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가장 '좋은' 작품 <에린 브로코비치>. ⓒ소니픽쳐스코리아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역대급의 화려한 데뷔를 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6살이었다. 그야말로 천재 감독의 탄생, 이후 인디와 메이저를 오가며 작품성과 흥행력을 두루 갖춘 감독으로 성장한다.
그의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표적>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을 잇달아 내놓는다. 모두 작품성과 흥행력을 갖춘 작품들로, 특히 2000년 오스카에서는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으로 동시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트래픽>으로 접수했다.
단언컨대 이후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작품들 중에 그의 경력 초중반, 즉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보다 나은 건 없다.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를 말하려면 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그중 가장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지극한 일반인 에린 브로코비치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그린다.
다윗과 골리앗
신화 '다윗과 골리앗'의 완벽한 현실재연이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 분)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두 번 이혼한 돌아온 싱글이자 고졸에 뚜렷한 이력이나 경력도 없거니와 16달러 짜리 잔고만 지니고 있는 여자다.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당연히 어렵다. 결국 그녀는 이전에 한바탕 난리를 친 볍률회사에 어거지로 취직한다.
안하무인 성격에 살인적인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파격적 옷차림으로 온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그녀, 특히 사장 에드 마스리(앨버트 피니 분) 변호사와 많이 부딪힌다. 어느날 서류를 검토하던 중 PG&E사와 관련된 이상한 의학기록을 보게 되고, 거기서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는 곧바로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녀가 알아낸 진상의 첫 번째이자 모든 것에는 '크롬'이라는 독극물이 있었다. 발전소에 쓰는 엔진의 과열을 막기 위해 엔진에 물을 넣는데 녹 방지용으로 크롬도 넣는 것이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수도국에서 증빙서류를 찾고 에드에게 압력도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PG&E사와의 일대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런 초거대기업과의 결전이 마음처럼 쉽게 성사되겠는가?
영화는 힘없는 한 개인이 초거대 조직에게 맞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신화적인 이야기 그 자체다. '다윗과 골리앗'이 생각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에 그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보다 훨씬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었던 만큼 더욱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전설도 이런 전설이 없고 신화도 이런 신화가 없다.
믿기지 않는 실화, 출중한 드라마
믿기지 않는 이 실화는 그 자체로 완벽한 드라마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에린의 영웅적인 행보는 가차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믿게 만들었으며 그녀는 그 믿음에 충실히 보답한다. 그렇게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의 행동은 반영웅적이다. 아슬아슬하다. 양면성을 겸비한 채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신화 속 트릭스터(Trickster)의 현신이다.
실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이 여인의 활약상은 그 자체로 출중한 드라마다. 신화에서 트릭스터의 존재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데에선 절대적이듯이,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 모든 걸 다 갖춘 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에린은 그 영화 내외적인 모순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거장이라 할 만한 앨버트 피니는 소시민 변화사 에드로 영웅적인 모습의 그녀 옆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기에 영화 각본으로 새롭게 지어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없을 그녀의 속사정, 두 번 이혼하고 어린 아이 세 명을 돌보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생활. 그래서 그녀의 영웅적인 행보가 주는 빛은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녀의 영웅적인 행보는 '일'에 국한된 것이지 '가정'에까지 연결되는 건 아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일까지 하는 이혼녀이자 워킹맘가 곳곳에서 보인다. 영화로는 20여 년 전, 실화로는 25여 년 전의 그녀의 이야기가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거니와 영화로서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굉장히 많고 깊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건 또한 영화의 주를 차지하는 PG&E사와의 싸움에만 초점을 맞춰 다큐멘터리로 빠지지 않게 하는 고도의 노림수이기도 하겠다.
에린의 활약, 교육적인 영화
영웅 에린 브로코비치의 활약은 교육적인 면모로 이어진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연히(?) 에린 브로코비치는 PG&E사와의 싸움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PG&E사는 미국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의 보상을 해주었다고 한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관련된 거의 모두에게 행복을 선물한 에린의 활약에 시선이 많이 가지만, 거대 기업의 도덕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 자체로 상당히 교육적인 것이다.
현재, 거대 기업들의 기업가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모든 걸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시대, 거대 기업들이 긍극적인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거대했을 때가 있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일반 사람은 알 도리가 없었다. 반면, 지금은 적어도 모두가 알고 있진 않은가.
이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PG&E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소위 '나쁜 짓'을 저질러 왔던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몰랐고,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소수의 힘으론 그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린이 가장 열을 올린 게 확실한 내부 증빙 자료를 구하는 것과 더불어 피해자를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이었다.
다수의 목소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신의 합당한 권리를 외칠 때 그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게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 혁명이겠는가? 혁명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고 가능하다.
'오래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사회 악과 싸운 연대 투쟁의 희망 <내일을 위한 시간> (0) | 2018.01.12 |
---|---|
이준익의 소품이 윤동주와 송몽규를 품다 <동주> (1810) | 2017.12.29 |
날 것의 액션과 아름다운 무협의 마지막 절정 <서극의 칼> (0) | 2017.12.06 |
드니 빌뇌브 감독의 거장으로 가는 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0) | 2017.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