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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페미니즘'에 해당되는 글 11건

제목 날짜
  • 특별한 여성들의 위대한 유산이 모두에게 닿길 바라며...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2) 2020.08.25
  • 페미니즘이 이슈를 넘어 일상이 된 지금 이곳의 연극 <환희 물집 화상> 2019.05.08
  • '스콧 피츠제럴드의 정신이상자 아내'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빛나는 여성'으로 <젤다> 2019.03.06
  •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본 에코니즘(1) 2018.04.06
  • 위대한 실화가 전하는 가족, 동물, 유대인을 향한 무한 애정의 의미 <주키퍼스 와이프> 2017.10.27
  • 21세기에 되돌아보는 '진정한' 20세기 <우리의 20세기> 2017.10.11
  • 남성 우월 사회를 향해 과격한 경종을 울리다 <스텝포드 와이프> 2017.05.19
  • 소설 같지 않은 소설, 이 소설이 많이 읽히는 이유 <82년생 김지영> 2017.05.08
  • 1980년대 일본을 뒤흔든 문단의 아이돌, 그 실체를 논한다 <문단 아이돌론> 2017.04.03
  • 그녀들에게 남았던 유일한 선택,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프러제트> 2016.08.03

특별한 여성들의 위대한 유산이 모두에게 닿길 바라며...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20. 8. 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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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표지 ⓒ유노북스



제목부터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원작 <Bright Precious Thing>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다. 저자와 책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경우 원작의 표지와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기에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제목만 봐서는 도통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한편 무슨 책일까 하고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즉 출판사 내부에서의 강력한 반대를 무릎쓰고 이 제목을 밀어붙인 데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퓰리처상 수상 작가 게일 캘드웰의 네 번째 에세이로 그녀의 강렬하고도 참혹했던 젊은 날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녀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특별한 여성들 이야기 그리고 이웃집 소녀 타일러와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이야기를 큰 축으로 전한다. 


저자는 말한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된 그녀의 젊은 날도 반짝거리고 소중하고, 그녀가 꿋꿋하게 살아 낼 수 있게 해 준 특별한 여성들도 반짝거리고 소중하며, 노년에 이른 그녀가 삶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강력한 힘과 의미로 다가온 이웃집 소녀 타일러도 반짝거리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저자와 저자의 삶을 둘러싼 것들과 저자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소중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저자의 젊은 날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강렬하고 참혹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되었기에, 역설적으로 반짝거리고 소중하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 또한, 그런 저자가 '특별하다'고 한 여성들은 누구일까. 그들에게서 어떻게 영향을 받은 걸까. 가장 궁금한 건 이웃집 소녀 타일러가 아닐 수 없다. 그녀 덕분에 한없이 무겁고 아프고 슬플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믿기 힘든, 믿기 싫은, 여성으로서의 젊은 날


이 책이 최초에 눈에 들어오고 번역출간을 결심하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게 된 건,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여성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하여 이 출판사에 들어오고 난 후 여성 에세이를 꾸준히 출간해 왔던 바,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거니와 결이 다른 점도 있다 하겠다. 이 책은 '미투 캠페인'으로 폭발한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히길, 본인은 여성운동의 혜택을 제대로 받진 못했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출판사로선 모험이고, 책임기획편집자로선 좋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고백한다. 


들여다보면, 이 책의 중심이 되는 저자의 젊은 날 이야기가 '미투'와 다름 아니다. 1951년생인 저자가 대학에 진학한 1968년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삶을 살아 낸 이야기 말이다. 간략하게나마 서술해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수학과 교수한테서 미적분은 여성과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여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놈한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1970년 19살엔 당시만 해도 불법이었던 임신 중절 수술을 받으러 멕시코까지 갔다 왔고 히치하이킹을 하려다가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보스턴 글로브>에서 어엿한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에도 유명한 남자 작가에게 '정중하게' 성희롱을 당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저자는 손가락 열 개로 세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주 가지각색의 성희롱을 당해 왔다고 말한다. 


기획편집하면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 훑고 정독하고 한 글자 한 글자 따로 떼어놓으며 읽었지만 지루하기는커녕 볼 때마다 새로웠다. 아마, 저자가 겪었던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인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오며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남자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하고 낯설겠지만, 여성이라면 옆집 이웃만큼이나 익숙하게 느낄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그런가 하면, 본인의 이야기가 시시하다고 말한다. 훨씬 암울한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극악무도한 폭력과 악랄한 포식의 상황에 놓인 여성들이 많다고 말이다. 사람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곤 하는데, 실상은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다를 줄은 몰랐다. 이 책을 통해 고백한 저자의 삶에는 일말의 거짓말도 없을 테니, 우리는, 우리 남자들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고 대하는 걸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자유니 평등이니 정의니 박애니 따위를 논할 순 없을 것이다. 


암울한 젊은 날을 꿋꿋이 살아 낼 수 있게 한 특별한 여성들


이 책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에 암울한 이야기만 들어 있진 않다. 저자가 추구하는 바도 아닐 뿐더러, 읽는 재미와 사색의 감동을 내보이는 에세이로서의 가치에도 맞지 않다. 하여, 저자는 암울한 젊은 날을 꿋꿋이 살아 낼 수 있게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특별한 여성들을 소환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인과 문학 속 인물, 가족, 선생님, 멘토, 친구 그리고 이웃집 소녀 타일러에 이른다. 그들은 저자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웃집 소녀 타일러는 저자가 말하는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의 핵심이자 저자가 앞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을 전해 주어야 할 후세의 상징과도 같다. 


그녀를 차별한 수학 교수 이전에 스프링어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음에도 당당함과 다정함을 잃지 않았는데, 저자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가 하면, 캘드웰이 중년일 때 만난 늙은 마조리는 자신감 넘치고 용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개들과 함께 살았는데, 부자였기도 했던 바 뭇 여성들의 멘토이자 롤모델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품위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었다. 저자에겐 우정 이상의 소울메이트로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했고 함께하고 있으며 함께할 캐롤라인이 있다. 그녀는 비록 저자와 오랜 세월 함께하지 못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책은, 저자의 젊은 날 이야기와 현재 저자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웃집 소녀 타일러와의 우정이 큰 얼개를 구성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보다 보면, 분개하고 슬퍼하다가 언젠가 싶게 웃고 즐거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이야기를 대함에 있어 감정의 확실한 높낮이를 부여하려는 저자의 계책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타일러라는 존재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녀 덕분에 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거니와, 전체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결국,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갈 타일러에게 건네는 기억인 것이다. 


