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일급 살인>


영화 <일급 살인>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앞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알카트라즈 섬, 1934년 그곳에 알카트라즈 연방 교도소가 문을 연다. 갱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때에 선전용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교도소라고 할 만한데, 미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계 마피아 거물 알 카포네가 수감되었었고 1963년 폐쇄될 때까지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했으며 재소자의 권리보장이 최악이었다.


폐쇄 후 몇 년 간 방치하였다가 1972년 이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관광지로 활용하고 있는데, 생전(?)의 그 유명함으로 소설, 게임, 영화, 드라마, 만화 등수많은 콘텐츠에 등장하였다. 마이클 베이의 유일하다시피 한 명작 액션영화 <더 록>에서 정부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특수대원들이 탈취해 요새화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더 록'은 알카트라즈 교도소의 별칭이기도 하다. 


<더 록>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명작 법정영화 <일급 살인> 또한 이곳이 주요 배경이라 할 만하다. 교도소의 기능이 구금과 교정에 있는 만큼, '가장 유명한 교소도' 알카트라즈는 탈옥 절대 불가의 철통 경비와 함께 재소자의 재활과 교육과 교화를 가장 투철하게 시행하는 곳이어야 마땅하겠다. 과연 그랬을까?


일급살인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주인공 헨리 영(케빈 베이컨 분)을 비롯한 4명의 재소자들이 알카트라즈 탈옥을 하다가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로 인해 두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맥케인은 밀고하여 추가 처벌을 받지 않고 헨리 영은 독방에 갇혀 3년 동안 있는다. 알카트라즈의 독방 정책은 19일 이상 감금 금지였다. 


영은 가끔씩 방문하는 소장의 독방 실태를 점검으로 풀려나 일반 감방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도 오래된 독방 생활로 정신이 이상해져 있었던 바, 식사시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배신자 맥케인을 죽인다. 그는 곧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일급 살인으로 기소된다. 


초짜 국선 변호사 제임스 스탬필(크리스찬 슬레이터 분)가 영을 변호하게 된다. 스탬필은 그를 돕고자 하지만, 영은 자신이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절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죽는 것보다 완전히 무혐의가 되기 전까지 그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던 것이다. 이에 스탬필은 다른 루트로 조사를 이어 나가고, 영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의 독방에서 3년 동안 있었고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상과 인간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탈옥자 재활을 위한 독방과 참작의 여지 없는 일급 살인자' 대 '규정을 어긴 처참한 독방 환경과 그로 인한 정신 이상 하에서의 살의 없는 살인'이라는 프레임의 대결이라는 외향을 띤다. 교도소 입장에서 재소자는 교화와 재활의 '대상'일 뿐이고, 스탬필 입장에서 영은 엄연히 인권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여기에 일절 요지부동의 '옳고 그름'이라는 재단기를 이용할 순 없을 것이다. 이 두 집단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의 요지에 '틀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팽행선에는 모든 걸 포괄하면서도 또 다른 개념을 재단기로 써야 한다. 이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선택한 궁극적 재단기는 다름 아닌 '존엄성'이 아닌가 싶다. 


스탬필이 주장하는 인권은 교도소가 주장하는 인권 없는 탈옥범의 교화 및 재활이라는 프레임을 완벽히 이길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영에게만 적용된, 저지른 죄에 비해 터무니 없는 죗값의 비애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심지어 명백히 인간 이하라 할 만한 인간들에게까지도 말이다. 


더불어 영화가 저격하려는 대상은 영의 살인이 아닌 알카트라즈의 비(非) 교도소적인 생태이다. 이는 극 중에서 스탬필이 (보는 이에 따라선) 영악하게 기존의 프레임 전쟁을 이탈해 새로운 프레임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한데, 영은 그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나라나 사회에 의해서가 아닌 알카트라즈 교도소에 의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만' 맞는 건 아니겠지만, 이 사실 '또한' 맞는 건 분명하다. 


영과 스탬필 이야기


영화 <일급 살인>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이 영화가 2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명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건, 비단 단순 법정영화에서 보이는 프레임 너머 또는 이면까지를 들여다봐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엔 두 주인공 헨리 영과 제임스 스탬필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에 둘 다 소싯적에 5불을 훔쳐봤지만, 한 명은 교도소에 와 있고 한 명은 변호사가 되어 있다. 


스탬필은 영을 위해, 아니 영으로 투영되는 '정의'를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다. 영은 자신을 위해, 아니 자신의 3년 독방 생활로 투영되는 '삶보다 나은 죽음'을 위해 삶을 포기한다. 그렇게 영은 자신의 삶을 살릴 스탬필이 아닌 친구 스탬필을 원하지만, 스탬필은 결국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관의 열망과 추구를 위해 의뢰인 영을 원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이들을 보여준다.


더불어 영화는 스탬필과 영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인생관 추구와 함께 모든 이가 추구할 것 같은 정의의 실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스탬필이 깨닫고, 행동하는 것도 그에 반응하는 것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움 없이 본인의 의사에 의해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영이 깨닫는 것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였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입을 열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헨리 영은 스탬필의 바람대로 보는 우리의 기대대로 '왜 맥케인을 죽였는지' '알카트라즈 독방에서 어떤 짓을 당했는지' 자세히는커녕 대략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증인석에 서서 죽음도 불사하는 엄청난 두려움을 뚫고 위대한 한마디를 입에 올린다. 


"저는 무기 대용이었지만 살인자는 아닙니다. 살인자는 그들이죠."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트루먼 쇼>


영화 <트루먼 쇼> 포스터. ⓒ파라마운트 픽쳐스



'굿모닝, 미리 인사하죠.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이트.' 성격 좋고 무난한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 분)는 조그마한 섬에서 살며 보험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는 대학 동창 메릴과 결혼했고 역시 대학 동창 말론과 절친 사이다. 트루먼은 대학 때 잠깐 만났다가 황망하게 헤어진 로렌을 만나러 피지로 여행을 가려 한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고 물 공포증을 앓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늘에서 조명기구가 떨어지질 않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만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끌고가버리질 않나,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자신의 이동경로를 고스란히 생중계하고 있질 않나. 하지만 엄마와 아내는 그의 말을 전혀 믿어주질 않고, 말론은 그의 말을 믿는 대신 자신을 믿어야 한다며 위로의 말을 함께 건넨다. 


