 과도함 없는 디저트였다.


매력적인 창작 도구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자크는 음식을 소설로 옮겨왔다. 저자는 이를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데, 반면 발자크 이후에는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프루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식의 세계를 소설에 담았다고 한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굴의 맛을 감상하고 싶다면 모파상을, 노란 크림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꿈꾼다면 플로베르를, 소고기 아스픽을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럽다면 프루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석영중 교수가 지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 중 고골은 엄청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로 글쓰기 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이었다고 한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의 코드에 의존해 범속한 일상을 전달하려 했다고 하고 푸슈킨은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음식을 탐하지는 않아 그 소박한 식성이 소설 문체와 분위기, 주제와 소재로 나타났다고 하니, 발자크와의 접점이 보인다. 그들에게 음식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물 또는 살아가는 데 가장 자주 접하는 욕망 중 하나가 아닌, 그야말로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아니었을까. 


발자크에게 음식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었다면, 저자에겐 역사적 인물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는 것 같다. 전기 문학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 저자 앙카 멀스타인은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프루스트, 로스차일드, 메디치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되었다. 근래 출간 예정인 <프루스트의 서재>가 심히 기대된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창조 도구라고 해두자. 나와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 '책과 영화'다.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을 책과 영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내는 '음식과 공부'일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일 테고, 누군가는 사랑일 테며, 누군가는 더 디테일한 하위 개념의 무엇일 테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걸 '어떻게' '어떤 이유'로 사용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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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쓰는 법>


<서평 쓰는 법> 표지 ⓒ유유


서평이랍시고 책 읽고 글 쓴지 4년이 넘었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지라, '내가 만든 책 내가 홍보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제대로 방법을 배우지 않은 채 엉겹결에 시작한 서평, 그 수가 족히 4백 편 가까이 된다. 이젠 매너리즘의 시기를 지나, 퇴행의 시기가 온 것 같다. 슬슬 힘에 부치는 게 아닐까. 


다른 분들의 서평을 두루 살펴왔다. 각기 다른 스타일, 거기에 정답은 없었다. 나에게 맞은 옷을 찾기란 힘들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라며 내 식대로 밀어 붙였다. 쓰면 쓸수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잘 쓰고 있는 게 맞는지, 한 번쯤 제대로 된 방법을 연구해봐야 하는 게 아닌지 자문했다. 그렇지만 나름 베테랑(?)이라 자부하는 바, 다른 누구의 지도편달을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계속 뒷걸음칠 치는 것 같은 느낌이 한없이 들었다. 그동안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우연에 우연이 겹쳤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책 읽기와 서평 쓰기의 방법론을 이번에는 집고 넘어가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법>(유유)을 들었다. 


서평은 무엇이고, 서평을 왜 쓰는가


이 책에서 어떤 빛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서평 쓰는 방법' 즉, 기술을 얻고자 한 것도 아니다. '진짜' 서평가는 서평을 어떻게 쓰는지 한 번쯤 들여다보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내 서평을 진단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 서평은 형편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저자에 따르면 애초에 내 서평은 서평보다 독후감에 가깝다. 매우 정서적이고 내향적이며 일방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초장부터 자괴감을 들게 만드는 저자의 단호함이 짧디짧은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 어렵게 만들었다. 차근차근 일게 되었다. 본질을 건드리니 머리와 가슴이 모두 반응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건 서평보다 독후감 쪽에 가깝다고 진단한 나의 서평들이다. 


서평이 무엇인지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서평을 왜 써야하는지일 것이다. 저자 또한 동의하는 분위기인데, '자아 성찰'과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진부하지만 지극히 올바른 논의를 끄집어 낸다. 매우 공감하는 바다. 서평을 쓰고자 마음 먹었을 때 목적을 정했는데, '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모토였다. 저자한테 칭찬 좀 들을 것 같다. 