작업하는 내내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슬프기도 했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으며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이 책을 '포장'하면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했다. 대신 품위와 기품을 유지하고 내보이고자 했다. 그것이 여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남자로서 감히 생각했다. 많은 분께 가 닿길 바랄 뿐이다.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길 바란다. 특별한 여성들이 전하는 영감과 유산이 모두에게 닿길 바란다. 이 책의 편집자로서 작지만 큰 바람이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 10점
게일 캘드웰 지음, 이윤정 옮김/유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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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게일 캘드웰, 데이트 폭력, 미투,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성희롱, 여성, 젊은 날, 차별, 페미니즘, 폭력
  • BlogIcon 휘게라이프 Gwho
    2020.08.25 17:37 신고

    잘보고 갑니다 .. ^^
    오늘 하루도 행복 하세요!

    • BlogIcon singenv
      2020.08.25 17:40 신고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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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이슈를 넘어 일상이 된 지금 이곳의 연극 <환희 물집 화상>

생각하다 2019. 5.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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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환희 물집 화상>


연극 <환희 물집 화상> 포스터. ⓒ프로덕션IDA



뉴욕이 유명 교수이자 저명한 여성학자 캐서린은 어머니 앨리스의 심장발작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외로움과 자신을 조건 없이 무한정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안식년을 맞아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는 그녀의 대학원 절친 그웬과 던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캐서린과 던은 대학원 시절 사랑했던 사이였다. 


캐서린은 새로운 페미니즘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강의에 신청한 이는 그웬, 그리고 그녀의 베이비시터 에이버리뿐이다. 사람도 별로 없고 아는 사이이니 캐서린과 앨리스 집의 거실에서 강의를 진행하게 되는데, 수업 때마다 열띤 토론이 계속된다. 페미니즘의 대가 캐서린, 전통적인 여성상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에 충실한 에이버리,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그런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기 싫은 그웬. 그리고 이들보다 한두 세대 위의 앨리스까지. 


한편 던은 학문은 포기했지만 교수로서 대학교에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집에선 마약에 술에 포르노로 점철된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가정에는 손을 떼다시피 하여 그야말로 수동적인 삶을 사는 원시인과 다름 아니다. 그런 그를 두고 캐서린과 그웬은 자리 바꾸기 게임을 시작한다. 전업주부 그웬이 교수 캐서린의 자리로 가고, 캐서린은 그웬에게서 '양도' 받은 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어떤 결말을 얻게 될까?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이론 수업


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2013년 극작가 지나 지온프리도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3년 퓰리처상 연극부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의 명망으로, 이 정도의 사전정보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회적 이슈와 시대적 요청을 넘어 누구나의 삶과 인생에 깊숙히 들어와 일상적이고 보편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페미니즘', 이 연극은 페미니즘을 이론과 삶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다층적으로 다양하게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도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이 연극을 보면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주지한 줄거리를 통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듯 <환희 물집 화상>은 '막장'이다. 숭고한 페미니즘과 저렴한 막장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고 또 잘 어울리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장 뒤에 '블랙코미디'가 붙는 만큼 매우 잘 어울리고 또 매우 웃기면서도 지적 심리적으로 매우 알차다. 모르긴 몰라도 매우 진지하기 짝이 없게 페미니즘을 전달하려 했다면 기억에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토론에 따른 이론 수업의 투 트렉으로 진행되는 연극은, 한편 매우 쉽고 직설적이지만 한편 매우 어렵고 복잡다단하다. 막장 스토리라도 쉽고 직설적이기만 한 게 아니고 이론 수업이라고 어렵고 복잡다단한 것만도 아니다. 투 트렉 모두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실컷 웃으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페미니스트 vs 안티 페미니스트


여기서 캐서린의 페미니즘 이론 수업을 가져와 페미니즘의 역사를 읊을 생각은 없지만, '베티 프리단'과 '필리스 슐레플리'는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론 수업 중 두 진영의 핵심인물이자, 그들의 핵심 사상이 캐서린과 그웬에게 그대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과 주장이 옳고 그른 것인지, 그렇다면 옳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옳지 않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불행한 삶인지, 행복과 불행이 옳고 그름과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 등의 생각을 끊임없이 할 준비가 되었는가. 


둘다 1920년대 태어나서 2006년과 2016년에 세상을 떴다. 베티 프리단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미국 페미니즘 제2물결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는 타고난 생물학적 특성이 그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필리스 슐레플리는 안티 페미니스트로, 미국 수정헌법의 양성평등조항 채택을 저지한 극우정치활동가였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고 하였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티를 캐서린에 필리스를 그웬에게 대입시켰을 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히 캐서린이 '옳고' 그웬이 '틀려' 보인다. 하지만, 캐서린이나 그웬 둘다 본인의 삶을 본인이 온전히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른 삶이 '행복'하다면? 물론 연극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탐하고 본인의 삶을 불행히 여기기에 자리 바꾸기 게임을 하지만, 결국 서로 바꾼 것이라면 달라질 게 없는 게 아닌가. 


이럴 때 우리 같은 일반인, 나 같은 남자는 말문이 막히고 나아갈 길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본인이 좋고 행복하다는데, 그것도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둘다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존재가 바로 에이버리이다. 다 모르겠고 본인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이 가장 중요한 그녀 말이다. 그녀의 의견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남녀평등'의 개념에 가장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녀의 의견은 극중에서 캐서린에게 큰 힘이 된다. 


사랑과 결혼과 가정


연극은 사랑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의제가 넘어간다. 사실 이것들은 여자에게 가장 중요하다기보다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어떻게 재정립하여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다. 캐서린과 에이버리도 사랑으로 흔들리고, 캐서린은 결혼 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다층적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있으며, 그웬은 가정에 목맨 현실에 불만이 없는 듯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다. 오직 던만이 그 수많은 암초들 사이에서 독야청청하다. 


사랑, 결혼, 가정. 인간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며, 사실 없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것들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남자보다 여자가 생각나지 않는가? 남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아닌 여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더욱 어울려 보이지 않는가? 참으로 오랫동안 교육받고 은연중에 보고 듣고 생각해왔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 결혼, 가정보다 커리어로 대변되는 바깥의 활동과 연결되어지기 마련이다. 


