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 표지 ⓒ미래의창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세대를 규정짓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는 '58년 개띠' '386 세대'를 지나 '88만원 세대'와 'N포 세대'에 이르렀다. 일본도 마찬가지, '단카이 세대'를 지나 '사토리 세대'가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생소할 수 있다. 중국은 '링허우'라는 말로 50년대부터 최근 9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세대를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중국의 80년대생을 일컫는 '바링허우'는 특별한 함의를 지닌다. 1980년대 직전, 1978년 10월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상징하는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화와 개혁개방정책 노선을 결정한다. 중국사회는 완전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후 1가구 1자녀 정책 아래 태어난 바링허우들은 '소황제'라 불리며, 나라와 가정의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다. 


한편으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체제와 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50년대 이래 수많은 변화들이 거대한 틀 안에서 행해진 것이었다면, 80년대의 변화는 세상을 뒤엎는 경천동지격의 변화였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지만 엄연히 자본주의를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그들은 때론 갈팡질팡하며 헤매고 때론 탄력적 선택을 행한다. 


1980년에 태어난 바링허우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하나인 양칭샹이 그의 저서 <바링허우,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본주의를 살아가다>(미래의창)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바링허우 세대의 현실이다. 그들은 대부분 실패의 연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고단하게 살아가는데, 저자는 그런 한 세대 전체의 실패를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그건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 속 바링허우 세대


'슈퍼차이나' 시대가 도래한 지 이미 꽤 되었다. 2020년이면 세계 경제대국 1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 또한 이미 오래다. 엄청난 고속성장 시대가 지나고 성장 연착륙이 시작되었다지만 여전히 중국의 성장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파르다. 중국은 연일 환호하고 전 세계는 중국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앞서 말했듯 그 엄청난 성장의 이면엔 근본부터 뒤바뀌는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가운데에 다름 아닌 바링허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시대를 이끌고 시대를 주름잡는 이들이 있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건 '소수'의 그들이 아니다. 소수라고 소외받는 이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이 책이 바라보려 하는 건 '다수'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다. 변화한 시대를, 변화하고 있는 시대를, 결국 혼란스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책의 본문은 굉장히 짧은 편인데, 저자는 인문학자답게 사회인문역사적 비평론을 내세워 바링허우 세대를 조명한다. 


우선 자신 또한 바링허우 세대라 규정하고 자신의 피폐하고 어려운 일상을 풀어낸다. 무슨 짓을 하던 절대 살 수 없는 집, 이건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과거로 시선을 돌려 바링허우 세대가 역사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규정한다. 그들에게 역사는 무거운 게 아니라 가벼운 것이다. 


현재로 돌아와 바링허우 작가의 대표주자이자 중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한한'을 주목한다. 그는 저항의 상징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에 진정한 자아의식과 힘 있는 정치적 신조의 결핍 때문에 영혼을 뒤흔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반면 바링허우 세대의 대부분은 '침묵'한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현실은 피폐하고, 쉼없는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할 뿐이며, 역사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바링허우 세대를 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짊어져야 할 세대가 아닌가. 문제도 이런 문제가 없다.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개인의 실패감과 역사 허무주의, 거짓과 허장성세가 사회와 역사로부터의 일탈의 구실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실패감을 초월하고 다시금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강의와 서술, 글쓰기로 그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런 행위들을 현실적인 사회 실천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본문 137~138쪽 중에서)


굉장히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주장인듯, 정확히 핵심만 짚어 해야하는 것들을 말한듯, 모호한 결말이긴 하다. 내가 받아들이기엔 이렇다. 규정된 세대론에 갇히지 말고 직접 자신의 세대를 규정하라, 침묵하지 말고 저항하라,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조금은 더 명확해지지 않았나 싶다. 


본문이 끝난 뒤 저자가 직접 바링허우 세대 5명과 각각 시행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책 자체로 보면 다분히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본문보다 이 인터뷰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같은 듯 조금씩 다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같고 친구의 이야기 같고 우리의 이야기 같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바링허우 세대에게는 진정한 청춘이 없고, 악세집단이며, 차별의 한 가운데 있으며, 희망이 없으며, 꿈을 꿀 수 없다고 말이다. 와중에 눈에 띄는 건, 잘 나가는 한 바링허우가 자신이 속한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인터뷰였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다수가 실패했다고 느끼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현상, 세대와 세대가 쪼개지는 건 물론이거니와 세대 내에서도 쪼개지고 양극화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 어찌할 것인가? 돌고 돌아 저자의 주장이 허무하게만 들리고, 앞은 깜깜하다. 역설적으로, 어떻게든 나 혼자라도 잘 헤쳐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굴뚝같아 진다.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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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카오스 멍키>


<카오스 멍키> 표지 ⓒ비즈페이퍼



'소설처럼 재미있다'는 말이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만큼 잘 어울리지 않고 통용되지 않는 장르도 드물 것이다. 아무리 읽기 쉽게 변형을 가한다고 해도, 기본이자 본질이 되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건 언제나 교훈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은 이야기가 아닌 사례에서 파생된다. 이야기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과 다르게, 사례는 그 자체로 수단이 되어 교훈에 목적이 있다.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혁신'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장르의 책들은 절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뜻의 혁신을 행하지 않는다, 못한다. 온갖 혁신적인 사례와 교훈을 들먹이며 혁신의 찬가를 불러대도 말이다. 


