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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멜 깁슨,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 영화관에 종지부를 찍다 <핵소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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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멜 깁슨의 <핵소 고지>


10년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멜 깁슨. <핵소 고지>는 상타려고 만든 영화이자, 그의 영화관이 집약되어 있는 영화다. ⓒ판씨네마



멜 깁슨이 10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손꼽으며 기다리는 정도는 아니나 일정 정도 이상의 기대는 하는 감독이다. 특히 이번 작품 <핵소 고지>는 그의 전작들이 가졌던 장점들만 모아놨다는 평을 듣는 전쟁영화인 바, 기대가 더 높아졌다는 걸 인정한다. 더불어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가 스파이더맨 이미지가 굳혀질 것 같을 때 선택한 두 영화(<사일런스> <핵소 고지>) 중 하나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멜 깁슨의 행보는 특이하고 영리하다. 1980~90년대 <매드 맥스> <리썰 웨폰> 시리즈 등으로 명성을 떨치고 많은 돈을 모으더니 돌연 연출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1993년에 데뷔해 25년 가까이 5편을 연출한 된 베테랑 감독이기도 한데, 그동안 많은 논란을 뿌리면서도 탁월한 리얼리즘 액션과 고민하는 개인 심리 그리고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메시지 전달은 변치 않았다. 


어렸을 때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당시에는 멜 깁슨이 연출과 감독 모두를 맡은 사실을 알 수 없었다)를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특히 장활한 연설 끝에 '프리덤!'을 외치며 엄청난 포스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달려가는 모습 말이다. 이번에도 이성을 잠식시키는 감성적인 명장면을 마음을 흐트러놓을까?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 영화관의 종지부


멜 깁슨이 그동안 만든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신념, 종교, 리얼리즘이 깔려 있었다. 이번 영화에 모조리 때려부었다. ⓒ판씨네마



어린 시절 있었던 일련의 일들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적인 이유로(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데스몬드 토마스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비폭력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도스는 또래들도 다 입대하고 할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원입대 한다. 누구보다 체력이 좋은 그, 하지만 군인이라면 절대적인 '집총'을 '거부'한다. 개인의 절대적인 신념에 의한 것. 종교가 전부는 아닌 듯하다. 


미군은 이 초유의 명령볼복종인 집총거부를 인정할까? 징병제이니까 군에서 쫓아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군대에 남아서 사람을 살리는 의무병이 되어야겠다는 또 다른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는 도스다. 그렇게 전쟁에 출전하게 된 도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가 주전장이다. 


그는 절대 굽히지 않았던 집총거부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비폭력과 활인(活人)을 견지할 수 있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도스 개인의 신념 형성과 고민과 견지를 다룬다. 남은 절반에는 신념의 실천을 다루니,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영화이자 종교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비단 도스의 신념뿐 아니라, 도스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 클로버(샘 워싱턴 분)의 신념과 간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오는 '악마' 일제의 대장의 신념도 살짝이지만 강렬하게 비춰준다. 멜 깁슨은 아무래도 이 영화로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을 버무린 영화관에 종지부를 찍을 모양인 것 같다. 


보통 수준의 전쟁신, 전쟁영화들이 생각난다


전쟁이 주된 테마 중 하나인만큼, 전쟁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여러 전쟁영화가 생각나는 보통 수준. ⓒ판씨네마



영화는 잔인하다는 평이 은근 많은 것 같다. 폭력의 수위가 다소 높다는 의견과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는 의견이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라서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사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 또는 보통의 수준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족히 20년은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해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인간성 상실의 상황에, 오로지 살리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뛰어든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대비가 극명하면 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겠다. 모두가 살인을 할 때 홀로 활인을 외치고 실제에 옮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나왔던 전쟁영화들에서 각종 장면을 차용한 것 같다. 초중반을 할애하는 전쟁 이전의 이야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전쟁에 출전하기 전의 훈련병 내무반 생활 장면은 <풀 메탈 자켓>을,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벙커 탈환의 소소한 작전은 <신 레드 라인>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홀로 적진으로 향하는 모습은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게끔도 했다. 


그러니 전쟁영화를 섬렵하다시피 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길지 않은 전투 장면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30분, 도스가 신념을 실현하는 모습에 있겠다. 


무리 없는 수작, 정이 가진 않는다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영화 자체로는 딱히 욕할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멜 깁슨이 다음에 또 이런 영화를 만든다면 보지 않을 것이다. ⓒ판씨네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전체적인 내용을 일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대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도스라는 '전쟁 영웅'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의 신념은 뒤로 하고 전쟁영화에서 비춰지는 영웅은 굉장한 위험이 뒤따른다.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에서 이긴 것 뿐인 역사의 승리자를 미화하며, 무엇보다 폭력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격이 다르다. 전쟁 영웅을 다루지만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절대적인 비폭력을 실행하니,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엄연히 실화이니 도식적이니 가식적이니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뒤로 한 신념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빚겨갈 순 없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한 개인의 신념을 지켜주었고 또 그 신념의 처절한 실천에 합당한 대우를 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 부분들에 지극한 드라마를 가미했다. 각종 논란거리를 일삼는 트럼프 정부를 향한 '미국은 이래야 한다!'는 일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수차례 인종 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멜 깁슨이니만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무리가 있겠다. 


전체적으로 무리 없는 수작으로 볼 수 있는 <핵소 고지>, 하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멜 깁슨이 또다시 이런 류의 영화를 내놓는다면 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진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최대한 살린 영화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거기에 어떤 논란거리를 얹혀놓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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