한편, 트루먼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 세계 수백만 명 시청자에게 완전한 리얼리티 삶을 보여주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다. 그가 사는 섬은 그 자체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세트장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과 섬에 사는 모든 사람이 연기자이다. 이를 총괄기획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 쇼'를 진짜 삶이자 특별한 삶이라 믿는다. 그리고 모든 게 완벽하게 만들어진 그곳을 천국이라 믿는다. 


거장과 최고의 도전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영화 <트루먼 쇼>는 199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 짐 캐리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그의 필모에서 <마스크> <덤 앤 더머> <에이스 벤츄라> 등의 코미디와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잇는 코미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마제스틱> <예스맨>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피터 위어 감독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70년대에 칸영화제를 섭렵하며 호주의 거장으로 이름 높은 그는 잘 알려진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작 로맨틱 코미디 <그린 카드>로 유명세를 떨쳤다. <트루먼 쇼>라는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마스터 앤드 커맨더>와 <웨이 백>이라는 대작 느낌이 물씬 풍기는 두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영화는 피터 위어라는 거장의 작가정신과 여유, 짐 캐리라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 배우의 도전 아닌 도전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몇 번을 봐도 '재미'를 보장하는 이 영화는, 지금은 일상화되어 있거니와 그래도 여전히 열광하는 몰래카메라 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와 연결되어 있다. 제작진의 주장에 따르면, 트루먼의 진짜 인생이다. 


몇 번을 보면 보이는 '논란'의 부딪힘은, 트루먼 쇼를 만든 크리스토프의 철학과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좌지우지 하는 이른바 '신'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분히 '비인간적인' 방송 철학과 맞닿아 있는 그의 '인간적인' 믿음이 현대사회의 모순적인 병폐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매스미디어 병폐의 우화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조작되어진 이 세계,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 트루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크리스토프는 말한다. 그가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리가 사는 곳은 역겹지만 그가 사는 곳 씨헤이븐은 천국이라고 말이다. 더욱이 트루먼은 가짜가 아닌 진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거기엔 '진실'이 없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만이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트루먼(truman)'이라는 이름을 들여다보자. '트루', 즉 진실(true)라는 단어에서 추출했다는 게 명백하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가 있고, 결국 이 트루먼 쇼의 결말은 트루먼이 진실을 찾아 가는 것으로 결말이 날 공산이 크다. 그게 비록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할지라도 말이다. 


한편, 이 영화를 지탱하는 다른 큰 축 크리스토프(christof)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이름은 전지전능하신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christ)에서 온 게 분명하다. 그는 트루먼의 인생뿐만 아니라, 트루먼이 사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일하는 연기자 모두에게 자신의 철학을 주입시켰다. 그들은 모두, 특히 트루먼의 아내와 절친은 사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 없는 인생을 영위하고 있고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게 진짜 인생의 일부분이고 숭고하며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통제'를 '약간의 통제'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믿음은 크리스토프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고 그 철학에 쉼없이 숨을 불어 넣고 있다. 가히 '방송 예술'이라 칭할 만한 이 작태는, 수많은 광고가 딸려 있는 시청률과도 맞닿아 있는 바 현대사회를 지탱하면서도 파괴시키고 있는 여러 병폐 중 하나인 '매스미디어 병폐'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는 우화이기도 하다. 


누구도 매스미디어를 피해갈 수 없다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파라마운트 픽쳐스



매스미디어 병폐 중에서도 가장 큰 병폐는 통합, 통제 등의 전체주의 잔재들이다. '통합'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는 '통제'와 함께 할 땐 더할 나위 없이 악랄한 단어가 되고 만다. 영화에서 그것은 크리스토프가 만들어낸 가상임에 분명한 진짜 세계에 블랙홀처럼 모든 걸 쓸어담아버리는 걸 뜻한다. 


'천국'이라 명명되어진 그곳은 크리스토프의 명명백백한 철학과 그 철학을 뒷받침하는 어마어마한 시청률 아래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고 가능하다. 그건 작은 나라의 예산과 맞먹는 엄청난 돈과 인력이 투입되어 철저하게(누군가 생각하기로는 약간의) 통제가 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스미디어를 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 어딜 가든 매스미디어가 우릴 반기고 유혹하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매스미디어를 피해갈 수 없다. 거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즐기기만 하는 사람도, 거기에 그 무엇도 비할 수 없는 심각성을 느끼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프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익숙하고 안주하기 때문인 것이다. 


방법은 '진실'뿐인가. 매스미디어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지 속속들히 아는 것인가. 아니, 그 이후에 크나큰 절망감을 느낄 게 자명하다.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진실을 알고 그 세계를 탈출하게 된다고 해서 그는 그의 진짜 삶,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매스미디어의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이 재미있는 영화는 끝까지 그 재미를 놓치지 않은 채 거대하고 진지하고 속절없는 물음만 던져놓는다. 우리는 그 막막한 물음 앞에 한동안만 멍하니 생각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당연한듯이 다른 매스미디어를 찾을 것이다. '트루먼 쇼'가 아닌 또 다른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릴 것이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5.18을 엿보는 영화 <스카우트>의 거시적 시선


영화 <스카우트>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2017년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이자 최고의 히트상품은 <라라랜드> <범죄도시> <택시운전사> <1987> <옥자>도 아닌 <아이 캔 스피크>라고 생각한다. 재미와 감동을 이 영화처럼 과하지 않고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감정선을 최상위까지 끌어내는 영화도 드물었다. 김현석 감독 필모 역사 최고의 쾌거라 할 수 있겠다. 


