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 표지 ⓒ학고재
김훈 작가의 글은 우직하다. 밍기적 거리지 않고 직진한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살필 줄 아는데, 어느 글보다도 수려하게 대상을 그려낸다. 공수(攻守) 양면을 다 갖춘 작가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그의 글은 따라하고 싶고 그의 숙고를 닮고 싶고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의 글을 읽기 전의 설렘은 글의 끝까지 함께 하고, 그의 글을 마치면서 찾아오는 여운은 아주 오래간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김훈을 <칼의 노래>로 시작했다. 20살 남짓의 어린 나이였으니 단번에 읽어내리지 못하고 자꾸만 서게 되는 그 소설을 완독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걸렸을 건 자명한 일이다. 몇 번의 도전 끝에 2년여 만에 완독해냈던 게 기억난다. 한마디로 가늠해내기 힘든 소설이고 소설가이다.
<칼의 노래> 이후 그의 장편은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공터에서> 등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리스트를 보면, 글로 표현되어 역사에 남지 않은 말을 상상해 쓰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말'과 함께 '울음'을 느낄 수 있다. 그 행간에 드러내는 김훈의 능력은 탁월하다 못해 경탄스럽다.
개인적으로도, 아마도 김훈을 읽은 많은 사람들도 <남한산성>을 최고로 치지 않을까 싶다. '김훈 스타일'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징들이 모두 극대화되어 있다. 특히 '한달음에 읽어내리지 못하는' 김훈 작가 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건 문체 때문일 수도, 극중 사건과 인물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생각지 못하게 빨리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정말 '잘' 쓰인 글 덕분일 것이다.
병자호란, 주전파와 주화파
163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용골대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지만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홍타이지는 용골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와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란간다. 병자호란이다.
한겨울의 매서운 날씨, 터무니 없이 적고 오합지졸인 병력, 한계를 보이는 식량과 사기,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말뿐인 주전파의 득세,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는 임금과 영의정. 1636년 남한산성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이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임금이라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상헌을 위시한 주전파에겐 사는 게 곧 죽는 것이다.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건 어버이 나라 명을 배반하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결사항전 후 장렬히 죽어야 한다. 사는 건 한순간이지만 치욕은 영원하다.
최명길을 위시한 주화파에겐 사는 건 사는 것이고 죽는 건 죽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의리고 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 여지는 없다. 치욕은 한순간이지만 사는 건 영원하다.
인간의 위대한 단상, 그리고 입체적 인물
주전파와 주화파의 계보와 변화, 그들을 향한 시선들은 매우 복잡하다. 특히 조선 말이 되어서는 주전파는 폐쇠적이지만 나라의 존망을 끝까지 걱정하고 저항했지만, 주화파는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개화파에서 친일파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누구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보다 백성을 위한 선택으로 치열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들 모두가 나라의 앞날을 진심으로 위하고 걱정했기에 옳고 그름의 철학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니, 그런 철학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의 수장격이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을 그래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위했다. 우린 그 모습에서 인간의 위대한 단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설에선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의미있게, 또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다. 관노 출신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청조 통역으로 위세를 떨친 정명수라는 인물과 남한산성 안에서 기거하는 대장장이 서날쇠가 그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 하염없이 오로지 부정적인 면모만 생각했던 인조라는 인물을 조금은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빼앗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전란의 참화 속에 내던지게 한 것도 모자라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였고 이후에는 아들을 독살시켜 나라 부흥의 싹을 지워버렸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소설 속 남한산성에서의 그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가엾고 힘없는 인간이었다.
여러 세계와 삶을 경험하다
정명수는 본래 조선 사람으로, 조선 입장에선 그야말로 나라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적군의 길잡이이자 위세 좋은 앞잡이이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관노, 그에게 과연 조선이란 나라는 무엇이었나. 그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나라인가? 그에게 어떤 극렬한 적의를 느낄 수 없었다. 주화파와 먼 친척뻘이라 할 수도 있는 그의 면면이 흥미롭다.
서날쇠는 김상헌의 부탁으로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말끔히 수행한다. 그가 보이는 특유의 행동력은 남한산성 내 그 어떤 사람도 따라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임금을 포함해 나라를 떠받드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란 나라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살기 위해, 김상헌이라는 사람을 위해 모진 임무를 떠맡았다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주전파의 임무를 행하는 그가 흥미롭다.
<남한산성>은 흥미로운 인간군상들의 집합체를 보여준다. 각자 다른 이유로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며 나아가는 모습들은 의도치 않게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들 중 누구의 역할을 하였을까. 아무래도 이름없는 지나가는 백성 중 한 명이었을 테지만, 정명수가 되기에는 배포가 작고 서날쇠가 되기에는 중심이 부족하며 김상헌이나 최명길이 되기에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인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을 전하게 될 그때 그곳, 그 이면에는 철학을 위시한 수많은 말들의 부딪힘과 삶, 죽음을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육체적 부딪힘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이면들에 관한 것이다. 그 이면들은 실제적인 것들과 관념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고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 우린 이 소설로 여러 세계와 여러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남한산성 -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학고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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