여기 '혁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책 한 권이 있다. 명색이 경제경영서이지만, 저자 자신의 삶과 저자가 몸담았던 월가 및 실리콘밸리의 민낯을 말그대로 낱낱이 파헤쳐 까발린 책 <카오스 멍키>(비즈페이퍼)다. 신기하고 특이하게도 이 책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면서 왠만한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보다 더 진득한 교훈이 있다.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아마 사실이겠지만,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매일같이 몇 시간이고 매달리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운영되어지는 실리콘밸리는 '똥구덩이'다. 그동안 수없는 내부고발로 이미 똥구덩이인 줄 잘 알고 있는 정치판이나 금융계완 달리 IT업계는 순수한 이들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저자의 삶으로 들여다보는 IT업계의 속살


책은 저자의 직업 일대기를 따라 진행된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삶을 내보이며 자신이 속했던 직업계의 모습모습들로 완벽한 '재미'를 주고 나름의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버클리라는 초일류는 아니지만 충분히 일류에 속하는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고 국제금융시장을 대표하는 투자은행 겸 증권회사 골드만삭스에 취업한다. 저자는 기업신용파생상품부에서 가격결정을 담당하는 퀀트였다. 


이 똥구덩이에서 여러 개새끼들과 함께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일을 해왔던 저자는, 우연히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에 관한 기사를 접하고 '애드케미'라는 회사에 지원해 입사하게 된다. 그곳은 수학을 이용한 광고 최적화 프로그램 개발사였다. 무너져 내리는 자본주의의 격랑 한복판인 월가에서 나름 격리되어 있고 외떨어진 IT업계야말로 최후까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기에 애드케미 또한 똥구덩이인 건 마찬가지, 얼마 못 버티고 엔지니어 두 명과 함께 스타트업 회사 애드크로크를 창업하며 그곳을 나온다. 그들은 실리콘밸리 최고 최대의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와이 콤비네이터의 우산 아래에서 회사를 시작하고 이끌어간다. 그야말로 모든 걸 내팽겨친 채 회사에만 매달려 열심히 하고 잘 하고자 그들에게 '트위터'가 접근한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했던 금액의 절반 정도밖에 제시하지 않는 트위터와의 협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페이스북에도 제안을 하고, 페이스북은 저자의 동료들이 아닌 한 명만 입사하길 원한다. 이에 애드크로크는 트위터에 인수당하고, 저자는 페이스북의 광고팀에 입사한다. 황당하기 그지없고 앞뒤 없는 무례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모습이란다. 이쯤에서 다시 나오는 똥구덩이...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하는 인간쓰레기들


65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절반쯤 도착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페이스북에서의 치열하고 황당하고 비열하고 당황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현재 전 세계 최고의 기업이자 가장 유명한 기업이자 누구나의 생활 속에 이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업이 있을 수 없을 만큼의 기적을 일구어낸 기업 페이스북.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2013년 전까지 페이스북의 수익은 한심할 정도였고 광고규모는 놀라우리만큼 작고 매력 없었으며 기성 관리 툴은 버그로 가득해서 쓰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사실 이 책의 절반 정도는 알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금융계와 IT업계에서만 쓸 법한 수많은 단어들의 향연, 당연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아주 빠른 속도로 읽고 큰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건 우리 모두가 알 만한 기업 페이스북과 역시 우리 모두가 알 만한 IT업계의 다양한 이름들 덕분이겠다. 물론 저자의 거침없는 풍자와 자학,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할 정도의 실랄한 내부고발과 실명비판도 큰 몫을 차지한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소시오패스론'이다. 


