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와일드>


괜찮은 감독 장 마크 발레와 괜찮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의 만남, <와일드>. ⓒ이십세기폭스코리아



PCT, 일명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라는 게 있다.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로,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약 4300km에 이르는 도보여행코스다. 말이 여행이지 매순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절망과 좌절과 다름 아니다. 꿈에서나 가능한 도전과 영광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그 절망과 좌절의 길에서 자신도 모르는 무엇인가를 건져올리고자 하는 이가 있다. 20대 이른 나이에 밑바닥 인생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여인 셰릴 스트레이드, 홀로 대장정의 길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경험은 논픽션 책으로 나와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 마크 발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영화 <와일드>. 


장 마크 발레는 흥행보단 비평에 강한 감독이다. 1995년에 장편영화 데뷔 이후 현재까지 총 8편의 장편을 연출했는데, 2013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이후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와일드> <데몰리션>까지 선보였다. 모두 수준급 이상의 '괜찮은' 영화들이다. 그중 <와일드>는 그의 스타일리시함은 최대한 배제한 반면 섬세함은 극도로 끌어올린 듯하다. 그의 필모 중 가장 무난하게 괜찮은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모든 걸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 셰릴이 장장 4300km의 PCT를 완하려 한다. 그 끝엔 무엇이 있으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은 족히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울 것 같은 배낭을 지고 당당히 홀로 태평양 연안에 있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에 도전한다. 시작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응당 어떤 큰 일을 겪지 않은 이상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은 일, 셰릴에게 일어났었을 일들이 궁금해진다. 


그동안 그녀의 짧은 삶에 행해진 일들을 단순히 몇몇 말의 나열로 제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안과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과 부모님의 이혼으로 점철된 불우한 어린시절, 모든 것이나 다름 없던 엄마의 죽음과 해체되는 가족, 섹스와 마약으로 잃어버린 사랑과 그로 인한 이혼까지. 


고난과 환희가 엇갈리는 길 위에서 셰릴은 그동안의 삶이 주는 끝없는 고통들을 다시금 맛본다. 그녀로서는 떨쳐버리려 왔는지, 되새기려 왔는지, 깊이 새기려 왔는지, 정면으로 들여다보려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래도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그 길 위에서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끝에 도달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니, 확실히 알고 있다. '고작' 폭염과 폭설,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단숨에 쓸려갈 것 같은 강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과 동물들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것들을 더한 것들을 겪어 왔고 겪고 있고 겪을 그녀이기 때문에.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도전의 끝이 아닌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고통


이 무지막지한 도전은 끝을 보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엇' 이상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행군'이라는 걸 몸소 겪어봤을 것이다. 30~40kg에 육박하는 군장을 짊어지고 밤새 30~40km 이상의 길을 주파하는 훈련으로, 보통 4박 5일에 걸친 '대훈련'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곤 한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전우애를 기르며, 체력을 단련하고... 


이처럼 '심신(心身) 단련'에 탁월하다는 행군, PCT는 약 4300km로 일반적인 행군을 100일 이상 매일 행해야 한다. 행군의 목적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과 인생을 건 도전이라 할 만하다. 그 끝에 다다르면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했는데 무엇인들 못하랴'와 같은 자신감 폭발과 동기 부여 등. 


하지만 영화는 그 도전의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처참할 정도로 힘든 과정과 그 가운데에서도 처참의 끝에 받는 도움만 보여줄 뿐이다. 그녀가 얻을 건 분명히 있었지만, 그 끝이 아닌 그 도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 도중에 깨닫는 건 너무도 힘들지만, 그 끝에서라도 깨닫는 게 중요하겠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셰릴이 얘기하는 건, 비록 무지막지한 육체적 고통일지라도 우린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라는 걸, 정신적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힘들게 하거니와 우리를 단련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함을, 그녀의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의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사실 둘 다일지 모른다. 


새겨볼 만한 인생의 여정, 삶의 단면


그럼에도 이 도전은 인생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셰릴은 아마 이 무지막지한 행군을 통해, 그 '환상적인' 고통의 지속을 통해, 그동안의 삶을 지워버리고 싶었을 테다. 힘든 여행이든 차분한 여행이든, 우린 여행을 통해 힘든 지난날에서 희망의 앞날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계속해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반추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고통을 겪는, 이중 고통을 통해 모든 고통을 완전히 뒤로 하려는 그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그리웠다. 그 고통의 시간 한가운데 있는 엄마가 한없이 그립다는 걸 깨닫는다. 즉, 다 받아들인 채 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꾸역꾸역 몸무게보다 무겁게 넣어 짊어지고 온 배낭처럼. 


함부로, 그 길을 가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는 4300km의 길을. 함부로, 그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끝없는 정신적 고통이 뒤따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그렇지만, 그 두 길을 모두 가본 이가 말하는 건 다르지 않을까.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하지 않을까. 


<와일드>는 그 세심하고 진지한 연출 속에 최소한 조금은 들어볼 만한 인생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 여정에 동참해 많은 걸 얻진 못하더라도, 무엇이라도 얻고자 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감동을 얻기 보다, 인생의 한 단면을 보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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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히어애프터>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작품 <히어애프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단연 튀는 작품이 있다. <히어애프터>가 그 작품이다. 그의 연출 특징상 어떤 사건을 다루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느낌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SF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죽음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더 눈길이 가는 건, 비현실적인 소재임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연출이라는 데 있다. 어떻게 비현실에서 현실을 끄집어낼까 자못 궁금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답지 않은 소재를 가져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답게 풀어낸 것이리라. 


그의 필모에서 <설리> <아메리칸 스나이퍼> <그랜 토리노> 등의 다분히 문제적이고 약간은 정치적인 성향의 작품 또는 <미스틱 리버> <체인질링> 등의 이야기 중심의 드라마가 아닌, <히어애프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인빅터스> 등의 인생 감성을 노래하는 드라마와 결을 같이 한다.


'죽음'이라는 질문에 직면하다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직면한 주인공들. 죽음은 분명 삶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멀디 멀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마리(세실 드 프랑스 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거대한 쓰나미에 쓸려 죽는다. 아니,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다. 사지를 헤맨 것이리라. 그곳에서 마리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흔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봤다는 광경 말이다. 그녀는 그 광경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조지(멧 데이먼 분)는 미국에서 공장 노동자로 생활한다. 사실 그는 사후세계를 보고 느끼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영매로 전천후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는 삶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그때문에 알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한다. 


마커스는 영국에서 술중독자 편모 슬하에서 쌍둥이 형과 함께 생활한다. 형은 그에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그를 대신해 심부름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믿기 힘든 일을 당한 마커스는 아직 형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형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는 거기 어딘가에 있는 형과 말하고 싶다.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셋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질문에 직면한다. 죽음에 다다랐던 사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나 눈앞에서 분신을 잃고 죽음 이후의 세계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나 모두 죽음을 대하는 게 힘들다. 그들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은 단절되어 있지 않지만, 서로 건너기 힘든 강을 마주보고 있다. 


