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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된, 뜻밖의 그곳 <폭력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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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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