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비밀의 언덕>
1996년 크지 않은 수도권 도시의 조그마한 학교, 평범해 보이는 5학년 소녀 명은이는 담임 선생님의 안중에 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담임은 명은이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명은이는 반장이 되기로 결심하고 비밀 편지함 공약이 통해 성공한다. 그녀는 반장이 된 후 담임과 함께 비밀 편지의 내용을 실현시키며 반을 더 좋게 만들어 간다. 하지만 걸림돌이 없지 않다.
그동안 계속 학급 임원을 해 온 회장 남자애는 명은이 아무리 노력해도 쌓을 수 없는 담임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미 단단하게 쌓은 것 같고, 새로 전학 온 혜진과 하얀 자매는 한 팀을 이뤄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내놓는 글쓰기로 모두를 놀라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라는 게 명은이였다면 어떡하든 숨기고도 남을 만한 성격의 것이었다.
한편 명은이는 자못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다. 엄마와 아빠는 같이 시장에서 젓갈을 판매하시고 한 살 많은 오빠는 명은이와 같은 학교 6학년생이다. 하지만 명은이는 부모님의 직업을 숨기기에 급급한다. 아빠는 회사원이시고 엄마는 가정주부라는 식이다. 꼭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할까.
물론 명은이에게도 평범하지만은 않은 가족사가 있는데, 할머니가 재혼을 하셨기에 새할아버지와 새삼촌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어떻게 할 건지를 두고 매일같이 싸운다. 명은이의 엄마는 매일 돈돈돈 하고 아빠는 매일 누워 빈둥거린다. 명은이는 가족이 너무 싫다.
말 못 할 비밀, 이해 가는 지점
학창 시절 내내 부모님이 아주 작은 슈퍼마켓, 이른바 '구멍가게'를 운영하셨다. 아빠는 회사원이었던 적이 없고 엄마는 가정주부였던 적이 없다. 동네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님이 모를 리 없으니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고 숨길 수도 없었으나, 여느 아이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님의 직업을 말할 수 없었다. 일반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명은이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최근 10년 새 독립영화의 한 축을 굳건히 쌓아 올리고 있는 여아 중심 성장 서사 계보를 충실히 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하다. 2016년 <우리들>부터 시작되어 2019년 <벌새>, 2020년 <남매의 여름밤>, 2021년 <종착역>, 2022년 <성적표의 김민영>까지 어느새 가슴속에 깊숙이 각인된 작품들이다. 그리고 2023년 <비밀의 언덕>.
영화는 어느 평범한 초등학생 소녀 명은이의 말 못 할 비밀 이야기를 전한다. 그 비밀의 대상은 가족이고 숨기고 싶은 대상은 가족 아닌 모든 이다. 그녀는 비록 가족에게 속해 있지만 가족, 특히 부모님을 완전히 부정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하다. 그렇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님께 인정받고 싶은 명은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해가 가는 지점이다.
그녀가 부모님의 직업을 숨기는 이유
명은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영화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상을 엿볼 필요가 있다. 극 중에서도 나오는 바 1990년대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가 교실에서 공개적으로 시행되었다. "부모님 뭐 하시니?"부터 시작해 각종 가정환경을 조사하는데 반 친구들 모두가 듣고 있었다. 비밀 따윈 없었다. 부모님 직업이 변변찮다고 느끼는 예민한 아이, 이를테면 명은이 같은 경우 굉장히 난감했을 것이다.
명은이가 부모님의 직업을 숨기는 게 충분히 이해된다. 그 사실을 안 오빠가 심하게 나무라도 어쩔 수 없다. 명은이 입장에선 아빠와 엄마의 직업 이전에 그들의 일상과 인성에 실망해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만, 실상은 시대가 그녀로 하여금 가정환경을 숨길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선생님과 따로 가정환경조사를 했더라면, 명은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있겠는가?
다른 친구들은 변변찮아 보이는 부모님의 직업을 당당하게 밝히는데 왜 명은이만 숨기는가, 하는 의아함이 뒤따를 것이다. 그건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이런 식이다. 명은이의 아빠는 명은이가 우수상을 타서 갔을 때 왜 최우수상을 타지 못했냐고 하면서 다음에 더 잘하라고 한다. 엄마는 명은이가 반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돈도 들고 귀찮기만 할 텐데 왜 했냐고 나무란다.
명은이가 학교에서 성적도 좋고 인성도 좋은 학생이자 친구로 명성을 쌓으면 쌓을수록 집에선 오히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 부모님을 직업은 차치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다.
변하고 성장하기까지
전학 온 혜진과 하얀 자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명은이의 궁극적인 변화와 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을뿐더러,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멘탈을 지닌 완벽한 인간상에 가까우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명은이의 가족을 매우 평범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기구한 가족사의 일원이다. 그렇지만 정녕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글쓰기로 또 말하기로 말이다.
명은이는 처음엔 그들을 시기질투하다가 그들의 티끌 많은 사연과 모순되는 티끌 없음에 마음의 문을 열고 친해진다. 그러곤 깨닫는다. 자신을 드러낸다고,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낸다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만 하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명은이 자신이 혜진과 하얀 자매를 손가락질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가 하면 명은이는 매사에 스스로 투철하게 임한다. 너무나도 대단하고 기특하다. 하지만 세상이 잘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 특히 가족이 말이다. 안타까운 지점이다. 그래도 그녀를 지지해 주는 이들이 많다. 자신을 숨기고 거짓을 말하고 다르게 드러내는 게 결코 그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것만 확실히 인지하면 좋겠다. 다른 모든 걸 다 더할 나위 없이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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