'죽음'을 보여주지만 '삶'을 말하다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고자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는, 그러나 죽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세 주인공의 세 이야기는 사후, 즉 죽음 이후를 바라보고 향하고 그곳에 다다르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건 결국 '삶'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다다르기 힘들고 상상하기 힘든 '히어애프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건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 아우르는 삶의 확대를 꽤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는 선천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삶에서 죽음을 지워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지만 죽음을 살아갈 순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워진 것일 테고, 한순간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초에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이 순간에도 계속 죽어간다.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영화의 세 주인공 또는 세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사후 세계를 보고 살아 돌아온 사람' 이야기는 은근 수없이 들어왔을 테고, 죽어서 옆에 없는 소중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없을 테며, 살면서 소중한 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 잘 살고자 한다. 


영화가 '웰다잉'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에 좀 더 관심을 두고자 하는 건 같지만, 죽음을 잘 대비하는 등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오히려 삶에 더 천착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만큼 삶에 감사하게 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한편 소외된 사람들, 즉 죽음에 직면해 삶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조명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그럼에도, 삶에서 죽음을 말하는 건 외롭고 고독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궁금하고 흥미롭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다. 세 주인공은 하나같이 혼자다. 외롭고 고독해 죽음 이후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지 않은가. <히어애프터>는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리와 조지는 특별한 경험을 했고 특별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고 능력이다. 그게 지금 이 세상의 한계일지 모른다. 반대로 그게 이 영화의 특별한 점일 것이다. 특별한 걸 특별한 연출이 아닌 담담한 연출로 다루어 일상에 편입시킨 뒤 소외의 개념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만의 드라마 스타일이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소구점이다. 


이 영화로 삶을 다시 보았는가, 이 영화로 죽음을 다시 생각했는가, 이 영화로 사후 세계에 흥미가 생겼는가. 모두 그랬을지도, 모두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생각의 전환, 시각의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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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스타일의 모든 것을 보여준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CJ 엔터테인먼트

 


자타공인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 박찬욱.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국내를, 2003년 <올드보이>로 해외를 접수하면서 지금의 박찬욱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은 미약하였다. 자그마치 25년 전인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들어본 적 없는 데뷔작과 1997년 <3인조>라는 작품 모두 실패하며 암흑의 초창기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2002년의 <복수는 나의 것>이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 감독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로 데뷔 10여 년만에 입지를 다진 후 그 여세를 몰아 자신만의 색깔을 오롯이 입힌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다. 박찬욱 영화를 지켜봐았던 사람이든, 박찬욱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든 단번에 '박찬욱 영화'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폭력, 하드보일드, 아이러니, 극단의 조화, 블랙코미디, 미장센...


박찬욱 영화들이 그렇듯 <복수는 나의 것> 또한 절대로 마음 편하게 즐길 수는 없을 거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할 것이며, 보고 난 후에도 계속 괴롭힐 것이다. 물론 그 불편함들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의 뫼비우스의 띠. 그거 참... ⓒCJ 엔터테인먼트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류(신하균 분)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누나(임지은 분)가 있다. 누나는 반드시 신장을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인데, 혈액형이 다른 류는 신장을 이식하지 못한다. 조급한 마음에 천만 원을 가지고 아무도 몰래 장기밀매업자를 찾아가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는 대신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받기로 거래하는 류, 사기를 당한다. 


그때 병원에서 좋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누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신장을 찾았다는 것... 천만 원만 있으면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류의 여자친구 영미(배두나 분)는 일단 류를 쥐어패고는 일명 '착한 유괴'론을 설파하며 천만 원을 구할 방도를 제시한다. 잘나가는 사장님 자식을 납치해서는 잘 대해주고 딱 천만 원만 받으면 바로 아이를 돌려주는 것. 


류와 영미는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 분)의 딸 유선(한보배 분)을 타겟으로 삼는다. 그들 스스로가 약속한대로 유선을 마치 딸처럼 잘 보살핀다. 그리고는 곧 동진에게 협박편지를 보내 천만 원을 받아낸다. 하지만 당일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잇따른다. 자신 때문에 아이를 유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류가 강가에 누나를 묻고 있는 사이에 함께 온 유선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제 시작된다. 류와 동진의 한 맺힌 복수가. 아무 잘못도 없는 딸을 유괴해 죽음까지 이르게 한 류와 영미를 향한 피의 복수, 역시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천만 원과 신장을 갈취한 장기밀매업자를 향한 피의 복수, 그리고 조직에 속해 있는 영미를 죽인 동진을 향한 피의 복수까지. 그야말로 복수는 그들 모두의 것이다.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는 이들에 남은 것, 복수


복수할 상황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쳤다. 그저 복수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다름 아닌 가족, 그것도 삶의 이유와 마찬가지인 가족의 죽음이 눈앞에 당도했다. 동진은 사실 잘나가는 사장님이 아니다. 일에만 몰두하다 이혼을 하고 아이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회사마저 어려운 지경이었던 것을, 그래서 더욱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던 그때 아이가 유괴당하고 죽기까지 한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류는 힘든 것도 그렇게 힘든 게 없는 주물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하루 아침에 해고당한 처지다. 거기에 누나의 치료비로 모아두었던 유일한 천만 원을 사기 당했다. 나름 방책을 연구해 '착한 유괴'를 실행에 옮기고 성공을 눈앞에 뒀는데 누나가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에게 남은 게 복수밖에 더 있겠는가. 


잔인해도 이렇게 잔인한 복수가 없다. 눈이 찌뿌려지고 헉 소리가 나고 흠칫 놀란다. 우린 그동안 이보다 더 한 잔인함이 동반된 영화들을 무수히 많이 봐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이 영화가 복수에 초점을 맞췄기로 복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행위가 눈에 띄는 건 행위의 연유와 사연의 처연함과 서늘함에 있겠다. 그들은 복수할 이유는 있었지만 복수할 상황에 처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외적 하이라이트는 류와 동진의 복수에 있지만, 주요 쟁점은 동진의 천만 원을 갈취하고 류의 누나가 자살하고 동진의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그때에 있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곳은 영화의 초반에 있는 것이다. 물론 류와 동진의 복수에서 연유하는 '악'의 개념도 생각해야 할 지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앞의 생각 지점보다 뒤의 생각 지점, 즉 악의 개념 또는 인간의 본성에 더 중점을 두었을 것이다. 


복수의 잔인함보다 초첨을 맞춰야 하는 곳


이 영화의 복수는 지극히 잔인하다. 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복수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CJ 엔터테인먼트



두 주요 지점이 사실 진부한 논의가 발화되는 곳이기는 하다. 류와 동진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가 이 사회에 있다는 것. 밑바닥의 소외계층과 망한 상류층 간의 대결 구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그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고, 왜 하필 그들끼리 서로 싸우게 된 것인가. 


그들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의 능력 또는 운명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능력론과 운명론. 영화에서 장기밀매업자의 사기 행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비롯 많은 '만약에'들에 안타까움을 표할 수밖에 없는데, 일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누가 해야만 할까. 


일련의 행위 원인을 들여다보았다면, 일련의 행위 결과를 들여다볼 차례다. 물론 영화에 나온 두 캐릭터들로만 일반화시킬 순 절대 없겠지만, 작은 표본을 도출할 순 있을 것이다. 이들의 행위 자체는 아무리 자신의 삶의 이유를 잃고 남은 삶을 포기해버렸기로서니 분명 악마적이다. 직접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으니 더욱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악마'의 타이틀을 붙일 순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같은 짓을 저질렀지만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안나 하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대입할 수 있을까. 거기에 어떤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었던 만큼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맞는 면이 있겠다. 


