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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행복'에 해당되는 글 21건

제목 날짜
  •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에서> 2020.07.06
  • 이보다 사랑스럽고 필요하고 바람직한 리더가 있을까 <패딩턴 2> 2019.03.22
  •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행복의 나라> 2018.08.08
  • 2018년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와 인간 군상들 <소공녀> 2018.04.25
  •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나이, 29살의 이야기 <나의 서른에게> 2017.12.15
  • 한국을 떠나야 할까, 한국을 바꿔야 할까 <한국이 싫어서>(2) 2017.05.15
  • 아름다움을 쫓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파인만의 길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2017.04.10
  • 행복이란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다섯째 아이> 2017.02.20
  • 떼려야 뗄 수 없는 삶과 죽음, 긍정적으로 접근해보기 <헤피엔딩> 2016.08.29
  • 비극과 고통에서 행복과 사랑을 끄집어내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2016.01.04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7. 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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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 ⓒ넷플릭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 소속의 에스티는 17살이 되자 중매결혼한다. 그녀는 집을 떠난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 대신 할머니 손에 길러졌는데, 반면교사 삼아 결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시댁 모두의 '감시' 아래 그녀에겐 오직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에스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 또한 엄마와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유일하게 외부와 소통하는 창구였던 외부인 피아노 교사를 통해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주고간 증서 덕분이기도 했다. 그 증서 덕분에 에스티는 독일에서 살 수 있었다. 에스티 엄마도 다름 아닌 베를린에서 거주 중이었다. 


에스티 시댁 집안 어른들은, 에스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베를린에서 그녀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집안의 수치이기도 하지만 사람 찾는데는 도사인 모이셰를 부른다. 에스티의 남편 얀키의 사촌 형인 그를 얀키와 함께 베를린으로 급파해 에스티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한편, 에스티는 베를린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찰나 우연히 음악원 학생과 마주한다. 그리고 평소 애정하던 음악을 향한 열정을 비로소 쏟아보기로 하는데... 과연 그녀는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를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향해 음악 등으로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데보라 펠드만의 자전적 회고록 'Unorthodox'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원제가 품은 뜻인 '이단(異端)'이라는 단어가 주인공 에스티의 여정과 맞물려 눈에 띈다. 


작품은 크게 세 트랙으로 진행된다. 현재 베를린에서의 에스티, 에스티를 쫓아온 현재 베를린에서의 모이셰와 얀키 그리고 과거 뉴욕에서의 에스티.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모이셰와 얀키의 트랙을 뒤로 하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베를린과 뉴욕의 에스티가 극을 이룬다. 천천히 확고하게 변화해가는 에스티를 보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베를린과 뉴욕 모두에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에스티도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지난 3월 말에 공개되어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로 칭송받고 있는데, 그동안 개인적으로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고 있었다. 제목에서 그 어떤 흥미 요소나 의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거니와, 생각할 거리가 많고 어려울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늦게나마 뚜껑을 열어 보니, 생각할 거리는 많았지만 어렵지 않았고 매우 속도감이 빨랐으며 의외의 서스펜스도 선사해주었다. 드라마로서의 흥미 요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다가오는 의미적 소구점 또한 그 어떤 콘텐츠보다 적확했고 논쟁적이었고 풍부했다. 


살고자 하는, 살고 싶은 삶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에 대해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여성을 '아기 낳는 기계'로 대한다는 정도는 알아두자. 극중 에스티의 말로는, 홀로코스트로 희생 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수를 복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여성은 그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공동체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결혼하면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리곤 가발을 쓰고 다닌다. 외부인의 시선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한 그들만의 '문화'이다. 고로, 비판은 하되 비난을 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럼에도, 비록 '문화'라는 이름이라고 해도, 인류 보편적인 시선에서 용인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구석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본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는 말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도 길이 남을 '명작'으로 불릴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누구도 알기 힘들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들만의 문화를 수면 위로 정확하게 끌어올렸다. 우리의 시선에 다양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의 명작인 이유에 드는 요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에스티의 결심과 여정이다. 


