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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학폭, 종말, 사이비종교까지 어디로 튈지 모를 이야기들 <지옥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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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지옥만세>

 

영화 <지옥만세> 포스터. ⓒ 찬란

 

어느 공터, 교복을 입은 가해자 학생들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주저앉아 있는 단발머리 황선우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힌다. 한편 송나미는 엄마의 가게 방에서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다가 엄마한테 혼나고 집을 나간다. 그녀는 자살 시도를 했는데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둘은 친구들이 모두 수학여행을 갔을 때 만나 동반 자살을 하기로 한다. 나미가 우선 목을 메기로 하며 선우에게 유서를 건넨다. 하지만 곧 자살 시도는 끝난다.

선우가 말하길 나미의 유서 속 박채린은 서울로 가서 잘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SNS에 버젓이 만천하에 알렸다나 뭐라나. 그들은 공동의 적, 선우에겐 학폭 가해자이고 나미에겐 따돌림 가해자인 박채린의 인생에 흠집이라도 내고자 수안보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낙원 상가. 그곳에서 우연히 박채린을 목격하고 어느 건물로 들어간다. 오랜만에 조우한 가해자와 피해자들. 그런데 채린의 행동이 이상하다.

채린이 다짜고짜 나미에게 다가와 서슴없이 안아 버린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나미와 선우, 채린은 자신의 죄를 모두 간증했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죄를 사해 주셨으며 두 피해자가 직접 찾아오는 기적까지 일어났으니 더할 나위 없다고 했다. 그러며 선우와 나미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자신에게 뭐든 하라며, 욕하고 때려도 좋다고 한다. 그곳은 효천선교회라는 곳, 채린은 바시아누 낙원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한다. 선우와 나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 당사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를?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보면 신애가 아들을 유괴범한테 잃은 후 기독교에 귀의해 유괴범을 용서하고자 면회를 갔다가 유괴범한테 "나는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후 신애는 이전보다 정신질환을 훨씬 더 심하게 겪으며 힘들어한다. 신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어떻게 유괴범은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한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지옥만세>의 주요 스토리 라인이 이와 비슷하다. 학교폭력의 주동자이자 집단 따돌림의 주동자 박채린을 만나 흠집이라도 내주려고 찾아갔는데 종교에 귀의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니? 아니, 피해 당사자인 자신들이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이 뭐라고 용서를 하는지? 그러며 악의 없어 보이는 눈으로 환영의 제스처를 취하는 채린을 보고 있으니 구토가 치밀지 않을 수 없다.

임오정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출신으로 2009년 <거짓말>을 시작으로 다수의 단편을 만들었다. 그녀가 내놓은 모든 단편이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또 대다수가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장편 영화는 연출 데뷔 1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이뤄졌다. 2022년에 제작해 2023년 8월에 개봉한 <지옥만세>로 독립영화의 흥행의 기준인 1만 명을 훌쩍 넘겼다. 범상치 않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 영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학폭, 종말, 사이비종교까지

 

영화는 몇 가지 갈래로 읽힌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매력 있다. 우선 학폭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막상 학교는 거의 안 나오긴 하지만 선우와 나미가 채린과 오랜만에 조우했을 때의 반응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움츠러들며 도망가고 싶어 지니 말이다. 복수하러 왔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채린의 반응이 복수하기 더 힘들게 한다. 선우가 우연히 목격한 교회 아이들의 행동으로 채린이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걸 유추해 본다.

채린의 상황, 나미와 선우는 자살 시도에서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종교적 개념이 눈에 띈다. 채린은 아버지 사업이 망한 후 사이비 종교 집단에 흘러들어왔고 낙원으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나름의 종말을 한 차례 겪은 상황이다. 추락이다. 나미와 선우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평온한 죽음의 상태를 원한다. 그들은 종말로 나아가고 싶다. 그들에겐 종말이 추락 아닌 복귀다.

사이비종교의 이야기 갈래도 빼놓을 수 없다. 선우와 나미가 채린을 찾아간 곳은 효천선교회, 교회의 탈을 쓴 사이비종교집단이다. 친절함과 무해함, 그리고 한 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을 무기로 선우와 나미한테도 마수를 뻗치려 한다.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게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낙원이란 게 사실 지옥과 다름없는 곳일 텐데…

 

연대하고 보호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그런가 하면 위의 여러 갈래를 한데 묶어 두 여고생이 연대해 함께 모험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선우와 나미, 둘 사이를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같이 자살 시도를 했고 같이 공동의 가해자를 찾아갔으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상황에서 헤쳐 나왔다. 그러며 피해자들인 둘 사이에도 존재했던 벽을 허물었고 얼떨결에 사이비종교집단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살하는 마당에 채린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야망(?)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 같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나미는 동화되어 가는 듯하며 선우는 차마 누군가를 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채린에게 복수를 하든 말든 일단락 나고 돌아오면 다시 지옥이 시작된다. 그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것뿐이다. 오늘 하루 더 살기로 했다면 죽기로 결심했을 때만큼의 용기를 가져왔을 때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학폭 가해자들은 사라지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마음가짐을 달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읽힐 요량이 있다. 또 '세상 밖을 다녀와 보니 알겠지? 학교 안이라 그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시종일관 학폭 가해자 채린뿐만 아니라 사이비종교 가해자들의 지리멸렬한 면면을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선우와 나미의 대사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들을 보호해 줄 이는 없다고 천명한다.

결국 선우와 나미, 나미와 선우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또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그게 학교 안이든 밖이든 지옥 같은 현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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