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의 1960년대>


<나의 1960년대> 표지 ⓒ돌베개



대학, 정치,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학생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을 일컫는 '학생운동'.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1980년대를 꼽는다. 물론 1960년 419 혁명도 학생의 손에 이룩한 것이니, 한국 현대사를 통틀어 활동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생운동에는 단연코 '68혁명'을 이끌어낸 프랑스학생운동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뒤흔든 사회변혁운동이었다. 


일본학생운동도 이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수많은 이야기거리를 양산해냈다는 측면에서는 단연 최고일 것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전공투'나 '연합적군'은 많은 문화콘텐츠를 통해 소개·소비되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 <1Q84> 등 소설로 이것들을 다뤄 알게 된 측면도 크다. 그 자신이 1960년대 전공투 세대였던 것이다. 


일본학생운동, 전공투 하면 생각나는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과격함'이다. 1970년대 변질되어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각목을 든 채 화염병을 던지며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이미지가 강한 것이다. 그 시작은 어땠을까. 매스컴이 만들어냈을 게 분명한 그 이미지 이면의 진짜 모습은 어떨까. 


<나의 1960년대>(돌베개)는 전공투를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자 일본 전공투를 상징하는 이들 중 하나인 '야마모토 요시타카'라는 재야 과학사가가 과거를 회상하며 쓴 일본 전공투 운동사이다. 그런 한편, 전공투가 궁극적으로 반대하고 투쟁했던 메이지 유신 이래 국책으로 추진되어 온 일본의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인문과학비평서이기도 하다. 얼핏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일본 전공투와 일본 과학기술, 이 둘을 하나로 엮어 흔하디 흔한 '옛 이야기' 따위를 타파한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 회상


전공투,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약칭이다. 저자가 속했던 도쿄대와 니혼대, 즉 일본 최고 최대의 국립 사립 대학이 주축이 되었고, 역사에 길이남을 투쟁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1968년에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이전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인지 대학 입학 직후인 1960년 '안보 투쟁'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1960년대 당시 일본의 비상식적 '풍요사회', 그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투쟁은 계속되어 62년 대학관리법 반대 투쟁, 66년 베트남반전회의 활동, 68년 미군 야전병원 철거 투쟁, 그리고 68년 대망의 도쿄대 투쟁까지 이어진다. 반미, 반대학, 반전을 거쳐 '반체제'까지 다다른다. 일본을 대표하는 대학의 학생들이 펼치는 '반체제' 투쟁의 파급력은 남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공투운동은 이전 학생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전략 전술적 움직임으로 긴 투쟁을 예고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저자가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야스다강당 점거 봉쇄 투쟁'이다. 야스다강당은 도쿄대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대학 입장에서는 절대 그대로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1968년 6월에 시작된 야스다강당 투쟁은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되지만, 결국 대학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무너진다. 그렇게 도쿄대 전공투는 해체되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전공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일련의 전공투 신화는 어느 정도는 누구나 알 만한 내용이고 이 책이 아닌 어디에라도 조금만 찾아보면 나올 내용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 커진다. 그들이 그런 투쟁을 한 이유 말이다. 그건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과 그를 뒷받침한 과학기술의 이면과 큰 관련이 있다. 50년이 지난 지금과도 결코 적지 않은 연관성을 띈다. 아니,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름 아닌 지금이겠다. 작금 일본의 모습과 나아가려는 방향이 50년 전 그때를 연상시키고도 남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


일본의 과학기술 찬양은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의 선진문물에 충격을 받고 '양이'를 기치로 내세운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다. 저자는 이후에도 2차 대전이 한창일 때와 전후 1960년대가 과학기술 찬양의 붐이 일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전쟁 시기는 그렇다 치고, 1960년대가 문제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하지만 터무니 없는 면모가 추악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임에도 제대로 된 반성 따윈 없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로 돌렸다다. 다만 전쟁 직후에 그런 기조를 드러내놓고 펼칠 순 없어 은근슬쩍 시행에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1960년대 과학기술 붐이 인다. 곧 경제성장에 직결되고, 평화니 민주주의니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전후 세계적 기조를 채택해 진짜 모습을 가린다. 저자는 다름 아닌 그런 기조의 최전선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어온 도쿄대 이학부 학생이었던 것이다.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자는 더 들어가 일본 과학기술의 이면까지도 파헤치는데, 거기에 '군(軍)'이 있었다. 사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일본의 과학기술은 '군에 의해서' 만들어지다시피 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 시기를 지나 전후 시기가 왔음에도, 군에 의한 과학기술은 여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1960년대는 경제성장의 시대이니 만큼, 자본주의 첨병인 기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즉, 군산학 합동 메커니즘이다. 


결국 일본의 전쟁 DNA는 전후 1960년에도 계속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겉을 과학기술, 경제성장, 평화, 민주주의 따위로 칠해 진짜 모습을 알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당시 전공투가 문제 삼은 건 다름 아닌 일본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건 그 진짜 모습을 지탱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인 도쿄대 학생 자신들을 부정함에 다름 없었다. 나라 자체를 부정하고, 자신까지 부정하는 건 그 얼마나 어렵고 두렵고 외로운 일이겠는가. 


50년이 지나 반복되는 총력전체제


5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움직임이 그때 그 시절을 연상케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른바 일본 전체를 끌어들이는 '총력전체제'를 다시금 가동하려는 것이다. 밑바닥에 다다른 경제 상황을 빗대 경제성장을 말하고, 한편에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말함과 동시에 전쟁을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결정적으로 3.11 대참사가 일어났음에도 반성 없이 그 원인을 낮은 과학기술로 돌릴 뿐인 것이다. 이쯤 되면 데자뷔 현상이다. 