애플 창업 초기 핵심 동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을 비롯 직원들을 등쳐먹고 끝까지 착취했던 스티브 잡스, 경쟁자의 아이디어를 가로채 IBM에 Dos를 납품했던 빌 게이츠, 쌍둥이 형제의 아이디어를 훔쳐 비록 수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족히 수백억 달러를 버는 지금의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까지. 이들이야말로 대표적인 '카오스 멍키'다. 카오스 멍키는 서버가 늘어선 데이터센터에서 원숭이가 케이블을 뽑고 서버를 부숴 난장판을 만들듯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일부러 프로세스와 서버를 다운시킴으로써 그러한 공격에서 성능 저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실험하는 내부 결함 테스팅 툴로 넷플릭스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그 자신이 카오스 멍키나 다름 없는데, 책은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주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를 포함,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람과 회사들은 하나같이 '쓰레기'들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이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실리콘밸리를 이끌며 떠받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혁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아마 내부동력으로는 영원히 바꿀 수 없지 않을까. 


이들은 우리 모두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우리 자신과 하등 관련이 없다. 단순 물리적으로도 너무 먼 존재이고, 살아생전 절대 만날 수 없을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배우듯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듯, 실리콘밸리 신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형태가 그들로 인해 바뀌어 왔지 않은가. 단순히 그들의 대외적인 모습만을 숭배하며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의 대내적인 모습을 면밀히 검토하고 받아들일지 말 것인지 결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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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표지 ⓒ현암사



지난 10월 5일 발표된 2017년 노벨문학상, 그 영광은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에게로 돌아갔다. 그 직전까지 매년 치르는 한바탕 소동을 이번에도 되풀이 했는데,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겠다. 다름 아닌 고은 시인 덕분이다. 지난 2002년부터 장장 15년 간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고 있는 그 아닌가. 이미 많은 국제적 문학상을 수상해오며 그 문명(文名)을 전 세계에 알린 그가, 아이러니하게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로 가치 절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도대체 노벨문학상이 뭐길래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인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이긴 할 테지만 그밖에도 저명한 문학상이 많지 않을까 싶다. 또, 우린 우리나라 사람이 후보에 오르내리지 않은 문학상에 대해선 일절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작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뽑히는 부커 국제상에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선정되면서 국내에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올해는 물론 그 전까지 누가 그 상을 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줄 안다. 


책을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온다. 문학상은 분명 그중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옥석을 가린 측면이 있기에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유명 문학상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일본에서 건너온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현암사)으로 조금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세계 유수 8대 문학상을 들여다보다


책은 세계 유수 문학상 중 8개를 뽑았다. 자타공인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뽑히는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공쿠르상을 비롯 퓰리처상, 카프카상, 예루살렘상, 나오키상, 아쿠타가와상이 그것들이다. 다분히 일본의 입장에서 고른 것이니 만큼, 일본의 2대 문학상인 나오키상과 아쿠타가와상과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상했던 카프카상과 예루살렘상이 있다는 게 특이할 만한 점이지만 거기에 불만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이밖에도 개인적으로 아는 유수 문학상들에 국제더블린문학상, 펜포크너상, 전미도서상, 노이슈타트국제문학상 등과 중국의 마오둔문학상, 일본의 일본서점대상, 한국의 이상문학상 등도 있음을 알리며, 책에서 말하는 8개 문학상 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작가, 어떤 작품, 어느 나라의 어느 작풍이 주로 수상의 영광을 얻었을까 궁금하다. 


가장 유명한 '노벨문학상', 책은 이 상이 세계의 문학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실은 유럽에 상당히 치우친 상이라고 말하며 캐나다의 앨리스 먼로와 터키의 오르한 파묵과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비디아다르 나이폴을 소개한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데, 먼로보다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더 어울리며 파묵보다는 야샤르 케말이 더 어울린다. 나이폴의 경우 트리니다드토바고 출신의 인도계 영국인으로 '국민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쿠타가와상은 순문학 쪽, 나오키상은 대중문학 쪽에서 뽑는 걸로 알려져 있고 또 알고 있다. 거기에 영압하는 분위기인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다는 거로 저자들이 밝혀내어 해부한다. 영국의 맨부커상은 프랑스의 공쿠르상에 대항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노벨문학상을 뛰어넘는 최고의 문학상이라고 치켜세운다. 그해에 나온 영어권 작품 중 반드시 최고를 선정한다는 것이다. 이 책으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면, 맨부커상을 향한 기대와 믿음의 확실성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공쿠르상과 미국의 퓰리처상, 체코의 카프카상은 분명 세계 최고의 문학상들이지만 아무래도 지역적인 특색이 강하다. 아니, 강했었다. 점점 최근으로 올수록 수상 목록에서 보이는 세계화가 눈에 띈다. 오히려 노벨문학상의 지역적 특색이 상대적으로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상은 카프카상, 세르반테스상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거쳐가는 이미지가 강한데, 세계 유수 문학상 중 괜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만의 문학상 리스트


책에서 소개하는 작품(작가와 더불어) 24권 중 부끄럽기 그지 없지만 읽어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는 작품과 작가가 태반을 차지했다. 일본과 한국의 문학적 취향의 차이이기도 할 테고, 문학상 또는 전문가와 대중의 시선 차이이기도 할 테다. 상마다 3명의 전문가가 각각 한 작품씩 3 작품을 소개하는데, 역시 모두 알고 있는 건 노벨문학상이 유일했다. 작품을 접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름이라도 익히 들었던 기준으로. 


