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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왕가위 스타일의 시초, 영원히 기억될 장국영 <아비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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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


영화 <아비정전> 포스터. ⓒ스폰지



올해로 15주기다. 우리의 영원한 홍콩스타 장국영이 2003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1977년 데뷔해 금새 성공한 가수생활과는 다르게 영화배우로서의 오랜 무명생활 끝에 1986년 <영웅본색>과 1987년 <천녀유혼>으로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 성공에 힘입어 곧바로 두 작품의 2탄을 찍고난 후 그가 택한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아비정전>이었다.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이 데뷔작 <열혈남아>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중박 이상을 쳐 그 기대감으로 왕가위가 하고 싶은 대로 찍게 해준 영화이다. <열혈남아>가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홍콩 액션 느와르의 계보를 이은 작품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인데, 차기작으로도 그런 류의 작품을 원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또 여전히 영화를 통해 접하고 있는 홍콩 최고의 스타들을 한데 볼 수 있다. 장국영을 비롯 유덕화,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그리고 양조위가 그들이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작품은 우울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비(非) 액션물이었다. 


왕가위 스타일의 시초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흥행에선 철저히 등을 돌린 것과는 다르게, 비평 면에선 철저히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왕가위는 이후 몇 년 동안 영화 찍는 게 쉽지 않았던 반면, 영화는 이후 오랫동안 홍콩이 자랑하는 명작이자 일명 '왕가위 스타일'의 시초로 칭송받고 있다. 


아비(장국영 분)는 매일 오후 3시면 도박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 분)을 찾는다. 1분 동안을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계를 본 후 아비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고 그를,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들은 동거를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원하자 그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수리진과 헤어진 아비 앞에 나타난 이는 댄서 루루(유가령 분), 여지 없이 그들은 사랑을 시작하지만 역시 계속 함께 할 것을 원하는 루루를 아비는 거절한다. 하지만 루루는 수리진과는 달리 쉽게 떠나려 하지 않는다. 한편, 아비에게는 그를 길러준 양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유명한 마담 출신으로 젊은 남자들을 갈아타며 살아가고 있다. 아비는 그 모습에 치가 떨린다. 결국, 친어머니가 있다는 필리핀으로 향한다. 


아비로부터 버림 받은 수리진에게 경관(유덕화 분)이, 루루에게 아비 친구(장학우 분)가 함께 하려 한다. 그들은 그녀들을 위로하고 도와준다. 하지만 그녀들의 마음 속에는 아비만 있을 뿐 그들이 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그녀들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홍콩 반환, 그리고 이별과 떠남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영화는 내적으로 왕가위 스타일로 점철되어, 외적으로 홍콩 반환 시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와중에 느끼는 불안감과 허무함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1985년 확정된 홍콩 반환은 1997년 시행되는데, 이에 대한 느낌을 와일드하게 표현한 대표적 영화가 <영웅본색>이라고 한다면 내적으로 스타일리쉬하게 표현한 대표적 영화는 <아비정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비를 들여다보자. 그는 필리핀 태생으로 친부모님으로부터 버림 받아 홍콩으로 입양되어 지금의 양어머니 손에 자랐다. 아비는 홍콩에서도 필리핀에서도 발 디딜 곳이 없다. 홍콩은 중국으로부터 영국이 영구할양 받았고 155년만에 반환되었다. 1985~97년 사이 홍콩 역시 중국이라고 하기에도 영국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아비의 사랑 방식은 그의 정체성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착하지 못하는 필연적 바람둥이 말이다. 그의 내레이션이 말하는 '발이 없어 지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 어디론가 날아가야만 하는 새'의 사연이 그 방식을 은유적으로 대변한다. 애초에 발이 없이 태어난, 자율 아닌 타율에 의한 '어쩔 수 없음'의 변명이다. 하지만 그게 홍콩 반환이라는 실존을 만나면 더 이상 변명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왕가위가 말하고자 하는 건 홍콩 반환이 아닐 것이다. 홍콩 반환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사랑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인 '이별'을, 더 자세히는 한 쪽이 가해를 하게 되고 한 쪽이 피해를 입게 되는 '떠남'을 말하고자 했다. 


아비의 부모는 아비를 떠났고, 아비는 수리진과 루루를 떠났고, 수리진은 경관을 루루는 아비 친구를 각각 떠났고...  그렇게 떠남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는 끝없이 계속된다. 가해의 되물림은 계속 되고, 피해자의 가해자를 향한 바라봄과 그리움과 따라감도 계속된다. 이는 홍콩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떠남의 운명과 순간의 소중함, 태곳적 미학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떠남'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영화는 대사, 캐릭터, 분위기, 색감, 장소, 촬영 구도를 통해서도 표현한다. 영화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두 명 이상을 한 프레임에 두지 않는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5각 관계를 형성하지만, 2각 관계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겉도는 느낌인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닌 한 명이 거의 일방적으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거의 언제나 우중충한 색감이 감도는 어두운 분위기의 좁은 곳에서 함께 있다. 그리고 밖에서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수리진과 경관이 그나마 탁 트인 바깥에서 만나지만, 그들마저도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영원은커녕 찰나의 순간 정도의 만남만이 가능한 그들, 떠남의 운명은 '순간의 소중함'이라는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그들 각각의 만남이 눈물나게 아름답고 아련하게 다가오는 건, 비단 이 영화가 30여 년 전에 만들어져 고전에 반열에 올랐기에 느껴지는 옛 감성으로의 영화 외적인 감정이 아닌 그들의 만남이 빚어내는 소중한 순간의 미학이 주는 영화 내적인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스타일리스트 왕가위가 선물한, 이른 바 태곳적 미학이다.


<아비정전>을 말함에 있어 희대의 명장면과 명 OST가 빠질 수 없다. 아비가 수리진은 물론 루루까지 쫓아보낸 후 '발 없는 새' 내레이션을 하며 하비에르 쿠가의 <마리아 엘레나> 음악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장면. 영화의 우울한 감성과는 정반대의 활기찬 음악과 춤사위인데, 그래서 더더욱 우울해 보이며 극중 아비에게 공감이 가게 한다. 


비로소 왕가위 감독의 시초까지 올라왔다. <열혈남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이지만 논외로 할 필요가 있고, <아비정전> 이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2046>까지 이어가보자. 왕가위의 영화 세계, 나아가 그가 바라보는 인간 세계의 '상(像)'이 떠오를 것이다. 그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잊히지 않는, 마음 속 한 편에 영원히 자리잡을 소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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