그들은 내재된 악마의 목소리를 따랐다기보다, 상황이 던진 복수의 목소리를 따랐다. 즉, 누구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 버금가는 짓을 행할 수 있는 요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행했다는 것처럼, 그들도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복수의 임무를 충실히 아니, 어쩔 수 없이 행했다. "너 착한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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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


여러 수작 단편을 쏟아내고는 멋진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들고온 윤가은 감독이다. ⓒ엣나인필름



두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해 함께 하고 싶은 한 명씩을 데려와 편을 가르는 방법을 택한 어느 체육 시간 피구 게임, 선이는 어느 쪽에서도 선택받지 못한 최후의 일인이 되었다. 왕따는 아닌 듯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외톨이인 듯하다. 키도 크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보라는 그런 선이를 이용해 먹기도 한다. 


보라의 부탁으로 방학식 날에 홀로 남아 반 전체를 청소하는 선이, 전학을 왔다는 지아를 우연히 마주친다. 보라의 치졸한 속임수 때문에 다리 위에서 실의에 빠져 있는 선이, 다리를 지나던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둘은 금새 친해지고 선이는 보라를 주려던 수제팔찌를 지아에게 준다. 둘은 생애 다시 없을 것만 같은 방학 한때를 보낸다. 


지아의 부모님은 지아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이혼을 하셨다. 그 때문인지 선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살가운 시간을 갖는 모습을 본 후 왠지 모를 적대감이 생기는 지아다. 그래도 그건 금새 풀었다. 하지만 지아가 영어학원을 다니고,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보라가 있었고, 개학을 하며 지아가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되며, 선이와 지아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진다. 지아는 선이를 본 척도 않고 보라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후 선이와 지아와 보라의 물고 물리는 관계가 계속되는데...


어른들이 무시했던, 아이들의 무시무시한 세상


누구나 지나왔을 어린 시절, 여러모로 '무시무시'했던 그때를 어린이 되고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엣나인필름



2016년 최고의 수작 중 하나라 할 만한 영화 <우리들>. <손님> <콩나물> 등으로 단편영화계에 신기원을 이룩한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독립예술영화계에선 거물로 통할 만한 '엣나인필름'이 배급을 맡아 온전한 '독립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대신 '예술영화'로 포지션하여 다양성영화의 훌륭한 계류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윤 감독은 앞선 두 대표 단편에서 어른이 되기 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우리들>로 그 재능과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곤 한다. 한없이 동물에 가까운 본성을 지닌, 아직 이성적 존재 인간이 덜 된, 생각 따윈 없고 본능을 따를 뿐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찌들대로 찌들고 죄질대로 진 어른 세상의 해법이 무지의 순수한 아이들에게 있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치명적 관계 유착과 되물림, 권력에의 의지와 빌붙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어른들의 세상, 그중에서도 지독하기 그지 없는 막장 인간들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을 말이다. 차라리 어른들의 세상이 더 유치한 것 같은 이유는, 그만큼 아이들의 세상을 무시했다는 방증이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불러온다. 특히 영화에서 선이에게 특별한 깨달음을 안기는 선이의 남동생, 어리디어린 윤이는 너무나도 귀여워 '보는 맛'이 날 정도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무시한 것처럼 선이는 자신보다 어린 윤이를 무시했다. 영화는 올려다보는 깨달음이 아닌 내려다보는 깨달음이라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 '관계'


영화 <우리들>의 첫 번째 주요 키워드는 '관계'다. ⓒ엣나인필름



'관계'라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평생을 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어떤 관계가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바르지 못한 것인지, 괜찮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그나마 괜찮은 관계가 무엇인지 모색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것이다. <우리들> 또한, 아니 <우리들>야말로 '관계'를 예리하고 섬세하고 긴장감 있게 파고드는데, 지극히 아이들의 시선과 생각과 행동으로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크게 다가온다. 빈 곳 없이 잘 표현해낸 주인공 아이들의 노력 덕분이겠다. 


2011년 최고작 <파수꾼>이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관계에 대한 천착 때문이다. 다만 <파수꾼>이 '관계'가 주인공에 다름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관계에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필히 비극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파수꾼>, 반면 희극에의 희망이 있는 <우리들>. 개인적으로 손이 가는 영화는 앞엣것이다. 


생애 다시 없을 한때를 보낸 이들에게 파국이 찾아오는 건 한순간이고 그 이유도 하찮기 그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다시 잇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그런데, 그러면 누구랑 노나? 친구가 가장 소중할 때에 말이다. 매일 가장 친한 친구랑 티격태격하며 자주 맞고 다니지만, 그 친구가 아니면 누구랑 노냐는 윤이의 말이 가슴 깊숙히 와 닿는다. 


문제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누군가는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관계가 틀어짐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반드시라고 할 만큼 한 명이 자신을 굽히고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따위의 깨달음을 알 것 같진 않고, 아이들이 그런 깨달음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또 하나의 키워드 '권력'


영화 <우리들>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는 '권력'이다. ⓒ엣나인필름



'관계'와 함께 <우리들>의 중요한 키워드는 '권력'이겠다. 관계가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거라면, 권력은 보라를 중심으로 역시 선이와 지아를 천착하는 것이겠다. 앞서 주지했듯 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걸 가진 아이다. 그리고 모든 걸 가져야만 하는 아이다. 그녀에게 존재감 없는 외톨이 선이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럼에도 선이는 보라와 보라가 이끄는 소그룹을 선망한다. 


와중에 방학 중 선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개학해 정식으로 전학을 오게 된 지아, 선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걸 숨기고 거짓말로 점철한 채 영어학원을 다니며 친해진 보라와 함께 한다. 아니, 보라가 지아를 자신의 그룹에 끼워준 것이겠다. 지아가 숨기고 거짓말을 한 것 중에는, 전 학교에서 왕따였다는 것과 엄마가 영국에 계신다는 것과 영국에 가봤다는 것 등이었다. 


선이는 그 모든 걸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폭로한다. 첩첩산중으로, 보라는 이미 자신의 영원한 공부 1등 자리를 뺏어간 지아와 격렬히 대치 중이었다. 자연스레 보라와 선이가 한패가 되고 지아가 외톨이가 되는 형국으로 권력이동이 실시된다. 관계 못지 않게 권력의 속성이란 게 참으로 하찮고 한순간이다. 그런 중에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킬 요량이 많지 않다. 선이, 지아, 보라 중 누가 가능할까. 


영화에서 선이가 자신과 지아에게 물들여준 봉숭아물, 보라의 매니큐어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와 권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일까, 보라와 보라를 따라한 지아의 매니큐어일까. 나는 '당연히' 권력과 관계를 응원한다. 선이와 지아가 함께 한 봉숭아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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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쇼생크 탈출>


어느덧 개봉 20년이 훌쩍 넘은 자타공인 최고의 영화 <쇼생크 탈출>. Best of Best다. ⓒ더 픽쳐스



평생 가장 많이 본 소설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접하곤 1년마다 꼭 한 번씩은 봐서 최소 10번은 족히 봐왔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도 중국어로도 봤고, 일본어로는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요즘 몇 년 동안엔 못 보고 있는데, 여전히 내 생애 최고의 소설로 남아 있다. 드라마도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하얀 거탑> <하이킥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 등. 


