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위대한 배우가 있다. 아니, 위대하진 않더라도 유명한 배우가 있다. 배우가 유명해지려면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해야 하겠지만, 잘생기고 예쁘기도 해야겠고 자기PR도 잘해야 한다. 이왕이면 좋은 학력이나 독특한 이력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다. '안목'이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 말이다.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을 들어봤을 만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최소한 하나 이상의 좋은 작품에 출연했다. (여기서 '좋은' 작품을, 작품성이나 흥행성에서 하나만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은 작품이라 칭하겠다.) 그래서 작품을 신중히 골라 얼굴을 많이 비추지 않되 항상 좋은 작품들에 출연하는 배우는 오히려 더 익숙하다.
소위 대단한 배우들도, 그중에서도 안목이 뛰어난 배우들도, 작품 선정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평소에 딱히 안목이 뛰어나고 느끼지 않는 배우들도 '도대체 왜 이런 영화에 나와 이런 배역을 연기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한번 추려보았다. '유명 배우들의 굴욕 배역'이다. 흑역사라고나 할까.
로버트 드 니로, 안소니 홉킨스, 알 파치노 등은 분명 '위대한' 배우들이다. 그들의 필모에는 전설 아닌 레전드 영화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터무니 없는 영화와 배역들 또한 즐비하다 못해 넘쳐 흐른다. 이런 경우, 한 작품 '삐끗'한 게 아니다. 이런 연유로 이밖에 여러 위대하고 유명하고 대단한 배우들이 이 기획에서 빠졌다. 또한 한국과 동양의 배우들도 이번 기획에서 빠졌다는 걸 미리 말씀드린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따로 모아보도록 하겠다.
<캣우먼> '캣우먼' 역의 할리 베리
<캣우먼>의 할리 베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말고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가 더 기억에 남는다. 아주 어린 시절 TV로 봤던 배트맨 영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몇몇 장면들은 에일리언 시리즈만큼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특이한 건 배트맨보다 조커, 펭귄, 캣우먼 등의 모습이 훨씬 더 선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완벽한 악당일 수 없었고 그 어린 시절에도 어딘가 연민이 갔다.
배트맨 시리즈는 이후 조엘 슈마허가 맡아 3, 4 모두 희대의 망작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 2>에서 가장 강렬한 여운을 남긴 캣우먼이 10여 년만에 단독으로 제작되었다. 캣우먼 역은 엑스맨 시리즈에서 스톰 역을 맡아 섹시한 히어로에 일가견 있는 모습을 보였고 <몬스터 볼>로 미국 아카데미와 베를린에서 상을 타며 연기력까지 인정 받은 할리 베리가 맡았다. 가히 완벽한 배역인 듯했다.
흑인 여배우 최초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할리 베리는 당연히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각본과 연출이 영화의 전부이다시피 한 캣우먼을 살리지 못했다. 영화는 할리 베리를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으로 데려가 그녀로 하여금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타게 만든다. 할리 베리는 이례적으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 참여하여 "이 쓰레기 같은 영화에 나를 캐스팅 해줘서 진짜 고마워요!"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우리에게 익숙한 캣우먼은 <배트맨 2>의 미셸 파이퍼, 영웅과 악당을 오가고 광기와 슬픔을 동시에 품은 채 순수하게 캐릭터적인 섹시함을 풍겼다. 하지만 할리 베리의 캣우먼은 오직 섹시만을 강조한 채 밋밋하기 짝이 없는 로맨스와 액션을 영화의 절반씩이나 보여준다. '우리'의 캣우먼은 어디가고 '그들'만의 캣우먼이 왔는가. 덕분에 원더우먼보다 훨씬 더 매력적일 수 있었던 캣우먼은 사라지고 원더우먼이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만에 다시 찾아올 때까지 여성 히어로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린 랜턴> '그린 랜턴(할 조던)'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
<그린 랜턴>의 라이언 레이놀즈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현존 최고의 히어로물을 양산하고 있는 마블 코믹스에는 흑역사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반면, DC 코믹스에는 <캣우먼>을 비롯한 수많은 흑역사가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흑역사를 양산 중이다. 그중에서도 큭 족적(?)을 남긴 영화가 있으니 2011년작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이다. 이 작품은 히어로물 전체에, DC 코믹스와 워너브라더스에게, 그리고 지금은 <데드풀>의 데드풀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라이언 레이놀즈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본래 그린 랜턴은 DC 코믹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중 하나로, 마블의 어벤저스와 같은 DC의 저스티스리그 원년 멤버이자 중심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과 비평 대참패로 영화 <저스티스 리그>의 중심축은커녕 주요 멤버로 등장하지도 못했다. 그저 회상 신에서 잠깐 등장했을 뿐이다. DC와 워너는 2020년 <그린 랜턴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그린 랜턴> 리부트를 진행 중이라 한다.
