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서극의 칼>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소싯적 무협이나 판타지 장르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할 수 없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무협과 판타지. 무협은 동양 그중에서도 중국을, 판타지는 서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무협은 소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는데 반해 판타지는 대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조직적인 게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판타지보단 무협을 더 좋아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분히 판타지적인 장르에 푹 빠져 있다. 비록 수십 년 전부터 이미 미국을 점령해온 코믹스를 영화로 옮겨왔을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기, 2~30년 전 무협 장르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이가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서극'이다. 


그는 <촉산>과 <황비홍> 시리즈로 8~90년대를 풍미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영웅본색> 시리즈를 비롯 <소오강호>와 <천녀유혼> <동방불패> 시리즈를 제작한 이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무협 영화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8~90년대 홍콩 무협의 대부인 것이다. 95년작 <서극의 칼>은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사실상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묻어버릴 액션


참 많이도 봐왔던 줄거리와 전개를 무참히 묻어버릴 정도의 액션을 선보인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명검 제조소로 유명한 연봉호, 사부의 딸 소령은 고아 출신의 정안과 4년차 철두에게 두루 애정을 과시하며 저울질하는 중이다. 정안과 철두는 함께 일을 보러 나갔다가 좋은 일을 한 스님이 마적단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고는 사이가 틀어진다. 와중에 사부는 정안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철두 일행은 몰래 스님의 복수를 하려 한다.


한편, 정안은 소령과 소령의 유모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사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향하는 복수의 길을 나선다. 정안은 아버지가 온몸에 문신을 한 비룡이라는 자객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자신은 사부가 간신히 탈출시켜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나선 소령이 하필 마적단에게 잡히고 정안은 소령을 구하려다가 오른팔이 잘리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흑두라는 아이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안, 정안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마적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우연히 발견한 무급 비서, 고수가 된 정안은 마적단을 물리치고 또다시 위험에 처한 소령도 구한다. 급기야 마적단은 비룡에게 외팔의 고수를 처단해줄 것을 의뢰한다. 드디어 복수의 길 그 끝에 다다른 정안, 과연 복수는 가능할까?


영화는 지금 보면 전형적이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스토리와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감 없는 정직한 전개와 캐릭터를 선보인다. 반면, 그 모든 걸 즉, 그 모든 단점을 일거에 잊어버리게 할 만한 액션을 선보인다. '리얼 액션'이라고 많이들 홍보하는데,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리얼 액션이 아닌가 싶다. 


<서극의 칼>의 액션, 날 것의 액션


이 영화가 자랑하는 액션은 다름 아닌 '날 것'의 액션, 현존 영화들이 따라하기 힘들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액션 기술은 나날이 진보해 이젠 왠만한 리얼 액션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대역 없이 위험천만한 액션을 맨몸으로 구사하는 맨몸액션은 일찍이 성룡이 정점을 찍었고, 타격감이 훌륭한 와중에 서로간의 완벽한 합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기술액션 또한 일찍이 <본 시리즈>가 정점을 찍었다. 그렇다면 이 <서극의 칼>의 액션은 무엇인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날것의 액션'이라고 해야 할까. 무협 액션이 가지는, 가질 수밖에 없는 '판타지'적인 모습을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거기엔 장풍가 오가고, 허공을 걷고, 소리보다 빠른 칼의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 영화엔 오로지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날것'에는 비단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나 외팔이 된 정안이, 아버지가 남긴 반쪽짜리 칼에, 타다만 반쪽짜리 비서로, 더 이상 복수의 의미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싸움들을 헤쳐나가기 때문이다. 거기엔 날것의 액션 이전에 날것의 삶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나락으로 추락했다가 우연히 얻은 비서로 절정고수가 되어 나타난 영웅 정안의 뜻밖의 전혀 영웅 같지 않은 모습은, 서극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엔 삶을 오롯이 감당하는 있는 그대로의 육체와 그에 걸맞는 둔탁한 폭력과 판타지와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이 있는 것이다. 


<와호장룡>와 극점을 이루는 '아름다운' 무협


가장 아름다운 무협 영화라 할 수 있는 <와호장룡>, 그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무협 영화는 단연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라 생각한다. 무협이 이리도 섬세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는가. 어찌 그 어떤 영화보다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가. <와호장룡>은 완벽한 와이어 액션과 기술 액션을 자랑한다. 거기에 감각적이라느니 비주얼적이라느니 하는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서극의 칼>은 이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무협을 탄생시켰다. 거기에 온갖 수식어를 붙여도 여한이 남는다. 스타일리시하고 비주얼리시하고 화려하면서도 날것이고 거칠면서 역동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현란하게 정신 없다. 한마디로 정해진 합이나 정교한 양식 없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것이다. 


오래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이 영화의 액션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 같다. <와호장룡>이 그 자체로 완벽을 자랑하며 더 이상의 후계자 없이 고고히 하늘 위에 존재하는 느낌이라면, <서극의 칼>은 그 자신 또한 개척의 주자였던 만큼 많은 여지를 남기면서 수많은 후계자와 추종자를 만든 느낌이다.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액션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가 보여준 액션의 한 단면이 그 끝에 있을 게 분명하다. 결국 영화가 추구하는 건, 진짜 영화다운 것과 진짜 현실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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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전성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거장으로 가는 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스타일은 명확하다. 기본적으로 정적이고 건조하며 느릿느릿하다. 김훈 소설가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문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서 조망하다가도 급격히 치고 들어가 깊숙히 찌른다. 정적이면서 느릿한 전개는 어느 순간 숨도 못쉬게 내달리는 전개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건조함은 피비릿내에 자리를 내준다.


거의 매년 장편을 내놓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성기는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이미 더 없이 좋은 작품들을 내놨고 흥행감독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영화의 참맛을 알아가는 건 축복이 아닐까. 


그의 2015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그의 연출작들 중에서도 특히 빼어나다. 드니 빌뇌브의 스타일을 모두 구현해내면서도 완벽하리만치 표현해냈다. 적어도 해당 장르에서는 역대 최고급 퀄리티를 자랑하고, 영하를 본 사람이라면 찬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으며, 영화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빈틈없이 배치했기에 교과서라 불러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치밀하게 그려낸 치열한 심리전쟁


세 주인공이 각각의 목적과 목표를 시카리오에 모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애리조나에서 있었던 아동납치살인사건 수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린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멕시코 카르텔 소탕작전의 일원으로 차출된다. 그녀가 성과를 올린 사건의 실상이 카르텔에 의한 거대 범죄였던 것. 그녀가 속한 팀을 이끄는 이는 CIA 소속의 맷(조슈 브롤린 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또 하나의 인물인 멕시코 검사 출신이라는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분).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 후아레즈로, 일명 암살자의 도시로 불린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최악의 카르텔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맷과 알레한드로는 잘 알고 있는 반면 케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이 도시 자체인 것 같다. 민간인들 눈앞에서 카르텔이라 의심되는 이들을 무차별로 죽여버리는... 그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두들...


