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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인권 선언 문서

인권 선언 문서: 권리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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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 카르타 및 권리장전과 함께 인권선언의 선구적 역할을 한 '권리청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628년에 공표된 '권리청원' 원문


권리청원 공표의 배경


17세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로 시작된다. 스코틀랜드의 왕 제음스 6세가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즉위한 것이다. 제임스 1세는 즉위와 동시에 종교문제와 당면한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여러 개혁안(예배의식의 단순화, 설교의 중시, 새로운 성경의 번역 등)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주교들과 청교도 대표자들을 함께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때 주교들과 청교도 대표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고갔고, 제임스 1세는 주교 편을 들어주며 논의가 끝난다. 청교도들은 실망과 불만을 가득 앉게 된다. 이런 실망과 불만은 가톨릭교도들에게도 있었다. 주교들이 가톨릭교도들에게도 불만을 드러냈고, 제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제임스 1세(1566~1625)


더불어 제임스 1세는 잦은 전쟁, 무분별한 낭비와 사치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의회의 동의도 없이 법률과 왕령을 제정하려 했고, 각종 세금과 강제 기부와 상납금을 남발하였다. 의회와 왕의 전면전이나 다름없는 분위기가 계속된 것이다.


1625년 제임스 1세에 이어 찰스 1세가 즉위한다. 그는 선왕에게서 물려받은 왕권신수설을 더욱 확고히 하여 의회와의 마찰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한편 제임스 1세 치하에서 권력을 휘둘렸던 버킹검 공은 찰스 1세 치하에서도 여전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에 패하면서 재정을 궁핍하게 하였는데, 이에 의회에서 제동을 걸으려 하였다. 하지만 찰스 1세의 보살핌으로 버킹검 공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하였고 계속해서 패하였다. 재정조달이 더더욱 어려워진 왕과 버킹검 공은 전보다 훨씬 무자비한 세금과 기부와 상납긍 등을 의회의 승인 없이 부과하고 남발하였다. 


권리청원 공표 경과


계속되는 찰스 1세와 버킹검 공의 전횡에 의회는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 1628년 3월에 찰스 1세는 세 번째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하원의원 에드워드 쿠크는 보통법의 우월을 주장하며 국왕의 대권을 제한하는 권리청원을 작성해 국왕에게 제출했다. 궁핍한 제정을 해결해야 했던 찰스 1세는 여기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1600~1649)


권리청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어떤 기부금, 차입금, 세금 등의 납부가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자유인은 누구나 합당한 이유없이 구속할 수 없다. 

섯째, 병사를 민가에 주인의 동의 없이 숙박시킬 수 없다. 

넷째, 민간인에게 군법을 적용시킬 수 없다. 


이 청원은 1628년 6월 2일에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1628년 6월 7일 찰스 1세의 비답이 내려졌다. 


왕은 이 왕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라며, 제정법들이 제대로 집행됨으로써 왕의 신민들이 그들의 정당한 권리와 특권들에 반하여 어떤 부정이나 억압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 같은 권리와 특권의 유지에 대해서는 그의 대권(국왕 자신의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사하는 배타적 권한)의 유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1629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제정치를 단행하였다.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청교도 혁명'은 1642년~1651년에 잉글랜드 전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권력 다툼이다. 그 결과 의회파가 승리하며 찰스 1세가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했으며, 의회파는 잉글랜드 연방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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