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감독의 본격적 상업영화 진출작 <공동경비구역 JSA>, 21세기 시작을 알리는 한국영화의 명작이다. ⓒCJ엔터테인먼트
지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굳게 악수를 나누며 남북은 극적인 화해 모드로 돌입한다. 이른바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때마침 나왔던 박찬욱 감독의 3번째 장편 <공동경비구역 JSA>는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로 명성을 떨쳤다. 박찬욱 감독은 비로소 상업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고 남북간 화해모드가 조성된다. 특히 후자의 영향으로 1999년 <쉬리> <간첩 리철진> 등의 상업영화가 만들어져 대대적인 인기를 끈다. <쉬리>의 경우 한국영화 흥행 기준을 바꾼 영화이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나온 <공동경비구역 JSA>는 명작+상업+시대적 관심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최초의 한국영화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후 적어도 상업영화에서 보여주는 박찬욱 스타일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2년 뒤에 나온 <복수는 나의 것>으로의 외도(?)를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 중에 가장 재밌지만 은근 어려워서 가장 많이 보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쉽게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힘든 국면이다.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북한과 남한의 엇갈리는 진술, 과연 진실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CJ엔터테인먼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한군 초소에서 총성이 울린다. 살인사건이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이영애 분)를 책임수사관으로 파견한다. 소피는 한국군 당사자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북한군 당사자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를 만나 당시 사건의 정황을 묻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술은 다르다.
북한은 남한 측의 북한군 초소 기습공격으로, 남한은 북한 측에 의한 남한군 납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북한군 초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건 사실, 사건 후 그곳에는 북한 초소병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가 총알 8방을 맞고 죽어 있었고, 그 옆에 북한 상위가 죽어 있었다. 한편, 오경필은 오른쪽 팔에, 이수혁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피가 보기에 뭔가 의심쩍은 상황, 소피는 사건 당시 북한군 초소에 제5의 인물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이수혁의 후임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을 추궁한다. 그 와중에 남성식이 투신하고, 사건은 점점 진실에 다가간다. 그때 그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사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영화가 초반을 넘기면서 보여주는 진실은, 당시 당사자들이 한없이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 하는 것에 비해 지나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씁쓸하다. 분단된 현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역사와 시대의 무게를 한낱 개인이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안타깝고 안타깝고 안타깝다.
선과 경계, 그리고 금기 깨기
북한과 남한, 절대적인 선과 경계가 존재한다. 영화는 그것들을 넘어 금기 깨기를 서슴치 않는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선과 경계를 넘어 금기 깨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수혁이 일행과 떨어져 북한 땅에서 지뢰를 밟았을 때 나타난 오경필과 정우진, 오경필이 이수혁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에서 이미 금기는 깨진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그들의 우정은 오히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안보'라고 하면 거의 100% 대북 정책의 기조 아래 있는 것이다. 여기엔 절대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명확한 선과 경계만 있을 뿐, '중립'이 들어설 자리에 어디 있겠나 싶다. 영화에서 소피는 그 자신이 남과 북을 드나들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넘어야 할 당사자는 중립 따위가 아니다. 경계 밖에 있는 이가 아니란 말이다. 경계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이야말로 경계를 넘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시대와 완벽히 조우했고, 시대의 한계를 완벽히 그려냈으며,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다시 바라보았고 예견했다.
반공의 남한, 반미의 북한, 그리고 제3지대. 영화는 세 입장을 대변하는 최고위층의 경계를 지키려는 속셈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흘려내는 반면,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려는 지극한 개인을 대놓고 긍정적으로 그려내며, 금기 깨기를 시도하지만 영화 이후까지 보여주려 했기에 실패하고 만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를 지향했다면 충분히 금기 깨기를 완성시켰을 테지만, 이미 사건의 진실로 판타지는 완성되었다.
남과 북의 '연결', 그 해석의 의미
영화에는 '연결'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이 나온다. 그건 북한과 남한의 '같음'으로 어이질 수 있지 않을까.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소소하고 소품, 꼼꼼한 조작 등으로 핵심 주제를 때론 비틀어 때론 정면으로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후에도 즐겨하는 미장셴이 주를 이루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확함을 그 기조로 한다고 하겠다. 그것들이 품은 의미를 찾는 것도 한 재미이거니와, 그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유의미한 스트레스도 존재한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같은 장소에서 행해졌다든지, 소피가 사진에서 숨기려고 했던 아버지의 존재와 남성식이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을 때 감추고자 했던 김일성과 김정일 존재의 일치성이라든지, 근무를 서는 와중에 이수혁에게 그림자도 넘지 마라고 하는 오경필과 오밤중에 처음으로 선을 넘으려는 남성식에게 어서 오라고 말하는 이수혁의 역설 등이 그렇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장면장면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은 모두 남과 북의 '다름'이 아닌 남과 북의 '같음'을, 또는 남과 북이 다르다고 해도 최소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해석과 시각과 생각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그 참혹하고 치가 떨리는 전쟁을 겪었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그런 생각을 해야 하고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하고 그런 해석을 해야 한다.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 대치는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보험 같은 게 아닌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대치를 하는 게 아닌가. 영화에서 보여준 파라다이스이자 유토피아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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