케이트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충격은 곧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곧 스스로의 무력감과 순진함에 대한 체념으로 바뀐다. 그들 앞에는, 그녀 앞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어떤 예측도 쉬이 할 수 없다. 


영화는 범죄 스릴러를 기본으로, 세 주인공 간의 치열한 심리 전쟁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범죄 장르에 어울리는 액션과 더불어 피와 살이 난무하는 모습도 물론 볼 수 있지만, 영화가 스릴러 장르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가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우린 세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인 그곳


거기엔 선악 따위, 이상과 현실 따위의 구분은 없다. 오로지 이익 추구만 있을 뿐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의도적으로 줌아웃과 줌인을 교차하는 듯하다. 암살자의 도시 후아레즈를 비롯 선과 법과 윤리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을 멀리서 조망하며, 개인과 조직을 위해 그곳의 생리를 이용하는 이들의 행동거지와 모양새롤 밀착해 보여주려 한다. 단순히 촬영 기술적인 줌아웃과 줌인이 아닌, 영화 전체에 스며든 이야기며 분위기를 뜻한다. 


케이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상주의자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있는 이곳에서 법을 지키며 작전을 수행하려는 그녀는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선악 개념은 모호하다. 악의 행동이 분명한 카르텔을 섬멸하고자 그들이 벌이는 짓들은 선보다 악에 가깝다. 최소한 의도는 선하되 행동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고민이 깊어진다.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지. 특히 평범한 가정을 둔 어느 멕시코 경찰의 끝을 목격한다면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선한 의도와 악한 행동이 만나 빚은 결말이 선하게 끝나는지 악하게 끝나는지, 아니 애초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한 건지. 


거기엔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이다. 법 따위는 당연히 없고, 선과 악의 개념 따위도 없으며, 옳고 그름의 기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 케이트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었고, 차라리 그곳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게 나았으며, 그곳은 여전히 그곳이었다. 그들은 언제고 그곳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것이었다. 과연 '암살자'는 누구인가.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은 영화


영화는 각본, 연출, 촬영, 음악, 사건, 인물 등 모든 면에서 교과서적인 풍모를 풍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앞서 말했듯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다. 현존 최고의 각본가이자 연출에도 일가견을 보인 테일러 셰리던의 정석적인 각본, 오로지 영화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인 연출, 개개인이 따로 빛나면서도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캐릭터들, '이게 바로 영화음악이다'라고 할 만한 음악까지. 무엇보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 이 도시가 압권이다. 


숨막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건, 영화 속 사건들 때문이지 드니 빌뇌브의 숨막히기만 하는 연출 때문은 아니다. 그는 줌아웃과 줌인을 자유자재로 교차하듯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평화 속에 전쟁이 있고, 정적 속에 동적이 있으며, 무표정 속에 수많은 곡절들이 숨겨져 있다. 


드니 뵐뇌브와 테일러 셰리던의 연출과 각본의 앞날을 기대한다. 그들의 뛰어나고 빼어난 영화적 능력만이 아닌, 독창적 시선 속에 내포된 다채로운 비판의식과 소외를 향한 따뜻함 말이다. 소외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다채로우니 기대의 수치는 더 높을 수밖에. 


마지막 장면, 그 무법지대에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이 씁쓸하다. 결국 그들이 이용한 그곳의 정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전쟁, 그 진정한 피해자는 민간인들이 아닌가.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 또한 그 부분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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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감독의 본격적 상업영화 진출작 <공동경비구역 JSA>, 21세기 시작을 알리는 한국영화의 명작이다. ⓒCJ엔터테인먼트



지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굳게 악수를 나누며 남북은 극적인 화해 모드로 돌입한다. 이른바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때마침 나왔던 박찬욱 감독의 3번째 장편 <공동경비구역 JSA>는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로 명성을 떨쳤다. 박찬욱 감독은 비로소 상업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고 남북간 화해모드가 조성된다. 특히 후자의 영향으로 1999년 <쉬리> <간첩 리철진> 등의 상업영화가 만들어져 대대적인 인기를 끈다. <쉬리>의 경우 한국영화 흥행 기준을 바꾼 영화이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나온 <공동경비구역 JSA>는 명작+상업+시대적 관심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최초의 한국영화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후 적어도 상업영화에서 보여주는 박찬욱 스타일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2년 뒤에 나온 <복수는 나의 것>으로의 외도(?)를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 중에 가장 재밌지만 은근 어려워서 가장 많이 보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쉽게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힘든 국면이다.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북한과 남한의 엇갈리는 진술, 과연 진실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CJ엔터테인먼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한군 초소에서 총성이 울린다. 살인사건이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이영애 분)를 책임수사관으로 파견한다. 소피는 한국군 당사자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북한군 당사자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를 만나 당시 사건의 정황을 묻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술은 다르다. 


북한은 남한 측의 북한군 초소 기습공격으로, 남한은 북한 측에 의한 남한군 납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북한군 초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건 사실, 사건 후 그곳에는 북한 초소병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가 총알 8방을 맞고 죽어 있었고, 그 옆에 북한 상위가 죽어 있었다. 한편, 오경필은 오른쪽 팔에, 이수혁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피가 보기에 뭔가 의심쩍은 상황, 소피는 사건 당시 북한군 초소에 제5의 인물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이수혁의 후임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을 추궁한다. 그 와중에 남성식이 투신하고, 사건은 점점 진실에 다가간다. 그때 그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사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영화가 초반을 넘기면서 보여주는 진실은, 당시 당사자들이 한없이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 하는 것에 비해 지나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씁쓸하다. 분단된 현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역사와 시대의 무게를 한낱 개인이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안타깝고 안타깝고 안타깝다. 