아무리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일본의 경제성장 그 이면의 한 편에 다름 아닌 '전쟁 특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항이겠다. 일본은 다시금 그 길로 나아가려는 것인가? 


저자는 일본의 작금 모습을 살피고는 '그렇다'고 판단했다. 그러곤 그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50년 전 전공투 이야기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투쟁한 이유를 상세히 펼쳐놓는다. 한편 과학사가로서의 특기와 이점을 잘 살려 투쟁 이유와 맞물린다. 우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듣는 한편, 자신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주장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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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물들의 인간 심판>


<동물들의 인간 심판> 표지 ⓒ책공장더불어



어렸을 때 집에는 놀 만한 게 없었다. 엄마가 직접 나와 저녁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밖에서 놀았다. 친구들과 놀 건 정말 많았는데, 우리집에서 조금만 가면 얕은 산을 낀 공원이 있어 그곳에 자주 갔다. 그러곤 매미, 잠자리, 사마귀, 메뚜기, 개미 등의 곤충을 잡았고, 잡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죽어가는 곤충이 있는 반면 잡아 괴롭히는 데 온 정성을 쏟는 곤충이 있었다.  


그 행위는 우리들에겐 흔한 놀이였고, 어른들에겐 자연 학습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자연과 덜 친숙한 지금, 모르긴 몰라도 그런 경향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그건 그 무엇보다 학습적인 놀이이다. 물론 그 곤충의 입장에서 생각할 이유나 여지 따위는 없다. 그러나, 그 곤충은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런 짓이 생태계 파괴에 일조하는 거라고 왜 그땐 몰랐을까.


<동물들의 인간 심판>(책공장더불어)은 동물을 향해 호모 사피엔스(인간)이 저지른 하찮고 작은 행동부터 엄청나고 크나큰 행동들, 그로 인해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낱낱이 까발린다. 너무 많이 접해왔던 계몽서 느낌이라고? 천만에. 이 책은 전적으로 동물들의 시점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재판에 올려 법정을 여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그 죄는 동물들에 대한 비방과 중상, 학대, 그리고 대량학살이다.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죄


생태계에는 양육강식 법칙이 존재한다. 이른바 생존 게임, 먹잇감을 두고 경쟁도 하고 발톱을 세우고 독을 뿜으며 사냥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서로 존중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자신과 상대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도 양육강식 법칙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의 양육강식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말 아래, 존중이고 규칙이고 존엄성이고 나발이고 같은 인간과 온갖 창조물을 헐뜯어 명예를 실추시키는 데 열중하는 걸 뜻한다. 인간은 인간을 욕할 때 하필이면 동물을 빗대는데, 그 자체로 이유없이 동물을 비방하고 중상하는 것이다. '개의 새끼'는 천하의 나쁜놈을 뜻하고, '숫염소'는 성(性)에 관한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단어다. '닭의 대가리'나 '금붕어'는 멍청하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뱀'은 교활하다는 뜻이고... 정녕 끝이 없다. 


인간의 두 번째, 세 번째 죄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근에 개봉해 많은 이슈를 뿌렸던 영화 <옥자>가 이 두 죄를 한 번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동물에 개, 돼지, 소, 말, 고양이 정도가 있다. 이중 개와 고양이는 반려의 대상이 되고, 소는 젖을 주고 밭을 갈며, 말은 유흥의 대상이다. 하지만 돼지는? 내가 알기론 오로지 식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돼지는 태어나서 인간의 식용 대상으로 키워질 뿐이다.


옥자가 전 세계 각지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양질의 고기를 위해서다. 책에서 법정의 증인으로 나온 돼지 장브누아르의 증언은 정녕 끔찍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더러운' 돼지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곧 식용 돼지로의 과정이다. 그들은 비좁고 더럽기만한 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먹기만 할 뿐이다. 그러곤 곧 도살장으로 향해 죽어간다. 옥자가 달랐던 건 '더 맛있는 고기'를 위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은 환경에서 자란 돼지였을 뿐, 그 끝이 도살장에서의 죽음, 그리고 식탁 위인 건 똑같다. 


인간의 부유함은 곧 다른 동물의 가난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동물들이 증언하는 내용은 상상 이상의 끔찍함을 동반한다. 동시에 생각하기 힘든 역발상과 인간이 제대로 마주칠 수 없는 인간의 본 모습도 제공하는데, 그 모든 게 실랄하게 정확해 보인다. 동물들은 인간이 절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원한다고 말한다. 그건 '소유 게임'이라는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경제'라고 부르며,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얻는 걸 목적으로 몇 가지 점수를 정확히 매겨서 계층을 나눈다. 그 기준은 '돈'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가지려고 하는 다양한 게임은 모두에게 재앙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은 제한적인데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문제는 70억 명의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라 '누가 더 가졌는지'를 결정하는 거대한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가 70억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더 가지면 분명 우리(동물)는 당연히 덜 갖게 되니까요. 물도, 깨끗한 공기도, 식량도, 살 공간까지 줄어드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부유함은 곧 우리의 가난을 의미합니다." (본문 192쪽)


