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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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민음사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세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본문 9쪽)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첫 단락이다. 이 소설의 축약이자 주인공 김지영 씨의 이때까지 삶의 축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세른네 살 전후의 일반적 여성 삶의 축약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데, 점점 평범하기조차 쉽지 않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를 반추해볼 때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 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삶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삶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삶을 배제하고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읽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김지영 씨의 삶에 교집합 하나는 있을 거고, 공감 하나쯤은 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무시한다.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던 소설 문법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다. <82년생 김지영>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또는 보고서 같다. 소설 같진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사교양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10년 동안 일한 경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김지영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증세가 계속되자 결국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를 정신과에 데리고 간다. 김지영 씨의 삶을 돌아본다. 비로소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누군가가 김지영 씨의 삶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니 소설 자체가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콘셉트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연히 이 점을 인지했을 터, 김지영 씨의 삶이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못박아 두려는 의도다. 사실 굳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아도 김지영 씨의 삶은 수많은 보편들의 합집합이다. 마치 <전원일기>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사실감도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사랑을 받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김지영 씨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여성의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궤적에서 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다. 김지영 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 '남'동생과의 차별이고, 삶에서의 수많은 그때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대답을 삼키고 그만두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고 특수한 상황이어야 하지만, 우린 굉장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저 '우리 이야기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구나' 하며 공감어린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 긴장 없이 읽기가 너무 쉽고 다음다음이 예측되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이 소설을, 딱 그만큼만 문제의식을 지니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할 게 더 많다. 그녀의 삶에서 특수한 부분을 많이 느낄수록 이 사회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이 더 옭아맨다


김지영 씨는 치료를 잘 받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은 부정한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피력한다는 것 자체를, 그런 시대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다. 소설은 끝나지만, 여전히 김지영 씨는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했다. 그러고는 아마 꼭꼭 숨겨놓았던 말, 여자로서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상징성이다.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찾으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게 뻔하다. 반면, 이대로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하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변화에 큰 일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마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가 껄끄럽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게...


그녀가 다른 누군가로 빙의해서 하는 말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의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의 엄마가 그러한대, 시댁에 가서 김지영 씨에게 빙의한 그녀의 엄마가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라고 말하고 곧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김지영 씨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엄마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소설이 그 방도를 생각해내진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으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보다 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여기까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방법을 생각해내는지는 수많은 김지영의 몫일 것이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도 방도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변하는 듯해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변형된 형태로 폐해가 잔존하는 것 같다. 수많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대현이 해야 할 일도 물론 많다. 많은 남성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김지영 씨 담당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어설픈 페미니즘을 지니고 있을 줄 안다. 어설플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아니면 제대로 동조를 하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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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 여름>


소설 <그 여름> 표지 ⓒ아시아



'동성애'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난 4월 25일 4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확고한 대답에 대선 주요 이슈를 넘어 사회 전체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지만, 동성애 차별은 반대한다는 대답. 


감히 말하지만, 위 세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 동성애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거나 반대하거나 반대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 내에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성애 차별 또한 동성애를 특별 취급한 말이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는 대답이 맞지 않은가, 싶다. 동성애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봐왔다. 특히 영화와 소설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 동성애 반대나 혐오를 반대하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성애가 이슈화되지 않는, 동성애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콘텐츠를 봤으면 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낸, 데뷔 4년차 신인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 소설 <그 여름>. 


소설은 두 주인공 김이경, 이수이의 신(新)고전적 서사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다. 이들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이지만, 우린 어느새 이들이 그런 관계라는 걸 잊고 만다. 그리곤 그저 이들의 사랑을, 청춘을, 서사를 따라갈 뿐이다. 그 기점은 이들의 사랑이 확고해지는 시점이다.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본문 28, 30쪽)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우연한 사고로 처음 만난다.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의 얼굴이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까지 났고, 그들은 함께 양호실과 안경점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이경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수이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둘은 서로 강렬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선이 갔고 몸이 반응했다. 


스무 살이 되며 둘은 서울로 갔다. 이경은 서울 중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수이는 서울 외곽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변함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단단한 사랑은 이경의 예감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언젠가 수이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예감. 그 기저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수이에 대한 이경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경에게 은지가 다가온다. 아니, 이경이 은지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이경이 생전처음 사랑을 해본 이는 다름 아닌 수이, 하지만 생전처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 당사자는 은지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이 당연하듯 다가왔듯이, 이경과 은지의 끌림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이다. 다만 소설에서 남자를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성인이 되어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수이가 남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랑의 당사자일 뿐이다. 