선과 경계, 그리고 금기 깨기


북한과 남한, 절대적인 선과 경계가 존재한다. 영화는 그것들을 넘어 금기 깨기를 서슴치 않는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선과 경계를 넘어 금기 깨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수혁이 일행과 떨어져 북한 땅에서 지뢰를 밟았을 때 나타난 오경필과 정우진, 오경필이 이수혁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에서 이미 금기는 깨진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그들의 우정은 오히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안보'라고 하면 거의 100% 대북 정책의 기조 아래 있는 것이다. 여기엔 절대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명확한 선과 경계만 있을 뿐, '중립'이 들어설 자리에 어디 있겠나 싶다. 영화에서 소피는 그 자신이 남과 북을 드나들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넘어야 할 당사자는 중립 따위가 아니다. 경계 밖에 있는 이가 아니란 말이다. 경계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이야말로 경계를 넘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시대와 완벽히 조우했고, 시대의 한계를 완벽히 그려냈으며,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다시 바라보았고 예견했다. 


반공의 남한, 반미의 북한, 그리고 제3지대. 영화는 세 입장을 대변하는 최고위층의 경계를 지키려는 속셈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흘려내는 반면,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려는 지극한 개인을 대놓고 긍정적으로 그려내며, 금기 깨기를 시도하지만 영화 이후까지 보여주려 했기에 실패하고 만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를 지향했다면 충분히 금기 깨기를 완성시켰을 테지만, 이미 사건의 진실로 판타지는 완성되었다. 


남과 북의 '연결', 그 해석의 의미


영화에는 '연결'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이 나온다. 그건 북한과 남한의 '같음'으로 어이질 수 있지 않을까.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소소하고 소품, 꼼꼼한 조작 등으로 핵심 주제를 때론 비틀어 때론 정면으로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후에도 즐겨하는 미장셴이 주를 이루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확함을 그 기조로 한다고 하겠다. 그것들이 품은 의미를 찾는 것도 한 재미이거니와, 그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유의미한 스트레스도 존재한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같은 장소에서 행해졌다든지, 소피가 사진에서 숨기려고 했던 아버지의 존재와 남성식이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을 때 감추고자 했던 김일성과 김정일 존재의 일치성이라든지, 근무를 서는 와중에 이수혁에게 그림자도 넘지 마라고 하는 오경필과 오밤중에 처음으로 선을 넘으려는 남성식에게 어서 오라고 말하는 이수혁의 역설 등이 그렇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장면장면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은 모두 남과 북의 '다름'이 아닌 남과 북의 '같음'을, 또는 남과 북이 다르다고 해도 최소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해석과 시각과 생각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그 참혹하고 치가 떨리는 전쟁을 겪었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그런 생각을 해야 하고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하고 그런 해석을 해야 한다.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 대치는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보험 같은 게 아닌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대치를 하는 게 아닌가. 영화에서 보여준 파라다이스이자 유토피아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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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래리 플린트>


미국의 대표적 포르노 잡지 창간인이자 발행인 '래리 플린트'의 투쟁을 담은 영화 <래리 플린트>. ⓒ소니픽처스



1950년대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보낸 래리 플린트(우디 해럴슨 분)와 지미 플린트 형제, 정직하게 돈을 벌 거라는 그들의 다짐은 20년 후 실현된다. 래리는 스트립바 허슬러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곧잘 되는 것 같지만 손님들이 따분해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 날, 앳된 신참내기가 다른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섹시미를 풍기며 래리의 눈에 띈다. 그녀는 엘시아(코트니 러브 분), 래리는 그녀의 나체사진을 이용해 화끈한 홍보물을 만든다. 그의 생각은 적중,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급기야 '플레이보이'를 능가하는 포르노잡지 '허슬러' 월간지를 창간해 전국적 홍보를 시작한다. 


'허슬러'는 그의 기나긴 투쟁, 대박으로 가는 길,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그는 '음란물 간행 및 배포죄'로 체포되어 수많은 재판을 받고, 단숨에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 어릴 적 꿈을 이루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를 최우선에 놓고 외쳐 결국 승리를 따내 시대정신 그 자체가 되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삶의 지론에 반하는 평생 베필 엘시아와 그가 발행하는 허슬러 잡지는 싫어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에는 모든 걸 걸고 찬성하는 변호사 앨런 아이삭맨(에드워드 노튼 분)이 있었다. 독특하기 짝이 없는 래리 플린트의 삶, 그는 여전한 기행으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거장 감독의 지루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거장 감독 '밀로스 포만'은 기구한 인물의 삶을 조명해왔다. <래리 플린트>도 그 일환, 지루하지 않은 다큐멘터리다. ⓒ소니픽처스



영화 <래리 플린트>는 1996년 작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즉, 당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말인데, 이 작품을 연출한 이는 다름 아닌 '밀로스 포만'으로 그 유명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를 만든 거장이다. 그의 명작들은 하나 같이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래리 플린트>는 분명 다분히 다큐멘터리적이다. '허슬러' 창간인 래리 플린트의 한 시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여전히 재단하기 쉽지 않은 '표현의 자유' 논쟁 한 가운데에 놓는다. 하지만 우린 래리 플린트만 따라가면 되기에, 아니 그가 가진 파워풀한 에너지에 끌려갈 수밖에 없기에 지루함이나 어려움, 부담감은 없다시피하다. 


더불어, 래리 플린트의 삶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맥머피,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처럼 기구하거니와 동정 혹은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그는 분명 많은 이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부를 쌓은 역겨운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표상과도 같지만, 어느 극렬보수주의자의 총탄에 의해 하반신 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더더욱 극렬하게, 신념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반보수 깃발을 들고 투쟁에 들어간다. 그의 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막대한 부가 버티고 있었다. 그 다음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수정헌법 1조와 진보가 있었다. 영화가 극적인 건 바로 그가 가진 부와 그로 대변되는 진보의 알쏭달쏭하고 간당간당한 동침이다. 


지극히 논쟁적인 주제, 표현의 자유


누구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논쟁적 주제, 표현의 자유. 이 영화가 정면으로 다루는 주제다. ⓒ소니픽처스



표현의 자유, 지극히 논쟁적인 주제이고 함부로 재단하기 힘든 주제이며 조금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고 깊숙이 생각할수록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에, 이 영화는, 이 래리 플린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며 그 어떤 권리보다 우선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 의견이 터무니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말도 안 되는 악의적 모함이라도 가능하다. 심지어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라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 논쟁의 첫 번째 핵심이 거기에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악의적 모함이 죄가 아닌가?