우리는, 인간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안다. 결국에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파멸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마인드가 똬리를 틀고 있다. 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내 세대만, 종국에는 인간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인간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이 간악한 마인드에 다른 종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되고 나아진다고들 하지만 사실 퇴보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아는 이상 글러먹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내려질 판결이 궁금하다. 물론 법정인 만큼 희대의 범죄자 인간에게도 변호인이 있는바, 적어도 동물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런 인간도 대다수가 아닌 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비록 늦었지만 깨달음의 꾸준한 나아감일까,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소수의 현인적 깨달음의 반복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떤 판결이 나온다 해도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일단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대다수의 인간들에게,  '네 죄를 네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인간 심판, 그 처벌의 모양새도 그 일환이겠다. 진짜 끔찍한 건 수많은 동물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한 수많은 끔찍한 죄들을 다시금 저지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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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무것도 아니야>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 표지 ⓒ현암사



"의미 있는 건 없어. 나는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야."(분문 7쪽)


의미 있는 건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안톤은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는 마을 자두나무에 걸터앉아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에게 설파했다. 의미나 가치 있는 건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아이들은 안톤의 말에 흔들렸다. 그가 던진 그 무엇이 한참 앞에 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가 되어야 했고, 누군가가 되어야 했다. 가치 있는 무언가, 의미 있는 누군가. 


그렇게 그들은 무언가를 하기로 한다.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버려진 목공소를 아지트로 삼고 각자 의미가 있는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데니스의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 세바스티안의 낚싯줄, 리샤르트의 검은색 축구공, 로라의 아프리카 앵무새 귀걸이, 아그네스의 초록색 샌들... 아그네스는 급기야 게르다에게 작은 햄스터 오스카리틀을 지목한다. 


본격적으로 처절하고 잔혹한 '폭탄 돌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안톤을 나무에서 내려오게 하여 자신들이 맞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의미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명목 하에, 그 어떤 것도 묵살되어 버린다. 거기엔 신앙, 생명, 순결, 신체까지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안톤의... 


진리를 알아버린 비성숙한 이들의 비극


자신들보다 한참을 앞서 나가 인생을 관통하는 진리를 깨달아 버린 이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애써 눈감는 그리고 눈감아야 하는 바이고, 대상은 불과 열네 살 아이들이다. 이제 막 세상에 대해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자 눈을 뜬 나이다. <아무것도 아니야>(현암사)는 그들의 안타까운 비극을 그린다. 여기서 안톤은 안톤이 아니라, 진리의 화신이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없다는 것, 즉 세상도 나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고 누구나 겪게 될 진리다. 결국 사람은 죽을 테고 세상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이 고답적이고 고차원적이지만 회의적이고 치명적인 진리는, 사실 그리 고깝게 받아들여지진 못한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데 부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게 자명하기 때문인데, 교육은 받았지만 원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우선 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은 교육에 기반한 거다. 세상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게 없을 수 없다는 것. 그들은 그걸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지탱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보인 생각과 행동은 교육에서 원숙하지 못한 본성 또는 본능으로 나아간다. 시스템적 교육과 자연적 교육, 개인과 집단의 조화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그들 만의 세상으로 숨어들어갔다. 


비극의 잉태는 예견된 수순이 아닌가. 우린 비성숙한 아이들의 집단이 저지른 수많은 비극을 익히 알고 있다. 그 비극은 비성숙이라는 이유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시선이 옮겨간다. 그 연유나 과정이 아닌 결과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그 연유는 분명 안톤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안톤이 그렇게 된 연유를 찾아야 마땅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잘해봐야 그들의 비극의 과정과 결과가 보여준 끔찍하고 잔혹한 면면만 살필 것이다. 


다른 세상, 다른 진리도 있다는 교육이 필요하다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극의 과정 즉 아이들의 '의미 있는 물건 더미 쌓기'는 매우 흥미진진하고 스릴까지 있다. 의미 있는 물건의 '의미'가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아이들의 본성이 살아나고 그럴수록 사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하고만 있다는 것. 사이사이 보이는 어른들의 시선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잘 알고 잘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고립된 아이들. 


이 소설을 통해 들여다보아야 할 건, 가치나 의미의 진정한 의미, 가치나 의미 따위는 없다는 진리, 아이들의 교육과 본성이 아니다. 그들이 그들하고만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된 모습이다. 거기엔 안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한 교육과 세상, 그리고 안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지은 교육과 세상이 있다. 


세상은 그들에게 하나의 세상을 알려주었을 뿐, 또 다른 세상의 존재와 세상과 세상의 대립과 충돌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그건 스스로 깨우쳐야만 알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다. 누군가 알려준다고 온전히 깨우쳐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다른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교육이 횡행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건 틀린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걸 알 길 없는 아이들이 그 끝에 비극적으로 도달할지 희극적으로 도달할지 알 수 없다. 


안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세상도, 아그네스를 위시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세상도 궁극적으로 모두 틀리지 않다. 결론적으로 봐서 아이들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시작은 올바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안타깝다. 그들이 대립하게 된 이유를 제공한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른들이 무능하고, 그들이 한 짓을 보고도 터무니 없고 황당한 짓거리만 일삼은 어른들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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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한 이웃>


<선한 이웃> 표지 ⓒ은행나무



민주화 30주년의 2017년 6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시점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 6월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민주화 영령들이 불려 나왔다. 그중엔 당연히 소설도 있는 바, 이정명 작가의 <선한 이웃>(은행나무)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선과 악의 대립 또는 선과 악의 모호함 등의 소재, 이정명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픽션적 뒷이야기들. 