김현석 감독 필모를 들여다보자. 20대 중반도 되지 않은 약관 나이에 각본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몇 편의 명작에 각본과 조감독으로 참여해 인정을 받았다. 2002년에 자그마치 송강호, 김혜수, 김주혁, 황정민 등과 함께 <YMCA 야구단>을 연출했다. 이후 <광식이 동생 광태> <스카우트> <시라노; 연애조작단>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과하지 않은 코미디 장르에 강점을 보이며 좋은 각본의 힘에 영화를 절대적으로 맡기는 편인 듯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평타 이상, 최소한 나쁘지 않은 수준의 영화를 선보인다. 점점 믿을 만한 감독이 되어간다. 그의 필모 중 <스카우트>는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거니와 가장 저평가되어 있는 영화인데, 사실 그의 최고작 <아이 캔 스피크>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거니와 가장 좋은 작품 중 하나이다. 


99% 픽션의,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10일간 이야기


영화 <스카우트>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우리는 영화 <스카우트>를 임창정, 박철민의 단순한 코미디 영화로 알고 있다. 포스터만 보아도 그렇게 인식되고, 영화의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인식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가는 사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알아차리기 충분하다. 영화는 다음의 두 문구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10일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99% 픽션이다.' 


1980년 5월 초, 신촌골 대학교 야구부 교직원 호창(임창정 분)에게 미션이 떨어진다. 안암골 대학교에 3연패를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당시 국내 최고의 초고교급 투수 광주일고의 선동렬을 스카우트해오라는 명령. 그는 이미 안암골에 내정되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5월 18일까지의 10일 뿐. 


와중에 호창은 YMCA에 들렀다가 옛 연인 세영(엄지원 분)을 만난다. 이소룡 팬이었던 그녀는 이소룡이 죽던 날 호창에게 이별통보를 했더랬다. 호창은 세영 곁을 멤도는데, 세영을 좋아하는 동네 주먹 곤태가 위협한다. 한편 호장의 선동렬 스카우트 작전은 신촌골 대학교에서 온 스카우트 병환의 방해작전으로 쉽지 않다. 병환은 호창의 대학교 시절 라이벌이기도 하다. 


호창은 선동렬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위기감을 느껴, 곤태에게 도움을 청해 납치 작전을 펼치기도 하고 선동렬이 미성년자임을 간파하고 부모님을 노리기도 하지만 잘 먹혀들지 않는다. 와중에 석연치 않게 헤어진 세영과의 옛일이 떠올라 괴로운 호창이다. 호창은 선동렬을 스카우트할 수 있을까? 세영은 그때 왜 호창을 떠났던 것일까, 진짜 이소룡이 죽어 너무 슬퍼서였을까?


5.18과 5.18을 아우르는 거대한 의식, 거시적 시선


영화 <스카우트>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외견 상, 그리고 주요 줄거리 상 그 어디에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느끼기 힘들다. 최소한 직접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느낄 수 있거니와, 행간과 자간과 보이지 않는 이면이 많고 간접적이기에 생각할 여지가 많다. <아이 캔 스피크>를 여러 모로 뜻깊게 봤다면, <스카우트>도 충분히 그러할 것이다. 


감독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를 소시민으로 보았다. 실제가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많은 영화들이 직접적으로 당시를 회상하여 우리 앞에 불러들였고 불러들이며 불러들일 것이다. 그 처참함에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반면 이 영화는 다분히 외부인의 시선이다. 전혀 상관 없거니와, 외려 그런 행위를 반대하는 호창의 시선 말이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5.18의 생생한 면면을 볼 수 없다. 치가 떨리게 잔인하고, 몸서리 치게 안타까우며, 부들부들 억울한 상황과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오히려 그 어떤 영화들보다 5.18을 정확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흔히 선택하는 시선인 미시적이 아닌 거시적으로. 


그렇지만 99% 픽션임을 앞세운 1980년 5월 18일 직전 10일 간의 광주, 전남도청과 더불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광주YMCA 소속의 세영, 그리고 호창과 세영이 헤어질 당시 있었던 일의 전모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제반 상황과 서사를 들여다보면 당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영화로 5.18의 단편만 볼 수 있다. 그 이면의 수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호창의 깨달음과 변화가 극적으로 보이는데, 그것들이 5.18로 이어지는 동시에 그가 그토록 염원해 마지 않던 선동렬을 포기하는 형태로 나간다. 여타 영화였다면 충분히 로맨스가 주가 되었을 텐데, 이 영화는 거기에 역사 의식과 삶의 의식의 변화를 입혔다. 바로 이 부분이 비록 이 영화가 5.18의 단편만을 보여줄 뿐이지만, 5.18과 5.18을 아우르는 거대한 의식까지 다루는 모습인 것이다. 


암울한 '폭력' 시대의 한 가운데


영화 <스카우트>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단편적 팩트 위에 복잡한 픽션을 얹어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을 바탕으로 <스카우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당대의 고발이다. 세영과 호창이 헤어지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당대 즉, 1960~80년대 한국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정부에 의해 시작된 그 폭력은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졌다. 


호창과 세영은 그 한가운데도 아닌 외곽 어딘가에 있었지만 인생을 상당 부분 결정 짓는 피해를 입었고, 이후에도 그들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다시 만난 건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때와 곳이었고, 또다시 또 다른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극점으로 수렴되지만, 한편 오래도록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암울한 폭력의 한 가운데라는 상징을 갖는다. 영화는 그 폭력의 한 시발점 스토리를 간략히 보여줬을 뿐이지만, 그들이 이름 없는 소시민임과 동시에 역사를 구성하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줄기라고 했을 때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5.18을 생생하게 체험하기 위해서는 <화려한 휴가> <꽃잎> <택시운전사> <박하사탕> <26년> 등을 보아야 할 것이다. 수작도, 평작도, 망작도 있지만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줄 안다. 반면, <스카우트>는 5.18이라는 현상을 체험하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본질을 이해하기엔 제격일 줄 안다. 