갈 길 먼 인식의 변화, 이 소설로 시작


단편에 메시지가 있기는 쉬운 반면, 서사와 분위기가 존재하긴 힘들다. 구현해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여름>은 서른넷의 이경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의 '그' 여름을 시작으로 십삼 년 전까지의 일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형식을 띄기에 서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서사 덕분에 이들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특별한 동성애'적 사랑이 '평범한' 사랑으로 치환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과 평범한 사랑의 만남이 있다. 이경이 느끼는 사랑, 거기엔 누구나의 사랑도 있고 이경 만의 사랑도 있다.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을.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문 106쪽)


급기야 '내'가 겪었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환희를 느끼고 아프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포함한, 이경과 수이와 은지를 포함한, 누구나의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이 동성애적 요소로 동성애가 아닌 '애(愛)'를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고, 나아가 그 선택을 문학적 실력으로 잘 살려나갔다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인다운 패기가 아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번뜩였다. 


그럼에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나라의 인식은, 시대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쟁 거리가 될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동성애인데, 첨예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한심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앞으로도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동성애적 요소가 점철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우선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름>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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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웨스 앤더슨 컬렉션>


<웨스 앤더슨 컬렉션> 표지 ⓒ윌북



2014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영화 한 편이 나왔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 역사상 '가장 예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어느 누구도 한 번 보면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웨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을. 엄청난 감독들이 많지만, 그는 단연코 눈에 띈다. 


나는 웨스 앤더슨 영화를 얼마 전 <문라이즈 킹덤>으로 처음 접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았다. 그의 최근작 두 편을 본 셈인데, 어쩐지 그 이전 작들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버렸다. 너무나도 예쁜 영화들이지만, 모두 비슷하게 너무나도 예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 한 권으로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그의 모든 작품(20년 동안 불과 8편이다!)을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한 웨스 앤더슨이 유일하게 모든 걸 드러냈다는 책, 웨스 앤더슨을 가장 잘 아는 평론가로 유명한 매트 졸러 세이츠가 일종의 인터뷰어가 되어 이끌었다는 책, <웨스 앤더슨 컬렉션>(윌북)이다. 


먼저 책의 외관과 디자인적 요소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웨스 앤더슨 책 아니랄까봐 완벽하게 짜 맞춰진,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예쁨'을 선사한다. 책이 아니라 아트 상품이라고 생각되는데, 진정 '폼 난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지 디자인도 장마다 철저하게 통제된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미(美)'를 선사한다. 누가 봐도 웨스 앤더슨 책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제외한 웨스 앤더슨의 일곱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논하는데, <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넌바움>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다즐링 주식회사> <판타스틱 Mr. 폭스> <문라이즈 킹덤>이 그것이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개봉조차 되지 않아, 팬이 아니라면 익히 들어보지 못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앤더슨과 세이츠는 절반 이상 알지 못할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앤더슨의 작품 세계와 스타일과 개인 이야기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화 역사, 감독, 음악가, 미술가, 작가는 물론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 방대한 예술 세계를 총망라한다. 그럼에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건, 팬들에게는 앤더슨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좋을 것이고 그냥 책이 예뻐서 집어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는' 웨스 앤더슨 월드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닌, 앤더슨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던 사실들을 수정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그를 오해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한 치의 오차 없이 웨스 앤더슨의 철저한 통제 하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 영화를 본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데, 앤더슨은 책을 통해 그 오해 아닌 오해를 해명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겠다. 