세종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를 집현전 학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풀어내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과 관계의 뒷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으로 풀어냈으며,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뒷이야기를 검열관 죽음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등 이정명의 소설은 구미를 당기는 무엇이 있다. 나는 앞의 두 책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은 재밌게 읽었는데, 뒤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인 '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 책 <선한 이웃>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좋던 나쁘던 기존의 이정명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실존 인물을 참조했겠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이 나오진 않는다. 유명한 사건의 뒷이야기를 그만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핵심인물들에 천착하는 건 여전하지만, 조금 더 서사에 집중했다는 데서 사건과 인물에 집중했던 이전 작품보다 고전적이 된 것 같다. 고전적 의미로 더욱 소설가다워졌지만, 소설로서는 재미가 많이 반감되었다.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잘 짜인 소설


신출귀몰 용의주도 얼굴 없는 운동가 최민석을 잡기 위해 김기준 팀장을 위시한 정보요원팀이 출동한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추적을 비웃듯 눈앞에서 놓치고, 관리관에 의해 김기준 팀은 해체되고 모두 좌천된다. 한편 극작가 이태주는 <줄리어스 시저>로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마지막 공연에서 대사가 문제시 되어 정보당국에 잡혀간다. 그를 제외하고 모두 고문을 받고, 극단주와 주연배우는 구속된 반면 그는 풀려난다. 


변절자로 낙인 찍힌 이태주는 삼류 에로극 주연 여배우 김진아와 연인이 된 후 함께 <엘렉트라의 변명>을 힘들게 준비한다. 김진아는 알고 있다, 이태주가 이 연극으로 세상에 맞서려고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를 진정 사랑하기에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좌천당하고서도 여전히 최민석에게 심히 집착하는 김기준, 관리관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김기준은 여러 후보군을 추려 <엘렉트라의 변명> 연출자 이태주를 최민석으로 점찍고 공작에 들어간다. 그는 이태주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하고 정교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등장인물들을 옭아매는지 모를 정도로 잘 짜인 소설 <선한 이웃>.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소설의 절정에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건 없다. 앞으로 계속 생각하게 될, 생각해야 할 개념이 생겼을 뿐이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의 악


이전 작품보다 서사의 흐름과 상징의 모호함에서 오는 깨달음을 더 절실하게 전하며 새로움을 선사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정명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특출한 캐릭터성을 엿볼 수 있다.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그리고 관리관까지. 이들이 얽히고 설킨, 물리고 물린, 복잡다단한 관계와 자기 신념들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악한 이의 악이 아니라 선한 이웃의 악이다'를 대변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거기엔 일면의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인 면이 도사린다. 1980년대 서슬퍼런 독재 정권 시대, 어쩔 수 없이 악에 부역하며 그렇지만 자신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들이 있다. 아주 많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본래 평범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범하고 힘없는 이가 악을 행하면서 '나는 악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지옥이다. 


사실 이는 식상하기 그지 없는 개념이자 도식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아이히만의 '나는 맡겨진 일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말을 빗대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만든지 오래다. 이후 수많은 콘텐츠에서 이 개념은 인용되고 변주된다. 이 책의 제목인 '선한 이웃'도 사실 '악의 평범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식상한 변주가 있다. 명백한 악을 행하고서도, 심지어 그것이 악인 줄 잘 알면서도, 그걸 행한 자신을 평범하다고 성실하다고 신념화 시킨다면 여지 없이 '악의 평범성' 개념을 꺼내들어 변주해야 한다. 물론 '잘' 해야 한다는 단서는 있다. 그런 면에서 <선한 이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쉽지 않은 소재와 주제를 풀어나가고자 정공법을 택했는데, 고대 그리스 배경을 위주로 한 연극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가져와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이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고대 그리스 배경이 주는 생소함과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인간 자체에 대한 비유와 상징들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잘 뒷받침해준다. 작가가 한탄하는 것처럼 3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만 있지 변한 게 없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이정명 작가는 달라지는 것 대신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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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편집자가 독자에게]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 출간에 부쳐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3) 표지 ⓒ아시아



2년여 전 쯤이었을 겁니다. 우연히 책 두 권을 접했습니다. 시리즈인듯 아닌듯 같은 출판사(웅진닷컴)의 같은 저자(제임스 헤리엇), 같은 번역자(김석희)의 책이었죠. 한 권은 2001년, 다른 한 권은 2002년에 나왔더군요.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제목과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동일한 부제인 '수의사 헤리엇이 만난 사람과 동물 이야기'로 책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지 재미있었습니다. 어쩜 이리 아기자기 하면서 풍성하고 행복하면서 슬프고 긴박하면서 느긋할 수 있는지, 그 모든 것들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해내는지,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편했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즉시 국내에 출간된 제임스 헤리엇 책을 모조리 구입해 직원들 모두가 돌려가며 읽고 분석에 들어갔죠. '어떤 식으로 복간을 할 것인가?'가 목적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이미 저작권 해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가장 먼저 김석희 선생님께 전화해 복간 작업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원고를 가지고 계시는지와 더불어 계약과 진행 관련된 사항을 간략히 주고받았죠. 그러곤 에이전트에 판권은 살아 있는지, 이전에 출간한 출판사에서 복간할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고는 바로 계약에 들어갔습니다. 


'제임스 헤리엇' 시리즈를 결정하다


알고 보니, 제임스 헤리엇이 쓴 책이 수십 권에 이르더군요. 기본이 되는 4권의 시리즈가 있고, 나머지 책들은 대부분 그 책에 상당 부분 가져와 추가 원고를 더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들은 시기도 출판사도 번역자도 중구난방이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1, 2권이 4권으로 분리되어 나왔고, 2000년에도 1권이 나왔으며, 2001년과 2002년에 각각 2권과 3권이 나왔었습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소개되어 왔던 제임스 헤리엇이지만, 사실 많이 알려지게 된 건 2001년과 2002년부터죠. 그리고 2003년에는 '개 이야기'가 2권으로 분리되어 같은 출판사와 번역자의 손에 출간되었습니다. 이후 2005년에는 다른 출판사와 다른 번역자가 '동물 이야기'와 아동용 책들을 출간합니다. 


