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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성자인가 악마인가 <산 파트리냐노>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1. 1. 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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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 포스터. ⓒ넷플릭스



1970년대 말 이탈리아 전역은 값싼 마약으로 뒤덮였다. 마약을 대중화시켜 막대한 부를 쌓기 위한 마피아의 새로운 전략이었는데,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가 마약 중독자의 길로 빠졌다. 이탈리아 정부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출현했다. 빈첸초 무촐리, 그는 이탈리아 북동부 리미니에 '산 파트리냐노'라는 이름의 재활원을 짓고 마약 중독자들을 무상으로 받았다. 


빈첸초 무촐리는 리미니 중산층 농부 집안 출신으로, 가족의 영향으로 돌보는 일을 열성적으로 한 반면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집에서 좌절감에 둘러싸여 있다가, 안토니에타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장인 어른이 결혼 선물로 작은 농장인 산 파트리냐노를 줬다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사육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영매가 되고 싶었던 무촐리는 심령술사 단체에 가입해 강령 의식을 열기도 했는데, 그들과 함께 협동조합의 형식으로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한 것이었다. 처음엔 약 따위로 아픈 이들을 치료하다가 시간이 지나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며, 마약 중독자들의 공동체가 되었다. 무촐리가 말하길, 마약 중독자들이야말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는 유럽에서 가장 큰 재활원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한 빈첸초 무촐리를 둘러싼 갑론을박과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빈첸초 무촐리의 마약 중독자 구원


무촐리는 산 파트리냐노 운영 방식의 제1 원칙으로 '한 번 이곳에 발을 들인 마약 중독자는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절대로 나가지 못한다'를 천명한다. 이 화끈하면서도 일면 무시무시한 발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를 대하는 두 대척점의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무촐리를 신격화하면서 그를 '구원자'이자 '성자'로 떠받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촐리를 '무법자'이자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로 보는 것이다. 


1970~80년대 당시 이탈리아는 값싼 마약들이 수많은 마약 중독자를 양산하며 신음했는데, 정녕 아무도 통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말이다. 그런 와중에 한 남자 '빈첸초 무촐리'가 나타나 마약 중독자 재활원이자 공동체 산 파트리냐노를 설립하더니,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이 자발적으로 그곳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닌가. 전국의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 당사자는 물론, 그들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촐리를 지지하고 떠받들게 된 것이다. 그가 그 어떤 무슨 짓을 하든, 마약 중독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의 '방법론'을 두고 정부와 법 관련자들 그리고 언론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촐리는 마약 중독자들을 도와 준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에게 힘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그 어떤 수가 '사슬'이라는 형태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80년 10월 어느 날, 15일간 사슬에 묶여 있다가 산 파트리냐노에서 탈출한 마약 중독자 소녀가 경찰에 신고한 게 크게 터졌다. 무촐리는 곧 법정에 서게 되었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무촐리의 입장에서는 정부도 손 놓은 마약 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무상으로 재활원을 설립해 사람들을 받아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냐는 것이었고, 검사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의를 위한다지만 인권을 저버리는 범죄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사례에 불과하지만 인류를 관통하는 철학적 주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논쟁, 결과는 40일만의 석방이었다. 산 파트리냐노 설립 이념을 긍정적으로 본 결과였지만, 결과를 위한 과정에서의 사슬과 폭력 사용은 금지되었다. 


