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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엄마와 아들, 그들에게 찾아온 비극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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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케빈에 대하여>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고, 논란도 이런 논란이 없을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티캐스트


화려한 붉은 물결의 토마토 축제, 그 한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 분)가 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 그 붉은 물결은 끔찍하게 변한다. 더러운 소굴 같은 집안에서 깬 에바는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붉게 칠해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한다.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 없이 차를 타고 에바가 도착한 곳은 한 여행사,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에 발탁된다. 


신나서 집으로 가려는 찰나 길에서 마주친 중년여자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신나 죽겠어?"라고 말하더니 대뜸 에바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악담하면서 가버린다. 지나가던 이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만류하며 에바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중간 중간 알 길 없는 장면 장면들이 지나간다. 건물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다. 반면 에바는 홀로 그 앞에서 멍하니 지켜볼 뿐. 한편, 에바는 교도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대략 유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갇혔으며 엄마는 그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모성'은 당연한 것인가?


세상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모성'이다. 이 영화는 모성이 당연한 것인지 충격적으로 묻는다. ⓒ(주)티캐스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의 전모를 날카롭게 때론 섬뜩하고 끔찍하게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가능한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가? 반론은커녕 물음조차 쉽지 않은 명제인 '모성의 당연함'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해부되고 깨어진다. 


다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기일 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힘들었다.' 아기라면 으레 다 집 떠나가라 울어야 정상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결혼은 물론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아기 케빈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고, 차라리 공사장 소음 소리가 편했다. 그녀는 애초에 엄마가 되기 싫었고, 스스로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케빈은 갓난 아기를 벗어나자 엄마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에바는 당연히 케빈이 남자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케빈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커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만'을 향한 적대심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느 날, 에바는 케빈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다. 전통으로의 회기를 선택해 대가족화를 밀고 나가는 어느 부모, 그렇게 태어난 일가족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섯째 아이 벤, 이들의 처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 소설이 시대, 선택, 운명 등의 문학적 장치들을 정교하게 끌어들였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심리 등의 현실적 장치들을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비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


영화는 내내 비극이 찾아온다. 작은 비극들이 모여 큰 비극이 되는데, 이를 반복한다.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 ⓒ(주)티캐스트



상황이 이럴진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영화에서 크나큰 사건은 3번에 걸쳐 일어 난다. 사실 에바가 엄마가 되고 케빈이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비극 중 첫 번째는 영화에서 중요 분기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적대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바와 케빈 사이에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케빈이 실리아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느덧 청소년이 된 케빈은 가히 그 똑똑한 머리를 여전히 엄마 에바를 괴롭히는 데 쓴다. 엄마를 직접적으로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니, 노골적으로 적대적 눈빛이나 행동을 일삼는 건 물론 실리아를 괴롭히는 우회적 타격이나 엄마한테 자위 행위를 들켜도 멈추지 않는 등의 심리적 타격을 일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싱크대를 막히게 해서 에바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독극물을 사용하게 만든 후 실비아가 실수로 독극물을 엎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 일이다. 겉으론 실비아의 실수, 나아가 에바의 잘못이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케빈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은 거라는 사실. 그건 에바를 향한 케빈의 처절한 '복수'다. 결국 케빈의 복수는 에바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파국을 안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바의 지옥 같은 현실과 지옥보다 더한 강제적 과거 회상, 그리고 에바와 케빈의 적대적 일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에바의 현실은 무덤덤하게, 과거 회상은 몽환적으로, 에바와 케빈의 일상은 사이코틱하게 그린다. 무엇보다 청소년 케빈을 분한 에즈라 밀러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다. 틸다 스윈튼은 에바 그 자체였다. 


특히, 에바와 케빈의 사이코틱한 일상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분명 잔잔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인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이 엄청난 것처럼 이들의 소소한 듯한 티격태격이 섬찟섬찟하다. 그 가중 큰 이유 중 하나가 적나라함에 있을 것이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우린 기괴함을 느낀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언젠가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어김없이 큰 일이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 논란거리는 아마 '케빈'과 '에바'일 거다. 엄마와 자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비극이 들이닥친다면? ⓒ(주)티캐스트



누구의 '잘못'이라고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케빈은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던 못했던, 낳자 낳지 말자 등등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케빈을 낳아 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에바 자신이다. 그 이후에 엄마와 자식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케빈이 그렇게 된 건 엄마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고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행간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엄마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임을 적용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시선은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로 간다. 보다 중요한 건 케빈이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논란이 있을 줄 안다. 내 주장은 형성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최소한 에바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케빈이 갓난 아기였을 때 보인 에바의 행동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행동은 단지 아기가 싫다는 이유로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아몬드>는, 감정이 없이 태어난 윤재가 감정이 풍부하고 교육 열정이 투철한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과 교육을 듬뿍 받아 결국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다. 반면 누구나처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채 태어난 곤이는 어릴 때 받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올바른 감정을 지니기 힘들다. 결국 선천적인 건 없다는 거다. 


이 영화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과 후천적. 아마 에바는 케빈이 선천적으로 나쁘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에바)가 아닌 네(케빈)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자신, 풍부한 감성과 열정적이고 반듯한 이성으로 케빈을 대했다면 당연히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잘 크지 않았을까. 한없이 안타깝다. 영화 또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엄마와 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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