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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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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출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 2019.09.01
  • 현시대적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그린 신화적 로맨스 <조> 2019.07.24
  • 일본 버블붕괴기 '잃어버린 10년'의 기막힌 변주 <종이 달>(2) 2017.06.02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출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

오래된 리뷰 2019. 9. 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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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저수지의 개들>


영화 <저수지의 개들> 포스터. ⓒ미라맥스



2020년대를 코앞에 둔 지금,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감독들 중 1980~90년대에 걸쳐 걸출한 데뷔를 한 이들이 많다.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이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90년대로 넘어가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크로노스>, 크리스토퍼 놀란의 <미행>,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 등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90년대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넘어설 데뷔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아니, 그 영향력으로만 따진다면 전후로 그런 데뷔작이 나오긴 결코 쉽지 않다. 이 영화로 데뷔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그는 최근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까지 10여 편의 작품을 내놓았는데, 2번째 작품인 <펄프 픽션>과 함께 <저수지의 개들>을 최고작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물론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할 순 없는 것이, 그는 201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좋은 작품을 내놓고 있다. 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이후 한 작품만 연출하고 감독에서 은퇴해 책과 연극 각본에 매진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과연 이루어질지 의문이긴 하나 과연 그다운 생각이라고 본다. 여전히 막강한 파급력이 있는 '건강한' 모습으로 뒤로 물러선다면 그것 만큼 완벽한 게 어디 있겠는가. 


다이아몬드 도매상 털기, 하지만 스파이가...


쿠엔틴 타란티노가 <저수지의 개들>을 만들기 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던 영화광 점원이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건 물론 주연의 소소한 한 축으로도 활약한다. 불과 수천 만원의 소규모 독립영화로 만들 예정이었던 이 영화는, 우연이 겹쳐 예산이 10억 단위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기엔 터무니 없이 적은 예산이었지만. 


영화는 여덟 명의 사내들이 식당에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별다른 내용 없이 지나간 후, 배에 총을 맞은 미스터 오렌지를 미스터 화이트가 차에 태우고 은신처 창고로 향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어가는 오렌지, 괴로워 하는 화이트, 이내 미스터 핑크가 오고 미스터 블론드가 온다. 미스터 블루와 미스터 브라운은 죽은 듯하다. 


그들은 조 캐봇과 그의 아들 에디의 수주를 받고 다이아몬드 도매상을 털고자 모인 이들이다. 혹시 잠복해 있을지 모를 경찰 스파이 때문에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게 했다. 하지만, 작업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떼로 몰려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들로 보아선 여덟 명의 공모자들 중 스파이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일행은 창고에 모여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며 옥신각신한다. 그런가 하면 화이트, 블론드, 오렌지 순으로 어떻게 조와 에디를 만나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한편, 다이아몬드 도매상을 털고 난 직후의 모습들도 볼 수 있다. 정작 중요한 듯한 작업의 순간만을 빼놓은 채 전후 사항을 다(多)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분히 쿠엔틴 타란티노가 의도한 게 아닐까 싶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연출 스타일 정립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로 사실상 영화 연출 스타일을 정립했다. 이후 그가 꾸준히 보여주는 연출 스타일이 총망라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전매특허이다시피 한 잔인하고 잔혹한 폭력 위의 범죄,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영화 내용과 이어질 만한 게 나올 것 같아서 유심히 들어 보지만 아무 상관 없는 잡담인 게 드러나는 비속어 다분히 섞인 대사, 실명이 거론되며 광범위하게 인용되는 다방면의 대중문화코드. 


무엇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시점과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가 특출나다. 서사가 있는 영화라면 왠만하면 순서대로 진행될 텐데, 이 영화는 퐁당퐁당 형식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것도 아닌 것이 몇 가지 시점을 넘나드는 것도 모자라 시점 속에 가짜 이야기까지 넣는 대범함을 보였다. 우리는 그게 가짜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극중 인물들은 진짜라고 믿는 게 재밌다. 


이쯤 되면 알아차릴 수 있는 건, 그 '가짜' 이야기들은 영화에서 있으나 마나 할지 모르지만 쿠엔틴 타란티노가 전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름 아닌 그 가짜 이야기를 팔고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가짜 같은 진짜 혹은 진짜 같은 가짜에 열광한다.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거다. '내가 기가 막힌 이야기 한 편 들려줄까? 재미있을 거야.'