웨스 앤더슨 曰 "이 사건이 이렇게 벌어지면 더 슬프겠군, 혹은, 여기에서는 한 번에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겠군, 이렇게 하면 관객한테 효과를 줄 수 있겠어, 지금이 몇 월인지 알리는 것뿐 아니라 10월은 파란색 커튼에 나오고 그래서 이런 분위기라는 걸 알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알리고, 그러면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관객을 스토리에 끌어올 수 있겠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종의 추상화 같은 겁니다. 일부러 관객을 밀어 넣는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걸 느끼겠지' 하고 직갑하는 거죠." (본문 118쪽)


매트 졸러 세이츠 曰 "웨스 앤더슨 영화들을 보면 사람들이 만든다는 걸 늘 느낄 수 있죠. 작은 카메라워크 하나까지.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카메라가 팬 할 때에도 로봇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는 않아요. 사람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죠. 줌을 쓸 때에도 옛날 스타일로 기계를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정확히 계산된 게 아닙니다." (본문 259쪽)


앤더슨 월드의 정점


세이츠는 이 책에 소개된 7편의 영화 중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와 <문라이즈 킹덤>이 가장 좋다고 엄지를 치켜드는 것 같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앤더슨과 대화한다. 그렇지만, 정작 웨스 앤더슨 월드와 스타일을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파트는 <판타스틱 Mr. 폭스>다. 영화 자체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거니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대화를 나눈다. 즉, <판타스틱 Mr. 폭스> 파트만 읽어도 앤더슨에 대해 상당 부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건 다른 말로 이 애니메이션이 앤더슨 월드의 한 정점이라는 뜻이다. 


<판타스틱 Mr. 폭스>는 웨스 앤더슨의 8개 작품 중 6번 째에 해당하는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다. 그가 구축해온 세계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명랑함, 장식적 디자인, 야한 유머, 세세한 것들로 가득한 구성,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시나리오와 연출, 음악으로 힘을 얻는 표현, 당당한 피날레. 그야말로 앤더슨 감수성의 끝이다. 세이츠는 이 작품을 두고,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용어로 감독의 형식과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앤더슨 학파의 입문서다'라고 평한다.


<문라이즈 킹덤> 파트도 또 다른 핵심을 찌른다. 다른 무엇보다 '영화'에 천착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의외인데, 앤더슨은 수많은 영화 감독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 고전인데 오손 웰스, 사티야지트 레이, 알프레드 히치콕, 프랑수와 드뤼포, 장 뤽 고다르 등이다. 이 파트에서는 <문라이즈 킹덤>에, 나아가 앤더슨 월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와 감독들을 깊이 있게 논한다. 상당히 깊이 있고 전문적이다. 


더불어 앤더슨 월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도 심도 깊게 논해진다. 책 전체에서 유일하다시피 한 음악 논의인데, 웨스 앤더슨 영화 하면 카메라와 화면과 캐릭터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평가되는 부분일 테지만 사실 음악이야말로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이 책 <웨스 앤더슨 컬렉션>을 두고 나는 '모두가 이해하거나 즐길 순 없는 용어로 감독의 형식과 주제뿐만 아니라 그 이면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앤더슨 월드의 모든 것'이라고 평하련다. 혹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빠져 있어서 섭섭하거나 아쉬움을 느낀다면 '웨스 앤더슨 컬렉션' 시리즈 1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윌북)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이 책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몸과 영혼을 모두 취할 수 있다. 


이제 고작 가장 최신의 두 편을 보았을 뿐이니, 곧 <판타스틱 Mr. 폭스>를 시작으로 앤더슨 월드를 여행해 보리. 고퀄리티를 자랑하는 8편 뿐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 예상한다. 함께, 세상에서 가장 예쁜 세계로 가보심이 어떠신지? 후회는 절대 없을 것이다. 대신 황홀한 여운만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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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월>


소설 <세월> 표지 ⓒ아시아



2014년 4월 16일,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참사가 발생한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탑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했다. 당년 11월에 결국 수색이 종료되었는데, 9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 여가 지난 2017년 3월 22일 드디어 세월호가 인양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참사 3주기가 지난 4월 18일에는 미수습자 9명 수색이 시작되었다.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색은 나라가 바뀌고 있다는 청신호일까? 그 청신호에 맞춰, 아니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많은 관련 책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나왔는데, 세월호의 그늘을 그린 이는 감히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출간한 방현석 소설가의 <세월>은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한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 엄마는 희생자, 아빠와 오빠는 미수습자... 다섯 살 아이만 혼자 살아 돌아왔다. 언론에서 소소하게 다뤄졌을 뿐, 많은 이들이 모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세월>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월호 베트남'으로 검색하면 겨우 몇몇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 실화가, 이 소설로 그늘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히 이 실화가 그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그늘, 베트남 이주민 가족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는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아니다. 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엄마 린의 아버지 쩌우다. 쩌우는 베트남 까마우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딸 린이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그는 마뜩잖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던 일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행동과 결정은 자본주의 물결의 한 갈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탄하고 한탄한다. 


