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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팡세 다시읽기

파스칼의 <팡세>를 통한 자유로운 사유(思惟)의 장-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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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고 우주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고귀하다. 인간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원리이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단, 올바름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 생각하기에 있어 높고 낮음은 없다는 것을 알아두자. 파스칼의 <팡세> 아포리즘은 계속된다. 자유로운 공론의 장이 되길 바란다. 


1. 즐거움과 아름다움의 어떤 모형이 있는데, 그것은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본성과, 우리를 기쁘게 하는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련성으로 성립된다. 

이 모형에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집, 노래, 연설, 시, 산문, 여인, 새, 강, 나무, 방, 옷 등등. 이 모형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것은 좋은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이 좋은 모형에 따라 만들어진 집과 노래는, 각기 그 자신의 양식에 의한 것이지만 이 유일한 원형을 닮은 점에서 그 사이에 완전한 연관성이 있는 것과 같이, 나쁜 원형에 따라 만들어진 사물들 사이에도 완전한 연관성이 있다. 나쁜 모형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가령 빗나간 시는 그 어떤 그릇된 모형에 따라 만들어졌건 간에 이 모형대로 옷을 차려입은 여인과 빼닮았다. 


2. 시적 아름다움. 시적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같이 기하학적 아름다움 또는 의학적 아름다움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증명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의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치료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목적으로 삼은 즐거움이 무엇으로 성립되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모방해야 할 그 자연스러운 모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묘한 표현들을 지어냈다. <황금 세기, 현대의 경이, 숙명적인> 등등. 그리고 이 특유한 말들을 시적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3. 몽테뉴. 몽테뉴의 좋은 점은 단지 어렵게 터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나쁜 점은-그의 품행은 제외하고-순식간에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너무 수다를 떨고 자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고 그에게 경고해 주었더라면. 


4. 사람이 고통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쾌락에 굴하는 것이 수치다. 이것은 고통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가해지기 때문도 아니고 또 우리 자신이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의로 고통을 추구하고 또 고통에 굴복하고도 이런 비굴함을 갖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이 고통의 압력에 굴하는 것은 영광이 되고, 쾌락의 굴레에 굴하는 것은 수치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러하다-고통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을 택하고 그것에 지배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에 있어 주인이고, 바로 그렇기에 인간은 고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에 있어서는 인간이 그것에 굴복한다. 지배와 통제력만이 명예를 가져오고 굴종만이 수치를 가져온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3. 파스칼의 <팡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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