에스티가 향하는 곳은 하필 독일 베를린, 히틀러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대인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숨쉬는 듯한 곳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에스티는 도망칠 때 입었던 가발과 옷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감히' 치장을 하며 불경한 음식들을 먹는다. 또한 여성으로서 상상도 해본 적 없거니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교육'도 받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느껴 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이 아닌, 살고자 하는 또는 살고 싶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에서 그치면 명작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뉴욕에서와는 다른 베를린에서만의 실패를 그리며, 또 다른 차원의 고민에 가닿게 한다. 뉴욕의 공동체에서는 '육체(몸)'적으로 아주 편안하다.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도 편할 것이다. 먹고살 걱정 없이,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걸 해주니까 말이다. 반면, 베를린에서 에스티는 정신의 자유를 얻었지만 육체의 힘듦을 얻었다. 현실 앞에서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거니와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하여, 에스티를 찾아낸 얀키는 설득을 위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대신 모이셰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얀키가 '이제 나도 바뀔게.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반면, 모이셰는 '네가 베를린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은 네가 해'라고 하는 것이다. 에스티로서는 모든 걸 건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 돌아가든 남아 있든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여정을 봐온 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응원할 게 분명하다. 


에스티의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들과 우여곡절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여성 아닌 남성이지만 가슴이 벅차다. 아무리 부조리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낀다고 해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곧 '세상'일 텐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건 대다수에게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그녀를 응원하는 것도 응원하는 것이지만 일면 부러움과 함께 선망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녀와 나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녀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인류보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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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를린에서, 삶, 세상, 여성, 여정, 음악, 인류보편, 탈출, 하시디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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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사랑스럽고 필요하고 바람직한 리더가 있을까 <패딩턴 2>

오래된 리뷰 2019. 3.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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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패딩턴 2>


영화 <패딩턴 2> 포스터. ⓒ이수C&E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은 영화에도 통한다. 수많은 영화들이 여러 면에서 여러 종류의 성공을 거두곤 여지 없이 속편 작업에 착수해 잊어버릴만 할 때 내놓는다. 하지만 개중에 많은 것들이 '왜 만들었냐'는 말을 듣는다. 


그럼에도 속편을 내놓는 건 돈 때문이다. 물론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로 못 이기는 척 내놓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욕을 먹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편의 확실한 성공의 후광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게 불 보듯 뻔하기에 그러는 것이다. 


여기, 위대한 속편들이 있다. 위대한 속편이 있으려면 위대한 오리지널도 있어야 하는 바, 오리지널도 괜찮지만 속편이 더 괜찮은 영화들이다. <대부 2> <에일리언 2> <터미네이터 2> <배트맨 2>. 챙겨보니 많지 않다. 형만 한 아우가 되기란 그만큼 어렵다. 


영국 영화 <패딩턴 2>에 '위대'를 붙이는 건 꺼려지지만, 오리지널보다 괜찮은 속편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할 영화임엔 분명하다. 전편보다 캐릭터의 귀여움, 서사의 촘촘함, 사건의 스펙터클이 다양해지고 깊어지고 매끄러워졌다. 


행복을 찾아서


영화 <패딩턴 2>의 한 장면. ⓒ이수C&E



페루에서 런던으로 와 박제사의 위협을 무릎쓰고 브라운 가족과 함께 훌륭히 적응에 성공한 말하는 곰 패딩턴, 이젠 브라운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삭막했던 동네에서도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사실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사고뭉치이지만,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패딩턴은 자신을 구해주고 길러주신, 혼자 남게 된 숙모에게 뜻깊은 선물을 해드리고 싶다. 그가 고른 선물을 런던의 12 명소를 소개해주는 팝업북, 하지만 굉장한 고가이기에 알바로 돈을 벌어야 한다. 역시 시작은 우당탕탕, 결과는 대성공. 