저자는 독후감과 서평 구분에 책 소개와 서평을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는데, 역시 한 발 빼고 다시 최후 변론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독후감과 서평이 궁극적으로 서로 통하는 것처럼, 책 소개와 서평도 서로 통한다는 것. 제대로 된 서평이 되려면 논리에 입각한 서평가의 목소리가 존재해야 하겠다. 서평쓰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었나, 싶다. 난 단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목적 하에 독자에게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소개해주면 왜 그 책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말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 초심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 초심으로 돌아간 나를 보여주고 싶다.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 책은 지금의 나에게 딱 알맞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줍잖게나마도 서평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해두고 꾸준히 상당량의 서평을 써왔지만, 제대로 체계를 세우진 않은 사람에게 말이다. 반면, 제목만 믿고 초보자가 덤벼들었다간 시작도 못한 채 끝맺음을 할 수도 있겠다. 실용적 기술보다 본질적 기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초보자는 이 책을 읽을 바에 차라리 좋은 서평을 찾아 읽고 그 구성을 따라해보는 게 좋을지 모른다.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에서도 여전히 실용보단 본질에 가까운 설을 풀어내고 있는 저자는, 깊고 다양한 책 읽기와 양가적 태도 장착을 전제로 요약과 평가라는 핵심을 가장 길게 펼쳐놓는다. 그러곤 10개도 채 되지 않는 '서평의 방법'을 짧게 설명하고 있으니, 누군가는 '낚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반면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특히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자리하고 있는 '평가'는, 저자가 몇 번이고 언급하고 강조하는 '서평'의 '평'에 해당하는 바로, 핵심 중의 핵심이다. 다른 건 건너 뛰고 이 부분만 잘 살펴도 이 책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거니와 더불어 저자와 내공까지 짐작할 수 있다. 


서평의 핵심인 평가, 평가의 핵심은 맥락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맥락화를 잘 해왔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책 한 권 읽고 그 책에 대한 요약과 평가를 하는 데도 벅찼으니까. 일전에 아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데, 내 서평에 없는 게 있다면 다름 아닌 맥락화라고 말이다. 맥락화가 기본이 되는 (석사)논문을 기똥차게 잘 쓴 아내가 한 말이었으니 맞는 말일 텐데 애써 무시하고 지금까지 왔다. 지금에라도 나는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책 읽는 모두가 서평을 쓰자


'책으로 세상을 바꾸자'라는 모토는 아직 변함 없고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으로 세상을 바꾸자'일 텐데, 그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책도 읽지 않는데, 서평은 무슨 서평... 물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의 서평 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했고, 이제 막 글도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혼자서는 아무리 수천 편의 좋은 서평을 써도 세상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라면 어떨까? 우리 모두 좋은 서평을 쓰고자 한다면? 그래, 좋다. 한 발 물러나 우리 모두 서평을 쓰고자 한다면 어떨까? 저자도 말했듯이, 저자와 독자 사이의 위계가 사라지고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는 분명 '사회를 번혁하고 세상을 바꾸는' 혁명에 다름 아니다. 


내가 꿈꾸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그려왔던 '바뀐 세상'의 모습 말이다. 내가 이 얇지만 강한 책에서 발견한 가장 빛나는 생각은 서평이 무엇인지, 서평을 왜 써야 하는지,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아닌 '서평이 가야할 길'이다. 이 책은 나에게 '모두가 서평을 쓰는 그 날까지 난 서평을 쓰겠다'는 일념을 새롭게 심어준 것이다. 정녕 열심히 쓸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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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표지 ⓒ책세상