그런 와중, 갑자기 딸 네가 제주도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농사 지으면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런데 그 소식은 곧 여객선 침몰 소식으로 점철된다. 자본주의 물결의 한탄이 자본주의 침몰로 갈 길을 잃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하고, 곧 잘못된 발표고 사실 구조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쩌우는 큰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쩌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축하를 받는다. 딸 린이 일주일 만에 건져 올려졌기에,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받은 축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을 간직한 채 하염 없이 기다릴 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딸이 거기서 죽어야 했는지, 사위와 외손자가 왜 아직도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소설이 주목하는 건,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목해야 하는 건,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겠다. 쩌우는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 가족이다. 기뻐하면서, 비참한 부러움과 기막힌 축하를 받으며, 끔찍한 기다림까지 교차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들은 이주민.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똑같은 목숨일진대, 차별 받는다. 


세월호 참사, 그 다양한 이야기와 진실의 시작


단편에 가까운 중편, 이 짧은 소설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라는 당대 최대 비극이라는 층위 아래, '베트남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더 깊이 들어가 그럼에도 존재할 '차별', 한편으론 한국은 물론 베트남까지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까지. 


각 층위의 갯수와 깊이만큼 스토리의 얼개가 얇고, 그러다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읽힐 여지도 많지만, 던지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고 깊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목적에 충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빨리 읽힐 뿐이다. 그러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층위가 보인다. 


큰 사건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명백한 한 쪽의 잘못과 한 쪽의 명예로움만으로 비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도 계속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오는 게 그 예다. 세월호 참사는 이제 3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세월>이 그 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롯해 일명 '베트남 3부작'을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한국과 베트남'의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우리가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진실이겠다. 마음 졸이는 한편 작가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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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몬드>


소설 <아몬드> 표지 ⓒ창비



우리 뇌에는 '아몬드' 모양의 중요 기관이 있다고 한다. 동기, 학습,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하는 '편도체'. 그래서 아몬드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사실 아몬드가 한자로 '편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아몬드. 


소설 <아몬드>는 작은 편도체와 각성 수준이 낮은 대뇌 피질을 타고난 아이 선윤재의 이야기다. 대신 그에겐 엄마와 할멈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 그런 한편, 선윤재와는 반대로 타고난 아이 곤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에겐 누구에게도 말 못할 어둠의 기억들이 있다. 이 둘의 만남과 성장은 강렬한 한편 눈물겹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치 못했다' 등의 식상한 감상평을 던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 있는데, 작가의 이력에 눈이 간다. 일찍이 영화평론으로 데뷔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계속 단편 영화를 연출해온 '영화통'이다. 


이창동, 유하 등의 작가 출신 영화감독이나 천명관처럼 영화감독으로의 궁극적 꿈을 꾸는 작가는 익히 봐왔지만, 영화감독 출신 작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설 같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소설을 더 반기는 추세에 적잖은 이점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은, 안 된다


소설은 날카로운 아픔으로 시작한다. 유일한 혈육들이 피칠갑으로 살인당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나, 윤재. 그러곤 그 유일한 혈육들인 엄마와 할멈과 나의 끈끈하면서도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윤재는 태어나길 감정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마와 할멈은 그에게 좋은 감정을 끝없이 불어넣어준다. 


시작부터 예고된, 홀로된 윤재. 어린 그지만, 역설적으로 감정이 없기에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그의 곁으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 다가온다. 엄마와 친하게 지냈다던 건물주 심박사를 비롯해, 풍부한 감정을 지녔지만 어둠의 기억들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곤이, 그리고 윤재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장본인 도라. 