사실 여기서 소개하는 모든 상의 수상작가 작품을 적어도 하나씩은 읽어 봤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맨부커상의 윌리엄 골딩이나 살만 류수디, 공쿠르상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우엘벡, 나오키상의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나 온다 리쿠, 아쿠타가와상의 무라카미 류나 메도루마 슌, 무라타 사야카, 카프카상의 필립 로스나 옌렌커, 예루살렘상의 이언 매큐언이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정녕 수많은 작가와 수많은 작품들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을 드높이는 데 이용되고, 문학상을 통해 인생이 역전되기도 하며, 간혹 문학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한 작가이자 작품이지만 하필이면 함께 수상을 겨루었던 작가와 작품들이 역대급일 때 수상한 사례가 있다. 이는 문학상뿐만 아니라 많은 종류의 '상'에서 종종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 소견과 책에서 소개하는 전문가의 소견을 합쳐 책에서 소개한 작가들 중 각 문학상의 only one을 뽑자면 오르한 파묵, 메도루마 슌, 후나도 요이치, 마거릿 애트우드, 미셸 우엘벡, 줌파 라히리, 필립 로스, 이언 매큐언이다. 누가 읽어도 절대 후회하진 않을 만한 작가들이다. 


책에서 따로 정리를 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리스트의 공통점이 눈에 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주류'인데, 다양성, 외부의 시선, 낮은 곳에서, 문학상 취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작품들이다. 대담 주체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리스트가 신선했고 의미있게 다가왔다. 모든 문학상의 모든 수상자와 수상작을 알 필요가 없는 만큼, 또 너무나도 유명한 책들을 따로 알아내려 애쓸 필요가 없는 만큼, 이 책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를 통해 색다르지만 수준높은 문학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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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응웬 옥 뜨의 <미에우 나루터>


응웬 옥 뜨 소설집 <미에우 나루터> 표지 ⓒ아시아



벌써 10년 전입니다. 2007년, 베트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설 한 편이 한국에 상륙합니다. 2005년 출간한 소설집 <끝없는 벌판>으로 베트남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응웬 옥 뜨의 <끝없는 벌판>(아시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베트남 소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었죠.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90년대에 출간되었다가 2012년에 아시아 출판사에서 재출간), 반 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응웬 반 봉의 <하얀 아오자이> 정도의 이름 있는 베트남 소설이 눈에 띕니다. 여하튼 <끝없는 벌판>은 베트남에서처럼 국내를 응웬 옥 뜨 열풍으로 몰아넣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적어도 '베트남 소설' 하면 <끝없는 벌판>이 생각나게끔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3쇄를 찍고 절판을 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찾는 분들이 있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14년에 사라진 <끝없는 벌판>, 1년여 후 결국 저자, 번역자와 여러 단편 소설을 추가해 개정증보판을 만들자는 합의를 보았죠. 


<끝없는 벌판> 10년 만에 나온 <미에우 나루터>


명색이 '아시아' 출판사인데 베트남 최고의 소설을 이대로 져버릴 순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출판계가 힘들다 하더라도, 아무리 소설 시장이 어렵다 하더라도, 그중에서 제3세계 문학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걸 상쇄할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고 판단했죠. 그렇게 2년이 흘렀습니다.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자께서는 개정증보판에 추가할 예정인 단편 소설의 면면이 예전 것들이라 크게 여의치 않아 하셨습니다. 번역가로서는 이미 한 번 번역해 내놓은 책에 역시 번역하여 계간지를 통해 소개한 작품들을 더하는 작업이기에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래 전에 했던 작업들이라 거의 다시 번역하다시피 하셨죠. 오히려 처음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번역되어 있는 걸 다시 번역하다시피 하는 작업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저희 출판사로서는 솔직히 손과 눈과 귀가 잘 향하지 않게 되더군요. 이 소설을 '아시아 문학선' 시리즈에 편입시키고자 마음 먹은 와중에 2년 사이 시리즈를 계속 내왔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도 했고요. 애초에 베트남 문학은커녕 아시아 문학으로의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증거와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각자가 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바쁜 와중에도 저자와 번역자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저희 출판사의 판매보다 중요한 의미부여가 책을 나오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정확히 <끝없는 벌판> 10년 만에 응웬 옥 뜨 소설집 <미에우 나루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네와 맞물려 있는 작품들


이 소설집에는 중편소설 '끝없는 벌판'을 필두로 '꺼지지 않는 등불' '뜻대로의 삶' '까이야' '아득한 인간의 바다' '미에우 나루터'의 단편 소설 5편과 '낯선 사람'이라는 산문 한 편이 있습니다. 모두 저자가 '끝없는 벌판' 전후에 썼던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오래되었다면 오래된, 최근이라고 하면 최근인 시기이죠. 