<환희 물집 화상>은 연극 자체로 청일점인 던을 주체 아닌 객체로 그리며 능동적 아닌 수동적 인물로 표현했지만 그게 비단 극중 아닌 실제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기도 한 게 사실이다. 가정에서는 마약과 술과 포르노로 도망치고, 바깥에서조차 가정에서 바라보는 '커리어'라는 뭉뚱그려진 개념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 시대 여자는 가정에서도 바깥에서도 도망칠 곳 없이 슈퍼우먼이 되어간다. 우리가 교육받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고 거기에 더해 여기저기 고리를 더 만들어 팽팽하게 당기기만 할 뿐이다. 


연극의 결말을 말할 순 없지만, 비극이 아니길 바란다. 남자와 여자의 구도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사이에 말이다. '물집'과 '화상'이라는 다른 듯 비슷한 상처가 아물어 '환희'를 맛보기 바란다. 자연스레 '연대' '통합'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막무가내 아닌 절절하고 투철하고 치열한 갈등과 다툼 끝에 얻어진 연대이자 통합이길 바란다. 비단 이 연극이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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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결혼, 블랙코미디, 사랑, 페미니즘, 환희 물집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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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의 정신이상자 아내'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빛나는 여성'으로 <젤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3.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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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젤다>


<젤다> 표지. ⓒ에이치비프레스



영미 문학사의 빛나는 그 이름 'F. 스콧 피츠제럴드', 읽지는 않았어도 그 이름 들어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미국의 황금기인 1920년 이른바 '재즈시대' 상징이다. 사교적이고 소비 지향적이며 주체적인 여성들, 즉 '플래퍼'를 다룬 소설로 뉴욕의 유명 인사가 된 그, 그에겐 소설 주인공의 대상이 되는 뮤즈가 있었는데 아내 '젤다 피츠제럴드'였다. 


잘 나가는 집안의 말괄량이 젤다는 1920년대 황금기를 스콧과 함께 흥청망정 보낸다. 뉴욕은 물론 유럽을 수없이 오가며 진정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스콧은 젤다를 거의 있는 그대로 소설에 옮겨 재즈시대의 상징이 된 것이라 하겠다. 


문제는, 젤다를 말하는 수식어다. 스콧을 재즈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나아가 20세기 영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수식하는 한편, 정작 그가 그런 위치에 설 수 있게 해준 뮤즈인 젤다는 오랫동안 위대한 작가의 재능을 탕진케 한 정신이상자 아내로 불렸다. 하지만, 그녀도 1920년대 당시 글을 썼다. 물론 단독으로도 썼고, 공저가 아닌 스콧 단독으로 표시가 되었을 뿐 스콧과 공저로도 썼다. 


지난 2월 27일 개봉한 영화 <더 와이프>가 겹쳐진다. 명배우 글렌 클로즈가 분한 '조안'은 작가 남편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바쳐 '킹메이커'로서 결국 그로 하여금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후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지는데... 아마도 스콧, 젤다 부부 사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제목이 '조안'이 아닌 '더 와이프'라는 점에서, '젤다'라는 제목이 더 눈에 띈다. 


국내 최초로 '젤다 피츠제럴드' 아닌 '젤다'의 이름으로 '젤다'의 편에서 온전히 소개되는 그녀의 소설과 산문 모음집 <젤다>(에이치비프레스)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아주 필요한 책이라 하겠다. 젤다를 단순히 스콧의 뮤즈이자 재즈시대의 뮤즈에서 재즈시대의 당당한 작가이자 예술가로 나아가 시대의 일원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빛나는 여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대공황 이후 1930년대로 접어들자 스콧의 소설은 저물고 젤다는 정신착락을 일으킨다. 그들은 별거 생활에 들어갔고 스콧은 1940년, 젤다는 1948년 세상을 떠난다. 스콧의 소설은 이후 재평가되어 지금의 위치에 오른 반면, 젤다는 1970년 평전이 발표되어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뒤늦게 재평가되었어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보이듯 여전히 부정적인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활동했던 영미 문학사 최고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그녀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데서 가장 크게 좌지우지되었다고 하는데, 언제까지 '그의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녀에 대한 평가'의 전부인 양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젤다는 1922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잡지에 단편소설과 산문들을 기고했다. 그녀는 작가였다. 20년대 후반엔 뒤늦게 시작한 발레임에도 발레단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을 정도의 수준에 올랐고, 30년대 중반엔 회화 작품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 예술가였다. 


그런 그녀를 소콧은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여자가 어디 감히'라는 생각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을 것이 분명하다. 젤다는 다방면의 재능과 기질을 타고났음에도, 스콧의 압력과 시대의 핍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니, 이길 수 없었다. 뒤늦게 우리를 찾아온 '젤다'라는 이름과 '젤다'의 이름으로 보는 글과 '젤다'라는 이름의 책은, 그래서 너무 반갑다. 


그녀의 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글은 여러 모로 편협하고 단편적이며 '멋'이 없다. 특히, 소설에서 두드러지는데 글이 향하는 중심은 있을지언정 정작 글의 중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체로는 쉽게 잊힐 파편들이다. 


하지만, '멋'이 있다. 그녀만의 스타일이랄까. 앞서 말한 '멋'과는 다른, 애초에 시선을 편협하고 단편적이고 글이 향하는 중심에 둔다면 이만큼 멋있는 글도 없다. 화려한 기교 대신 대상을 향한 정성 어린 묘사가 있고, 풍부한 위트와 함께 날카롭게 번뜩이는 반어와 풍자의 기법이 엿보인다. 저자 본인 그 자체와 본인의 삶, 그리고 본인으로 대변되는 당대 '플래퍼'를 이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힘들 것이다. 


