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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엄마'에 해당되는 글 1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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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는 볼 수 없는 충격적인 10대 이야기 <박화영>(2) 2019.10.01
  •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9.04.12
  • '여성의 날'에 한 번쯤 볼 만한 영화 4 2019.03.08
  •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 하지만 끔찍한 현실 <툴리> 2018.11.23
  • 지금은 없어진 '대지극장',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 2018.08.24
  • 그곳엔 공포의 광활한 대지가 있을 뿐...<달콤한 노래> 2017.12.18
  • 문소리가 전하는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 <여배우는 오늘도> 2017.10.25
  • 결국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딸에 대하여> 2017.10.23
  • 엄마와 아들, 그들에게 찾아온 비극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2017.05.06
  • 삶과 죽음의 운명, 그 속박을 풀 수 있을까? <줄리에타> 2016.12.16

10대는 볼 수 없는 충격적인 10대 이야기 <박화영>

오래된 리뷰 2019. 10. 1. 08:21



[오래된 리뷰] <박화영>


영화 <박화영>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2000년대 중반까지 독립영화 조·단역으로 활약한 배우 이환, 2008년 <똥파리>로 독립영화 주연급이 된다. 2010년대엔 <마이 리틀 히어로> <암살> <밀정> 등 메이저영화 조연으로 발돋움해 인지도를 쌓았다. 한편 그는 2013년 <집>이라는 단편영화로 감독으로도 데뷔하며 부산과 전주와 미쟝센 등 굵직한 영화제들 다수에 초청받으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7년에는 단편영화 <집>에서 모티브를 따 발전시킨 장편영화 <박화영>을 내놓았다. 부산 및 서울독립영화제와 파리한국 및 묀헨영화제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낳으며, 이환 배우에서 이환 감독으로 괜찮게 이착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식개봉을 하진 못했고 1년 여가 지나 2018년 7월에 극장으로 정식개봉할 수 있었다. 


영화 <박화영>은 10대는 볼 수 없는 10대들의 믿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들며 보고 있기가 이야기를 표방한다. 1990년대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2000년대 임상수 감독의 <눈물>의 뒤를 이어 10대 가출 청소년들의 리얼한 속사정을 전한다. 한편, 이환 감독이 주연급으로 분한 <똥파리>와 2010년대 최고의 10대 영화 <파수꾼>과 가출팸 이야기를 전하는 <꿈의 제인> 등의 영화가 겹쳐진다. 


'엄마' 박화영과 가출팸들


고등학생 박화영은 엄마에게 버림 받으며 남기고 간 허름한 자취방에서 가출팸들을 재우고 먹이고 챙긴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겐 '엄마'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데, 이상한 건 친구들이 그녀를 의지하는 듯하면서 가차없이 까는 것이다. 박화영의 단짝 은미정은 무명 여그룹의 일원으로 가출팸의 리더로 보이는 영재의 여자친구로 권력을 부리고 있다. 


영재는 다른 이들과 다름 없이 화영의 집에서 먹고 자고 놀면서 외형의 의지를 지속하고 있지만, 그 집에서 여자친구 미정이 다른 남자와 붙어 있는 꼴을 보면 미친놈보다 더한 행위로 화영을 괴롭힌다. 화영은 본인의 잘못이 없음에도 한없이 두려운 표정과 몸짓으로 영재의 몹쓸짓을 당한다. 한편, 영재는 미정과 화영이 붙어다니는 것도 싫어한다. 그 꼴을 보면 역시 미정 아닌 화영에게 끔찍한 화풀이를 한다. 


화영은 고등학생이지만 학교를 거의 가지 않고 하루종일 가출팸들을 챙기며 그들이 오지 않을 땐 안절부절 못한 채 기다리며 집을 치우곤 돈이 떨어지면 엄마가 사는 집으로 가 온동네가 들여다볼 만한 행패를 부리곤 한다.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화영은 끝없이 당하면서도 미정을 비롯한 가출팸들을 챙기는 것이다. 오히려 화영이 살아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듯 말이다. 


충격적인 10대 이야기


영화 <박화영>은 결코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하곤 하지만, 다른 세상 혹은 그들만의 세상으로 치부하곤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잘 알 것 같지만 사실은 대략 알 뿐이며, 대략이나마 알 것 같지만 사실은 아예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10대 가출팸의 내막을 상세하게 전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하여, 영화는 매우 충격적이다. 화영의 인간 본질적인 인정욕구와 함께 10대 때만 느끼는 인정욕구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외향으로 보이는 10대의 폭력 수준의 참담함이 충격적인 것이다. 한 장면도 건너지 않고 등장하는 욕설과 술·담배는 물론 족히 한 장면 건너띄고 등장하는 날 것의 정신·육체적 폭력과 아름답지 않은 섹스까지, 기억에 박힐 만한 수위 높은 장면들이 끝없이 나온다. 


함께 영화를 시청한 필자의 아내가 그동안 본 영화들 중 가장 기분 나쁜 영화라고 했을 정도다. 덧붙이기를 그런 만큼 영화를 잘 만들었다는 말도 되지 않겠냐고 하긴 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걸 옹호할 수 없고 옹호할 마음도 없지만 어른들의 책임도 막중하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즉, <박화영>은 기획의도를 잘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10대들의, 10대들밖에 모를 것 같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정작 10대는 볼 수 없기에, 정작 영화가 대상으로 하는 건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층인 어른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단순히 보고 있기 힘들다는 반응뿐 만 아니라 다른 무엇을 느껴야 한다. 어른의 시선에서 10대들을 바라보는 한편, 10대들의 시선에서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10대의 인정욕구


10대를 돌이켜 보면, 재밌기도 했지만 힘들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인생에 다시 없을 재미있는 한때를 수없이 누렸지만, 소위 '일진'이 아니었거니와 잘못 찍히는 바람에 괴롭힘의 대상이 된 적이 있어 힘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진 패거리를 향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든 동경은 나 또한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향한 동경의 시선을 갖는다니 말이다. 


화영이 자신의 집에서 먹이고 재우고 챙기는 가출팸을 비롯 영재에게 매일 같이 각종 폭력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단짝이라 불려도 손색 없는 미정에게 일말의 의심 없는 배신을 당하면서도 계속 놓지 않는 게 있으니, 그게 바로 그들을 향한 동경이다. 별 일 없으면 화영은 영재와 함께 한 자리에 있고, 영재가 없을 땐 욕하고 술담배를 하며 마치 한 패거리인 양 행동하는 것이다. 10대'만'의 인정욕구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10대 때 특출난 모양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한편, 엄마한테 버림 받고 나타난 화영만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10대 화영 아닌, 화영으로서의 화영 말이다. 그녀는 엄마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소위 '잘 나가는' 일진한테서, 특히 그중에서도 특출난 미정에게서 인정 받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이 '엄마'가 되어 그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진짜 엄마를 내면화·동일화하고자 하기까지 했던 게 아닐까. 