'철학'은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굳이 멀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마느 그 어떤 학문보다 우리와 먼 게 사실이다.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와중에도 철학은 그 고고함을 꺾지 않는다. 가까이 오라 손짓해도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철학이 생겨난 고대, 철학은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곧 철학이었다는 것이다. 지혜 추구가 주요 목표였다. 하지만 17~18세기 자본주의 형성과 시민사회 성립으로 근대가 시작되며 함께 등장한 근대 학문 하에서 철학은 삶에서 멀어졌다. 근대 철학자들은 학문과 기술과 경제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철학은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지극한 '학문'이 된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철학이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고 했다. 20~21세기의 '아픈 시대'에 이보다 더 정확하게 철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 말이 있을까. 이 말은 전언과 다름 없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철학은 학문에서 다시금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직접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이라 한다면, 이는 '삶의 기술'로 요약할 수 있겠다. 혹자에게는 이 움직임이 철학을 삶의 기술의 하나로, 즉 '삶'이라는 하찮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려는 걸로 보일 수 있겠다.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이 살기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이다. 


삶의 기술 철학 권위자 빌헬름 슈미트는 오랫동안 이를 천착해왔다. 그의 주요 저서 또한 <삶의 기술 철학>이라는 책인데, 우리는 그 요약판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책세상)으로 손쉽게 그 정수를 접할 수 있다. 앞의 책에선 18개 장을 통해 15개의 기술을 선보였던 바, 이 책에선 3개의 기술을 추가했다. 


"철학적 숙고는 삶의 기술에서의 기술에 대해, '숙련된 삶'에 대해 그리고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한몫을 할 수 있다.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사항들을 발견하고, 조건들을 숙고하고,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삶이 처한 상황을 해명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11쪽)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공감되는 것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은 일관성 있게 나열되어 있지만, 격렬히 공감되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다. '습관'을 삶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기법 중 하나로 본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동안 습관에 자기계발 요소를 듬뿍 담아 참으로 많은 저서들이 나왔는데,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애초에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철학의 자기계발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기술의 주체는 수련과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가장 기초적인 기법으로 습관을 들며, 타율적 습관이 아닌 자율적 습관이 진정 의미 있는 형식의 습관이라 말한다. 탁월한 능력을 양산하는 습관, 모든 게 완벽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칸트가 모든 습관의 위험한 적대자로 삼은 '관성의 법칙'이다. 정착된 습관은 아무런 수고 없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한대,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울증'으로 불리며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된 멜랑콜리를 삶의 기술 철학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주장하는 '피로사회'와 닿아 있는 면이 있다. 심하게 낙관적인 보편적 정보와 소통의 문화에서 의미가 생긴 세계에 대한 무상함의 의식으로서의 멜랑콜리, 활동의 과잉이 낳은 활동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과 정반대에 위치한 무력감 충분한 멜랑콜리. 


한때 멜랑콜리가 트렌드처럼 젊은 층을 휩쓴 적이 있었는데, 다분히 반(反)세계적인 생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세계가 한없이 오르막일 때에도, 한없이 내리막일 때에도, 다를바 없는 무한 활동과 긍정이 모두를 압박할 때였다. 아마 이전까지 찾을 수 없는 막강한 압박이었을 테다. 그 반대급부로 생겨난 질병인 멜랑콜리. 이제는 당당히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받아들이기 힘든 것


끝간데 없는 긍정이 아무리 철폐되어야 한다고 해도, 일부러라도 부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긴 힘들다. 현대적 인간이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힘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항상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조금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같은 주장을 하는 한병철의 접근과 성찰과는 차이가 있다.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하며 얻는 병리현상을 말하기 위해, 한병철은 긍정의 폐해을 주장했지 그저 부정을 말하진 않았다. 반면, 저자가 주장하는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멜랑콜리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은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볼 요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라는 건 인생 자체를 바꾸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함부로 해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어떤 깊은 접근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을 살라는 주장은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으며, 죽음을 상정함으로서 삶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직 삶 속에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죽음의 재발견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지게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라도 죽음을 체험한다. 궁극적으로 죽음에의 집착을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삶의 지식 역시 죽음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 죽음은 삶을 그늘지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다." (106쪽)


'아름다운 삶'과 '나의 삶'


열거된 관점들로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기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명명백백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얼핏 저자가 앞서 주장한 바와 상반되는 것 같은데, 이에 저자는 쾌적한 것과 즐거운 것 등의 '긍정적인 것'과는 다른, 불쾌한 것,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 부정적인 것 등을 포함한 '긍정적인 것'을 뜻하다고 밝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삶의 기술을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과 맞닿아 있는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를 위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가 아닌 '성찰적 삶의 기술'이 형성 된다. '인간'과 '삶'을 위한 철학적 접근, 그 일환인 '삶의 기술'.