하루만 있으면 돈을 마련하게 될 찰나 누군가 가게에 칩입해 팝업북을 훔치는 걸 발견한다. 하지만 재빠른 도둑, 오히려 패딩턴이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가게 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패딩턴, 하지만 그곳에서도 행복 바이러스는 그대로이다. 


중요한 건 숙모에게 줄 선물, 팝업북. 팝업북을 되찾아야 누명도 풀리고 범인도 잡고 숙모에게 선물도 드릴 수 있고, 결국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뭘 할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꾼다는 것


영화 <패딩턴 2>의 한 장면. ⓒ이수C&E



영화는 다분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마냥 귀여운 와중에 착한 마음씨와 행복 바이러스와 완벽한 교훈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는 패딩턴이란, 이보다 더 억울할 수 없겠지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인생 밑바닥 중 밑바닥인 누명 쓴 감옥 생활 와중에도, 패딩턴은 슬기롭게 행복하게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수많은 벽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칠해 이용할 줄 안다. 


'말하는 곰'으로 인간 세상 한가운데 떨어져 적응에 성공하고 없어선 안 될 이로 거듭난다는 건, 단순히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을 바꾼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대상이, 1편이 런던이었다면 2편은 감옥이다. 


본인, 말하는 곰이 보수적인 나라 영국의 보수적인 수도 런던의 조그맣고 적적한 동네에선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불 보듯 뻔하다. 그것도 대책 없이 착하고 사고뭉치에 옳은 말만 하는 곰이라면? 아니꼽은 건 물론, 불편하고 심지어 '이상한' 타지 개체의 칩입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감옥도 다르지 않다. 크고 작은 잘못을 한 범죄자들이 모여서는, 뭘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게 있고 좋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계속 잘못만 저지르라는 법은 없다. 패딩턴은 잘 알고 있다. 


이보다 바람직한 리더가 어디 있을까


영화 <패딩턴 2>의 한 장면. ⓒ이수C&E



이런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비평적 성적에 비해 흥행 성적이 형편 없는 이유는 영국 영화이기 때문일까. 세계 최고의 도시이지만 우중충하고 꽉 막혀 있을 것 같은 런던을 중심으로, 과하게 귀엽고 유쾌하고 행동적이지만 한편 숙모님 말씀을 신앙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꽉 막힌 면모를 지닌 패딩턴이 마냥 와닿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패딩턴은, 편견 없고 신념 있고 생각이 없지만 행동은 있으며 행복을 주고 사랑을 받는다. 완벽과는 하등 거리가 먼, 가장 필요 없는 존재일 것 같지만 사람들의 좋은 면을 보고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그야말로 가장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리더 아닌, 좌중 각각에게 힘을 실어주어 좌중과 함께 하는 서번트 리더 말이다. 패딩턴은 알고 있다. 내가 널 섬기면 너도 날 섬길 테니, 이보다 더 바람직한 리더가 어디 있고 공동체가 어디 있겠나. 


1958년 처음 등장해 1975년 최초로 영상화된 '패딩턴', 이후에도 100편 이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랑스러운 패딩턴은 <패딩턴 3>을 비롯,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마다 우린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환영할 테고 그만이 줄 수 있는 행복 바이러스에 가감없이 감염될 것이며 그보다 더한 사랑을 그에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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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교훈, 리더, 영국, 패딩턴 2,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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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행복의 나라>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8.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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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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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자리, 자살, 죄의식, 죽음, 파국, 행복, 행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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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와 인간 군상들 <소공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4.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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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공녀>


영화 <소공녀>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 그리고 <소공녀>의 공통점은 무얼까?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 모두 괜찮게 감상했다는 점. 그리고 '광화문 시네마'라는 독립영화 제작사의 작품들이라는 점. 요즘 가장 유명하고 잘 나가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이었던 감독 다섯 명과 프로듀서 한 명이 뭉쳤다고 한다. 


