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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아내'에 해당되는 글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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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 없이 시아버지 모시고 12년, 이제 독립하다! <웰컴 투 X-월드> 2020.12.09
  •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2019.04.12
  • 대문호 체홉이 들여다본 '아내'의 사랑과 욕망 <체홉, 여자를 읽다.> 2019.03.13
  • 볼 때마다 아내가 "고마워!"를 연발한 책 <썅년의 미학> 2018.10.29
  • 내 아내의 여행법을 소개합니다 2018.07.02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한 번만 와요" 2014.07.29
  • <인형의 집> 여성의 날, 이 책 꼭 읽어보세요(6) 2014.03.10

남편 없이 시아버지 모시고 12년, 이제 독립하다! <웰컴 투 X-월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12. 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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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웰컴 투 X-월드>


영화 <웰컴 투 X-월드> 포스터. ⓒ시네마 달



세상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부부를 중심으로 친족 관계에 있는 이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을 일컫는데, 혼인, 혈연 등의 방법으로 이뤄진다. 그러던 게 점차 다양해져, 천륜이라 부르는 혈연이 아닌 관계의 집단이나 구성원들도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대표적인 게 반려동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족에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여기 매우 전통적인 가족 개념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례가 있다. 오히려 그래서,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가족에의 또 다른 다양성과 포용성을 나타내는 것도 같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와 딸이라는 보고도 믿기 힘든 구성원을 가진 가족. 78세의 시아버지 한흥만, 51세의 며느리 최미경, 23세의 딸 한태의. 최미경은 12년 전 남편을 먼저 보냈지만, 이후로도 계속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한태의 감독이 제작, 연출, 촬영, 편집, 주연 등 영화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도맡아 한 다큐멘터리 <웰컴 투 X-월드>,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이 가족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뻔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결코 그렇지 않다. 참고로, 주인공은 이 가족이 아니라 최미경이라는 걸 미리 말해 둔다. 


남편 없이 시아버지 모시고 12년


학창시절 전교회장까지 도맡아 했던, 똑똑하고 리더십 넘치고 끼도 다분한 한태의. 하지만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으며 삼수를 했고 결국 엄마의 반대를 무릎쓰고 숭실대 영상과에 진학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두고 기대주에서 웬수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최미경이 시아버지 사이에서만 관계에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니라, 딸과의 사이에서도 있다는 걸 에둘러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런가 하면, 아내로서 12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도 있을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남편과 아내, 딸과 엄마로서의 최미경, 결혼한 많은 여성이 참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갈 텐데 이분의 경우 보다 훨씬 극대화되었다고 하겠다. 남편이 세상에 없은 지 12년이 지났건만, 남편과의 관계로 생긴 관계들을 저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니 말이다. 그것도 남편 없이 12년이고, 남편과 함께였던 세월까지 합치면 18년이라고 한다. 2013년에 호주로 건너간 한태의의 3살 터울 오빠도 함께 살았다고 하니, 최미경이라는 분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 


한태의는 그런 엄마를 보고 비혼을 결심, 선언하기에 이른다. '나를 위해 살겠다'는 밀레니얼 세대다운 당찬 포부인 동시에, 평생을 지근 거리에서 두고 본 엄마의 행태(?)에 반감이 설 수밖에 없는 합리적이면서 당연한 선택인 듯보인다. 그런 딸과 엄마는 서로를 가까이하지 못할 것 같은데, 세상 어느 모녀보다 친근해 보인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관계인 것 같다. 답답하고 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은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 가장 좋은 부분이다. 


그녀는 왜 그렇게 살아왔을까?


어느 날, 한흥만은 최미경과 한태의에게 통보를 한다. 따로 살자고 말이다. 18년을 함께 살았지만 여전히 잘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집은 한흥만의 것이었으니, 최미경과 한태의는 곧 나가야 했다. 최미경으로선 독립한다는 설렘이나 두려움보다 앞서는 건, 한흥만을 향한 서운함.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모셔 왔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한태의는 최미경과 함께 집을 알아보며, 엄마에 대해서도 알아보려 한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왜 남편 없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걸까? 스스로 몇 개의 가설을 세워 본다. 첫 번째로는, 돈이 없어서? 아닌 걸로 판명난다. 1억 정도의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걸로 보아, 어떻게든 둘이 살 집을 구할 순 있었다고 본다. 두 번째로는, 아파트가 좋아서? 그렇다기 보다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듯하다. 세 번째로는, 변화를 싫어해서? 성격으로 보아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네 번째로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려고? 글쎄...


최미경의 생각과 말을 통해 가장 근접한 가설을 세워 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머나먼 전북 익산에서 열리는 큰고모의 큰딸의 아들 결혼식을 보러 모녀가 함께 다녀온 후 최미경의 소감을 통해서 말이다. 최미경의 집안과 분위기가 다른, 화기애애하고 웃긴 분위기. 형식적이지 않은 진심으로, 아는 척하고 반가워하고 말 걸고 손 잡아 주고 좋아하는 친척들. 최미경은 말한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너무 편하고 좋다. 최미경으로선, 단순히 시아버지를 모시고자 했던 게 아니라 시댁 가족들이 너무 좋고 그들과 함께하는 관계가 그립고 그 시간들이 좋았던 게 아닐까. 


