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책하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구원'에 해당되는 글 5건

제목 날짜
  •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성자인가 악마인가 <산 파트리냐노> 2021.01.20
  •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열여섯 살 소녀의 성장물 <히치하이크> 2019.03.25
  • 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2017.05.17
  • <83일>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떠안을 방사능 피폭 환자(6) 2015.03.27
  • <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 교수가 이 시대 청춘에게 보내는 뻔하지 않은 편지(2) 2015.01.26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성자인가 악마인가 <산 파트리냐노>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1. 1. 20. 12:00
728x9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 포스터. ⓒ넷플릭스



1970년대 말 이탈리아 전역은 값싼 마약으로 뒤덮였다. 마약을 대중화시켜 막대한 부를 쌓기 위한 마피아의 새로운 전략이었는데,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가 마약 중독자의 길로 빠졌다. 이탈리아 정부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출현했다. 빈첸초 무촐리, 그는 이탈리아 북동부 리미니에 '산 파트리냐노'라는 이름의 재활원을 짓고 마약 중독자들을 무상으로 받았다. 


빈첸초 무촐리는 리미니 중산층 농부 집안 출신으로, 가족의 영향으로 돌보는 일을 열성적으로 한 반면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집에서 좌절감에 둘러싸여 있다가, 안토니에타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장인 어른이 결혼 선물로 작은 농장인 산 파트리냐노를 줬다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사육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영매가 되고 싶었던 무촐리는 심령술사 단체에 가입해 강령 의식을 열기도 했는데, 그들과 함께 협동조합의 형식으로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한 것이었다. 처음엔 약 따위로 아픈 이들을 치료하다가 시간이 지나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며, 마약 중독자들의 공동체가 되었다. 무촐리가 말하길, 마약 중독자들이야말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는 유럽에서 가장 큰 재활원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한 빈첸초 무촐리를 둘러싼 갑론을박과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빈첸초 무촐리의 마약 중독자 구원


무촐리는 산 파트리냐노 운영 방식의 제1 원칙으로 '한 번 이곳에 발을 들인 마약 중독자는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절대로 나가지 못한다'를 천명한다. 이 화끈하면서도 일면 무시무시한 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를 대하는 두 대척점의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무촐리를 신격화하면서 그를 '구원자'이자 '성자'로 떠받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촐리를 '무법자'이자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로 보는 것이다. 


1970~80년대 당시 이탈리아는 값싼 마약들이 수많은 마약 중독자를 양산하며 신음했는데, 정녕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 한 남자 '빈첸초 무촐리'가 나타나 마약 중독자 재활원이자 공동체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하더니,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닌가. 전국의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 당사자는 물론, 그들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촐리를 지지하고 떠받들게 된 것이다. 그가 그 어떤 무슨 짓을 하든, 마약 중독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의 '방법론'을 두고 정부와 법 관련자들 그리고 언론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촐리는 마약 중독자들을 도와 준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에게 힘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어떤 수가 '사슬'이라는 형태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80년 10월 어느 날, 15일간 사슬에 묶여 있다가 산 파트리냐노에서 탈출한 마약 중독자 소녀가 경찰에 신고한 게 크게 터졌다. 무촐리는 곧 법정에 서게 되었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무촐리의 입장에서는 정부도 손 놓은 마약 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무상으로 재활원을 설립해 사람들을 받아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냐는 것이었고, 검사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의를 위한다지만 인권을 저버리는 범죄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인류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논쟁, 결과는 40일만의 석방이었다. 산 파트리냐노 설립 이념을 긍정적으로 본 결과였지만, 결과를 위한 과정에서의 사슬과 폭력 사용은 금지되었다. 


