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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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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과 현실을 오가는 환상적 이야기와 치명적인 디스토피아 세상 <인셉션> 2019.08.27
  •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독재와 불복종의 잔혹한 이야기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2019.05.10
  • '잘돼가? 무엇이든'이라고 묻는 배려 2018.12.18

꿈과 현실을 오가는 환상적 이야기와 치명적인 디스토피아 세상 <인셉션>

오래된 리뷰 2019. 8.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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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인셉션>


영화 <인셉션>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08년 <다크 나이트>라는 슈퍼 히어로 영화로 '천재'에서 '거장'으로 거듭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이 영화의 흥행과 비평 양면 큰 성공을 바탕으로 워너브라더스에서 큰 돈을 투자받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보라는 전언과 함께. 그에 놀란은 10여 년 동안 갈고 닦은 시나리오로 2년 만에 <인셉션>을 들고 와 또 한 번 흥행과 비평 앙면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인터스텔라> <덩케르크>까지 워너와의 윈윈 작업을 이어나간다. <다크 나이트> 이전, <배트맨 비긴즈> <프레스티지> 또한 함께 한 그들이다. 그리고 내년 개봉 예정인 국제 첩보 액션물 <테넷>도 함께 할 예정이다. 15년 여를 함께 한 놀란과 워너의 작업물들 중 최고는 단연 <다크 나이트>일 테지만, 놀란의 독자적인 천재성이 돋보이는 <인셉션>도 또 다른 최고가 아닐까 싶다. 


범죄 및 스릴러 장르에 천착해 온 놀란은, <인셉션>을 기점으로 보다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를 선보였다. 그러는가 하면, 기획과 제작과 프로듀서 방면으로도 발을 넓히기도 했다. 놀란에게 <인셉션>은, 그의 이름을 알린 <메멘토>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평을 듣는 <다크 나이트> 이상 가는 의미를 지닌 영화라 하겠다. 그 놀라운 이야기의 간략한 줄거리를 살펴보겠다. 


꿈속에 침입해 생각을 주입하는 '인셉션'


코브는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과 꿈을 공유하고 타인의 꿈속에 침입해 비밀을 추출해내는 추출자이다. 그는 사이토라는 일본 기업가의 비밀을 추출해내려 하지만 실패해 고용주 코볼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코브의 실력에 감탄한 사이토는 역으로 그에게 협박 및 제안을 한다. 코브는 죽은 아내와 얽힌 사건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처지인데, 사이토가 해결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코브가 해야 할 일은 꿈속에 침입해 비밀을 추출해내는 게 아니라 생각을 주입하는 '인셉션'이었다. 


사이토가 제안한 일은, 사이토 기업의 경쟁 기업이자 세계 에너지 시장을 독식하다시피 하는 피셔 모로우의 후계자 피셔의 머릿속에 '물려받은 기업을 분할하겠다'는 생각을 심는 것이었다. 코브는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위해 드림팀을 조직한다. 기존의 한 팀인 포인트맨 아서와 함께 하고, 교수인 장인에게 설계자 아리아드네를 소개받고, 위조꾼 임스와 약제사 유서프를 물색해 찾아낸다. 사이토는 관광객이지만 직접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함께 한다. 


한편, 코브는 팀원들 몰래 매일 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내 맬과의 기억을 투영한 꿈의 세계를 유영하며 기억의 최하층에 맬의 무의식을 가둬놓는 실험도 병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맬은 코브가 임무에 임할 때마다 무의식 형태로 등장하며 방해를 했고 그 방식은 점차 대담·대범해졌다. 불가능에 가까운 인셉션 임무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끝없는 난관 위의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절대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 그곳엔 무엇이 있는지. 


꿈과 현실의 환상적 이야기의 이면, 디스토피아


영화 <인셉션>의 주된 내용 자체는 거창하지 않다. 드림팀을 조직해 불가능에 가까운 큰 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나 최동훈 감독의 '케이퍼 무비'를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영화 내적으론 팀을 조직해 강탈을 주된 목적으로 활동하고, 영화 외적으론 치밀한 각본과 화려한 촬영 테크닉을 자랑한다. <인셉션> 또한 여기에 거의 완벽히 부합한다. 다만, 그 안에 들어찬 이야기 및 의미가 전혀 다르다. 


영화는 우선 강탈이 아닌 주입이 목적인 점이 다르다. 이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데, 한 사람을 규정하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생각 자체를 주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업이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는 점 자체로 이미 전에도 후에도 없을 디스토피아이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했다손 쳐도, 세상이 아무리 파멸에 가까워진다손 쳐도 꿈속에 침입해 생각을 주입한다는 게 가능할까. 또한, 그건 어떤 세상을 불러올까. 생각하기도 힘들고, 생각하기도 싫다. 