영화에서 어른은 몇 명 나오지 않는다. 그 몇 명의 어른조차 10대 아이들에게서 뭔가를 갈취하려 들고 그들을 이용해 욕망을 채우려 들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10대 아이들을 내버리던가 그들에게 밀려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내버리고 만다. "요즘 애들은 왜 저래. 말세다, 말세야."라고 치부해버릴 게 아니라, 본인부터 돌아보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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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10대, 가출팸, 박화영, 술담배, 엄마, 욕, 인정욕구, 일진
  • BlogIcon 여강여호
    2019.10.01 09:41 신고

    누구나 한번은 거쳐간 시간이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애써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9.10.01 09:46 신고

      이해하진 않더라도 또는 못하더라도 배척하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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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4. 12. 08:00



[모모 큐레이터'S PICK]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미국 뉴욕의 작은 섬에서 20년째 유치원 교사로 살아가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 매일매일 따분한 일상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종종 있는 야간 시 수업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좌절할 뿐이다. 자신의 평범한 예술적 감각을 이해와는 와중, 그래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어 위로가 되지만 다 큰 아들과 딸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그들은 부모를 경원시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원생 중 다섯 살 난 지미(파커 세바크 분)가 앞뒤로 오가며 시를 읊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 꼬마에게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리사는 곧바로 달려가 시를 받아적고는 보모에게 말해 집에서도 지미가 불현듯 읊는 시를 옮겨적을 것을 부탁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야간 시 수업에서 가서 발표하고 전에 없는 칭찬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몇 편 더 자신의 야간 시 수업에서 발표하는 한편, 지미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은커녕 주위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고 또 못하는 그의 시적 예술 재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시적 예술 재능을 지녔지만 욕망과 열망이 꽃피어난 자신을 대신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사의 지미를 향한, 아니 리사의 시적 예술 재능을 향한 광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치원 교사


원작의 제목은 <유치원 교사>, 이 제목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다브 라피드의 2014년작 영화 <시인 요하브>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즈가 '훌륭한 원작의 영리한 재해석'이라고 평했는데, 딱 들어맞다고 생각한다. 1980년생 사라 코랑겔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만큼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원제가 <The Kindergarten Teacher>, '유치원 교사'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고, 주체가 '작은 시인'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영화가 달달할 것 같다고 짐작하게 만든다. 즉, 한국어판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다. 


반면 원제 <The Kindergarten Teacher>는 그 무엇도 지레짐작하지 않게 한다. 대신 영화를 보며 계속 곱씹을 수 있다. 유치원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여자인 리사, 그녀는 이제 유치원에서 전에 없던 예술적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그건 교사, 엄마, 아내라는 명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에게 예술적 열망은 곧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가꾸고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40대 여성 리사의 삶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40대 여성 리사의 삶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매우 '시시하게' 시작된다. 평화롭고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을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곧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다. 안정적이지만, 그래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선 '리사의, 리사에 의한, 리사를 위한', 리사를 주체로 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고뇌와 열망과 삶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다섯 살 천재 시인 '지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에 의해 '모차르트급 재능의 천재 시인'이 된 지미는, 그러나 영화에서 결코 주인공도 주체도 될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범인 살리에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고, 그 영화에서 사실 주인공이자 주체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며 운을 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사와 지미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아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레오폴트가 철저히 교육시키고 또 일명 '그랜드투어'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홍보도 했기에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사는 지미의 보호자가 아니고, 다행히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보호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로 인해 변해가는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 또 한 축이겠다.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시 수업 교실에서도 그녀는 전에 없는 열망 어린 눈빛과 몸짓을 보이며 한껏 활기찬 삶의 여운을 내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량이 있어야 하므로, '누군가가 전해주는 시를 그저 읊을 뿐인' 천재 시인 아이 지미가 그 희생양일 것이다. 


예술적 열망의 표출


예술적 열망이 표출되다 못해 폭발한다.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크게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다층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리사가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분출할 매개체로 지미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 지미의 천재적 시적 예술 재능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극중에서 지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대략적으로나마 재단하기도 힘들 것 같다. 결국 감독이 전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건 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사의 시적 예술 열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교사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무료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열망은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리사의 열망과 욕망이 좀 더 다층적이고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시'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를 잘 모르지만, 시에 '추상'이 상당히 용인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에서 몇 번이나 읊어지는 지미의 첫 시를 인용한다.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 모차르트, 삶, 아내, 엄마, 여자, 예술, 유치원 교사,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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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에 한 번쯤 볼 만한 영화 4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3. 8. 12:20



[기획] '여성의 날' 영화 4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1975년 UN에 의해 공식 지정되었다고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2018년에야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그 지위가 다릅니다. 구 공산권이라 할 수 있는 동부유럽의 많은 국가들, 아프리카 남부의 몇몇 국가들, 베트남과 북한까지 공휴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고, 중국 등 몇몇 나라는 여성만 공휴일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날'의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1910년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 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이 주창해 이듬해부터 '세계 여성의 날'을 제정하고 조직해 기렸습니다. 1857년과 1908년 3월 8일에 미국 여성노동자들이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요구하며 벌인 대대적인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선거권은 여성의 지위 향상,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는 여성의 노동조건 개선과 같은 말일 것입니다. 즉, 여성으로서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 말이죠. 그런데, 과연 지금 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현되고' 있을까요? 


'여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관점과 생각들을 영화로 간략히나마 들여다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016년부터 올해 2019년까지 4년 동안, 매해 나온 1편의 대표적 영화들을 뽑았습니다. 투철한 문제의식, 엣지 있는 시각, 현실적인 생각, 여성만의 관점을 두루두루 살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프러제트>(2016)


영화 <서프러제트> 포스터. ⓒUPI코리아



20세기 초 영국,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 모드 와츠가 여성 참정권을 되찾기 위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구호 하에 폭력적인 활동을 하는 '서프러제트'와 함께 전진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역사적 인물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역사적 사실인 여성 참정권 운동을 기반으로, 여성으로서의 기본권에 대한 투철한 문제의식이 빛나는 작품 <서프러제트>입니다. 대단할 것 없는 이들의 대단한 여정이 빛납니다. '세계 여성의 날'의 시작과 결을 같이 하는 것 같네요.