'극장 매니저들에게는 섹시함으로, 안목 있는 관객에게는 육체적 흡인력으로, 공연계의 저속한 방면에 널리 퍼져 있는 적들 사이에서는 재능 부족으로 통하는 특징이었다.'(소설 '재능 있는 여자' 중에서)

'그녀는 추파를 던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추파를 던졌고, 몸매가 좋았기에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다. 체면이 필요 없었기에 얼굴을 분과 연지로 덮었고, 본인이 따분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따분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늘 하고 싶었던 일과 의식적으로 일치시켰다.'(산문 '플래퍼 예찬' 중에서)


스콧이 그녀와 공저로 글을 짓고, 그녀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그녀의 모습을 묘사했던 게 전부 그녀의 재능에서 발현되었던 것이고, 그런 그녀의 재능을 스콧은 높이 사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 동반자로 함께 한 게 아니라, 분노하고 무시하고 깎아 내릴 뿐이었다. 젤다는 그런 모습을 두고, '피츠제럴드 씨는 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산문 '친구이자 남편의 최근작' 중에서)라며 날카롭게 번뜩이는 글을 서평을 썼다. 


결코 그녀를 영미 문학사에 빛나는 거장 아니, 재능이라고도 두둔할 이유도 마음도 없다. 이 책을 통해 젤다를 소개하는 엮은이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건 '젤다'라는 사람, 그 자체와 삶이다. 스콧이 스콧이라는 사람과 삶이 아닌 소설로 재평가 받았듯, 젤다는 젤다라는 사람과 삶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젤다 - 10점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에이치비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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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 산문, 소설, 스콧 피츠제럴드, 여성, 재즈시대, 젤다, 페미니즘, 플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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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본 에코니즘

오래된 리뷰 2018. 4.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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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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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신화, 에코니즘, 인간, 자연, 페미니즘

  • 2018.04.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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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실화가 전하는 가족, 동물, 유대인을 향한 무한 애정의 의미 <주키퍼스 와이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0.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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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주키퍼스 와이프>


제목과 포스터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비해 엄중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 ⓒ영화사 빅



흔한 소설의 구성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또는 '기-승-전-결'을 소설을 위시한 콘텐츠들에서 그대로 발현하는 건, 이제 식상하다 못해 능력의 부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롭고 참신한 걸 원하는 이 시대에 형식의 파괴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보수(변하지 않는 것)에 가깝고 보수가 편한 인간의 성향에 부합하는 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구성과 형식이다. 주제와 소재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최고의 화두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는 샛길로 새면 안 되는 성역이다. 


제시카 차스테인이 열연한 <주키퍼스 와이프>는 동물을 향한 무한애정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비당사자이지만 가장 위험하게 관련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전통적인 구성방식을 정확히 따른다. 평화-위기-위기 속 평화-파멸에 가까운 상황의 연속-모든 걸 되돌려 놓은 결말. 


홀로코스트 당시의 위대한 이야기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당시 300명의 유대인을 숨겨주고 탈출시킨 자빈스키 부분의 위대한 실화를 다룬다. ⓒ영화사 빅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전운이 조금씩 감돌며 전쟁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직전이다. 바르샤바 동물원을 운영하는 안토니나 자빈스키(제시카 차스테인 분)와 얀 자빈스키(요한 헬덴베르그 분) 부부, 정녕 한가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동물을 향한 한없는 애정과 구성원들을 향해 불어넣는 활기와 자비가 함께 한다. 


어느 날, 감지는 하고 있었지만 무서운 현실로 다가온 전쟁. 동물원은 파괴되고 동물들이 도망가거나 죽는다. 가까스로 재건하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물학자 루츠 헤크 박사(다니엘 브륄 분)가 히틀러 수석 동물학자의 신분으로 바르샤바 동물원에 온다. 동물원을 무기고로 사용하려니 희귀동물들을 맡기라는 것이었다. 


루츠가 장기적 '적'이 될 것이 확실한 가운데 모든 유대인들을 게토로 강제이주시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개 중에는 물론 자빈스키 부부와 마음을 나눈 친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한 명만 지하실에 숨겨놓기로 하지만, 유대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들은 돼지 사육장을 차린 후 게토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돼지에게 준다는 명목 하에 게토로 들어가 아이들을 몰래 빼돌려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300여 명의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탈출시켜준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빈스키 부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진 '쉰들러'의 위대한 이야기가 단번에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영화 <주키퍼스 와이프>에서는 동물을 향한 사랑과 가족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마음과 페미니즘이 함께 한다. 


그동안의 홀로코스트와는 다른 시선


유대인 이전에 동물을 향한 무한 애정을 바탕으로 나치의 참화를 이겨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사 빅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우리가 수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주제다. 그걸 영화로 치환하면, 안타깝게도 '클리셰'가 되기 일쑤이다. 어디서 본듯한...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은 보고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는 적어도 나에게 그때그때 다른 소회를 남긴다. 끔찍함, 분노, 슬픔, 안타까움, 공포 등. 분명 클리셰 '이상의' 진부함을 선사하지만, 클리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맥락에 서 있는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고 상기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겠다. 


<주키퍼스 와이프>에서의 홀로코스트는 참으로 담담하다. 영화 전체의 잔잔함을 뛰어 넘는 담담함인데, 그저 유대인이 아닌 핍박받는 유대인을 향한 위로의 차원이다. 하지만 강제이주 당해 죽음에 가까운 곳으로 가는 유대인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땐, 그 잔잔함과 담담함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이는 곧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과 불의를 향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핀다. 


동물이 곧 가족이고, 가족이 곧 유대인이고, 유대인이 곧 핍박받는 모든 이들의 대변자라고까지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미친다. 그 자비의 손길은 모든 것에 뻗치는데, 그 시작이 다름 아닌 동물이다. 이런 면에서 그동안 보아 왔던 홀로코스트와 상당히 다른 결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동물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이가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까지


영화는 주인공 자빈스키 부인을 매개로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영화사 빅



영화는 이와 함께 동물을 향한 애정과 페미니즘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동물원이 주배경인 만큼 동물이 주된 소재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 자체로 그리 중요한 소재는 아니다. 루츠 박사가 자빈스키 부부, 특히 안토니나에게 접근하는 도구 정도로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안토니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도구 정도. 


심지어 동물은 페미니즘을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로까지 쓰인다. 희귀 물소의 암컷과 수컷을 강제로 교미를 시켜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루츠 박사의 우생학 발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당연한듯 버려지는데, 안토니나가 자신의 불안정한 안위에도 챙겨준다. 


