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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의 예술, 만화

달리는 열차 안에서 격렬하게 돌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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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


<설국열차> 표지 ⓒ 현실문화연구

<구약성서> '창세기' 6~8장을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온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어 하느님이 대홍수로 심판하려 한다. 홀로 타락하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하던 노아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홍수가 올 것을 미리 알게 된다. 그는 120년에 걸쳐 길이는 약 135m, 폭은 약 23m 높이 약 14m의 삼층 구조 배를 만든다. 8명의 가족과 여러 쌍의 동물들을 데리고 방주에 탑승한다. 


대홍수는 40일(또는 150일)동안 계속되어, 노아의 방주에 탄 이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전멸한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길은 오로지 노아의 방주 뿐인 상태이다. 언제 끝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 노아의 가족은 어떤 생활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을 뒤로 하고 상황 자체만을 두고 봤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이다.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감, 고립감 그리고 안도감 등의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사랑, 정치, 종교가 뒤섞일 것이다. 


극악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이와 비슷하다.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기후 무기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다.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전멸했다. 이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국열차에 탑승하는 것뿐이고, 설국열차의 정지는 죽음을 의미한다. 


영원히 달리게끔 되어 있는 설국열차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이 인류 생존의 마지막 보루에도 계급이 존재하는데, 위기가 닥치자 위의 계급이 아래 계급을 밀어내려 한다. 일명 '꼬리 자르기'로, 꼬리칸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의 레이스의 전말을 알게 된 꼬리칸의 한 남자는 반란(혁명)을 시도한다. 


4년 전에 개봉해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많은 논란거리를 남겼던 영화 <2012>의 후반부 스핀오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마야설에 근거해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후반부에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출현한다. 영화는 재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노아의 방주 탑승과 노아의 방주 내에서의 생활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내린 노아의 방주 탑승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설국열차>는, 이런 극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극도로 좁은 공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극대화된 상징성들


<설국열차>는 그래픽노블로서의 장점(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그림체와 시각적 상상력 등)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까지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철저히 인간을 그리려는 문학에 가까워 보인다. 그 상징성을 몇 가지 살펴본다. 


계급

설국열차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 구조이다. 고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연히 칸이 나뉘어져 있고 그에 따라 계급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워 있으면서도, 공존의 길을 찾지 않고 공멸의 길로 가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증오하는 모습은 자못 아이러니하다. 


전염과 이분법

꼬리칸에서의 치욕스러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건너가려는 주인공은 군사당국에 붙잡히고 만다. 이때 그들은 주인공에게 '전염병'이 있을지 모른다며, 그의 머리를 밀고 목욕을 시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가 꼬리칸 출신이라는 것. 낮은 계급에, 못 먹어서 건강하지 못하고 못 씻어서 더럽다고 생각한다. 극명한 이분법적 생각이다.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우리가 될 수 없고, 나는 너희가 될 수 없다. 


돌진

<설국열차>를 영화로 제작한 '봉준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격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고나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무슨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배경이 들어가면 이해가 된다. 꼬리칸 출신의 주인공은, 처음엔 끌려가고 나중엔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가고자 하는 칸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칸이다. 즉, 돌진은 혁명이고 혁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가령 '돌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자체를 생각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 말이다. 


고립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이상 뛰어내릴 수 없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또한 설국열차의 밖은 곧 죽음이기에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차단된 고립무원의 상태이다. 옛날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들어가 면벽좌선 9년 후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고립을 자처해 한계를 넘어섰다. 감옥에서 또 다시 사고를 치면 아무도 없는 독방에 고립시켜 놓지 않는가. 고립은 그토록 끔찍하다. 고립된 설국열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타인과 분리되어 멀어진 상태인 고립과 수많은 사람들이 만났을 때,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수많은 콘텐츠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인간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간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자행된 파멸, 파멸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전쟁 그리고 혁명, 영원히 멈추지 달린다지만 인간이 있어야만 하는 기계. 한마디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이다. 기계의 움직임도 목적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협력이 가능하다


언제 어느 때나 생존은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곧 생존의 역사이다. 그 역사에는 무수한 반목과 협력이 있어왔다. 반목의 역사는 지워졌고, 협력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협력이 무조건적인 찬성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고, 반목 또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협력과 반목에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는 시간이 갈수록 '갑과 을', '너 아닌 나'와 같은 이분법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시간이 갈수록 자국만 생각하는 일방적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먼 이웃나라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공동의 가치 실현에 앞장서려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을 찾기도 어렵다. 


인간은 '人'의 생김새에 기반을 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희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돌진'하지 않으면 '전염'의 공포로 점철된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계급'주의적 세상의 '인간'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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