영화는 그러니까 놀란 감독은, 아주 흥미진진하게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 세상을 우리 앞에 내보였던 것이다. 큰 범위에서 그가 <인셉션> 이전까지 선보였던 '인간 타락'의 끝이자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세상이 나의 것이 아니며, 결국 나의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만다. 우리는 영화의 치밀하게 직조된 각본과 화려하기 그지 없는 촬영 테크닉에 압도되고 '꿈과 현실'이라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환상적 이야기에 경도되어 그 이면을 살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환상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있어 보이는 영화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하에 이 영화를 본다면, 이 만큼 환상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쫄깃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찾기도 힘들다. 영화 외적으로 파고들어도 양파 껍질처럼 한없이 뭔가가 나올 것 같은 이 영화는, 그 반대로 영화 내적으로 즐기고 즐겨도 한없이 즐거울 것 같다. 꿈속에 침입해 비밀을 추출하고 또 생각을 주입하는 과정과 방식과 그에 따른 단어들은 마니아틱한 상상력과 DB력을 불러일으키고,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까지 들어가 찰나의 찰나까지 쥐어짜는 쫄깃함을 맛볼 때는 그야말로 100% 이입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해석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다양한 '떡밥'들은 그 자체로 영화를 둘러싼 재미요소다. 예를 들어, 작년에 8년 만에 밝혀진 결말 부분의 '꿈과 현실 논쟁'이 그것인데 코브가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 토템을 돌려놓고는 끝까지 보지 않고 가버렸고 결말이 나지 않은 채 영화가 끝나버렸다. 사실 별거 아닐 수 있음에도 <인셉션>의 가장 큰 논쟁이 그 부분이었는데, 이 영화의 아우라가 어느 정도인지를 반추하는 결정적 모습이라 하겠다. 


한편 이 영화를 보다 훨씬 '있어 보이게' 한 결정적 요소가 음악이다. 각본에 더해 촬영까지 있어 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한스 짐머 특유의 웅장하면서도 긴장감 어린 음악이 없었다면 상당히 밋밋했을 게 분명하다. <배트맨 비긴즈>를 시작으로 <덩케르크>까지 짐머는 놀란의 음악적 페르소나로 6편을 함께 했다. <인셉션>은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와 더불어 놀란 보다 짐머가 더 돋보이는 영화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인셉션>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에디트 피아프의 마지막 대히트곡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Non, Je Ne Regrette Rien>이다. 극중 꿈에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던 노래, 그 구슬픈 음색 안의 가사는 코브와 맬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에디트 피아프를 그린 영화 <라 비 앙 로즈>는 물론, 영화 <몽상가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청춘의 지난날을 감싸기도 했던 이 곡은 참 절묘하다. <인셉션>과 <몽상가들> 모두 꿈에서 빠져나오는 데 이 곡을 쓰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네 인생이 그 옛날 장자가 들여다봤던 것처럼 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실이면 또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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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디스토피아, 떡밥, 생각, 음악, 인셉션, 촬영, 크리스토퍼 놀란,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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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독재와 불복종의 잔혹한 이야기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5.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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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포스터. ⓒ디스테이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상 '판의 미로')가 13년 만에 재개봉했다. 2006년 국내 개봉 당시, '기이한 판타지'라는 단어를 앞세워 어른들 아닌 아이들을 공략하는 오판 마케팅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었다. 영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판의 미로>가 21세기 최고의 판타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걸 알겠지만 그러하기에 황당하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잘 모르고 봤던 이들은, 이 영화가 주는 여러 가지 의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재개봉하면서 '잔혹'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13년 전 그때 그 배급사는 잔혹함을 내세우면 관객들이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게 아니었을까. 지금은, <판의 미로>가 갖는 급이 다른 영향력과 작품성과 연출력과 풍부함을 알기에 한편으론 익숙하게 한편으론 새롭게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재개봉작들이 과거 큰 흥행과 파급력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시금 진정성 있게 다가간다는 것에서 진정한 의미의 재개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 사이 21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 불러도 손색없는 커리어를 쌓았다. 재작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쥐었으며 베니스에서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다. 역시 오스카를 평정한 알폰소 쿠아론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더불어 멕시코 출신 영화감독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그(3명이서 2014년부터 2019년까지 2017년을 제외하고 오스카 감독상을 독식했다)의 자타공인 최고작이니만큼 기대해도 좋다. 