마블 영화의 대표적 아이콘인 '쿠키영상'을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모든 독립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홍보가 쉽지 않은 독립영화의 여건 상 효과적인 방법임에 분명해 보인다. 영화 한 편의 홍보 뿐만 아니라 제작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도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독립영화 제작사로서 계속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알리는 데도, 스스로 계속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고취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광화문 시네마는 6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 중 전고운 감독과 김태곤 감독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김태곤 감독은 <1999, 면회>를 연출했고, 2년 전 <굿바이 싱글>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로 장편 데뷔를 했다. 


대한민국의 현시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네 번째 영화이자 최신작 <소공녀>는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들을 상당수 결합하여 '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3~40년 전 힘들기 짝이 없던 시절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정도의 현시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소(이솜 분)는 하루 45000원을 벌어 혼자 살아가는 3년 차 가사도우미다. 월세 30만 원 짜리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5000원 짜리 밥을 먹고 12000원 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2500원 짜리 담배 한 갑을 피운다. 그런데 집주인이 월세를 5만 원 올려버렸다. 그리고 2015년이 되자 담배가 4500원으로 올라버렸다.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는 미소는 2015년 새해 벽두 6000원 적자가 나자 포기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그녀가 포기한 건 위스키 한 잔도, 담배 한 갑도, 빌빌 거리는 남자친구도 아닌 집이다. 그 즉시 집주인에게 밀린 월세를 청산하고 집을 나선다. 우선 대학교 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즐겼던 크루 5명을 찾아가 당분간 신세를 져보려 한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셀프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베이스 문영, 30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했던 시댁 부모님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형편 없는 음식 솜씨로 욕먹고 사는 키보드 현정, 결혼해서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하여 20년 동안 돈을 갚아야 하는 이혼 위기남 드럼 대용, 늦은 나이에도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빈둥대는 보컬 록이,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지만 남편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뿐인 기타 정미. 그리고 웹툰 작가 지망생이자 현재 백수로 재직 중인 남자친구 한솔까지. 


2018년 트렌드와 인간 군상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N포'를 기본으로 하는 트렌드들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결합시켰다. 특히 주인공 미소는, '미소 서식 환경, 즉 미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의 영문명 microhabitat과 '미생물·곤충'을 뜻하는 이름으로 유추해보고 더불어 하루 일당 45000원과 하루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을 생각해볼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이 터무니 없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과 남자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포기했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일을 더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쯤에선 소확행 트렌드의 '유행적 부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 즉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의 한 행태라고 할 수 있는 트렌드라고 치부할 수 없게, 해선 안 되게 된다. 


우린 잘 알고 있다. 영화도 우리가 아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다. 2015년작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열심·악착의 비극은 이제 포기·행복의 미학으로 변했다.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퇴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퇴행이겠지만, 개인으로 보면 발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유행이 아닌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이 트렌드를 바라봐야 하겠다. 


영화는 비단 한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소가 집을 포기한 것처럼, 그녀가 찾아가는 친구들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은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친구들은 미소처럼 가심비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따를 수 없는,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고 집이 없어 불쌍하다느니 청년 실업만큼 청년 주거 대책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이 트렌드는 유행도 아니고 사회정치도 아니다.


'웃픈' 비현재적 부분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몇몇 부분, 아니 여러 부분에서 비현실 아닌 비현재적이다. 21세기 세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3~40년 전 경제·사회 과도기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경천동지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바뀐 건 그걸 잘 받아들인 사람들 뿐이라는 게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이 비현재적인 장면들은 그야말로 '웃프다'. 한껏 찌질함을 풍겨 웃기고, 그 찌질함이 너무나도 진지한 자기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슬프다. 특히 광화문 시네마의 네 작품에서 모두 얼굴을 비친 페르소나 안재홍이 분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면면은 웃픈 찌질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공녀>는 나에게, 우리에게 확고한 자기 신념과 삶의 방식이라는 트렌드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듣지 않고 비난도 무시할 수 있지만, 과연 이 문제가 거기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무리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배제시켜 단절되는 것과 존중하되 강제하지 않고 범 공동으로 함께 가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회는, 정부는, 이 미생물·곤충처럼 작은 이들도 존중하고 또한 함께 가야하는 구성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반면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기성세대, 사회, 정부에 반발하고 신념을 지키고 삶의 방식을 영위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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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나이, 29살의 이야기 <나의 서른에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2.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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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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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야 할까, 한국을 바꿔야 할까 <한국이 싫어서>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7. 5. 1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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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한국이 싫어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지 ⓒ민음사