영화는 어떨까. 한국과 미국 것이 나눠진다.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참 많이 봤다. 군대 경험이 있는 한국 남자라면 뿜어져 나오는 웃음과 평생 남을 트라우마의 역설로 괴로워하면서 재밌게 볼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이다. 


스티븐 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미드의 새로운 신기원을 이룩한 <워킹데드 시리즈> 초창기를 진두지휘한 이로 유명하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이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쇼생크 탈출>을 뽑지 않을까 싶다. TV에서 잊을 만하면 방영되는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명작을 제치고 '네이버 평점'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명작 중의 명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쇼생크 탈출'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인공 앤디에게 탈옥, 즉 '쇼생크 탈출'은 자유 그 자체다. 뭐가 더 있겠나. ⓒ더 픽쳐스



영화는 1947년 미국, 전도유망한 은행 부지점장 앤디(팀 로빈슨 분)가 바람난 아내와 그 애인을 총으로 쏴죽인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갇히면서 시작된다. 다음날 입소 동기 중 한 명이 잘못 보여 간수장에게 얻어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건 으레 있는 일로 치부된다. 이곳의 갇힌 죄수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소장과 간수장 이하 간수들은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 모두가 그리 주장하듯이 앤디도 한사코 무죄를 주장한다. 자신은 아내와 그 애인을 죽이고 싶었지만 결코 죽이진 않았다는 것. 곧 쓰러질 것 같이 비리비리한 앤디의 첫인상을 좋지 않게 보았지만 점점 그 결기랄까 아우라랄까에 빠져든 레드(모건 프리먼 분), 그는 이미 20년째 복역 중인 종신형수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이다. 앤디는 그에게 상식 밖의 물건들을 요청하곤 한다. 


앤디는 오래지 않아 간수장과 소장의 눈에 띈다. 은행원이라는 점을 이용해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어 소장의 회계 비서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건 곧 소장의 비리를, 즉 돈세탁과 세금포탈을 맡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앤디는 우연히 자신의 혐의가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소장이 이를 가로막는다. 어느날 앤디는 방에서 감쪽 같이 사라지는데...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것일까. 


자유에의 희망


앤디가 역설한다. '자유' 그 자체보다 더 필요한 건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더 픽쳐스



원작자 스티븐 킹은 스릴러공포 장르로 유명하고 또한 정평이 나 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영화로 나와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캐리> <샤이닝> <미저리>라는 공포스릴러의 대명사급 영화들이 그것이다. 반면 생각 외로 공포와는 거리가 먼 드라마 장르로도 우리를 설레게 했다. <쇼생크 탈출>을 필두로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등의 영화들이 그것이다. 그는 정녕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쇼생크 탈출>은 제목에서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듯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후 '감옥 탈출'이라는 오래되었지만 엄청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토를 가져왔다. 우리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탈출할지 노심초사, 학수고대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을 선보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건 '왜' 탈출해야 하는지와 맞물려 있는데, 영화는 시종일관 단순명쾌하게 '자유에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모습은 전적으로 앤디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레드가 유추하는 바를 통해서다. 그리고 몇몇 죄수들의 에피소드들까지. 


앤디는 간수장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신 함께 땡볕 아래서 일하는 동료 죄수들에게 '맥주' 2캔씩을 부탁하고, 한창 소장 밑에서 잘나가고 있을 때 모든 죄수들에게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선사하곤 독방으로 직행한다. 레드에게는 반드시 탈옥하여 완벽한 자유를 선사할 멕시코의 어느 해변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으로 함께 사업할 것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유'로 수렴된다. 그 장면들이 하나같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인생에의 지독한 은유


그렇지만, 희망에의 과정은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자유에의 결과는 더욱 가혹하다. ⓒ더 픽쳐스



마냥 좋을 것만 같은 '자유'의 역설도 잊지 않는다. 장장 50년 동안 교도소에서 생활하다가 이제는 자신의 죄를 완전히 뉘우치고 사회생활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해 풀어준 죄수가 있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 도서관 사서로 꽤 중요한 일을 하며 간수와 죄수 모두에게 두루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밖에 나가면?


죄수들 중에서야 중요하고 신망이 두텁지 일반인 중에서는 죄수 출신 늙은이일 뿐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나가기 전에 사고를 일으켜 형을 연장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교도소를 나가서도 사고를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너무 늦었음을 직감했다. 결국 그가 그가 할 일은 생을 마감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유를 진정 바라고 그에 준비된 사람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역설을 몸소 보여준 에피소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딜까, '내가 있고자 하는 곳'은 어딜까. 나에게 자유가 없을 때 과연 끝없이 자유를 탐할 수 있을까. 본래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실로 오랫동안 자유가 주어지지 않을 때도 여전히 자유를 탐할까, 오히려 자유가 없는 그곳이 더 자유롭다는 역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럼에도 강제로 자유가 주어졌을 때다. 강제로 자유를 빼앗고 다시 강제로 자유를 부여하고. 그보다 더 '강제'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말한다. 희망을 절대 버리지 말라고. 여기서는 '언젠가 반드시 풀려날 거라는' 직접적 희망이겠다. 인생의 부분부분들에 대한 지독한 은유인데, 살면서 진정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가 언제인지, 과연 그런 때가 있긴 한 건지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실제 감옥을 탈출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생 감옥에서는 탈출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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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와 <포레스트 검프> 등으로 익숙한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숨겨진 명작 <콘택트>. ⓒ워너브라더스



1980년대 '스타워즈'와 쌍벽을 이루며 그야말로 역대급 시리즈로 자리매김한 '백 투 더 퓨쳐'. 그 단편적인 재미만큼은 그 어느 콘텐츠도 따라잡을 수 없을 영화 시리즈였다. 스타워즈에 조지 루카스가 있었다면, 백 투 더 퓨쳐엔 로버트 저메키스가 있었다. 이후 그는 작품성으로 선회하는데, 우리가 모를 리 없는 영화들이 포진되어 있다. 