영화가 보여준 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좌절과 전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남녀평등 쟁취와 실현에의 물음일 것입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끊임없이 투쟁해왔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걸 새삼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히든 피겨스>(2017)


영화 <히든 피겨스>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960년대 초 미국,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천재 흑인 여성들 3명의 이야기를 진지하지 않고 유쾌하게 그려내어 색다른 빅 재미를 선사합니다. 그들은 관리자, 엔지니어,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능력을 뽐내지만, '흑인 여성'으로서 이중 차별과 멸시를 당하죠. 


영화는 굉장히 유려하게 할리우드식 웰메이드의 수순을 따라갑니다. 차별 당하는 것과 차별을 이겨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죠. 하지만 이면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들 곁엔 백인 남성 상사가 있었고, 그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녀들이 받는 차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가 없는 체제였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들이 '출중한 실력을 갖춘' 여성이 아닌 일반적인 '여성'이었다면 과연 백인 남성 상사가 차별 철폐에 앞장섰을까? 이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고 특수한 게 아닌가? 엣지 있는 영화였지만, 보다 전투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게 아쉬움 아닌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툴리>(2018)


영화 <툴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두 아이를 키우는 마를로는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그녀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돌입하는데, 관심 없는 남편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그녀에게 보모를 추천하고 보모 툴리가 옵니다. 


영화 <툴리>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인 동시에 가장 끔찍한 현실을 그린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 '육아 전쟁'이라고 표현하기에 마땅한 아이 키우기 영화는, 사실 엄마를 위한 영화이자 엄마가 보아야 하는 영화여서는 안 됩니다. 엄마 아닌 이들이 보아야 하는 영화이죠.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엄마만 아이를 키운다는 전통적이고 비상식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마인드가 걸립니다. 엄마란 아이를 키우는 사람일 뿐인가, 그렇다면 여자는? 100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서프러제트>의 주인공이 들었던 '여자는 남편의 아내이자 엄마의 아이'일 뿐이라는 말과 다를 게 뭔가? 


이 영화를 보며 당연하다고 생각해선 안 될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의 엄마는 반드시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도 키울 수 있고 키워야 하죠. 그와 별개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의 엄마이자 여자는 배려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자가 전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해도 말이죠. 여자는 엄마여야 한다는 것이 사회통념상으로 굳어져서 풀리지 않을 때까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9)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8세기 영국, 절대권력의 여왕 앤과 앤의 조력자 사라 그리고 사라의 하녀 애비게일 간의 권력, 사랑, 욕망이 휘몰아치는 관계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여왕의 여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죠. 여왕 앤은 허울 뿐인 권력을 누리면서도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요. 


18세기라면 참으로 옛날이지만, 그래서 여성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할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한 나라를 이끄는 절대권력과 측근이 모두 여성입니다. 영화는 치밀하고 치졸하고 치열한 불편함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그런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게 하지만 말이죠. 


비단 권력뿐이 아닙니다. 사랑과 질투도 여성들끼리, 욕망에 몸부림치며 광기를 내뿜는 것도 여성들끼리, 밑바닥으로의 한없는 추락과 파멸 그리고 불안하고 불쾌한 성공과 유지 또한 여성들끼리입니다. 


남자로서 이 영화가, 여성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이 모습이('옛날 여성'이라는 시대적 의아함이 아닌) 전혀 불쾌하거나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제 개인의 생각 덕분일까요, 2019년 지금 시대의 정신 덕분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이 기막히게 완벽한 영화 덕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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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 더 페이버릿, 서프러제트, 엄마, 여성, 여성 참정권, 여성의 날, 툴리, 흑인여성, 히든 피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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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 하지만 끔찍한 현실 <툴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1. 23. 08:00



[리뷰] <툴리>


영화 <툴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두 아이를 키우는 임산부다. 큰딸은 의젓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기에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고 챙겨주어야 한다. 둘째 아들은 조금 특별하다, 조금 다르다. 예민한 게 정도를 지나칠 때가 많다. 와중에 그녀는 이제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운명이다. 육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가 태어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돌입한다. 큰딸을 최소한으로 챙기고 둘째 아들에게는 여전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정녕 밤낮 없이 셋째 키우기가 계속된다. 와중에 남편은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고는 게임 삼매경이다. 끝이 없을 것 같고 변함도 없을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모든 게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마를로의 오빠는 자신들이 야간 보모의 손에 키워졌다며 마를로에게 야간 보모를 권유한다. 어떻게 되든 아이는 엄마 손에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해 완강히 거절하는 마를로, 하지만 나날이 지쳐가며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오빠의 권유를 받아 들인다.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 분)가 등장한다. 


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가 케어해줄 거라 말한다. 이 당돌함 또는 당당함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점점 믿음직하게 와닿는다. 마를로는 툴리에게 마음을 열고 아이를 맡기며 한껏 여유로운 나날을 만끽한다. 하지만 툴리의 정체는 가히 궁금하다. 그녀는 누구이길래 마를로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를로 본인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것인가? 


끔찍한 현실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끔찍한 현실을 그려내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툴리>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이자 끔찍할 수 있는 현실을 끔찍하리만치 여지없이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했던 그때 D-Day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찬사를 받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육아 전쟁' 편을 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툴리>의 그것이 더 끔찍했다. 


데뷔 후 쉬지 않고 열일 중인 샤를리즈 테론이 세 아이의 엄마 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22kg나 찌우는 투혼을 불살랐던 게 이슈가 되는 와중에, 이 영화의 제작도 한 그녀는 <몬스터>의 에일린,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잇는 대반전 변신 캐릭터로 분했다. 이 영화들에서 그녀가 공통적으로 변신 공력에 맞먹는 연기 공력을 선보였듯, <툴리>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에 얼굴을 비치며 '찌질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론 리빙스턴이 마를로의 남편 드류로 희한하게 중심을 잡는 와중에, 툴리 역의 맥켄지 데이비스는 특유의 저음과 표정으로 샤를리즈 테론과 훌륭한 짝을 이룬다. 