그러하기에 5.18을 최소한으로 알고 있는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한다. 5.18을 또 다른 프레임으로 들여다보길 원하는 분들, 5.18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당대를 구성하는 폭력의 진실이 무엇인지 개인적이고 미시적으로 알고 싶은 분들에게도 제격이다. 선동렬을 스카우트한다는 줄거리와 코미디 장르라는 외견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주는 진한 페이소스를 함께 즐긴다면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을 것이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


영화 <아비정전> 포스터. ⓒ스폰지



올해로 15주기다. 우리의 영원한 홍콩스타 장국영이 2003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1977년 데뷔해 금새 성공한 가수생활과는 다르게 영화배우로서의 오랜 무명생활 끝에 1986년 <영웅본색>과 1987년 <천녀유혼>으로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 성공에 힘입어 곧바로 두 작품의 2탄을 찍고난 후 그가 택한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아비정전>이었다.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이 데뷔작 <열혈남아>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중박 이상을 쳐 그 기대감으로 왕가위가 하고 싶은 대로 찍게 해준 영화이다. <열혈남아>가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홍콩 액션 느와르의 계보를 이은 작품으로 칭송받았기 때문인데, 차기작으로도 그런 류의 작품을 원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또 여전히 영화를 통해 접하고 있는 홍콩 최고의 스타들을 한데 볼 수 있다. 장국영을 비롯 유덕화,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그리고 양조위가 그들이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작품은 우울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비(非) 액션물이었다. 


왕가위 스타일의 시초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흥행에선 철저히 등을 돌린 것과는 다르게, 비평 면에선 철저히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왕가위는 이후 몇 년 동안 영화 찍는 게 쉽지 않았던 반면, 영화는 이후 오랫동안 홍콩이 자랑하는 명작이자 일명 '왕가위 스타일'의 시초로 칭송받고 있다. 


아비(장국영 분)는 매일 오후 3시면 도박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 분)을 찾는다. 1분 동안을 함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계를 본 후 아비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고 그를,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들은 동거를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원하자 그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수리진과 헤어진 아비 앞에 나타난 이는 댄서 루루(유가령 분), 여지 없이 그들은 사랑을 시작하지만 역시 계속 함께 할 것을 원하는 루루를 아비는 거절한다. 하지만 루루는 수리진과는 달리 쉽게 떠나려 하지 않는다. 한편, 아비에게는 그를 길러준 양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유명한 마담 출신으로 젊은 남자들을 갈아타며 살아가고 있다. 아비는 그 모습에 치가 떨린다. 결국, 친어머니가 있다는 필리핀으로 향한다. 


아비로부터 버림 받은 수리진에게 경관(유덕화 분)이, 루루에게 아비 친구(장학우 분)가 함께 하려 한다. 그들은 그녀들을 위로하고 도와준다. 하지만 그녀들의 마음 속에는 아비만 있을 뿐 그들이 들어 있지 않다. 그들은 그녀들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홍콩 반환, 그리고 이별과 떠남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영화는 내적으로 왕가위 스타일로 점철되어, 외적으로 홍콩 반환 시점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와중에 느끼는 불안감과 허무함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1985년 확정된 홍콩 반환은 1997년 시행되는데, 이에 대한 느낌을 와일드하게 표현한 대표적 영화가 <영웅본색>이라고 한다면 내적으로 스타일리쉬하게 표현한 대표적 영화는 <아비정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비를 들여다보자. 그는 필리핀 태생으로 친부모님으로부터 버림 받아 홍콩으로 입양되어 지금의 양어머니 손에 자랐다. 아비는 홍콩에서도 필리핀에서도 발 디딜 곳이 없다. 홍콩은 중국으로부터 영국이 영구할양 받았고 155년만에 반환되었다. 1985~97년 사이 홍콩 역시 중국이라고 하기에도 영국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아비의 사랑 방식은 그의 정체성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착하지 못하는 필연적 바람둥이 말이다. 그의 내레이션이 말하는 '발이 없어 지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 어디론가 날아가야만 하는 새'의 사연이 그 방식을 은유적으로 대변한다. 애초에 발이 없이 태어난, 자율 아닌 타율에 의한 '어쩔 수 없음'의 변명이다. 하지만 그게 홍콩 반환이라는 실존을 만나면 더 이상 변명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왕가위가 말하고자 하는 건 홍콩 반환이 아닐 것이다. 홍콩 반환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사랑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인 '이별'을, 더 자세히는 한 쪽이 가해를 하게 되고 한 쪽이 피해를 입게 되는 '떠남'을 말하고자 했다. 


아비의 부모는 아비를 떠났고, 아비는 수리진과 루루를 떠났고, 수리진은 경관을 루루는 아비 친구를 각각 떠났고...  그렇게 떠남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는 끝없이 계속된다. 가해의 되물림은 계속 되고, 피해자의 가해자를 향한 바라봄과 그리움과 따라감도 계속된다. 이는 홍콩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떠남의 운명과 순간의 소중함, 태곳적 미학


영화 <아비정전>의 한 장면. ⓒ스폰지



'떠남'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영화는 대사, 캐릭터, 분위기, 색감, 장소, 촬영 구도를 통해서도 표현한다. 영화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두 명 이상을 한 프레임에 두지 않는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5각 관계를 형성하지만, 2각 관계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겉도는 느낌인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닌 한 명이 거의 일방적으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생각하며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거의 언제나 우중충한 색감이 감도는 어두운 분위기의 좁은 곳에서 함께 있다. 그리고 밖에서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수리진과 경관이 그나마 탁 트인 바깥에서 만나지만, 그들마저도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영원은커녕 찰나의 순간 정도의 만남만이 가능한 그들, 떠남의 운명은 '순간의 소중함'이라는 교훈(?)을 남기기도 한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그들 각각의 만남이 눈물나게 아름답고 아련하게 다가오는 건, 비단 이 영화가 30여 년 전에 만들어져 고전에 반열에 올랐기에 느껴지는 옛 감성으로의 영화 외적인 감정이 아닌 그들의 만남이 빚어내는 소중한 순간의 미학이 주는 영화 내적인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스타일리스트 왕가위가 선물한, 이른 바 태곳적 미학이다.


<아비정전>을 말함에 있어 희대의 명장면과 명 OST가 빠질 수 없다. 아비가 수리진은 물론 루루까지 쫓아보낸 후 '발 없는 새' 내레이션을 하며 하비에르 쿠가의 <마리아 엘레나> 음악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장면. 영화의 우울한 감성과는 정반대의 활기찬 음악과 춤사위인데, 그래서 더더욱 우울해 보이며 극중 아비에게 공감이 가게 한다. 