재미있는 이야기


우린 언제든 그가 건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까지 30여 년 가까이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이야기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 불러도 이상한 게 없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 '영화꾼'이다. 영상이 아닌 글로만 봤으면 이 만큼의 환희를 맛보진 못했을 거다. 그는 영화를 위한, 영화에 의한, 영화를 만든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통상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강탈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예산이 부족해 찍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그런 현실적인 제약을 영화적 장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일종의 '선택과 집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탈 장면의 삭제라는 선택을 했고, 대신 강렬한 캐릭터들 하나하나에 보다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서도 딱히 이상하다는 걸 느끼진 못할 것이다. 우린 그가 의도한대로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듯, 우린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 세상에서 영화 기구를 타며 즐기기만 하면 된다. 다방면의 다양한 대중문화 코드들과 쌈박하다 못해 웃기기까지 해 속이 시원해지는 비속어들이 반길 것이다. 굳이 깊이 해석하려 들지 말고 의아해하지 말고. 혹시 이상한 게 있으면 지체 없이 그에게 말하라. 그는 언제나 아주아주 심도 깊은 토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결코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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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대중문화, 범죄, 스파이, 영화, 이야기, 재미,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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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적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그린 신화적 로맨스 <조>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7. 2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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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조>


영화 <조>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경멸했다고 하는데, 매춘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현실 여성을 멀리한 채 조각에만 몰두한 피그말리온, 너무나도 아름답고 이상적인 여인 조각상을 만들고는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는 그것에게 정성을 쏟으며 사람 같은 대우를 해주었고 급기야 아프로디테 신에게 간청해 그것은 그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피그말리온은 그녀 갈라테이아와 결혼해 자식까지 두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리메이크되었고 또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간절히 원하고 기대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고,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좋은 영향을 미처 좋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도 유명하다. 여기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모티브로 쓰인 또 하나의 작품이 우리를 찾아왔다. 영화 <조>, 특별한 로맨스에 천착해오고 있는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신작이다. 그의 작품들은 지난 2011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작 <라이크 크레이지>를 시작으로 국내에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이후 꾸준히 선보인 작품들은 다름 아닌 로맨스물, 하나 같이 영상과 음악의 톤앤매너가 굉장히 감각적이다. 최신 로맨스 영화의 첨단이자 한 축을 이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다만, 그에 비해 한없이 떨어지는 스토리의 빈약함이 큰 단점이다. 보는 맛과 듣는 맛은 출중하지만, 영화가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지 않은가. 꾸준히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을 연작처럼 내놓고 있는데, <조> 이후 힘든 갈림길에 봉착하지 않을까 싶다. 균형을 찾길 바라며 영화로 들어가본다. 


로봇 조와 인간 콜의 사랑


영화 <조>의 한 장면. ⓒ (주)팝엔터테인먼트



조(레아 세이두 분)는 커플의 연애성공률을 분석·예측해 제공하는 연구소에 일한다. 커플들은 관계의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고 수치로 결정한다. 그녀가 눈길을 두고 있는 이가 연구소에 있으니, 로봇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콜(이완 맥그리거 분)이다. 그는 일에 파묻혀 살다가 이혼하고는 혼자 살고 있다. 왠지 모르게 그의 조를 향한 시선도 남다르다. 그들의 대화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서로 관심을 두고 끌린다면 알지 못할 이유가 없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법, 하지만 조는 콜과의 연애성공률이 0%가 나온 걸 보고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뒤로 한 채 조는 콜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내 콜이 조에게 고백한다. 사실 넌 내가 만든 로봇이라고. 네가 이렇게 인간과 대등하게 진화할 줄은 몰랐다고. 진작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그들의 연애전선에 이상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꾸준하고 순도 높은 사랑의 모습을 함께 한다. 조의 로봇 동료 애쉬도 응원하고, 콜의 전 부인 엠마도 응원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조가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망가진 것이다. 콜은 조를 수술시켜 회복하게끔 하지만, 그들 사이는 멀어져 버렸다... 인간 아닌 '로봇'으로서의 조가 너무도 날 것으로 드러나버린 것이다. 한편 잠깐 동안 첫사랑 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약 베니솔이 출시된다. 


신화적 로맨스, 진짜와 가짜


영화 <조>의 한 장면. ⓒ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조>는 현시대적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신화적 '로맨스'를 그렸다. 그 중심엔 '사랑'이 있고, 그 이면엔 '진짜와 가짜'가 있다. 디스토피아라 하면 가공의 완벽한 이상향을 가리키는 유토피아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유토피아를 꿈꿨다가 실패하여 정반대로 가버린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중에서도 콜의 회사가 추구하는 게 유토피아다. 로봇이 단순히 인간이 편리해지기 위한 존재를 넘어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완벽한 대체제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처럼 진화를 하는 로봇이 나타나는데, 그게 조이다. 