의도는 선하고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과정은 치명적


'선의' 즉, 선한 의도는 선한 과정과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선의로 시작한 것들이 불쾌하고 불합리하고 불편하게 끝맺음한 예가 수없이 많다.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약 중독자 치료를 위한 무상 과정의 선한 의도는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불과 수 명에서 시작한 재활원은 수천 명으로 불어나 수없이 많은 마약 중독자를 개관천선시킨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 논쟁의 중심이고 이 다큐멘터리가 최대한 중립을 지키면서 전하고자 하는 논쟁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재단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무촐리의 의도와 과정과 결과, 의도는 선하고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과정은 치명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무촐리라면? 사슬로 묶어 감금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데 최우선의 목적을 둘 것 같다. 내가 마약 중독자 가족이라면? 무촐리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포기해 버린 이를 개과천선하게 지지할 것 같다. 내가 정부 또는 판사라면?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해 칭찬해 주기는커녕 못하게 막을 것 같다. 판사로서 최우선하는 가치를 생각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마약 중독자 당사자의 입장이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반드시 인생을 망칠 것이고 '죽음'에 이를 것이기에, 살고자 스스로의 의지로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를 찾았다. '무급'으로 노동하며 마약 중독을 치료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탈출하거나 마약에 다시 손을 댔을 땐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했다. 내가 마약 중독자라면? 살고자 하는 의도로 산 파트리냐노를 찾을 것이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 따를 것 같다. '마약 중독'을 다룰 다른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의 방법에 있는 게 아니라, 값싼 마약이 유포되게 막지 못했거니와 마약 중독자들을 손 놓고 방치한 정부에 있는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더 강한 국가(그가 생각한 선한 국가)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악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다고도 했다. 다분히 빈첸초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에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마약 중독 치료의 목적을 위해서는 '악'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짓들은 묵과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촐리로서는 산 파트리냐노 안팎으로 온갖 멸시와 의혹에 찬 눈빛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마약 중독 치료라는 일념 하에 사랑받는 존재로만 남길 원하지 않았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명과 암


하지만, 그런 무촐리도 변해 갔다. 마약 중독 치료라는 긍극적 목적과 거시적 일념은 그대로였지만, 방법과 과정에 있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첫 타격을 안겼던 폭력 사건은 급기야 의문스러운 자살 사건으로까지 번졌고, 산 파트리냐노는 나날이 번창해 2000명이 넘는 재활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했지만 더 이상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무촐리는 권력에 단맛에 젖은 듯 스스로를 신격화시켰는데, 공동체를 시스템화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인재를 등용했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출중한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바꿔놓았지만, 그 자신이 권력에의 열망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인재들을 등용해 결국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제정 로마의 기틀을 세웠으니, 이후로도 로마는 오랫동안 전성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무촐리 또한 비록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출중한 능력과 추진력과 카리스마로 많은 이의 인생을 바꿔놓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도 인정하듯 권력에의 잘못된 열망과 잘못된 인재들의 등용으로 논란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1970~90년대까지 이탈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한때,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들보다도 더 위대한 이로 칭송받은 적이 있다. 또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며 그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위인이 그렇듯 그에게도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중립적으로 그것들을 짚으며 탄생부터 추락까지를 다뤘다.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잘 알겠고 또 잘 다뤄 주어 좋았지만,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이 굳이 중립적이라는 표현까지 넣을 만큼 50 대 50을 이뤘을까 의문이 간다. 과보다 공이 많고, 암보다 명이 짙었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논할 때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을 말한다. 경제화를 이룩했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쇠퇴시켰으며, 그가 아니더라도 경제화는 시대의 숙명이자 전 세계의 추세였기에 천천히 단단하게 진행되었을 것이었다. 반면, 빈첸초 무촐리는 그대로 두면 반드시 죽었을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했거니와 정부도 손 놓은 걸 오직 그밖에 하지 못했다. 비록, 마약 중독자들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받아들였거니와 논란의 여지 없는 선한 의도와 목적에 따른 것이다. 물론,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곳에서 사람이 살해된 사건은 논란의 여지 없는 과와 암에 속할 것이다. 이후 급속도로 추락한 무촐리의 삶의 일환이겠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그리고 당시 산 파트리냐노 거주자들에 너무나도 많이 할애한 점이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간략히 나오는 시대상을 보다 더 논했다면, 보다 더 풍부한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시대와 사회가 개인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개인에 너무 천착한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했기에 다큐멘터리 치고 상당히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구원, 구원자의 죄, 마약 중독자, 빈첸초 무촐리, 산 파트리냐노, 선한 의도, 성공, 성자, 악마, 이탈리아, 치료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열여섯 살 소녀의 성장물 <히치하이크>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3. 25. 08:00
728x90



[모모 큐레이터'S PICK] <히치하이크>


영화 <히치하이크> 포스터. ⓒ무브먼트



열여섯 정애(노정의 분)와 효정(김고은 분)은 무작정 길을 떠난다. 정애는 집 나간 엄마를, 효정은 이름만 알고 있는 친아빠를 찾으려 한다. 먼저 효정의 친아빠를 찾으러 서울에서 강화로 간 그들, 하지만 이름과 주소만으로는 찾기가 요원하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지만 헛탕을 치고 밤 늦게 히치하이크에 성공해 서울로 향한다. 뭔가 이상하다, 인신매매인가? 무작정 도망치고 결국엔 경찰에 의해 무사히 구출된다. 