우리는 우선 기본이 되는 4권에 더해, 3권을 추가로 계약했습니다. '개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 '동물 이야기'가 그것이고요. 일관성 있는 시리즈를 위해 김석희 선생님께 7권 모두를 맡겼습니다. 이 시리즈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분명하고,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실력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본인께서 1권부터 끝까지 제대로 번역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2016년 10월 첫 책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아시아)이 나왔습니다. '제임스 헤리엇'을 아시는 분들이 은근히 많아서 소소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김석희'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도 크게 작용했고요. 이후 12월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과 2017년 2월 <수의사 헤리엇의 개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연작 소설 또는 연작 에세이


2개월 주기로 2017년 내로 7권 모두를 내놓자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식 시리즈 3권에 해당하는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을 출간하기 전에,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더불어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와 같은 동물 관련 책인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를 출간하기도 했고요. 여하튼 계획한 것보다 2개월 늦은 6월에 3권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연작 소설' 또는 '연작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굳이 1권부터 읽지 않아도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지만, 이왕이면 1권부터 접하며 제임스 헤리엇가 이제 갓 수의대를 졸업하고 요크셔 지방의 대러비로 이주해 수의사로 일하게 된 사연과 수의사로서의 일들, 그리고 장차 아내가 될 이와의 연애와 결혼까지 들여다보고, 2권으로 본격적인 시골 수의사로서의 일들과 달콤한 신혼을 들여다볼 수 있죠. 


3권인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에선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공군에 입대해 훈련을 받는 제임스 헤리엇과 대러비에서의 과거 회상이 주를 이룹니다. 4권은 제대 후 대러비로 돌아와 아이를 낳고 지역의 명사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죠. 더불어 '개 이야기' '고양이 이야기' '동물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천착한 이야기들입니다. 


동물을 넘어 생물로


그렇습니다. 이 시리즈는 하나 같이 1930년대 요크셔 지방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1916년에 태어난 제임스 헤리엇이 50세가 넘은 1970년대에 들어 비로소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낸 것이죠. 의도한 게 아닌, 우연히도 시리즈 첫 책을 낸 2016년은 제임스 헤리엇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해 일찍 알았다면 뭔가 더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더 많은 분들께 알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가 갖는 태생적 한계도 존재하지 않나 싶습니다. '수의사'라는 그다지 관심이 많이 가지 않을 수 있는 키워드를 타이틀에 넣어야 하는 반면, '반려동물' 하다못해 '동물'도 타이틀에선 다루지 않죠. 엄연히 '수의사 제임스 헤리엇'이 주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인지 책 곳곳에서 우린 1930년대의 원시적인 의약품과 시술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소중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죠. 더불어 그가 '시골 수의사'이기 때문에 알게 되는 외딴 요크셔 지방의 생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동물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의 인간 주인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죠. 즉, 순수한 자연에서 지내며 모든 '생물'들에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 것입니다. 수의사(獸醫師)의 수(獸)가 짐승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물을 의미하게 만드는 위대한 진보입니다. 


그렇다면 '제임스 헤리엇'을 알리는 길밖엔 없을 텐데, 서양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며 최소 수천만 부 이상 최대로 잡아 1억 부는 족히 팔리고 1권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앤서니 홉킨스가 제임스 헤리엇의 은인과 같은 동업자 시그프리드 파넌 역을 맡았으며 BBC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이 또한 수천만 명은 봤을 정도로 위인의 자리를 꿰찬 그를 이곳에서 반의 반도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헤리엇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시리즈는 이제 막 절반을 지났습니다. 잘하면 올해 내로, 못해도 내년 초까지는 시리즈가 일단락날 것 같고요.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할 테지만, 모든 생물을 사랑한 제임스 헤리엇을 이보다 더 알리는 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연장선상에서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시리즈를 더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간절함을 담아 한 번 여쭤보려고요. 후회하지 않을 그 이름, '제임스 헤리엇'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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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경성의 건축가들>


<경성의 건축가들> 표지 ⓒ루아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현재와 과거가 멋지게 어우러진 건축물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이다. 정조의 효성과 개혁 의지가 담긴, 생활 공간으로서의 읍성과 전쟁 대비 공간으로서의 산성 복합 도시이기도 한 화성은, 전통이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서양의 도시 개념을 얹힌 완벽함을 자랑한다. 


서울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또 다른 완벽함을 지녔다. 조선 건국 당시 인의예지의 유교 이념을 고스란히 입혔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 그것인데,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고 보호할 자신감이 엿보인다. 거기엔 어떤 의심도 없고 어떤 반감도 없다. 어떤 혼란도 없을 시대 가치의 구현이겠다. 


수원 화성과 서울 사대문이 이처럼 나름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건, 시대의 굳건함과 건축주 또는 건축가의 굳건함 덕분이리라. 새로운 시대 조선의 시작, 조선 6백 년간 가장 완벽한 왕이었을 정조. 하지만 그런 시대가 영원할 순 없고, 그런 사람이 언제까지고 있을 순 없고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경성의 건축가들>(루아크)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없고 의심만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따라 돈에 따라 사람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완벽한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것에 눈이 가는 것도 인간의 본능이다.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바라보는 건축물


책을 통해 소개되는 한국의 1세대 근대건축가들, 그들은 많은 수가 1916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나와 총독부 산하 설계조직에 취직했다. 하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은 당연했던 바,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엔 조선인 건축주를 만나 독자적으로 설계를 하고자 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차별이 아니라, 건축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이다. 그들은 적어도 배를 곯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친일'의 냄새가 나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건축가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기술가였기 때문이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저자는 그 지점에 주목한다. 그들도 당시 독립운동이나 친일이 아닌 무수한 회색지대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고 말한다. 