우린 이들의 모습에서 무감정이 주는 '편리함'과 감정이 주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윤재의 무감정과 무표정이 부럽고 따라하고 싶어 진다.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넘겨 집으려 하지 않는, 아니 못하는 윤재가 오히려 소통과 공감을 울부짖는 이 시대에 일종의 '해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고 또 알고자 하고 느끼고자 하는 지금, 이 감정과다의 시대에 '무감정'과 '무관심'이 나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감정이 없는 게 편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해답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일까. 결국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될 무감정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일까. 거기에 함정이 있다. 한도 끝도 없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결국 무감정과 무관심이 우리를 좀먹는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다


소설은 다분히 '성장 소설'로서의 콘셉트다. 전체적 느낌은, 성장 소설의 대명사 <데미안>보다는 또 다른 대명사 <호밀밭의 파수꾼>에 가깝다. 세상의 표준과는 너무도 다른 주인공, 그는 혼자다. 하지만 그에겐 빛과 같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 덕분에 세상의 표준과 가까워진다. 아니, 표준과 다른 것도 표준의 하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아몬드>는 또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뜬금없다고 할 만한 마무리도 닮았다. 다름 아닌 빛과 같은 존재와의 해후, 그리고 변화. 한 단계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곁에 두고 가끔씩 다시 읽어도 하등 지루할 것 없는 전개와 읽는 이의 마음을 영원히 어루만져줄 것 같은 따스함은 조금 엹다. 


우린 아마 풍부한 감정을 가졌을 거다. 그래서 제대로 감정을 '배운' 적이 없을 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게 윤재가 감정을 배우는 모습이었는데, 굉장한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상당히 불쾌하기까지 했다. 책장을 덮으면서 그런 마음은 거의 없어졌다. 감정을 배우진 않더라도, 감정을 소중히 여기며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인간은 머리가 온전히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만, 가슴이 머리를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린 내 감정은 물론 남의 감정도 잘 다루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잘 못 다루기도 한다. 감정을 배울 필요도 있는 것이다. 윤재의 무감정이 부러웠다가, 감정을 배우는 윤재가 부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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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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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단 아이돌론>


<문단 아이돌론> 표지 ⓒ한겨레출판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이 자랑하는 자타공인 전 세계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지명되며 대중적 인기와 함께 비평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다. 지난 2월 24일 일본 현지에서 출간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인기에 완벽히 부합하며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초판 인쇄 부수만 자그마치 130만부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다. 


1979년에 데뷔해 데뷔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여전히 남녀노소 불문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하루키론'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건 물론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번 상반기가 가기 전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하는데, 그에 맞춰 하루키를 다룬 하루키론 책들이 나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나올 것 같다.  


그중 하나가 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한겨레출판)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나왔으니 15년이나 지난 책인데, 그것도 책의 주제가 1980~90년대 일본 문단의 주요 작가라는 점을 볼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상륙에 맞춘 출간이라고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책이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뜬금없다고 느낄 순 있을지언정 허투루 별 것 아닌 책을 낸 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독특한 해석과 유머러스함이 빛을 바란다. 많은 책을 낸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엔 2006년에 나온 <취미는 독서>라는 책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나마 그 책도 절판되었단다. 소설, 소설가, 문단, 문화, 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만한 저자이다. 


RPG 게임을 연상시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


저자가 소개하는 문단의 아이돌들은 모두 8명. 그중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들은 5명 정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이들은 2명 정도다. 다름 아닌 '두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다. 저자는 하루키를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 시기에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를 냈던 작가 중 하나로, 류를 '작가'라는 틀을 넘어 폭넓은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펼쳐온 지식인 중 하나로 보았다. 