1994년 <포레스트 검프>, 2001년 <캐스트 어웨이>, 2004년 <폴라 익스프레스> 등이 그것이다. 이쯤까지가 그가 1990년~2000년대 초반 우리에게도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 도식을 만들고 알린 시기이다. 기본적인 대서사의 지붕 아래, 약간의 사랑과 약간의 유머와 약간의 감동과 약간의 사연과 약간의 전문지식 등이 생동하고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즐기며 동시에 감정이입과 몰입까지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을 영화 한 편이 있다. 1992년작 <죽어야 사는 여자>는 아니고, 2000년작 <왓 라이즈 비니스>도 아니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1997년작 <콘택트>이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장편소설을 영화한 작품으로, 전문적인 지식과 문학적 유흥의 완벽한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상과학 영화가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현실


현실과 지극히 동떨어진 일을 하는 우주과학자들, 하지만 그들도 현실과 지극히 연결되어 있다. ⓒ워너브라더스



앨리 애로웨이(조디 포스터 분)는 어릴 적 매일같이 모르는 이의 교신에 열중했다. 일찍 세상을 떠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아끼고 좋아해줬지만 9살 때 세상을 뜬 아버지.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수학과 과학 분야에 인생을 건다. 과학이야말로 진리 추구의 해답이거니와 '거대하고 거대한 우주에 오직 지구 생명체만 존재한다는 건 공간 낭비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 신념은 지구 아닌 우주에의 인간 아닌 생명체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게 되는 것으로 발현되고, 그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나 메시지를 잡아내 결국에는 그들과 접촉하고자 하는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그녀는 보장된 자리를 내팽겨치고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일개 프로젝트 그룹을 이끌며 나라의 돈을 받아 천문대를 돌아다닌다. 


'위대한' 일을 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과학자들, 하지만 그들도 자본의 지원이 없으면 나라의 동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애로웨이처럼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라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소속되어 안정된 상황에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일정 정도의 논문은 물론이고 행정과 정치도 병행해야 하는 곳이 그런 곳이다. 


애로웨이는 가히 그 출중한 실력으로 몇 년에 걸쳐 수많은 난관을 뚫고 중요한 발견을 해낸다. 외계 생명체가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신호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 공은 고스란히 그녀의 프로젝트에 가차없이 지원을 끊어버린 국가에서 가로채버린다. 그러곤 군대까지 대동한 검열도 시행한다. 일개 개인의 위대한 발견은 곧 나라의 위대한 발견이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과학자의 현실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상과학 영화가 보여주는 지극히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종교와 과학, 이중적 잣대의 아이러니한 차별


기독교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종교가 최우선이지만 과학 또한 그들이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워너브라더스



애로웨이가 수신한 신호는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 연설이 송출된 후 다시 보내진 것이었다. 지구를 침공한다는 둥 비상식적이지만 그들 입장에선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내뱉으며 애로웨이의 공을 깎아내리는 국가, 이에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그 영상의 프레임 사이에 있는 디지털 신호를 알아낸다. 그 신호는 다름 아닌 운송 수단, 외계를 오갈 수 있는 운송 수단 설계도였던 것이다. 


이전과 똑같이 다시금 애로웨이의 공을 뺏어가는 국가, 각 나라의 대표를 뽑아 외계로 향하는 운송 수단에 탑승시킨다. 하지만 애로웨이는 그 대표에 낄 수 없었다. 그녀가 종교를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다는 이유였다.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대표를 뽑는 대통령 직속 고문단에는 당연히 종교인 팔로 조스(매튜 맥커너히 분)도 있었다. 그와 그녀는 사랑도 나눈 사이지만, 엄연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나라에서 과학자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이중적이기 그지 없다. 과학자로서 객관적인 데이터로 판단하건대 신이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을 텐데, 그럼에도 절대다수가 절대자를 믿는다는 주장 하에 그녀의 신념은 묵살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인 그녀는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나서도 역사적인 믿음과 대다수의 사람들의 바람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대표로 선별되지 못한다. 과학자의 비애임과 동시에 '종교는 종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라는 절대적 이성적 잣대의 아이러니한 차별이다. 


여기서 영화가 나아갈 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연히 보인다. '조화'. 절대로 맞물리지 못할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화합. 신은 믿지 못하되 외계생명체 존재는 믿는 애로웨이 박사와 신에의 절대적인 믿음의 팔로 조스 신부가 방향과 신념은 다르되 '진리에의 추구'라는 지향점은 같다는 결론까지. 그건 서로를 존중하고 믿는 것일 테다. 자신이 믿는 바의 중심을 지키면서 상대의 중심에게 다가가기. 


과학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의 인정에의 희망


영화는 주인공 애로웨이를 통해 말한다. 과학과 종교에의 화합을 말이다. '우리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가 우주에 속해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결코 혼자가 아니란 사실' ⓒ워너브라더스



인간 대표들의 외계 탐험은 결국 무산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애로웨이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똑같은 종류의 외계 탐험 프로젝트에 참여해 수송선에 탑승하게 된다. 그녀는 기이하고 기이한 일을 겪고 돌아오는데, 전세계 모든 이가 지켜본 그녀의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18시간은 1초도 되지 않은 찰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청문회가 열리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 설전이 이어진다. 


과학자 애로웨이 박사의 과학자답지 않은 발언이 이어진다.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와중에 오로지 그녀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1조 달러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간 초국가적 프로젝트인 것,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학자적인 신념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는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직접 경험했고 다같이 나누고 싶기 때문에. 


"제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우린 우주에 속해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결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어요. 전 그 경험을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게 바로 제 희망입니다."


과학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멋있고 아름다운 발언이다. '절대자'를 믿는 종교인과 '절대적' 데이터를 믿는 과학자. 그녀는 과학자로서 과감히 한 축을 무너뜨리는 생각과 발언을 한 것이다. 과학의 끝에 영적 경험이 있을 수 있고, 영적 경험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도 있을 테다. 또한 인간 그 자체로서의 위대하고 완벽한 존재의 발현과 동시에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의 발현, 이는 과학과 종교 모두를 인정하는 태도다. 그걸 모든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게 그녀의 희망이고 이 영화가 바라는 바이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을 지은 칼 세이건은 무신론자였지만 마냥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과학적으로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신이 자신을 본떠 만들었다는 '위대한' 존재 인간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지를 말이다. 그건 외계생명체와의 끈임없는 접촉과 대화 시도에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코 절대자의 부정과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겠다. 상호존중과 자가보완이 함께 나아가는 길이다. 그것이 모든 이의 행복과 그 기반 위의 진보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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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포스터의 홍보문구가 이토록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이자 '한 여인의 위대한 여정'을 그렸다. ⓒ티캐스트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는 참혹함을 아는가? 그때만큼은 다른 어떤 영화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이제 영화를 졸업해야 하는 건가?' 같은 황당무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인데, 다름 아닌 감독의 면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드니 빌뇌브는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는다. 전 세계적인 호평 일색. 이어 내놓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2010년에 내놓은 <그을린 사랑>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소개된다. 하나 같이 명감독의 걸작들이다.


2010년대에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슬슬 흥행에도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올해 말에는 고전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35년 만에 내놓아 정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을린 사랑>이 준 충격과 전율은 무엇도 따라하지 못할 그 영화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들, 역사와 전쟁과 운명.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여인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맞선다. 아니, 품는다. ⓒ티캐스트



영화의 시작은 황당하고, 이어지는 전개는 조금 지루하다. 진도가 팍팍 빠지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기막힌 연출력과 꽉 짜인 각본에 있는 것 같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공증인에게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듣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그 존재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 그전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자 약속이었다. 쌍둥이는 어머니의 뿌리와 흔적을 찾아 중동으로 향한다. 


한편 나왈 마르완의 충격적 옛일을 들여다본다. 중동에서 기독교와 회교도의 전쟁이 한창인 1970년대, 기독교 집안의 딸 나왈, 회교도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나왈 집안의 오빠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랑의 댓가로 그를 죽이고 그녀 또한 죽이려 한다. 할머니의 중재로 살아난 나왈,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그 또한 용서받지 못할 대죄, 결국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찾을 것을 다짐하고 약속한다. 


