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묵공>


영화 <묵공>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중국 전국시대 한복판 BC 370년, 전국 칠웅 중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조는 천하제패의 한 걸음으로 역시 전국 칠웅 중 하나인 연을 치기 위해 십만 대군을 파견한다. 조에서 연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소국 양은 항전이냐 항복이냐의 위기에 빠진다. 이에 침략에 반대해 수성(守城)으로 명성이 자자한 묵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조의 선봉대가 코앞까지 진군했건만 아직 오지 않은 묵가로 인해 양은 혼란에 빠진다. 


왕세자는 결사항전을 외치고, 대신들은 절대항복을 외치며, 장군들은 왕의 지시만 기다릴 뿐이다. 왕은 십만대군 앞에 모든 이를 합쳐도 고작 사천뿐인 성의 분수를 알고 일찌감치 항복하기로 한다. 그때 모습을 드러내는 묵가의 혁리, 그는 활 한 발로 조의 선봉대를 물리친다. 그러곤 왕과의 독대 및 단판으로 양의 병권 그 전권을 받는다. 


혁리는 완벽한 전략전술는 물론 성 전체를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일치단결의 신념과 기치로 조의 선봉대를 물리치고 본대이자 십만대군 총사령관 함엄중 장군까지 불러들인다. 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조의 대군 앞에 모든 걸 건 결사항전을 불사한 양의 운명은 어찌 흘러갈 것인가?


지키고자 하는 자와 뚫고자 하는 자


영화 <묵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묵공>은 뚫고자 하는 자와 지키고자 하는 자의 피나는 전쟁을 다룬다. 천하제패를 향한 걸음, 이 모든 걸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걸음을 가고자 하는 조나라. 약자의 편에 서서 기어코 지지 않는 싸움, 지키는 싸움을 이룩해내어 이긴 자로 하여금 무차별적인 학살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묵가. 그리고 당사자이지만 나라와 백성이 아닌 자기 한 몸과 한 세력의 안위에만 급급하는 양나라 왕족과 고위관료들. 


중심에는 단연 묵가에서 파견한 묵공 혁리가 있다. 묵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활동한 다양한 학자와 학파를 일컬는 '제자백가'의 유력 학파 중 하나로, 당대 최고의 학파였던 유가와 대립했다. 유가의 차등적 사랑에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겸애를 주장했고 유가의 인문학적 경향에 실용주의적 관점을 주장했으며 유가의 덕치에 권위를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묵가는 침략전쟁을 반대했다. 침략은 주로 강이 이루고 약이 당하는 것, 자연스레 약자의 편에 서서 지키는 데만 몰두한다. 그 최후의 목적에는 혼란의 평정이 있을 테고, 그 수단으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겸애가 있을 테며, 그 구체적인 행동으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지키는 싸움만을 행하는 것이 있을 테다. 


영화 내외적, 그리고 중심에 있는 것들


영화 <묵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한중일 동양 대표 삼국 합작을 내세웠다. 한국에서는 제작 참여 및 대배우 안성기와 슈퍼주니어 시원을 주연 및 대표 조연으로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영화 배경과 감독을 내세웠으며, 일본에서는 영화 원작 및 세계적인 프로듀서를 참여시켰다고 한다. 묵가의 사상이 영화 외적으로까지 퍼진 느낌이랄까. 


영화 내적으로는 끝없이 계속되는 대규모 공성전 및 소규모 전투, 치열한 전략전술의 맞부딪힘이 주를 이룬다. 중국적 대륙 스케일의 장대함을 바탕으로, 일본만의 전쟁 스타일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한국으로선 배우들이 이질적이지 않게 섞여 들어간 것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했다 하겠다. 


와중에 혁리를 중심으로, 조나라 대장군 함엄중과는 '전투'의 전략전술로 치열하게 맞붙는 것도 모자라 '전쟁'이라는 것의 의미론까지 치열하게 맞붙으며, 양나라 왕과 왕세자와는 나라와 백성 그리고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안위를 두고 치열하게 생각들을 주고받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중심에는, 영화의 내외적을 아우르는 개념에는 현실적인 묵가의 사상과 묵가의 사상을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있다. 거기에 묵가를 향한 찬양이나 묵가 사상의 홍보(?)가 아닌, 고민이 있을 뿐이다. 어떤 결정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이 누구를 위한 행동인가. 이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가. 


혼란 평정, 평화 구축에의 지향들


영화 <묵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장이모우 감독의 명작 <영웅: 천하의 시작>은 <묵공>처럼 중국 전국시대 이야기를 다룬다. 중심에는 전국 칠웅 중 최강자의 위치에 오른 진나라 영정(훗날 시황제)이, 그리고 그에게 접근한 '무명'이 있다. 무명은 영정의 목숨을 노리는 최강의 세 자객 은모장천, 파검, 비설을 물리치고 그 자리에 왔다. 


그의 목적은 이 혼란한 전국시대의 진정한 끝, 즉 천하통일이다. 영정의 목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그는 원한다. 천하통일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천하통일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그건 모든 것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진정한 평화. 전제적 지배에 의한 질서 있는 법체제에 의한 일방향 평화를 지향하는 법가의 이 기치는, 묵가가 목표로 하는 혼란의 평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묵가의 혼란 평정은 절대적으로 침략 없는 만민 평등에 기초한 것이고, 법가의 혼란 평정은 절대적으로 침략으로만 가능한 일군 독재에 기초한 것이다. 그 수단이 완벽하게 반대에 위치해 있기에, 유가를 반대한다는 점과 평화 구축에만 궤를 같이 할 뿐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다 하겠다. 


혼란 평정, 평화 구축은 겉으로든 속으로든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찬성하는 개념일 테다. 하지만 그 수단에 있어서 묵가 또는 법가의 것이 양립할 순 없다. 한쪽을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평화에의 모양새, 근본이 백성이길


영화 <묵공>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작금 남북한을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법가 쪽에서 묵가 쪽으로 옮겨가는 모양새이다. 적대적 침략 또는 침략의 모양을 띈 수단을 동원해 크게는 각 국의 이익을 챙기고 작게는 각 국을 이끄는 이들의 이익을 챙기는... 그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반면 지금은 상호불가침을 기본 전제로 하여 혼란을 잠재우고 그 자체로 평화가 구축되는 모양을 추구한다. 