그런데 담당 경찰 이름이 현웅(박희순 분)이다. 효정이 찾는 이름만 알고 있는 친아빠와 똑같은 이름, 사는 곳도 비슷하니 정애는 확신한다. 반면 효정은 반신반의, 대면대면. 사실 효정은 얼마 후 새아빠가 생길 예정이다. 반면, 정애는 아빠가 많이 아프다. 더군다나 아빠는 정애의 앞날을 막지 않으려고 치료도 받지 않는다. 정애는 곧 세상에 홀로 남아야 하는 것이다. 효정이 아닌 정애가 현웅을 향한다. 


서울로 돌아갔다가도 다시 현웅을 찾는 정애, 그에게서 그리고 그의 집에서 안식을 얻는다. 인신매매범에게서 도망치다가 다리를 다친 효정을 대신해 친아빠를 찾아주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정작 그녀는 집 나간 엄마를 찾는 데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엄마가 병원에 있어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정애는 단단하게 버텨왔지만 버팀목을 찾아야 한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소녀의 성장물


영화 <히치하이크>의 한 장면. ⓒ무브먼트



영화 <히치하이크>는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열여섯 소녀의 성장물로, 죽어가는 아빠를 대신해 집 나간 엄마로 표상되는 의지할 곳을 찾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히치하이크'는 그 여정을 비유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미성년자로서 무전(無錢)의 절박한 상황에서 구해줄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삶의 여정. 


우린 이 여정에서 구원, 포기, 가족 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처럼 영화 내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건 연출보다 연기의 힘이 컸다. 연출은 다분히 요즘 한국 독립영화스러워서 특이점을 찾긴 힘들었는데, 정애로 분한 노정의 배우가 어린 나이에 영화를 거의 이끌다시피 하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연기를 선보였다. 캐릭터 자체가 그랬기도 했지만 훌륭히 소화했다. 


여기에 베테랑 박희순 배우가 전혀 튀지 않는 무채색에 가까운 연기로 중심을 잡으며 다른 배우들을 돋보이게 해주었고, 효정으로 분한 김고은 배우가 역시 어린 나이임에도 전혀 어설프지 않게 톡톡 튀면서도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독립영화인 만큼 연출과 각본과 연기에 힘을 실을 수밖에 없는데, 연기를 필두로 대체로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구원과 포기


영화 <히치하이크>의 한 장면. ⓒ무브먼트



먼저, 구원에 대해서 시작해본다. 히치하이크라는 이미지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의 차를 얻어타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여정의 일부분, 기대와 설렘이 한 가득이다. 하지만 이를 삶에 대비해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갈 곳도 의지할 이도 없는 어린 소녀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내맡긴다는 게 쉽기는커녕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히치하이크는 낭만과는 정반대의 지극한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살기 위해, 할 수 없는 걸 해야 하고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며 해선 안 되는 걸 해야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의는 참으로 숭고하고 위대하지만, 구원을 현실화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정애에겐 미안하지만, 그녀는 구원을 바랄 뿐 행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다. 


그러면 포기해야 할까. 정애의 아빠가 정애의 삶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했듯 정애도 삶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정애의 삶을 위해서 포기한 만큼 정애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영화는 포기로서의 포기가 아닌 나아가기 위한 포기를 역설한다. 여기서 포기는 희생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현실 직시의 다른 말일 수도 있으며 인간다움의 다른 말일 수도 있다. 세 가지 전부 다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정애는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고 그저 구원자만 찾아다니는 무능자가 아니며 그저 받기만 바라는 파렴치한이 아니다. 인신매매, 죽어가는 아빠라는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위협부터 자잘하고 추상적이며 귀찮기까지 한 위협까지, 그녀를 흔드는 많은 것들을 때론 무덤덤하게 때론 무신경하게 때론 무탈하게 지나치고 헤쳐나간다. 어느샌가 포기란 말은 더이상 어울리지 않게 된다. 