'밖'에서 피말리는 작업을 하는 얀이, '안'에서 쉬운 일이나 하며 루츠와 놀아나기까지 하는 안토니나를 구박하는 모습에서도 페미니즘 목소리의 단 면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급한 시기에 안과 밖을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이며, 밖 못지 않게 안에서도 피말리는 작업이 계속 되거니와 안토니나가 루츠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얀도 어쩌지 못하는 루츠의 강력한 뒷배가 있지 않은가.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생각거리 또는 소재와 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소화해 선보인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성공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몇몇 것들은 보여주기 위한 보여줌으로 그칠 용의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에 부정적 시선을 던질 이유도 없고 빈틈도 없다. 최고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악과도 거리가 먼 한없이 보통에 가까운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그저 보고 그저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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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되돌아보는 '진정한' 20세기 <우리의 20세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0.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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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의 20세기>


'아트버스터'라 부르기 충분한 영화 <우리의 20세기>. ⓒ그린나래미디어㈜



1979년 미국 서부 산타 바바라, 약관 15세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분)는 40살 많은 엄마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분)와 함께 산다. 하숙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20대 애비(그레타 거윅 분)와 40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그들이다. 그리고 매일 같이 제이미 방에 몰래 놀러와 자고 가는, 제이미의 친구 17세 줄리(엘르 패닝 분)가 있다. 


각자 소소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들, 제이미 덕분에 또는 때문에 뭉친다. 제이미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도로시아가 혼자서는 자신이 없으므로 애비와 줄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제이미를 보살펴 주고 가르쳐 주라고 말이다. 즉, 제이미를 함께 키우자는 뜻이었다. 


애비와 줄리는 지극히 열려 있는 여성으로서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제이미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 나이대에 비해선 굉장히 열려 있는 여성인 도로시아가 보기에도 그건 굉장히 급진적이거니와 '잘못된' 방향인 것 같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머리로는 가능한대 가슴으로는 불가능한 세대 간의 간극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기엔 제이미가 전에 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는 어떨까. 우리는 왜 그들의 20세기를 봐야 하는가.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되어버린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21세기도 어언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선 한꺼번에 '옛날'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20세기를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이 영화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한 줄이 그 목적을 말해준다. "난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제이미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거울이었을 게 분명한 만큼, 그의 어머니 즉, 도로시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20세기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들과 함께 배치해 보여주고 설명하는 구조를 택했다. 1920년대생 도로시아, 1940년대생으로 추측되는 윌리엄, 1950년대생 애비, 그리고 1960년대생들인 줄리와 제이미까지. 1979년 당시까지, 오롯이 20세기를 관통하는 세대들이다. 얼핏 다큐멘터리적인 장면들인데, 미장센이 상당히 감각적이라 지루할 새가 없다. 


1980년대 이전, 진정한 '자유'의 시대


그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20세기는 1980년대 이전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도 나오지만 1979년은 적어도 미국에 한해서 '소비와 환락의 시대'의 마지막이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대적인 연설로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출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말하는 '20세기'란 1979년까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 이후 다섯 사람의 행보를 간략히 들어보면, 모두 마치 한 사람인 양 획일화된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1980년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며 '너희의 20세기'란 제목을 붙여도 되겠다 싶었다. 사회문화비평적으로 상당한 소구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영화에도 그런 소구점들이 눈에 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페미니즘'으로, 원제가 '20TH CENTURY WOMEN'인 만큼 세 여성의 생각이 얽히고 부딪히고 맺어지는 부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사이 사이 세대와 문화와 환경에서 비롯된 여러 차이들이 산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키움을 당하는 제이미뿐만 아니라 키움을 행하는 도로시아, 애비, 줄리도 모두 이 거스르기 힘든 차이들로 혼란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건 1979년까지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 20세기 덕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순 없어도 인정할 준 알았다. 거기에 편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장치들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이 영화를 수놓는데, 하나같이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각종 장치들이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상징하는 중요 요소들과 함께 다큐멘터리적으로, 그러나 감각적으로 보여준 게 가장 큰 장치라 하겠다. 오히려 시대가 아닌 개인이 보이고 기억에 남는 훌륭한 의도적 역효과를 일으켰다. 


여기에 자주 선보이며 항상 같은 느낌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에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몽환적 음악 등이 있다. 이 장치들을 한 번에 선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현실에서 벗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을 묘사할 때다. 누가 보아도 인상적일 텐데, 누군가에겐 최고의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평생 몇 번 느껴볼까 말까한 진정한 자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린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저 '20세기'라고 통칭하는 20세기도 이토록 수많은 점점들로 나눌 수 있고 수많은 시대들로 나눌 수 있을진대, 21세기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러한 면면들이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당대는 모른다. 아직 역사의 한 모퉁이로 진입하지 않았기에. 나는 바란다. '우리의 21세기'에 한순간이라도 진정한 무엇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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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21세기, 개인, 미국, 소서사, 시대, 우리의 20세기,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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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월 사회를 향해 과격한 경종을 울리다 <스텝포드 와이프>

오래된 리뷰 2017. 5.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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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스텝포드 와이프>


과격한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일으켜 해고 당하는 조안나, 그녀가 가족과 함께 간 스텝포드. 그곳엔 현모양처의 표본들이 즐비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잘나가는 방송국 CEO이자 방송제작자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 분), 그녀는 예측불허의 자유인이다. 이번에도 역시 파격적인 페미니즘 프로그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크게 성공할 것 같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열린 성대한 TV쇼 소개 자리에 한 남자가 출현해 총으로 위협한다. 조안나가 만든 페미니즘 프로그램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조안나는 곧 해고되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데, 남편이 스텝포드라는 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은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교외에 있었는데,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에 친절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안나가 보기에 그곳은 이상했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이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파티 자리에서 사단이 난다. 한 여자가 춤을 추다 말고 쓰러진 것이다. 조안나는 그녀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그런데 쓰러진 여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은 움직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마을은?