도시에 있는 친척네로 보내진 나왈, 그곳에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회교도 난민들의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이내 탈출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찾아나서는데, 끝내 찾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회교도인 척 하고 차를 얻어탄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에 습격당해 몰살 당하고, 나왈은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와 홀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나왈은 결심한 듯하다. 기독교를 용서치 않겠노라고. 


계속되는 비극의 고리는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참혹한 비극이 그녀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이며 지옥불 같은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파괴적인 역사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아픔보다 그녀를 더욱 옥죄는 건 인간의 힘으론 털 끝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약속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고리 끊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분명한 비극을 마주하고, 사랑과 약속이라는 더없이 순결무구하고 위대한 것들과 맹세한 바를 지키고자 한다. ⓒ티캐스트



영화는 대번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해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오이디푸스의 현현이라 하겠다. 


고로 이 영화를 역대급 반전이 주는 쾌감과 감동과 전율로 포장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건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위대함 때문이리라.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과의 반전이 아닌, 과정의 서사에 천착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비극의 고리 끊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이 넓고 깊은 품과 지극한 자기 희생이 바탕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 결단은, 영화 <똥파리>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차원을 달리하는바,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파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 모든 건 태초의 '사랑'과 사랑에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널 찾아내 내 사랑을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중심에 이 두 요소를 자리잡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일찍이 이런 사랑은 목격한 적이 없다. 이리도 숭악한 것들 사이에 피어난 이리도 숭고한 사랑의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당사자도 되기 싫다. 너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아프다.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 하기


무조건적인 끌어안음, 그리고 역시 무조건적인 함께 하기. 이는 영웅이라면 할 수 없고, 무명의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티캐스트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혹자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가 그것인데, 종교라고 하는 숭고한 존재가 내뿜는 잔혹한 파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허무하게 존재를 말살당한다. 나왈은 사랑과 약속에의 '약속'으로 종교마저 헤쳐나간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집안과 가문과 종족과 나라의 기반인 종교를 저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비겁자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를 떠는 가해자가 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혹한 짓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될 걸 모를리 없지만, 이 역사와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일개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얻는 생존.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날을 손꼽게 될 사랑. 


그녀가 궁극적인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나왈이 끝의 끝까지 손에 쥔 채 놓지 않았던 생존과 사랑과 약속으로 얻고자 했던 게 도대체 무엇일까. 포용, 조화, 함께 하기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받아들였는데 어느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 쏘냐. 그녀가 어울리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엇나가려 하겠는가. 그녀가 함께 하길 바라는데 어느 누가 등을 돌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영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대립과 전쟁을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하고 기가 막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인생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자신 자체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낸 것을 빗대어, 종교 대립과 전쟁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개 연약한 인간이 이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를 말하며, 그런 인간도 행할 수 있는 포용과 조화와 함께 하기를 한 집단, 한 종족, 한 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영화 중 하나다. 영화 따위가 이런 깨달음을 주고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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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


<미드나잇 인 파리>와 더불어 우디 앨런 감독 경력 후반기 최대작이라 할 수 있는 <블루 재스민>이다. ⓒ인벤트디



개인 삶의 문제를 떠나 영화감독으로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우디 앨런. 그 명성에 비해 그의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진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그 명성에 비해 흥행은커녕 개봉조차 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듯한데, 우연히 <미드나잇 인 파리>보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 우디 앨런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이후 얼마 전 재개봉한 2005년작 <매치 포인트>를 인상깊게 봤다. 용서받지 못할 상류층을 참으로 적나라하고 아슬아슬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50년 영화 감독 경력의 우디 앨런으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적당한 평을 받고 흥행했다. 그리고 2013년 <블루 재스민>이다. 


이 영화는 <매치 포인트>의 여러 요소를 이었다고 보이는데, 다분히 우디 앨런식의 풍자 코미디와 가학적이고 비비 꼬는 비판 시각이 합세해 좋은 결과를 냈다. 일사천리 막힘 없는 스토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없이 보는 와중에, 우디 앨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남김 없이 집어낼 수 있다. 상류층과 밑바닥 인생의 삶, 이 시대 자본주의의 몰락 과정과 결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까지.


우디 앨런, 유럽에서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오다


<매치 포인트>,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등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우리 앨런의 첫 작품 <블루 재스민>이다. ⓒ인벤트디



남편 할(알렉 볼드윈 분)의 사업 덕분에 뉴욕 최상류층에서 살아가는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 그녀는 생각, 행동,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최상류층이다. 물론 그 기본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최상류층 일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다름 아닌 남편의 외도, 그리고 남편의 사업 몰락. 공교롭게도 남편의 외도와 사업 몰락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남편이 사기로 몰락했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빈털털이가 된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 진저(샐리 호킨스 분)에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잠시 몸을 의탁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녀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는 정반대, 너무나도 다른 삶이다. 아예 차원이 다른 삶일 테다. 그 와중에 진저와 동거를 시작하려는 남자친구 칠리(바비 카나베일 분)의 압박이 신경쓰이고, 진저와 칠리의 하찮기 그지 없는 생각, 행동, 외모에 진절머리를 치는 재스민이다. 


재스민은 계속해서 옛날 생각을 하며 혼잣말을 하기 일쑤다. 밑바닥 인생인 현재를 부정하고 최상류층이었던 과거를 생각하는 데 더더욱 몰두하는 것일 테다. 그러곤 현실로 돌아오면 머리가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견딜 수 없다. 그런데 그 증상이 딱히 최근에 와서 생긴 것 같진 않다. 어쨋든 그녀는 약을 먹고 술을 마신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다시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예전의 '제대로 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디 앨런은 그의 44번째 작품 <블루 재스민>으로, <매치 포인트>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그의 클래식을 제대로 선보였다. <미드나잇 인 파리>로 정점을 찍고 다시 돌아온 느낌으로, 돌아오자마자 또 다른 정점을 찍는다. 최소 2000년대 이후 그의 대표작은 이 두 작품이다. 


자본주의 위기에 맞물리는 상류층의 몰락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뉴욕 최상류층의 기막힌 몰락은, 역시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현대 자본주의의 몰락과 궤를 함께 한다. ⓒ인벤트디



우디 앨런이 작정하고 만든 듯한 <블루 재스민>, 주인공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 또한 제대로 작정한 듯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을 메인 중 하나로 내세우며 영화를 돋보이게 했는데, 1970년대는 다이앤 키튼을, 1980~90년대는 미아 패로우를, 2000~10년대는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엠마 스톤을. 