오히려 지극히 철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기에, 명백한 기술이 명명되고 방법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에도 편하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다. 철학을 '지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해석을 손수 살펴야 한다. 그 끝에 다름 아닌 '나의 삶'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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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쇄 미정>


<중쇄 미정> 표지 ⓒ그리조아



지난해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인 인기를 얻은 드라마 <중쇄를 찍자!>, 일본 만화 매거진 업계 2위를 달리는 대형 출판사에 입사해 고군분투를 마다 않고 성장해가는 신입 편집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로서는 알 길 없는 일본만화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고 '편집자'라는 더더욱 알 길 없는 직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 그 새로움이 많이 와닿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학계간지와 단행본을 양립하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지라,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새로움보다 일종의 동료로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며 한편으론 자괴감이나 자격지심도 느꼈으니... 나는 출판계의 99%를 차지하는 소형출판사의 일원이고, <중쇄를 찍자!>의 주인공는 굴지의 대형출판사의 일원이 아니겠는가. 재미와 공감과는 별개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의 소소하지만 피말리는 일상


이런 99%의 사정을 눈치챘는지 출판계의 99%를 차지하는 소형출판사의 이야기가 만화로 나왔다. 제목은 '중쇄를 찍을지 정하지 못했다'라는 뜻의 <중쇄 미정>(그리조아). <중쇄를 찍자!> 원작이 만화이거니와 중쇄를 찍자는 얘기이니, 다분히 노리고 나온 작품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만화는 굉장히 얇은 분량에 대사도 거의 없고 배경도 거의 없으며 스토리라 할 것도 없다시피 하다. 대신 소형출판사의 막내 편집자가 겪는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거의 없는 대사도 거의 출판계에서만 쓰는 전문 용어이기에, 초반엔 각주만 읽으며 지나간다. 그 자체로 편집자의 소소하지만 피말리는 일상이다. 


책 한 권을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편집자의 일, 말그대로 피말린다. 잘 팔릴 것 같은 책 기획, 밤새 작업해도 마감에 맞추기 힘든 일상, 3번이나 꼼꼼히 살펴도 보이지 않던 오자는 꼭 인쇄가 마무리되어 책으로 나와야 보이고, 서점이나 유통업체는 절대 굽히지 않을 고압적인 자세로 자존감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은 팔리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중쇄 미정>에 나오는 표류출판사보다 더더욱 작은 출판사에서 온갖 잡일부터 시작해 대형 진행까지 도맡아 한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3교'를 볼 시간도, 저자 관리나 서점 관리를 할 시간도, 오자 하나에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자문도 할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게 있다면, '팔리지 않는 책'에 대한 고민은 항상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책 팔아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는 씁쓸하고 충격적인 깨달음


만화에 나오는 표류출판사는 지난 한 해 '중쇄'를 찍은 책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중쇄를 찍는다는 건 비로소 '본전 치기'를 했다는 뜻(중쇄를 찍으면서도 돈이 들기에 완전한 본전은 한참 멀었지만). 초판 1쇄를 찍을 때 총제작비에 맞춰 부수를 산정하기 때문인데, 사실 99%의 출판사들이 중쇄 찍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시간이 갈수록 초반 부수가 적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2000부를 찍으면 많이 찍은 거라고 봐야할 정도이다. 그 수치는 앞으로 점점 더 작아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제는 중쇄를 찍어도 본전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다. 소형출판사의 앞날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표류출판사의 편집장은 참으로 멋지다. 아니면 의지가 박약하거나 내려놓았거나. 주인공인 막내 편집자에게 조언하길, '천 권만 팔리는 책도 만들어야 해. 만 권이 팔리는 책의 독자는 천 권만 팔리는 책을 안 볼 테니까. 우리는 그런 독자들이 책을 보게 해야 할 의무가 있어.' 혹자에겐 자본주의 시대에 적자만 늘어나는 소형출판사 편집장이 늘어놓는 궤변이자 자기 위안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공감이 가는 건 사실이다. 