며느리, 아내, 엄마에서 독립하자


최미경과 한태의의 독립은, 한흥만과 따로 살게 되었다는 형식적인 겉모양의 그것만은 아니다. 작품은 그렇게 말하고, 또 보여 주려 한다. 최미경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차마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에서 독립하는 것 말이다.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걸 강력하게 추천하며 그동안 도대체 왜 그랬냐고 따지게 되지만, 내부의 시선에서 보면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다단한 감정이 소용돌이치지 않을까 싶다. 극과 극의 그리고 모순적인 감정들이 부딪히다 보니 진짜 감정을 찾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한태의은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시선을 이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한데,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이해하기 힘들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조금은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더 응원하게 되는 과정. 그 과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텐데, 영화의 끝자락에서 행복하고 긍정적인 면을 보여 준다. 최미경은 독립하고선, 딸의 친구들을 초대하고 강아지를 가족으로 들이고 자전거도 배우고 소개팅도 한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서 조그마한 카페를 내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도 꾼다. 


제목 <웰컴 투 X-월드>에서 'X'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왜 'X-월드'일까. 생각할수록 많은 게 연상된다. '틀렸다'는 의미라면, 그동안의 틀려먹은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걸 응원한다는 것일 테다. '이전의'라는 의미라면, 독립하기 전의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일 테다. '미지수'라는 의미라면, 영화에선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은 독립 후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것 그리고 평생 지근 거리에서 봐 왔지만 엄마의 진짜 생각과 모습을 알고 싶은 마음의 발로일 테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맨 마지막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하여, <웰컴 투 X-월드>는 최미경의 최미경에 의한 최미경을 위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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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독립, 딸, 며느리, 시아버지, 아내, 엄마, 웰컴 투 X-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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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4.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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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미국 뉴욕의 작은 섬에서 20년째 유치원 교사로 살아가는 리사(매기 질렌할 분), 매일매일 따분한 일상을 영위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낙은 종종 있는 야간 시 수업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해 좌절할 뿐이다. 자신의 평범한 예술적 감각을 이해와는 와중, 그래도 다정다감한 남편이 있어 위로가 되지만 다 큰 아들과 딸들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다. 또 그들은 부모를 경원시하는 것 같다. 


어느 날 우연히 유치원생 중 다섯 살 난 지미(파커 세바크 분)가 앞뒤로 오가며 시를 읊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 꼬마에게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적 면모를 발견한 리사는 곧바로 달려가 시를 받아적고는 보모에게 말해 집에서도 지미가 불현듯 읊는 시를 옮겨적을 것을 부탁한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야간 시 수업에서 가서 발표하고 전에 없는 칭찬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지미의 시를 몇 편 더 자신의 야간 시 수업에서 발표하는 한편, 지미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은커녕 주위에 그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고 또 못하는 그의 시적 예술 재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시적 예술 재능을 지녔지만 욕망과 열망이 꽃피어난 자신을 대신하려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사의 지미를 향한, 아니 리사의 시적 예술 재능을 향한 광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유치원 교사


원작의 제목은 <유치원 교사>, 이 제목이 훨씬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연출가이자 작가인 나다브 라피드의 2014년작 영화 <시인 요하브>를 원작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즈가 '훌륭한 원작의 영리한 재해석'이라고 평했는데, 딱 들어맞다고 생각한다. 1980년생 사라 코랑겔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만큼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원제가 <The Kindergarten Teacher>, '유치원 교사'이다.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고, 주체가 '작은 시인'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영화가 달달할 것 같다고 짐작하게 만든다. 즉, 한국어판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다. 


반면 원제 <The Kindergarten Teacher>는 그 무엇도 지레짐작하지 않게 한다. 대신 영화를 보며 계속 곱씹을 수 있다. 유치원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이자 여자인 리사, 그녀는 이제 유치원에서 전에 없던 예술적 열망에 눈을 뜨게 된다. 그건 교사, 엄마, 아내라는 명명에서 벗어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에게 예술적 열망은 곧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가꾸고 나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40대 여성 리사의 삶


교사이자 엄마이자 아내로서의, 40대 여성 리사의 삶은 무엇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매우 '시시하게' 시작된다. 평화롭고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을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는데, 곧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다. 안정적이지만, 그래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선 '리사의, 리사에 의한, 리사를 위한', 리사를 주체로 하여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녀의 고뇌와 열망과 삶을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다섯 살 천재 시인 '지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사에 의해 '모차르트급 재능의 천재 시인'이 된 지미는, 그러나 영화에서 결코 주인공도 주체도 될 수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영화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범인 살리에리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고, 그 영화에서 사실 주인공이자 주체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라며 운을 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리사와 지미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아닌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와 모차르트에 가깝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레오폴트가 철저히 교육시키고 또 일명 '그랜드투어'로 유럽 전역을 다니며 홍보도 했기에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리사는 지미의 보호자가 아니고, 다행히도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의 보호자였다. 