오필리아의 세 가지 과제와 스페인 내전의 연장 전투


오필리아는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하고, 스페인 내전의 후과는 계속된다.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먼 옛날 지하왕국,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찬 그곳에 인간 세계를 동경하는 공주가 있었다. 햇빛과 하늘과 바람을 꿈꾸던 공주는 지상의 인간 세계로 도망친다. 하지만 너무나 눈부신 햇살에 공주는 눈이 멀고 기억을 잃은 채로 죽고 만다. 1944년 스페인,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지만 반란군은 산속에서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반란군 소탕을 위해 산밑으로 군대를 파견한다. 그곳은 비달 대위가 이끌고 있고, 어린 소녀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함께 새아버지 비달 대위가 있는 그곳으로 향한다. 


도중에 요정을 만나는 오필리아, 산밑 주둔지 침소에 찾아든 요정을 따라 산속 신비의 세계로 진입한다. 현실의 반란군이 있기도 한 그곳에서 숲의 요정 판을 만나 그에게서, 자신이 원래 지하 세계 공주 모안나이며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녀는 판의 말을 굳건히 믿고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이어간다. 


한편, 산밑에서 비달 대위가 이끄는 정부군은 산속의 반란군과 계속해 대치하면서 잔인한 짓을 일삼는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반란군 포로를 고문하며,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난 후 확인사살도 잇지 않는다. 비달 대위는 사실 오필리아는 물론 아내가 된 카르멘도 안중에 없다. 그에겐 오직 카르멘의 뱃속에 있는 아들(아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만 있을 뿐이다. 


영화는 오필리아와 판을 필두로 하는 환상 세계와 비달 대위를 필두로 하는 현실 세계를 자연스레 오간다. 두 세계는 엄연히 다른 곳에 있는 듯하지만, 비단 산속과 산밑이라는 절대적 공간만 다를 뿐인 듯도 하다. 더불어 오필리아의 하염없이 한가해 보이는 듯한 세 가지 과제 수행기와 두 집단의 피비린내 나는 대치 사이가 굉장히 큰 차이와 간격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여러 맥락들의 일치 덕분일 것이다.


환상과 현실


환상과 현실을 환상적으로 오간다.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맥락들엔 아무래도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인물은 단순히 인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닌 투철한 상징성을 획득해 환상과 현실에서 활약한다. 오필리아는 현실의 비달 대위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택했고, 진정한 환상의 세계로 즉 모안나 공주로서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무모한 환상과 어두운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필리아가 보고 듣고 행하는 환상의 세계란 것이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모한 환상인지, 그 환상에의 여정에 우리도 동참해 지친 심신을 희한하게 위로받고 있는 게 아닌지. 그런가 하면, 비달 대위는 단순히 정부군 소속의 투철한 군인으로서만 비춰지지 않는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자 지배자로, 오필리아나 카르멘이 위협을 느낄 만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신념을 넘어선 뒤틀리고 어두운 욕망 덩어리가 아닌가. 


영화는 미장센보다 몽타주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으로 정통하게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다. 환상의 세계를 신화적 요소들로 채워넣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시대 새로운 고전이자 신화를 쓰고자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20세기 최악의 사건은 충분히 신화의 요건을 갖췄거니와, 그 후과는 신화의 소재로 쓰일 만한 자질(?)을 갖췄다.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불가능하게 종과 횡으로 복잡다단하게 비극적인 사건인 것이다. 


독재자와 불복종의 신념


독재에 맞선 불복종의 신념.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스페인 내전으로 프랑코는 정권을 장악해 1970년대까지 독재를 계속한다. 영화 속 비달 대위는 프랑코 정권 독재의 현현(顯現)이다. 프랑코가 정권을 장악하게 도와준 이들이 다름 아닌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비롯 파시스트들이었기에, 넓은 의미로 독재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프랑코가 정권을 탈취한 이들은 좌익연합인 인민전선 내각으로,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다방면의 이슈가 생겨나고 말았기에 영화에서는 정부군과 대치하는 반란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그친다. 


영화에서 반란군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대신하는 이가 오필리아이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다시 그 역할을 한 번 더 대신하여 현실 아닌 환상의 세계에서 수행한다. 이 영화가 대단한 점, 연출과 각본과 제작을 맡은 기예르모 델 토로가 대단한 점은 이 지점이다. 오필리아가 반란군의 역할을 우회하고 우회해서 수행하는 게 세 가지 과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과제를 실패하면서 그 역할이 이루어진다. 물론 오필리아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위대하면서도 위험한 불복종의 신념을 지켜나간 것이었다. 