최초이자 최고의 건축가라 일컬어지는 박길룡, 건축으로 저항했던 강윤, 천재 친일파 이천승, 우리말 건축용어의 대부 장기인,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외국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와 윌리엄 보리스 등 13명의 건축과 삶은 신산하고 안타깝고 혼란스럽다. 무엇보다 그 시대의 그들에게 '이해'의 눈길이 간다. 


여기에서 '이해'란 최소한 친일을 향한 것은 되지 못한다. 회색지대에 있던, 타협과 저항 사이를 오가는 그들의 심정과 상황 그 자체에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그건 이 건축가들의 건축물이 사물이 아닌 사연으로 비춰야 가능할 듯하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고작 건물 한 채인 그 이면의 사연이. 


경성제국 대학 본관이었던 대학로의 예술의 집, 미쓰코시백화점이었던 신세계백화점, 경교장이었던 전시관, 시민회관 자리에 들어선 세종문화회관, 조선은행 본점이었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이왕가미술관이었던 덕수궁 현대미술관, 명치좌였던 명동예술극장... 이중 최소한 두세 건물은 우리가 익히 봐서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또한 많은 근대 건축가들이 전통 가옥을 비판하며 서양 가옥을 위시한 건축 양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서양 양식이라는 게 전부라면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일제를 통해 들어온 것이 대부분, '서양 따라하기'의 일제를 다시 따라했으니 저자의 말마따라 'B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게 그 시대 건축가들의 숙명이었던 것을, 직업소명에서든 시대소명에서든 이쪽에도 저쪽에도 설 수 없었던 건축가들의 생존 방법이었던 것을.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


무엇보다 새롭게 다가오는 건 천재 시인 이상의 정체(?)이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설계조직에 취직해서 일했던 건축 재원이다. 다만 그는 총독부에 근무하는 조선인 건축가들이 퇴근 후 건축 부업을 할 때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근대건축가들이 근대건축물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을 완성했을 때 첫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시를 발표하고 그림으로 전람회에서 입선을 한다. 


이상은 1933년 스물네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총독부 건축기수 자리에서 사직했는데, 이때까지 그의 삶은 문학보다 건축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4년 동안 건축잡지가 아닌 대중신문으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하는데, 그야말로 '이단아'로 극과 극의 평을 받는다. 


저자는 건축가로서 아쉬워한다. 그가 계속 건축을 하며 독자적인 설계를 하고 작품을 남겼다면 어땠을지 하고 말이다. 저자는 그랬다면 당대 건축가들이 인식했던 물질문명의 근대를 넘어서는 건축이 나왔을지 모를 거라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이상만이 표현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건축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당연하게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이상을 두고 문학가 김기림은 한국문학이 50년은 후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근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학성의 기반엔 다른 무엇도 아닌 '건축'이 있었다. 그를 '경성의 건축가들' 중 하나로 당당히 올려놓은 저자의 패기와, 문학가 이상이 아닌 건축가 이상의 삶을 끌어올린 저자의 안목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건축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이론, 생각, 교재 등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름도 모습도 고스란히, 이름만 또는 모습만 고스란히, 아니면 터라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것들은 단지 그것들로만 남아 있지 않을 거다. 우리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사람을 사회를 시대를 역사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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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 표지 ⓒ아시아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반려인'이 자그마치 1000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직간접적 가족까지 합하면 인구의 절반은 훌쩍 넘을 수치인데, 고령화와 핵가족화가 크게 작용했다고 알고 있다. 나만 해도 평생 반려동물을 옆에 둔 적이 없는데, 고양이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내가 신(新) 핵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런데 벌써부터 걱정되고 겁이나는 건, 인간보다 훨씬 짧은 반려동물의 평균 수명이다. 개든 고양이든 평균 수명이 15살 이하이니, 떠나보낸 후의 슬픔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종종 들려오는 '펫로스 증후군'에 의한 반려인의 자살 소식이 결코 남일 같지 않은 이유다. 이는 반려동물을 '가족' 이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겠다. 


의외로 관련 서적은 많지 않다. 2009년에 나온 <펫로스 반려동물의 죽음>(책공장더불어), 2014년에 나온 <고마워, 너를 보내줄게>(미래의창) 정도이고, 올해 들어 두 권 정도가 나왔다. 그리고 어느 유명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아시아)가 출간되었다. 