<그린 랜턴>은 제작 당시 마블의 <아이언맨>을 꿈꿨다. 슈퍼맨과 배트맨 이후 차세대 스타가 없었던 DC가 모든 걸 쏟아부은 작품!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자 캐릭터였기 때문인데, 결과는 처참했다. 전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거대한 스케일은 그린 랜턴 군단의 하찮음이 집어삼켰고, 심각하게 빛을 잃은 유치함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민망함을 불러일으켰다.
단연 그 중심에는, 처참한 실패의 중심에는 그린 랜턴이 있어야 하고 있었을 테지만, 캐릭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 영화가 캐릭터를 활용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게 맞는 듯하다.
<캣우먼>도 그렇고 <그린 랜턴>도 그렇고 주연을 맡은 할리 베리와 라이언 레이놀즈는 당시로서는 충분히 그 배역을 맡을 이유와 열망이 있었다. 유명 제작사와 거대 배급사에서 대놓고 미는 작품이자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비평 면에서는 몰라도 흥행 면에서는 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지 않았겠는가?
<그레이트 월> '윌리엄' 역의 멧 데이먼
<그레이트 월>의 멧 데이먼 ⓒUPI코리아
1980년대 후반 스크린에 데뷔해 10년 후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찬사를 받는 것도 모자라 미국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각본상까지 수상하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 멧 데이먼. 비록 중퇴이지만 하버드대학 출신의 그, 이후 행보는 그야말로 탄탄대로.
<그림 형제>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연기면 연기 액션이면 액션 모두 수월했고 <굿 윌 헌팅>을 통해 보여준 각본 실력은 물론 제작과 기획 그리고 감독까지 섭렵했다. 그야말로 믿고 볼 수 있는 배우 멧 데이먼인 것이다. 그러던 그가 불과 최근 황당한 영화의 황당한 배역을 맡은 적이 있다. 감독이나 함께 출연한 배우의 면면을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구원하진 못한다.
자그마치 장이머우 감독의 <그레이트 월>이 그 작품인데, 함께 한 배우로 자그마치 윌렘 데포, 유덕화 등이 있다. 중국판 국뽕의 완결판, 중국판 <디 워>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에 멧 데이먼은 왜 출연했을까. 그는 이전과 달리 2010년대 들어 <엘리시움> <인터스텔라> <마션> 등의 블록버스터에 출연했다. 그 정점에 <그레이트 월>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스케일 면에서는 충분히 장대함을 자랑하고 또 '판타지' 장르로서는 <그림 형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영화를 보면,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따른 사라진 각본의 약점은 차치하고 윌리엄이 도대체 왜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의 존재는 그레이트 월, 즉 만리장성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윌리엄 역을 멧 데이먼이 맡지 않아도 됐었다는 얘기가 된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를 꿈꿨을 게 분명한데, 결과는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47 로닌>에 버금가고 말았다.
<그레이트 월> 이후 멧 데이먼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흥행과 비평 양면 모두에서 믿을 만했던 그의 영화가 양쪽 모두에서 '그레이트'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북미에서는 2018년에 한 작품도 내놓지 못했고 2019년 이후의 계획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좋은 작품으로 찾아오길 바라지만, 그의 절친이자 동료 벤 애플렉이 <배트맨 대 슈퍼맨> 이후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아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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