한편 감독 제이슨 라이트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젊은 나이이지만 10대 때 연출 데뷔를 한 만큼 다수의 연출작을 보유한 그는, 우리에게 <주노> <인 디 에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에 특화된 그는, 지극한 현실의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잘 캐치해내어 건드려 내보인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인지하게 되며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은데 <툴리>도 그러하다.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키는 엄마의 모습


엄마의 모습은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킨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남자, 남편으로서 아직 아이는 없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지만 이 영화에서 마를로로 보여지는 엄마의 실질적인 모습들을 보고 참담, 경악, 슬픔의 감정을 복잡다단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쟁 같은 아이들 돌봄의 광경은 참담함을 야기시켰고, 밖으로 드러내기 힘든 엄마의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으며, 반전을 통해 보여준 여자, 엄마, 아내의 복합적인 자장에서는 슬픔이 밀려왔다. 


내 한 몸 온전히 건사하기 힘든 게 세상사는 이치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와 차라리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는 아이와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 세 아이를 온전히 키워낸다는 건 한없이 불가능의 영역에 수렴된다. 매일같이 한시도 쉼없이 똑같은 전쟁을 치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 그 자체이다. 영화의 시작은 참담이다. 


영화는 점차 그 참담함을 들여다본다. 디테일들은 경악이다.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함의 일환일 테다. 그럴수록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경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줄 젓을 짜는 유축기 사용 장면은, 사용자 엄마의 태연하고 하릴 없는 모습과 대비해 충격을 준다. 제때 젖을 짜주지 않아 가슴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도 그렇다. 실로 많은 걸 배운다. 충격과 경악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슬픔을 수반한다. 


이 영화가 주는 슬픔은 말할 수 없는 반전과 함께 온다. 말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면 2/3 지점에서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올 때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바로 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가장 이해되고 가슴에 와닿게 된다. 그러며 세 아이의 엄마가 여자이자 아내라는 걸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치유와 위로의 긍정적 목적


영화는 치유와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의 참담-경악-슬픔의 감정라인은 당사자에겐 치유, 보는 이들에겐 위로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치이다. 당사자인 주인공 마를로, 마를로로 대변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누구한테고 보여주기 힘들다. 거기에 부정이나 긍정, 무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를로는, 샤를리즈 테론은 가감없이 대신해주었다. 그 자체로 치유다.


보는 이들이 이 영화에, 마를로의 모습에 마냥 감동 종류의 감정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그런 현실은 애써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맞대면 했을 때는 나서기 힘들기에 어떤 식으로든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다시피 했지만 '영화'로서의 함의를 잊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의 감정 영역에 들게 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영화가 대신해주는 치유의 역할에 묘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이기적인,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 


사실, 이 영화의 대상은 엄마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엄마에게 이 영화는 또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서 공감 어린 끄덕끄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혹은 끝나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보러 가야 한다. 


반면, 당장의 엄마가 아닌 모든 사람은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실상을 한순간, 한 장면의 디테일을 통해서라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엄마를 보는 시선이. 나아가 아내를 보는 시선이. 궁극적으로 여자를 보는 시선이. 더 이상 '여'전사(女戰士)는 없다. 전사(戰士)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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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대지극장',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

생각하다 2018. 8. 24. 08:00



영화는 좋아하지만 극장을 잘 가는 편은 아니다. 아니, 영화를 보는 횟수에 비해선 거의 안 가는 편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일주일에 영화를 최소 2편 이상 보지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건 일년에 고작 몇 번 되지 않는다. 블록버스터를 즐기지 않고 작은 영화를 즐겨보기에 굳이 극장에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축인 것 같다. 


간혹 극장에 가면 남다르게 설렌다. 누군가에겐 허구헌 날 가는 연인과의 데이트 장소, 누군가에겐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는 일터, 누군가에겐 심심하면 들락거리는 놀이터인 극장이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몇몇 극장에서의 일이, 그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많은 기억이 없는 게 이런 식으로 유용하기도 한가 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첫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 <여고괴담>이다. 찾아보니 1998년 5월 말에 개봉했다고 하는데, 98년에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기억이 정확하다. 학교에서, 우리반 전체가 가서 봤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고, 충격적인 몇몇 장면만 기억난다. 그 유명한 최강희의 점프컷...


왜인지 몰라도 그때 그 기억, 극장에서 영화를 처음으로 봤던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지금 나에게 극장은 완벽한 혼자만의 영화 보기가 가능한 공간인데,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다. 중2 친구들이 모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떠들고 소리지르고 욕하고 액션을 취하고. 


대지극장에서의 <쥬라기 공원 3>




그 이후 기억에 크게 남는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쥬라기 공원 3>이다. <쥬라기 공원 3> '따위' 때문에 기억에 남는 건 아니고, 지금은 없어진 '대지극장'과 가족들끼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 때문이다. 아, 아빠는 없었고 엄마랑 나랑 동생이랑 가서 봤다. 동생은 당시 중3이었다. 


당시가 2001년, 2003년에 없어진 대지극장의 마지막 즈음이었다. 대지극장은 미아삼거리(지금은 '미아사거리역'이 된 '미아삼거리역' 주위를 통칭)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지금은 주위에 백화점이 두 개, 종합쇼핑몰이 두 개, 이마트가 한 개 있는 강북의 중심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당시에는 대지극장이 전부였다. 


서대문의 화양극장, 영등포의 명화극장과 더불어 홍콩영화 3대장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그곳에서 홍콩영화를 본 적은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대지극장에 관한 말을 들었고, 수없이 자주 대지극장을 지났으며, 수없이 대지극장을 갈 수 있었지만, 정작 나는 딱 한 번 <쥬라기 공원 3>을 보러 대지극장에 갔었던 것이다. 


동생이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좋아했다. 1, 2탄은 집에서 비디오로 봤었을 텐데, 3탄만은 극장에서 보고 싶다고 했었을 테다. 당시 우리집은 아빠, 엄마가 교대로 보시는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평일은 고사하고 주말조차 온가족이 외부에 나가서 뭘 해본 기억이 없다. 세 가족이라도 극장 나들이를 한 건 굉장한 것이었다.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




1965년에 생겼다는 대지극장은 2003년에 없어졌다. CGV가 우리나라 최초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1993년 강변에 열고, 롯데시네마가 1999년 일산점에서 시작해 폭발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메가박스가 동양 최대 규모의 코엑스점을 2000년에 오픈했으니 오래 그 자리를 버텼다고 볼 수 있다. 