비로소 왕가위 감독의 시초까지 올라왔다. <열혈남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영화이지만 논외로 할 필요가 있고, <아비정전> 이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2046>까지 이어가보자. 왕가위의 영화 세계, 나아가 그가 바라보는 인간 세계의 '상(像)'이 떠오를 것이다. 그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잊히지 않는, 마음 속 한 편에 영원히 자리잡을 소우주이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코엔 형제의 <파고>


영화 <파고> 포스터. ⓒ서우영화사



전 세계 시네필이 좋아해 마지 않는 형제 감독들이 있다. 50년대에 데뷔해 70~80년대 유럽영화의 시대정신을 이끌었다는 평가받는 거장 타비아니 형제, 80년대에 데뷔해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를 내놓으며 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하나로 우뚝 선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그리고 역시 80년대에 데뷔해 오랜 시간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코엔 형제. 


코엔 형제는 1984년 <분노의 저격자>로 제1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들과 함께 또는 그 이후로 짐 자무쉬, 스티븐 소더버그, 쿠엔틴 쿠란티노 등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선댄스를 통해 이름을 알린 바 코엔 형제는 선댄스로 대표되는 미국 현대 인디 영화의 총아이자 시작점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화려한 데뷔를 비롯해 칸 영화제로부터 다르덴 형제보다 더한 사랑을 받으며 80~90년대 전성기를 누린 반면, 2000년대는 상대적으로 주춤한 듯했고, 2010년대 들어선 거의 주류에 안착한 느낌이다. <파고>는 그들의 필모에 있어 여러 모로 최정점에 위치한 영화라 하겠다. 관점을 갖고 들여다보려 한다. 


미국 중북부 노스다코타 주의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1987년 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노스다코타 주의 파고,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윌리암 H. 머시 분)는 돈에 쪼들려 자신의 아내를 유괴해 돈 많은 장인어른에게서 8만 달러를 뜯어낼 계획을 세운다. 그는 아는 사람을 통해 칼(스티브 부세미 분)과 게어(피터 스토메어 분)를 소개받고는 차까지 빌려준다. 


제리는 아내를 납치해 장인어른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돈을 한 번에 벌고자 하는데 쉽지 않다. 칼과 게어는 재빨리 제리의 아내를 납치해 그들의 아지트로 향한다. 그런데 고속도로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관의 검문에 걸렸고 납치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운 나머지 게어가 경찰관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차를 타고 지나가던 목격자 두 명도 끝까지 쫓아가 죽여버린다. 


한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노스다코타 주와 인접한 미네소타 주의 작은 시골 도시 브레이너드, 그 일대를 담당하는 경찰서의 서장 마지(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만삭의 몸을 이끌면서도 철두철미하고 영리하게 사건에 접근한다. 결국 이 모든 사건의 원흉 제리의 사무실까지 당도하는데... 


'비교'와 '대조'로 들여다보는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영화 <파고>는 코엔 형제 스타일 그 최정점에 위치해 있다. 우린 이 영화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스타일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시네필만을 위한 감독이 아니게 되었고, 그들의 영화도 더 이상 시네필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파고>는 마음껏 물고 뜯으며 즐기고 재멋대로 해석을 하며 파고 파고 또 파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나오는 정도의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수식어와 해석이 붙고 나온 지 20년이 넘은 만큼 그중엔 정립된 것들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비교' '대조'라는 개념만을 중점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영화사에 영원히 길이 남을 작품에 많은 것들을 들이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얼핏 단조로운 <파고>를 이루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부 이중성을 띠고 있다 시피 한다. 지명 'fargo'를 뜻함과 동시에 'far go'를 뜻하기도 하는 제목, 모든 걸 파묻어 버릴 수도 있지만 모든 걸 드러내기도 하는 하얀 눈, 모든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모든 걸 잃을 수도 있게 하는 돈, 다른 이를 죽이기도 하지만 나를 죽이게도 하는 총. 그리고 그 모든 이중성을 실행하고 이중성에 당하는, 이중성의 화신 인간까지. 


우리는 이 한없이 '재미있는', 그러나 무차별로 잔인해 너무나도 영화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터무니없이 싱겁고 한량스러운 대화들의 남발로 너무나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영화를 굉장히 '진지하게'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그걸 의도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들은 계산적이기보다 본능적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어 영화를 만들었을 테다. 


'본능적으로' 파는 <파고>


영화 <파고>의 한 장면. ⓒ서우영화사



이번엔 최대한 '본능적으로' <파고>를 들여다보자.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그래도 여전히 '너무 많이 가버렸다'는 제목과 모든 걸 드러내어 이야기가 이어지게 만드는 눈과 결국 모든 걸 잃게 만드는 돈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이를 죽이게 만드는 총이 눈에 보이는 걸 어쩌나. 그것들은 전부 이 영화를 '계산적으로' 볼 때 나온 것들 아닌가. 


정녕 코엔 형제는 천재 중에 천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놀라움을 지나쳐본다. 이 영화의 물흐르듯 흐르는 이야기에 종종 제동을 거는 건, 다름 아닌 싱거운 대화들이다. 문제는, 이 대화들이야말로 코엔 형제가 '계산적으로' 넣은 게 분명해 보이는 장치라는 것이다. 나는 그 대화들이 굉장히 비(非) 영화적으로도 느껴지는데 말이다. 