2010년대 들어 한국을 강타한 신조어 중 하나가 '헬조선'인데, 아무도 지옥에서 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희망 따윈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하는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남들처럼만 살기 위한 피나는 노력, 인생 한방 역전을 위한 로또, 이전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의 포기, 헬조선 땅을 떠나는 이민. 이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무엇일까. 노력은 남들도 다 하고, 로또는 가능성이 희미하다. 반면 포기가 가장 쉬운 것 같다. 이민은?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다. 


10여 년 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헬조선 탈출의 의미 부여는 전혀 아니었고, 외국에서 살며 일하고 놀고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였다. 이왕이면 공부도 하면 좋고. 그런데 요즘 워킹홀리데이는 다른 의미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민의 교두보인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최장 2년까지 가능한대, 그렇게 돈을 모으고 스스로를 현지화시킨 다음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며 영주권 준비를 한다. 


사실 이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에 의한 계획적 이민이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이민이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외하벌이를 위한 국가의 계획적 이민이 주를 이뤄왔다고 한다. 그러던 외환위기 이후 양상이 크게 바뀌어 경제불안정과 교육 불안 때문에 중산층의 이민이 주를 이룬다. 그 이후가 경쟁력이 없는(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010년대 헬조선 탈출이다. 


장강명 작가가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통해 보여주는 헬조선 탈출 양상은 사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누구든 생각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고, 내 동생은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곳에선 행복할까


'계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한 행운아다. 그것도 대기업이라 할 만한 W종합금융에. 그녀는 또한 예의 바르고 허세 부리는 거 없고 목표가 뚜렷한 남자 친구 '지명'도 있다. 그럼에도 3년 동안 회사를 다닌 후 때려 치우고 호주로의 이민을 위해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 그녀는 왜 한국을 떠나는가? 그녀의 말을 빌리면,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 


N포 세대 당사자들이 보기에 기가 찰 노릇일지 모른다. 취업도 했고 연애도 하고 있는데 더 무얼 바라냐 하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비전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가난하고, 그렇다고 엄청 예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N포 세대가 가진 엄청난 스펙트럼을 발견한다. 계나처럼 '행운아'조차도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 스펙트럼만큼 슬퍼지는 바, 급기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N포 세대의 비애도 엿보인다. 계나가 포기한 건 희망이고, 계나를 부러워 하는 이들이 포기한 건 여전히 현실적인 조건들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게 계나가 정착하게 된 호주는 어떨까. 그곳에서라도 잘 산다면 그녀가 포기한 희망이 갈 곳을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곳에 가서 되찾을 수 있기에, 국가야 어쨌든 한 개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 계나의 삶을 위시한 실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계나는 그곳에서도 지옥을 맛본다.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의 지옥이다. 기본적인 거주 조건조차 최악인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영주권을 딴 계나이지만 그녀는 '외부인'이라야만 겪을 곤경을 계속해서 겪는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희망은 눈에 어른거리지도 않는 상황의 연속. 인간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소설이 끝날 때쯤 일이 있어 한국에 왔다가 다시 호주로 가는 계나가 하는 말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는 그래서 허무하게 들린다. 