대지극장이 사라진 곳에는 복합쇼핑몰 트레지오가 생겼다. 그리고 그곳에 CGV가 들어섰다. 2007년의 일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곳은 망했다. 북적이던 옛 느낌, 상징과도 같았던 옛 명성이 없어졌다. 물론 영화를 보러 가면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여느 영화관 건물처럼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쥬라기 공원 3>을 보러 간 이후에도 엄마와 두 번을 더 극장에 갔다. 당연하게도 극장은 그곳, 옛 대지극장 자리에 들어선 CGV 미아였다. 두 번 모두 조조로 봤는데, <인셉션>과 <관상>이었다. 엄마도 아주 재밌고 알차게 보았다고 하셨으니, 엄마의 영화보는 눈썰미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함께 가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한 번은 서로 갈 길을 갈 수밖에 없었고 한 번은 근처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에 갔다. 그 또한 엄마, 나아가 가족과 처음 가보는 패밀리레스토랑이었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도 없어졌다. 여러 모로 아쉬움 가득 남는 엄마와의 영화 데이트다. 


하고 싶은, 해야 하는 것들


더 늦기 전에 엄마, 아니 가족들과 극장에 가보고 싶다. 아빠는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지만, 영화를 보진 않더라도 극장이란 델 함께 가보고 싶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히 한 번쯤 했어야 하는 수순이 아닌가 싶다. 나도 나지만, 부모님도 부모님이었다. 무심한 걸까, 무심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정말 무섭게 빠르다. 나의 만만했던 미아사거리역이 말이다. 빠르게 바뀌고 있다. CGV 미아도 도태되면 어느새 없어져버릴지 모른다. 그러면 가족들과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게 아닌가. 꼭 그곳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이왕이면 그곳이면 좋겠다 싶다. 그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에게 '대지극장'은 특별하니까. 


무엇이든, 누구든,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한다. 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 테고,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다. 나에겐 그게 가족들과 함께 옛 대지극장 자리에 있는 CGV 미아로 영화를 보러가는 거다. 소박하다면 한없이 소박하지만, 나에겐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미뤄온 일이고 결코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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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공포의 광활한 대지가 있을 뿐...<달콤한 노래>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12. 18. 08:00



[서평] 2016년 공쿠르상 <달콤한 노래>


소설 <달콤한 노래> 표지 ⓒ아르테



프랑스 파리 10구 오트빌 가의 근사한 아파트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한 보모가 자신이 기르던 아이 둘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죽으려 했다. 남자 아기는 즉사했고 여자 아이는 병원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이 충격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보모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아이들은 왜 죽었어야 했을까. 시간은 아이들의 부모가 버티다 못해 보모를 들이려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폴과 미리암은 둘째를 낳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보모를 들여야 했다.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이들을 완벽히 다루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생활은 너무도 불안하다. 집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일터로 가서 아이들을 케어하고 일터를 완벽히 꾸며놓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 


덕분에 폴과 미리암은 자신의 일터에 완벽히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루이즈는 요정이었다. 그래서 루이즈를 가족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간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영원할 순 없다. 그들은 루이즈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견디기 힘들다. 너무 완벽하고 예민해서 가끔 혐오감 같은 게 드는 것이다. 


폴과 미리암이 자신들의 편함을 위해 아이들을 루이즈에게 맡긴다. 루이즈는 보모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완벽히 수행한다. 폴과 미리암, 아이들 그리고 루이즈 모두 행복하다. 그런데 어느새 이 집과 아이들은 루이즈의 것이 되었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뺏긴 것 같다. 그런 미리암의 생각이 루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루이즈는 결국 거절당하고 마는 것인가. 


참혹한 서늘함, 그 중심엔 알 수 없는 루이즈...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공쿠르상 수상작 <달콤한 노래>(아르테)는, 레일라 슬라마니의 불과 두 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이 소설로 완벽하리만치 참혹한 서늘함을 선사한다. 동시에 한없이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소용돌이의 궤적을 느낄 수 있다. 결국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이 소설에 나오는 누구보다 루이즈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루이즈에 대해 많이 듣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현재를 살아가며 어떤 마음이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자세히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잘 모른다. 그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지부터 시작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짓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일터에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찾아 발현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일터를 떠나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불행한 삶을 살수록, 삶의 본연 외의 것에서 자신을 찾고 가치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다른 건 잘 몰라도 루이즈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또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아이들을 완벽히 보살피고 집안을 완벽히 케어하고 폴과 미리암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루이즈는, 일평생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것들을 이 집에서 성공시키려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럴 때 이 집은 그녀에게 일터가 아닌 또 다른 삶의 공간이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는 감정선들


소설은 온갖 감정선들이 씨줄과 날줄로 치밀하게 엮어져 있다. 그중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선들은 엄마와 보모와 아이들의 것들이다. 엄마 미리암, 또 다른 엄마인 보모 루이즈, 그리고 아이들. 아이들은 이성보다 감정 아니 본능에 가깝다. 그들은 엄마보다 보모를 따른다. 엄마 이상의 애착을 느낀다. 


엄마는, 적어도 이 소설에서 엄마 미리암은 이성에 가깝다. 남편 폴이 음악을 공부하면서 이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캐릭터라면, 반면 그녀는 법을 공부했기에 이성에 가까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아이들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 아이들과 멀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루이즈는 아이들 너무나도 잘 다룬다. 아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안다. 감정에 가까운 그녀다. 그러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부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까지도 정확히 캐치한다. 감정적이지만 이성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상태는 깨지기 쉽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괜찮지만, 그녀의 삶이라는 게 극단과 극단을 오가지 않는가. 그녀가 분해되면서 날아간 파편들은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향한다. 


이토록 특징 없고 존재감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캐릭터가, 이토록 큰 임팩트와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은 시종일관 단 한순간도 여지없이 온갖 부정적인 느낌을 이어간다. 긍정적인 느낌을 한순간이라도 느낀다면 그건 더 큰 부정을 위한 도움닫기일 뿐이다. 공포, 공포의 궁극이 아닌 공포의 보편, 소용돌이쳐 안으로 안으로 말려 들어간 그 끝에 있는 건 공포의 심연이 아닌 공포에 휩싸인 광활한 대지가 있을 것이다. 


달콤한 노래 - 10점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arte(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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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공포, 달콤한 노래, 보모, 본능, 아이, 엄마,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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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가 전하는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 <여배우는 오늘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0. 25. 08:00



[리뷰] <여배우는 오늘도>


18년차 한국 대표 여배우 문소리가 연출, 각본, 주연을 '꿰찬'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메타플레이



모든 콘텐츠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 그녀, 그들, 우리, 너도 모두 '나'이다. 그래서 창의적이고 참신하고 독특하고 전에 없던 이야기들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놀랍도록 황홀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 '보편타당'을 지향하는 것이다. 아니, 굳이 지향하지 않아도 이야기는 거기에서 출발해 거기로 나아간다. 


