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박범신<은교>
소설 <은교> 표지 ⓒ문학동네
소녀는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적요 시인은 소녀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건 저돌적이기 그지 없는 '욕망'. 그는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의 이름은 '은교', 머지 않은 곳에 사는 17살 아이다. 그 아이는 이적요의 서재를 청소하게 되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모든 건 은교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와 그의 제자 서지우 작가가 남긴 일기, 그리고 시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Q변호사의 현재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은교의 시점은 끝내 비춰지지 않는다.
시작은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인데, 이곳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전체가 담겨 있다. 소설은 시작하며 그 모든 걸 풀어 놓는다. 스스로 스포일러를 푼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를 사랑했고 서지우를 죽였으며 자신 또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들은 변태적인 애욕이라 부르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누구도 막지 못할 '운명'의 결과물이다.
사건 자체에 반전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반전들이 있다. 이적요 시인과 은교, 은교와 서지우 작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심리 스릴러, 관능적인 섹스 판타지까지.
처참한 영화, 수불석권 소설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은교>는 개봉도 하기 전에 역시 '노출'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배우 김고은이 이 영화로 데뷔했는데, 헤어 노출을 감행한다. 더불어 박해일은 대역이었다고 하지만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안 볼 수 없게 하는 치졸한 언론 플레이였는데, 135만 명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소설에 비해 별 거 없었단 뜻이다.
조금이라도 박범신 작가의 원작에 그 화살이 돌아갈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의 영화 성적이 상당히 별로인 것 같다. <은교>도 은교지만, 최근에 개봉한 <고산자>는 10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범신 작가의 야심작 '욕망 3부작'의 멀티 유즈가 사실상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촐라체>는 연극으로, <고산자>와 <은교>는 영화로 나왔는데, 큰 반향도 큰 감동도 큰 흥행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선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는데, 우연히 잡아들게 된 소설은 가히 '수불석권'하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결코 얇지 않은, 아니 상당히 두꺼운 소설이었는데 욕망의 점점들을 그 끝에 파국이 있을 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다고 할까.
가끔씩 이런 장르적 글쓰기가 가미된 소설을 읽곤 하는데, 잘못 선택하면 소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소설을 보고 있는 나의 파국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책을 덮고 다신 거들떠도 안 보겠구나.' <은교>는 '오래지 않아 소설이 끝나겠구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겠구나. 어서 다른 소설을 꺼내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결코 흔치 않은 경우다.
노인의 사랑은 특별한가, 당연한가
소설에서 가장 눈살을 찌뿌리게 하면서도 가장 가슴을 친 이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린 이적요이다. 그의 나이가 되려면 족히 40년은 필요한데 어찌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는가. 그의 욕망이, 은교를 향한 변태적인 애욕이자 '사랑'이, 역시 제자 서지우를 향한 삐뚫어진 '사랑'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니 누구나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에서 가장 수요가 적은 노인을 택해 극적 요소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특별했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그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라는 생각보다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노인이 사랑을 하면 추태인 거다. 그런 와중에 10대 여자 아이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거다.
그럼 노인의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쉽게 용인하기 힘들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인데, 100% 변태로 찍힐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 수 없다. 이적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어려운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사랑이라 말한다.
여기에 제자 서지우가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단순한 사제 지간은 아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스승 이상으로, 아버지처럼 모신다. 시중이나 비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적 신과 다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적요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다. 이적요는 그런 서지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학적 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과 '인간'이라는, 가깝지만 먼 두 개체의 소용돌이가 이들 사이에서 요동친다.
연애소설? 예술소설!
<은교>는 어느 모로 봐도 연애소설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모든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사랑이라는 욕망과 다른 것들이 있다. 노인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의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끝인데 내 마음대로 사랑이라 외치고 사랑을 실컷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죽고 나서 영원히 남는 이름인데 살아생전 쌓아올린 명성을 무너뜨릴 순 없겠다 싶은 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거기엔 삶도 있다.
또한 이적요는 소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에, 문학이란 무엇인지 시란 무엇인지를 말하기도 한다. 공대생 출신인 서지우로선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 거란 강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며 이적요가 쓴 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서지우를 보면서 이적요가 갖는 복잡한 심리를 통해 '문학 동네'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이 별개 아니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이상 연애소설로만 볼 순 없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술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예술소설을 표방하고 있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어 불편하다는 점이다. 에돌아 은은하게 깔려 자연스럽게 알면 훨씬 좋았으리라. 작가의 실력이 모자랐을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노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외치듯이 '이 소설은 예술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노작가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박범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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