반려인의, 반려인에 의한, 반려인을 위한 책


이 책은 지극히 '반려인의 반려인에 의한 반려인을 위한' 안내서이다. 반려인이 아닌 사람은 낄 자리가 없을 정도다.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게 기정사실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도 인간과 똑같은 권리, 즉 동물권이 있고, 동물이 결코 상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면 애초에 이 책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반려동물은 가족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 두 명의 지은이와 한 명의 옮긴이 모두 반려인이라는 이 책, 그래서 비록 1000만 명에 육박하는 반려인을 두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반려동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가히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종일관 반려동물 상실(펫로스) 과정과 극복을 깊이 있게 다루는 와중에, 반려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상실에서 오는 슬픔을 억누르는 대신 소중히 간직하라는 역설이 그 첫 번째다. 온저히 받아들여 치료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점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심은 성장을 동반하며 회복력, 융통성, 안목이 키워지는 건 물론, 감사하는 능력을 증가시킨다고. 무엇보다 삶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가 늘면서 현명함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펫로스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웰바이(Well-bye)'부터 '웰다잉(Well-dying)'까지 다루는 놀라운 스펙트럼이다. 반려동물의 죽음에 직면하며 죽음이 삶의 정상적 일부라는 진실과 죽음이 실패나 재앙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충고한다. 나아가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작디 작은 웰바이 실용서에서 뜻밖에 삶의 중요한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지침들이 펫로스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지만, 그래서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만큼 반려동물과 우리 인간이 밀접한 관계를 영위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런 식의 깨달음이 더 와 닿는 것이다. 


펫로스 증후군에 필수적인 책


그럼에도 이 책은 '안내서'이기에, 반려동물을 잃은 반려인이 해야 하는 생각과 행동을 알려주려 하는 본분을 잊진 않고 있다. 펫로스가 부모님을 잃은 것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반려동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안락사를 과감히 지지하며, 반려동물을 잃은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도 전해준다. 장례식, 상담도 적극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 과정을 알려준다. 그러며 반려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무식한' 호의 내지 막말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중 특별한 몇몇 과정들은 충격적이지만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반려동물과 부모님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도 모자라 반려동물을 더 위에 올려놓는 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저자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죽음이 가정이나 일상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매일 이야기하고 만지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반려동물과의 놀랄만한 정서적, 신체적 친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함을 발생시키는데 그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일정 이상 동의할 수밖에 없는 논리인 게 분명하다. 그런 한편 다른 대체 반려동물을 언제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지에 대해 모호하고 유보적인 대답을 하는 데에는 조금 안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판단을 상실의 슬픔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반려인 당사자에게 맡긴다는 것 아닌가. 거기에 '시간과 친구가 돼라' 따위의 말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펫로스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며 괜찮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책은 반드시 반려동물을 잃기 전에 읽고 취할 건 취하고 재고해야 할 건 재고해야 하겠다. 반려인으로서 필수적인 책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를 소개한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글만 읽어도 머릿속에 어떤 상(狀)이 그려진다. 그 자체로 치유가 되는 듯하다. 


"자연 속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에 감싸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죠.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 부드러운 초록이 약해진 잎을 뚫고 하늘을 향해 돋아나고, 오래된 생물의 껍질은 해안을 따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습니다. 소라게가 바다 우렁이가 남긴 회색 나선형 집 속으로 웅크리며 들어갑니다. 게를 보면서, 그의 집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의 쉼터가 됐을까 상상해 봅니다. 신선한 공기, 새의 노래, 부스럭거리는 잎들과 알록달록한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광경과 파도 소리, 연못에서 찰랑이거나 험난한 개울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위로해주는 포옹이지요."(본문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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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것이 나의 도끼다>


<이것이 나의 도끼다> 표지 ⓒ은행나무



3년 전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굉장히 의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파리 리뷰'라는 세계적인 문학잡지에서 20, 21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를 인터뷰해왔는데, 도서출판 다른에서 설문을 통해 가려내 단행본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1, 2, 3권 각각 12명씩 소개했고 내가 본 건 1권, 거기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 밀란 쿤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소설가들 위에 군림하는 소설가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의외였는데, 소설 쓰는 건 '노동'이라는 것이었다. 흔히 소설가를 비롯 예술가를 생각하면 연상되는 신의 어깨 위에 올라탄 천재의 이미지와는 정반대. 충격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개인적으로 한때나마 소설가를 꿈꾼 적이 있기에, 둔재도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안도감을 심어준 고마운 책이었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우리나라 작가들의 인터뷰집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당연할듯, 이 책의 영향인지 나의 바람을 들었는지 2015년 7월에 'Axt'라는 소설 서평 잡지가 생겼고 소설가 심층 인터뷰가 커버 스토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 10명 분을 모아 단행본으로 나왔다. <이것이 나의 도끼다>(은행나무). <작가란 무엇인가>가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를 표방했다면 이 책은 '소설가들이 소설가를 인터뷰'를 표방한다. 비전문적일지 모르나 더 심도 있고 심층적일 수 있겠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


이 책에서 인터뷰한 10명의 작가는 나름대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 같다. 파스칼 키냐르(프랑스)와 다와다 요코(일본, 독일)는 외국 작가라는 공통점 외에 인터뷰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고 또 직접 대면하지 않은 관계로 심층적인 대화를 하지 못한 것 같아 제외하기로 하고, 남은 8명은 4명씩 구분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철지난 구분일지 모르지만, 순문학과 장르문학으로 말이다. 공지영, 이장욱, 김연수, 윤대녕은 순문학에, 천명관, 듀나, 정유정, 김탁환은 장르문학에 가까운 것 같다. 


그들 자신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순문학 쪽은 문단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아니더라도 문단에서 수여하는 문학상들을 다수 수상한 작가들인 건 분명하다. 이 네 명 중 이장욱을 제외한 세 명이 국내 최고 권위 문학상이라 할 만한 이상 문학상을 수상했다. 반면 장르문학 쪽은 문단과는 크게 관련 없이 대중과 밀접한 글을 쓰는 것 같다. 작가나 소설가라는 호칭보다 '이야기꾼'이 어울린다고나 할까?


