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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각본집' 유행, 그 이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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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의 영화화는 어느덧 오래된 주제입니다. 문학만이 가지는 고유의 문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스크린에 구현해내느냐가 주된 포인트죠. 그렇게 참으로 많은 영화들이, 좋은 영화들이 좋은 문학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의 공생 관계는 영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시류가 달라졌습니다. 현 세계 영화시장을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있는 할리우드로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문학'의 영화화는 이어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문학이 가지는 원작 콘텐츠로서의 자체 확장성에 주목한 것이죠. 마블과 DC로 대표되는 코믹스 작품의 영화화입니다. 


코믹스, 문학의 한 부분으로 충분히 편입 가능한 분야입니다. 흔히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명작 만화들이 존재하죠. 마블과 DC의 영화 원작들이 이 범주에 들 만한 정도로 문학적 퀄리티를 자랑하는가와 별개로, 또한 굳이 만화가 문학의 범주에 들어야 하는가의 논의와 별도로, 만화가 가지는 영화 원작으로서의 가능성은 이미 무한이죠. 


반대로, 비단 영화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읽는 콘텐츠에서 보는 콘텐츠로의 통행이 전방위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와중에 읽고 보기도 하는 콘텐츠인 만화가 각광받고 있는 건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이 게을러진 것인지,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것처럼 관객 수준에 맞추고자 한 것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겠습니다. 


각본집과 대본집 출간의 새로운 움직임


<아가씨 각본> 표지 ⓒ그책



요즘 출판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조금씩 보입니다. 아직 '유행'이라고 할 것까진 아닐지 모르지만, 워낙 작고 잘 휘둘리는 한국 출판계의 사정상 유행을 넘어 광범위하게 문어발식으로 뻗어나가는 광풍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읽는 콘텐츠에서 보는 콘텐츠로의 통행만이 아닌, 반대의 움직임이 그것입니다. 


영화엔 시나리오 또는 각본이 있을 테고, 드라마엔 대본이 있을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감독이나 배우뿐만 아니라 작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텐데, 바로 그들이 남긴 글인 것이죠. 범문학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각본집과 대본집 출간이 속속 들려옵니다. 


지난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여러 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중 하나가 다름 아닌 각본집 출간인데요. 디시인사이드 갤러리 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합니다. 유행에 따른 의례적인 출간이 아닌, 팬들의 요구에 따른 이례적인 출간이었던 것이죠. 책은 많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러곤 곧 같은 출판사에서 박찬욱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들 각본집을 출간했죠.


2년이 지난 지금,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개들의 섬> 각본집과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아는 와이프> <시간> <라이프> <너도 인간이니?> <미스 함무라비> 대본집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대체적으로 나쁘지 않게 팔렸고 최근들어 더 많이 팔리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중 한눈에 보이는 것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신과 함께> <미스 함무라비>는 만화와 웹툰과 소설로 원작도 있는 작품들인데 말이죠. 


출판계의 '원 소스' 위상이 사라지다


팔리니까 만드는 것일 테죠. 한편으론 출판계 생태계가 변화 또는 파괴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건 출판계를 주체로 생각할 때이고, 영화계나 드라마계를 주체로 생각해보면 관객이나 시청자층의 마니아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겠죠. 그들이 볼 때는 각본집이나 대본집이 또 하나의 콘텐츠가 아닌 홍보 또는 부가수익인 것이겠죠. 


그들보다 훨씬 작은 자본 생태계인 출판계에서는 충분히 지각변동을 일으킬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문학 하다못해 만화가 가지고 있던 텍스트의 위상이랄까, 스스로를 향한 위로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그나마도 있긴 있었던 '멀티 유즈' 아닌 '원 소스'만의 위상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읽는 콘텐츠 즉 텍스트든, 보는 콘텐츠 즉 영상이든, 오직 퀄리티로 승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방 통행은 사리지고 쌍방향 통행이 가능해졌기에 원 소스가 되기 위한 전쟁이 문화예술 콘텐츠 전방위적으로 시작된 것이죠. 


SNS조차 텍스트의 트위터에서 텍스트와 포토, 영상의 페이스북을 지나 포토의 인스타그램, 그리고 영상의 유튜브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문화예술계, 그중에서도 영상의 영화계와 드라마계, 그리고 텍스트, 포토의 문학계와 만화계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명약관화입니다. 각본집과 대본집이 소소하게 하지만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는 이면입니다. 


자리를 지키며 버텨야 하는 출판계


이쯤 되면 출판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생각을 개진하고,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까 하는 논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대를 이끄는 SNS이 그런 움직임을 빠르고 견고하게 이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영상이 대세가 되고 텍스트는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시대는 이미 와버렸고, 앞으로 그 양상은 더욱더 가파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다만, 위안이랄까 황당무계한 바람에서 오는 시덥잖은 들여다봄이랄까 SNS의 텍스트를 담당하는 트위터가 죽을 듯 죽지 않고 자리를 버티고 있다는 점이 새삼 고맙게 다가옵니다. 


앞으로 출판계는 이리저리 휘둘릴 것입니다. 사방 팔방에서 불어오는 광풍으로 휘청거릴 것입니다. 다양한 다른 생태계들의 부하 노릇을 해야 할 테고, 노예 노릇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지요. 자리를 지키며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버티면 다시 출판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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