반면 케이트 블란쳇은 이들처럼 그의 뮤즈라고까지 할 수 없지만, 영화 한 편을 책임지며 여지껏 여자에게 허락한 적이 거의 없는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우디 앨런이 표현하고자 했던 빙퉁그러진 상류층을, 말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몰락과 비극적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이 시대의 상류층이라면, 무지막지한 돈을 벌고 그에 맞는 엄청난 소비를 하며 역시 그에 맞는 부류와 어울리며 일정 정도의 기부를 통해 남을 돕는 행위를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상류층이라는 걸 알고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그런 삶이 모두 '사기'와 '거짓'으로 쌓아올린 것이라니. 이 시대 자본주의의 명백한 위기를 상징하는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의 이면에 사기와 거짓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지금, 이는 그 확실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자본주의와 한 배를 타고 세상의 머리 위를  유유히 항해하는 상류층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사기와 거짓이라는 점, 거시적으로 볼 땐 통쾌하게 다가오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서 느낀 건 결코 통쾌가 아니다. 씁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것만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가 그렇게 좋은 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라는 진리


최상류층이었던 재스민의 삶, 그리고 밑바닥이었던 진저의 삶. 결국 모두의 삶은 맞다. ⓒ인벤트디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할 부분은, '상류층' 재스민이 아닌 상류층 '재스민'이다. 그녀의 삶을 돌이켜보고 함께 따라가보면, 피해자인 것 같은 그녀가 결코 피해자인 것만은 아닌 게 드러난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행을 선택 '당한' 게 아니라 선택'한' 것이다. 상류층이라는 배를 내려온 게 아니라, 다른 상류층 배를 갈아타기 위해 환승을 준비 또는 대기하고자 한 거다. 피해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한편, 이 영화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은 진저의 삶이다. 흔히 말하는 밑바닥 인생 말이다. 그녀는 비록 없지만 전남편과 잘 지내던 시절 로또로 20만 불을 받고 모조리 재스민의 남편 할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망하고 급기야 이혼을 한다. 다 큰 아이들도 있는 상황에서 역시 밑바닥 인생이라 할 만한 칠리와 사귀고 거기에 모자라 유부남인지도 모르는 어떤 남자와 사귀기도 한다. 


그녀 또한 재스민처럼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삶을 써가려 한다. 다만, 재스민과 달리 누구도 그녀더러 뭐라고 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 또는 자신에 관계된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 모든 면에서 품위 있는 재스민을 보는 시선과는 달리, 다른 누가 보기에는 그녀의 삶이 하등 하찮고 볼 것 없이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또한 그녀의 주체적인 삶이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그녀를 향한 시선과 생각의 피해자가 아닌가. 


나의 눈에는 보인다. 진저와 재스민의 앞으로의 삶이. 흔히 규정내려지는 행복과 상류층은커녕 중산층의 삶과도 그리 깊은 인연이 있을 것 같진 않은 진저이지만 그녀에게 절대적 불행은 없을 것이다. 반면 어느모로나 상류층의 면면을 자랑하는 재스민은 복잡다단하고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매일매일과 가끔 찾아오는 절대적 불행이 함께 할 것이다. 어느 삶을 '선택'할 것인가?


두 삶의 양태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거리 이상으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같은 미국이라는 진리만큼 삶에 있어서 절대적 동떨어짐과 차원을 달리함이 없다는 걸 왜 모를까. 모든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그건 모든 나라를 포함한 이 세계와 이 세계를 지탱하는 많은 요소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시대 모든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라고 다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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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양익준 감독·각본·주연 <똥파리>


똥파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그는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영화사 진진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은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돈을 받아와야 할 대상은 물론, 같이 일하는 후배들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팬다. 그런 그도 이복 누나와 그 아들인 이복 조카한테는 그나마 대해주는 편이다. 상훈은 사람을 패서 번 돈을 조카 손에 쥐어주며 그 표현을 한다. 


한편 상훈은 길을 가다 우연히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와 시비가 붙는다. 안하무인 상훈에게 대적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데, 연희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상훈에게 대들며 욕을 날리고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지 않는가? 이에 상훈도 주먹을 날리고는 곧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왜 아버지에게 폭력을 날리는 것인가? 곧 기가 막힌 사연이 밝혀진다. 상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날 급기야 식칼로 위협을 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칼에 맞고 죽는다. 상훈이 여동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향하고 뒤따라 오던 어머니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아버지는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연희에게도 사연이 있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다 용역 깡패에 맞아 죽고 없다. 아빠는 정신 이상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데, 허구헌날 죽고 없는 엄마 타령이다. 오빠라고 있는 영재는 하는 일 없이 연희에게 돈을 뜯어가며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고생에 불과한 연희는 공부는 물론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양익준 원맨쇼의 수작 <똥파리>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독립영화 르네상스 한 가운데에 <똥파리>가 있다. ⓒ(주)영화사 진진



2009년작 독립영화 <똥파리>는 양익준 감독·각본·주연의 원맨쇼에 가까운, 그럼에도 수작 중 수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니와, 그 해결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흔하디 흔한 자기 변명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2010년을 좌우한 독립영화의 르네상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 3대 작품으로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2009년작 <똥파리>, 2011년작 <파수꾼>을 뽑는데 <똥파리>가 그중 가장 덜 어렵고 가장 직선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리 폭력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육체적 폭력의 수위 자체가 그리 높진 않은 것이다. 다만, 폭력의 주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쉬지 않고 나오는 쌍욕도 거북하게 다가온다. 욕은 육체적 폭력의 전조처럼 느껴지기에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영화의 폭력 수위 자체가 아닌 폭력의 주 상대와 그 연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여 거기서 폭력의 미학이라든지 폭력의 정당함 따위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 결코 정당방위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상훈의 폭력성이 아닌 상훈의 자상함과 따뜻함, 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똥파리>가 남겨둔 기회의 희극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나락 같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 폭력에 관한 영화들 와중에 기회의 희극 가능성을 남겨둔 <똥파리>. ⓒ(주)영화사 진진



위에서 언급한 <용서받지 못한 자>나 <파수꾼> 또한 다분히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는 사이에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 사슬을 끊고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자 도움을 청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들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똥파리> 주인공 상훈 역시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다. 그 역시 그 사슬을 끊고자 다짐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려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 대상은 예상했듯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이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이 폭력들은 결론적으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속출시킨다. 


하지만 <똥파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여지를 남겨둔다. 비극적 요소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기회의 희극 가능성, 그 씨앗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진 않는다. 상훈이 죽고 나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훈의 아버지, 상훈의 이복누나와 남편, 그 어린 아들, 그리고 연희까지.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상훈의 아버지가 눈에 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희망'과 '기회'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분히 비극적 요소도 있다. 그 연결고리는 제2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의 오빠인 영재. 그는 비록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연희와는 달리 상훈처럼 용역깡패의 길을 간다. 다름 아닌 그가 상훈을 죽이는데, 상훈의 아버지조차 희망과 기회의 공동체 안에 속하지만 그만은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엔 연희와 영재의 엄마를 죽게 한 이가 상훈이라는 비극의 선대(先代)가 있었으니...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최소한의 해결 또는 방편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이 영화는 그걸 몸소 보여준다. ⓒ(주)영화사 진진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것이 잉태된 이후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폭력인 '가족에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거기엔 과연 길이 존재할까. 오직 비극으로의 길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퍼진 암세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이쪽이 해결되는 저쪽이, 저쪽이 해결되면 그쪽이 문제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거시적인 관점까지 완벽하리만치 균형있게 그려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해결이라는 건 없다는 진리 위에, 비극의 계속되는 잉태와 희망을 꿈꾸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양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 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정상을 이런 식으로 포착해낸 듯하다. 