물론 여기 실린 작가들은 하나같이 국내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들이다. 더불어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글을 뽑아내는 장인들이다. 그게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겠다. 개인적으로 장르문학 혹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서 있는 두 기수 천명관과 정유정 인터뷰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공지영, 김연수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많이 할애했고, 이장욱, 윤대녕은 재미없었으며, 듀나는 알 수 없었다. 김탁환은 평소 긍정적이지만은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좋은 인터뷰였다. 그는 장인이었다.


소설가 천명관과 정유정이 말하는 소설


'문학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선 일단 밥벌이가 되어야 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천명관, 시종일관 한국 문단에 맹폭을 날리며 사이다 발언을 이어간다. 시스템이 만들어낸 작가는 이미 세상에서의 유효성을 상실했고, 절대 무너지지 않는 권력인 문단마피아가 그 원인이며, 그 대안으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대중과 소통하며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터뷰어는 그를 문단 외부와 내부의 경계, 또 순문학과 장르문학 경계에 서 있는 이라고 했는데,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천명관의 글을 좋아하는데, 결코 막힘이 없고 고민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편 힘 있고 의미도 있는 무엇보다 재미있는 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래>의 충격은 앞으로도 오래오래 갈 것이다. 소설의 한 축을 지탱하는 데 충분한 작품이고 작가이다. 앞으로도 대부분의 작가들이 문단을 통해 데뷔하고 활동을 이어가겠지만 그와 같은 생각과 활동을 하는 작가도 나와주길 바래본다. 


'힘 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꿈꾼다'는 작가 정유정,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으로 이어지는 최근 한국소설로는 찾아보기 힘든 베스트셀러 행진의 주인공이다. 이중 <7년의 밤>을 읽었고 나머지 둘은 아직 읽지 못했는데, 그 어마무시한 흡입력 때문에 고민이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너무 빨려들어갈 것 같아서 말이다. 그의 소설은 시간 있을 때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한다. 


그는 소설이나 글보다 '이야기'를 말한다. 재미와 의미의 조화로서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만들어주고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비록 그의 소설은 한 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그가 말한 것들이 충분히 녹아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소설가의 피나는 노력 하의 핍진한 소설 쓰기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그저 소설로 모든 걸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가가 되려는 이에게 정유정의 인터뷰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매우 실제적인 도움을 말이다. 소설가로서의, 소설로서의, 그리고 소설가가 만드는 소설로서의. 반면 천명관의 인터뷰는 소설계 내부와 소설 독자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길 것이다. 그의 남다른 스케일을 가늠하며, 그를 더 자주 찾게 만들 게 분명하다. 


소설, 소설가, 소설계, 소설 독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최근 몇 년간 여러 불미스러운 사태 때문에 안 그래도 침체 일로인 한국 문학계가 더욱 침체된 감이 있다. 이 책은 그 진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종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초석으로 만들어진 것일 테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다시 소설' '그래도 소설' '결국 소설' '오직 소설'이 아닐까 싶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는 더욱 피나는 '소설'로서의 침잠,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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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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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민음사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세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본문 9쪽)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첫 단락이다. 이 소설의 축약이자 주인공 김지영 씨의 이때까지 삶의 축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세른네 살 전후의 일반적 여성 삶의 축약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데, 점점 평범하기조차 쉽지 않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를 반추해볼 때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 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삶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삶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삶을 배제하고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읽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김지영 씨의 삶에 교집합 하나는 있을 거고, 공감 하나쯤은 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무시한다.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던 소설 문법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다. <82년생 김지영>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또는 보고서 같다. 소설 같진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사교양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10년 동안 일한 경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김지영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증세가 계속되자 결국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를 정신과에 데리고 간다. 김지영 씨의 삶을 돌아본다. 비로소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누군가가 김지영 씨의 삶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니 소설 자체가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콘셉트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연히 이 점을 인지했을 터, 김지영 씨의 삶이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못박아 두려는 의도다. 사실 굳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아도 김지영 씨의 삶은 수많은 보편들의 합집합이다. 마치 <전원일기>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사실감도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사랑을 받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김지영 씨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여성의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궤적에서 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다. 김지영 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 '남'동생과의 차별이고, 삶에서의 수많은 그때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대답을 삼키고 그만두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고 특수한 상황이어야 하지만, 우린 굉장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저 '우리 이야기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구나' 하며 공감어린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 긴장 없이 읽기가 너무 쉽고 다음다음이 예측되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이 소설을, 딱 그만큼만 문제의식을 지니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할 게 더 많다. 그녀의 삶에서 특수한 부분을 많이 느낄수록 이 사회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이 더 옭아맨다


김지영 씨는 치료를 잘 받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은 부정한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피력한다는 것 자체를, 그런 시대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다. 소설은 끝나지만, 여전히 김지영 씨는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했다. 그러고는 아마 꼭꼭 숨겨놓았던 말, 여자로서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상징성이다.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찾으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게 뻔하다. 반면, 이대로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하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변화에 큰 일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마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가 껄끄럽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게...


그녀가 다른 누군가로 빙의해서 하는 말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의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의 엄마가 그러한대, 시댁에 가서 김지영 씨에게 빙의한 그녀의 엄마가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라고 말하고 곧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김지영 씨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엄마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소설이 그 방도를 생각해내진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으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보다 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여기까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방법을 생각해내는지는 수많은 김지영의 몫일 것이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도 방도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변하는 듯해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변형된 형태로 폐해가 잔존하는 것 같다. 수많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대현이 해야 할 일도 물론 많다. 많은 남성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김지영 씨 담당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어설픈 페미니즘을 지니고 있을 줄 안다. 어설플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아니면 제대로 동조를 하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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