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환희 물집 화상>
</환희>
뉴욕이 유명 교수이자 저명한 여성학자 캐서린은 어머니 앨리스의 심장발작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외로움과 자신을 조건 없이 무한정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안식년을 맞아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는 그녀의 대학원 절친 그웬과 던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캐서린과 던은 대학원 시절 사랑했던 사이였다.
캐서린은 새로운 페미니즘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강의에 신청한 이는 그웬, 그리고 그녀의 베이비시터 에이버리뿐이다. 사람도 별로 없고 아는 사이이니 캐서린과 앨리스 집의 거실에서 강의를 진행하게 되는데, 수업 때마다 열띤 토론이 계속된다. 페미니즘의 대가 캐서린, 전통적인 여성상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에 충실한 에이버리,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그런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기 싫은 그웬. 그리고 이들보다 한두 세대 위의 앨리스까지.
한편 던은 학문은 포기했지만 교수로서 대학교에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집에선 마약에 술에 포르노로 점철된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가정에는 손을 떼다시피 하여 그야말로 수동적인 삶을 사는 원시인과 다름 아니다. 그런 그를 두고 캐서린과 그웬은 자리 바꾸기 게임을 시작한다. 전업주부 그웬이 교수 캐서린의 자리로 가고, 캐서린은 그웬에게서 '양도' 받은 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어떤 결말을 얻게 될까?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이론 수업
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2013년 극작가 지나 지온프리도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3년 퓰리처상 연극부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의 명망으로, 이 정도의 사전정보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회적 이슈와 시대적 요청을 넘어 누구나의 삶과 인생에 깊숙히 들어와 일상적이고 보편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페미니즘', 이 연극은 페미니즘을 이론과 삶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다층적으로 다양하게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도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이 연극을 보면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주지한 줄거리를 통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듯 <환희 물집 화상>은 '막장'이다. 숭고한 페미니즘과 저렴한 막장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고 또 잘 어울리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장 뒤에 '블랙코미디'가 붙는 만큼 매우 잘 어울리고 또 매우 웃기면서도 지적 심리적으로 매우 알차다. 모르긴 몰라도 매우 진지하기 짝이 없게 페미니즘을 전달하려 했다면 기억에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토론에 따른 이론 수업의 투 트렉으로 진행되는 연극은, 한편 매우 쉽고 직설적이지만 한편 매우 어렵고 복잡다단하다. 막장 스토리라도 쉽고 직설적이기만 한 게 아니고 이론 수업이라고 어렵고 복잡다단한 것만도 아니다. 투 트렉 모두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실컷 웃으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페미니스트 vs 안티 페미니스트
여기서 캐서린의 페미니즘 이론 수업을 가져와 페미니즘의 역사를 읊을 생각은 없지만, '베티 프리단'과 '필리스 슐레플리'는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론 수업 중 두 진영의 핵심인물이자, 그들의 핵심 사상이 캐서린과 그웬에게 그대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과 주장이 옳고 그른 것인지, 그렇다면 옳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옳지 않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불행한 삶인지, 행복과 불행이 옳고 그름과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 등의 생각을 끊임없이 할 준비가 되었는가.
둘다 1920년대 태어나서 2006년과 2016년에 세상을 떴다. 베티 프리단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미국 페미니즘 제2물결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는 타고난 생물학적 특성이 그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필리스 슐레플리는 안티 페미니스트로, 미국 수정헌법의 양성평등조항 채택을 저지한 극우정치활동가였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고 하였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티를 캐서린에 필리스를 그웬에게 대입시켰을 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히 캐서린이 '옳고' 그웬이 '틀려' 보인다. 하지만, 캐서린이나 그웬 둘다 본인의 삶을 본인이 온전히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른 삶이 '행복'하다면? 물론 연극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탐하고 본인의 삶을 불행히 여기기에 자리 바꾸기 게임을 하지만, 결국 서로 바꾼 것이라면 달라질 게 없는 게 아닌가.
이럴 때 우리 같은 일반인, 나 같은 남자는 말문이 막히고 나아갈 길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본인이 좋고 행복하다는데, 그것도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둘다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존재가 바로 에이버리이다. 다 모르겠고 본인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이 가장 중요한 그녀 말이다. 그녀의 의견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남녀평등'의 개념에 가장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녀의 의견은 극중에서 캐서린에게 큰 힘이 된다.
사랑과 결혼과 가정
연극은 사랑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의제가 넘어간다. 사실 이것들은 여자에게 가장 중요하다기보다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어떻게 재정립하여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다. 캐서린과 에이버리도 사랑으로 흔들리고, 캐서린은 결혼 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다층적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있으며, 그웬은 가정에 목맨 현실에 불만이 없는 듯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다. 오직 던만이 그 수많은 암초들 사이에서 독야청청하다.
사랑, 결혼, 가정. 인간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며, 사실 없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것들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남자보다 여자가 생각나지 않는가? 남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아닌 여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더욱 어울려 보이지 않는가? 참으로 오랫동안 교육받고 은연중에 보고 듣고 생각해왔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 결혼, 가정보다 커리어로 대변되는 바깥의 활동과 연결되어지기 마련이다.
<환희 물집 화상>은 연극 자체로 청일점인 던을 주체 아닌 객체로 그리며 능동적 아닌 수동적 인물로 표현했지만 그게 비단 극중 아닌 실제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기도 한 게 사실이다. 가정에서는 마약과 술과 포르노로 도망치고, 바깥에서조차 가정에서 바라보는 '커리어'라는 뭉뚱그려진 개념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 시대 여자는 가정에서도 바깥에서도 도망칠 곳 없이 슈퍼우먼이 되어간다. 우리가 교육받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고 거기에 더해 여기저기 고리를 더 만들어 팽팽하게 당기기만 할 뿐이다.
연극의 결말을 말할 순 없지만, 비극이 아니길 바란다. 남자와 여자의 구도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사이에 말이다. '물집'과 '화상'이라는 다른 듯 비슷한 상처가 아물어 '환희'를 맛보기 바란다. 자연스레 '연대' '통합'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막무가내 아닌 절절하고 투철하고 치열한 갈등과 다툼 끝에 얻어진 연대이자 통합이길 바란다. 비단 이 연극이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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