래리 플린트는 첫 번째 재판에서 승리한 후 어느 날 '허슬러'에 신망 받는 원리주의 기독교 목사 제리 포웰이 어린 시절 엄마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의 만화 광고를 실어 버린 것이다. 이는 가히 그 선정적임으로 부수를 늘리려는 전략과 함께 대놓고 보수와 한판 붙으려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포장을 정말 잘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짓을 당하고 '허허' 웃으며 지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100% 완벽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지 않는 입장으로, 표현의 정도를 따지고 최소한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진보의 제1원칙이라지만, 이 또한 자칫 원칙을 지키기 위한 원칙이라는 보수적 프레임이 아닐까?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래리 플린트


뭐니뭐니해도 래리 플린트라는 캐릭터에 호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니픽처스



그렇지만, 우리는 래리 플린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앞뒤 없고 경계 없는 트릭스터(trickster) 기질로 말미암은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들고 행동하기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일 텐데, 한 단계 더 들어간 논쟁에서의 호불호 또는 가불가를 떠나 그 자체로 '호(好)'임에 분명하다. 


그건 비단 래리 플린트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투쟁과 재판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의 예능 '쇼'를 지켜보듯 흥미롭게, 그러나 나와 이 사회, 이 나라와 큰 관련이 있는 만큼 응원도 하며 지켜보게 된다. 그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과 신념과는 별개로, 한 인간의 거대 다수를 상대하는 다부진 모습이 아닌가. 


그가 지극히 순수한 전사(戰士)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별이 아닌가 싶다. 그는 모든 걸 남김없이 드러내고 맞붙었지 않나. 반면 '댓글부대'를 운영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으로 허위를 유포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등 드러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표현의 자유'를 이용한 건 완벽한 범죄다. 


래리 플린트는 '잘 못'했다.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도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의 비상식적이고 막무가내, 안하무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는다. 하지만 그가 '잘못'한 건 아니다. 그는 '표현의 자유'라는 지극히 이치에 맞는 주장만 오로지 했을 뿐이다. 그가 허용한 범위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만, 자유라는 이름 하에 짓밟힐 수 있는 다양한 권리들의 총합이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선 또 다른 견해와 사례, 논쟁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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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최동훈 감독의 <타짜>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는 다른 스타일로 한국 영화를 할리우드에 가깝게 한 최동훈 감독의 정점 <타짜>. ⓒCJ엔터테인먼트



2004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스타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최동훈 감독. 데뷔 13년이 된 현재까지 불과 5편의 작품밖에 내놓지 않았지만 단 한 편도 흥행에서 고배를 마시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 내놓은 두 편 <도둑들>과 <암살>이 1000만 명을 넘으며 윤제균 감독과 더불어 현재까지 유이한 2편의 1000만 이상 관객 동원 감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홈런왕과 장타율 1위의 최강 거포다. 


그 흥행 이상 가는, 아니 버금 가는 작품들이었을까?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이 던진 웰메이드 충격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세련'된 영화라는 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감히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과는 다른 스타일로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에 가까워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한국영화 흥행에 새역사를 쓴 최근 두 작품이 그의 역량을 가장 집약시켰음에도 오히려 그의 역량이 퇴보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한다. '최동훈 스타일'은 확립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각인되었지만, 사실 데뷔작과 두 번째 작품인 <타짜>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에 진정 긍정적 진보가 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최동훈의 인생작이자 정점은 <타짜>이다. 


타짜 인생


도박판에서 모든 걸 잃고 나서 타짜로의 길에 들어선 고니. 그에게 타짜 인생은 무엇인가. ⓒCJ엔터테인먼트



허영만·김세영 원작, 전설의 만화 <타짜>의 존재에 최동훈 감독이 직접 각본까지 진행해 안 봐도 100% 충만한 기대감이 용솟음친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그런저런 인생을 살아가는 고니(조승우 분)는 우연히 공장 한 편에 차려진 도박판에 낀다. 3년 모은 돈을 한 번에 날리고도 모자라 누나의 이혼 위자료도 모두 날려먹는다. 뒤늦게 모두 타짜들의 짜고 친 판이었다는 걸 알고 그 일행을 찾아 전국을 헤맨다. 


더이상 잃을 게 없는 고니, 어느 도박판에서 모든 걸 잃고 여지 없이 깽판을 치고 있던 와중 전국 최고의 타짜 평경장(백윤식 분) 눈에 띈다. 고니는 득달같이 달려가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하고 타짜로의 길에 들어선다. 지방원정 중 알게된 설계자 정마담(김혜수 분), 그녀에게로 향하는 욕망과 그녀가 내뿜는 욕망에 끌려 평경장을 떠나 그녀와 함께 하게 된 고니다. 잘나가는 그들, 하지만 경찰의 단속을 피할 순 없다. 


이번에는 경찰 단속을 피하던 와중 만나게 된 소시민적 타짜 고광렬(유해진 분)과 파트너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는 고니,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게 된 화란과 안정적인 삶을 꿈꾸지만 정마담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정마담 뿐이랴? 그를 도박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일당, 평경장, 정마담, 고광렬 등과 얽히고 설킨 모든 이들이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이 타짜 인생은 무엇인가. 


순간의 욕망


타짜에게 있어 '순간의 욕망'은 모든 것이다. ⓒCJ엔터테인먼트



총 4부로 구성된 만화 <타짜>의 1부인 '지리산 작두'를 영화화한 영화 <타짜>는, 만화와 같이 주인공 고니의 타짜인생을 그렸다. 정확히는 고니가 타짜의 길로 들어선 후 그의 타짜인생 1막 정도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에서 고니의 타짜인생은 곧 '욕망'이다. 


도박의 길에 한 번 들어서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말, 몸소 겪어봐서 잘 알고 있다. 외국에서 1년 여 살았을 때 일이 끝나면 카지노에 매일 '출근해' 블랙잭을 했다. 매일 지니고 가는 돈은 지금 생각해도 매우 큰 10만 원. 10만 원을 따던지 10만 원을 잃던지. 그러던 중 하던 일을 떼려친 직후인 연말, 하루밤새 100만 원을 잃는다. 수중에 돈이 없는 상황,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위기에 겨우 다시 일을 잡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일을 잡고 돈이 조금씩 생기니 다시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마음잡고 철저한 자기관리 하에 '투 잡'으로서의 블랙잭을 다시 시작하지만, 잘 될 턱이 있나. 고니가 계속해서 파트너를 바꿔 가면서까지 전국 도박판을 유랑하는 이유가 뭔가. 누나에 대한 미안함? 돈을 향한 소유욕? 스승님의 복수? 사랑? 우정? 이 모든 게 조금씩은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 '순간'이다. 수많은 종류와 이유의 욕망이 들끓는 도박판에 자리하고 있는 그 순간 말이다. 승리의 짜릿함과 황홀감, 패배의 쓰라림과 무력감, 그 모든 걸 넘어선 도박판의 흥분. 도박판이야말로 내가 진정 나일 수 있는 유일한 자리라는 느낌과 믿음의 발로다. <타짜>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즉 페이소스를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의 향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놓았다.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


최동훈 감독의 스타일,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한다. 그 최후의 목적은 '재미'가 아닐까. ⓒCJ엔터테인먼트



<타짜>를 보고 가장 와닿는 건 페이소스 이전의 서사와 이야기와 캐릭터의 향연이다. 서사와 이야기는 고니의 타짜인생역전으로 완성된다. 계속되는 우연의 연속으로 다른 파트너와 다른 인생을 사는 듯하지만, 또 다른 필연의 연속으로 이전의 파트너를 만나고 이전의 파트너와 관련된 이를 만나 내려가고 올라가는 일을 반복한다. 