미국 또는 중국이 조나라 또는 연나라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는 조그마한 양나라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부침 더 위기 초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내부에서는 그 원인을 외부로 돌리며 자신들 각자의 안위 챙기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 기본적 모양새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바랄 뿐이다. <묵공>에서 보여준 조나라 십만대군을 물리친 양나라 '백성'들의 힘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를 향해서도 발휘되기를 말이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듯이, 백성이 향하는 곳에 나라의 근본이 서기를. 그 모습이 작금의 대한민국, 한반도에도 보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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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송곳니>


영화 <송곳니> 포스터. ⓒ필굿 엔터테인먼트


모든 것엔 기원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5만 명 전후의 흥행성적과 폭발적인 비평성적을 기록한 바 있는 <더 랍스터> <킬링 디어>의 감독 요르고스 란디모스,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잔인하고 빙퉁그러진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통렬한 우화를 선사하는 그의 기원은 어디일까. 


그리스 태생인 그는 <더 랍스터> 이전까진 4편의 영화를 당연하게도 오로지 그리스를 배경으로만 영화를 찍었다. 그중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더 랍스터> 이전 그의 이름을 알린 <송곳니>가 요르고스 란디모스 영화의 기원 또는 스타일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고정팬도 생기고 '젊은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그의 시작은 어땠을까. 아니, 이 영화로 시작을 알 순 없으니, 지금은 확립되다시피 한 그의 스타일의 시작은 어땠을지 궁금증을 갖는 게 맞을 것 같다. <송곳니>는 그에 대한 답을 충분히 줄 수 있을 것이다. 


잔인하고 빙퉁그러진 세계


영화 <송곳니>의 한 장면. ⓒ필굿 엔터테인먼트



오늘 배울 단어는 '바다', '고속도로', '소풍', '카빈총'이다. 그중 '바다'를 들여다보자. '바다'는 나무 팔걸이가 달린 안락의자로 집의 거실에 있는 걸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예문은 "서 있지 말고 바다에 앉아서 나랑 얘기나 해요"란다. '고속도로', '소풍', '카빈총'에도 상식과 동떨어진 의미가 부여되고 예문이 나열된다. 


도시 근교의 대저택, 수영장과 정원이 있고 높은 담장이 둘러진 그곳에 세 남매가 아빠한테 기괴한 교육을 받는다. 엄마는 교육을 함께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아빠만 차를 타고 저택 밖에 나갈 수 있는 걸 제외하고 나머지는 집밖에 나가는 것도 허락 없이 안 되고 저택 밖에 나가는 건 절대 안 된다. 아니, 송곳니가 빠지고 나서는 나갈 수 있다. 나갈 땐 차를 타야 하는데, 운전은 송곳니가 다시 나고 나서야 배울 수 있다. 


이 잔인하고 빙퉁그러진 세계를 창조해낸 건 아빠다. 그는 엄마와 공조해 생활의 수많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철저히 통제한다. 매일매일 시행되는, 외부와는 전혀 다른 의미 체계의 단어 외우기. 즉, 교육. 그리고 다시는 '불순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폭력이다. 


아빠는 막내아들 남자 구실 '교육'과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의 여자 경비원을 지에 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지 못하게 첫째딸과 교류 아닌 교류를 하는데, 비디오 테이프나 헤어젤을 가져다준다. 첫째딸은 그렇게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고 결국 생각할 수도 없었던 계획을 시도하려 하는데...


독재와 교육


영화 <송곳니>의 한 장면. ⓒ필굿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포스터를 통해 대놓고 메시지를 전한다. '전 세계가 격찬한 독재에 대한 통렬한 우화!' 전 세계가 격찬한 것도 맞고 독재에 대한 이야기인 것도 맞고 우화인 것도 맞으니 더 할 말이 없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순 없으니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교육'을 말해보고자 한다. 


교육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능력을 후천적으로 올바르고 수준높게 끄집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 어느 하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 사실상 동등한 관계로서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절대 완벽할 수 없기에, 스승이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에 일방적이면 안 된다. 


바로 영화 <송곳니>에서처럼 말이다. 스승인 아빠가 제자인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잘못된' 사실을 주입시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교육의 중요성을 몇 번이고 다시 되새기게 된다. 물론 여기서 아빠가 주입시키는 사실이 '잘못된' 게 아닌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게 중요하진 않다. 


반쪽 짜리 독재 우화


영화 <송곳니>의 한 장면. ⓒ필굿 엔터테인먼트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독재'의 모습엔 '왜'가 빠져 있다. 오로지 '어떻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건 다분히 의도한 설정일 텐데, 의도한 게 아니라면 반쪽 짜리 독재만 보여주고 있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감독은 독재를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황당무계한 시스템이라고, 독재자를 대상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납득되는 이유 없이 오로지 일방적으로 주입만 시키는 바보괴물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난 독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독재란 물 샐 틈 없는 대의명분을 갖고 겉으로나마 철저하게 눈높이를 맞춘 생활을 영유하며 일방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의미를 주입시키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이 아닌 너른 마음으로 회유책을 쓰기도 한다. 영화에서의 아빠는 절대 독재자와 같을 수가 없다.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나. 또는 회유 당해 전향하고 말았나. 그건 독재자가 펼치는 독재라는 것에 능력과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겠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독재 그 자체가 아닌 독재에의 우화를 들여다보는 정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첫째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져 성공하고서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도 매우 궁금하다. 독재의 가장 큰 폐해, 독재를 당하는 사람들이 객체가 되어 길들여진다는 것. 독재자의 바람대로 우매한 민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독재를 끝내고 나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것. 이런 생각들을 독재자들이 계속 양산해내고 주입시킨다는 것. 우리나라가 독재를 청산한 지 30년, 앞으로 30년은 언제 다시 출현할지 모를 독재를 주시해야 한다.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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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CJ E&M



현재까지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2003년도 <실미도> 이후 16편이다.(조만간 <신과 함께-인과 연>이 이 대열에 합류할 듯하다.) 2010년대에 11편이 나왔다. 이제 매년 한 편 이상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 영화들은 하나같이 웰메이드 대중영화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중 '웰메이드'에 중점을 놓고 얘기할 만한 영화는 많지 않다. 즉, 영화 내적인 요소보다 외적인 요소가 흥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영화 내적으로도 빛나는 성취를 이룩했다고 평가받고 또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작품들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단연 돋보이고, <부산행> <베테랑> <도둑들> <변호인> 등이 눈에 띈다. 이들 작품은 '1000만 영화'라는 꼬리표 아닌 꼬리표를 떼고 그 자체로 영화적 인정을 받을 만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를 빼먹을 뻔했다. 개봉 당시가 제18대 대통령선거가 불과 3개월 전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이 영화가 재조명하는 광해군의 모습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하여 영화 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영화 내적으로만 보아도 이 정도의 흥행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대중영화의 정석이다. 


'성군' 광해를 만나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조선 제15대 왕 광해 8년, 자신을 노리는 정적들의 술수가 날로 심해짐을 느끼는 광해(이병헌 분)는 도승지 허균(류승룡 분)에게 명해 위협에 대비한 대역을 찾게 한다. 그렇게 끌려온 광대 하선(이병헌 분)은 광해와 얼굴이 똑같을 뿐 아니라 특유의 말투와 몸짓까지 똑같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왕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을 채운다. 