한편, 불복종의 신념은 현실에서 투철한 스파이들에 의해서도 지켜진다. 독재 지배에 맞서는 방법은 오직 불복종일 뿐이다. 독재에 독재로 맞서서는 안 되는 것이고, 독재에 테러와 전쟁으로 맞서는 건 한계가 있을 뿐더러 또 다른 독재를 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고, 독재에 평화로 맞서는 건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볼복종에 이은 희생, 그 굴하지 않는 끝없는 신념에의 무모함이 궁극적으로 독재를 물리칠 방법이다.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독재라는 초유의 사태에 맞서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일이겠다. 


영화가 수많은 비극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와중에도 빛을 잃지 않는 희망을 얘기하고자 한다면, 독재자 비달 대위는 죽고 오필리아는 세 가지 과제를 모두 수행하여 지하 세계로 돌아가는 스토리일 것이다. 문제는, 신화란 그렇게 단면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비달 대위는 죽겠지만, 오필리아는 과연? 그녀가 다른 이유 아닌 비달 대위에게 죽는다고 상상해보자. 적어도 맥락을 아는 관객들에겐 불복종의 신념을 지키다가 독재자의 손에 죽은 어린 순교자가 아니겠는가. 기예르모가 그것까지 노렸다면, 그는 천재가 확실하다. 어떤 결말일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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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 독재, 불복종, 스페인 내전, 잔혹,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현실,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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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이라고 묻는 배려

오래된 리뷰 2018. 12.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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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경미 감독의 데뷔작이자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감독, 한국 영화계에서 굉장히 특이한 존재이자 케이스이다. 많지 않은 여자 감독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다섯 글자 짜리 장편영화 단 두 편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로 마니아까지 양산시킨 장본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 '이경미 월드'가 존재한다.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녀의 작품들은 관객 평점과 기자·평론가 평점이 비슷하다. 대중이 평단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방증인가, 그녀의 작품들은 수작임에 분명하지만 별개로 기막히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기막히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일까. 둘 다 맞는 말일 테다. 그녀의 작품들은 흥행에 참패했지만 무수히 많은 상을 탔다. 


그녀가 최근에 책을 냈다. 지난 15년 동안의 끼적거림을 모아 놓은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아르떼), 나와 하등 상관없을 것 같은 그녀의 지난 편린들이 무슨 의미일까. 그래도 그녀의 영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아 집어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를 받았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주고 싶다. 


그런데, 그녀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의 '잘돼가? 무엇이든'은 그녀의 또 다른 처음과 겹친다. 뒤늦게 들어가 꿈을 펼친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작품 <잘돼가? 무엇이든> 말이다. 이 작품으로 대대적인 호평을 받으며 수많은 상을 탔고 결국 지금의 그녀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경미 월드'의 시작이랄까. 


기묘하게 함께인 지영과 희진


이경미 감독의 공식 데뷔작 <잘돼가? 무엇이든>의 한 장면. ⓒ빵미필름



'주성쉬핑'에서 근무 중인 4개월차 경력사원 지영, 사장의 말마따나 영리하고 일도 잘하는 믿음가는 일꾼이지만 정작 본인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만이고 못마땅하다. 반면, 지영보다 2살 어린 3년차 희진은 아무 생각도 눈치도 없이 자기 일 욕심만 많다. 


희진을 지영은 당연히 극도로 싫어하지만, 사장은 그런 둘을 붙여 비밀스럽게 장부 조작 일을 시킨다. 공평하게 일을 나눠 각자 하자는 지영, 같이 하자고 하기도 하면서 모른 척 함부로 지영의 자리와 일 영역을 침범하는 희진. 잘 맞을리가 없는 둘이다. 


어쨋든 중요하게 시킨 일이라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둘. 하지만 지영은 이 일을 용납할 수 없어 꿈자리도 뒤숭숭한 와중에 희진은 계속 자신의 영역을 이래저래 침범하고 이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뒤죽박죽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회사에 큰 사단이 벌어지고, 무너지는 지영과 그런 지영이 버티게 도와주는 희진이다. 역시 아무 생각이 없는 희진은 자기 갈 길을 가고자 하는데, 예민하게 날 서 있는 지영이 무너지니 기댈 곳이 희진밖에 없다. 그들은 기묘하게 함께다. 


이경미 감독의 공식 데뷔작 <잘돼가? 무엇이든>


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경미 감독의 공식적 데뷔작이다. 졸업 작품이기에 그러한대, 졸업하기 전 몇 편의 영화들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녀는 20대 중반이 넘어 뒤늦게 한예종에 입학했는데, 이전엔 해운회사를 3년 다녔고 그 이전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녀는 책에서 이 작품을 얘기하는데, 성공 신화를 이룬 거대 중소기업을 다닌 그녀이지만 그곳에서의 이십대 회사 생활은 끔찍하고 암울했다고 한다. 그때 회사에서 그녀의 유일한 친구들 둘이 있었고 나중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만들어서 대히트를 쳤다고 밝힌다. 


