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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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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낳은 인류 최고의 문학 거장 '표도르 미할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보는 통찰에 있다 하겠다.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잘 알았던, 휴머니티(humanity)의 극(極)에 다다른 작가였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인간을 잘 알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마저 그 폭력성 때문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맛보았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밑바닥 생활을 하였는데, 그런 경험이 그의 소설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겪게 되는 특별한 경험. 이 경험이 100%를 차지하진 않더라도 이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는 사형을 언도받아 사형 직전에 기적적으로 풀려났었던 것이다.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1872년작.



급진적 정치 모임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에 태어나 1846년 25세의 어린 나이에 <가난한 사람들>로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때까지 그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나오는 <백야>, <문신> 등은 혹평을 면치 못하고, 그는 정치적 외도를 한다. 


때는 19세기,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봉건주의는 빠르게 타파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주의 사회였다. 자연스레 급직전인 세력들이 등장했고,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는 급진적이고 공상적인 사회주의의 선봉격이었다. 그의 이념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급기야 정치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젋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모임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당시 러시아 차르(황제) 니콜라이 1세는 첩자를 보내 이 모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49년 4월 15일 도스토예프스키가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던 것이다. 이 편지는 왕정을 신봉했던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읽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첩자의 밀고로 8일 후인 4월 23일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임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감옥에 갇혀 8개월을 보냈고, 그 사이 2개월여 동안 진행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군사재판에서 군사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린다. 


"퇴역 육군 중위 도스토예프스키는 범죄 음모에 가담하여, 정교회와 최고 권력을 거스르는 불온한 표현들로 가득 한 벨린스키의 편지를 유포시켰으며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사설 인쇄소를 통해 정부에 반대하는 문서를 보급했으므로 모든 권리를 박탈함과 동시에 8년간의 요새 유형에 처한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여기에 "4년 간의 징역 이후 사병 복무"를 추가했다. 하지만 황제는 예정에 없던 명령을 내린다.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사실 황제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사형을 선고한 후 사형 직전에 황제의 특별 사면을 통해 집행 유예로 풀어주게 하여,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그들에게 확실한 경고를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사형 집행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황제가 세부사항까지 직접 관여하였다. 


죽음을 맛보고 돌아오다


1849년 12월 22일,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의 회원 20명의 사형 집행이 거행된다. 영하 20도(50도라는 설도 있음)의 극한 추위 속에서 단두대 위의 말뚝에 두 손이 묶이게 되고, 곧 이어 집행관이 선고문을 읽는다. 그리고 총을 겨누어지고 발사되기 직전! 사형 집행 정지 휘슬이 울린다. 광장 저쪽 끝에서 말을 한 황제의 특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며 달려왔던 것이다. 사형이 중지되고 대신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로 인해 몇몇 사람은 백발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에서 연출된 사형집행극 장면Ⓒhttp://ch.yes24.com/Article/View/19364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심정을 다양한 방편으로 표출하고 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20년 후인 1869년에 나온 <백치>에서 그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열린책들' <백치>(상) 96~98쪽)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두 개의 선고 사이에, 즉 20분 아니면 적어도 15분 동안 '나는 몇 분 후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지요. 그가 가끔 가다 그 당시의 인상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 얘기를 난 무척이나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는 몇 번씩 그에게 꼬치꼬치 되묻곤 했어요. 그는 마치 어제 일처럼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몇 분 동안의 어느 한 순간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세 개의 기둥이 구경꾼들과 병사들 곁에 있는 처형대에서 스무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여러명 되어서였지요. 처음엔 세 명의 죄수를 그 기둥으로 끌고 가서 거기다 묶었습니다. 그리고 옷자락이 긴 흰 가운 같은 사형복을 입히고, 총이 보이지 않도록 흰 벙거지를 눈 위까지 눌러씌웠지요. 그러고 나서 각 기둥의 정면에 서너 명의 병사가 한 조를 이루어 정렬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죄수는 앞에서 여덟 번째로 서 있었고, 세 번째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모든 죄수들 앞을 돌아다녔습니다.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없었던 거지요. 이 5분이 그에게 있어서는 무한대의 시간이고 엄청난 재산처럼 여겨졌다고 그는 술회했어요.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5분 동안에 해야 될 일들을 정리했던 거지요. 