사실 이 범죄 스릴러의 기본은 의외로 액션이 아니다. 놀랍게도 대화와 장면(풍경)이 그 기본이다. 대화들은 <파고>라는 영화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파고> 속 인물들의 일상을 구성하기도 한다. 장면들은 역시 영화 속 중요한 장치적 맥락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그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로만 쓰이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파고>를 인간, 사회, 범죄, 일상, 비극 등 수많은 객체와 주체들로 바라볼 수 있다. 그 모든 걸 남김없이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이번엔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그나마 '코엔 형제'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그들의 또 다른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영화를 해석하는 데에만 공력을 쏟아도 모자라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들의 또 다른 작품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있기를.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기해서


영화 <지슬>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올해가 '제주 4.3 사건' 70주년이다. 1948년 제주도 각지에서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 통일, 완전한 민족해방 그리고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기치를 내걸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5.10 총선거까지 이어졌는데,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선거 이후 제주도에서의 문경과 무장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진다. 같은 해 8월 15일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제주도에 대한 강경 진압 수위를 높여간다.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 또는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을 조작하여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는 것이다. 10월 "해안선 5km 이외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내리고, 11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곧 '초토화작전'이라 불리는 진압이 시작된다. 


잠정적으로 1954년 9월에 끝이 나는 이 사건은, 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부가 벌인 최악의 자국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자 제주도 최대 최악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우리 모두 이 사건의 진실을, 이 사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불러일으켜야 한다. 거기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민간인이 학살을 당해야 했던가. 이제 와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 2>는 5년 전에 개봉한,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1948년 10월에 행해진 '섬 해안선 5km 밖인 중산간지역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과 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도망쳐 산으로 피신한 사람들과 계엄군 이야기를 다룬다. 


마을 사람들은 왜 도망가야 하는지 모른 채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는 잘 안다. 불과 몇 년 전에 끝이 난 일제강점기 때에도 무수한 위협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도망을 다녔고 무수한 죽음을 뒤로 한 채 살아남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속해 있는 나라의 정부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산 기슭의 아무도 모를 굴 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내일 모레 곧 나갈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이 조금만 참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그러며 평소 정겹고 살갑게 나누던 이야기를 이어가고 도망나올 때 가지고 온 지실(감자)을 사이좋게 나눠먹는다. 또 누군가는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는데, 기르고 있는 돼지들에게 밥을 주어야 하고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와야 하며 어디로 간지 모를 순덕이를 데리고 와야 한다.


한편, 계엄군들에게서도 인간군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상사란 놈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중사란 놈은 매일 칼을 갈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랍시고 빨갱이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상병이란 놈은 상사의 말 한 마디에 아무렇지도 않게 민간인을 죽이고 후임들에게 죽기 싫으면 폭도를 잡아 죽이라고 한다. 


와중에 일병 한 놈은 자신들이 여기 와 있는 건 폭도 때문이 아니고 명령 때문이라며, 자신들이 잡아 죽이는 이들은 폭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민간인이라는 걸 이성과 감성의 개념으로 직시하고 있다. 신병 한 놈도 이 일병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다. 


웰메이드 작품 <지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 <지슬>은 제주 4.3 사건이라는, 다른 한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비극들보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 있지 않은 비극을 다룬다는 영화 외적인 요소보다, 너무도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작품으로의 영화 내적인 요소로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작업이 선행되고 나면 영화를 보는 눈에, 영화를 보는 생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씬이 많지 않다. 한 씬마다 롱테이크를 쓰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데 할애한다. 영화적 기법을 영화의 주제와 조화시키는 형태라고 보는데, 거대 비극 속에서도 인간성을 져버리지 않고 '유머(humor)'를 발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유머는 나아가 영화에서 종종 묻어나오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와 장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그건 다시 영화적 기법으로 이어져 궁극의 '미장센'이 탄생한다. 영화 전체가 흑백으로 처리되는데, 그래서 롱테이크와 함께 정적인 구도가 더욱 눈에 띄고 빛을 발한다.


구도는 장면의 자체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계엄군 사이의, '인간'과 '비인간'의 구도로까지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거기에 차라리 이데올로기 대립과 정부에 의한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기라도 한 명령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거기엔 오로지 광기만 있을 뿐이다. 광기에 대응하는 건 광기도 총도 무력함도 아닌 유머 뿐이다. 그리고 '지슬' 즉, 감자.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기억의 전쟁'을 이어가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라산 일대에 잠복한 350여 명의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제주도 중간산 마을 초토화 명령을 내렸다는, 믿기 힘든 사실은 최대치의 이성을 동원해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다. 타국과의 전쟁에 임해서도 민간인 피해는 절대적으로 없게끔 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자국 민간인 학살을 어찌 대놓고 명령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경제적으로만 보았을 때 경제 주체가 되는 사람들 수의 하락은 국가에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가. 정치적으로만 보았을 때도 제주도에만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건 역시 국가에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는가. 군사적으로만 보았을 때도 그 멀리 있는 제주도로까지 군사를 파견해 그 눈 쌓인 산을 포위하고 힘겹게 소탕작전을, 그것도 민간인을 상대로 펼치는 건 너무도 쓸데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인지상정의 개념으로는 백 번 천 번 만 번을 생각해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사건을 계산적으로만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런 사건을 대함에 있어, 이제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왜곡되지 않고 억지 숨김을 당하지 않은 기억들을 후세에 이어주는 것밖에 없다. 


70년 전 그때 그곳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이들이 머지 않아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곳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 하에 민간인 학살의 주체를 옹호하고 그들 역시 빨갱이 폭도 분자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은 존재할 것이다. 


'기억과의 싸움'이라고 했던가. 이 싸움은 단순히 네 편, 내 편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의 문제이고, 진실을 전달하고 알리는 문제이고, 진실을 간직하는 문제이다. 진실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 진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영원히 그 자리 그대로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를 문제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싸움을 영원할 것이다. 올바름을 전달하는 이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윈터스 본>


영화 <윈터스 본> 포스터. ⓒCJ 엔테테인먼트



2010년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배우를 뽑자면 '제니퍼 로렌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1990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하더라도 올해 서른이 채 되지 않되었다. 10대 중후반에 TV로 데뷔한 그녀는, 10대 후반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곧바로 승승장구의 길을 간다. 


경력 초반의 연기로 전 세계의 인정을 받은 후 상업영화를 넘나들었는데, <엑스맨> 시리즈와 <헝거게임>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두 강력한 2010년대 흥행 시리즈로 그녀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사이사이 알찬 시간을 보냈는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 <조이> 등으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에서 주조연상을 놓치지 않았다. 


