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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두 소년의 맑은 우정과 그들을 감싸는 선한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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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포스터. ⓒ 와이드 릴리즈(주)

 

어느덧 나이 50을 바라보는 히사 다카아키는 소설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현실은 대필 작가다. 유명 인플루언서의 대필 자서전 대필로 거액의 돈을 벌 수 있으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는데, 이혼해서 가끔만 볼 수 있다. 한숨만 나오는 인생,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다가 문득 고등어 통조림 한 캔을 보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986년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나가사키 어촌 마을, 히사는 티격태격 평범하지만 정 많은 가족의 일원이다. 그가 다니는 학교의 반에는 매일 민소매 티만 입는 다케가 있다. 반 친구들이 놀리길 다케네 집이 못 살아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다케는 히사와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친구들이 본 다케네 집은 형편없었다. 다들 깔깔 대고 웃을 때 히사는 웃지 않고 슬픈 눈으로 다케를 바라봤다.

얼마 후 다케는 히사에게 돌고래가 출몰했다는 부메랑 섬에 가자고 한다. 못 가겠다고 하는 히사, 다케는 얼마 전에 히사가 100엔 동전을 주워 꿀꺽한 걸 봤다고 함께 안 가면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새벽같이 긴 여행을 떠난 히사와 다케, 히사의 자전거를 함께 타고 가기로 했다. 히사는 내키지 않고 다케는 애초에 성격이 시크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여정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일본판 '응답하라 1986'

 

10여 년 전 '응답하라' 시리즈가 방영될 때마다 한국을 들썩이게 했다. 당시 한국 드라마를 지배하다시피 한 일명 막장 드라마와 결을 완전히 반대로 하는, 한없이 맑고 긍정적이고 깔끔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연출이 빛을 발했다. 무엇보다 각각 1997년, 1994년, 1988년을 배경으로 한 레트로 드라마라는 점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바, 힘들고 팍팍한 현 시절에 비해 살 만했던 옛날을 판타지에 가깝게 그려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일본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은 일본판 '응답하라 1986'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들이 주인공이지만 그들을 은근슬쩍 지켜보고 도와주고 살가운 한마디로 성장시키는 어른들이 있다. 웃음과 감동의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았다. 근래 본 수많은 영화 중에 단연 꼭짓점에 위치해 있다. 사람을 움직일 힘이 있는 영화다.

영화는 일본 드라마를 대표할 만한 자격이 충분한 <한자와 나오키>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한 카나자와 토모키 감독의 입봉작이다. 그의 이력이 특이한데 개그맨 출신으로 지상파 예능 작가의 길을 갔다가 드라마 작가를 거쳐 영화감독까지 다다랐다. 각본도 도맡은 건 물론이다.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영화에서 순도 높은 웃음이 빵빵 터지는 건 감독의 과거 이력 덕분이 아닌가 싶다.

 

두 소년의 우정 어린 여정

 

아이들의 교실 파워게임이 시작되는 듯하다. 몇몇이 모여 허름해 보이는 한 아이를 지목한다. 그는 다케, 근데 반응을 보니 밀릴 것 같지 않다. 급기야 직접 자기 집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역으로 친구들의 반응을 보겠다는 심산인가?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을 보여줬더니 예상대로 다들 깔깔 웃으며 돌아간다. 와중에 히사만이 웃음끼 전혀 없는 슬픈 얼굴로 뒤돌아 다케를 바라본다. 다케는 그런 히사를 눈여겨본 것 같다.

다케와 히사, 히사와 다케의 하루 여정은 의외로 다케의 협박 어린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아마 당시에는 둘 다 그 여정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을 것이다. 허름한 집에서 아빠 없이 아빠 노릇을 하며 동생 넷을 보살펴야 했던, 그래서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던 지난날. 그런 와중에 히사라는 아이가 눈에 띈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히사와 친구를 하고 싶어 희한한 여행을 제안했을 테다. 돌고래 따위가 무슨 대수랴, 자전거 따위 망가지면 어떠랴,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우면 된 거지.

히사로선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평소 친하기는커녕 말 한마디 섞지도 않은 다케가 다짜고짜 함께 돌고래를 보러 멀고 험한 곳으로 가자는 게 말이다. 소심하고 체력도 약한데 겁도 많아 끌려다가 시피 길을 나섰는데, 의외로 재밌다. 생각하면 왠지 뭉클한 시간, 마이너스였던 기대감이 100% 채워지고, 다케와 진짜 친구가 된 것 같다. 생전 처음 경험한 감정이다.

 

파수꾼처럼 아이를 지켜본 어른들

 

히사와 다케의 곁에는 항상 어른이 있다. 다케의 엄마가 히사에게 다케를 부탁하고, 히사의 아빠는 히사와 다케의 여정을 응원한다. 그들의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은 히사의 목숨을 구해 주고 그들에게 먹을 걸 주고 동네 건달들의 행패에서 구해 주고 집 근처까지 차로 안전하게 데려다준다. 그런가 하면 다케가 자주 서리하는 과수원 주인은 마치 괴물처럼 그들을 쫓아다니지만 사실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살피는 존재다.

생각해 본다, 나의 어린 시절을. 히사 또는 다케 같은 친구가 있었나? 있었다. 우연히 만나 필연처럼 친구가 되어 매일같이 함께 다니며 그가 나를 위험에서 구해 주기도 했다. 사소한 게 크게 번지기도 했고, 그가 이사를 가게 되어 헤어졌다가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들을 보살핀 어른들이 있었나? 있었다.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서로 잘 아셨고 서로의 아이를 부탁하셨다. 동네 곳곳에 어른들이 파수꾼처럼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한 번쯤 옛사람들에게 연락을 해 보지 않을까 싶다. 그런 힘이 있는 영화다. 그런가 하면, 어른이 된 나는 누군가의 파수꾼이 될 수 있을까.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콜필드가 꿈꾼 이상적인 어른처럼 말이다. 그렇게 어른의 올바른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는 다시 누군가를 보살필 것이다. 세상이 참 아름다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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