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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죄'의 근본은 변할 수 있나?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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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우리를 찾아온 지 어언 10여 년이 되어가는 이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제야 보게 되었다. ⓒ주)노바미디어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 소년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고는 토를 하며 울고 있다. 지나가던 여자가 토사물을 치우고 소년을 토닥인 후 자신의 집으로 이끈다. 그러곤 목욕을 하게끔 한다. 집에 돌아가 진찰해보니 성홍열이란다. 몇 달을 요양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여자의 집으로 향한다. 이후에도 계속 찾아간다. 훔쳐본다. 


소년 마이클에게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여자 한나는? 어느 날 그녀는 마이클에게 일을 시키고는 목욕을 하게끔 한다. 그러고는 전라의 몸으로 그를 유혹한다. "이럴려고 온 거 아니야?" 마이클은 그럴려고 간 거였다. "당신, 정말 아름다워요." 둘은 사랑을 나눈다. 잠깐, 그들이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하는 것이 있다. 일종의 의식처럼 되었는데, '책 읽기'다.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오랫동안 다가가기 힘들었다. 30대 여성과 10대 남성의 성관계를 동반한 사랑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이유다. 다 보고 나서야 하는 얘기지만, 사랑은 정녕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이 엄청난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 그 장애물이라는 건 상상을 초월한다.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 변할 수 있을까?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한나의 경우는? 영화는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현재인 1995년에서 마이클이 과거 1950~60년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나와의 짧지만 강렬한 만남, 마이클에겐 첫경험이기에 그의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근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사무직으로 승진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한나, 마이클에겐 말도 하지 않고 떠나게 되어 마이클은 충격에 휩싸인다. 시간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 실습의 일환으로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한다. 그곳에 떡 하니 앉아 있는 한나, 마이클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그녀가 나치 협력자일 줄은... 하지만 충격은 계속된다. 


시종일관 계속되는 마이클의 충격, 그건 모두 한나에 의해서다. 그 이면에는 '나치'가 있다. 한나로 대변되는 나치 협력자, 즉 전쟁 세대와 마이클로 대변되는 전후 세대. 마이클 동료 중 한 명은 재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총으로 쏴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이클은 한나를 사랑했던 바, 그런 식으로 그녀를 대할 수 없다. 사랑 앞에선 나치 범죄도 한낱 과거의 일일 뿐인가?


이제 답해야 한다. 근본은 변할 수 있는가? 나치 협력자라는 근본이 변할 수 있는가? 인류 최악의 범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인가? 하지만 한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시행했을 뿐... 악마인가, 충실한 일꾼인가, 의도된 연출인가,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을 대변하는 인물인가. 답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우린 계속 생각해야 한다. '죄'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에서는 나치의 죄다. 힘겹지만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숙명. ⓒ주)노바미디어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수많은 인종학살, 즉 인종대청소도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인종학살을 일으켰다. 독일인이 가장 월등한 민족이고 유대인이야말로 없어져야 할 민족이라는 명목 하에. 


여기서 '많은 인종학살이 있었는데, 왜 나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아가 '수많은 악마 같은 이들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왜 한나만 갖고 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건 그들의 죄를 단 1%도 다시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죄'는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다른 어떤 '죄'와도 한통속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각각의 '죄'는 각각 처벌 받아야 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이것과 일맥상통하진 않는다. 다만, '죄'를 생각할 때, 나치 전범이라는 사상 최악의 죄를 생각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만 마이클의 동료가 말했듯이, 나치를 모조리 악마로 묘사하며 지상에서 없애버려 독일의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죄'에 대한 심판도 거치지 않고 말이다. 심적으론 100% 동의한다.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전후 세대는 야만과 비이성의 시대를 딛고 이성의 시대를 열어 과거 청산에 기치를 내걸었다. 그 와중에 다시 야만과 비이성이 들고 일어선다면, 그들과 우리를 구분짓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상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나 같이 안타까운 일만 초래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심판이 필요한 바, 하지만 한나 같은 경우는 심히 어렵고 괴로울 수 있겠다. 끊임없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후세가 지니고 가야 할 필연적 숙제이자 사명이다. 


'사랑'과 '죄'의 메시지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키다


영화는 '죄'에 대한 무거운 통찰과 함께 '사랑'을 얘기한다.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는 명제가 이를 관통한다. 과연 어떨까? ⓒ주)노바미디어


영화는 파릇파릇 즐거운 짧은 사랑이 지나고, 형용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무너짐의 시련을 지나, 기다림과 참회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지극한 사랑이야기, 그것이 이 영화의 실체라면 실체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나치'라는 존재가 워낙 강하기에 그곳으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를 관통하는 한나의 속사정, 그건 '책 읽기'와 관련이 있다. 


사랑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가. 인류 최악의 범죄보다 더 숨기고 싶은 사실은 무엇인가. 나치 협력이라는 근본은 절대불변의 악마적 소행인가. 내가 마이클이라면, 내가 한나라면? 내가 전쟁 세대라면, 내가 전후 세대라면? 심판하고 심판받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책임을 나누고 책임을 받아들이고. 너무 받아들이기 힘들고 싫은 것들 뿐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하나 같이 머리 아픈 것들. 그렇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들.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게 답이 아닐까. 이실직고 용서를 구하고, 깨끗하게 심판하고 받아들이고, '나'의 책임은 아니지만 '우리'의 책임으로 인지하고 책임을 나누고, 후대에게 이 모든 걸 거짓 없이 전달하고. 영화는 사랑이야기라는 실체와 더불어 또 다른 실체인 '역사 의식'을 일깨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적으로 각이 지지 않고 유려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말과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라는 말을, 둘이 맞붙을 때 상충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들을,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조화시켜 놓는다. 한나가 자신의 치욕적 비밀과 최악의 범죄 사이에서 고민하고, 마이클이 법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 결과였다. 마이클은 진정 한나를 사랑했고, 한나는 치욕적 비밀을 지킨 끝에 죗값을 받았다. 지극한 사랑, 비밀의 사랑적 승화, 합당한듯 합당하지 않은듯한 죗값. '죄'에 대해선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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