글쓰기의 기본이라 하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는 '일기'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끝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정도가 될까? 이를 영화로 옮겨보면 어떨까. 연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부분을 영화로 만드려 할 것이다. 


올해로 18년차 '여'배우 문소리, 한국을 넘어 세계에 자랑하는 연기파 배우다. 하지만 본인의 말대로 200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20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선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다. '여배우'의 숙명일까, '엄마'로서의 한계에 직면한 것일까, '영화계'의 변화 때문일까. 그녀가 직접 연출, 각본, 주연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준 <여배우는 오늘도>를 통해 들어보자. 


여배우, 생활인, 영화인 문소리


문소리 배우를 통해 보는 여배우, 생활인, 영화인의 3막. ⓒ메타플레이



영화는 세 개의 단편을 1막, 2막, 3막으로 나눠서 보여준다. 먼저 '여배우' 문소리 편. 친구들과 북한산 등반을 하는 문소리 배우는 우연히 한 제작사 대표를 만난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려와 막걸리 한잔 하는데 또 만난 제작사 대표 일행. 그녀에게 무작위로 쏟아지는 '여배우'에 대한 생각 없는 질문들, 벅차다. 


다음으로 '생활인' 문소리 편.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갈 뿐인 문소리 배우. 그녀는 어느 역할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거기엔 항상 유명인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든 걸 뒤로 하고 도망가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영화인' 문소리 편. 유명하지 않은 감독의 빈소에 가게 된 문소리 배우. 단촐한 빈소를 뒤로 하고 나오려는 찰나 누군가가 부른다. 그녀와 함께 쓰레기 같은 이 감독의 옛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남자 배우다. 흑역사와 자리를 함께 하려니 짜증부터 난다. 그런 와중에 젊은 여자가 빈소를 찾더니 오열을 하는데...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


영화는 짜임새 있게 여성, 여배우, 그리고 영화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메타플레이



'문소리'를 구성하는 것들을 여러 시각으로 나눠서 바라보았다. 자신의 다른 모습을 봐달라는 호소,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바에 대한 공감에의 바람, 영화계를 향한 폭로 또는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건 '영화인' 문소리가 아니었을까. 문소리는 영화가 가장 잘 맞고 영화를 가장 좋아할 게 분명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자로서 살아가는 영화배우 또는 영화배우가 여자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고찰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배우로서 예뻐야 하는 게 좋은지, 매력이 있어야 하는 게 좋은지. 데뷔 때부터 주연으로만 살아온 그녀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연급으로 하향조정되고 있는 게 '여배우'이기 때문이 아닌지.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그녀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명명된 삶의 모양새가 있다. 집에 오면 여배우가 아닌 여성이 된다. 엄마 노릇, 딸 노릇, 아내 노릇, 며느리 노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노릇 노릇 사이에 공인된 여배우의 역할이 겹쳐진다. 각종 노릇을 하기에도 여배우 노릇을 하기에도 벅찬데, 혼용되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하니 죽을 맛이다. 술을 끊을 도리가 없다. 


그 삶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을 듯. 그래서 다분히 노골적인 폭로성의 다큐멘터리도 아닌, 그렇다고 다분히 영화적인 설정의 비현실적인 천상의 메시지를 선보이는 것도 아닌, 충분히 설득력 있으면서 조금의 자학과 자기반성과 자신으로의 스포트라이트성 메시지를 담은 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여성의 현주소, 여배우의 현주소, 영화의 현주소다. 


이 영화를 봐야하는 이유


영화 내외적으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들이 있다. ⓒ메타플레이



얼핏 이 영화를 볼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어쨋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선보이든, 누군가가 겪었던 일을 선보이든,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을 선보이지 않았는가. 그 자체로 우리완 하등 상관없는 세계다. 하지만 문소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편을 보나 영화인이 아닌 사람이 나오고 문소리 배우를 포함한 영화인들과 엮인다. 결국 모든 영화인이 향하는 곳은 관객을 포함한 대중이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와 지대한 상관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건 특별한 존재인 영화배우와 평범한 일반인이 모두 살아가는 게 비슷하지 않겠냐는 시각과 또다른 동질성의 시각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개인으로서의 삶의 정리 또는 대중과의 소통으로서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영화'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건, 가장 공을 들인 게 분명한 마지막 3막에 있다. 지극히 영화인으로서의 시각과 의견을 담고 있는 3막은 누가 봐도 홍상수로 대표되는 양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계와 영화인을 향한 수준 있고 강도 높은 비판과 영화를 향한 진정성 어린 연민을 담고 있다. 


문소리 배우의 오랜 팬으로서 또는 문소리라는 이름을 오래도록 들어온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특별하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일단 보면, 문소리의 팬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배우는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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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여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딸에 대하여>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10. 23. 08:00



[서평] <딸에 대하여>


소설 <딸에 대하여> 표지 ⓒ민음사



일찍 남편을 보내고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나', 남편이 유일하게 남긴 유산인 집에 서른을 훌쩍 넘었어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학교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딸애'를 들인다. 딸애는 7년 간 사귀어 왔다는 '그 애'와 함께다. 나로선 정녕 상상하기도 싫고 어려운 그들과의 동거지만, 딸애의 부탁을 져버릴 순 없지 않은가. 서로를 그린과 레인으로 부르는 그들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딸애는 안 그래도 어렵게 살아가는 시간강사의 삶 위에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삶을 얹혀 놓았다. 딸애처럼 레즈비언 시간 강사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기 때문인데,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로 딸애가 그러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요양원에서 보살피는 무연고 치매노인 '젠'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이다. 


젠은 젊은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고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해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후원했다. 평생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나', '딸애'와 '그 애', '젠'의 이야기 <딸에 대하여>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그 안엔 현시대를 가로지르는 첨예한 사항부터 시대와 상관 없이 오래도록 당연시 되어온 문제까지, 주로 소수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성애자 시간강사, 홀몸의 중년여인, 무연고자 치매노인, 모두 소수자이기에 앞서 모두 여성이기에 삶의 고단함을 향한 이중부과가 매겨져 있는 느낌이다. 


'딸에 대하여'보다 '여성에 대하여'


소설은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로 '평범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아니, 제목을 앞세워 그렇게 포장한 것이리라. 실상, 딸보다 '나'와 '젠'에 대하여 즉 엄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게 맞다. 여기서 나에겐 젠이 딸애와 겹쳐 보이니, 결국 '여성에 대하여'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제목이라 하겠다. 


