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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이안 감독의 '인생 영화' <결혼 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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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거장 이안 감독의 오늘을 있게 한 작품 <결혼 피로연>. ⓒ(주)케이알씨지



유명한 영화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 있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 있다. 의외로 개중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많은데, 그 이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강해서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의 안정적인 퍼포먼스로 충분한 기대 충족 모멘텀을 구축, 아시아는 물론 할리우드를 정복하고 세계적으로도 감독의 기량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만 영화 감독. 이안에게도 그런 작품이 있다. 


이안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지난 25년 간 10편 남짓한 많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누구나 알 만한 대단한 영화로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라이프 오브 파이>를 들 수 있겠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수익과 비평 양면을 완벽히 요리했다. 그런 그에게도 흠이 하나 있으니, 15년여 전에 내놓은 <헐크>인데 거장도 히어로물은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정확히 보여주었다. 3년 뒤에 <다크나이트> 출현으로 조금은 상쇄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안은 위에서 들었던 2000년대 영화 이전에 1990년대부터 충분히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었다. 1992, 93, 94년에 연달아 대만 배경의 영화를 내놓고는 95년 할리우드에 진출해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대박을 낸다. 그리고 97년과 99년의 상대적 과도기 이후 2001년 <와호장룡>으로 진정한 거장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생각하는 이안 감독의 진정한 '인생 영화'는 93년에 내놓은 <결혼 피로연>이다. 이후 그의 영화 인생 길은 이 영화에서 비롯되고 파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서로서로 이득이 되는 선의의 거짓말로 위장결혼을 택한 이들, 하지만 일을 계속 꼬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주)케이알씨지



뉴욕에서 잘 나가는 부동산 딜러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대만 출신 웨이퉁(조문선 분), 그는 남자친구 사이먼(밋첼 릭테스타인 분)과 동거한다. 이 사실을 알 길 없는 부모님은 자주 편지를 날려 결혼과 손주를 기대하고 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웨이퉁과 사이먼, 급기야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대만에서 맞선녀를 보낸다. 동성애자인 웨이퉁이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이에 사이먼이 황당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한다. 


웨이퉁이 관리하는 건물에 세들어 사는 여인 웨이웨이(메이 친 분)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이다. 웨이웨이는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웨이퉁은 부모님을 거짓으로나마 일단 만족시켜드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뉴욕으로 출두한다. 철저한 준비를 하는 세 사람, 같이 살게 될 집은 일단 웨이퉁과 사이먼이 동거하는 사이먼의 집으로 잡고 결혼식은 동사무소 같은 곳에 가서 약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하등 이상할 것도 꺼림칙한 것도 없다. 


문제는 역시 부모님이다. 나이가 나이신 만큼, 장군 출신의 대단한 집안인 만큼, 당연히 대만 전통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었던 부모님, 약식 결혼식을 올리고는 울음을 터트리신다. 대신 사이먼이 뉴욕 최고의 중화요리집으로 초대해 그들만의 결혼 피로연을 연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우연찮게도 요리집 사장이 웨이퉁 아버지가 장군이었던 시절 오랫동안 기사 노릇을 했던 이였던 것. 그는 장군의 아들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미국식으로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자신의 요리집을 무료로 빌려주어 대대적인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열게 한다. 


이보다 난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세 사람이지만, 문제 없이 치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절차를 따른다. 그런데 결혼 피로연에서 웨이퉁과 웨이웨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부모님은 돌아가지 않으시며, 세 사람의 굳건한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면 좋을까?


이 '좋은' 영화의 따뜻함


날카로움이 좋은 영화의 기본 키워드가 된 요즘, 따뜻한 좋은 영화를 다시 본다. ⓒ(주)케이알씨지



영화는 명백한 코미디 느낌으로 시작해 그 느낌을 이어나간다. 좌충우돌 소동극이라고 해도 무방한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기 때문인데, 그 자체에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부모님과 세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데,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 갈등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이런 요소들을 머금은 채 초반에 쉽게 풀다가 중반 이후에 폭발하면서 문제들을 드러내고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반전으로 기막힌 화해를 선보인다. 대만 최고의 톱배우 조문선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이 작품에서 그는 상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역의 랑웅과 더불어 협력과 대립의 조화를 이끈다. 


특히 랑웅은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 모두 출현해 중심을 톡톡히 잡는데, 2002년에 세상을 떴기에 <와호장룡>을 마지막으로 찾아볼 순 없다. 계속 살아계셨으면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 작품에서 동양, 전통, 보수의 상징과도 같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반전 중 하나라 할 만한 그의 영어 실력은 그 모든 걸 일거에 무너뜨린다.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대립되는 것들의 단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거나 통렬하게 비판하거나 악랄하게 찍어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25여 년 전이라 그럴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건 순전히 이안 감독의 의도이자 그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우린 2008년 이후 자본주의의 폐해를 섬뜩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와중에 <결혼 피로연>의 따뜻함을 목격한다면,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의 느낌을 들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루는 영화들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보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좋은'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영화는 세대, 동서양, 남과여의 차이를 허물고 조화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주)케이알씨지



애초에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의 갈등,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5여 년 전에, 그것도 촌스럽지 않고 감각적으로 풀어낸 이안 감독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르면서, 그의 담론에 동의한다. 동성애에 찬성과 반대의 논리 따위는 성립될 수 없다. 세대 간에 갈등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갈등도 존재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도 마찬가지로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동질성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강렬하게 다가 오고 부각되고 기억에 남는 한 면이 곧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들이다. 우린 이 길지 않는 영화 한 편으로 나쁜 예들과 함께 해결되는 모습들을 완벽에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다. 결은 완연히 다르지만 전체를 풀어내는 느낌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한국의 김애란 소설가 초기의 모습과 닮아 있다. 코미디 또는 잔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아픈 문제들. 다만,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쯤에서 '결혼 피로연(결혼식)'의 폐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만의 전통 결혼 피로연이나 미국의 약식 결혼 피로연이 아닌, 한국의 결혼 피로연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이것도 저것도 합친 '짬뽕'인 것 같다. 짬뽕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두며, 과도한 돈으로 치장된 보여주기식은 결혼식으로서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약식 결혼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영화로 봤을 땐 대만의 전통 결혼식이 가장 괜찮아 보였다. 


전통이 사라지는 것도 신식이 하대받고 무시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한 면이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의 하나가 아닌가. 역시 조화밖엔 답이 없을 텐데, 여기서 해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잘못된 해석의 총합은 폐해를 낳는다. 그건 곧 대립과 부조화를 낳아 오래된 비극을 만들기 십상인 것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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