어느 날 광해가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정적의 술수가 분명하지만 당장 달리 도리가 없다. 허균은 모든 책임을 지고 하선으로 하여금 왕이 깨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왕이 될 수도 왕이 되어서도 안 되는 천민 하선은 왕이 된 것이다. 정녕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선은 도승지 허균에게 가르침을 받고 의 말단 기미나인을 살뜰히 챙기고 중전에게 전에 없던 호감을 보이고 내관과도 스스럼 없이 지내고 부장에게 진심을 내보인다. 이 모든 건 원래의 광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선선함과 솔직함과 여유 덕분이다. 하지만 와중에도 변함없는 정적의 술수는 날로 더해져만 가는데... 


영화는 광해군 8년 2월 28일 '광해군 일기'에 남아 있는 글귀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를 토대로 영원히 사라진 15일간의 기록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그 밑바탕엔 '폭군' 아닌 실리외교와 민생안정의 재평가로서의 '개혁군주' 광해가 있다. 그리고 우린 이 영화를 통해 '성군' 광해를 만날 수 있다. 


완벽한 대중 상업 영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대중 상업 영화는 당대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 한국은 대선이 코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는데, 광해 아닌 하선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사무치게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곱절 천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중 심리 반영이다. 


또한 안정과 파격의 조화가 필요한 대중 상업 영화다. 이병헌의 180도 달라지는 광해와 하선의 1인 2역과 허균을 비롯한 주요 조연들의 연기는 영화의 안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천민이 왕의 대역을 넘어서 실제 왕보다 더 왕다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파격 너머 파격의 모습이 신선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시대 반영과 메시지 전달은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아예 넣지 않으면 안 될 수준이어야만 한다. 맞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너무 과하거나 과격하면 프로파간다가 되기 십상인데, 그런 함정에 빠지기란 너무나도 쉽다. <광해>는 주로 하선의 말로 전한다. 


광해를 위시한 비주류 대북파가 주장하고 전통적 주류 기득권 서인이 반대한 대동법의 핵심은 "땅 열 마작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쌀 열 섬을, 한 마작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한 섬을 받겠다는데 그것의 어떤 것이 그릇된 말이오?"란 말에 있다. 한 토시도 빠짐 없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반영해도 된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찬성과 반대가 극렬히 싸우는 이 법을 기득권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지키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일본의 전설적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 전설적인 무장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 무사를 통해 정체성과 허무함을 그린 이 영화는 198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전 세계 수많은 상을 휩쓴 명작이다. 소재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영화임에도 <광해>를 보는 내내 <카게무샤>가 생각났다. 


영화의 역사에서 <카게무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가 되어 영원히 명작으로 남을 것이고, 아마도 <광해>는 무엇을 말하고 할 때 소품 또는 도구로서 가끔씩 불려나오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봄에 있어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다. 이 영화는 대중상업영화로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을 선사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지켰다. 


이 영화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봤고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행복했을 게 분명하다. 이 착한 영화는 우리를 박장대소하게 하고 대성통곡하게 하고 종국엔 씁쓸하지 않은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다. <카게무샤> 같은 영화는 절대 해낼 수 없다. 예술 명작 영화와 대중 상업 영화 사이는 높고 낮음의 기준을 매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둘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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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아웃사이더>


영화 <아웃사이더>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1970년대 미국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다. 당시 <대부>, <컨버세이션>, <대부 2>, <지옥의 묵시록>을 연달아 내놓으며 그야말로 영화 세계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 <카게뮤샤>도 기획 제작했으니 뭘 더 말할 수 있으랴. 


8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영화를 찍었지만 70년대만 못했다. 최근까지도 주로 기획과 제작에 참여해왔고 괜찮은 작품이 적지 않다. 그의 영화 연출, 그 빛나는 재능은 비록 한때였지만 그 한때가 남긴 흔적이 영원할 것이기에 아쉬움은 적다. 


여기 그의 1983년도 작품 <아웃사이더>가 있다. 아마도 코폴라 전성기 끝자락에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성장소설 중 하나인 S. E. 힌턴의 1967년 소설 <아웃사이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범상치 않은 스토리 구도에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흥미로운 조화를 이루었다. 물론 정점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일 것이다. 


부자와 빈민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미국 오클라호마의 어느 마을, 남쪽에는 백인 부자가 북쪽에는 백인 빈민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쏘시와 그리저라 부르며 적대시한다. 그리저 포니보이는 어려서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큰형 대릴, 작은형 소다팝과 함께 산다. 그는 감옥까지 다녀온 댈러스 무리와 함께 다니며 비행을 일삼지만, 소설과 시를 좋아하는 감수성 어린 열네 살 소년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하기도 했던 영화의 원작은 S. E. 힌턴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가 열일곱 살에 집필했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한 소년의 성장 이전에 부자와 빈민 마을로 나뉘어진 배경이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다 못해 기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자유라는 것이 명백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는 벽도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서울의 강남,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몇몇 구는 우리나라 전체 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런 사실 하에서 '계급'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부자들이 돈을 많이 버는 이유와 돈을 많이 벌고 나서 하는 일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릴 때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건 시작될 당대에도 자신의 세계를 부정으로 잠식하는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만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결코 좋을 수 없는 영향을 끼친다. 상대적 우월감도 좋을 수만은 없다. 한 인간을 구성하는 건 결코 한 가지만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영화의 재미들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포니보이에게는 친한 친구 쟈니가 있다. 그는 매일 같이 싸우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어느 날, 그 둘이 새벽에 밖에서 배회할 때 쏘시들이 덮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포니보이를 죽일 듯이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쟈니는 칼을 꺼내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쏘시의 한 아이를 죽인 것이 아닌가. 


영화는 데뷔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여전히 탑배우의 자리에 있는 톰 크루즈와 지난 2009년 세상을 떠난 90년대 최고의 스타 패트릭 스웨이지, 80년대 최고의 청춘 스타 맷 딜런을 비롯,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재미는 쏠쏠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시의적절한 OST들이다. 영화의 주제를 완벽히 구현하는 스티브 원더의 <Stay Gold>(황금빛 시절)을 필두로 제리 리 루이스, 엘비스 프레슬리, 칼 퍼킨스의 노래들이 영화를 수놓는다. 