자력으론 절대적으로 만 권 팔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애초에 천 권만 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젠 '책 팔아 돈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깨달음, 책을 펴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명감밖에 안 남았다는 깨달음. 이 쓸씁하고 충격적인 깨달음을 만화는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아기자기까지 하다. 


편집자란 무엇인가, 출판이란 무엇인가


매일 매순간에 편집자의 일에 대한 자괴감이 따라온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뒤따른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사명감으로도 지탱할 수 없을 때가 올 텐데. 표류출판사의 사장처럼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그때 회사 식구들은? 내 가족들은? 우리 출판계는? 독자는?


경력이 조금 쌓인 지금은 덜하지만, 혼자 끙끙대며 밤새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초판 부수를 만 단위로 고민하는 출판사의 이야기인 <중쇄를 찍자!>는 이런 나의 고민과 두려움에 절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었다. 반면 <중쇄 미정>은 비록 고민과 두려움을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오게 했지만 상당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심지어 강 건너 일본에서도 하는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열심히 책을 만들고 어떻게든 팔아보겠다고 이것저것 해보는 수밖에. 하지만 그건 모든 출판사에서 나보다 훨씬 열심히 치열하게 하고 있을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버틴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지 모른다. 지극히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의 일이니. 그저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맞는 말 같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이다. 요즘 들어 책에 관한 책이나 출판사에 관한 책, 편집자에 관한 책에 전보다 많아진 것도 그 일환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닌가.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창'에 불과한 편집자, 책의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집자의 이야기를 말이다. 여기까지 왔다. 아니,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여기까지 온 게 당연할지 모른다. 


이 책은 '소형출판사'의 편집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형출판사의 '편집자'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판사 관계자는 물론, 일반 독자분들도 한번 보시면 좋을 듯하다. 이 책 또한 작디작은 출판사에서 홀로 옮기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영업하고, 펴낸 이가 작업한 책이니만큼, 보는 것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은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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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핸드 투 마우스>


<핸드 투 마우스> 표지 ⓒ클



35여 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잘' 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여기서 '잘'은 부유하다는 말이니, 정확하게는 부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겠다. 그 생각이 깊이 박히게 된 연유는 다름 아닌 'IMF', 당시 중학생이었기에 피부에 와닿진 않았지만 엄마가 사주는 신발 브랜드가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했을까?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던 것 같다. 다만, 부모님 직업이 친구들 대다수의 부모님과는 달랐기에(동네 구멍가게), 거기서 느껴지는 기시감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전혀 모자람 없이 컸다. '잘' 살진 못했지만 '가난'하진 않았던 거다. 뭐, 가난하면 어떠랴. 나중에 부자되면 되는 거지. 


가난이란 뭘까. 이제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수준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세상, 하나의 계층이 된 것이리라.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수렁이 바로 가난이겠다. '내가 가난해도 내 자식은 부자가 될 거야.' '지금은 가난해도 나중엔 괜찮을 거야' 같은 생각은 현실화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난'을 모른다. 진짜 가난이 무엇인지. 옛날 옛적 말고 지금. 


당사자가 말하는 빈민층의 처절한 생존 일기


파트타임 일자리 두 개를 뛰며 풀타임으로 일하는 남편과 함게 두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백인 여성이 있다. 그녀는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빈민층'이다. 어느 날 자주 가던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어째서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파괴적 행동을 하는 걸까요'라는 질문에 '어째서 나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는가, 또는 '빈곤'에 관한 생각'이라는 제목의 답글을 썼다. 생각지 못한 폭발적 반응, 오래지 않아 책을 쓴다. 