의도는 선하고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과정은 치명적


'선의' 즉, 선한 의도는 선한 과정과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선의로 시작한 것들이 불쾌하고 불합리하고 불편하게 끝맺음한 예가 수없이 많다.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는 어떠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약 중독자 치료를 위한 무상 과정의 선한 의도는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불과 수 명에서 시작한 재활원은 수천 명으로 불어나 수없이 많은 마약 중독자를 개관천선시킨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 논쟁의 중심이고 이 다큐멘터리가 최대한 중립을 지키면서 전하고자 하는 논쟁의 중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재단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무촐리의 의도와 과정과 결과, 의도는 선하고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과정은 치명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무촐리라면? 사슬로 묶어 감금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데 최우선의 목적을 둘 것 같다. 내가 마약 중독자 가족이라면? 무촐리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포기해 버린 이를 개과천선하게 지지할 것 같다. 내가 정부 또는 판사라면?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해 칭찬해 주기는커녕 못하게 막을 것 같다. 판사로서 최우선하는 가치를 생각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마약 중독자 당사자의 입장이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반드시 인생을 망칠 것이고 '죽음'에 이를 것이기에, 살고자 스스로의 의지로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를 찾았다. '무급'으로 노동하며 마약 중독을 치료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탈출하거나 마약에 다시 손을 댔을 땐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했다. 내가 마약 중독자라면? 살고자 하는 의도로 산 파트리냐노를 찾을 것이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 따를 것 같다. '마약 중독'을 다룰 다른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의 방법에 있는 게 아니라, 값싼 마약이 유포되게 막지 못했거니와 마약 중독자들을 손 놓고 방치한 정부에 있는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더 강한 국가(그가 생각한 선한 국가)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악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낫다고도 했다. 다분히 빈첸초 무촐리의 산 파트리냐노에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마약 중독 치료의 목적을 위해서는 '악'이라 불리는 치명적인 짓들은 묵과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촐리로서는 산 파트리냐노 안팎으로 온갖 멸시와 의혹에 찬 눈빛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마약 중독 치료라는 일념 하에 사랑받는 존재로만 남길 원하지 않았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명과 암


하지만, 그런 무촐리도 변해 갔다. 마약 중독 치료라는 긍극적 목적과 거시적 일념은 그대로였지만, 방법과 과정에 있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첫 타격을 안겼던 폭력 사건은 급기야 의문스러운 자살 사건으로까지 번졌고, 산 파트리냐노는 나날이 번창해 2000명이 넘는 재활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했지만 더 이상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무촐리는 권력에 단맛에 젖은 듯 스스로를 신격화시켰는데, 공동체를 시스템화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인재를 등용했다.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출중한 능력으로 인류 역사를 바꿔놓았지만, 그 자신이 권력에의 열망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인재들을 등용해 결국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제정 로마의 기틀을 세웠으니, 이후로도 로마는 오랫동안 전성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 무촐리 또한 비록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출중한 능력과 추진력과 카리스마로 많은 이의 인생을 바꿔놓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도 인정하듯 권력에의 잘못된 열망과 잘못된 인재들의 등용으로 논란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1970~90년대까지 이탈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한때,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들보다도 더 위대한 이로 칭송받은 적이 있다. 또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며 그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위인이 그렇듯 그에게도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중립적으로 그것들을 짚으며 탄생부터 추락까지를 다뤘다. 작품이 지향하는 바는 잘 알겠고 또 잘 다뤄 주어 좋았지만,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이 굳이 중립적이라는 표현까지 넣을 만큼 50 대 50을 이뤘을까 의문이 간다. 과보다 공이 많고, 암보다 명이 짙었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논할 때 공과 과 그리고 명과 암을 말한다. 경제화를 이룩했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쇠퇴시켰으며, 그가 아니더라도 경제화는 시대의 숙명이자 전 세계의 추세였기에 천천히 단단하게 진행되었을 것이었다. 반면, 빈첸초 무촐리는 그대로 두면 반드시 죽었을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했거니와 정부도 손 놓은 걸 오직 그밖에 하지 못했다. 비록, 마약 중독자들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받아들였거니와 논란의 여지 없는 선한 의도와 목적에 따른 것이다. 물론,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곳에서 사람이 살해된 사건은 논란의 여지 없는 과와 암에 속할 것이다. 이후 급속도로 추락한 무촐리의 삶의 일환이겠다. 