북미에서 2010년에 개봉한 <윈터스 본>은 그녀를 이 자리에 있게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엄연한 명감독들의 등용문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세계 유수 영화제들에서 좋은 모습을 선 보인 이 영화는, 제니퍼 로렌스의 제니퍼 로렌스에 의한 제니퍼 로렌스를 위한 작품이 되었다. 


아빠의 실종, 가장이 된 열일곱 소녀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미국 중남부 미주리주 오자크 산골에 사는 열일곱 살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 분), 그녀는 정신적으로 아픈 엄마와 어린 두 남매를 책임지고 있다. 아빠는 가석방 중이고 말이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선 아빠가 다시 약을 만드는 것 같다고 하며,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보석금으로 집과 땅을 저당잡고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알린다. 


아빠를 찾아 재판에 출두하게끔 해야 집과 땅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리는 길고 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아빠와 친한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아빠의 종적을 쫓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커녕 친척들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아빠가 이미 죽었음을 인지한다. 


리로서는 어떻게든 무조건 아빠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 그런 리의 행동을 심히 못 마땅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그녀에게 심한 위협을 가한다. 그때 나타난 삼촌 티어드롭 돌리(존 호키스 분), 마음을 돌려 리의 사투를 도우며 함께 한다. 아빠의 실종, 나아가 죽음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리는 아빠를 찾아내어 집과 땅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까. 


강대국의 강력함이 독이 되는 이면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영화는 과연 이곳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아주 강하게 들 정도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얼핏 나라의 힘이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인 듯하다. 소규모의 목축업이나 마약 제조를 제외하면 도무지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무(無) 경제활동으로 일관하는 폐허의 마을이 아닌가. 


와중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국가의 존재는 한 가족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다. 강력함이라는 자장 안에서, 강력함의 영향력을 체화시켜주는 것이 아닌 몸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국가 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 즉 다른 국가뿐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들에게도 소위 그 강력함을 내보인다.


이 영화의 가난한 배경이 보여주는 세계 최대강국 미국의 이면은, 단순히 그 강력함에 반하는 가난이라는 이면뿐만 아니라 그 강력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이면인 것이다. 그걸 감당하는 자가 하다못해 장대한 기골의 영웅적인 중년 남성이 아니라 나이 어리고 여리디 여린 열입골 살의 소녀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차라리 신화적 존재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제니퍼 로렌스가 어색함 없이 흔들림 없이 신인티 없이 완벽하리 만치 연기한 리 돌리는, 영웅적 존재가 아닌 신화적 존재에 가깝다. 영웅이라는 게 신화적 존재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화적 존재란 좀 더 상징적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이 거대한 국가와 마을이라는 존재에 뚝심 있는 저항을 하지만, 그 어떠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 그럴 영웅적 힘과 지능이 뒤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내야 하기에 진실 찾기가 아닌 생존에 포커스를 맞춘 반면, 그들은 그녀의 생존이 아닌 진실 찾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라는 길을 시도하고, 생존하기 위해 어린 동생들에게 총 쓰는 법을 가르치고, 야생 다람쥐를 사냥해 직접 손질하게 하는 건, 영웅적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차라리 신이 내린 시련을 성장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이겨나가는 신화적 스토리에 가깝다. 그건 미국 신화일까, 반(反)미국 신화일까. 


영화는 리의 영웅적 스토리를 포기함으로써 자연히 미스터리 스릴러도 함께 포기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스토리 성격상 드라마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일 게 분명해 보이지만, 실상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주 조금 가미된 드라마이다. 그래서 일면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아니 거의 반드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윈터스 본>이 개봉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그 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건, 제니퍼 로렌스라는 배우의 발견뿐만 아니라 그녀가 분한 리 돌리의 가족을 향한 피나는 나아감 덕분일 것이다. 나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어른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려는 그녀의 사투는, 그 양상이 어떻든 진지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두 번 더 보면 영화가 더 명확해지리라 믿는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미스 리틀 선샤인>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여기 가족 3대가 있다. 헤로인 상습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15살 손자에게 가급적 많은 여자와 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의 아들 리차드는 9단계 성공의 법칙으로 강의를 하고 책도 팔아 대대적인 성공을 하려 하지만, 집에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리차드의 아내 쉐릴은 그런 리차드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기대를 거는 한편 집안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저녁은 매일같이 닭튀김이다.


쉐릴의 남동생 프랭크는 자칭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이지만, 사랑을 잃은 게이이자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 자리를 빼앗기고 자살 시도 끝에 살아 돌아왔다. 리차드와 쉐릴의 큰 아이 15살 드웨인은 공군사관학교를 갈 때까지 묵언 수행 중인데 9개월 째이고, 작은 아이 7살 올리브는 똥똥한 배와 특출날 것 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유독 미인대회 출전에 집착한다. 


이 각기 너무 다른 개성을 지닌 6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올리브가 겨우겨우 출전하게 된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해 함께 간다. 대회가 열리는 곳은 캘리포니아, 그들이 사는 알버커키에서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떨어져 있다. 여유가 안 되니 비행기로는 갈 수 없고, 결국 그들은 폭스바겐 마이크로 버스로 1박 2일의 여정을 떠난다. 이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의 여정은 순탄할까?


가족 로드 무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은 완벽한 가족 로드 무비이다. 100분의 러닝타임 중 20여 분을 캐릭터 설명에 투자하고, 60여 분을 가족의 여정에 투자하며, 20여 분을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투자한다. 즉,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그들의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를 향한 여정인 것이다. 


로드 무비에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목적이 불분명하거나 없을 때보다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더 다양하고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기대에 완벽히 부합하고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출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니 이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건, 무조건 이 콩가루 가족을 한 데로 뭉치게 하면서도 절대 오그라들지 않아야 하며 너무 진지하지도 너무 코믹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건 연출이나 연기보다 각본이 좋아야 할 텐데, 이 영화는 영화의 구성요소 중에서 각본이 가장 훌륭했다. 