천부적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최동훈 감독의 이야기는 보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마음 놓고 즐기되, 기본 이상의 질적 양적 퀄리티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다. 그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건, 최동훈 스타일의 기반이 되는 캐릭터와 대사에 있다. 


최동훈 감독 작품들이 꽉 차 있다고 느끼는 건 기본적으로 캐릭터들의 빈틈없는 생각과 행동과 대사에 있다. 상당한 숫자의 주연급 조연들이 출연해 각자의 개성을 최대치로 발휘하며 하나같이 영화 스토리라인에 주요하게 기여하는데, 그래서 시종일관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캐릭터에도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타짜>는 최동훈 감독의 그런 감각과 역량이 최대한으로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영화라 하겠다. 몇 번을 봐도 새로운 게 보이고, 몇 번을 봐도 뒤가 궁금해지고, 몇 번을 봐도 끝나는 게 아쉬운 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에게서 '스티븐 킹'의 향기가 스멀스멀 나는 건, <타짜>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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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우아한 세계>


조폭의 발견, 느와르의 발견. 만드는 작품마다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고루 성적을 내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롯데엔터테인먼트



2000년대 두 편, 2010년대 두 편만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이지만 흥행과 비평 어느 한 면에서 두루 두각을 내고 있는 한재림 감독. 공교롭게도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으로 비슷한 느낌, 지향하는 바가 같은 두 편을 두 번 선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2020년대 가서야 또 다른 느낌과 성향의 차기작을 내놓지 않을까 싶다. 


그의 데뷔작 <연애의 목적>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센세이션 했다. 연애란 게 이런 거였나 또는 연애에 이런 모습도 있었나. 2000년대 들어와 연애를 새롭게 발견한 느낌일까. 그야말로 '연애'의 발견이다. 이어 내놓은 <우아한 세계>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조폭이란 게 이런 건가. 


조폭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느와르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평범한 가장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각본까지 함께한 한재림 감독의 발견인 건 확실하고,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송강호의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도무지 목격할 수 없는 '우아한 세계'의 발견은 언제쯤 이뤄질까?


평범한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특별한 조폭의 삶


'특별한' 조폭이 어찌 '평범한' 일반인과 같을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본질이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서울 강남에서 활동하는 들깨파 중간보스 강인구(송강호 분), 20년 짬밥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 졸음운전까지 해가며 열일 중이다. 그가 하는 일이야, 여기저기 중요 거점들 관리하고 등쳐먹을 인간들한테서 어떻게든 계약서 지장 찍는 일 정도. 집에서는 여느 가장들처럼 아내와 자식들에게 등돌림을 당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좋은 곳에 위치한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 하나뿐이다. 


그야말로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미래의 우아한 세계를 꿈꾸고 있는 이 나라의 흔하고 평범한 가장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특별하다. 특별히 조폭 세계에 몸을 담고 있다. 평범함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세계에서의 직업이다. 그러니 그에게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특별할 게 없다. 길을 걷다가 칼 맞고 쓰러져 그대로 죽어도 말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게, 먹고 살고자 하는 목적이지만 누군가에게 물적, 심적으로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가장 큰 대상은 경쟁하는 조직일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가장 큰 적이 내부에 있는 경우도 많다. 우리 강인구 씨가 내부경쟁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조직폭력배 조직 중간보스 강인구가 사는 세계가 '특별'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평범하다는 우리네 생활, 사회생활과 그의 생활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지 찾기 힘들다. 다분히 조폭의 발견인 동시에, 그에 심히 접점이 있는 일반인의 발견이기도 하다. 특별한 줄 알았던 조폭이 알고보니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는 것보다, 우리네가 조폭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는 게 충격적이지 않는가. 


조폭도 피해갈 수 없는 먹고사니즘, 오직 송강호


어느 누구도, 아니 왠만한 사람이라면 평범하든 특별하든 피해갈 수 없다. '먹고사니즘' ⓒ롯데엔터테인먼트



조폭이라고 '먹고사니즘'을 피해갈 순 없다. 조폭 중간보스에, 벤츠 S클래스를 끌고 다녀도, 오래된 전세 아파트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좋은 환경의 전원주택에서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모든 걸 버리고 '먹고사니즘'을 최우선에 둘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 조폭이고 뭐고 다 평등해진다. 


조폭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무서움의 대상, 누군가에게는 그저 영화에게나 등장할 법한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영화에서 조폭은 그런 추상적인 객체, 우아한 세계의 존재, 아름다운 일의 대상이 아니라 직접적인 주체, 억척스러운 세계의 존재, 추하기 짝이 없는 일의 대상이다. 


송강호가 맡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송강호밖에 맡을 배우가 없지 않나 싶다. <넘버3>에서 소규모 조폭의 두목을, <반칙왕>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을, <효자동 이발사>에서 소박한 아버지를, <괴물>에서 사투를 벌이는 가족의 한 일원을 맡아 완벽히 소화해낸 송강호의 다층적인 면모를 <우아한 세계>에서 발휘한 것이다. 


강인구는 일을 잘 해냈다. 항상 우여곡절이 있지만 회장님에게 유일하게 믿을 만한 부하가 강인구뿐이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내부에 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수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적 때문에 심히 괴로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서 오는 감정의 흔들림, 생존이 걸린 소시민적 흔들림을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도 송강호뿐이다. 


이제는 일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인간


이제는 '일'에게 인간이 굽신굽신 거려야 한다. 그 시작은 2008년 세계 금융 대위기가 아니었을까. 2006~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걸 예언한 것일까. ⓒ롯데엔터테인먼트



1시간 50분짜리 영화는 1시간 30분쯤에서 사실 일단락을 맺는다. 하지만, '일'이라는 게 뭔지, 평생 그 일밖에 해보지 않았으니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떠나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마지막 20분은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일이 나쁜 쪽으로 특별한 일이지만 막대한 부를 주고, 그래서 가족들을 훌륭히 부양하게 해주지만 정작 가족들은 싫어하고, 가장은 외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일이고, 자신이 선택한 가족의 화목이고,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른 외로움이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이제 특별함과 평범함, 우아함과 억척스러움,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는 무의미하며 구분도 필요없다. 모든 사람들은 일의 주체가 아닌 일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에서 2006~7년 만들어진 당시 일종의 예언을 했거나 또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해냈다고 할 수 있다. 곧 찾아올 세계적인 경제 위기, 그 후에 지속될 일에의 노예화와 먹고사니즘의 광범위화를 말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고 말이다. 우리나라에게는 10년 만에 또다시 찾아온 재앙이었다. 