영화는 흔히 생각하는 디스토피아의 파괴적 단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피폐한 단상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적으로 단번에 다가오지 않고 정신적으로 천천히 깊숙히 다가온다. 로봇을 비롯 연애성공률을 예측해준다느니 베니솔을 출시한다느니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연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역행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면 유토피아인 것처럼 보였던 세상은 점점 디스토피아적 양상을 띤다.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조>는 일련의 양상들 그 시작을 주지했다시피 피그말리온 신화의 로맨스에서 따왔다. 다만 신화에서 주체가 창조적 주체인 진짜 인간 피그말리온이었다면, 영화에서 주체는 창조적 객체인 가짜 로봇 조이다. 앞엣것이 인간의 모든 걸 뛰어넘는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한다면, 뒤엣것은 로봇의 모든 걸 뛰어넘는 섬뜩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진짜가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건 아직까진 진짜의 컨트롤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손아귀 안에서 바운더리를 치고 나름 안전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가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자 했다가 실패했는데 가짜 스스로 진짜가 되고자 한다면, 그건 '아웃 오브 컨트롤'이다. 세상을 이루는 금기가 깨진 것으로, 바운더리는 존재하지 않고 안전한지 안전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조>의 세상이 그렇다. 


예쁜 디스토피아


영화 <조>의 한 장면. ⓒ (주)팝엔터테인먼트



그럼에도 <조>는 로맨스 영화이다. 사랑이 주된 내용인 것이다. 앞서 말했든 <조>의 세상은 금기도 깨지고 경계도 존재하지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디스토피아이지만, 영화의 외형은 철저히 '예쁘다'. 감독의 단순한 취향이라면 실망이다. 순간의 끌림을 위한 CF의 한 장면이 영화의 외형적 텍스트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를 의도한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정도이다. 영화의 내형적 컨텍스트를 담는 그릇으로 훌륭하게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로맨스 연작을 생각해보면, 완벽하진 않지만 후자에 가깝다. 


사랑에 천착하는 로맨스의 환상과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색감, 빨려들어갈 것 같은 빛의 향연과 그에 조우하는 반사적 아련함과 뿌연 입체감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기까지 하는 것이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으로 패션 디자이너로서 세계적 명성을 쌓고는 영화 감독으로 전향해 그만의 색감과 미장셴으로 독보적 명성을 쌓고 있는 톰 포드의 영화들이 연상된다. <싱글맨>과 <녹터널 애니멀스> 말이다. <조>는 그보다 훨씬 예쁘다. 


음악은 또 어떤가. 그 자신이 아직 30대 후반의 영화 감독으로선 너무나도 젊은 나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느낌의 세련되고 힙한 음악을 예쁜 색감의 영상과 딱 맞아떨어지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을 속삭일 때면 여지없이 오글거리는 대사의 연속과 나른함까지 동반되게 하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들의 향연이 계속된다. 녹아내린다는 표현이면 적절할까. <조>는 보고 있으면 한없이 아련해지며 몽롱해지는 마법을 부린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한 디스토피아를 보여준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두려움이 끼쳐온다. 편안한 듯 균열이 감지되는 불편함이 시종일관 함께 한다. 


영화는, 결국 진짜 인간에게서 진짜 사랑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고 어렵기에 가짜 로봇에게서 진짜 사랑을 찾으려 하고 약을 통해 가짜 사랑이라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찾으려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되며 진짜가 진짜일 필요가 있는지 가짜가 가짜여도 상관없지 않은지 근원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런데, 진짜란 무엇이고 가짜란 무엇인가. 이 지극히 철학적인 명제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히지만, 영화는 개의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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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붕괴기 '잃어버린 10년'의 기막힌 변주 <종이 달>

오래된 리뷰 2017. 6.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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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종이 달>


한 평범한 가정 주부의 기막힌 일탈, 횡령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밀회를 즐긴다. 그건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변주다. ⓒ영화사 오원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버블경제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한 키워드다. 특히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버블붕괴기는 현대 일본을 이야기하는 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2000년대에도 나아질 또는 예전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20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바, 참으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그 지위를 굳히자마자 앓게 된 숙명적 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병은 나라에서 사회로 가정으로 개인으로 전염되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개개인들이 뒤짚어쓰다시피 했다. 많은 사회파 소설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작 소설로 회자되는 작품을 영화화한 <종이 달>은 드라마를 기본으로 한 심리와 상황적 서스펜스 장르를 앞세워 숨막히는 현실감을 선사한다.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진중한 변주가 엿보인다. 그런 한편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도 가미해 소설과 영화만이 가지는 예술적 특성의 발현도 만끽할 수 있다. 


일본 버블붕괴기의 변주


이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하다. 리카의 삶이 불안하고, 보고 있는 내가 불안하며, 이 세계까지 불안해 보인다. ⓒ영화사 오원



그리 모자를 것 없는 가정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우연한 기회에 별 생각 없이 지원해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은행에서 어느새 4년차 계약직원이 되었다.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충동적으로 화장품을 사게 되는데 만 엔이 부족하길래 고객의 예금에서 꺼내 쓰고 나중에 채워놓는다. 채워놨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한 번의 행위가 시작이었으니...