가족의 의미, 그리고 거슬리는 부분들


영화 <히치하이크>의 한 장면. ⓒ무브먼트



두 소녀가 가족 아닌 가족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만큼,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애는 아빠가 있고 효정은 엄마가 있다. 정애의 아빠는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하지 않는다. 정애는 집 나간 엄마에게 막연한 희망을 걸고 길을 나서지만 엄한 효정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경찰 현웅에게 기대게 된다. 그녀는 길지 않은 인생에서 온전한 가족 형태를 가진 사람을 처음 접한 것일까. 


한편, 효정은 곧 새아빠가 생긴다. 그래서일까, 친아빠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현웅을 향한 마음이 크지 않다. 새아빠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정애처럼 가족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가족이 찾아온 셈이다. 정애와 효정 둘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지만, 안정감 있어 보이는 효정과 달리 정애에게서 절벽 끝에 선 느낌을 받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영화의 디테일적인 측면에서 몇몇 부분이 거슬렸다. 정애와 효정, 그리고 정애는 몇 번이나 남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한다. 창문으로 들어가고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을 받으며 잠들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등 영화적 장치로 사용한 흔적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납득하기엔 불편한 구석이 명백했다. 또한 정애로 분한 노정의의 연기력과 단단하게 버티는 정애라는 캐릭터와는 별개로, 정애의 성격이나 행동 양상이 주는 불편함도 있었다. 효정하고는 하염없이 잘 어울리고 잘 웃는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여중생인 것 같지만, 그렇게 단정지을 수도 없는 애매모호함과 여러 모습들 때문에 떨어지는 개연성이 달갑지 않게 다가왔다. 


온전히 그 때문이진 않겠지만 크게 한몫 하기에, 영화는 독립영화 특유의 작가주의적 답답함이 자칫 불쾌함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경계 어린 줄타기가 아슬아슬했다. 필자에겐 나쁘지 않은 정도로 다가왔지만, 누군가에겐 불쾌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시종일관 그 어디에서도 시원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더불어 여러 의미들을 되새기고 생각하면서 얻게 될 수밖에 없는 답답함 이상의 것들. 감독의 다음 작품이 한편 기다려지면서도 한편 마냥 선택할 것 같진 않은 이유다. 

Posted by singenv
가족, 구원, 독립영화, 모모 큐레이터, 소녀, 포기, 히치하이크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5. 17. 08:00
728x90



[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가해자, 구원, 목소리의 형태, 아름다움, 원죄, 이지메, 일본애니메이션, 존재, 피해자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83일>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떠안을 방사능 피폭 환자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5. 3. 27. 08:00
728x90




[서평]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뿌리와이파리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 지진과 쓰나미가 대비할 수는 있지만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에 의한 자연 재해라면, 원전 사고는 그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인간에 의한 인재이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원전 사고는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방사능 피폭의 직격탄을 맞는 후쿠시마현은 거의 유령 마을과 다름없게 되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었으며, 아직까지 타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원전 사고에 의한 방사능 피폭 때문이었다. 방사능 피폭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방사능 피폭의 위력이라면 일개 개인에게는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2011년 대규모 방사능 피폭을 당한 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20세기 말인 1999년에 일본을 떠들썩 하게 했던 방사능 피폭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곳이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약 2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면, 1999년 방사능 피폭 사건은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이바라키 현 도카이무라 'JCO 도카이 사업소'에서 핵연료 가공 작업을 하던 불과 서른다섯 살의 남자 오우치가 대량 중성자선에 피폭당했다. 피폭량은 일반 사람이 1년에 받을 수 있는 방사능 량의 2만 배에 달했다. 일본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방사능 피폭 임계 사고였다. 