이런 관계 설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로 인해 변해가는 40대 여성 리사의 삶이 또 한 축이겠다. 유치원에서도 집에서도 시 수업 교실에서도 그녀는 전에 없는 열망 어린 눈빛과 몸짓을 보이며 한껏 활기찬 삶의 여운을 내보이는 듯하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량이 있어야 하므로, '누군가가 전해주는 시를 그저 읊을 뿐인' 천재 시인 아이 지미가 그 희생양일 것이다. 


예술적 열망의 표출


예술적 열망이 표출되다 못해 폭발한다. 그 끝은 어떤 모습일까.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크게 영화를 구성하는 두 축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데 다층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리사가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 열망을 분출할 매개체로 지미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 지미의 천재적 시적 예술 재능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걸 알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극중에서 지미가 시를 얼마나 좋아하고 즐기고 하고 싶어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대략적으로나마 재단하기도 힘들 것 같다. 결국 감독이 전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건 리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리사의 시적 예술 열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교사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무료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열망은 추상적으로 드러난다. 


리사의 열망과 욕망이 좀 더 다층적이고 다채롭고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면 영화가 좀 더 풍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시'라는 점에서 나도 모르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를 잘 모르지만, 시에 '추상'이 상당히 용인된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극 중에서 몇 번이나 읊어지는 지미의 첫 시를 인용한다. 무료한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특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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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시인에게, 모모 큐레이터, 모차르트, 삶, 아내, 엄마, 여자, 예술, 유치원 교사,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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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체홉이 들여다본 '아내'의 사랑과 욕망 <체홉, 여자를 읽다.>

생각하다 2019. 3.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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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체홉, 여자를 읽다.>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 ⓒ씨어터오컴퍼니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안톤 체홉'(본래 '체호프'라 읽어야 하지만, 이 리뷰에서는 '체홉'이라 읽겠다), 소설과 희곡 가릴 것 없이 900편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를 넘어 서는데, 그를 일컬어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현대 희곡의 선구자'라고 하는 이유다. 


체홉은 삶의 단면을 칼로 잘라 보여주는 듯한 인상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개중엔 진지한 것도 많았지만 유머러스한 것들도 제법 있었다. 주지한 것처럼 900편에 이르는 글이 모두 발표된 건 아니었을 테다.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는 것처럼 미발표 글이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했을 테다. 


그의 사후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단편소설의 거장이지만, 희곡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쌍벽을 아니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그이기에 그의 희곡들은 정녕 끊임없이 무대에 오른다.


<체홉, 여자를 읽다.>는 그의 희곡 아닌 미발표 단편소설 5편을 옴니버스로 구성해놓은 연극이다.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나의 아내들' '니노치카' '불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아내의 불륜과 일탈을 소재로 했다. 


삶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데 천재적인 체홉이 인간을 들여다본 케이스들로, '아내'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 작품들을 '여자를 읽는다'는 주제 하에 모아놓은 것이다. 5편의 에피소드들은 각각 코미디, 드라마, 그로테스크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 멜로의 형식을 띈다. 



'약사의 아내'


재미없고 조용한 마을의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간, 재미없는 약사 남편을 둔 젊고 예쁜 '약사의 아내'가 푸념한다. 코골며 나 몰라라 자고 있는 남편을 향한 불만의 표출이다. 재미없고 조용한 삶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녀 아닌가. 


사실 그녀는 젊고 예쁜 걸로 소문이 나 있는 바, 두 군인 장교가 찾아온다. 그녀는 남편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들을 맞이한다. 곧 둘 중 한 명의 잘생긴 장교와 곧 눈이 맞아 흥분의 감정으로 빠져든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녀는 사심없이 그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끌릴 뿐이다. 


잘생기지 않은 술 취한 다른 한 명의 장교와의 실랑이, 그녀와 잘생긴 장교와의 밀당, 깰듯 말듯 긴장하게 만드는 남편의 잠꼬대 등이 어우러져 무대는 코믹하면서도 은근한 애로틱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내의 사랑과 욕망은 아직 위험하지 않다. 


'아가피아'


자유로운 영혼 사프카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작가 니키타는 함께 낚시를 즐기는 친구 사이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낚시를 즐기는 니키타와는 달리 사프카는 새소리가 들리지 않자 새소리 나는 물건을 가져와 기어이 새소리를 듣는 낭만파이다. 그건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런 사프카여서일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피아는 먹을 것들을 챙겨와 안면이 있는 니키타가 보는 앞에서도 아랑곳 없이 밀애를 즐긴다. 이제 곧 남편이 올 시간, 가야 한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프카와 아가피아의 밀애는 '알콩달콩'하다. 파렴치한 불륜의 모습으로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욕망 아닌 사랑이 보일 뿐이다. 사프카도 그녀를 욕망의 대상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 같다. 위험한 겉모습과 달리 그저 사랑스런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나의 아내들'


'푸른수염'으로 지칭되는 연쇄살인마, 라울 시냐 보로다. 그는 7명의 아내를 살해한 자신을 묘사한 어느 오페라를 인정할 수 없어,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왜 아내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가 살해한 7명의 아내들은 '여자'를 생각할 때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고 몸매가 좋으면서 돈만 펑펑 써 짜증난다든지, 머리가 너무 좋아 피를 말리게 한다든지, 한없이 순종적이어서 답답하다든지, 매일 시만 읽으며 놈팽이 시인과 바람을 핀다든지 등등.