어떤 여성을 말하고자 함인가. 소설에선 남성이 주인공으로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통적 보수의 전형과도 같은 나는 딸애가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성공과 여성으로서의 결혼적 성공을 동시에 바란다. 소설은 그 정도에 머물러 있는 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성장' 매커니즘을 따른다. 그 끝에는 '여성'이 아닌 '공동체'가 있다. 


한편,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될 수 있는 '퀴어' 소재의 주인공들인 딸애와 그 애는 그 이슈를 가슴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현실상 머리로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당연한 삶의 결정체로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소설은 퀴어의 당위성에 집착하는 대신 객관적 사회문제로 격상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젠'은 소설의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느낌으로 와서 소설의 모든 것에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느낌으로 떠나간다. 그녀의 지난 젊은 시절은 딸애를 보는 것 같고, 그녀의 현 시절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소설은 한국 모든 여성의 미래와 한국 늙은 여성의 현재, 그 한 단면을 젠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깨달음과 이해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삶과 행동,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그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녀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보내고 있으며 그녀들을 얽매기도 하면서 조종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은 여성이 상상하는 딱 그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내가 종국에 만나게 되는 공동체란 상상할 수 없는 여성의 삶도 상상할 수 있는 남성의 삶도 뛰어 넘는 연대다. 자신의 일과 딸애의 일에서 겪게 되는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아니 나의 일과 다름 없는 남의 일'의 정체를 깨닫고, 딸애의 성향을 이해할 순 없지만 딸애의 상상불가 위의 상상불가의 어려움은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의 가족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도는커녕 혐오를 하는 딸애가,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겐 얼마나 크나큰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될 것인지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런 매커니즘의 이해야말로 가족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의 깨달음과 성장이 거기서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서 파생된 '가족 아닌 자'인 젠을 향한 마음 또한 크나큰 깨달음과 성장의 한 면이다. 가족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해가, 가족이 아닌 자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의 발로다. 그 모든 게 '딸에 대하여' 생각한 끝에 나아가게 된 이 시대 평범 평균의 여성의 깨달음이다. 이제 '위대'라는 뜻의 수정이 필요할 때다. 위대라는 단어에 '보수로 대변되는 완벽'이 아닌 '진보로 대변되는 나아감'이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진실로 위대하다. 


딸에 대하여 - 10점
김혜진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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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 그들에게 찾아온 비극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오래된 리뷰 2017. 5. 6. 08:00



[오래된 리뷰] <케빈에 대하여>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고, 논란도 이런 논란이 없을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티캐스트


화려한 붉은 물결의 토마토 축제, 그 한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 분)가 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 그 붉은 물결은 끔찍하게 변한다. 더러운 소굴 같은 집안에서 깬 에바는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붉게 칠해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한다.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 없이 차를 타고 에바가 도착한 곳은 한 여행사,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에 발탁된다. 


신나서 집으로 가려는 찰나 길에서 마주친 중년여자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신나 죽겠어?"라고 말하더니 대뜸 에바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악담하면서 가버린다. 지나가던 이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만류하며 에바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중간 중간 알 길 없는 장면 장면들이 지나간다. 건물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다. 반면 에바는 홀로 그 앞에서 멍하니 지켜볼 뿐. 한편, 에바는 교도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대략 유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갇혔으며 엄마는 그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모성'은 당연한 것인가?


세상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모성'이다. 이 영화는 모성이 당연한 것인지 충격적으로 묻는다. ⓒ(주)티캐스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의 전모를 날카롭게 때론 섬뜩하고 끔찍하게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가능한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가? 반론은커녕 물음조차 쉽지 않은 명제인 '모성의 당연함'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해부되고 깨어진다. 


다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기일 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힘들었다.' 아기라면 으레 다 집 떠나가라 울어야 정상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결혼은 물론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아기 케빈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고, 차라리 공사장 소음 소리가 편했다. 그녀는 애초에 엄마가 되기 싫었고, 스스로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케빈은 갓난 아기를 벗어나자 엄마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에바는 당연히 케빈이 남자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케빈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커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만'을 향한 적대심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느 날, 에바는 케빈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다. 전통으로의 회기를 선택해 대가족화를 밀고 나가는 어느 부모, 그렇게 태어난 일가족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섯째 아이 벤, 이들의 처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 소설이 시대, 선택, 운명 등의 문학적 장치들을 정교하게 끌어들였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심리 등의 현실적 장치들을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비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


영화는 내내 비극이 찾아온다. 작은 비극들이 모여 큰 비극이 되는데, 이를 반복한다.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 ⓒ(주)티캐스트



상황이 이럴진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영화에서 크나큰 사건은 3번에 걸쳐 일어 난다. 사실 에바가 엄마가 되고 케빈이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비극 중 첫 번째는 영화에서 중요 분기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적대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바와 케빈 사이에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케빈이 실리아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느덧 청소년이 된 케빈은 가히 그 똑똑한 머리를 여전히 엄마 에바를 괴롭히는 데 쓴다. 엄마를 직접적으로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니, 노골적으로 적대적 눈빛이나 행동을 일삼는 건 물론 실리아를 괴롭히는 우회적 타격이나 엄마한테 자위 행위를 들켜도 멈추지 않는 등의 심리적 타격을 일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싱크대를 막히게 해서 에바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독극물을 사용하게 만든 후 실비아가 실수로 독극물을 엎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 일이다. 겉으론 실비아의 실수, 나아가 에바의 잘못이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케빈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은 거라는 사실. 그건 에바를 향한 케빈의 처절한 '복수'다. 결국 케빈의 복수는 에바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파국을 안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바의 지옥 같은 현실과 지옥보다 더한 강제적 과거 회상, 그리고 에바와 케빈의 적대적 일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에바의 현실은 무덤덤하게, 과거 회상은 몽환적으로, 에바와 케빈의 일상은 사이코틱하게 그린다. 무엇보다 청소년 케빈을 분한 에즈라 밀러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다. 틸다 스윈튼은 에바 그 자체였다. 