빈첸초 무촐리와 산 파트리냐노 그리고 당시 산 파트리냐노 거주자들에 너무나도 많이 할애한 점이 조금 아쉽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간략히 나오는 시대상을 보다 더 논했다면, 보다 더 풍부한 다큐멘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시대와 사회가 개인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개인에 너무 천착한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했기에 다큐멘터리 치고 상당히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았나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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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구원자의 죄, 마약 중독자, 빈첸초 무촐리, 산 파트리냐노, 선한 의도, 성공, 성자, 악마, 이탈리아,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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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바꾸는 '치유' 프로그램 <돈 워리>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8. 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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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돈 워리>

 

 

영화 <돈 워리>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미국 포틀랜드의 유명 만화가 존 캘러핸(호아킨 피닉스 분), 휠체어에 앉은 채 대중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히 충격적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걸은 날은 전날 마신 술로 잔뜩 취한 상태였기에 숙취 없이 잠에서 깼다는 것이다. 곧 그는 술을 찾아 마시고 계속 술을 찾아 헤맨다. 밤에는 파티에 가서 '언니'들이랑 놀았는데, 덱스터(잭 블랙 분)가 와서 훨씬 좋은 파티에 가자고 한다. 그들은 밤새 술을 마시며 놀고는 계속 차를 타고 이동했다. 술을 진탕 마셨으니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고 밤새 놀았으니 졸렸을 것이다. 덱스터가 운전할 때 가로등을 들이박는다.

 

이 사고로 운전자 덱스터는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끝나고, 동승자 존은 전신이 마비된다. 그때 병원으로 찾아온 자원봉사자 아누(루니 마라 분)에게 한눈에 반한 듯한 존이다. 시간이 흘러 휠체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존, 그런데 그가 나라에서 돈을 타서 하는 거라곤 집에 간병인을 한 명 두고는 계속해서 술을 찾아 마시는 일이었다. 그를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뜨린 술이지만, 술이 아니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알코올중독자 신세. 그는 변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존은 술을 끊기로 작정하고 알코올중독자 프로그램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모임의 리더이자 멘토 도니(조나 힐 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서 존은 자유롭지 않은 손을 이용해 특유의 영약한 유모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에겐 인생을 결정지을 만한 트라우마가 있는데, 그를 버리고 떠난 생모이다. 그는 생모에 관해 아는 게 4가지라고 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고 빨강 머리이고 교사라는 것. 그리고 그를 원치 않았다는 것.

 

착하게 그려내는 아웃사이더

 

 

영화 <돈 워리>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돈 워리>는 지난 2010년 작고한 미국의 유명 만화가 존 캘러핸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거장'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신작으로, <굿 윌 헌팅> <밀크>로 대표되는 '구스 반 산트'표 인물 천착 장르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무난하고 안정된 스토리에, 결을 함께 하는 연출과 연기가 조화를 이루었다.

 

2010년대 들어서 거짓말처럼 좋지 않은 평가를 들을 만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이지만, 최고 흥행작이자 대표작 <굿 윌 헌팅>을 비롯해 <아이다호> <투 다이 포> <파인딩 포레스터> <엘리펀트> <밀크> <파라노이드 파크> 등 1990~2000년대를 주름잡을 만한 영화들을 다수 내놓았다. 이중 '각 잡고' 만든 영화 <엘리펀트>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에 빛난다.

 

들여다보면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변방의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을 다룬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때론 착하게 그려내어, 오히려 더 부각되는 묘미를 살린다. 그 자신이 성소수자(게이)임을 밝혔기에,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겠다. 구스 반 산트의 삶과 시선이 다분히 녹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알코올중독

 

 