7명의 아내들은 여자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자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맞는 게 아닐까 싶다. 5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큰 웃음을 주기도 하는데, 그 웃음의 이면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세상의 정형화된 시선과 욕망을 내보이면 안 된다는 기조에 반하는 욕망의 표출. 


'니노치카'


니노치카의 찌질하기 짝이 없는 남편 비흘레네프는 절친이자 사교계의 유명인사 루반체프에게 아내와의 문제에 대해 하소연한다. 한없이 차가운 니노치카와 잘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니노치카와 내연 관계에 있는 루반체프는 니노치카에게 직접 말해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비흘레네프에게 내연 관계를 들키고 마는 그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이내 루반체프는 니노치카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이 비흘레네프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자못 충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비흘레네프, 역시 찌질하기 짝이 없다. 

 

에피소드의 제목도 니노치카, 주인공 세 명 사이의 문제 핵심도 니노치카이지만 정작 니노치카는 이 에피소드에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하다. 거래의 도구, 문제 해결의 수단. 남자들끼리의 거래이자 문제 해결이다. 


'불행'


고지식하고 꽉 막힌 변호사 남편 안드레이를 둔 소피아, 안드레이와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일리인, 일리인은 소피아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고 구애를 한다. 하지만 결혼한 몸인 소피아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느 날도 일리인의 줄기찬 구애를 뿌리치고 집에 와 안드레이의 저녁을 챙기는 소피아, 그녀는 너무너무 불행하다. 일리인도 초대한 파티가 있어 술을 빌려 남편에게 자신의 불행을 말하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세 당사자가 모인 곳에서 소피아는 큰 결심을 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자의 사랑과 불륜 이상의 모습을 보인다. 또는 사랑도 불륜도 택할 수 없는 여자의 결심. 그건 모두에게 '불행'을 남긴다. 아니, 여자에겐 불행 아닌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결심에 이은 선택의 양상은 다분히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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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아내가 "고마워!"를 연발한 책 <썅년의 미학>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8. 10.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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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표지. ⓒ위즈덤하우스



아내가 고맙다고 말할 때가 있다. '결혼해줘서' 고맙고, 돈 벌어 오느라고 '고생해줘서' 고맙고, 집안일을 '도와줘서' 고맙고... 그럴 때마다 어깨가 으쓱하지만 한편으로 쓰윽 내려가는 무언가가 있다. 사실 난 잘 난 게 없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 나보단 아내가 훨씬 능력이 뛰어난대... 하는 자격지심 비슷한 것들. 


아내가 요즘 가장 고마워할 때가 있다. 그런 내 생각을 전할 때,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난 '한국의 전형적인 남자'처럼 자존심 쎄고 능력 있어 보이려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굉장히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기 때문인데, 가끔 그런 모습이 요즘의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 사이의 조류와 맞게 보이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런 나조차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아무리 애를 쓰고 기를 써도 각인되어 낙인이 찍인 것들은 지워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다. 진정한 남녀평등은 내 가슴속에서 평생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고맙다고 한다. 그럴 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씁쓸해진다. 


<썅년의 미학>(위즈덤하우스)이라는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두 번. 첫번째는 별 생각 없이 읽다가 '남자로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뿌려지는 때가 많았고, 두번째는 정독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아니, 정확히는 공감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솔직히 쉽지 않았지만 정말 많이 '배웠다'.


이 책을 소개시켜준 이가 다름 아닌 아내인데, 내가 책을 집어들 때마다 책을 볼 때마다 이례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책을 다 보고 나서는 물론, 중간까지 보고 책을 잠시 덮어놓을 때도 다가와 물었다. "어때? 어떤 생각이 들어?" 그러고는 또 고맙다고 한다. "오빠가 이 책을 관심 갖고 봐주시까 너무 좋다. 정말 고마워!"


책을 두 번 정도 보니까 알겠다. 아내가 고맙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 책은 분명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을 향한 책이고 나아가 자세히는 자신을 위해 욕망하는 여성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거기에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남자가 어딜? 껴들 자리를 보고 껴들어'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움츠러 들었다. 여성들에게 미안해서? 남성인 내가 쪽팔리고 창피해서? 그것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과연 괜찮은 남자, 좋은 남자, 멋진 남자, 최고의 남자일까, 하는. 이제까지 '~~ 남자'가 아닌 남자 자체가 훌륭한 수식어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남자로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와닿은 부분은, '우리는 괜찮은 남자를 원해' 칼럼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싫다. 못생긴 남자가 싫다. 꾸미지 않는 남자가 싫다. 자기 관리를 안 하는 남자가 싫다. 술이라고는 싸구려 국산 병맥주와 소주밖에 모르는 남자가 싫다. 인생에서 해본 최고의 모험이나 경험이 주체적이지 못한 남자가 싫다. 여행을 가보지 않은 남자가 싫다. 책을 안 읽고 영화를 안 보고, 콘텐츠를 즐길 줄 모르는 남자가 싫다. 경험에 쓰는 돈을 아까워하는 남자가 싫다. 자기 취향이 뭔지 모르는 남자가 싫다. 남의 취향을 존중할 줄 모르는 남자가 싫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인지 못하는 남자가 싫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사과하지 않는 남자가 싫다. 1년 후에 뭐하고 있을지, 5년 후에 뭐하고 있을지 물어봤을 때 아무 대답도 못하는 남자가 싫다. 대충대충 사는 남자가 싫다. 미래가 없는 남자가 싫다. 싫다. 싫다."(59~60쪽 중에서)


나는 이중 90% 이상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며 나는 이중 50%, 아니 30% 이상만 해당되는 남자들을 싫어한다. '남자가 되서 뭐하는 거냐. 찌질하게.'라면서.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배운' 것에 따르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공부하고 드러내려 하는 제대로 된 인간상의 하나가 아닌가. 