남자는 이래도 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하나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입고 금발을 한 그곳의 그녀들, 뭔가 이상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는 시작과 동시에 '페미니즘'을 흘린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초장부터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조안나라는 것과 무대가 스텝포드라는 걸 알린다. 그곳에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현모양처들이 즐비하다는 건, 조안나와의 갈등이 심화될 거라는 영화의 앞날을 예고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과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은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형국이니 얼핏 보기엔 평등한 것 같다. 그런데 한 발만 들어가면 명백한 차원의 다름을 볼 수 있다. '남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있지만 '여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없고, 무엇보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순종과 복종이 남녀 조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 차림으로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의 정본과도 같다. 남자들이 원하는 모습 말이다.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그녀들은 남편을 극진히 모신다. 완벽한 집안일은 물론 남편이 시키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군말 없이 하며 남편의 캐디 역할도 한다. 이쯤 되면 아내가 아니라 비서 또는 하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남성 우월 사회는 파시즘일 수 있다


그녀들의 일방적인 모습은 남성 우월 사회의 파시즘을 역설한다. 그곳은 이상한 곳이 아니라 틀린 곳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남편은 방송국 부사장, 자신은 방송국 CEO. 조안나는 단순히 잘나가는 방송인일뿐 아니라 남편보다 위에 군림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거니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남편을 모시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갈색 짧은 머리에 검은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다니니 만큼 바비인형 차림의 금발 머리도 용납할 수 없다. 


반면, 조안나의 남편 월터는 스텝포드에서 신세계를 경험한다. 남성 우월 사회에서 우월한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한껏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스텝포드에서 드러내고자, 남성들만의 모임에 참석하고 조안나에겐 홧김에 이혼을 통보하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똑같이 완벽한 남성 우월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에 사실 조안나와 월터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들이 느끼기엔 이곳은 '이상한 곳'이고 '틀린 곳'일 것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적인 공동체에서 구성원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다. 그저 전체의 생각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자 경고는, 남성 우월 사회가 파시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 우월'이라는 개념으로 개인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건, 여기서 여성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에 더해 여성이라는 개인 또한 통제 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에서 여성만 퇴색되며, 통제되는 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뿐이다. 조안나와 월터가 힐링의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로 찾은 스텝포드가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로 느껴지고 다가오는 건 이 사실을 깨달을 때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유토피아일 거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유토피아.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영화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스토리로 중무장한 채 페미니즘을 외치고 남성 우월 사회에 경종을 날린다. 조금 자제가 필요해보였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처럼 보여주고 또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과격하게 보여준다. 과격한 스토리와 장면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투박하기 짝이 없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우린 영화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포드의 모든 여성들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처럼 자신의 생각 없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비유와 상징의 개념이 아니라, 진짜 로봇이라는 사실.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로봇이 될 수 있었는지, 또는 원래 로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일단 알 길이 없다. 맥락상 사람이었던 이들을 로봇으로 만든 것 같은데, 영화의 전반적 만듦새만을 들여다볼 때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를 향해 그저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인 스토리에 그것들은 그저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안나처럼 능력있는 여성들을 데려와 로봇으로 개조해 충실한 현모양처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 이 모습은 이전까지 '당하고' 살았던 남자들이 일종의 복수를 하는 형국으로 비친다. 그 자체가 그들이 남성 우월 사회에서 왔다는 방증이다. 남녀 평등 사회였다면, 실력이 아닌 '성'의 차이로 비교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단적인 시작과 과정을 거쳐 끝까지 극단적으로 마무리한다. 선명하고 명명백백한 것과 극단적인 건 비슷한 듯하지만 완연히 다른 것. 영화는 자칫 여자와 남자를 홍해 가르듯 가를 조짐을 보인다. 그건 높지 않은 영화의 만듦새에서 기인한 게 클 것이다. 러닝타임도 평균보다 30분 정도 짧았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더 촘촘히 보여주어 극단적이 아닌 선명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안나 혼자가 아닌 남편 월터가 끝까지 함께 해준 점이 눈에 띈다.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녀 평등 사회가 아니다.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평등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스텝포드처럼 기괴한 사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또는 그 중간 어디라고 해도 될까. 아니, 과도기여야 하겠다. 그래야 언젠가는 평등이 실현된다는 뜻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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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남녀평등, 남성, 남성우월사회, 스텝포드 와이프, 여성, 파시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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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지 않은 소설, 이 소설이 많이 읽히는 이유 <82년생 김지영>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5. 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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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82년생 김지영>


소설 <82년생 김지영> 표지 ⓒ민음사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세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본문 9쪽)


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의 첫 단락이다. 이 소설의 축약이자 주인공 김지영 씨의 이때까지 삶의 축약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세른네 살 전후의 일반적 여성 삶의 축약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인데, 점점 평범하기조차 쉽지 않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를 반추해볼 때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 또는 공분을 살 수 있는 삶인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은 그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많은 삶을 아우르고 있지만 한편으론 많은 삶을 배제하고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읽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김지영 씨의 삶에 교집합 하나는 있을 거고, 공감 하나쯤은 줄 것이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 무시한다.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던 소설 문법과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테다. <82년생 김지영>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또는 보고서 같다. 소설 같진 않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시사교양프로그램 방송 작가로 10년 동안 일한 경력을 잘 살린 것 같다. 


이 소설이 사랑받는 이유


김지영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증세가 계속되자 결국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를 정신과에 데리고 간다. 김지영 씨의 삶을 돌아본다. 비로소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누군가가 김지영 씨의 삶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싶더니 소설 자체가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정리했다는 콘셉트다.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 중 가장 많은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연히 이 점을 인지했을 터, 김지영 씨의 삶이 지극히 보편적이라는 걸 못박아 두려는 의도다. 사실 굳이 그런 장치를 하지 않아도 김지영 씨의 삶은 수많은 보편들의 합집합이다. 마치 <전원일기>를 보는 듯한 현실적인 사실감도 느낄 수 있는데, 이렇게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많은 사랑을 받는 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적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김지영 씨로 대표되는 한국 현대 여성의 보편적이고 사실적인 삶의 궤적에서 당하는 '여성으로서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한다. 김지영 씨에게 남은 가장 오래된 기억이 '남'동생과의 차별이고, 삶에서의 수많은 그때그때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대답을 삼키고 그만두었던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특수한 상황이고 특수한 상황이어야 하지만, 우린 굉장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저 '우리 이야기구나' '우리 주위의 이야기구나' 하며 공감어린 시선으로만 보면 '안 된다'. 긴장 없이 읽기가 너무 쉽고 다음다음이 예측되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는 이 소설을, 딱 그만큼만 문제의식을 지니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삶이 보편적으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이 사회는 바뀌어야 할 게 더 많다. 그녀의 삶에서 특수한 부분을 많이 느낄수록 이 사회는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이 더 옭아맨다


김지영 씨는 치료를 잘 받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남의 목소리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소설은 부정한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피력한다는 것 자체를, 그런 시대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다. 소설은 끝나지만, 여전히 김지영 씨는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했다. 그러고는 아마 꼭꼭 숨겨놓았던 말, 여자로서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건, 김지영 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상징성이다.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찾으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못할 게 뻔하다. 반면, 이대로 종종 다른 누군가로 빙의하면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변화에 큰 일조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차마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에 응원을 보내기가 껄끄럽다. 그렇게라도 말을 하는 게...