이번에도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껄끄럽지만 대형 고객의 손자 코타와 마주친다. 일전에 집에 찾아 갔다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카의 충동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코타와의 밀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리카의 남편은 상하이로 장기출장을 가는데, 리카는 코타와의 밀회를 계속하면서 홀로 남는다. 그리고 코타가 대학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를 위해 리카의 충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대형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 것이다. 이전에 잠깐 쓰고 채워놓은 만 엔 정도가 아닌, 200만 엔의 거금이다. 당장 채워놓을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더 많은 고객 예금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엄청난 돈을 쓰는 호화로운 생활에 취해버린 것 같다. 그녀의 앞날은 어떨까.


1990년대 중반 일본, 가정주부 출신, 은행, 대형 고객, 횡령, 밀회, 자유. 영화 <종이 달>을 형성하는 키워드들이다. 동일선상의 층위라고 할 순 없지만, 1990년대 일본 버블붕괴기의 여러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횡령과 밀회와 자유의 상관 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요소와 개인적 요소를 합리적으로 이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횡령에 의한 호화생활, 그 모든 게 신기루이자 가짜


제목 '종이달'은 신기루이자 가짜의 상징이다. 리카가 횡령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밀회를 즐기는 게 모두 그렇다는 것.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라. ⓒ영화사 오원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중심엔 리카의 횡령이 있다. 그녀가 상대하는 대형고객들은 망령든 일본 사회가 흩뿌린 마지막 행운을 움켜쥔 운좋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버블경제의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버블경제가 곤두박칠 치기 직전 땅값과 주가가 폭등할 때 한몫 챙겼을 것이다. 이후 모두가 허덕일 때 홀로 자가증식했고 은행의 최대고객이 되었다. 


리카가 그들의 예금을 빼돌려 내연남과 함께 분수에 맞지 않은 호화 생활을 한 건,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한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아닌 버블경제가 낳은 '버블'이라는 쓰레기를 조롱하며 그 또한 언젠가 사라질 신기루이거나 이미 진짜 아닌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렬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리카는 달리 말한다. 왜 횡령을 일삼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앞에 '가짜로서의'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녀 입으로 직접 대형고객들의 예금을 빼돌려 호화 생활을 한 게 전부 '가짜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돈 모두 버블에 지나지 않은 신기루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리카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빼돌린 돈으로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보이는 그녀의 공허한 표정은 앞으로 다가올 예정된 비극을 암시한다. 그녀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죗값을 달게 받을까. 그건 이 변주의 정석적인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죗값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이 변주의 훌륭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죗값을 받고 있지만, 정작 버블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죗값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원을 달리하는,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


'가짜'와 '자유'를 운운하는 그녀의 횡령범죄, 진짜 문제는 그리고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나라를 그 꼴로 만든 이들의 무능력과 무감각과 무탈함일 것이다. ⓒ영화사 오원



시대의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출신의 리카가 벌인 희대의 범죄 행각은, 그 평범함이 주는 무감각만큼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횡령은 그 어느 누구라도 실행 가능한 범죄이며, 그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범죄다.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부자의 돈이라며 자기합리화하고, 다시 채워넣으면 된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더 큰 문제이자 더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이다. 횡령을 비롯한 그들의 범죄는 전국민 누구나 알게 되어 공론화 되지만, 전국민 누구도 그 자세한 사항과 비하인드 스토리와 이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회자되고 비난받고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삶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소시민의 평범한 범죄가 주는 소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정한 범죄가 아닌가. 


일본의 버블붕괴, 한국의 IMF사태, 미국의 금융위기와 같은 초국가적 경제 위기는 모두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비상식적이고 의도된 무감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리카의 '자유'와 '가짜' 운운하는 횡령 범죄는 비록 그 평범함 때문에 더 깊숙이 와 닿아 더 치를 떨고 지켜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귀엽다고 하겠다. 한편, 리카가 말하는 자유와 가짜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이들에게 던지는 말이니 만큼 아니러니하다 하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생각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건 한순간이기에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건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해당된다. 돈을 채워놓지 않는 한 반드시 들통 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채워놓을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결국 들통 난 이후에 해당될 것이다. 죗값을 받을까? 도망갈까? 여기에서의 선택은 보다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인 바, 도망을 택하겠다. 리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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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가짜, 무감각, 일본 거품경제, 잃어버린 10년, 자유, 종이 달, 횡령

  • 2017.06.03 11:01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singenv
      2017.06.03 11:16 신고

      아이구, 감사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연재도 하고 있으니, 거기에서도 보실 수 있어요ㅋ 블로그에는 월수금 올리고 있구요ㅋ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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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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