작품들은 단연코 잘 읽히지 않습니다. 글을 잘 못 써서? 번역이 안 좋아서? 문체가 나빠서?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모두 절대 아닙니다. 모두 가히 빼어난 수준이죠. 그나마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가 맞을 수도 있겠네요. 진짜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와 정서가 수십 년 전 우리네 이야기, 정서와 너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헤쳐나왔다고 생각해 다시는 돌아가고 싶은 않은 그때 그 시절을 상기시켜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엔 너무 아픈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이 처절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베트남 사람들의 다분히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하면, 뼈가 다 아플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우린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하층민적 동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됩니다. 


여기, 좋은 '아시아 문학'이 있습니다


아시아 문학은 그동안 엄청난 '발전'을 해왔죠. 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발전이라는 건 무엇이 기준이었을까요. 아마도 서양 문학과 서양 문학을 곧 세계 문학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기준이었겠죠. 저도 거기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선 아시아 문학은 결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아시아 문학에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명백히 아시아에 속해 있고,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 중 하나이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이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세계로 나아가는 데 아시아가 큰 걸림돌이 되는 그런 시대에 살아 왔고 아마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테죠. 


그런 시대성을 타파하고 아시아를 그 자체로 한 '세계'로 격상하자는 등의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할 마음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이 지구상에는 서양 문학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아시아 주요 나라의 문학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의 문학도 그 이상가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고 우리를 설레게 할 준비를 마쳤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은 겁니다. 


응웬 옥 뜨의 <미에우 나루터>는 그에 충분하다고 넘칠 만한 능력을 갖춘 책입니다. 굳이 추천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그 진가를 알아줄 분들이 소수나마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 소수를 위해 이 책을 내놓고, 이 시리즈를 이어가고, 이 출판사가 계속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지나가다 보시면 아는 체라도 한 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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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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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감정 시대>


<감정 시대> 표지 ⓒ윌북



요즘 어떠냐고 묻는 말에 '괜찮아' 정도의 긍정적 답변을 하기도 듣기도 매우 어렵다. 난 대체로 '불안하다'라고 말하는 편인데, 가족끼리 종종 진지한 자리를 가지는 자리에서도 그런 대답을 자주한다. 문제는,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데 있다. 그저 불안전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할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가 왜 불안할까. 비단 나뿐만 그런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 걸까. '불안'말고 다른 느낌이나 감정은? 역시 부정적일까, 혹은 긍정적일까. EBS 다큐프라임에서 '감정시대'라는 주제로 지금 한국 사회를 떠도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보았고, <감정 시대>(윌북)라는 책으로도 나왔다. 대략 6개로 압축할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부정적인 감정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갑에게 받은 '모멸감', 열심히 살아봐야 소용없다는 '좌절감', 각자도생이 살 길이 돼버린 '고립감', 명백한 인재로 소중한 존재를 잃은 '상실감',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죄책감'까지,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이런 감정들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고 단정한다. 그럼 얘기가 달라진다.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


6가지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대략 살펴보자. 불안감의 원천은 실직과 고용 불안이라 한다. 개인이 직업이 없거나 불안정한 것은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모멸감은 주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제 모든 이들이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이 되었다. 우리 모두 어딘가에선 갑으로 모욕을 주며, 어딘가에선 을로 경멸을 받는다. 


가정과 사회에서 기대하는 역할의 무게에 짓눌리는 중년 가장에게서 주로 보이는 고립감 또한 더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도태되고 소외되는 노인 또한 고통을 겪는다. 모든 자유가 통용되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모든 실패는 오로지 당사자의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 이들이 결국 맞닥뜨리는 건 '뭘 해도 안 될 거야' 하는 좌절감이다. 


책에서 말하는 상실감과 죄책감은 다른 4가지 감정과 결이 다르다. 한국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비극이 된 '세월호 참사'에 따른 감정으로, 우린 영원한 상실감과 그에 따른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들만 하겠는가. 그 참사에서 친구를 잃고 살아돌아온 이들과 유가족들 말이다. 