한국을 떠나지 말고 바꿔 보자


동생이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던 건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에서 더 잘 살아보려고' 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이 하는 말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계나에게 시민권을 딴 후에는 한국에 와서 같이 살고 늘그막에 다시 호주로 가서 살자고 한다.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다면서. 그러나 계나에게 호주 영주권이 수단으로 작용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다. 그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나도 한국이 싫다.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또한 적어도 한국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쉽게 떠나진 못할 것 같다. 한국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도 큰 틀에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과 오히려 더욱 하찮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몸소 겪어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계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호주가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호주에서 '지금' 행복하지 못하는지? 왜 '앞으로' 꼭 행복해져야지 하는 다짐을 계속 하는지? 헬조선의 물질적 탈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지 않을까. 작가가 그려내며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같이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국에서 희망까지 포기한 삶을 영위하며 그저 현실에 안주하란 말인가. 저성장 시대인 만큼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다른 방도가 있다. 거칠 게 말해서, 한국을 바꾸는 것. 물론 계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그것을 이유로 한국을 떠난 것이기는 하다. 


방법은 다양하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고민하며 강구해야 한다. 사자와 맞짱뜨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사자를 굶어죽게 할 수도 있고 사자를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며 하물며 사자를 하이에나로 둔갑시켜 버릴 수도 있는 시대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논란과 논의가 있을 줄 안다. 논란에서 그치지 말고 논의로 발전되길 바란다. 


한국이 싫어서 - 10점
장강명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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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n포 세대, 한국이 싫어서, 행복, 헬조선, 호주
  • BlogIcon 여름햇살
    2017.05.18 12:28 신고

    매번 느끼지만 해당 주제는 쉽게 결정 내려질 수 없는 것 같네요. 정답 또한 없고.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잘 읽고 갑니다 :-)

    • BlogIcon singenv
      2017.05.18 12:30 신고

      이것도 저것도 하기 힘들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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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쫓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파인만의 길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4.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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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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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다섯째 아이>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7. 2.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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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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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려야 뗄 수 없는 삶과 죽음, 긍정적으로 접근해보기 <헤피엔딩>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8.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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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해피엔딩>


<해피엔딩> 표지 ⓒ엔자임헬스



10년도 훌쩍 넘은 것 같다. '웰빙'이라는 거의 모든 곳에서 쓰였던 적이 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시대를 지나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만을 강요하는 시대를 지나 정신적인 풍요와 성공이 삶의 진정한 척도로 부상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거다. 


웰빙의 뜻은 점차 확대 되었다. 이제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닌 '잘 죽는 것'도 웰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지도 10년이 넘은 줄 안다. 일명 '웰다잉'이다. 말이 쉬워 웰다잉이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웰다잉이 사회적으로 퍼진 건 '고 김수환 추기경' 연명 치료 중단 판결 덕분이다. 2009년 선종한 그는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기계적 치료에 의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왔고, 법원은 환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웰다잉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인,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온다. 시류에 은근히 민감한 출판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제목에서 죽음이 물씬 풍기는 <해피엔딩>도 그중 하나다. 영화, 소설에서나 봤음직한 '해피엔딩' 즉, 행복한 죽음이 가능할까 싶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반드시 자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 문제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싹해지며 한기가 흐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책은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이 여기에 해당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할까'까지 도출해보려 한다. 산증인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그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책에는 그런 죽음들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 화해하고 화합하는 현장.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음 앞에서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욕심 없이 모든 걸 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죽음이 축복이고, 행복한 죽음이 가능하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의 이야기


책을 보면서 내가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는 게 더 참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 반면 내가 죽는 건, 너무 두렵지만 심적으로 이전보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렇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을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로 떼어낸 채 살고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 앞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후회하고 삶을 축복하고 삶을 찬양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죽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삶이 행복한 죽음을 막진 않는다. 누구나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삶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정녕 후회 없이 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산다기 보다,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맞지 싶다. 


책에는 행복하지 못한 죽음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억울하기 그지 없는 죽음, 쓸쓸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 등.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죽음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죽음이다. 가족을 비롯해 그 죽음을 그나마 챙겨주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존엄사


일명 '연명치료결정법'이 통과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된다. 자세한 사항을 숙지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결정하게 된 첫 걸음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그것인데,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생명 연장 혹은 특정 치료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사전에 서류로 작성해 놓는 것이다.  그건 곧 내 죽음을, 내 삶을 내 손으로 맞이하겠다는 표시이다. 