사실 하루키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단 아이돌'의 핵심이다.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잘 논해지는 작가이기 때문일 테다. 저자는 하루키의 판매량 수수께끼는 제외하고 '왜 그토록 잘 논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롤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킨다. '하루키 퀘스트'. 하루키 작품은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키가 작품에 그런 요소들을 숨겨놓고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저자는 하루키 작품 해석을 게임에 맞춰 소개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 또는 비평가의 레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벨 1은 분위기 비평이다. '나는 이 문체가 좋아, 이 세계관이 좋아'라며 어린아이처럼 써 내려가는 것. 레벨 2는 퍼즐 풀기다. 하루키 월드에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기에 그에 대한 해설을 써야 한다는 것. 쓸데없이 복잡한 '본격적 비평 시대'의 시작이다. 레벨 3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수수께끼 풀이 기계 같은 사람이 비평 아닌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 레벨 4는 공략본의 출현이다. 비평이 아닌 해석에만 매달린 이가 써내려간 하루키 퀘스트의 공략본이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매 작품마다 그렇다. 사실 가장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은 이런 면에선 가장 덜 궁금증을 자아낸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알 법한 하루키 월드의 진정한 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 팬들은 이 소설들을 읽으며 'RPG 게임'을 해왔던 거다.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교당하는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 우리나라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그 인기가 확실히 떨어진다. 단적으로 서점에서 이름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하루키 관련 책이 200여 권 정도인 반면 류 관련 책이 100여 권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현재 절대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비슷하다), 단지 '무라카미'라서 비교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일본 현지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하루키 월드뿐만 아니라 '류 월드'도 확연히 존재한다. 그 특징은 '조잡 파워'와 '와이드 쇼'로 정리할 수 있단다. 아마추어리즘의 힘으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켜 특별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대중적인 텔레비전 뉴스의 시대를 읽는 센서와 시대를 읽는 센서가 특출나게 발달했다는 것.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진단한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빨리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루키와의 비교는 일본에서 엄청나게 오랜 시간 계속 되어 오고 있는데, 저자는 두 무라카미의 비교론을 의심스러워 한다. 만약 둘 중 하나의 이름이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정도까지 비교를 했을까? 그리고 의외로 무라카미 비교론자들은 모두 결국엔 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루키에 비해선 류의 작품에 비평적인 요소가 더 잘 소화되어 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이항 대립의 도식은 하등 의미 없고 소모적일 수 있다는 것. 


하루키와는 다르게 류의 작품을 거들떠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영화로 옮겨진 소설 <69>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는 정도? 아마 저자의 말처럼 류를 보는 시선이, 단순히 소설가 이상의 그 무엇, 지식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일까.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1980년대의 일본, 우린 지금도 따라가고 있다


이밖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 '우에노 지즈코', '다치바나 다카시' 등도 거론된다. 대부분 저자의 빼어난 촌철살인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히 '지식의 거인'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광으로만 알고 있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여성차별을 위시한 '여성과 어린이 문제'는 상당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여성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차치하고,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한 축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대에만 10여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저자는 이 역시 날카롭기 그지 없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녀를 두고, '남자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음에도 남자 사회 내에서 앉을 자리를 확보했으며, '인텔리=양갓집 자제'를 위한 담론을 생산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고지식한 영감들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점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은 분명 작가 비평, 문예 비평의 성격을 띠지만, 1980년대 일본 사회 자체를 비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큰 틀에서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1부에서는 '거품 경제'를, 우에노 지즈코를 위시한 2부에서는 '페미니즘'을, 무라카미 류를 위시한 3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를 좆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호황과 불황, 페미니즘 유행, 지적 권위주의 파괴 라는 일련의 주제들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본 1980년대 일본은 그대로 1990~2010년대 한국이다. 전례 없는 호황이 지나 기나긴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되고 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시대, 여지 없이 지적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그림자를 따라기기 바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걸었던 길이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인 것인가.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도 한 번쯤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비평을 수단 삼아 우리가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갈 길을 목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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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동급생>


소설 <동급생> 표지 ⓒ열린책들



예술에 있어 '소품'과 일명 '작은 걸작'은 한 끗 차이다.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면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으며 2016년 최고의 영화로 우뚝선 <문라이트>는 제작비가 불과 5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품이 아닌, 작은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971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7년에 재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프레드 울만의 작은 소설 <동급생>(열린책들)이 재출간 40년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작은 판형임에도 13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소설은 어떨까. 그 자리에서 완주가 가능하기에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품을 가장한 작은 걸작이다. 


한스와 콘라딘의 꿈 같은 우정, 최선의 행복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을 다니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 슈바르츠, 1932년 2월에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소년이 전학온다. 저명한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 뭔가 '다른' 그 소년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는데, 함부로 다가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한스는 콘라딘이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한스에게 콘라딘은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한스는 콘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문학과 체육이라는 극점에 있는 것에서 말이다. 이내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 무엇도 그들의 우정을 방해할 순 없었다. 벽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표식이 나타났다든가 유대계 시민이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들겨 맞았다든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보였다. 


화가 출신 작가는 이들의 우정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표현해낸다. 암울했을 당시 독일과 대비되는 자연 풍경은 한스로 하여금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황홀함을 선사한다. 