(부정적) 감정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마음, 그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긍정 하나 없이 부정적일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수록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은 일면 무책임한 듯하면서도, 일면 무책임을 넘어선 차원의 책임 있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상실감과 죄책감


책에서 말하는 불안과 모멸과 좌절과 고립의 감정, 모두 충분히 공감하고 백배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그 감정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매순간 생각하고 있을 감정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상실과 죄책의 감정이 주는 거대함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분이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더욱 이 사회의 일원으로 상실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상실감' 자체는 인생에서 흔히 직면하는 감정이다. 다들 받아들이고 살아가며 비록 그 흔적이 크게 남는다 하여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돌아온 아이들의 상실감은 차원이 다른 그리움과 아픔과 소외와 책임이 뒤따른다. 그들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굳이 찾는다면, 그들은 친구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 우리 사회는 희생자를 기억하고 생존자를 이해하는 것.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상실감보다 더 치명적인 건 '죄책감'이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인 '생존자 죄책감' 말이다. '내가 끝까지 친구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친구가 살았을지 모른다, 내게 구명조끼를 양보한 그 친구 대신 내가 살았다.' 이 비극적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가 겪는 '방관자 죄책감'도 존재한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이 참사를 두고 '지겹다', '시체 장사 한다' 따위의 말들을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 전체가 자책과 죄책에 빠져 있는 건 물론 좋지 않지만, 그 출구를 '기억'이 아닌 '아픔의 전가'로 선택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어찌 그럴수가 있겠는가. 


이런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부정적 감정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가 결코 비인간적인 사회로만 가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부정적인 사태에 대면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 사태를 직면해 '그랬어야 했어' '잘 되었네' 따위의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말이 되겠는가. 감정이 무엇이든 들여다보고 내보이려 하자. 그리고 공유하고 공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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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고은 깊은 곳>


<고은 깊은 곳> 표지 ⓒ아시아



편집자 일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시는지요.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께 읽히는 걸 볼 때, 더 자세히는 길거리에서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가 읽으며 지나가는 걸 볼 때. 저한테는 아직 이 두 상황이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러면, 편집자로서 가장 설레는 건 무엇일까요. 위대한 작가의 원고를 책이 나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 저는 이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한대요. 그동안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인도의 대문호 '쿠쉬완트 싱'의 <델리>, 중국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각국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 모음집 <물결의 비밀>, 한국 노동문학의 대부 '방현석'의 <세월>, 그리고 중앙 아시아 고대 신화까지. 이 정도만 해도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저자군이지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할 수 있는 너무 유명한 '고은'


이번에는, 이 저자군의 품격을 단번에 올려줄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의 작품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자타공인 '국민시인' 고은 시인과 김형수 작가의 대담집, <고은 깊은 곳>입니다. 끝없는 설렘과 부담감을 품은 채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선생님들의 빠르고 정확한 피드백 덕분에 작업을 일단락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 유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린 그 대상에 무지한 경향이 있지요. 고은 시인도 그런 경향을 피해갈 순 없었을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삶에 있지만 우린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알고 있을 뿐이죠. 이 책에는 김형수 작가에 의한 그런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결코 길지 않은 책인데요. 충분히 고은 시인의 '깊은 곳'까지 다다랐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고은 시인을 잘 알고 또 누구보다 사려깊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할 줄 아는 김형수 작가가 함께 대담을 진행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두 어른의 대담에서 정서적으로 실용적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김형수 작가와는 지난 2014년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와 2015년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의 '작가 수업' 시리즈로 작업을 했었습니다. 3탄을 준비 중인데, 공교롭게도 위 책들을 낸 후 더 바빠지셔서 늦어지고 있네요.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건 물론 기대도 됩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믿음 덕분이죠. 


고은 시인의 삶과 시, 그 깊은 곳


사실 이 두 분의 대담이 책으로 엮어 나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자그마치 5년 전에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한길사)이 나와 많은 이들의 눈을 밝혀주었었죠.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만이 가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두 세기의 달빛>이 1930~50년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반면, 또 같은 출판사의 <바람의 사상>이 고은 시인의 일기를 중심으로 1970년대를 다루고 있는 반면, <고은 깊은 곳>은 고은 시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두루 다루며 '고은' 그 자체의 깊은 곳을 다루고 있지요. 


이를, 김형수 작가는 고은 시인과 대담하는 내내 그 파동이 울려나오는 곳에 닿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죠. 그곳이 다름 아닌 '고은 깊은 곳'이며 '고은의 시를 끝없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958년에 데뷔해 내년이면 시(詩)력 60년이 되는 '시인 고은'의 삶과 시, 이 책 하나면 충분할 것입니다.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에 대해, 이 또한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모국어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문학, 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을 조망하죠. 고은의 시적 근원에 자리한 '모국어'라는 존재의식의 장벽을 넘는 행위입니다. 고로, 무엇보다 모국어 한글의 축복이죠. 