나는 한편 소심과 낮은 자존감을 방패 삼아 욕망을 배제시켜, 남자로서 목소리를 드높이지는 않지만 여성한테도(대부분 아내한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려고 한 게 아닌지. 그래서 여성들한테는 얼핏 '괜찮은' 남자로 비춰질 테지만, 스스로는 평범하지 않은 경계 위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닌지. 그곳에서 대놓고 아닌 은근하게 여전히 남자만 갖고 있는 유리한 점들을 행사하고 있는 게 아닌지. 


사실 <썅년의 미학>을 본 지는 꽤 되었다. 몇 개월 되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떻게 생각을 전달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정확히는, '남자로서' 이 책을 평할 수 있을까, 나 같은 남자 즉 여성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남자로서 이 책을 평할 수 있을까. '나 같은' 남자로서 또 한 번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여성에게 공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몰라도 괜찮다. 손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정말 정말, 그래도 돕고 싶다면, 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입을 막지 말고, 여성의 앞길을 막지 말고, 여성의 인생을 막지 마라. 돕겠답시고 나대지 마라. 지금 당장 보이는 아군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223쪽 중에서)


여러 가지가 느껴진다. '나는' 이 책으로 배우고 공감하려 애쓰고 나아가서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을 하는데 반해, '그들'은 모든 걸 다 걸었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역시 내가 낄 때가 아니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 또, 확실히 내가 아내로 치환되는 여성의 입과 앞길과 인생을 막고 있다는 생각... 


아직 난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과연 진심으로 준비를 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반드시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헤게모니를 최소한 완전히 잃을리는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나 같은 남자는, 알 수 없고 알기 힘들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남자는, 다시 나는, 쪽팔리고 창피하고 싶지 않다. 여성을 위하는 척만 하기 싫고, 남자의 권위가 내세워지게끔 방치하는 것도 싫다. 참기 힘들다. 


나름대로 방도를 찾아보려 한다. 아니, 찾아보자. 돕겠다고 나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보이는 아군이 되지도 못할 테지만, 나만의 방법을 계속 찾아보겠다고.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인지 상하좌우를 계속 살펴보겠다고. 


썅년의 미학 - 10점
민서영 지음/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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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여행법을 소개합니다

생각하다 2018. 7.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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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7월 4일에서 7일까지 제주도로 3박 4일의 여행을 떠납니다. 여름휴가로요. 결혼하고 나서 그래왔듯 처가 식구들과 함께입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아내, 그리고 나. 이번에는 처남도 함께 합니다. 지난 2년간은 군인 신분으로 함께 하지 못했지요.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새로운 멤버가 추가되어 또 다른 설렘과 기대가 있습니다. 


이번 휴가여행에 있어 아내가 특별한 걸 준비했습니다. 여행 안내서, 알림장, 개인일기장이 혼합된 얇은 책. 이번 여행 총책임자로서 몇 개월에 걸쳐 계획을 짜고 정녕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책을 엮어냈습니다. 책의 기획, 원고, 디자인까지 모조리 혼자 한 것입니다. 인쇄와 제책만 외주를 주었고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저도 혼자서 기획하고 원고를 만들고 디자인까지 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 수준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말이죠. 능력은 고사하고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내는 생각한 그대로를 실천에 옮겨서 실물을 내놓았습니다. 이제는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이제'냐고요? 사실 아내에게는 이런 책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제 아내만의 여행법이라고 할까요. 


여행 준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


아내의 여행 책들 ⓒ김형욱



소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책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건 2013년 일본 도쿄 6박 7일 여행이더군요. 그전까진 주요 정보만 출력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던지라 하나하나 자세한 일별은 불필요했던 거더군요. 그런데 2013년 도쿄 여행은 난생 처음 혼자 가는 해외 여행이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죠. 


현지에 가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재밌고 편하게 구경하고 이동하고 먹을지 고심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에 나와 있던 가이드 책은 만인을 위한 것이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아내는 그중에 오직 자신만을 위한 정보를 뽑아내어 정리하고 공부합니다. 책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해당 도시의 관광청 홈페이지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우선 지도를 일별하며 숙소를 중심으로 묵을 곳과 구경할 곳과 먹을 곳의 후보지를 선정한다. 그러곤 가장 빠르면서도 즐길 만한, 예를 들면 이왕 가는 김에 잠깐 들릴 만한 곳들을 곁들여 루트를 짭니다.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도 철저해야 하구요. 