그 정점은 노래가 아닌 시인데, 포니보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금빛은 오래 가지 않는다'이다. '청춘은 오래 가지 않는다'라고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영화의 재미, 그 기저에는 속절없이 빠르고 속절없이 지고 마는 청춘에 대한 찬미와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자연의 첫 푸름은 금빛//붙잡아두기 가장 어려운 빛깔.//자연의 첫 번째 잎사귀는 꽃.//하지만 한 시간은 피어있을까요.//에덴은 슬픔에 잠겨버렸고//새벽은 낮으로 퇴색하는 것.//금빛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속절없이 흘러가는 황금시절, 청춘


영화 <아웃사이더>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포니보이와 쟈니는 이런 일에 도가 텄을 것 같은 댈러스에게 도움을 청하고, 댈러스는 그들에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버려진 교회 건물에 숨어 있을 것을 추천한다. 그들은 곧 야영을 시작한다. 얼마 후에 찾아온 댈러스와 함께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 맛있는 것도 먹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한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교회 건물이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곳에는 견학온 어린 아이 몇몇이 갇혀 있었다. 포니보이와 쟈니는 주저없이 들어가 아이들을 구하는데, 쟈니는 그만 크게 다치고 만다. 


갈 곳 없는 포니보이와 쟈니에게 도망쳐 온 버려진 교회 건물은 역설적으로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무엇보다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계급적 배분의 하위 단계 삶에서 멀리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새롭게 부과된 굴레는 또다른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살인'. 


그들의 절대 되돌릴 수 없는 또다른 '청춘'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다. 영화는 현실에서 절대 달아날 수 없이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선보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굉장히 문학적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에 좀 어려운 면이 있는데, 이는 아이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함이라기 보다 문학적으로 승화 내지는 비참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기 위함이라고 보는 게 맞다. 


쟈니가 포니보이에게 남긴 편지가 이를 증명한다. '황금은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 같아, 우리처럼.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새롭잖아 새벽처럼. 네가 석양을 보며 생각하는 것이 바로 황금이야. 계속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아직도 세상엔 좋은 것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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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포스터. ⓒ월트디즈니코리아



스타워즈 시리즈에 온갖 최초와 최고의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영화'라는 걸 본다는 사람이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필수코스 중 하나인 것이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들인 <007>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쥬라기>, '마블' 등이 모두 영화 아닌 원작이 있는 반면 <스타워즈>는 영화가 원조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정도가 완벽한 원작 없이 영화로 만들어진 유명 시리즈이다. 


<스타워즈>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할 순 없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화 연구자의 필수코스인 미국의 비교신화종교학자 조지프 캠벨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니 말이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연구 자체가 <스타워즈>의 원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역사가 짧아 신화라고 할 것이 마땅치 않은 미국에게 선사한 현대 신화라고 할까. 미국은 <스타워즈>를 시작으로 수많은 현대 신화를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스타워즈 시리즈를 전혀 접하지 않았다. 못한 건 아니니 일부러 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너무도 방대한 세계관에 압도 당해 부담을 느꼈다. 한참 전에 끝난 시리즈를 이제 와서 다시 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2015년 10년 만에 오리지널로 돌아왔고 이듬해에는 최초로 스핀오프를 선보이며 최소 2020년 이후까지 매년 오리지널과 스핀오프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사라진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오리지널과 세계관은 동일하지만 독립된 이야기를 내세우는 스핀오프를 보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할 것이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는 나의 스타워즈 시리즈 입성의 시작이 되었다.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한 작전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제국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숨어 살던 제국군 과학자 겔렌 어소 가족은 결국 제국군 크레닉 국장에게 걸리고 만다. 겔렌은 제국으로 끌려가는 한편 겔렌의 아내는 죽고, 겔렌의 딸 진은 탈출한다. 시간은 흘러 15년 후, 겔렌은 제국에서 행성 하나를 파괴해버릴 치명적인 무기 '데스 스타' 개발에 다시 투입되고 반군은 이 사실을 알고는 그의 딸 진을 이용해 저지하려 한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이내 설득 당하고 만 진은 호기롭게 실행에 옮기고자 한다. 하지만 완성단계에 있는 데스 스타를 파괴하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때 갤런이 극비리에 남긴 비밀 영상을 보고 데스 스타의 설계도 존재와 위치를 알아낸다. 설계도를 탈취할 가능성은 불과 2.4%, 즉 이 작전에 투입된 모든 이들의 죽음을 뜻했다. 


더군다나 반군 의장단 내에서는 그냥 항복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진은 강경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녀를 따르는 일행이 있다. 정보 요원 카시안, 무술 전사 치루트, 전투 전사 베이즈, 전향한 제국군 파일럿 보디, 그리고 새롭게 프로그래밍 된 제국군 안드로이드 K-2SO까지. 이들은 실패 없는 오직 성공을 위해 작전에 투입된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로그 원>의 시작은 상당히 중구난방이다.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와 동떨어진 '스핀오프'를 선보임에 따른 딜레마가 존재했을 것이다. 오리지널 스토리를 전혀 몰라도 즐기는 데 큰 문제가 없게끔, 즉 새로운 팬을 위한 영화가 되어야 하면서도, 기존의 스타워즈 팬들에게 다시 없을 선물로 다가와야 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시리즈라는 큰 골격과 세계관에 속해 있거니와 스토리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했기에 영화 초반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수시로 오가는 것이다. 제국군과 반군, 이 행성과 저 행성. 그것도 모자라 <로그 원>의 주인공들, 즉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처음 선보이는 캐릭터들까지. 


영화는 다양한 종류의 관객들에게 다양한 상황과 관계와 캐릭터를 최소한으로라도 보여주고 난 초반 이후에 비로소 날개를 핀다. 밉상 하나 없는 캐릭터 구성,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하거니와 한없이 직진에 가까운 작전 수행 과정, 이전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소규모 전투신과 볼 수 없었다는 대규모 전투신까지. 압도적이다. 


스타워즈를 모르는 이들과 잘 아는 이들 모두를 만족시킨 결과물이었다고 할까.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확장과 관련이 깊다. 스핀오프의 가능성은 스타워즈 팬의 유입을 크게 도울 것이다. 동시에 그동안 비울 수밖에 없었던 구멍들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팬들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을 줄 것이다. 


'희망' 하나에의 반란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코리아



로그(rogue)는 악당이라는 뜻이다. 악질적이고 악마적 기질이 있는 류의 것이 아니고 악동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극 중에서 전 제국군 파일럿 보디가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일당의 이름이다. 이들이 수행하는 건 '반란'이다. 아직 혁명이 일어나기 전, 반대를 무릎쓰고 자신들만의 신념으로 수행하는 반란 말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란은 제국에의 물리적 반란뿐만 아니라 반군연합에의 정신적 반란이다. 


