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콘크리트 유토피아>
보고도 믿기 힘든 대지진이 덮쳐 서울 전역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 버린다.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곳곳에 수많은 시체가 있다. 와중에 '황궁아파트 103동' 만이 고고하게 무너지지 않고 서 있다.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외부인들, 내부인들이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1층 어느 집에서 외부인들에 의한 방화가 일어난다. 그때 김영탁이라는 사람이 어디선가 나타나 불을 꺼 버린다.
급하게 주민회의를 개최하는 김금애 부녀회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을 보인 김영탁을 주민대표로 추대한 후 문제의 외부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투표를 진행한다. 외부인 대부분이 평소 그들을 무시했던 드림팰리스 입주민이었다며 여론을 몰아갔는데 먹혀들어간 것 같다. 압도적인 표 차이로 외부인을 황궁아파트에서 쫓아내기로 한다. 설전과 몸싸움이 있었지만 김영탁의 몸을 사리지 않는 카리스마로 성공한다.
김영탁 그리고 김금애가 중심이 되어, 오로지 입주민으로만 구성된 황궁아파트를 만들어 간다. 와중에 김영탁은 일전의 1층 사건 때 도움을 줬던 김민성을 최측근으로 기용한다. 공무원 출신 김민성이 체계를 만들자며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김영탁이 주민대표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입주민들은 내부적으로 철저한 평등 배급 체계를 세워 가는 한편, 남자들로 구성된 방범대를 외부로 파견해 먹을거리를 구해 오도록 했다.
오랜 실패 끝에 크나큰 성공을 거두는 방범대, 하지만 이후 배급 체계가 성과제로 바뀌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런 한편 김영탁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새로운 어둠을 몰고 오려 한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재난물
김숭늉 웹툰 작가는 2014년부터 2년 동안 레진코믹스에서 <유쾌한 왕따>를 연재했다. 초반에는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다가, 대지진으로 무너진 학교 지하실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뒤바뀐 권력관계를 다뤘다. 2부 '유쾌한 이웃'에서는 세상 밖으로 탈출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김숭늉 작가 특유의 기분 나빠지지만 본능을 건드리는 그림체와 메시지가 한껏 살아 있는 작품이다.
<지옥> <D.P.> 등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에서 <유쾌한 왕따>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명 '콘크리트 유니버스'를 만든다고 하여 화제를 뿌렸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출격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작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대규모 재난에 의한 인류 멸망 이후를 다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재난물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최고 재난물은 <부산행> <더 테러 라이브> <터널> 정도였는데, 이 작품이 장르성, 시의성, 서사성 등 여러 면에서 다 뛰어넘었다. 스토리, 메시지, 연기도 물론이다. 몇 번이고 다시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구석도 존재한다.
집단 이기주의가 만든 유토피아에서
'순살 아파트'라는 오명을 영원히 남긴 브랜드 아파트 부실시공의 여파가 거세다. 가만히 놔둬도 무너질 판에 대지진이 한 번 훑으면 무너지지 않을 요량이 없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선 황궁아파트만 무너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가? 하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왜 다른 아파트들은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의구심을 뒤로하고 영화는 시작부터 예민한 곳을 건드린다. 내부인과 외부인, 즉 입주민과 외부인 말이다. 투표 끝에 외부인을 쫓아내고 입주민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자는 결의를 이끌어낸 주민회의는 점점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간다. 극단적 집단 이기주의는 결국 타 집단과의 전면전으로 끝맺음될 것이기에 그들만의 유토피아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극 중에서 일명 '바퀴벌레', 즉 외부인을 받아들이려는 명화(민성의 부인)와 도윤은 황궁아파트의 입주민 조직에서 입지가 불안정하거나 철저히 배척당한다. 그 기저에는 한정된 자원이라는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사람을 더 받아들이면 한정된 자원을 더 잘게 나눠야 하고, 결국 기존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자원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100명 중 90명 이상은 집단 이기주의 맥락의 주장을 따를 것이다.
다시 시작하는 인류 문명과 인간군상
완벽에 가까운 시의성과 함께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장점은 장르성과 서사성이다. 전 세계일지 전국일지 서울일지 알 수 없는 대규모 지진이 덮친 이후의 그 자체로 극적인 세상은 물론 지진에 덮치는 극적인 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려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한테 기대하는 지점은 의외로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마치 인류 문명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듯한 거시적 역사성과 미시적으로 펼쳐지는 인간군상의 조합이 일품이다.
영화는 거시적 역사성의 인류 역사에서 빠지지 않을 치열한 대규모 전투를 황궁아파트 입주민과 외부인의 대규모 유혈 다툼으로 치환했다. 선과 악이 따로 없고, 스크린 밖의 제3자 입장에서 내 편과 네 편이 따로 없다. 누군가 승리할 테고 누군가 패배할 것이다. 누군가 살아남을 테고 누군가 죽고 말 것이다. 하여 중요한 건 '콘크리트 유토피아' 황궁아파트일 테고 뭇 인간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미시적으로 펼쳐지는 인간군상은 이 작품의 재미를 상당 부분 책임진다. 영탁, 금애, 민성, 명화, 도윤, 혜원으로 대표되는 입주민의 개별 입장 그리고 개별적으로 닥친 상황까지 비슷한 듯 확연히 다르다. 초반에는 세상이 망한 후 겨우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를 게 많지 않았으나 점층적으로 상황과 감정들이 쌓이면서 크게 달라지니, '유토피아'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보는 것도 같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한편 영화적으론 <해운대> 이후로 15년여간 이어진 한국 재난 영화 문법을 완전히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억지 신파와 애매한 코미디가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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