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이터널 선샤인>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조엘은 오랜 연인 관계의 클레멘타인을 찾아간다. 사과를 하러 간 것. 서점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조엘을 알아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느 남자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 너무 황당해 돌아선 그는 친구 부부의 집으로 가 하소연한다. 그런데 남편이 보여주길 '라쿠나'라는 회사에서 편지가 왔는데 클레멘타인이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고 한다.
황당함을 넘어 분노로 치달은 조엘은 라쿠나를 찾아 자신도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워 달라고 한다. 홧김에 한 선택인 듯한데 아마도 클레멘타인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여 라쿠나의 기술자 스탠, 보조 패트릭, 접수원 메리가 조엘의 집으로 가 그를 침대에 눕힌 채 머리에 헬맷을 씌우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조엘은 밤새도록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자각할 때도 있고 자각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다.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고 있는 이와의 기억을 소멸시켜 버리는 경험이라니. 어느 순간이 지난 후 조엘은 원장에게 간청하고 있다. 더 이상은 지우지 말아 달라고, 이 기억만은 남겨달라고. 급기야 그는 기억 속 클레멘타인과 어디론가 도망치려 하는데…
겨울 시즌 로맨스 영화 3대장
자타공인 21세기 최고의 로맨스 영화라 일컫는 <이터널 선샤인>이 북미 현지 개봉 2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재재재개봉했다. 즉 국내에서 정식 극장 개봉 4번째를 맞은 것이다. 내년 1월에 일본 현지 개봉 3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9번째 재개봉을 예정에 둔 <러브레터>, 7번 재개봉을 이룩한 <러브 액츄얼리>와 더불어 겨울 시즌만 되면 찾는 로맨스 영화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결코 가볍게 볼 만한 작품이 아니다. 환상적이고 독특한 영상미로 명성 높은 프랑스의 미셸 공드리 감독과 영리한 상상력으로 유명한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합작해 완벽한 시너지를 일으켰다. 거기에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 투톱으로, 커스트 던스크와 마크 러팔로 등이 뒤를 받친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주지했듯 이 영화는 오래된 연인이 크게 다툰 후 홧김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는 시술을 받는다는 게 주요 이야기 라인이다. 흔하디 흔한 로맨스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한데, 주요 설정이 기가 막히고 조화를 이룬다. 하여 <이터널 선샤인>은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과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찰까지 나아간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 사랑에 빠지니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 양과 질이 완연히 다를 텐데 그래도 특정 순간이 기억나는 건 그곳에 누군가가 함께 있었기 때문이겠다. 그와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감정이, 행복하든 격양되든 슬프든 기쁘든 정점에 이른 순간이 기억나기 마련이다. 와중에도 사랑의 감정은 특별할 것이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감정이 발현되니 말이다.
극 중에서 조엘이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워 가는 과정이 굉장히 독특하게 그려진다. 기억의 순간이 사라지는 걸 그 순간의 세상이 무너지고 사라지게 그려지는 것이다. 단순히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기억을 이루는 하나의 세상, 여러 기억을 이루는 여러 세상이 사라진다. 이때와 저때와 그때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 다르다. 독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특정인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린 후 그와 다시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100이면 100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그와의 기억만 지웠을 뿐 나라는 존재와 그라는 존재는 한 점 바뀜 없이 그대로이니 말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존재와 존재가 만나 사랑에 빠지니 별도리가 없을 것이다.
사랑과 기억, 그리고 존재에 관한 이야기
연인 관계 사이에 그런 말 많이 한다. "시간을 되돌려도 나랑 만날 거야?" "다음 생에도 나랑 만날 거야?" 등 만난 지 꽤 되었기에 좋은 면, 안 좋은 면 모두를 알아 버린 관계에서 하는 이런 말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다. 그리고 지금 그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진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다를 것이다, 지금의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지 유지하고 있지 않은지에 따라.
한편 그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그러니까 그의 좋은 면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면까지 모두 오롯이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기억을 유지하는지 유지하지 않는지에 상관없이 그와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관계에 있어 사랑과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지만 그 무엇보다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들, 사랑과 기억과 존재는 외형이 바뀔지언정 내면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들을 다룬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런 영화, 또 나오기 어렵다. 영상의 힘과 각본의 힘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한편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전달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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