책을 만들 정도로 준비를 하다 보니 여행할 도시를 어떤 면에서는 현지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됩니다. 가령, 서울 사람도 서울의 숨은 명소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외국인 관광객이 오히려 그런 곳을 잘 찾아가는 식이죠. 그래서 현지에 가면 이 책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수준에 이릅니다. 


단기 여행과 장기 여행


아내의 여행 책들(이전) ⓒ김형욱



아내의 2015년 한 달여의 대만 타이베이 여행 책은 의외로 얇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다 사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운 계획과 물색과 루트까지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대신 가봤으면 할 곳들의 리스트와 함께 그 결과물을 남겨 왔습니다. 도장이 굉장히 많이 찍여 있는 걸 보니 도장 인증을 한 것 같네요. 소소한 일기도 눈에 띕니다. 


단기 여행과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방법에 차이를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입니다. 장기 여행을 단기 여행처럼 하면 일찍이 지쳐버려 돌아올 때쯤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절을 잘 해주세요. 아내의 대만 여행 책이 시사하는 바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2016년 호주 브리즈번으로의 우리 신혼여행 책은 굉장히 두툼한 편입니다. 그 어느 책보다 정보가 많고 철저하며 현지에서 기록했으면 하는 페이지들이 많지요. 비할 바 없는 정성이 느껴집니다. 당시의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요. 아내한테 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아내는 신혼여행을 자유여행으로 기획했습니다.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직접 말입니다. 누구라도 이 책 하나면 혼자서도 지금 당장 브리즈번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체험하며 지내다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한편 단순 관광 여행이 아닌 '살아보기' 콘셉트였습니다. 아침에 동네를 조깅하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주말에만 서는 마켓도 구경하고요. 이 콘셉트는 아내가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여행의 개념을 달리하는 특별함이 엿보입니다. 


여행, 그 전과 중과 후


아내의 여행 책들(최근) ⓒ김형욱



이제까지와는 달리 2017년부터는 전과 비교불가의 책을 만들어 냅니다. 일본 교토와 오사카로의 여행이었습니다. 이 역시 완벽하진 않지만서도,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굉장한 편입니다. 나름대로의 차례와 판권도 존재하고 전체적인 짜임새가 수준 높네요. 


여행지를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조망하고는 해당 여행 또한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짚어봅니다. 그러곤 여행 관련 정보를 한데 모아 보여주고 여행자의 정보를 한데 모아 보여주며 마칩니다. 전체적으로 거시와 미시를 줄세워 체계가 확실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정보를 한눈에 훑게 하는 거시와 숙소 가는 길 또는 유심 교체하는 법의 아주 자세한 미시의 조화가 인상 깊습니다. 


그리고 이번 2018 여름휴가 제주도 여행 책입니다. 우리나라이거니와 많이 가봤었고 길지 않은 3박 4일의 여정이기에 얇게 나왔지만, '책'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서 완전하다고 할 만큼 벗어나, 오밀조밀한 포인트와 함께 핵심을 짚었습니다. 아내가 추구하는 여행법에 점점 가까이 가 완성으로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네요. 


여행은 물론 여행지에서의 여정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아내의 여행법을 살펴보면 진정한 여행의 완성은 여행의 전과 후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책으로 엮어낼 정도로 여행을 준비하고, 그에 따른 효율적이고 여유로운 여정을 만끽하며, 여행의 결과물과 기록을 영원에 가깝게 되새기는 것. 그런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저는 행운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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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한 번만 와요"

오래된 리뷰 2014. 7.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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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워너브라더스


1965년. 일리노이주 박람회가 열렸던 때, 남편과 함께 두 남매가 박람회에 가게 된다. 아내는 4일 간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이들이 어서 떠나주기를 바란다. 너무나 단조로운 아이오와 생활. “조용하고 사람들도 참 착하다.” 이게 전부인 삶이다.

 

그녀가 꿈꿨던 미국에서의 삶은 결코 아니다. 교사 일을 하다가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그만두었지만 후회가 밀려온다. 남편은 무뚝뚝의 전형이고, 아들은 엄마의 부탁을 잔소리로 들으며, 딸은 제멋대로다.

 

전설적인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1995년 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반복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부인. 잔잔한 일상에 파문이 일어날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은 4일 밖에 없다.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아이오와에 있는 로즈먼 다리를 향하던 중 프란체스카 존슨(메릴 스트립 분)의 집에 들렀다가, 길을 묻고는 같이 다리로 향한다. 그들은 돌아와 같이 저녁 식사를 한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는 여자. 꽃을 꺾어주고 은근슬쩍 스킨십을 하는 남자. 농담을 주고 받으며 마음껏 웃는 남과 여. 운명적 사랑에 빠진 남과 여.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중년의 사랑(불륜)을 옹호하게 된다. 


“그 어떤 판단이나 도덕이 개입되지 않아요. 그저 그대로...있는 그대로죠.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는 꼭 이성과의 사랑이 아닌, 변화가 필요 했다. 일종의 일탈을 꿈꾸었다고 할까. 다른 세계의 새로운 사람과의 대면으로 설렌 것이다. 그녀는 그와 대화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같이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 한 잔 하고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고 블루스도 추고 키스하고 목욕하고 그의 몸을 탐닉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 명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 두려움이 동반된 설렘과 떨림이 싫지 만은 않다. 


