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더 킹>
지난 한 해 계속된 '시국영화', <더 킹>은 그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묵직하지만 가볍게, 직설적이지만 풍자적으로. 감독의 전작을 다 괜찮게 본 입장에서, 과연 이 영화는 어떨지? ⓒNEW
지난 2015년 11월 개봉한 <내부자들>부터 시작된 일명 '시국영화'. 사실 이 시국엔 어떤 영화가 나와도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시국을 그린 영화든, 시국을 비판한 영화든, 시국을 위로해줄 영화든 말이다. 2017년에도 변함없이 이어나갈 예정인 듯하다. 아니, 그 강도는 그 어느 해보다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한재림 감독의 <더 킹>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될 것인데, 가히 그 수위가 어느 영화보다 높다. 블랙 코미디로 무장한 직접적인 실명 거론과 패러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최순실 게이트'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어,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했고 한편으론 영화를 너무 날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17년 1월이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건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일 터,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한재림 감독의 능력에 관심이 쏠린다.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니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뿐만 아니라 제작한 두 개의 영화 모두 본 게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 감독은 이어서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을 연출했고, <연애의 온도> <특종: 량첸살인기>를 기획, 제작했다.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 모두 그가 각본, 각색에 참여했다는 것.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 타기
영화는 '개천에서 용 난' 한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으로의 험난하지만 할 만한 길을 보여준다. 그건 곧 한국 현대사의 추악한 일면. ⓒNEW
영화는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분)의 내레이션에 따라 진행된다. 초반엔 오로지 태수의 성장과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양아치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는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검사'의 힘을 보고 미친듯한 공부 신공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다. 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휘말린 태수는 군대에 끌려들어가고 제대를 하고선 단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된다. '샐러리맨 검사'의 시작이다.
태수가 바랐던 검사는 권력의 정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검사다. 그가 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때가,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른 삼류 건달 아버지를 단번에 제압한 진짜 '힘'의 검사를 보고 나서이지 않은가. 태수는 곧 정의를 버리고 권력의 라인으로 향한다. 검사 권력의 핵심인 전략부의 양동철 검사(배성우 분)와 전략부장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 라인이 그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주무르는 실세.
한편 목포 최대 조폭 조직인 들개파의 2인자 최두일(류준열 분)은 어린 시절 박태수의 친구였다. 홀연히 나타난 그는 박태수가 처리하지 못하는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개'가 된다. 대신 한강식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태수는 두일의 뒤를 봐주고 두일은 곧 강남의 1인자가 된다. 검사와 조폭이라는 상극이 한통속으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최대 '라인', 그렇지만 라인의 생태라는 게 정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는 법, 정점이란 곧 대통령을 말하는데 그들 또한 대선이 있는 5년마다 라인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력이란 이길 것 같은 라인을 잘 고르는 능력과 비록 진 라인에 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는 능력이다. 언제까지 계속 라인을 잘 탈 수 있을까? 천하 권력을 누리는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을까?
'이게 나라냐'의 지경으로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리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게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나라를 몇몇의 개인들이 좌지우지 하다니. 물론 현실은 더 막장이지만, 이들 또한 그에 큰 역할을 했음이 자명하다. ⓒNEW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지난 몇 달 동안 전국을 강타했는데, 결코 영화 유행어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울분의 토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도래.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거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하거나 고대부터 예견된 지구 멸망을 목도하는 것만큼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민간인의 나라 사유화. 모르긴 몰라도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는 깊디 깊을 것이다.
<더 킹>은 그런 작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린다. 그러기 위해서 차용한 것이 '한국 현대사 일별'. 이 영화를 보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대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를 볼 수 있다. 자칫 영화는 안 보이고 한국 현대사만 잘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의도가 그러한듯. 이를 알고 보면 재밌게 볼 수 있다.
2014년 말에 개봉해 큰 사랑을 받았던 '국뽕'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 현대사 연대기가 생각나게끔 하는 바, 하지만 <더 킹>은 국뽕과는 전혀 반대되는 면모를 보인다. '이게 나라냐'에 대해 참으로 영화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국까' 영화는 아닌듯,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사람이다.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권력의 정점, '더 킹'이라 칭한다. 그들을 권력의 노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폭주시키며 나라를 망칠 동안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일면 '더 킹'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기대를 웃도는 퀄리티, 차기작을 기다린다
영화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심각하기 그지 없는 소재들에 묻히지 않고 감독의 본연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그게 괜찮게 어울리니, 상당히 좋았다. 차기작이 기대된다. ⓒNEW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전작들을 모두 접한 이상 한 감독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시국에 편승한 그렇고 그런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내부자들>류의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괜찮네' '참신한대?' '기대 이상이네' '참 영화답게 잘 만들었네'를 연발했다. 다 보고는 '재밌었어'를 합창했고.
한 감독은 그동안 연출한 모든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약간의 사회고발, 지극한 리얼리즘, 은근한 코미디, 영화로만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요소를 보여주었는데 <더 킹>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현대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화려한 블랙 코미디와 영화시각적 요소로 가지고 놀듯이 보여준 모습들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몇몇 장면들, 한강식 라인의 승리 자축 파티 장면들에선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연상되었는데, 아무래도 오마주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희대의 사기극을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광란의 파티 장면을 차용해 쓰면서, 그들의 자축 파티 또한 사기극 못지 않은 희대의 범죄를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한재림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감독이 많지 않은데, 그런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 힐링을 주는 법이다. 그야말로 영화로만 얻을 수 있는 힐링 말이다. <더 킹>도 힐링을 주었나? 단연코 힐링을 주었다. 하지만 씁쓸함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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