<핸드 투 마우스>(클)는 그녀의 첫 번째 책,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베스트셀러 <노동의 배신>의 정식판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이 저자가 3년 동안 워킹 푸어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 이야기로, 빈곤 문제를 조명하기 위해 체험한 것인 반면 <핸드 투 마우스>는 저자 본인의 삶 자체를 보여주며 빈곤 문제를 처절하게 드러낸다. 앞의 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그렇지만 훨씬 더 처절하다. 


이 처절한 '생존 일기'는,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공감을 주진 못하는 것 같다. 그건 괴리감, 거리감 내지 구별 짓기 비슷한 느낌 때문일 거다. 그녀가 빈민층이고 내가 빈민층이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그녀의 투쟁적이고 때론 자아비판적 때론 자아옹호적인 글쓰기 때문이겠다. 


르포 형식으로 빈민층의 삶을 체험하는 건 그저 혀를 끌끌 차고 자유롭게 비판하며 볼 수 있지만, 당사자의 목소리에는 함부로 접근할 수 없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빈민층의 처절한 삶을 굳이 당사자의 목소리로 듣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과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충격적으로 본 터라 이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이에게 섹스는 돈이 안드는 최고의 놀이?


저자에 의하면 미국에서 최저임금이나 그 미만을 버는 25세 이상의 성인이 8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보다 조금 더 버는 수준. 그 어떤 계산식으로도 제대로 살 수는 없다. 살아남을 수는 있을 정도, 그게 다다. 그녀는 처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처절하다는 건 몹시 처참하다는 뜻인 바, 빈민층의 삶 자체를 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준 만큼 번다'라는 일념 하에 절대로 의무보다 더한 헌신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그녀의 말이 정녕 처절하게 다가온다. '회사를 내 집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라'라는 팁은 개나 줘버려야 할 것 같다. 그녀 앞에서 내 의식이 조금이 무너져 내린다. 


다른 의식이 눈을 뜬다. '진짜 가난'이라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좋은 건강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는 저자의 말을 본 순간, 그녀는 그 가격을 낼 수 있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을 본 순간, 그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비록 미국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뒷통수가 시끈거린다. 


담배와 섹스를 말할 땐 가난의 또 다른 면모가 보였다. 가난을 일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 적어도 그녀는(그녀는 시종 일관 계속해서 강조한다. 자신이 모든 빈민층을 절대 대변하지 못한다고)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피고, 돈이 들어가지 않는 최고의 놀이이자 사치의 일환으로 섹스를 한다고 말이다. 특히 섹스에 대해서 저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진짜 가난한 이에겐 엥겔지수도 무의미하다


'엥겔지수'라는 게 있다. 총 가계지출액 중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데, 저소득 가계일수록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고소득 가계일수록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낮다는 것이다.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식비를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떨까. 


저자는 일단 치아 상태가 완전 꽝이란다. 말그대로 돈이 없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라고. 또 임신을 했을 때는 돈이 없어 보험도 들지 않아 '정신 나간 년' 소리를 들었다고. 제대로 꾸며본 적이 없어서 글이 뜨고 난 후 인터뷰를 하러 다닐 때 엄청 애를 먹었다고. 


그럼에도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 한편 '굶주림'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펼치며 '어른들이 먹을 수 있는 보통 음식을 아이들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 씁쓸함을 금하기 힘들다.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것조차 상상하기 힘든 빈곤의 현실. 


사실 저자는 이제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고 한다. 그녀가 올린 글이 좋은 반응을 받고 이 책을 내고는 지구의 절반을 다니며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누렸단다. 식당 주방에서 일하지 않은 지는 3년이 되었다고. 그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길을. '천절하고 상냥해지자. 베풀고 현명해지자.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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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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