그녀가 다른 누군가로 빙의해서 하는 말은,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의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의 엄마가 그러한대, 시댁에 가서 김지영 씨에게 빙의한 그녀의 엄마가 "아이고 사부인, 사실 우리 지영이 명절마다 몸살이에요"라고 말하고 곧 "정 서바앙! 자네도 그래. 매번 명절 연휴 내내 부산에만 있다가 처가에는 엉덩이 한 번 붙였다 그냥 가고. 이번에는 일찍 와."라고 말하는 게 그렇다. 김지영 씨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엄마가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거의 모든 여성들이 하고자 했던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법. 소설이 그 방도를 생각해내진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암울한 상황으로 끝난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태도보다 더 여성을 옭아매는 '이중잣대'와 '어설픈 페미니즘'. 이 소설이 보여준 건 여기까지.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어떤 방법을 생각해내는지는 수많은 김지영의 몫일 것이다. 김지영 씨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는 것도 방도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은 변하는 듯해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변형된 형태로 폐해가 잔존하는 것 같다. 수많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대현이 해야 할 일도 물론 많다. 많은 남성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김지영 씨 담당 정신과 의사가 보여준 어설픈 페미니즘을 지니고 있을 줄 안다. 어설플 바에야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낫다. 아니면 제대로 동조를 하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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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보편, 사실, 여성, 이중잣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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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일본을 뒤흔든 문단의 아이돌, 그 실체를 논한다 <문단 아이돌론>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4.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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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문단 아이돌론>


<문단 아이돌론> 표지 ⓒ한겨레출판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이 자랑하는 자타공인 전 세계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1순위로 지명되며 대중적 인기와 함께 비평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그다. 지난 2월 24일 일본 현지에서 출간된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인기에 완벽히 부합하며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초판 인쇄 부수만 자그마치 130만부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다. 


1979년에 데뷔해 데뷔 40주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여전히 남녀노소 불문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하루키론'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 건 물론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번 상반기가 가기 전에 한국에 상륙한다고 하는데, 그에 맞춰 하루키를 다룬 하루키론 책들이 나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나올 것 같다.  


그중 하나가 평론가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 아이돌론>(한겨레출판)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나왔으니 15년이나 지난 책인데, 그것도 책의 주제가 1980~90년대 일본 문단의 주요 작가라는 점을 볼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상륙에 맞춘 출간이라고밖에 생각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책이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뜬금없다고 느낄 순 있을지언정 허투루 별 것 아닌 책을 낸 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의 독특한 해석과 유머러스함이 빛을 바란다. 많은 책을 낸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엔 2006년에 나온 <취미는 독서>라는 책 한 권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나마 그 책도 절판되었단다. 소설, 소설가, 문단, 문화, 사회로 이어지는 일련의 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만한 저자이다. 


RPG 게임을 연상시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세계


저자가 소개하는 문단의 아이돌들은 모두 8명. 그중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이들은 5명 정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이들은 2명 정도다. 다름 아닌 '두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다. 저자는 하루키를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 시기에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를 냈던 작가 중 하나로, 류를 '작가'라는 틀을 넘어 폭넓은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언론 활동을 펼쳐온 지식인 중 하나로 보았다. 


사실 하루키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단 아이돌'의 핵심이다. 어마어마한 판매량과 함께 어마어마하게 잘 논해지는 작가이기 때문일 테다. 저자는 하루키의 판매량 수수께끼는 제외하고 '왜 그토록 잘 논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소설은 '롤플레잉 게임'을 연상시킨다. '하루키 퀘스트'. 하루키 작품은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뭔가 말하고 싶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퍼즐이나 게임을 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키가 작품에 그런 요소들을 숨겨놓고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저자는 하루키 작품 해석을 게임에 맞춰 소개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는 독자 또는 비평가의 레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레벨 1은 분위기 비평이다. '나는 이 문체가 좋아, 이 세계관이 좋아'라며 어린아이처럼 써 내려가는 것. 레벨 2는 퍼즐 풀기다. 하루키 월드에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하기에 그에 대한 해설을 써야 한다는 것. 쓸데없이 복잡한 '본격적 비평 시대'의 시작이다. 레벨 3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수수께끼 풀이 기계 같은 사람이 비평 아닌 해석에만 몰두하는 것. 레벨 4는 공략본의 출현이다. 비평이 아닌 해석에만 매달린 이가 써내려간 하루키 퀘스트의 공략본이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매 작품마다 그렇다. 사실 가장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혹은 <상실의 시대>)은 이런 면에선 가장 덜 궁금증을 자아낸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잘 알 법한 하루키 월드의 진정한 맥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키 팬들은 이 소설들을 읽으며 'RPG 게임'을 해왔던 거다.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교당하는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류, 우리나라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그 인기가 확실히 떨어진다. 단적으로 서점에서 이름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는데, 하루키 관련 책이 200여 권 정도인 반면 류 관련 책이 100여 권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치인데(현재 절대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비슷하다), 단지 '무라카미'라서 비교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일본 현지에서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하루키 월드뿐만 아니라 '류 월드'도 확연히 존재한다. 그 특징은 '조잡 파워'와 '와이드 쇼'로 정리할 수 있단다. 아마추어리즘의 힘으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켜 특별한 공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대중적인 텔레비전 뉴스의 시대를 읽는 센서와 시대를 읽는 센서가 특출나게 발달했다는 것.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진단한다.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시대를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빨리 내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루키와의 비교는 일본에서 엄청나게 오랜 시간 계속 되어 오고 있는데, 저자는 두 무라카미의 비교론을 의심스러워 한다. 만약 둘 중 하나의 이름이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이런 정도까지 비교를 했을까? 그리고 의외로 무라카미 비교론자들은 모두 결국엔 류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루키에 비해선 류의 작품에 비평적인 요소가 더 잘 소화되어 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이항 대립의 도식은 하등 의미 없고 소모적일 수 있다는 것. 