한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그 시절은 횔덜린의 아름다운 시로밖에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다. 시에 일가견이 있는, 시인이 인생의 꿈이기도 한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횔덜린이기도 한대,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귀향>의 일부)와 같은 구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선의 행복을 표현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 정도였고, 한스의 가슴 속에 맺힌 행복의 이슬이 이 정도였다. 


마지막 한 줄로 위대한 소설이 되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종말이 코앞에 와 있었다는 걸.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종말의 전조들이었다는 걸. 1930년대 독일에서 독일 귀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독일을 당연히 조국이라 생각하고 그에 충성을 다하며 자연스레 '독일인'이어도,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졸지에 '독일을 망치고 있는 유대인'이 된 한스, 콘라딘과의 불가항력적인 멀어짐도 비슷한 이유였다. 급기야 콘라딘을 피하기 시작한 한스,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있어 미국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한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화한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산화한 동찰들 리스트를 읽어내리는 한스, 그곳에서 더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전체가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수렴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 한 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러곤 지체없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줄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다. 


한 층위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우정 또는 사랑의 총량이 이리도 엄청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다른 층위를 '동성애'라는 코드로 풀어내 더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이 소설 <동급생>은 어떨까. 한 층위는 비슷한 수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층위가 주는 수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다. 자신과 가족과 시대까지도 뛰어 넘는, 즉 모든 걸 뛰어 넘는 우정의 총량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 한 줄로 그 어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뛰어 넘거니와, 위대한 콘텐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홀로코스트 작품보다 큰 울림


이 소설이 어줍잖게 홀로코스트를 끼워넣었다면, 명백한 소품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동급생>과 굉장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비록 슬프고 아름답고 충분히 위대한 감동과 역설을 선사하지만 '작은 걸작'이 아닌 '소품'이라고해도 무방하다.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에서는, 생각보다 그 울림이 작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급생>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충격을 주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홀로코스트'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래픽노블 <쥐>,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위대한 작품들이 생각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파급력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더 심도 있고 치열한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동급생>은 홀로코스트를 작품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끔찍히도 와 닿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더 깊은 우정을 통해 많은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홀로코스트가 주는 절망감을 더 절절하게 전달하여, 더욱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랬다면 마지막 한 줄에서 받는 충격이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 그건 작품이 갖는 위치는 격하시키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였기에 이 작품이 위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탁월한 솜씨와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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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발자크의 식탁>


<발자크의 식탁> 표지 ⓒ이야기나무


이런 책, 좋다. 치열한 연구, 오타쿠적이기까지 한 관심과 열정, 종횡무진 오가며 확대재생산시키는 와일드함으로 무장한 책. 일단 뿌리 부분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겠다. 그에 못지 않게 가지나 잎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바, 보는 입장에선 얻을 게 무궁무진하다. 지식은 물론, 앎에서 오는 재미도 한가득이다.


앙카 멀스타인의 <발자크의 식탁>(이야기나무)이라는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뿌리 부분은 다름 아닌 '발자크'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소설가,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 말이다. 90편이 넘는 개별 소설들을 통해 당대를 완벽히 그려낸 방대한 소설 <인간 희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세계는 <인간 희극>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다. 여기에 '식탁'이라니. 발자크의 음식 사랑을 탐구하는 책인가, 싶다. 


막상 읽어 보면, 발자크가 아닌 발자크의 소설을 들여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 희극>을. 솔직히 말해, 발자크를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나 유명한 <고리오 영감> 정도? 하지만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럼에도 책에 손이 가고 글에 눈이 가는 이유는, (읽어보지 못한) 위대한 소설가와 음식의 만남 때문이다.