코미디와 페이소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작년에 개봉해 괜찮은 평을 들었던 <빌리 진: 세기의 대결>의 감독 커플이기도 한 조나단 데이턴과 발레리 페이스 부부는 광고, 뮤직비디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이 영화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들의 특기는 몇 편 되지 않는 연출작에서 보이듯이 코미디와 페이소스가 결합한 드라마인 듯하다. 


이 콩가루 가족을, 각각의 개성이 너무나도 뚜렷해 굳이 하나로 합칠 필요까지 있나 싶은 가족을 한 데 합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들이 힘을 합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터져야 하겠다. 그 일들의 과정은 제법 진지하지만 코믹하고 그 일들의 결과에는 자못 은은히 풍겨 나오는 페이소스가 묻어 있다. 


영화는 6명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고 사려깊게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일일이 보여주다가, 리차드와 쉐릴, 할아버지와 올리브, 프랭크와 드웨인으로 짝을 짓고는, 마지막에서는 그야말로 멋지게 한 데 뭉친다. 뭉치지 않아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물론이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뭉치는 건 좋아 보이지 않나. 


너무나도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는 타이밍을 지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타이밍이 도래한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돌아보고, 나의 가족을 돌아본다. 우리도 여행 한번 떠나볼까?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하다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스 리틀 선샤인>은 종종 대놓고 영화적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고,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여행이거니와, 온갖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영화적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코믹하지도 않고 페이소스를 뿜어내지도 않는다. 아주 가끔, 아주 순간적으로 그럴 뿐이다. 영화는 그 한순간을 포착해 확대재생산 해낸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에서 어떤 교훈이나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메시지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요소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신 힘들 때나 우울할 때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언제고 찾을 만하다. 그때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은 때묻지 않은 위안을 선사할 것이다. 그 여운이 길지는 않을 지라도. 


이혼, 파산, 자살, 좌절, 죽음, 실패에 직면한 이들의 모습과 프랭크가 존경해 마지 않은 완벽한 패배자 프루스트의 삶 그리고 한 마디가 결합한 위안도 적절하다. 프루스트는 진짜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이 짝사랑만 한 동성애자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20년에 걸쳐 썼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고 있다. 


그런 그가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니까 말이다. 반면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이자 우리에게 수줍게 보내는 유일한 메시지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 자체로 의미다운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래빗 홀>


영화 <래빗 홀> 포스터.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조용하고 한적한 교외의 큰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베카(니콜 키드먼 분)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 하지만 그들에겐 불과 8개월 전 크나큰 일이 있었다. 네 살 된 아들 대니가 달려가는 개를 따라가다가 차에 치여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들은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 하고 비슷한 일을 당한 부부들 모임에 나가 위안을 받으려 한다.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베카는 대니에 대한 흔적을 지워나가며 과거를 뒤로 한 채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하위는 매일같이 대니의 살아생전 동영상을 보며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그들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벌어진다. 


문제만 일으키던 베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해 남자친구와 함께 엄마 집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베카 하위 부부와 절친했던 데키 릭 부부, 하위와 릭은 여전히 잘 만나고 대니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베카와 데키는 연락이 끊긴 상태다. 


베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대니를 치인 장본인 제이슨을 만나 위안 아닌 위안을 받고자 하는데, 아들을 잃었던 엄마와 아이를 갖게된 여동생과는 계속 부딪힌다. 하위는 모임에서 알게된 개비를 만나 동질감에서 오는 위안을 받고자 한다. 여기서 방식의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위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죽음이라는 아픔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 <헤드윅>과 <숏버스>를 통해 자못 파격적인, 그만의 언어로 고민을 드러내고 편견을 부수고자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이 <래빗 홀>을 통해서 '아픔'을 말했다. 아픔을 대하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또한 편견을 부수고자 한다. 지루하다 할 만큼 정적인 대응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아픔을 대하는 방식으론 파격적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가족을 잃는다는 것,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의 자식을 잃는다는 것. 죽음에 차등이 있일 수 있겠냐마는, 남겨진 이가 가장 아픈 건 아마도 자식 잃은 부모의 사례가 아닐까. 영화는 죽음에 관한 최고 수위의 아픔을 받고 견뎌내야 하는 한 부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지만 이런 류의 끔찍한 상실을 겪어본 이는 많지 않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영화를 완전한 몰입 하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그럼에도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 이상의 위로와 위안 없이도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방식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두 부부의 방식 차이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베카가 미래지향적이고 하위가 과거지향적이어서,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하위는 지니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베카가 과거의 인연을 끊으려 하면서 자신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려고 하는 반면 하위는 과거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며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동질감 어린 위안을 받고자 한다. 


한편, 현재 대니는 떠나고 없다.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도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이슨이라는 아픔의 가장 큰 축을 대면하는 용기도 보인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그를 만나서 대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동은 정녕 위대하다.


하위가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지극히 일반적이고 인간적이다. 누구라도 자식을 상실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상실의 때 이전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이슨과 마주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우리가 보인다. 


영화는 말한다. 그럼에도 베카와 하위는 모두 힘들다고 말이다. 위대한 베카와 일반적인 하위 모두 이 속절없는 상실과 아픔과 슬픔 앞에서 한없이 힘들다고 말이다. 과연 이 앞에 '어떻게'를 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가' 따위의 물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게 맞긴 할까. 


영화가 건네는 답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답을 주진 않지만, 아니 답을 줄 수 없지만, 답을 찾아보자. 제목에서 찾을 수 있고, 뜻밖에 베카 엄마의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무심한듯 진정어린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스치듯 지나가는,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책 '래빗 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래빗 홀을 통해 가게 된 그곳에 나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고통은 베카와 하위 부부를 단 한 순간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출구는커녕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단언할 수 있지만, '래빗 홀'에 대한 상상이 순간이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분명하다. 영화가 건네는 답 아닌 답이다. 


베카 엄마에겐 아들이 있었다. 서른 살에 헤로인 과용으로 죽은 아들이. 베카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동질감으로 비교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 하지만 반감만 살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이 주는 치명적 아픔은 같은 것, 베카는 엄마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녀의 말이 영화가 건네는 또 다른 답이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만 하게 되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그러다 또 문득 생각나서 보면 거기 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그렇지만... 사실, 괜찮아."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