나 또한,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사슬 위에 서 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지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그건 즉, 나 또한 누군가를 괴롭혀 왔다는 뜻이다. 내가 알기론, 사람은 받은 것을 최소한은 돌려주려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그걸 당사자한테 돌려주긴 쉽지 않으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그건 설사 내가 의식하고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거기엔 당사자 또는 당사자가 포함된 집단에 어떤 큰 결단 내지 큰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대부분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영화는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해결 또는 나아감을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르다. 제3의 인물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애초에 다가가기 힘들겠지만 훨씬 더 가깝고 이해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그(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불행한 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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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금발이 너무해>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서 잽을 날리는 영화 <금발이 너무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할리우드가 영화 하나는 정말 '잘' 만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작정하고 세상이 놀랄 블록버스터를 내놓을 때도, 제대로 된 진지하고 의미있고 비판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내놓을 때도 아니다. 물론 돈 벌고자 만든 그렇고 그런 상업 영화도 아니다. 다름 아닌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 적당히 잽을 날리는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15년도 더 된, 자그마치 2001년에 나온 영화 <금발이 너무해>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커녕,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나쁘진 않은 상업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이상의 것을 주지도 않았고 그 이상의 명작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여러 모로 '잘'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나아가 이 영화가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어가고 의미 있게 끄집어낼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때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내놓거나, 그 자신의 포지션보다 더 많은 포텐셜을 터트려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법 아닌가. 가령,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분한 최악의 리메이크 중 하나로 뽑히는 <스텝포드 와이프>도 나에겐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었다. <금발이 너무해>라면?


잘 만든 영화 <금발이 너무해>가 줄 것들은?


<금발이 너무해>는 '잘' 만든 영화이다. 마냥 재밌게 볼 수도, 문제의식의 시선으로 볼 수도, 다분히 할리우드식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볼 수도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금발이 너무해>로 괜찮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데뷔한 후 연달아 흥행면에서는 당시 톱랭커에 들게 된 로버트 루케틱 감독. <21>로 정점을 찍고, 2010년대 들어서는 되도 않는 우려먹기로 폭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여하튼 그런 그가 데뷔작을 함께 할 주연으로 점찍은 이는 리즈 위더스푼. 작은 키에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스탠퍼드대학 출신(중퇴라고는 해도)에 이전까진 주로 정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이 영화가 마냥 귀엽고 재밌고 즐거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인공에게 그것을 타파하려는 타파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가 주어져 있으니, 리즈 위더스푼만 한 배우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이후 종종 <금발이 너무해>의 느낌을 울궈먹고자 하는 게 보여 안타까울 때가 있긴 하다. 그것도 그녀의 생김새에 따른 편견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리즈 위더스푼이 분한 엘 우즈는 청초한 금발, 귀엽고 예쁜 얼굴, 군살 없는 몸매, 핑크핑크하고 화려한 옷가지, 장학생이자 캠퍼스 모델, 부잣집 딸로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다. 하버드 법대생 남자친구까지 있다. 문제의 시작은 다름 아닌 그 남자친구 워너. 워너가 청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특별한 저녁 자리에서, 워너는 엘에게 이별통보를 한다. 자신의 집안이 5대 째 상원 의원을 배출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명문가 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등 별별 이유를 다 대지만, 중요한 건 엘이 'Legally Blonde', 즉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이유였다. 


엘은 곧바로 하버드 법대를 준비하고 좋은 성적으로 붙어버린다. 하지만 그곳은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그녀가 있을 곳 같지 않다. 이에 엘은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다시금 열심히 공부한다. 비로소 하버드 법대생이 된 것 같은 엘, 급기야 극소수의 엘리트만 붙는다는 인턴에도 붙어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존재하는 난관들은 그동안 그녀를 옭아맨 편견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극복할까?


'머리 나쁜 금발머리'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들


화려한 금발머리는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자, 주인공 엘 우즈가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화신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의 재미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지해야 할 또는 진지하게 비칠 엘의 난관 극복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가 계속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은 수없이 많고 엄청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이다. 애써 코믹하게 그려내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더욱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편으론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감이 있어 조금만 살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단연코 그녀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한 한 마디이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편견의 상징과도 같은 말은 워너가 그녀에게 건넨 '머리 나쁜 금발머리'이다. 금발머리 여성이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엄청나게 고착화 되었을 거다다. 그건 일종의 형상화인데, 유추되고 유추된 것들의 총합이다. 굉장히 무서운 편견이다. 경우에 따라선 가장 많이 선행되고 있지만 가장 피해야 할 악질적 차별인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등과도 동급이라 할 만하다. '우생학'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다. 


금발머리는 일단 그 자체로 화려하다. 화려한 금발머리 여성 중 당연히 몇몇은 화려한 겉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당연히 몇몇은 실제로 머리가 나쁠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것들의 당연한 총합은 굉장히 눈에 잘 띄고 자연스레 하나의 형상화로 뇌리에 박혀 잘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머리 나쁜 금발머리의 형상이 굳어진다. 이런 식이라면 만들기 나름이지만, 이 총합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 워낙 크기에 알려지기는 쉽고 기억되기 쉽지만 잊히기는 쉽지 않고 바로잡기도 쉽지 않다. 


엘이 이후에 계속 넘어야 하고 넘게 되는 난관들은 모두 이 대표적인 편견에서 파생된 변종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녀가 금발이 아니었더라도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았더라도 얼굴과 몸매가 예쁘지 않았더라도, 셋 중 하나만으로도 편견은 계속 그녀를 향했을 것이다. 편견들의 총합이 큰 형상을 이룬 이상, 각각의 편견들도 각자 충실히 기능한다. 모두 다 하나씩 깨부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지 말고 나아가자


결국 극복에 성공한 엘 우즈. 그녀는 말한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엘을 가로막는 편견은 사실 굉장히 이성적이다. 감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당연한 사실 또는 진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성적 사고의 산실과도 같은 하버드 법대에서조차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는 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걸 뜻한다. 이성에서 길을 찾을 수 없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녀가 택한 건 이성이 아닌 감성 즉 열정이고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신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당당히 졸업하게 되는 엘은 졸업연설로 명대사를 시전한다. '하버드에서의 첫 강의 때 존경하는 교수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셨죠. "법은 열정을 배제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버드에서의 3년을 되돌아보니 열정이란 법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더군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리버티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세상에 나갈 수 있어요. 첫인상은 틀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엘은 그럼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 깊이 박힌 편견의 형상, 그 표준과도 같은 엘은 그 모습이 그대로 세상을 향했다.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것인지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한편 이 영화는 자기확신과 그에 이르는 열정, 그에 따른 용기라는 자기계발의 주요 요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탓하지 말고 우선 자기부터 계발하라는 말이다. 


조금 꺼림칙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 것이, 혼자만 바뀐다고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나부터 먼저 바뀌고 또는 올바른 길을 가면 그 영향이 두루두루 퍼진다고 말하고 있기에,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싶다. '연대'는 애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주고받으면서 잇는 것도 가능하지만, 깨달은 누군가가 툭 튀어나와 찾아다니고 설득하며 잇는 것도 가능하다. 엘은 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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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