이제는 '일'이라는 놈에게 가서 굽신거려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점점 없어질 테고, 성장은 점점 멈출 거다. 전방위적인 고착화를 향해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익숙한 일을 바꾸는 건 당장 죽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 그 어떤 바람, 질타, 후회도 막아서지 못할 생존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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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와일드>


괜찮은 감독 장 마크 발레와 괜찮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의 만남, <와일드>. ⓒ이십세기폭스코리아



PCT, 일명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는 게 있다.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로,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약 4300km에 이르는 도보여행코스다. 말이 여행이지 매순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절망과 좌절과 다름 아니다. 꿈에서나 가능한 도전과 영광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그 절망과 좌절의 길에서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건져올리고자 하는 이가 있다. 20대 이른 나이에 밑바닥 인생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여인 셰릴 스트레이드, 홀로 대장정의 길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경험은 논픽션 책으로 나와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 마크 발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영화 <와일드>. 


장 마크 발레는 흥행보단 비평에 강한 감독이다. 1995년에 장편영화 데뷔 이후 현재까지 총 8편의 장편을 연출했는데, 2013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후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와일드> <데몰리션>까지 선보였다. 모두 수준급 이상의 '괜찮은' 영화들이다. 그중 <와일드>는 그의 스타일리시함은 최대한 배제한 반면 섬세함은 극도로 끌어올린 듯하다. 그의 필모 중 가장 무난하게 괜찮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모든 걸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 셰릴이 장장 4300km의 PCT를 완하려 한다. 그 끝엔 무엇이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은 족히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울 것 같은 배낭을 지고 당당히 홀로 태평양 연안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에 도전한다. 시작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응당 어떤 큰 일을 겪지 않은 이상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일, 셰릴에게 일어났었을 일들이 궁금해진다. 


그동안 그녀의 짧은 삶에 행해진 일들을 단순히 몇몇 말의 나열로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과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점철된 불우한 어린시절, 모든 것이나 다름 없던 엄마의 죽음과 해체되는 가족, 섹스와 마약으로 잃어버린 사랑과 그로 인한 이혼까지. 


고난과 환희가 엇갈리는 길 위에서 셰릴은 그동안의 삶이 주는 끝없는 고통들을 다시금 맛본다. 그녀로서는 떨쳐버리려 왔는지, 되새기려 왔는지, 깊이 새기려 왔는지, 정면으로 들여다보려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도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그 길 위에서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끝에 도달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다. '고작' 폭염과 폭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단숨에 쓸려갈 것 같은 강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과 동물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것들을 더한 것들을 겪어 왔고 겪고 있고 겪을 그녀이기 때문에.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도전의 끝이 아닌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


이 무지막지한 도전은 끝을 보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엇' 이상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행군'이라는 걸 몸소 겪어봤을 것이다. 30~40kg에 육박하는 군장을 짊어지고 밤새 30~40km 이상의 길을 주파하는 훈련으로, 보통 4박 5일에 걸친 '대훈련'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곤 한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우애를 기르며, 체력을 단련하고... 


이처럼 '심신(心身) 단련'에 탁월하다는 행군, PCT는 약 4300km로 일반적인 행군을 100일 이상 매일 행해야 한다. 행군의 목적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과 인생을 건 도전이라 할 만하다. 그 끝에 다다르면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했는데 무엇인들 못하랴'와 같은 자신감 폭발과 동기 부여 등. 


하지만 영화는 그 도전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처참할 정도로 힘든 과정과 그 가운데에서도 처참의 끝에 받는 도움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얻을 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끝이 아닌 그 도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 도중에 깨닫는 건 너무도 힘들지만, 그 끝에서라도 깨닫는 게 중요하겠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셰릴이 얘기하는 건, 비록 무지막지한 육체적 고통일지라도 우린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라는 걸, 정신적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거니와 우리를 단련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함을, 그녀의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의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사실 둘 다일지 모른다. 


새겨볼 만한 인생의 여정, 삶의 단면


그럼에도 이 도전은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은 아마 이 무지막지한 행군을 통해, 그 '환상적인' 고통의 지속을 통해, 그동안의 삶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테다. 힘든 여행이든 차분한 여행이든, 우린 여행을 통해 힘든 지난날에서 희망의 앞날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계속해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반추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고통을 겪는, 이중 고통을 통해 모든 고통을 완전히 뒤로 하려는 그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그리웠다. 그 고통의 시간 한가운데 있는 엄마가 한없이 그립다는 걸 깨닫는다. 즉, 다 받아들인 채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꾸역꾸역 몸무게보다 무겁게 넣어 짊어지고 온 배낭처럼. 


함부로, 그 길을 가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는 4300km의 길을. 함부로, 그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그렇지만, 그 두 길을 모두 가본 이가 말하는 건 다르지 않을까.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와일드>는 그 세심하고 진지한 연출 속에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한 인생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 여정에 동참해 많은 걸 얻진 못하더라도, 무엇이라도 얻고자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감동을 얻기 보다,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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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작품 <히어애프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단연 튀는 작품이 있다. <히어애프터>가 그 작품이다. 그의 연출 특징상 어떤 사건을 다루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SF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죽음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연출이라는 데 있다. 어떻게 비현실에서 현실을 끄집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가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것이리라. 


그의 필모에서 <설리>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랜 토리노> 등의 다분히 문제적이고 약간은 정치적인 성향의 작품 또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 등의 이야기 중심의 드라마가 아닌, <히어애프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빅터스> 등의 인생 감성을 노래하는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한다.


'죽음'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다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직면한 주인공들. 죽음은 분명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멀디 멀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마리(세실 드 프랑스 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 죽는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지를 헤맨 것이리라. 그곳에서 마리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흔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봤다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그 광경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조지(멧 데이먼 분)는 미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한다. 사실 그는 사후세계를 보고 느끼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영매로 전천후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는 삶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때문에 알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마커스는 영국에서 술중독자 편모 슬하에서 쌍둥이 형과 함께 생활한다. 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그를 대신해 심부름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믿기 힘든 일을 당한 마커스는 아직 형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형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는 거기 어딘가에 있는 형과 말하고 싶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셋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질문에 직면한다. 죽음에 다다랐던 사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나 눈앞에서 분신을 잃고 죽음 이후의 세계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을 대하는 게 힘들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건너기 힘든 강을 마주보고 있다. 