모든 곳이 자신의 집처럼 느낀다는 남자의 말. ”이것은 내 것. 이 여자, 이 남자는 내 것. 그런 경계선이 너무 많죠.” “모든 사람이 가족을 이루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미국의 가족 윤리에 불만이에요. 온 나라가 최면에 걸린 것 같아요.”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프란체스카. 당신은 단순한 여자가 아니에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죄스러움을 느끼는 여자에게 남자는 "괜찮아요.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식들에게 숨길 일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둘 간의 확고한 차이가 발견되는 대화가 계속되지만 그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느낀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남자는 떠난다. 하지만 여자는 참지 못하고 새벽에 로즈먼 다리를 찾아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 찾아오게끔 한다. 이후 그들은 4일 간의 여행을 떠난다. 그 둘 만의 여행. 동네에 있으면 어떤 수모를 당할 지 알 수 없다. 

 

“초원과 다리... 낯익은 사람들과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기로. 그 하루가 원하는 곳으로 우릴 데려가게 뒀다.”


여자는 전에 없이 여성스러워진다. 그들은 그 몇 일 간의 휴가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의 모든 걸 알고 싶고 자신 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르게 남자는 그걸 구속으로 생각한다. 남자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 그 여자는 지나 가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난 평생 여기 앉아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겠죠. 당신은 또 어디 가서 멋진 친구들과 얘길 하고 있겠죠. 내 얘기까지."


그들은 함께 떠날 것을 결심한다. 남자도 여자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여자는 여행용 짐을 싸고 그 날 밤으로 바로 떠날 준비를 한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저녁 식사. 결국 여자는 같이 갈 수 없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삶보다 남편과 아이들, 가족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선택한다. 그와 함께 가면 평생 죄를 짓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자와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다. 그를 사랑하기에 보낸다.


다음 날 돌아온 가족들. 아내이자 엄마로 돌아온 여자. 집안일을 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낸다. 어느 비 오는 날,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하게 된다. 도중에 남자를 보게 된 여자. 남자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비를 맞고 서 있는 남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여자. 당장이라도 자동차 문을 열고 그에게 가고 싶지만 결국 가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할 길을 가고, 평생 추억 만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훗날 늙었을 때 남편이 말한다. 


"당신 꿈이 있었다는 거 알아. 그걸 못 이뤄줘서 미안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남편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숨겨온 옛 일을. 안정과 모험. 정착과 방랑.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 확실한 느낌은 일생에 딱 한 번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느낌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서로를 조금만 더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보듬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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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여성의 날,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4. 3. 1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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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인형의 집> 표지 ⓒ 열린책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106년 전인 1908년 3월 8일, 1만 5000여 명의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10시간 노동제와 작업환경 개선·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여성운동가대회에서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에 따라 결의됐다. 이후 꾸준히 여성들의 국제 연대 운동이 활발해졌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여성 20대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남성을 앞질렀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2013년에 비로소 우리나라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왔지만, 세계로 넓혀보면 이미 오래 전에 국가 최고 수반에 여성이 자리매김했다(1974년 아르헨티나의 세계 최초 여성 대통령 이사벨 페론). 세계적인 지도자 반열에 오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해 1980년대 영국에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있었다. 이제는 최초의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해진 것이다. 


새로운 시대로의 물꼬를 트다


이런 거대한 물줄기의 물꼬를 튼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계기로 시작된 것일까. 일명 '신여성'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히 그 엄청난 영향력으로 '신여성' '페미니즘'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 있다. 북유럽 노르웨이의 작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노라'이다. 


지난해 출간된 책 <아내의 역사>(매릴린 옐롬 지음, 책과함께 펴냄)의 부제는 "최초의 아내 이브부터 인형의 집 노라까지 역사 속 아내들의 은밀한 내면읽기"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지만 <인형의 집>의 노라가 출현하기까지는 여자는 한 인간, 한 개인이기에 앞서 아내와 엄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재산에 불과했던 적이 있었다. 재산의 일부로 취급됐던 아내(여자)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지금이 되기까지의 생생한 발자취를 그린 책에서 <인형의 집>의 노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가히 절대적이다. 


또한 노라는 한 여성의 꿈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여자이자 중국의 마녀로 일컬어지는 '장칭', 그녀는 어릴 때 극단에 들어가 음악과 연기를 배우면서 <인형의 집>의 노라를 좋아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모든 걸 뒤로하고 집을 나가버리는 노라의 모습에 반한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결국은 가출하기 전의 노라처럼 마오쩌둥의 아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희곡 속 노라의 발자취는 어떻기에 이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120여년 전인 1879년에 만들어진 짧은 3막 희곡이 왜 지금에까지 계속해서 읽히고 리메이크되고 초연되는 것일까. 여성해방의 원전이라 평가 받으면서도,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 작품이라 평가 받는 이유를 알기 위해 작품을 들여다보자. 