이들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 수행의 원동력은 오직 '희망' 하나다. 제국의 최종병기 데스 스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동되지 않게 하지 않는 이상 단순히 반군연합뿐만 아니라 이 은하계에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게 된다는 생각,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희망으로 수행한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개인보다 집단이 더 이성으로 수렴된다고 하지만, 현실을 바꾸는 건 이성이 아닌 이상이다. 실행되기 어려운 이상의 실행이야말로 그러하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실행에 옮겨 성공해내고야 마는 그 사람들이 있어서 이 세계는 끊임없이 바뀌고 그래서 지탱해나가는 게 아닐까. 


로그 원 일당은 스타워즈 세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들로 남을 것이다. 한국 영화 <아나키스트> <암살>의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게된 그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살아 왔기에, 죽음도 자신만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건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스스로의 선택과 신념. 사사(私事)와 대의(大義)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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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인크레더블>


<인크레더블> 포스터.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전 세계 영화판을 뒤흔들며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한 '슈퍼히어로', 1930년대 대공황 때 시대적 탈출구로서의 영웅으로 처음 만들어진 후 80년 동안 사랑받고 있다. 1970년대 후반의 슈퍼맨과 1980년대 후반의 배트맨이 크게 성공한 후 1990년대까지 슈퍼히어로는 DC가 책임졌다고 보면 되겠다. 


2000년대 들어서 마블이 득세한다. 2000년대 초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2000년대 후반 아이언맨, 2010년대 어벤져스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매우 공고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슈퍼히어로도 부침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다. 사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슈퍼히어로는 존재의 이유가 크게 있지 않았다. 


주지했다시피 영웅은 혼란스러운 암흑기에 탄생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는 대체적으로 활황기였다. 위기가 와도 오래지 않아 자가재생이 가능했다. 영웅이 필요치 않았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후 거짓말처럼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를 위시해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4년에 나온 픽사의 6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은 슈퍼히어로가 필요치 않은 시대의 슈퍼히어로 이야기이다. 은퇴 후 일반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슈퍼히어로 가족이 주요 소재다. 


슈퍼히어로 인크레더블과 평범한 직장인 밥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크레더블은 세상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슈퍼히어로다. 사소한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부터 국가적인 도움이 필요한 곳까지 모든 곳에 나타나 해결해준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연달아 생긴다. 그 날은 그가 엘라스티걸과 결혼하는 날이었는데, 자살하려는 사람을 살려주고 인크레디보이라는 꼬마팬을 살리려다가 밤 보이지를 놓친 것도 모자라 기차선로를 부셔먹는 바람에 기차를 억지로 세워야 했다. 


근데 자살하려던 사람이 인크레더블을 고소한다. 살고 싶지 않았는데 살려놓았고 부상까지 당했다고 말이다. 또 기차 사고 부상자들도 그를 고소한다. 이를 시발점으로 슈퍼히어로를 상대로 한 소송이 쏟아지고 결국 정부는 그들에게 히어로 일을 그만둔다는 맹세를 받기에 이른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인크레더블은 밥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보험일을 하고 엘라스티걸은 헬렌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들은 세 아이를 기른다. 그중 두 아이는 그들처럼 초능력이 있다. 막내는 아직 알 수 없고. 밥은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힘들 뿐 아니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어느 날, 정부기밀기관에서 일한다는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슈퍼히어로의 힘으로 처리해주었으면 하는 일을 제안한 것이다. 그는 회사를 때려치고 당장 그 일에 착수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15년 전 그에게 가차 없이 퇴짜를 받았던 인크레디보이가 슈퍼히어로를 척살하고 그 자리를 본인이 차지하려는 수작의 일환이었으니... 인크레더블의 앞날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슈퍼히어로를 향해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인크레더블>은 대체로 슈퍼히어로 영화의 범주에 속하진 않는 것 같다. 그저 픽사에서 만든, 그것도 아주 잘 만든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치부하는 인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다시 시작된 슈퍼히어로 전성 시대, 그 초창기에 큰 역할을 했거니와 지금까지 수없이 나온 슈퍼히어로 영화들 중 단연 으뜸으로 쳐야 마땅하다. 


이 영화는 독특하다. 대다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슈퍼히어로에 의한' 것인데 반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를 향한'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보다 그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슈퍼히어로라는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와 다름 없이 밥 먹고 싸고 씻고 자는 것 아닌가. 행동주체로서가 아닌 대상주체로서의 슈퍼히어로라고 해야 할까. 


원작으론 '최고'라는 수식어가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지만 영화로선 혹평과 흥행실패를 면치 못했던 <왓치맨>이 어른 거린다. 반면 흔치 않은 소재와 주제를 코믹과 진중함의 탄탄한 조화로 내보인 이 영화는 호평과 흥행성공을 쟁취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슈퍼히어로를 들이대는 건 각종 위기에 봉착한 전 세계의 일원으로서 알게 모르게 탈출구를 찾고 있는 심리를 이용하려는 수작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슈퍼히어로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텐데,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다름 아닌 내가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평범한(?) 슈퍼히어로 가족이 주인공인 <인크레더블>은 그 지점까지도 나아갔다. 


가족의 의미, 가족의 소중함, 가족과 함께 


<인크레더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정작 이 영화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2편이 나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팬들의 바람도 '슈퍼히어로'의 그것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른다. '가족'이다. 영화 시종 일관 내보이고 있는 '가족의 의미'. 밥이 다시금 슈퍼히어로라는 '꿈'이자 '지나간 영광'이자 '위험한 짓'을 꿀 때 헬렌이 말하는 '가족의 소중함'.


영화는 얼핏 헬렌을 두둔하고 있는 듯하지만 밥의 행동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의 허황된 꿈은 남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꿈을 꾸지 말고 살아가라는 말 또한 일면 허황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은 옳고 그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범주에 들어갈 테지만 그리 되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가족과 함께' 꿈을 꾸면 어떨까. 당연히, 다함께 망하자는 건가 하는 말이 나올 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힘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헬렌이 말하는 가족의 소중함이 '돈 많이 벌어 오세요'가 아닌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로 들리는 건 나뿐일까. 가족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가는 길, 강력한 적을 맞아 밥은 헬렌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홀로 가려 한다. 헬렌은 당신은 내 남편이니 죽으나 사나 같이 있을 거라 말한다. 밥은 자신이 강하지 않다고 얼버무리더니 "당신을 또 잃기 싫어. 다신... 절대! 난 그걸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해."라고 고백한다. 이 대화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가족의 소중함,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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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주토피아>


<주토피아>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1930년대 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월트 디즈니 살아생전 황금기를 보냈지만 1960년대 중반 그의 사후 오랫동안 부침을 겪는다. 1990년대 들어 완벽한 부활, 그야말로 디즈니 역사상 최고의 르네상스를 구축한다. 그 시기에 나온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고전이자 명작이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2000년대 들어 암흑기가 부활, 2006년 픽사와 합병하여 존 라세터가 돌아와 디즈니를 진두지휘하기 전까지 계속된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존 라세터의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뻗치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완벽하게 부활한 것도 모자라 제2의 르네상스를 연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하면 픽사였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까. 연일 고전 명작에 오를 만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주토피아>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최소한 디즈니의 두 번째 암흑기와 제2의 르네상스 시대를 통틀어 최고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주토피아>는 현 시대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스로에게 던지는 우화로, 애니메이션으로서의 기술적 측면과 스토리와 장르와 캐릭터성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 그리고 최소한 청소년 이상은 되어야지만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마음가짐이나마 가질 만한 수준높은 주제의식까지 두루 갖춘 잡식성 완벽함을 자랑한다. 