'죽음'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다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자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는, 그러나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세 주인공의 세 이야기는 사후, 즉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향하고 그곳에 다다르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삶'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다르기 힘들고 상상하기 힘든 '히어애프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건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 아우르는 삶의 확대를 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삶에서 죽음을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을 살아갈 순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워진 것일 테고, 한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이 순간에도 계속 죽어간다.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화의 세 주인공 또는 세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은근 수없이 들어왔을 테고, 죽어서 옆에 없는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테며, 살면서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잘 살고자 한다. 


영화가 '웰다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 하는 건 같지만, 죽음을 잘 대비하는 등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삶에 더 천착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만큼 삶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한편 소외된 사람들, 즉 죽음에 직면해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삶에서 죽음을 말하는 건 외롭고 고독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궁금하고 흥미롭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세 주인공은 하나같이 혼자다. 외롭고 고독해 죽음 이후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리와 조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고 능력이다. 그게 지금 이 세상의 한계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 것이다. 특별한 걸 특별한 연출이 아닌 담담한 연출로 다루어 일상에 편입시킨 뒤 소외의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만의 드라마 스타일이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소구점이다. 


이 영화로 삶을 다시 보았는가, 이 영화로 죽음을 다시 생각했는가, 이 영화로 사후 세계에 흥미가 생겼는가. 모두 그랬을지도, 모두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각의 전환, 시각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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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스타일의 모든 것을 보여준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CJ 엔터테인먼트

 


자타공인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 박찬욱.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국내를, 2003년 <올드보이>로 해외를 접수하면서 지금의 박찬욱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은 미약하였다. 자그마치 25년 전인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들어본 적 없는 데뷔작과 1997년 <3인조>라는 작품 모두 실패하며 암흑의 초창기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2002년의 <복수는 나의 것>이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데뷔 10여 년만에 입지를 다진 후 그 여세를 몰아 자신만의 색깔을 오롯이 입힌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다. 박찬욱 영화를 지켜봐았던 사람이든, 박찬욱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든 단번에 '박찬욱 영화'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폭력, 하드보일드, 아이러니, 극단의 조화, 블랙코미디, 미장센...


박찬욱 영화들이 그렇듯 <복수는 나의 것> 또한 절대로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할 것이며, 보고 난 후에도 계속 괴롭힐 것이다. 물론 그 불편함들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뫼비우스의 띠. 그거 참... ⓒCJ 엔터테인먼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류(신하균 분)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임지은 분)가 있다. 누나는 반드시 신장을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인데, 혈액형이 다른 류는 신장을 이식하지 못한다. 조급한 마음에 천만 원을 가지고 아무도 몰래 장기밀매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는 대신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받기로 거래하는 류, 사기를 당한다. 


그때 병원에서 좋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찾았다는 것... 천만 원만 있으면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류의 여자친구 영미(배두나 분)는 일단 류를 쥐어패고는 일명 '착한 유괴'론을 설파하며 천만 원을 구할 방도를 제시한다. 잘나가는 사장님 자식을 납치해서는 잘 대해주고 딱 천만 원만 받으면 바로 아이를 돌려주는 것. 


류와 영미는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 분)의 딸 유선(한보배 분)을 타겟으로 삼는다. 그들 스스로가 약속한대로 유선을 마치 딸처럼 잘 보살핀다. 그리고는 곧 동진에게 협박편지를 보내 천만 원을 받아낸다. 하지만 당일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잇따른다. 자신 때문에 아이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류가 강가에 누나를 묻고 있는 사이에 함께 온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제 시작된다. 류와 동진의 한 맺힌 복수가. 아무 잘못도 없는 딸을 유괴해 죽음까지 이르게 한 류와 영미를 향한 피의 복수, 역시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천만 원과 신장을 갈취한 장기밀매업자를 향한 피의 복수, 그리고 조직에 속해 있는 영미를 죽인 동진을 향한 피의 복수까지. 그야말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이다.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는 이들에 남은 것, 복수


복수할 상황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쳤다. 그저 복수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다름 아닌 가족, 그것도 삶의 이유와 마찬가지인 가족의 죽음이 눈앞에 당도했다. 동진은 사실 잘나가는 사장님이 아니다. 일에만 몰두하다 이혼을 하고 아이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회사마저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을, 그래서 더욱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때 아이가 유괴당하고 죽기까지 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류는 힘든 것도 그렇게 힘든 게 없는 주물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하루 아침에 해고당한 처지다. 거기에 누나의 치료비로 모아두었던 유일한 천만 원을 사기 당했다. 나름 방책을 연구해 '착한 유괴'를 실행에 옮기고 성공을 눈앞에 뒀는데 누나가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잔인해도 이렇게 잔인한 복수가 없다. 눈이 찌뿌려지고 헉 소리가 나고 흠칫 놀란다. 우린 그동안 이보다 더 한 잔인함이 동반된 영화들을 무수히 많이 봐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이 영화가 복수에 초점을 맞췄기로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행위가 눈에 띄는 건 행위의 연유와 사연의 처연함과 서늘함에 있겠다. 그들은 복수할 이유는 있었지만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외적 하이라이트는 류와 동진의 복수에 있지만, 주요 쟁점은 동진의 천만 원을 갈취하고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동진의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그때에 있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곳은 영화의 초반에 있는 것이다. 물론 류와 동진의 복수에서 연유하는 '악'의 개념도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앞의 생각 지점보다 뒤의 생각 지점, 즉 악의 개념 또는 인간의 본성에 더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복수의 잔인함보다 초첨을 맞춰야 하는 곳


이 영화의 복수는 지극히 잔인하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복수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CJ 엔터테인먼트



두 주요 지점이 사실 진부한 논의가 발화되는 곳이기는 하다. 류와 동진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이 사회에 있다는 것. 밑바닥의 소외계층과 망한 상류층 간의 대결 구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하필 그들끼리 서로 싸우게 된 것인가.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의 능력 또는 운명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능력론과 운명론. 영화에서 장기밀매업자의 사기 행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비롯 많은 '만약에'들에 안타까움을 표할 수밖에 없는데, 일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누가 해야만 할까. 