무엇보다 우선 내가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해요


노라는 곧 은행장이 되는 변호사 남편을 둔 화목한 중산층 가정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따뜻하기 그지없는 엄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크나큰 걱정이 있었다. 한동안 남편이 죽을 정도의 병에 걸려 요양이 필요했을 때, 그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돈을 빌렸어야 했다. 하필 그때 돈을 빌렸던 사람이 남편이 은행장이 되자 부하 직원으로 들어왔다. 그 부하 직원은 평판이 좋지 않은 데다가, 노라가 그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 친구의 일자리를 남편에게 부탁하게 됐다. 남편은 부하의 자리에 노라의 친구를 앉히려 했는데 부하가 반발을 한다.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데, 사실 그 부하 직원으로부터 노라가 돈을 빌릴 때 약간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보증인에 아버지를 세웠는데, 보증을 설 당시에 이미 아버지는 죽고 없었고 노라가 임의로 서명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부하는 이를 빌미로 노라를 압박했고 이 사실을 편지로 써서 노라의 남편에게로 보낸다. 노라는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얼마나 화를 낼지,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말이다. 노심초사하는 노라에게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노라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노라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이중적인 얼굴을 내비친다.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도, 남편은 그 사실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을 더 생각한 아내(노라)와는 달리 남편은 자신의 체면과 지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가정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그 모습에 노라는 큰 상처를 받고 마음을 굳힌다.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 아이의 어머니기에 앞서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인형의 집'을 나선다. 그녀는 아빠와 남편에게 인형에 불과했고, 그녀의 아이들은 그녀와 남편의 인형에 불과했다.


노라 : 무엇보다 우선 내가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해요. (중략)

노라 : 단지 재미있었을 뿐이죠.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잘해 줬어요. 하지만 이 집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가두어 두는 놀이터에 불과할 뿐이에요. 여기 있는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인형이죠. 아빠가 날 어린 인형으로 취급했던 것처럼요. 바꿔 말하면, 내 아이들 역시 내 인형이죠. 아이들과 놀면 재미있듯이 당신이 나에게 와서 놀아 주면 즐거웠던, 그게 우리들 결혼 생활이었어요, 토르발. (중략)

노라 : 나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난 완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예요.(본문 중에서)


여성의 문제는 인류의 문제


새장 안에 있는 집이 인상적이다. 열려있는 문으로 나온 노라는 어떤 삶을 살아 갈까. ⓒ www.sourgrapeswine.com

이 작품은 여성 운동의 물꼬를 틀고 이 책이 있기 전과 그 이후를 구분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지협적인 평에 불과하다. 저자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그는 여성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문제와 같은 것이라며 보편적인 인간성을 묘사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남과 여를 따로 떼어내 생각하지 않았고 평등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여성의 문제가 특수성을 가진 좁은 의미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인 인류의 문제라고 선언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또한 극 중에서 노라는 여성 이외의 사회적인 문제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나는 종교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겠어요"라며 종교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게 어기게 된 법의 효용성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에서의 남편과의 대화에서는, 왜 여자는 아내와 엄마로서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작품의 저자를 데려다 놓고 이 작품의 진짜 의도가 뭔지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작품의 해석을 너무나도 과도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우선 내가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노라지만, 남편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말도 한 노라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남편이 자신보다 노라를 더 생각해서 감싸줬으면 하는 생각 말이다. 이 점을 보면 분명 그녀가 한 말에는 인류사적 문제의 논의가 있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갈망에서 나오는 말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작품에 나오는 상징성만을 너무 과도하게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결혼한 여자는 대부분 엄마이자 아내로서만 존재한다. 그녀들이 이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반면에 남자들도 결혼한 후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그녀들을 아내이자 엄마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들이 이 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노라처럼 집을 나가라는 말일까? 아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그린 노라의 독립 실패처럼, 단란한 가정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까지 파괴할 수 있는 여지도 다분히 있다. 


기존의 관념에서 탈피해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현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옛날보다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 또는 현대 시대에는 당연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말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깨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노라가 말하려는 바를 여성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확장시켜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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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노라, 신여성, 아내, 아내의 역사, 여성 대통령, 여성 운동, 여성 해방, 인형의 집, 장칭, 페미니즘, 헨리크 입센
  • BlogIcon mindman
    2014.03.10 07:33 신고

    그래요. 노라!~ 인형의 집.....
    또 뭐드라? "유리구슬"이라고 있지 않았나요?

  • BlogIcon 노지
    2014.03.10 09:23

    제시한 방향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남자들의 시선도 바뀌어야 하지만
    여자 본인 자체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ㅎㅎ;
    여성 중에서도 '여자가 어떻게...'라고 생각나는 틀에 박히신 분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3.10 11:45 신고

    글 잘 읽고가요~

  • BlogIcon 여강여호
    2014.03.10 19:49 신고

    백년 전 작품이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저런 논란이 있을 수 있겠죠.
    다만 노라의 가출이 의미하는 상징은 여전히 진행형이 아닐까 싶네요.

  • Zoom-in
    2014.03.11 00:14

    노라의 다음 행보를 예상한다면 아마도 현대를 살고 있는성들일겁니다. ....정답처럼 살고 있는 이가 있을까요?^^

  • BlogIcon 음
    2014.03.11 13:08

    노라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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