이 영화에 대해 '미래에 대한 작은 기대도, 설레는 희망 한 조각도 없이 그저 살아야 되니까 살던 그 시절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본문 99쪽 중)고 하는 그녀, '싫다는 감정에는 삶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있다'(cine21 2016.1.13. 인터뷰 중)고 연출의도를 밝히는 그녀. 앞엣것이 그녀가 오랜 후에 이 영화를 뒤돌아본 느낌일 테고, 뒤엣것이 그녀가 한창 '이경미 월드'를 구축하고 있던 때의 생각일 테다. 


한편 이 영화는 버팀목 하나 없이 얇디얇은 현대사회에 내던져진 두 여직원의 이야기로도, 하찮지만 치명적일 수 있는 권력 관계를 치밀하게 그려낸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앞엣것이 그녀가 회사를 다닐 당시 피부로 직접적이게 느꼈던 바일 것이고, 뒤엣것이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당시 간접적이게 느꼈던 바일 것이다. 


단편이라 하면, 단편소설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이나 순간을 포착해 치밀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듯 단편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깝다 하겠는데, 그래서 소위 '킬링 포인트'가 몇몇 장면들에서 보인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3분이 가장 좋다. 지난 30분의 짜증과 갈등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한 소구점으로 모아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면서 기묘하게 봉합되고는 한순간에 환한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여운은 처음 느껴본다. 


이경미 감독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감독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 표지. ⓒ아르테



그녀는 책에서, 누군가가 '잘돼가? 무엇이든.' 하고 물으면 갈대 무성한 망망무제한 벌판에서 낫을 들고 서서 외치겠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아요, 아저씨이??!"(본문 102쪽 중에서) 그러면서, '나는 염치 불고하고 조금 행복한 편이다.'(본문 126쪽 중에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엇이 진담인지 무엇이 농담인지 모를, 꿈과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경미 월드'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런가 하면, 곧 그 절정의 문구들을 발견한다. JTBC 대선 토론을 보고 그녀가 머릿속으로 외친 말들, '나는 조금 행복한 편이다. 그러니까, 오늘 낸 세금, 행복한 내일로 돌려줘! 제발 우리 모두에게 수치심을 되돌려줘! 내가 먹기 싫은 우유를 돈이 없어서 굶는 아이에게 버리는 일이, 돼지발정제를 먹이고 강간을 시도하는 일이, 동성애를 차별하는 일이 없기를, 그게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도와줘. 제발 고양이들아!!!! .......으응?'(본문 129~130쪽 중에서)


'엔딩 크레디트에 넣을 '고마운 사람들'을 정리하려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지나온 시간이 길기도 하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완성하고 버리기를 반복했던 시나리오들까지 떠올리자니 좀 많긴 많다. 특히나, 이번 작품에는 '고마운 사람들'과는 별도로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 항목을 따로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얻기도 했다.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줘야 할 텐데...... 그 부분은 조금 걱정이다. 아무튼 사랑한다. 쓰다 보니 유서 같다? 그럼 안녕. (으응?)'(본문 153~154쪽 중에서)


3부로 구성된 46개의 글들과 수많은 일기들은 얼핏 별 게 아닌 듯하다. 쉽게 읽히기도 하거니와 편린에 불과한 것들이 많아 이해하고 지나가 머리에 남는 게 아닌 스치고 지나가 머리에 남지 않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고 나면 정말 신기한 것이, 그 하나하나가 지나가버리지 않고 남아 뭉쳐져 하나의 형체를 이룬다. 뒤죽박죽 뒤섞임들이 일관되게 이어지니 그 자체로 하나의 길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아, 영화 아닌 책으로도 이경미 월드는 보다 공고해졌구나, 앞으로 보다 공고해지겠구나, 난 이경미 감독의 팬이 되어버렸구나.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장편 두 편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를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단편 데뷔작으로 사로잡다니 대단한데... 


종국에 그녀가 묻는 건 '잘돼가? 무엇이든.'이다. 자신은 힘들고 슬프고 아프고 죽고 싶어도 어쨋든 가고 있다고, 그러니 너는 잘돼가냐고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전하는 방식이 특이해,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기괴한 머릿속을 뒤섞어 보여주고 있다지만... 그녀의 농담들이 이제 불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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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농담, 이경미, 이경미 월드, 인생, 일상, 잘돼가? 무엇이든, 환상,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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