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 루시!>
영화 <오 루시!> 포스터. ⓒ엣나인필름
일본 도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중년 여성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 분)는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 분)의 부탁으로 영어 회화 교실을 다니게 된다. 일단 무료체험을 하겠다고 나선 길,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학원 내부의 한 교실로 안내된 세츠코는 그곳에서 선생님 존(조쉬 하트넷 분)을 만난다.
그는 미국식 영어를 알려주겠다고 하며 별 거 없는 영어와 함께 과장된 몸짓과 포옹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녀는 루시(lucy)라는 영어이름으로 불린다. 금발머리 가발과 함께. 가발을 돌려주러 갔을 때 다케시(야쿠쇼 코지 분) 즉, 톰을 만난다. 존에게 영어를 배우러 온 그였다. 루시는 그때 존과 깊은 포옹을 하고 남다른 기분을 느낀다. 사랑?
정식으로 등록하러 갔을 때 존은 떠나고 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세츠코가 대신 수업을 듣는 대신 내준 60만 엔을 들고서. 그 사실을 안 미카의 엄마이자 세츠코의 언니 아야코(미나미 카호 분)는 세츠코에게 60만 엔을 돌려주고, 이를 다시 세츠코가 아야코에게 돌려주려 하면서 미카가 있는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가겠다고 한다. 아야코가 동행한다. 이 동상이몽 여정의 끝은?
신인 감독과 베테랑 배우들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 <오 루시!>는 일본의 젊은 신인 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가 자신이 만든 단편 <오 루시!>를 장편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선보인 단편의 장편영화화에 일본 최고 베테랑 배우들과 할리우드 스타가 합류했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배우 반열에 오른 테라지마 시노부와 야쿠쇼 코지, 일본 내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는 미나미 카호, 말이 필요 없는 조쉬 하트넷까지.
초짜 감독의 그냥저냥 멜로 로맨스 영화에 이런 배우들이 모여들리 없다. 이 영화에는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게 뭘까? 섬뜩한 지하철 투신 자살 사건으로 시작하는 영화, 가족 간에 회사동료 간에 친구 간에 일절 관계가 형성되지 않아 보이는 세츠코, 고작 포옹 한 번에 미국까지 날아가는 세츠코, 언니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세츠코.
세츠코의 기이한 면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퍼즐 맞추듯 해보면 뭔가가 보일 듯하다. 영화 시작에서 보이는 투신 자살 사건이 비단 그 한 번으로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일면을 보이는 것 같고, 세츠코의 면면은 다름 아닌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흔하다면 흔한 병리자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심지어 이 영화가 겉으로 내보이는 멜로 로맨스 즉, 세츠코의 사랑조차 이 병리의 일환 같다. 결정적으로, 세츠코라는 자아와 루시라는 자아의 분리.
개인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1인 가구의 폐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1인 가구는 더 이상 특별한 현상 내지 양상이 아니다. 이미 전 인구에서 30%에 육박했고 머지 않아 1/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 모습은 '문제'인가. 문제라고 하면 문제다. 의료발달로 수명은 점점 늘 것인데 반해 결혼과 출산은 점점 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문제를 문제라고 하기 전에 다른 의미로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개개인의 문제를 먼저 해결할 필요도 있다. <오 루시!>는 사회적 아닌 개인적으로 1인 가구의 폐해를 들여다보고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혼삶을 사는 이가 모두 세츠코 같은 건 아닐 것이다. 그들 대다수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연대하며 살아간다. 삶의 형식이 둘 이상이 아닌 혼자일 뿐이다. 와중에 혼삶의 객체적 문제가 드러난다. 1인 가구가 지닌 병리적 모습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 '사회적'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이, 최악의 경우 자신의 삶을 누군가가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이.
세츠코의 경우, 가장 크게 다가오거니와 원초적인 사건이자 병리적 모습의 원인은 남자친구를 빼앗아간 언니 아야코와 미카의 존재다. 그녀는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고 느끼고 지금의 삶이 의미 없다고 느끼며 자연스레 이 사회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는 비록 이유도 현상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관계들의 집합체
영화 <오 루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세츠코가 존을 사랑하게 된 또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저 존의 다가옴이었다. 존이 다가와서 포옹을 했고 세츠코는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면 '사랑'이라 자신있게 말하리라. 그런데 세츠코라는 사람이 사람과의 소통이 불능한 상태이기에, 관계에 있어 최상에 위치한 '사랑'을 한순간에 느끼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사랑이 아닌 병리적 모습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존은 세츠코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결혼한 아야코의 딸과 함께 도망친 사람이 아닌가. 세츠코에게 한처럼 남아 있는 그 일에 대비해볼 때, 존에 대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인 갈망과 집착과는 완연히 다른 복수의 일면일 수 있다. 세츠코에게 남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 형상이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의 현대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1인 가구가 된 게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1인 가구의 혼삶을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세츠코의 이야기는, 그 면면이 혼삶의 병리적 모습을 띄고 있기에 복합적으로 보여지고 다가온다. 뭔가 알 만한 그림이 그려질 듯한 퍼즐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외롭고 초조하고 기이하고 단순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반면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단순명쾌하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충분한 효과를 보인다. 진심 어린 포옹. 내 몸의 절반과 상대방 몸의 절반을 오롯이 맞대는 행위. 거기엔 사람 대 사람으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이 주고 받는 모든 것들이 있다. 그 자체로 이겨낼 수 없는 병리를 초월한 관계 형성이다. 분리되어버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자아도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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