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하다

[100년의 문학용어 사전] 우리나라 문학에서의 '검열'이란?

반응형




[100년의 문학용어 사전] 검열


검열 檢閱    영) censorship


공권력이 언론이나 출판, 문화, 예술 등에 대해 사전 또는 사후에 검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


검열의 역사는 꽤 오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분서갱유를 실시한 진시황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억압적 사회 체제의 지배 권력은 기득권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소수자나 반대자의 목소리를 탄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열이 오늘날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서양의 경우 존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 부제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위해 영국 의회를 상대로 작성한 존 밀턴의 연설문')를 출판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기서 ①햇빛도 보기 전에 출판물이 재판받는다는 점, ②무과실의 검열관이 있을 수 없다는 점, ③국민이 알아도 무방한 것과 알아서는 안 될 것을 당국이 선별하는 것은 필자뿐 아니라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을 들어 의회의 명령을 비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검열이 한 시대의 풍요로운 문학적 사유에 찬물을 끼얹은 대표적인 사례를 문체 반정에서 살필 수 있다. 강명관은 박지원, 이덕무 등의 문장이 주자학적 고문과 다르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걸어 감행된 정조의 문체 반정으로 인해, 비록 피를 흘린 사람도 없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없었으나, 그것이 결국 당대 새로운 사유와 표현에 대한 탄압의 족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검열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출판물도 공식적으로 출간될 수 없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뒤흔들 정도였다. 김동인은 "내 작품의 3분의 1쯤은 검열 때문에 잃어버렸다."라고 할 정도였다. 채만식은 "(내 작품의) 가장 정확한 독자의 수는 나 자신과 문선 직공 한 사람과 교정 보는 이 한 사람과 검열관 한 사람 총합 네 사람"이라고 야유하기도 했다. 특히, 카프나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탄압은 극심했다. 검열 때문에 우리 문학사를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다는, 그래서 때로는 복자를 꿰맞추는 게 한국 문학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임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반공주의에 의한 검열이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대표적인 예가 '분지 필화 사건'이다. 남정현의 단편 소설 「분지」는 1965년 3월『현대문학』에 게재되었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65년 북한의 노동당 기관지『조국통일』에 이 작품이 전재되면서 이른바 '분지 필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이 의미 있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반공법이라는 대립 관계가 펼쳐지면서, 1960년대의 시대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반공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1974년에는 일본에서 출판되던『한양』지에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이 '문인간첩단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고초를 겪었다. 김지하의 '오적 필화 사건'도 1970년대를 대표하는 검열 사건이다. 이 밖에도 김지화의『황토』, 문병란의『죽순 밭에서』, 양성우의『겨울공화국』, 조태일의『국토』, 현기영의『순이 삼촌』, 황명걸의『한국의 아이』 등이 검열의 희생양이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양성우의『북치는 앉은뱅이』, 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정지아의『빨치산의 딸』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검열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 사회에 일정 정도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검열이 문화적 검열로 그 중심축을 이동하였다. 


1996년 10월, 장정일의『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출판 후 바로 폐기되었다. 그래도 그것은 '성 담론'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린 중요한 문학 텍스트로 기억된다. 장정일이 등장인물 '와이'와 '제이'의 행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자기모멸과 부패한 기존 가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정부 당국은 간행물윤리위원회를 통해 '와이'와 '제이'의 '성행위 묘사'를 문제 삼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통념에 대한 문화적 저항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검열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지배 권력에 의한 검열은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물에 대한 탄압일 뿐만 아니라, 검열을 의식한 결과 표현의 위축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한에서 문학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담당한다. 문학예술 작품에 대한 엄격한 검열 과정은 곧 당이 정한 기준에 적합한 작품인가를 판단하고 당 정책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으로, 당의 사상 외에 사상 유입을 차단하여 사상 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 한만수, 「일제 식민지시기 문학검열과 원본 확정」,『대동문화연구』제51집, 2005. / 홍사중,『영국혁명사상사』, 전예원, 1982. / 강명관, 『안쪽과 바깥쪽』, 소명출판, 2007.


 <100년의 문학용어 사전>, 아시아 출판사 펴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