일단 이런 류의 '콜라보레이션'을 좋아한다. '딱'하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들의 만남은 많은 재미를 준다. 더군다나 관심은 지대하지만 막상 대한 적은 없는 발자크 아닌가. 발자크와 음식, 둘 다 따로따로 놔둬도 관심이 가는데 둘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그것도 지금의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배경 아닌가.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 희극>, 미식의 도시 파리가 보인다


저자는 발자크가 장갑과 돈과 음식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중 뜻밖의 것이 음식인데, 그는 미식가도 아니었거니와 제대로 된 식습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당대의 사회상을 짚기 위해서 였다. 그에게 음식은 영양 섭취 대상이나 미식적 대상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들에는 여지 없이 음식이 등장하는데, 인간 군상의 성격이나 재력, 집안 내력까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기 전, 파리에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 자체가 그다지 훌륭한 식생활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한 시기에 으레 그렇듯 신흥 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란한 시기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부를 함부로 과시할 수 없었기에, 도망간 황족들이 남겨두고 간 궁전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을 은근한 부의 과시 장소로 택한다. 프랑스 파리에 비로소 식산업다운 식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식의 도시 파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저자는 발자크가 이런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발빠르게 알아차리고 소설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가 <인간 희극> 속 등장인물들을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부터 가장 싸구려 레스토랑까지 찾아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 희극>은 파리 사회와 미식 문화에 대한 실용적인 보고서나 다름 없다. 발자크 소설이 곧 19세기 프랑스 파리였고,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곧 발자크 소설이었다. 저자는 발자크와 발자크 소설과 프랑스 파리를 종횡무진 누비며, 발자크를 읽고 싶게 만들고 나아가 파리를 여행하며 온갖 음식들을 먹고 싶게 만든다.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저자는 본격적으로 <인간 희극>에 뛰어 든다. 특별한 날,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그리고 침대까지. 들여다보면, <인간 희극>을 예로 드는 건지 당대 프랑스 파리를 예로 드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그만큼 발자크가 당대를 완벽히 파악하고 재연해낸 것이리라. 저자의 철저한 치밀한 연구도 한 몫 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음식과 함께 특별한 연회가 있어야 함은 상식이다. 하지만 당대, 특별한 음식과 연회(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막 '야만'의 식생활에서 벗어난 신흥 부자들이 뭘 알겠냐는 것이다. 그건 발자크도 마찬가지. 갓 습득한 예의범절과 겉치레는 음식과 술이 섞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발자크는 가장의 권위와 취향, 야망에 탐구를 바탕으로 특별한 날의 음식과 연회를 글로 옮겼다. 다분히, 인간 군상 중 하나인 '가장'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의 평범한 일상은?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의외로 <인간 희극>을 통해 프랑스의 중심인 파리 사람들의 음식 이야기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 사람들이 열정 없이 음식을 먹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음식보다 사업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정보를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자크가 생각한 이상적인 미식은 신선한 재료를 쓰고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에 있다며, 평범한 식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시골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발자크에게 돈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와 음식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는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가 지나치면 살을 위협한다는 발자크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너무 잘 챙겨 먹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아버지의 지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를 구분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등장인물에게 엄격한 심판의 철퇴를 내렸는데, 악인이 아니라 해도 스스로 만들어 낸 집착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가 생각한 미식의 천국은,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이상적인 미식이듯 어머니의 손길로 만들어진 과도함 없는 디저트였다.


매력적인 창작 도구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자크는 음식을 소설로 옮겨왔다. 저자는 이를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데, 반면 발자크 이후에는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프루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식의 세계를 소설에 담았다고 한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굴의 맛을 감상하고 싶다면 모파상을, 노란 크림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꿈꾼다면 플로베르를, 소고기 아스픽을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럽다면 프루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석영중 교수가 지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 중 고골은 엄청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로 글쓰기 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이었다고 한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의 코드에 의존해 범속한 일상을 전달하려 했다고 하고 푸슈킨은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음식을 탐하지는 않아 그 소박한 식성이 소설 문체와 분위기, 주제와 소재로 나타났다고 하니, 발자크와의 접점이 보인다. 그들에게 음식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물 또는 살아가는 데 가장 자주 접하는 욕망 중 하나가 아닌, 그야말로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아니었을까. 


발자크에게 음식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었다면, 저자에겐 역사적 인물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는 것 같다. 전기 문학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 저자 앙카 멀스타인은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프루스트, 로스차일드, 메디치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되었다. 근래 출간 예정인 <프루스트의 서재>가 심히 기대된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창조 도구라고 해두자. 나와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 '책과 영화'다.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을 책과 영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내는 '음식과 공부'일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일 테고, 누군가는 사랑일 테며, 누군가는 더 디테일한 하위 개념의 무엇일 테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걸 '어떻게' '어떤 이유'로 사용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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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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