피폭 환자의 치열한 사투를 담다


책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뿌리와이파리)은 1999년 당시 오우치가 피폭 당한 후 83일 간 병원에서의 치열한 사투를 담은 2001년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콘텐츠보다 원전 사고와 방사능 피폭에 관해 훨씬 더 경각심을 일으키게 할 만하다. 그만큼 피폭 당했던 오우치와 그를 치료하고자 했던 의료진들의 사투가 끔찍했고 지난 했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책은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이 방사능 피폭을 당해 죽고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간다는 통계적 전달보다 단 한 사람에 집중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살고자 하지만 결국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강렬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파괴되어 가는 몸과 정신, 그리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몸의 상태. 그 앞에서 어느 누군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방사능 피폭 환자 오우치는 이틀째만 해도 멀쩡하게 보였다.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냥 여기저기가 조금 아플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피폭을 당한 오른팔 정도. 그러던 그의 상태가 며칠이 지나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게 되었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식이 사라졌고, 염색체가 산산이 부숴져 내장도 혈액도 피부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


여동생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해 희망이 생기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유전자가 파괴되어 버렸다. 방사능에 의한 잇따른 장애, 한번 장애가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신체가 된 오우치, 그리고 결국 심장이 멈추고 만다. 겨우 겨우 심장을 다시 뛰게 했지만, 그로 인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갔다. 국내외에서 아직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온갖 약물까지 투여해 목숨만 부지해 놓은 상태가 되고 만다. 


여기서 간호사와 의사들은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들고 만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고통스러운 치료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어느 누가 보아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이 환자를 왜 붙잡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정녕 환자를 위한 것인가. 이런 딜레마는 오우치를 치료했던 모든 의료진의 숙제이자 숙명이었다. 


결국 피폭 당한지 83일만에 오우치는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오우치씨,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라고 말한다. 종교적이기까지 한 이 말은, 방사능 피폭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통렬한 말이다. 


남의 일도, 오래전 이야기도 아닌 원전 사고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는 현재 23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11기의 원전을 더 지어 올리고 있다. 규모로는 세계 5위지만, 단위 면적당 용량은 세계 1위에 빛난다. 또한 설계 수명을 다한 월성 원전 1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고리 원전과 월성 원전 주변에는 족히 500만 명은 될 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주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그런 일들을 보고도 말이다. 원전 사고가 모두 인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누군가는 피폭을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원전의 폐쇄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과 파멸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원자력이니 만큼 말이다. 다만 원전 사고가 남의 일만은 아니며, 오래전 이야기만도 아니며, 만약 일이 터지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될 곳이 우리나라라는 걸 잊으면 안 되겠다. 파멸의 위험이 다분한 구원의 길은, 그 자체로 이미 구원이 아니지 않은가. 이는 도박이나 마찬가지가 않은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83일, 고리 원전, 구원, 동일본 대지진, 방사선 피폭, 원전 사고, 월성 원전, 파멸
  • BlogIcon 空空(공공)
    2015.03.27 08:57 신고

    원전의 무서움을 넘의 일 보듯 하고 있습니다
    아마 서울에 원전 짓는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 BlogIcon singenv
      2015.03.29 19:16 신고

      원전 없는 나라로 이민을 가야겠죠?

  • BlogIcon 늙은도령
    2015.03.27 22:27 신고

    원전은 블랙스완 같아서 일단 사고가 나면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핵발전이 경제적으로도 비싸다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원전은 사용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될 뿐 그후로 수만 년 동안 피해를 후세대에게 가합니다.
    어떤 나라도 핵발전폐기물을 500년 이상 관리할 수 없으니 그 피해를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3.29 19:17 신고

      이 책이 그런 걸 한 개인의 죽음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더군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요.

  • BlogIcon 조아하자
    2015.03.27 23:30 신고

    어쩌면 원전은 애초에 개발되면 안되는 기술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지구온난화가 한번 진행되면 그 전의 상태로 절대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 BlogIcon singenv
      2015.03.29 19:18 신고

      맞아요. 애초에 개발되면 안 되는 기술...
      개발되지 않을 수 없었을 기술이기도 하구요...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가장 사소한 구원> 라종일 교수가 이 시대 청춘에게 보내는 뻔하지 않은 편지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5. 1. 26. 08:00
728x90




[서평] <가장 사소한 구원>


<가장 사소한 구원> ⓒ알마

그다지 끌리지 않는 표지, 유명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저자, 더군다나 노교수와 청춘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라니... 세대 담론을 앞세워 사회를 진단하고 끝에는 힐링으로 끝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앞서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 <가장 사소한 구원>(알마)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구원'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두 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마' 출판사에 대한 믿음도 한 몫 했다.)