영화 <돈 워리>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의 시점은 자못 뒤죽박죽이다. 만화가로 성공한 지금의 시점도 3~4개에 다다르고, 대중 앞에서 하는 이야기와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쓰러졌을 때 일으켜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와 중독자 모음에서 일행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일치 또는 불일치되면서 사고가 나기 전의 이야기, 사고가 난 직후의 이야기,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된 후에도 여전히 알코올에 중독된 이야기, 중독자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 후의 이야기가 마치 알코올중독자이자 전신마비자 존의 뒤죽박죽 삶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돈 워리>에서 전신마비는 의외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전신마비에 이르게 한 교통사고가 단순한 실수나 타인에 의한 고의 때문이 아니라, 100% 본인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알코올중독. 그래서일까, 교통사고에 천착한 참혹한 장면 묘사는 없고 대신 그때에 이르기까지 그가 어떤 알코올중독적 일상을 지내왔는지 들여다보거나 전신마비 재활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닌 알코올중독적 일상을 계속 영위하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영화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극중에서 존은 중독자 프로그램에서 큰 깨달음을 두 번 얻는 듯하다. 그때마다 활짝 웃으니까. 프로그램에 처음 갔을 때 도니가 나와서 얘기한다. 그는 두 벌의 바지만 있었다고 한다. 똥 묻은 바지와 똥 묻지 않은 바지. 그는 원래 그 둘 중 어느 것을 입으나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젠 아침에 일어나 똥 묻지 않은 바지를 입고 커피를 마시러 간다고 한다. 커피 맛이 기가 막힌 그 평범함을 축하하고 그런 하루가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중독자 프로그램의 또 다른 모임에서 도니가 존에게 음주에 관해 얘기해줄 것을 요구한다. 존은 13살에 처음 술을 마셨는데, 좋았고 계속 마셨다. 그는 자신이 술을 끊지 못한 게 입양아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술을 마시면 입양아인 게 별로 신경 안 쓰였던 것 같다면서.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말이 핑계라고 몰아부친다. 분노가 치민 존, 급기야 본인의 전신마비 얘기를 꺼낸다. 그때 한 명이 웃기에 조는 그녀에게 화를 푼다. 하지만 그녀는 심장암을 앓고 있었고 '자기 연민'에 대해 존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넨다. 존은 받아들이고 사과를 하며 활짝 웃는다. 그건 이 모임의 '12단계' 중 하나였던 것이다.

 

궁극적 ‘치유’에 다다르다

 

 

영화 <돈 워리>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전신마비 '재활'을 건너 띄고 알코올중독 '치료'로 나아갔지만, 궁극적으론 인생을 보다 올바르고 건강한 쪽으로 바꾸는 '치유'에 다다른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보는 존의 사고 전후의 이야기들 자체가 모두 치유의 과정이라 하겠다. 존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매우 힘든 일임과 동시에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궁극적 심연에의 도달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돈 워리>는 그 자체로 치유 프로그램이다. 누구든 문제라고 직시하고 있거나 힘들고 두려워 하는 부분이 있다면 궁극적 심연에 도달하기 위해 존의 과정을 따르면 될 것이다.

 

존은 걷지 못한다, 왜? 사고를 당했으니까. 왜? 덱스터가 졸음운전을 했으니까. 왜? 술에 취했으니까. 왜 그 차를 탔나? 다음 파티장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그 차를 탔나? 그땐 어렸으니까. 도대체, 왜 그 차를 탔나? 모르겠다... 술에 무지 취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술에 절어 살았다. 너무 창피했다. 날 사랑해주는 사람도 날 원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을 마셔서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 어릴 때 아버지 집에서 많은 몹쓸 짓을 저질렀다. 존은 그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도니는 오히려 존이 그들을 용서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굿 윌 헌팅>의 명대사 "윌, 네 잘못이 아니야", 들여다보기는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은 윌의 그곳을 숀은 윌과 함께 억지로 다다른다. 그러곤 올바르고 건강한 삶을 향한 치유의 발걸음을, 그 고통의 심연을 파헤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돈 워리>에선 도니가 숀의 역할을 대신 하여 존을 이끈다. 획기적이거나 번개 같지 않은 발견과 통찰과 명료한 순간들의 길고 긴 이어짐 속 '용서'의 궁극을 전하는 것이다. 그 끝엔 다름 아닌 자신을 향한 용서가 있다. 결국,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고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고는 자신의 모든 과오를 자신이 직접 용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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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국민을 대변하기 때문에 왕이요." <킹스 스피치>

오래된 리뷰 2017. 3. 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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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킹스 스피치>


역사상 유명하다고 하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몰랐다. '말더듬이' 왕의 진심을 다한 국민으로의 연설을. ⓒ(주)화앤담이엔티



허를 찔렸다. '말더듬이'라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상태가 이리도 긴장감을 유발할 줄이야. 자신이 말더듬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중요한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하다니.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한가. '이게 뭐라고 이리도 떨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짧지만 강렬한 시작 장면에서 느낀 감정들이다.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이자 전임 국왕 조지 6세의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겨 감동을 자아내고자 했는데, 제대로 성공시키며 감격을 주었다. 우린 그 감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의 진심을 다한 연설 하나만으로. 


