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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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