<고은 깊은 곳>을 읽는 것은 곧 고은의 시를 읽는 것


고은 시인을 지칭하는 말은 비단 '국민시인'뿐만 아닙니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오로지 시와 함께 하는 그의 삶은 네 번에 걸친 치열한 자살 시도와 10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거쳐,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현실에 대한 시야를 습득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앞장서 현실문제에 대응하며 자연스럽게 따라온 상상을 초월하는 심신의 고달픔을 뒤로 하고 '살아남아' 시를 쓰는 고은 시인,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감히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독자분께서 이 영광스러운 작업의 수혜를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시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소설을 압도적으로 즐기는 편이죠. 그런 가운데 '시인 고은'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또 좋았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로 시에 입문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에게서 시를 빼앗으면 나는 뱀 허물이고 거미줄에 걸린 죽은 풍뎅이 껍질'이라고 말하는 고은 시인의 '삶'은 곧 '시'일 것입니다. 그의 삶을 읽는, 즉 <고은 깊은 곳>을 읽는 누군가는 곧 그의 시를 읽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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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악의 해부>


<악의 해부> 표지 ⓒ에이도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생각나는 건 단연 '홀로코스트'다. 통칭으론 대학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있어 왔지만, 이토록 어마어마한 전쟁과 대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건 일찍이 없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각은, '왜'와 '어떻게'로 쏠린다. 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자행했는가.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인사들을 향한 관심도 있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아이히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비롯 나치는 그렇게 '악마'가 된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게 한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악마여야 한다. 여기서 '왜'는 충분히 설명되어 진다. 그러면 '어떻게'가 남고, 잔인함을 넘은 악마적 학살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린 그 방법들을 전해듣고 그저 치를 떨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누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진다. 위에 명명된 이름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개인이라기보다 악마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나치에 속한 수많은 조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나치를, 제2차 세계대전을,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최선일까?


나치 전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악'


정신의학자가 치밀하게 돌아본 '악마'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악의 해부>(에이도스)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나치 전범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수용한 룩셈부르크 아쉬칸 포로수용소에서 시작된다. 앤드러스 대령 교도소장과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켈리, 그리고 나치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 등장한다. 


오래지 않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해 무대가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진다. 와중에 독일노동전선 수장 로베르트 레이와 반유대주의자 신문 《데어 슈튀르머》 편집자 율리우스 스트라이허가 소개된다. 그리고 대망의 나치 부총통 루돌프 헤스. 또 한 명은 더글러스 켈리와 치열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 대결을 펼칠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다. 켈리와 길버트에 의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이 시작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의 길 또한 열린다. 이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책의 한 축을 이루며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들이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나치 전범 네 명에 대한 케리와 길버트의 심리 분석. 이 악마들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먼저 로베르트 레이,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전쟁 중에 행한 활동을 뉘우치기도 한 복잡다다한 인물이었다. 전범 중 유일하게 뇌를 부검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뇌에 손상이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그의 악을 손상된 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돌프 헤스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병명으로 하면 '편집성 조현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 당시 기억상실증도 겪었다고 하지만 꾀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정신병은 인정되어 사형당하지 않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의 '악'은 말그대로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반면 헤르만 괴링은 '진정한' 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연합국 측에 모욕을 안기고 순교하려는 의도였을 정도다. 그는 사과도 변명도 일절 하지 않았고, 재판에서 외려 연합국 측과 치열하게 공방해 일말의 승리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호감형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율리우스 스트라이허는 어땠을까.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쁜 남자'라 칭하는 그는, 여기서 소개한 여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게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완전하게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쁜 거였다. 같은 편조차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치 전범은 악의 화신인가,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는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더글라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거니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야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은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 주장의 핵심이다. 


반면 구스타브 길버트는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 악마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그들의 악은 특수한 악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치 전범들이 악이라는 명제를 모든 주장의 전제에 놓았다. 사실 길버트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인 대세였다.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 전범들을 일반인과 같은 평범의 범주 안에 놓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길버트가 가난한 유대인 망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객관적 대신 주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당대에는 비주류였지만 추후 심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켈리의 주장에 가 닿아 있다.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악에 대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해석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연구 네 건이 이 관점의 함의들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다. 


