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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세심하고 진지한 와중, 새겨볼 만한 인생 여정과 삶의 단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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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와일드>


괜찮은 감독 장 마크 발레와 괜찮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의 만남, <와일드>. ⓒ이십세기폭스코리아



PCT, 일명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는 게 있다.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로,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약 4300km에 이르는 도보여행코스다. 말이 여행이지 매순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절망과 좌절과 다름 아니다. 꿈에서나 가능한 도전과 영광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그 절망과 좌절의 길에서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건져올리고자 하는 이가 있다. 20대 이른 나이에 밑바닥 인생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여인 셰릴 스트레이드, 홀로 대장정의 길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경험은 논픽션 책으로 나와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 마크 발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영화 <와일드>. 


장 마크 발레는 흥행보단 비평에 강한 감독이다. 1995년에 장편영화 데뷔 이후 현재까지 총 8편의 장편을 연출했는데, 2013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후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와일드> <데몰리션>까지 선보였다. 모두 수준급 이상의 '괜찮은' 영화들이다. 그중 <와일드>는 그의 스타일리시함은 최대한 배제한 반면 섬세함은 극도로 끌어올린 듯하다. 그의 필모 중 가장 무난하게 괜찮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모든 걸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 셰릴이 장장 4300km의 PCT를 완하려 한다. 그 끝엔 무엇이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은 족히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울 것 같은 배낭을 지고 당당히 홀로 태평양 연안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에 도전한다. 시작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응당 어떤 큰 일을 겪지 않은 이상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일, 셰릴에게 일어났었을 일들이 궁금해진다. 


그동안 그녀의 짧은 삶에 행해진 일들을 단순히 몇몇 말의 나열로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과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점철된 불우한 어린시절, 모든 것이나 다름 없던 엄마의 죽음과 해체되는 가족, 섹스와 마약으로 잃어버린 사랑과 그로 인한 이혼까지. 


고난과 환희가 엇갈리는 길 위에서 셰릴은 그동안의 삶이 주는 끝없는 고통들을 다시금 맛본다. 그녀로서는 떨쳐버리려 왔는지, 되새기려 왔는지, 깊이 새기려 왔는지, 정면으로 들여다보려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도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그 길 위에서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끝에 도달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다. '고작' 폭염과 폭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단숨에 쓸려갈 것 같은 강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과 동물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것들을 더한 것들을 겪어 왔고 겪고 있고 겪을 그녀이기 때문에.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도전의 끝이 아닌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


이 무지막지한 도전은 끝을 보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엇' 이상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행군'이라는 걸 몸소 겪어봤을 것이다. 30~40kg에 육박하는 군장을 짊어지고 밤새 30~40km 이상의 길을 주파하는 훈련으로, 보통 4박 5일에 걸친 '대훈련'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곤 한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우애를 기르며, 체력을 단련하고... 


이처럼 '심신(心身) 단련'에 탁월하다는 행군, PCT는 약 4300km로 일반적인 행군을 100일 이상 매일 행해야 한다. 행군의 목적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과 인생을 건 도전이라 할 만하다. 그 끝에 다다르면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했는데 무엇인들 못하랴'와 같은 자신감 폭발과 동기 부여 등. 


하지만 영화는 그 도전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처참할 정도로 힘든 과정과 그 가운데에서도 처참의 끝에 받는 도움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얻을 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끝이 아닌 그 도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 도중에 깨닫는 건 너무도 힘들지만, 그 끝에서라도 깨닫는 게 중요하겠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셰릴이 얘기하는 건, 비록 무지막지한 육체적 고통일지라도 우린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라는 걸, 정신적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거니와 우리를 단련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함을, 그녀의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의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사실 둘 다일지 모른다. 


새겨볼 만한 인생의 여정, 삶의 단면


그럼에도 이 도전은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은 아마 이 무지막지한 행군을 통해, 그 '환상적인' 고통의 지속을 통해, 그동안의 삶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테다. 힘든 여행이든 차분한 여행이든, 우린 여행을 통해 힘든 지난날에서 희망의 앞날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계속해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반추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고통을 겪는, 이중 고통을 통해 모든 고통을 완전히 뒤로 하려는 그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그리웠다. 그 고통의 시간 한가운데 있는 엄마가 한없이 그립다는 걸 깨닫는다. 즉, 다 받아들인 채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꾸역꾸역 몸무게보다 무겁게 넣어 짊어지고 온 배낭처럼. 


함부로, 그 길을 가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는 4300km의 길을. 함부로, 그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그렇지만, 그 두 길을 모두 가본 이가 말하는 건 다르지 않을까.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와일드>는 그 세심하고 진지한 연출 속에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한 인생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 여정에 동참해 많은 걸 얻진 못하더라도, 무엇이라도 얻고자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감동을 얻기 보다,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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