물론 여전히 연명치료와 존엄사에 대한 논란은 거세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 자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그건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회생불능의 환자에게 고통만을 가해 살게 할 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존엄사를 자살과 동일시 하는 건 '틀린' 생각이다. 존엄사는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책은 소개한다. 무한긍정 에너지로 마지막을 살다가 간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녀는 살아생전 후회 없이 열심히 즐겁게 살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열심히 즐겁게 '살았다'. 정말 큰 축볼인진데, 그런 '죽음'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삶'이 부럽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삶을 살았다.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심오한 걸 원했다.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 훨씬 나아간 고찰이 있을 수 있겠나 싶다. 죽음을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 했다 하겠다. 죽음이 제대로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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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고통에서 행복과 사랑을 끄집어내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1.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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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표지 ⓒ열린책들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삶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보다 못한 삶 또는 나보다 나은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삶보다는 못한 삶을 들여다보는 게 편할 것이다. 그래서 나은 삶은 거의 자기계발 영역으로 빠졌다. 반면 못한 삶은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에서 예전 삶으로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을 그리고 있다. 못한 삶의 정도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필력뿐 아니라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에 의한 압도적인 슬픔보다 그보다 더한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최루성 콘텐츠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될 가족


엄마 쥘리앙과 아빠 로이크는 영영 빼도 박도 못할, 일상에 아로새겨질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들의 두 살 된 여자 아이 타이스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심각한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 못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서서히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멀고, 결국에는 생명 기능까지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환아의 동생이 태어날 경우 네 명 중 한 명 꼴의 발병 위험성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나쁜 유전자들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부산스럽고 자기 주도적이고 고집도 센 아이 타이스는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보며 쥘리앙과 로이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밖에. 이토록 치명적인 병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길이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타이스의 남은 생을 눈물 바다로 보낼 것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타이스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슬픔과 고통과 불 보듯 뻔한 비극과 불행을 딛고 타이스의 예견된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인지. 마지막의 삶이 그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기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택한다. 무엇보다 타이스를 위해...


"네가 이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된대. 엄마 아빠는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우리 예쁜 아기,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아주 예쁘게 살다 갈 거야. 다른 아이들이나 가스파르 오빠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네가 뿌듯해 할 만한 삶일 거야. 그 삶에 사랑만큼은 모자라지 않을 거야." (본문 중에서)


그들은 처참하고 지옥 같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한다


쥘리앙과 로이크는 셋째 아이를 낳는다. 언니와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이 25%에 달하는 아이. 25%의 확률은 100%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겨냥했다. 셋째 아이 아질리스도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이란다. 소름이 끼치고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내린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타이스를 잘 보내고... 아질리스를 잘 살려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모순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니 너무 힘들다. 그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들을 돕는다.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인가, 안도의 눈물인가, 체념의 눈물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 삶은 반대로 화창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들의 처참한 삶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런 길을 걷기로 결연하게 맹세했기로서니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타이스 덕분이다. 타이스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한다. 그저 사랑밖에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타이스한테 '사랑'은 남을 것이다. 타이스가 준 사랑, 타이스에게 준 사랑.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내다


흔히 비극과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사랑을 보고 '오그라든다'는 말을 쓴다. 그럴 때 고통의 눈물과 사랑의 환희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자 방법이다. 반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냈다. 극단으로 치닫는 건 좋지 못하고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맞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단에는 극단만이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귀여운 우리 딸, 엄마가 애원하잖니, 조금만 더 싸워 줘. 제발 버텨 줘. 네가 없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의 태양이고, 나의 세상이고, 나의 마음, 나의 힘, 나의 급소란다. 네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심연이야. 사랑한다, 내 딸아. 지금 가면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줘.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중에서)


이 짧은 소개로는 그들의 고통을 1%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또한 각자의 아픔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그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만은 이 짧은 소개로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사랑을 힘껏 공유하고 있다. 온전히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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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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