'구원'은 굉장히 종교적인 단어인데, 일반적으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함'을 뜻하고 기독교적으로는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냄'을 뜻한다. 그래서 인지 일반적으로 아무 때나 쓰지는 않는 듯하다. 뭔가 거룩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구원이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은 얼마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 그런데 들여다보면 엄청난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일을 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고, 결혼을 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고, 집을 갖고 싶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고, 노후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열해 보니 너무 많은 걸 원하는 건가?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누리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청춘들이 이런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정말 '사소한 구원'을 원한다. 


노교수의 뻔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원하다 


<가장 사소한 구원>에서의 구원은 위에서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70대 노교수와의 서른 두 통의 편지를 통해 30대 청춘이 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녀 개인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들에 대한 구원 말이다. 그녀 김현진에게 그 아픔과 상처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지독히 괴롭힌 악마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사랑과 이별, 죽음 등. 그녀의 아픈 이야기는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다. 


"저는 지금 속이 끓는 것 같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때 제 팔의 큰 상처 자국을 보시고 왜 그러냐고 물으신 적이 있지요. 누군가를 죽이고, 저도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제가 목숨 바쳐 죽일 만큼 가치가 없었고, 제 목숨도 그렇게 헐하게 버릴 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제 인생의 숨통을 반쯤 끊어놓은 사람이 희희낙락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나니 누군가 심장을 쥐여짜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잔인하고 얼음 같은 손으로 말이죠." (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아픔과 상처를 70대 노교수인 라종일 교수는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류는 다를 수 있겠지만 아픔의 강도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외의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와 같은 주옥 같은 문구로 위로하기도 한다. 그만의 뻔하지 않은 위로의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며 역시 그만의 방법으로 공감한다. 


인생을 먼저 살아가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선배가 후배에게 보내는 따끔하고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조언이자 위로로 보이기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대동해 할아버지가 손녀를 어르고 달래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현진의 말마따라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대화로는 보이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만약 남자친구를 선택할 때 '존경'을 제일로 놓는다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그들의 대화는 톡톡 튀고 진득하며 예리하고 두루뭉술하며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듯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


김현진이 라종일 교수에게 보내는 16번의 편지와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보내는 16번의 답장은 일관성을 유지한다. 김현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묻는다. 라종일 교수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때론 부탁하는 투로, 때론 강압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답한다. 책을 다 보면 라종일 교수가 이 시대의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김현진은 이 시대의 청춘을 대표해서 그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답이 뻔하지 않기에, 생산적이기에, 때론 김현진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기에 그 가치가 출중하다. 하나하나 곱씹어 볼 만하다. 


하지만 그의 답이 모두 정답인 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현진이 지금 청춘들이 일도, 연애도, 결혼도, 아기도 포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었을 때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으며 옛날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그 끝에는 항상 '무슨 도움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도 별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며 시종일관 아기에 대한 찬양(?)을 설파 한다. 인구 감소 때문도, 노동력 부족 때문도, 민족 융성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을 전하며 아기를 낳아 부부가 함께 양육하면서 겪는 특별한 경험을 말한다.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사람으로서 존재에 매우 중요한, 불가결한 일면이다. 


한편 그는 모든 면을 두루 살피려 한다. 오직 상대적인 면을 강조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스탈린과 히틀러까지 포용한다. 심지어는 일베와 서북청년단까지 끌어 안는다. 가히 충격적인 생각과 발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해가 되는 신기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마치 인간 사회가 굉장히 작아지면서 한 눈에 모든 걸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다.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어진다. 적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말이다. 신기한 경험이다. 


"현진은 이런 일에 관해 너무 판에 박힌 쉬운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는 일베이건 서북청년단이건 좀더 심층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략)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리 우리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사람도 아니다' 혹은 '미친놈들'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뜻이었어요. 사람으로서 특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본문 중에서)


"이제 아무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의 대화.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평생 가져 보지 못했던, 갖기 힘든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생각들을 잘 이끌어 낸 김현진이 대단하다. 라종일 교수는 이 책 하나로 이 시대 청춘들에게 멘토 이상의 버팀목이 될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 30대의 나이지만 흔치 않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있는 그녀가 낫기 위해 매달릴 만하다. 사소한 구원을 위해서.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속만 상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면 그의 말을 한 번 쯤 들어봄이 어떤가. 마지막으로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건네는 세 가지 이야기를 올려 본다. 첫째,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둘째, 나는 네 편이다. 셋째, 글 쓰는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 당신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네 편이다." 책을 덮고 나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가장 사소한 구원, 구원, 김현진, 노교수, 라종일, 청춘
  • BlogIcon 늙은도령
    2015.01.26 16:01 신고

    멋진 교수네요.
    이런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다니.....
    인간이 완벽할 수 없고, 사람은 시대를 닮기 마련이지만 그 시대적 차이가 민주주의를 만드는 힘이지요.