일련의 행위 원인을 들여다보았다면, 일련의 행위 결과를 들여다볼 차례다. 물론 영화에 나온 두 캐릭터들로만 일반화시킬 순 절대 없겠지만, 작은 표본을 도출할 순 있을 것이다. 이들의 행위 자체는 아무리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고 남은 삶을 포기해버렸기로서니 분명 악마적이다. 직접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으니 더욱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악마'의 타이틀을 붙일 순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안나 하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대입할 수 있을까. 거기에 어떤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었던 만큼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맞는 면이 있겠다. 


그들은 내재된 악마의 목소리를 따랐다기보다, 상황이 던진 복수의 목소리를 따랐다. 즉, 누구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짓을 행할 수 있는 요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행했다는 것처럼, 그들도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복수의 임무를 충실히 아니, 어쩔 수 없이 행했다. "너 착한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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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


여러 수작 단편을 쏟아내고는 멋진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들고온 윤가은 감독이다. ⓒ엣나인필름



두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해 함께 하고 싶은 한 명씩을 데려와 편을 가르는 방법을 택한 어느 체육 시간 피구 게임, 선이는 어느 쪽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최후의 일인이 되었다. 왕따는 아닌 듯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외톨이인 듯하다. 키도 크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보라는 그런 선이를 이용해 먹기도 한다. 


보라의 부탁으로 방학식 날에 홀로 남아 반 전체를 청소하는 선이, 전학을 왔다는 지아를 우연히 마주친다. 보라의 치졸한 속임수 때문에 다리 위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선이, 다리를 지나던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금새 친해지고 선이는 보라를 주려던 수제팔찌를 지아에게 준다. 둘은 생애 다시 없을 것만 같은 방학 한때를 보낸다. 


지아의 부모님은 지아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이혼을 하셨다. 그 때문인지 선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살가운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본 후 왠지 모를 적대감이 생기는 지아다. 그래도 그건 금새 풀었다. 하지만 지아가 영어학원을 다니고,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보라가 있었고, 개학을 하며 지아가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되며, 선이와 지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진다. 지아는 선이를 본 척도 않고 보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후 선이와 지아와 보라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계속되는데...


어른들이 무시했던, 아이들의 무시무시한 세상


누구나 지나왔을 어린 시절, 여러모로 '무시무시'했던 그때를 어린이 되고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엣나인필름



2016년 최고의 수작 중 하나라 할 만한 영화 <우리들>. <손님> <콩나물> 등으로 단편영화계에 신기원을 이룩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독립예술영화계에선 거물로 통할 만한 '엣나인필름'이 배급을 맡아 온전한 '독립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대신 '예술영화'로 포지션하여 다양성영화의 훌륭한 계류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윤 감독은 앞선 두 대표 단편에서 어른이 되기 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우리들>로 그 재능과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곤 한다.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본성을 지닌, 아직 이성적 존재 인간이 덜 된, 생각 따윈 없고 본능을 따를 뿐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찌들대로 찌들고 죄질대로 진 어른 세상의 해법이 무지의 순수한 아이들에게 있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치명적 관계 유착과 되물림, 권력에의 의지와 빌붙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어른들의 세상, 그중에서도 지독하기 그지 없는 막장 인간들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을 말이다. 차라리 어른들의 세상이 더 유치한 것 같은 이유는, 그만큼 아이들의 세상을 무시했다는 방증이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불러온다. 특히 영화에서 선이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안기는 선이의 남동생, 어리디어린 윤이는 너무나도 귀여워 '보는 맛'이 날 정도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시한 것처럼 선이는 자신보다 어린 윤이를 무시했다. 영화는 올려다보는 깨달음이 아닌 내려다보는 깨달음이라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 '관계'


영화 <우리들>의 첫 번째 주요 키워드는 '관계'다. ⓒ엣나인필름



'관계'라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평생을 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관계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바르지 못한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나마 괜찮은 관계가 무엇인지 모색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것이다. <우리들> 또한, 아니 <우리들>야말로 '관계'를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데, 지극히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과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크게 다가온다. 빈 곳 없이 잘 표현해낸 주인공 아이들의 노력 덕분이겠다. 


2011년 최고작 <파수꾼>이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관계에 대한 천착 때문이다. 다만 <파수꾼>이 '관계'가 주인공에 다름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관계에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필히 비극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파수꾼>, 반면 희극에의 희망이 있는 <우리들>. 개인적으로 손이 가는 영화는 앞엣것이다. 


생애 다시 없을 한때를 보낸 이들에게 파국이 찾아오는 건 한순간이고 그 이유도 하찮기 그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런데, 그러면 누구랑 노나? 친구가 가장 소중할 때에 말이다. 매일 가장 친한 친구랑 티격태격하며 자주 맞고 다니지만, 그 친구가 아니면 누구랑 노냐는 윤이의 말이 가슴 깊숙히 와 닿는다. 


문제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는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관계가 틀어짐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한 명이 자신을 굽히고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따위의 깨달음을 알 것 같진 않고, 아이들이 그런 깨달음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또 하나의 키워드 '권력'


영화 <우리들>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는 '권력'이다. ⓒ엣나인필름



'관계'와 함께 <우리들>의 중요한 키워드는 '권력'이겠다. 관계가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거라면, 권력은 보라를 중심으로 역시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것이겠다. 앞서 주지했듯 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가진 아이다. 그리고 모든 걸 가져야만 하는 아이다. 그녀에게 존재감 없는 외톨이 선이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럼에도 선이는 보라와 보라가 이끄는 소그룹을 선망한다. 


와중에 방학 중 선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개학해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된 지아, 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걸 숨기고 거짓말로 점철한 채 영어학원을 다니며 친해진 보라와 함께 한다. 아니, 보라가 지아를 자신의 그룹에 끼워준 것이겠다. 지아가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 중에는, 전 학교에서 왕따였다는 것과 엄마가 영국에 계신다는 것과 영국에 가봤다는 것 등이었다. 


선이는 그 모든 걸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폭로한다. 첩첩산중으로, 보라는 이미 자신의 영원한 공부 1등 자리를 뺏어간 지아와 격렬히 대치 중이었다. 자연스레 보라와 선이가 한패가 되고 지아가 외톨이가 되는 형국으로 권력이동이 실시된다. 관계 못지 않게 권력의 속성이란 게 참으로 하찮고 한순간이다. 그런 중에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킬 요량이 많지 않다. 선이, 지아, 보라 중 누가 가능할까. 


영화에서 선이가 자신과 지아에게 물들여준 봉숭아물, 보라의 매니큐어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와 권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일까, 보라와 보라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일까. 나는 '당연히' 권력과 관계를 응원한다.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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