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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그림 한 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참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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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림을 통해 문화를 읽는다 <그림문답>


<그림을 보는 법>(아트북스)이라는 책이 있다. 화가와 미학자의 대화를 통해 그림 감상 비법을 알려준다는 기획이었다. 내용과 서술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시대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새롭게 다가왔다. 

아마도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을 맞대면하면 그림 자체에 압도되어 그림 안에서 허우적대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오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는 궁금증에 앞서,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건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궁금증까지 해결이 되었다면 작가가 보일 것이고 그의 삶과 사상이 보일 것이다. 그 이후에나 시대적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림밖에 안 보이겠지만, 알고 나면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인다(혹자는 다른 것들을 배제한 채 그림만을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예술작품의 감상법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시대적인 관점'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대의 문화·경제·정치·일상 등의 관점으로 또는 관점과 함께 그림을 보는 것일 게다. 즉, 그림이라는 프레임(창)을 통해 당대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는데, 바로 그 대화의 방법론으로 그림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문답> ⓒ 생각정원



이런 방법을 이용해 조선 시대 500년을 이야기한다는 취지로, 각 시대를 대표하는 6명의 대화가와 그의 대표작을 읽으려는 시도를 한 책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그림문답>(생각정원).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한 저자는 통섭적인 전공의 묘미를 살려 책에서 문학과 미술, 그리고 역사를 버무려냈다. 

사실 그림과 역사, 문학과 역사, 그림과 문학 등으로 섞어서 한층 복합적인 재미를 주자는 취지로 나온 책들은 부지기수이다. 어떤 책은 '미술은 역사의 자서전'이라는 말을 모토로 내세워 그림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자 하였고, 어떤 책은 미술 통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기 위해 역시 그림을 통해 역사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림문답> 또한 위의 책들과 맥을 같이 한다. 각각 15세기 조선의 건국, 16세기 사림 시대, 17~18세기 당쟁 시대, 18세기 조선 문화 르네상스 시대, 19세기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시대, 20세기 조선의 마지막을, 한 명의 화가와 그의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과 화가와 함께 했던 지식인들의 고뇌가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새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국가의 모든 것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문화사의 회화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보기엔 그 선두에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것은 조선이 건국되고도 몇 십 년이 흐른 뒤지만, 적어도 회화 부분에서는 첫 번째라고 손꼽을 만하다.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이 여러 의미로 완벽한 조선 제1의 그림 작품이다. 

이 작품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가 있다. <몽유도원도>는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을 꾼 장면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좋아했던 안평은 21명의 조선 최고 문사들로 하여금 그림을 위한 찬시를 짓게 했다. 그래서 <몽유도원도>는 그림과 함께 멋진 시들도 있다. 

어느 날 안평은 백악산 아래를 거닐다가 꿈에서 본 것과 같은 땅을 찾게 되었고 그곳에 정자를 만든다. 하지만 그곳은 왕으로 흥할 땅이라 그가 곧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수양대군은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칼을 빼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란을 일으킨다. 꿈은 꿈에서 그쳐야 했던가? 그가 꿈꿔왔던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만다. 

왕자의 꿈 - "그러하냐. 내 꿈을 모두 가져갔으니 이제 네가 내게 그림을 가져다줄 일만 남은 게로구나…."
화가의 꿈 - "나의 오랜 꿈, 나만이 그릴 수 있는 산수를 남기고 싶다던 꿈이 비로소 때를 만난 것이리라."
조선의 꿈 - "조선 최고의 문사들이 우리와 함께하였구나. 꿈을 즐기는 자, 꿈에서 벗어나려는 자….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명문들이 아니더냐. 이들의 문장이 없다면 조선은 어둠 속으로 잠기고 말 터인즉, 이 그림 한 폭으로 조선의 꿈을 이야기한다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 속에서)

책은 이와 같은 콘셉트로 꿈(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념(무명(無名)의 <독서당계회도>), 자아(윤두서의 <자화상>), 풍경(김홍도의 <소림명월도>), 미감(조희룡의 <홍백매팔폭병>), 회고(장승업의 <귀거래도) 순으로 진행된다. 각각의 단어는 그림이 그려진 당대를 상징하는 주요한 정신을 뜻한다. 

역사학도답게 기본적으로 철저히 연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였고, 미술학도답게 그만의 그림 보는 법을 선보인다. 또한 국문학도다운 글 솜씨로 사이사이 복원할 수 없었던 곳을 훌륭히 메운다. 마치 팩션 역사소설을 보는 듯, 인문교양서다운 딱딱함은 전혀 없다. 

"<소림명월도>는 '이런 장면도 산수화가 될 수 있는가' 즉, 현대의 어법으로 바꿔 묻자면 '어느 달밤의 풍경이 그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김홍도는 어떻게 이와 같은 질문에 직면했을까. 아니, 그 자신이 던지지 않았다면 18세기 말의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질문일 것 같다."


"장승업이 활동한 시대는… 혼란한 고종 시절이었다. 전통과 근대의 교차점이라 할까. 그야말로 옛것과 새것이 혼재하는 시대였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자리에는 어째 걸맞지 않은 '회고'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장승업은 그 과도기를 지켰던 화가다."(본문 속에서)

아직 가을은 먼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은 어느새 흘러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 있을 것이다. 조선 500년을 한 눈에 훑듯 한 속도로 말이다. 그때쯤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무덥기 짝이 없는 여름 한복판에서도 이 책을 꺼내 들면, 책 속의 시(詩)·서(書)·화(畵)에 빠져 더위가 느껴질 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오마이뉴스" 2013.7.29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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