우선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을 할당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해 보는 데 2분,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할당했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결정을 시간에 맞춰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는 스물일곱 살이란 건강하고 혈기 왕성한 나이에 죽어 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동료들과 작별을 고하며 그 중 한 사람에게 아주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어떤 대답이 나올까 매우 궁금해 하기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과 작별을 고한 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2분이 찾아왔지요. 그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생각할 지 알고 있었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 보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지금 존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3분 후면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할 것이다. 그 존재가 생명체인지 비생명체인지는 모른다. 생명체라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될까? 그리고 어디에서 살게 될까? 그는 이 모든 것을 2분 동안에 다 생각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의 황금빛 용마루는 태양빛에 이글거렸습니다. 그는 눈부시게 이글거리는 그 교회 꼭대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지요. 그는 '저 빛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자연이다. 3분 후에 나는 저 빛과 융합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감과 불투명성은 실로 무섭기 짝이 없었던 게지요. 그렇지만 이 순간 그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만약에 이대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생명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이 영원이 아닐까! 그럼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두어 결코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 결국 그의 이러한 상념은 독한 마음으로 변하여, 차라리 한순간이라도 빨리 총살을 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다고 술회했습니다."



과거 세묘노프스키 연병장이었던 피오네르스까야 광장Ⓒhttp://ch.yes24.com/Article/View/19364



생의 마지막 5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5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 '살고 있구나' 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였다.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온 극한의 순간에, 생(生)으로의 감각이 극한으로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너무나도 소중한 1분 1초. 만약에 살게 된다면 매 순간을 100년처럼 생각하고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의 발로. 그는 기적적으로 삶을 되찾고 그때의 마음가짐을 실제로 옮긴다. 그리고 이후 그의 모토는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소설에서는 매순간을 감사하게 살아가며 기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모토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죽음에서 건져올린 삶"의 한 부분을 옮겨 본다. 조금 더 시적이고 극적인 표현으로 당시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까의 그 황금빛 교회 지붕을 본다. 그것은 이제 떠오르는 아침의 붉은 빛 속에 신비롭게 불타고 있다.

 

성숙한 장미 같은 아침빛이 경건한 기도로 감싸듯 그 지붕을 감싸고 반짝이는 기둥머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으로 성스러운 칼을 가리킨다. 높이 기쁨으로 붉게 물든 구름의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거기서 아침 광채 속으로 소리내며 신의 교회는 교회를 넘어 자란다.

 

빛의 흐름 하나가 빛나는 파도를 종소리 울리는 하늘로 던져 올린다.


(중략)


신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무한한 동정심이 영원한 빛으로 신의 회당을 불태운다. 묵시록의 기사들이 흩어져 나간다. 죽음 속에서 삶을 겪은 자에게 고통은 기쁨이 되고 행복은 괴로움이 된다. 벌써 불 붙은 천사 하나가 땅바닥에서 일어서서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성스러운 사랑의 빛으로 깊고도 빛나는 모습으로 그의 두려워하는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러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꿇는다. 갑자기 그는 진정으로 무한한 고통 속에 있는 세상 전체를 느낀다. 그의 몸이 떨린다. 하얀 거품이 그의 이 사이로 뿜어 나오고 경련이 그의 모습을 일그러뜨린다. 그러나 눈물이 행복하게 그의 죽음의 복장을 적신다. 비로소 그의 가슴은 삶의 달콤함을 느낀다. 그의 혼은 고문과 상처를 향해 타오르고, 이제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1초 동안 그는 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저 불타오르는 죽음의 키스를 받은 뒤로 그분처럼 자신도 오직 고통으로 인해 삶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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