    • BlogIcon singenv
      2015.01.28 22:23 신고

      마지막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해요^^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블로그 이미지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by singenv

공지사항

  • 댓글에 대한 공지
  • [책으로 책하다 도서 목록]
  • <오마이뉴스> 서평/리뷰 송고 방침
  • 모든 이미지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

    최근...

  • 포스트
  • 댓글
  • 트랙백
  • 프랑스 대통령 후보이자 IMF 총재⋯
  • 소년에서 소녀로, 그리고 발레리나⋯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
  •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
  • 더 보기
  • 감사합니다~ 시즌3를 기대하고 있⋯
    singenv ㆍ 2020
  • 재미있게 읽었어요 지금 시즌2 보⋯
    개구리 ㆍ 2020
  • 감사합니다! 맞구독합니다~
    singenv ㆍ 2020
  • 구독과 하트 누르고 갑니다 맞구독⋯
    아마추어 리뷰어 ㆍ 2020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래 전 서평⋯
    singenv ㆍ 2020

태그

  • 넷플릭스
  • 죽음
  • 삶
  • 아포리즘
  • 현실
  • 역사
  • 사랑
  • 인간
  • 관계
  • 책
  • 청춘
  • 천재
  • 일본
  • 가족
  • 제2차 세계대전
  • 연기
  • 여성
  • 미국
  • 만화
  • 영화
  • 책으로 책하다
  • 전쟁
  • 캐릭터
  • 소설
  • 재미
  • 희망
  • 중국
  • 피해자
  • 욕망
  • 성장

글 보관함


  • 2021/01
    (11)

  • 2020/12
    (13)

  • 2020/11
    (11)
«   2021/01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링크

카테고리

다양한 시선 (1414)N
신작 열전 (604)N
신작 도서 (303)
신작 영화 (301) N
넷플릭스 오리지널 (133)N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오래된 리뷰 (202)
생각하다 (231)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그대 그리고 나 (17)
서양 음악 사조 (8)
인권 선언 문서 (4)
조선경국전 (5)
중국 영화사 개괄 (5)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카프카의 편지 (6)
팡세 다시읽기 (14)
명상록 다시읽기 (12)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감독과 배우 콤비 (10)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궁극의 리스트 (8)
제9의 예술, 만화 (14)
독립영화의 힘 (4)
생생 스포츠 (10)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첫 문장-아포리즘 (8)

카운터

Total
2,072,381
Today
99
Yesterday
154
방명록 : 관리자 : 글쓰기
singenv's Blog is powered by daumkakao
Skin info material T Mark3 by 뭐하라
favicon

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 태그
  • 링크 추가
  • 방명록

관리자 메뉴

  • 관리자 모드
  • 글쓰기
  • 다양한 시선 (1414) N
    • 신작 열전 (604) N
      • 신작 도서 (303)
      • 신작 영화 (301) N
    • 넷플릭스 오리지널 (133) N
    •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 오래된 리뷰 (202)
    • 생각하다 (231)
      •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 그대 그리고 나 (17)
      • 서양 음악 사조 (8)
      • 인권 선언 문서 (4)
      • 조선경국전 (5)
      • 중국 영화사 개괄 (5)
      •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 카프카의 편지 (6)
      • 팡세 다시읽기 (14)
      • 명상록 다시읽기 (12)
    •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 감독과 배우 콤비 (10)
      •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 궁극의 리스트 (8)
    • 제9의 예술, 만화 (14)
    • 독립영화의 힘 (4)
    • 생생 스포츠 (10)
    •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 첫 문장-아포리즘 (8)

카테고리

PC화면 보기 티스토리 Daum

티스토리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