하루키와는 다르게 류의 작품을 거들떠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데뷔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영화로 옮겨진 소설 <69>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는 정도? 아마 저자의 말처럼 류를 보는 시선이, 단순히 소설가 이상의 그 무엇, 지식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일까. 그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1980년대의 일본, 우린 지금도 따라가고 있다


이밖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 '우에노 지즈코', '다치바나 다카시' 등도 거론된다. 대부분 저자의 빼어난 촌철살인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특히 '지식의 거인'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광으로만 알고 있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여성차별을 위시한 '여성과 어린이 문제'는 상당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여성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만큼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차치하고,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한 축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2010년대에만 10여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저자는 이 역시 날카롭기 그지 없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녀를 두고, '남자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음에도 남자 사회 내에서 앉을 자리를 확보했으며, '인텔리=양갓집 자제'를 위한 담론을 생산했다'고 평한다. 어쨌든 고지식한 영감들을 상대로 싸워왔다는 점도 잊지 않고 있지만. 


이 책은 분명 작가 비평, 문예 비평의 성격을 띠지만, 1980년대 일본 사회 자체를 비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큰 틀에서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시한 1부에서는 '거품 경제'를, 우에노 지즈코를 위시한 2부에서는 '페미니즘'을, 무라카미 류를 위시한 3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제를 좆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호황과 불황, 페미니즘 유행, 지적 권위주의 파괴 라는 일련의 주제들 말이다.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본 1980년대 일본은 그대로 1990~2010년대 한국이다. 전례 없는 호황이 지나 기나긴 불황의 시대가 도래하고, 페미니즘의 대중화되고 있다.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는 시대, 여지 없이 지적 권위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의 그림자를 따라기기 바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걸었던 길이 누구나 걸어야 할 길인 것인가.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도 한 번쯤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닌, 비평을 수단 삼아 우리가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갈 길을 목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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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에게 남았던 유일한 선택,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프러제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8.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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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프러제트>


지금은 당연한 것들 중 하나인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영화 <서프러제트> 포스터 ⓒUPI코리아


영화 <서프러제트>는 일방적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그들 말마따나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건물 유리창을 박살내는 걸 시작으로, 비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력 정치가에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건 서프러제트의 주요 활동이었다.

 

가상의 인물 ‘모드 와츠’가 어떻게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어 과격한 폭력 활동까지 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나를 앞뒤 가릴 것 없이 직진하는 식으로 그려낸 영화는, 심오한 고민이나 산재한 문제들을 뒤로 하고 현상에 집중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한 면과 본질을 무시한 것인데,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프러제트를 이끈 전설적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그녀에게 감화된 수많은 여성 중 한 명을 가상의 인물로 내세운 점만 봐도 그렇다.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될 때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중 하나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다. 특히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과 결이 완전히 반대인바,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흔한 여성 노동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까지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동자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가 남성 고용주의 부당한 심부름(남자가 해야 하는 일을 떠맡김)을 가는 도중 서프러제트에 의한 폭력 활동을 목격하며 시작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남녀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우연히 엉겁결에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 모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증언했다는 진심어린 말이 여기저기 회자된다. 때문에 정부에서 찍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종다인 모드 와츠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폭력 활동을 목격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여성 참정권 가부 발표가 있던 날 현장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모드, 감옥에서 여성의 굴욕을 맛보고는 발을 빼려 한다. 하지만 더 심해진 차별을 보고 다시 현장으로 향한다. 그때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고 감화된다. ‘물러서지 말아요,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이길 거예요. 노예가 되느니 반역자가 됩시다!’ 한 번 더 잡혀갈 위기에 처한 모드, 그런데 감옥이 아닌 집 현관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남편한테 맡기면 알아서 할 거란 말과 함께.


남편의 행동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부가 행하는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편은 그녀를 쫓아내고는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 보내 버린다. 남자인 남편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사상, “‘내’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들이 맞서야 했던 건 참정권이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남자, 나아가 여자들에게도 뿌리박힌 그와 같은 사상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지금은 물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참정권은 돌아갔지만, 뿌리 깊은 사상은 아직 인 것 같다. 여전히 여자를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 내기, '폭력'

 

쫓겨난 모드가 갈 곳은 서프러제트 일원의 집뿐이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에게까지 한순간에 내팽개쳐진 그녀는 서프러제트 활동에 매진한다. 아무도 그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 가장 뼈아픈 건 같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현실을 바꿀 마음이 없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게 운명이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활동한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남은 건 뭘까. 격렬히 시위하고 유리창을 깨고 의회에 청원해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속절없이 묻히지 않는가. 정부는 그 행위를 ‘관심을 얻어 보려는’ 수작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차원을 달리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행하는 짓보다 더한 행위, 힘없고 무능하다고 여기는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행위인 ‘폭력’말이다. 그것도 생각하기 힘든 폭력.

 

폭력은 격렬한 고민을 수반한다. 아니,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폭력이라는 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악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폭력을 목소리로 인지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편으로 말이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남성이었기에.

 

지금 한창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말할 필요가 있겠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페미니즘에 속해 있긴 하지만, 여성 참정권은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자 시작일 뿐이다. 거기서 끝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다름없다. 진정 쟁취할 건 ‘남녀평등’에 있겠다. 아직 여러 면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하라

 

남녀평등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할 때는 가끔 말을 더듬기도 할 정도다. 조심도 조심이지만, 스스로 남녀평등에 대해 절대적이리만치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는-’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남자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민감한 사항인 군대, 결혼 얘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여자들이 ‘여자니까 ~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영화에서 남자들의 생각에 당연한 듯 동조하는 여자들의 심리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이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남자는~’이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남녀평등’이 흔들리곤 하는 것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해 수많은 논란이 오고간다. 이 영화는 그 시작이 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비록 폭력을 동반했지만, 합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영화는 그런 나의 고민을 붙들어 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여성 참정권’을 되찾기 위해 전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성스럽게 다가왔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엔 많은 고민과 고충이 뒤따르겠지만, 실제로 뒤따랐겠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보여주지 않았다. 행동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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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남자, 민주주의, 서프러제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성, 여성 참정권 운동, 차별, 페미니즘, 폭력,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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