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하다

열정의 '적절한 균형'에 대하여

반응형



"자네, 해봤나?" 현대그룹을 만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명한 말이다. 기업의 제1의 가치를 '도전'으로 치는 그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는 한 마디라 하겠다. 그 한 마디가 지금의 현대를 만들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 그의 또 다른 명언들을 보탠다. 현대만이 아니라 가히 지금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을 만든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만이 해낸다." 누구라도 들으면 힘이 나며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기필코 해내고야 말 것 같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그런데, 이 명언은 너무 간 것 같다. 도전과 열정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고 한 말인 것 같다. 너무나도 좋은 의미의 '도전'과 '열정'을 무식하리만치 한 데 모아놨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라.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 이 말이 지금도 통용된다는 건, 우린 여전히 전후 1960년대를 살고 있는 것이리라. 


'열정 만수르' '열정의 대명사' 유노윤호




최근 여러 의미로 '열정'이 이슈다. 의욕적으로 일에 매진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인 '번아웃 신드롬'이 전국민을 강타하며, 출판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바람과 생각을 글로 옮긴 책들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에세이의 강세와 맞물려 앞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동방신기 멤버 유노윤호가 '열정 만수르' '열정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사건(?)이 있었다. 3월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기상하자마자 바로 춤연습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였고, 10월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해 "열정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다" "사람의 몸에 가장 안 좋은 해충은 바로 '대충'이라는 벌레다"라는 명언을 내놓았다. 


이후 '나는 유노윤호다'라는 유행어가 한동안 SNS뿐만 아니라 대형포털 검색어 상위권을 장식했다. 번아웃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쓰러질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조 섞인 주문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지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유노윤호는, 그 예전 산업화 시대 때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 길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의 정신적 우상 정주영과 다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사람들을 옥죄는 열정이라는 괴물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외치는 에세이




요즘 출판계는 에세이가 대세다. 과거 정말 오랫동안 자기계발이 대세였던 적이 있는데, 직장인들이 필수로 봐야 했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끝없는 자기계발이야말로 회사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탄탄한 진로를 확립해주는 방법, 그 길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성공, 다름 아닌 자기계발 책들이 가르쳐주었다. 


이젠, 아니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길이 성공의 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과연 성공이 무엇인지 성공을 왜 해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묻는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 제목만 봐도 느껴지는 반(反)열정의 스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오늘은 이만 좀 쉴게요> 등의 책이 함께 한다. 


작년에는 사표를 내는 과정과 백수로 지내는 모습을 담은 에세이가 유행을 했었다. 사실 에세이라는 게 '쉼'을 매개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내보이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의 시대 상황 또는 시대 정신과 잘 맞아들어가는 것이리라. 넓은 의미에서 이 또한 자기계발의 일환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다. 


재작년 말 전국민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촛불혁명', 당시 박근혜 정부의 온갖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두고볼 수 없었던 국민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하여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비리를 척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제 위기를 전면에 내세운 채 돌이킬 수 없는 정치 위기를 몸소 양산해내고 있던 '벌레'를 '퇴치'했다고 하면 너무한 말일까. 


결과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긍정적 결과를 도출해냈지만, 국가와 사회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을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할 수밖에 비극인 것 사실이기에 국가 전체가 번아웃에 걸렸을 테다. 큰 일을 치른 후 일상으로 돌아오면 너무나도 힘든 게 자명한 만큼, 이 사회와 개인들은 그야말로 '살' 방법을 찾고 있다. 사회의 미묘하고 세세한 부분들을 캐치하는 걸 잘하는 출판계, 그 대세의 변화는 소소한 일면일 뿐이다. 


적절한 균형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균형'이 아닐까. 인간을 이루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이 공동체도 이 사회도 이 국가도 마찬가지다. 겪어본 결과 '열정'은 과하면 절대 안 될 테지만, 없어서도 절대 안 된다. 누구나 최소한의 열정은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열정에 비례해 나머지를 채울 건 무엇인가. 말그대로 '대충하는 것' '열심히 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본다. '과도한' 모든 것엔 '과도한' 반대급부가 생기기 마련인데, 참으로 오래된 과도한 열정 괴물이 부른 참사나 다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보다 '짧고 굵게' 사는 게 각광 받아 왔고 여전히 일면에선 각광 받고 있다. 이 '잛고 굵게'에 과도한 열정이 '잘 살아보자'는 말과 함께 그 자체로 자리를 잡고 있을 텐데, 그 반대급부이기도 하지만 적절한 균형에 맞춰 말하고 싶다. '가늘고 길게' 살자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프레임이 아닌, 누가 만든 기준인지 모를 '잘' 살 필요는 없다는 프레임에 맞추자는 이야기다. 


일단은 '그냥' 살아보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난 그냥 살고 있다. 그냥에는, 열심히 할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꾸준히 할 때도 대충할 때도 속해 있다. 어느 한 방면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어느 한 방면을 '하는' 것이다. 영원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떻게 영원히 열심히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가늘고 길게, 지치지 않고 살아보는 거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