'멍청하고 약해 빠진 토끼'에게 주어진 임무


<주토피아>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토끼 주디 홉스는 부모님은 물론 아는 모든 동물들에게서 반대와 멸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토끼 경찰이 되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드는 게 꿈이다. 그는 340km 떨어진 곳에 있는 위대한 도시 '주토피아'로 향한다. 그곳은 동물들의 이상향으로 '누구나 뭐든지 될 수 있다'는 도시이다. 주디는 우여곡절 끝에 주토피아 경찰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최전선 제1구역에 배치된다. 


주디에게 떨어진 임무는 고작 주차 단속. 그가 아무리 경찰 학교 수석이라지만, 그는 멍청하고 약해 빠진 '토끼'였다. 그럼에도 주디는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 참으로 많은 주차 딱지를 끊는다. 어느 날 수달 오터톤 부인이 남편 실종 건으로 찾아온다. 아무 이유 없이 사라질 사람이 아닌데, 실종된 지 열흘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주디는 선뜻 나선다. 서장은 그에게 48시간 동안 찾을 것을 명령하고 그렇지 못할 시 주디에게 경찰복을 벗으라고 한다. 주디는 곧 단서를 찾아내는데, 하필 그 단서의 시작점이 되는 주인공이 일전에 안면 있는 사기꾼 여우 닉 와일드였다. 주디는 닉에게 당한 뒤통수 치기를 이용해 꼬득여 수사를 진행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장르물


<주토피아>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주토피아>는 그 자체로 해석의 여지가 필요 없이 훌륭한 장르물이다. 초짜 경찰이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사건을 아무런 지원 없이 홀로 맞서게 되고, 콤비를 이루는 게 경찰이 아닌 범죄자라는 점이 콤비 범죄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콘셉트인 것이다.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위화감 없이 그려냈다는 점을 높이 살 만하다.


퀘스트를 완료하듯 하나 하나 실마리를 풀어내는 진행 방식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영화적 재미라는 한 마리 토끼를 이쯤에서 완전히 손에 쥔 격이라 하겠다. 여기에 주인공들이 사람 아닌 동물이라는 게 화룡정점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 장르물로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캐릭터성을 동물보다 더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특히 양육강식 동물 세계에서 최하층에 속하면서 동물로서의 귀여움은 최상급에 속하는 토끼가 동물들의 낙원인 주토피아를 지키는 경찰이 된다는 설정은, 영화적 해석 즉 영화가 줄 수 있는 영화 외적인 교훈이나 감동 또는 깨달음적인 측면을 차치하고서라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토끼의 성장 또는 좌충우돌이 기대되는 것이다. 


토끼와 콤비를 이루는 동물은 하필 여우다. 토끼와 상극이랄 수 있는 여우는 늑대나 하이에나 등과 더불어 가장 미움을 받는 동물 또는 가장 잘못된 상식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다. 영화에서 토끼가 상식과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여우는 편견 그대로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주토피아>가 주는 영화적 해석은 바로 그들, 토끼와 여우에게서 비롯된다. 


차별과 편견에 대한 우화


<주토피아>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명백한 우화 <주토피아>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선사함에도 캐릭터와 배경과 대사 모두 인간 세계에 대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린 이 영화가 다른 손으로 완전히 쥔 또 한 마리의 토끼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편견과 차별에 관한 이야기, 멍청하고 약한 토끼와 비열하고 믿을 수 없는 여우. 그들은 각자의 타율적 시선을 이유로 세상을 지키고 더 좋은 쪽으로 바꾸는 일을 할 수 없다. 


차별 이전에 편견이 존재한다. 인간 세상에서 전통적으로 약자라고 통칭되는 노인, 아이, 여자는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아닌 타율적으로 한계가 정해져 버린다. 오랜 시간 고착해 되어온 그 한계는 편견이라는 상대적으로 여지가 있는 두루뭉술한 개념에서 머물지 않고 명백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차별로 나아간다. 돌이키기 쉽지 않다. 


영화는 여기에서도 한 발 더 나아가, 약자에의 편견과 차별만이 아닌 강자에의 편견과 차별 즉, 역차별까지도 다루는 광폭 행보를 보인다. 사실, 여우를 투 톱 중 하나로 내세운 것에서 엿보이는 부분인데 여우에의 편견과 차별이 분명 존재하지만 여우가 동물 세계에서 약자에 속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약자에의 편견과 차별' 또한 그 자체로 편견과 차별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편견과 차별에 대응하는 개념이 평등이라고 한다면, 평등을 약자에 대응하는 개념인 강자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선 동물 세계에의 우화로서 너무 많이 간 게 아닌가 싶다. 아니, 인간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물 세계에서는 강자가 강자로서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게 당연하다. 인간은 어떤가? 당연하지 않은 게 정설이지만, 당연해졌다. 


동물이나 인간 세계가 똑같다. 완벽한 우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동물 세계에서 역차별이 존재하느냐는 점이다. 태초부터 강자인 상황에서 강자라는 이유로 다수의 약자로부터 어떤 조치를 당하는 건 강자가 주체가 되는 차별의 차원이 아닌 약자가 주체가 되는 생존의 차원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류의 고찰이 직선적이고 일차원적이었던 점이 살짝 아쉬웠던 <주토피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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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씽: 사라진 여자>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 포스터. ⓒ메가박스 플러스엠



최근 몇 년 새에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한국영화들이 많이 보인다. <차이나타운> <비밀은 없다> <악녀> <소공녀> <당신의 부탁> 등이 기억에 남는데, 남주인공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온전한 여배우 탑 영화라 할 순 없다. 자본의 손이 덜 탄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련희와 연희> 정도가 여배우 탑 영화로 기억에 남는다. 


한국영화에서 온전히 여주인공만을 내세운 영화를 찾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반면 해외로 시선을 돌리면 셀 수 없이 많다. 특이할 점은, 상업영화에서도 눈에 띈다는 것이다. 올해 우리를 찾아온 영화만 열거해도 <툼 레이더> <레이디 버드> <스탠바이, 웬디> <미세스 하이드> 등이다. 한눈에도 엄청난 차이이다. 