먼저 한나 아렌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더 없이 유명한 그녀의 '악의 평범성'은 켈리의 주장을 정통으로 잇는 연구다. 그녀는 이에 '악은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곰팡이 같은 것. 그것에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다'고 말했다.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타인이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보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행위의 책임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 달리와 빕 라타네의 '방관자 무관심' 실험도 켈리를 잇는다. 1964년 3월 뉴욕 시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 세계를 뒤흔든다. 38명이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어느 목격자가 다른 목격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강행한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낸다. 사회적 맥락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저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의 뒤를 이은 주장은? 켈리의 주장 전통에는 빈 서판으로 세상에 태어나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빈 서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기본값이 훨씬 더 어두운 쪽에 치우쳐 있다면? 사이코패스, 즉 나쁜 뇌, 병든 뇌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아니 정확히는 나치 전범의 심리를 분석한 켈리와 길버트가 남긴 것들로는 진정한 '악'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저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생각 끝에 켈리와 길버트 모두가 옮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켈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약간씩의 어둠을 찾아냈고, 길버트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어둠을 찾아냈다는 것. 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섬뜩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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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꿀벌과 천둥> 표지 ⓒ현대문학



중2 음악 시간, 선생님께서 종종 수업 대신으로 영화 한 편을 보여주셨다. 족히 20년은 흐른 지금까지도 개인적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아마데우스>를 그때 처음 보았고, 여전히 뒷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절정의 영화 <파리넬리>도 그 시간을 통해 처음 보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다뤘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클래식은 나의 조그마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유독 그때 그 음악 시간은 클래식 음악 숙제가 많았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대표곡들을 듣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직접 오페라 콘서트 실황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등.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였을까.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건 리코더나 멜로디언 정도였고, 나머진 사실 글쓰기 과제였던 거다. 


음악 감상의 느낌을 글로 쓰는 건 고역이었다. 머리가 훨씬 큰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예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감정이 팔팔한 그 나이대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묘사가 태반을 차지한다는 걸 알고 일본 만화에서 참조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한창 <미스터 초밥왕>을 열독했었는데, 거기엔 무수히 다양한 묘사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신의 물방울>이 이어받았으려나. 하여튼 일본 음식 만화가 답이었다.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절정


일본이 자랑하는 온다 리쿠 작가의 신작 <꿀벌과 천둥>(현대문학)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굴지의 피아니스트 콩쿠르 오디션의 전초전 격인 일본의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일명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정점이다. 뭐랄까, 오그라들다 못해 민망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진지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랄까.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소설은 일본 소년 성장 만화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았다 못해 낳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슬램덩크>를 필두로 하는 천재와 둔재의 성장과 경쟁의 한 시절, <신의 물방울>을 필두로 하는 민망하지만 헤어나오지 못하는 묘사의 절정이 모두 이 한 소설에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 여지없이 모두 천재적이고 구구절절 사연이 있고 확고한 캐릭터성이 있다.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떠도는 10대 중반의 최연소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이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의 추천서와 절대적인 자유로움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 다른 세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경쟁을 벌인다. 


천재 중 천재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무대를 떠났다고 부활의 날개짓을 하는 소녀 에이덴 아야, 완벽 그 자체로 모두를 압도하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 소년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그리고 어렸을 때 음악을 전공했었지만 악기점 점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20대 후반의 최고령 다카시마 아카시까지.


피아노 연주를 글로 표현해내는, 이 소설의 백미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작품임에도 헤어나오기 힘든 흡입성을 보이는 건 이미 일본 현지에서 입증되었다. 제156회 나오키상과 제14회 서점대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하는 영예를 받은 것. 둘 다 지극히 대중성과 거리가 가까운 상들인데, '읽히는 소설'을 쓰는 온다 리쿠 앞에서 작품성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게 된다. 나아가 작품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중간하면, 욕하면서 시간때우기용으로 적당히 볼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취급을 받을 줄 알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 <꿀벌과 천둥>은 그걸 넘어선 듯하다. 피아노라는 예술의 한 면을 다뤄서가 아니라, 이쯤 되는 캐릭터와 묘사에의 열정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량이 워낙 길기도 했고, 1차 예선이니 2차 예선이니 해서 구분도 되어 있고, 주인공마다 챕터가 확연히 갈라져 있어, 중간 중간 쉬면서 다른 책들도 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봤음에도 그때마다 주인공들이 확연히 되살아날 정도였다. 굳이 책을 앞에서 다시 일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그 형상이 잡혀 지워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자칫 가소로워 보이는 캐릭터들을 얼마나 연구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글로 표현해낸 부분들이라 하겠다. 몇 쪽에 걸쳐 펼쳐지는 각종 묘사의 향연은 솔직히 한 번 웃지 않고 지나갈 사람 없을 만한 민망함을 깔고 있지만, 작가가 소설을 통해 연주를 표현한 것처럼 '비범하고 환상적이다'. 그때만큼은 '소설의 신'이 내려온 것 같다... 종종 온다 리쿠를 찾을 것 같다. 매일 건강에 좋지만 맛은 그다지 없는 음식만 먹을 순 없으니, 종종 한없이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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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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