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오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 에우리피데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를 통해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신탁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와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외과의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마틴의 집에 갔을 때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스티븐은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집착적인 행동을 보이는 마틴,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작은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큰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어진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인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고.
만약 스티븐이 직접 죽이지 않는다면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도 죽을 거란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기아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를 거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는 스티븐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것인가, 죽인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종교적 운명과 우연적 딜레마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한 명을 직접 죽일 수밖에 없게 될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신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진 처지를 바꿀 능력 따위는 인간에게 없다. 특히 과학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들이닥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모습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해보겠지만,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종교라는 게 그런 것인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인가.
영화는 운명의 굴레에 종속되어버린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종교의 한 면모를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편,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도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운명이 신의 영역이라면 딜레마는 인간의 영역이다. 운명이 선택되어지는 거라면 딜레마는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치명적이고 어렵기 그지없다. 그럴 때 찾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이다.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을 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타개하려는 게 그것이다. 영화는 딜레마에 처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무책임한 모습을 통해 종교를 비꼬고 운명을 무시하는 이들도 통렬하게 비꼬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오드
자, 우리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신의 대리인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였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
이 진중하고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꼼.
여러 가지 것들을 통렬하게 비꼬는 와중에 그에 걸맞지 않아 보여 그 비꼼의 수위가 더욱 강해지게 만드는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시컬한 OST들은 영화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모든 배우들이 발성하는 높낮이 없는 낮고 무성의한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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