그 와중, 한국영화 중에도 감독과 주연배우가 모두 여자인 경우가 비교적 최근에 있었다. 이언희 감독, 엄지원·공효진 주연의 <미씽: 사라진 여자>가 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앞서 제시했던 한국의 여배우 탑 영화들처럼 자본과 거리가 먼 독립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여자라는 '객체'를 앞세워 도구로 이용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여자라는 주체가 겪는 지극한 현실을 지극히 잘 짜인 영화적 각본에 끌어들여 어느 하나 모나지 않게 우리 앞에 나왔다. 우리는 그저 즐기고 안타까워하고 분개하고 소름을 돋으며 응원하며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라진 그녀를 찾아라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혼 후 지선(엄지원 분)은 생계를 위한 일은 물론 아이 육아까지 책임지고 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보모를 두었지만 언젠가 큰 실수로 아이를 다치게 하여 그만두게 하고 버티다가 새로운 보모 한매(공효진 분)을 들였다.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덥지 않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출중한 능력을 믿고 함께 하고 있다. 


어느 날, 일도 잘 안 풀리고 아이 양육권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한매가 아이 다은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설마설마 하던 지선은 온동네를 찾아다니다가 경찰서에 신고하려 하지만, 변호사와 시어머니에게 오히려 양육권을 지키려고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결국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다은이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은이 혼자가 아닌 한매와 함께 사라진 만큼 한매의 행방을 찾는 게 맞다고 판단한 그녀, 와중에 보이스피싱까지 당하고 결국 경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경찰조차도 지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데... 다시 혼자가 된 지선은 한매를, 아니 다은이를 무사히 찾을 수 있을까? 한매는 왜 다은이를 데리고 사라진 것일까. 


현대 미스터리 스릴러의 절정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는 연기와 각본 그리고 미스터리 스릴러로서의 연출력과 분위기까지, 완벽에 가까운 영화적 기술력을 뽐낸다. 최근 몇 년 새에 전성기라고 할 만한 연기력을 폭발시키며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엄지원과 범접할 수 없는 '로코의 여왕'에서 이젠 그 연기력을 다양하게 뽐내고 있는 공효진의 앙상블은 따로 또 같이 빛난다. 


근래 보기 드문 잘 짜여진 꽉찬 각본은 이 영화의 힘을 대변한다. 그 자체이자 뿌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웰메이드 실종 미스테리 영화, 할리우드의 <나를 찾아줘>와 일본의 <화차> 등이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그 안에 완전히 다른,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기에 결코 묻히거나 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스릴러는, 지극히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는, 현대인이 갖는 불치병과 현대사회가 주는 거대한 압박을 한몸에 동시에 받는 모습과 다름 아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고 불만에 차 있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우리 사회는 우리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하고, 우리가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혼한 워킹맘 지선과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한매의 처절함을 통해 현대의 미스터리 스릴러가 보이는 모습에 더 직접적이고 깊숙히 다가간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자'이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모르긴 몰라도, 지선과 한매(와 다은)는 결국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린 눈에 보이는 지선의 극도의 불안과 불만과 불쾌, 그 위에 덧씌어진 처절과 바람과 허무를 훨씬 능가할 게 분명한 한매의 그것과 만날 것이다. 치를 떨며 소름이 돋고 악에 받힌 울음을 함께 터뜨릴 수도 있고, 못 버티고 눈과 귀를 틀어 막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건 그런 거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방이 막혀 있는 건 물론, 사방에 도움 청할 이 하나 없으며, 사방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은, 그런 현대 미스터리 스릴러 그 자체 말이다. 그들 자신이 겪은 엄청난 일로 힘들어 하는 그들을 보며, 우린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걸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녀들의 울음이 오래 가지 않고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녀들이 서로를 찢어 죽이려 하고 서로의 아이를 팔아 넘기려 하지 않고, 부디 서로를 진정한 이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우리 모두 평평한 땅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어불성설' 땅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울어졌고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두 여주인공을 제외하곤 주로 남자로 구성된 조연 캐릭터들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평면적·도식적이었던 아쉬움 아닌 아쉬움을 남긴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남자 쪽으로 기울어진 땅에서 여자가 버티고 서 있으려면 한 없이 입체적인 변신을 시도해야 한다는, 그런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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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슬로우 웨스트>


영화 <슬로우 웨스트> 포스터. ⓒ더 픽쳐스



1870년 미국의 콜로라도 깊숙한 곳,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는 사랑하는 애인 로즈를 찾으러 멀고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로즈는 제이의 귀족 친척을 실수로 죽인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신대륙에서 제이가 처음 마주친 건 마을을 잃고 피신 중인 듯 보이는 원주민들, 그리고 얼마 못 가 마주친 건 인디언 사냥꾼이다. 


발사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다니는 제이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그때 나타난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가 인디언 사냥꾼을 죽이고는 제이에게서 돈을 받고 '서쪽'으로의 여정을 함께 한다. 미국 서부는 제이에게 희망과 착한 마음이 가득한 곳이고, 사일러스에겐 돈에 눈 먼 악당이 튀어나와 칼을 꽂는 곳이었다. 


이 둘의 여정은 쉬운듯 쉽지 않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속도와 분위기이지만, 가는 곳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백인, 굶어 죽기 직전의 스웨덴계 가족, 학자 같아 보이는 독일계 사기꾼, 그리고 한때 사일러스가 몸 담았던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까지. 어려움이란 어려움을 다 뚫고 제이는 로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인듯 보이는 사일러스는?


'아름다운' 웨스턴 영화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 <슬로우 웨스트>는 독특한 웨스턴 영화이자, 버디 로드 영화이자, 성장 영화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충분히 독특하다 할 만하지만, 이 장르들 모두의 정통 문법에서 조금씩 빛나가거나 어긋나면서도 그것이 '파격의 부미(不美)'의 길을 가지 않는 묘미가 있다. 


즉,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파격의 길을 택했다는 측면에서도, 영화 내적으로 폭력과 고통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 곳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또 아름다움과는 하등 거리가 멀어보임에도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다분히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제이 덕분일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것 같은 곳에서 생존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고, 총칼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와중에 남을 죽이고서 죄책감을 느끼고, 보편적인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실제였다면 진작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제이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 웨스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파격을 택한 영화 또한 제이를 중심에 두고 제이의 여정과 그로 인한 성장을 기본 축에 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행성 B612에서 지구로 찾아와 가히 그 순수한 영혼으로 여행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장'의 주인공은 제이가 아닌 사일러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사랑과 희망, 착한 마음에의 찬가를 고수하는 제이에게 성장이 필요한가? 물론 폭력과 고통과 고난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장 필요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는 총칼로 '침공'해 무차별로 빼앗고 죽인 백인들, 미국 서부 개척은 곧 과거 수백 년 동안 자행된 학살의 반복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오직 생존에의 길은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즉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일러스는 제이와의 여정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길을 수정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서 생존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연히' 어리고 어리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제이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도 있다. 총칼을 앞세운 무단 통치로 기반은 다질 수 있지만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법, 이후엔 필수적으로 문화 통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칼 대신 사랑과 희망과 책의 문화로 서부를 개척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제이를 통해 그래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배경까지 섭렵하여 성장의 주체 반전을 훌륭히 시도한 영화는, 그 때문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얇팍함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제이와 사일러스의 여정에 따로 또 같이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삶은 길고 죽음은 짧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생존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데, 모든 죽음이 하나 같이 허망하거니와 순간이다. 