특히, 에바와 케빈의 사이코틱한 일상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분명 잔잔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인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이 엄청난 것처럼 이들의 소소한 듯한 티격태격이 섬찟섬찟하다. 그 가중 큰 이유 중 하나가 적나라함에 있을 것이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우린 기괴함을 느낀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언젠가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어김없이 큰 일이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 논란거리는 아마 '케빈'과 '에바'일 거다. 엄마와 자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비극이 들이닥친다면? ⓒ(주)티캐스트



누구의 '잘못'이라고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케빈은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던 못했던, 낳자 낳지 말자 등등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케빈을 낳아 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에바 자신이다. 그 이후에 엄마와 자식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케빈이 그렇게 된 건 엄마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고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행간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엄마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임을 적용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시선은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로 간다. 보다 중요한 건 케빈이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논란이 있을 줄 안다. 내 주장은 형성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최소한 에바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케빈이 갓난 아기였을 때 보인 에바의 행동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행동은 단지 아기가 싫다는 이유로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아몬드>는, 감정이 없이 태어난 윤재가 감정이 풍부하고 교육 열정이 투철한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과 교육을 듬뿍 받아 결국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다. 반면 누구나처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채 태어난 곤이는 어릴 때 받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올바른 감정을 지니기 힘들다. 결국 선천적인 건 없다는 거다. 


이 영화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과 후천적. 아마 에바는 케빈이 선천적으로 나쁘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에바)가 아닌 네(케빈)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자신, 풍부한 감성과 열정적이고 반듯한 이성으로 케빈을 대했다면 당연히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잘 크지 않았을까. 한없이 안타깝다. 영화 또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엄마와 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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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운명, 그 속박을 풀 수 있을까? <줄리에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12. 16. 08:00



[리뷰] <줄리에타>


<줄리에타> 포스터의 두 여인은 사실 한 명이다. 젊을 때의 줄리에타와 중년의 줄리에타. 젊은 줄리에타를 분한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손색이 없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는 로렌조와 함께 마드리드의 삶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한 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베아, 베아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딸 안티아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만에 듣게 된 딸의 소식에 줄리에타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취소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딸을 향한 사죄의 시작인 양. 


스페인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줄리에타>는 줄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와 편지를 쓰는 현재가 교차되는 형식을 취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줄리에타가 있고 감독은 줄리에타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여성' '사죄' '욕망' 등과 과거와 현재, 문학과 신화가 뒤엉켜 상당히 복잡다단한 이 영화는, 상징으로 표출되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야기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주요 줄기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삶에서 이런 층위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 여성도, 회상 속 20~40대 여성도, 그렇다고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처럼 '여성'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이 중에 하나인 바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싶다. 


줄리에타를 따라다니는 삶과 죽음의 운명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평생 줄리에타를 따라다닐 운명 말이다. 그녀는 그 속발을 풀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때는 1980년대, 대학에서 고전문학 강사로 있는 젊은 줄리에타, 난해한 패션의 소유자이지만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 그녀, 야간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녀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난 나이든 남자가 말을 건다. 너무 싫었던 줄리에타는 그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한 후 레스토랑 칸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아내를 몇 년 동안 간호해 왔다는 소안. 거기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줄리에타. 


얼마 후 일어나게 된 끔찍한 사고, 줄리에타가 무시한 나이든 남자가 자살을 한 것. 줄리에타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곧 소안과의 육체적 관계로 해소한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후 받게 된 소안의 편지로 그를 찾아가고 그들은 곧 함께 한다. 기차에서의 관계로 얻게 된 아이 안티아도 함께. 기차에서 겪은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혀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비극은 그녀를 빗겨가지 않는다.


영화 초반,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대비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그 둘이 줄리에타의 삶을 따라다니며 곧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바, 기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차는 일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곳에서 타에 의해 정해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바, 운명적 요소가 굉장히 진하다. 줄리에타도 그 운명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열차는 그녀를 계속 따라 다닌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유추해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시작된 운명의 문이 거기 있다. 문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 알겠는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줄리에타는 운명이 선사한 지독히 속박에 갇혀 헤어나기 힘들어 하고 있다. 로렌조가 보낸 구원의 손길도 어쩌지 못한다. 스스로만 풀 수 있을 뿐.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모녀 관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모녀 관계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줄리에타에겐 누워 지낸 지 오래된 엄마가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아빠도 있다. 그리고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게 된 여자도 있다. 줄리에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데 아빠와 여자의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습도 목격한다. 역겨움을 느끼는 줄리에타, 하필 그때 즈음에 소안이 예전 아내가 아팠을 적에 그의 절친 아바와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싸늘하게 소안을 물리는 줄리에타, 소안은 어부로서 할 일을 하러 나가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 소안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줄리에타는 옛날 기차에서의 죽음이 겹쳐 죄책감이 되살아난다. 어느새 큰 안티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어린 안티아에게 삶을 위탁하다시피 하는 신세를 진다. 참으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는 정신을 차린 줄리에타. 어린 안티아는 이제 다 커서 18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줄리에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덥친 건, 그녀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잃음'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는 간신히 회복한 그녀를 또다시 후려친다. 이번엔 딸의 독립으로. 그녀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현재는커녕 과거에 머무르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개인적으로 <줄리에타>에서 기억에 남는 부부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다. 자신으로 인해 저질러 졌다고 믿는 두 명의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줄 정도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딸 안티아다. 우연치 않게 홀모 밑에 살았다는 딸의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선 안 될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다. 일반적인 엄마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다. 딸의 인생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진 최선의 사랑이자 모성애다. 하지만 딸에게는 최악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엄마에게 돌아가 빙퉁그러진 모성애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엄마와 딸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생각하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하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묵'은 갈수록 영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침묵은 '잠적'으로 확대된다. 잠적은 곧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어떤 인생이 남아 있나.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시스가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10년 만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한 것처럼, 줄리에타도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고는 재회할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패션, 그럼에도 그녀가 '고전문학' 강사인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했다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드러나는 부분인데 그녀가 강의하는 내용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율리시스' 이야기. 


율리시스는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여신 칼립소를 만나 살다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10년 만에 아들과 재회한다. 영화에서 소안은 줄리에타와 만나 살지만,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줄리에타는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루는 이 영화에서 '율리시스' 모티브는 단연 정점이다.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녀들이 재회한다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또다시 불행해지기 싫을 테니까.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12분 마다, 12시간 마다, 12일 마다, 최소한 12개월 마다는 재회하는 우리들은 어떨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까? 잘 알고 싶어나 할까? 상실을 경험해야 슬픔을 알까. 


줄리에타를 응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와 딸을 응원한다.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 아니다, 사랑과 모성애는 엄마만, 여성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모든 인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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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딸, 사죄, 삶, 신화, 엄마, 여성, 욕망, 운명, 율리시스, 죽음, 줄리에타, 페드로 알모도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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