<슬로우 웨스트>의 죽음은 그래서 전혀 '슬로우'하지 않다. 빠르고 간결하며 피가 난무하는 파티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주인공마저 웃음 짓게 하는 죽음도 있다. 그런 죽음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죽음들은 이곳의 선입견을 바꿔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불사하는 개척정신과 문명을 확대시키려는 탐험정신의 위대함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 


죽음의 얇팍함은 삶의 얇팍함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생존 또한 얇팍하기 그지없다는 걸 말한다. 얇팍한 생존을 그저 영위하기 때문에 삶이 길어보인다. 이곳만의 삶을, 생을 지어올려야 한다. 타인을 죽이고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생존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리인 제이가 곳곳에 흔적을 내고 영향을 끼치고 남은 이들에게 부여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다. 생존 그리고 생존과 대비되는 얇팍한 죽음이 판을 치는 곳의 삶이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보편적 진리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금 이곳에 뿌리내리는 건 굉장히 느릴 테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 주체와 방법과 방향까지 영화가 제시하진 않는다. 혹은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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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일급 살인>


영화 <일급 살인>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앞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 1934년 그곳에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가 문을 연다. 갱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때에 선전용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라고 할 만한데, 미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마피아 거물 알 카포네가 수감되었었고 1963년 폐쇄될 때까지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으며 재소자의 권리보장이 최악이었다.


폐쇄 후 몇 년 간 방치하였다가 1972년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데, 생전(?)의 그 유명함으로 소설, 게임, 영화, 드라마, 만화 등수많은 콘텐츠에 등장하였다. 마이클 베이의 유일하다시피 한 명작 액션영화 <더 록>에서 정부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특수대원들이 탈취해 요새화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더 록'은 알카트라즈 교도소의 별칭이기도 하다. 


<더 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명작 법정영화 <일급 살인> 또한 이곳이 주요 배경이라 할 만하다. 교도소의 기능이 구금과 교정에 있는 만큼, '가장 유명한 교소도' 알카트라즈는 탈옥 절대 불가의 철통 경비와 함께 재소자의 재활과 교육과 교화를 가장 투철하게 시행하는 곳이어야 마땅하겠다. 과연 그랬을까?


일급살인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주인공 헨리 영(케빈 베이컨 분)을 비롯한 4명의 재소자들이 알카트라즈 탈옥을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로 인해 두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맥케인은 밀고하여 추가 처벌을 받지 않고 헨리 영은 독방에 갇혀 3년 동안 있는다. 알카트라즈의 독방 정책은 19일 이상 감금 금지였다. 


영은 가끔씩 방문하는 소장의 독방 실태를 점검으로 풀려나 일반 감방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도 오래된 독방 생활로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던 바, 식사시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배신자 맥케인을 죽인다. 그는 곧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일급 살인으로 기소된다. 


초짜 국선 변호사 제임스 스탬필(크리스찬 슬레이터 분)가 영을 변호하게 된다. 스탬필은 그를 돕고자 하지만, 영은 자신이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절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죽는 것보다 완전히 무혐의가 되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에 스탬필은 다른 루트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영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의 독방에서 3년 동안 있었고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상과 인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탈옥자 재활을 위한 독방과 참작의 여지 없는 일급 살인자' 대 '규정을 어긴 처참한 독방 환경과 그로 인한 정신 이상 하에서의 살의 없는 살인'이라는 프레임의 대결이라는 외향을 띤다. 교도소 입장에서 재소자는 교화와 재활의 '대상'일 뿐이고, 스탬필 입장에서 영은 엄연히 인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여기에 일절 요지부동의 '옳고 그름'이라는 재단기를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이 두 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의 요지에 '틀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팽행선에는 모든 걸 포괄하면서도 또 다른 개념을 재단기로 써야 한다. 이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선택한 궁극적 재단기는 다름 아닌 '존엄성'이 아닌가 싶다. 


스탬필이 주장하는 인권은 교도소가 주장하는 인권 없는 탈옥범의 교화 및 재활이라는 프레임을 완벽히 이길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영에게만 적용된, 저지른 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죗값의 비애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심지어 명백히 인간 이하라 할 만한 인간들에게까지도 말이다. 


더불어 영화가 저격하려는 대상은 영의 살인이 아닌 알카트라즈의 비(非) 교도소적인 생태이다. 이는 극 중에서 스탬필이 (보는 이에 따라선) 영악하게 기존의 프레임 전쟁을 이탈해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한데, 영은 그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나라나 사회에 의해서가 아닌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의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맞는 건 아니겠지만, 이 사실 '또한' 맞는 건 분명하다. 


영과 스탬필 이야기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이 영화가 2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명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건, 비단 단순 법정영화에서 보이는 프레임 너머 또는 이면까지를 들여다봐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엔 두 주인공 헨리 영과 제임스 스탬필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에 둘 다 소싯적에 5불을 훔쳐봤지만, 한 명은 교도소에 와 있고 한 명은 변호사가 되어 있다. 


스탬필은 영을 위해, 아니 영으로 투영되는 '정의'를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다. 영은 자신을 위해, 아니 자신의 3년 독방 생활로 투영되는 '삶보다 나은 죽음'을 위해 삶을 포기한다. 그렇게 영은 자신의 삶을 살릴 스탬필이 아닌 친구 스탬필을 원하지만, 스탬필은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관의 열망과 추구를 위해 의뢰인 영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는 스탬필과 영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인생관 추구와 함께 모든 이가 추구할 것 같은 정의의 실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탬필이 깨닫고, 행동하는 것도 그에 반응하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본인의 의사에 의해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영이 깨닫는 것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헨리 영은 스탬필의 바람대로 보는 우리의 기대대로 '왜 맥케인을 죽였는지' '알카트라즈 독방에서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자세히는커녕 대략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증인석에 서서 죽음도 불사하는 엄청난 두려움을 뚫고 위대한 한마디를 입에 올린다. 


"저는 무기 대용이었지만 살인자는 아닙니다. 살인자는 그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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