조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8세는 역사상 유명한 스캔들을 일으키며 하야하고 동생 조지 6세(콜린 퍼스 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생각지도 못한 왕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가 너무 부담스러운 조지 6세, 특히 라디오야말로 왕 노릇의 절대적 기반이 된 시대에 '말더듬이'로서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높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 분)로부터 치료를 받아오긴 했지만, 큰 진전이 없는 것 같기도 했거니와 기상천외한 치료 방법에 기가 질려 오다가다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조지 5세가 돌아가셨을 때나 형 에드워드 8세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줬을 때 심리적 위기가 찾아와 관계가 틀어지지만, 로그에 대한 믿음으로 계속해서 찾아가는 조지 6세다.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일회용 영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더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일회용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주)화앤담이엔티



흔히 무난하고 무탈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를 '웰메이드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그렇다. 참 잘 만든 영화란 생각이 든다. 드라마 요소가 적절히 배합된 실화를 바탕으로 꼼꼼히 손 본 듯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프로페셔널하고 충실하게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영화에서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와 색채를 최대한 배제한 듯한 감독, 독특하다기보다 정형화된 안정감이 인상적인 장면 미장센까지, 모두가 영화만을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느낌이다. 


결과는 흥행과 비평 양면의 완벽한 대박. 단도직입적으로,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사실상 여주가 없는 영화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4억 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제작비 대비 26배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엘리자베스 2세도 극찬을 보냈다고 하니, 누가 보아도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이면 족할 그런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보면서 이야기와 숨겨진 이면을 확대재생산하며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를 보는 행위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처럼 좋은 영화임에도 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굳이 찾아보라면, 실제와 영화 속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정도? 하지만 그건 결코 영화가 중심이 될 순 없겠다. 영화의 주요 모토인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원인과 치료 과정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그것 또한 의미는 있겠지만 영화가 중심이 될 순 없겠다. 여러모로 <킹스 스피치>는 정말 잘 만든 일회용 영화다. 그렇다고 킬링타임용은 아니다. 


눈 돌리지 않고 정면만 바라본 선택


이 영화가 가장 잘 한 점이 바로 조지 6세와 라이오넬 로그다. 이 두 사람에 방점을 찍고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 ⓒ(주)화앤담이엔티



이야기가 산으로 갈 만한 요소들이 도처에 깔렸다. '왕의 연설'이라는 하나의 극점을 향해 치달렸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눈을 돌렸다면 영화의 만듦새는 여지 없이 흐트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유혹이 꽤 강했을 텐데, 그 요소들이 꽤 재밌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시대극이니만큼 조금만 건드려도 봇물처럼 뿜어져 나올 게 아닌가. 그것도 현존하는 영국 여왕의 직계 선대에 관한 이야기이니.


완전히 바뀐 세상에 대처하는 왕실의 모습, 에드워드 8세의 세기의 스캔들, 스탠리 볼드윈이나 네빌 체임벌린이나 윈스턴 처칠과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황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산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꿋꿋이 한 길을 걸어간다.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치료, 그리고 라이오넬 로그.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그려내지 않은 선택, 필자를 포함해 약간의 불만이라도 갖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너무 한 개인에 천착해 지극한 목적 지향이 된 게 아닌가. 그리하여 대작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음에도 소품의 면모를 띠게 된 게 아닌가. 


영화는 온몸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치밀하고 꼼꼼한 각본은 결코 그 부분들을 간과하지 않는다. 한 장면, 한 표정, 한 마디가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와 닿아 꽂히는 것이다. 조주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을 잘 살펴야 한다. 어느 영화인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겠냐만, 이 영화는 그 강도가 조금 더 쎄다고 하겠다. 


영화 자체가 가진 압도적 힘


비록 일회용 영화라곤 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이 엄청나서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재와 주제가 가진 힘. ⓒ(주)화앤담이엔티



<킹스 스피치>는 계속해서 다시 보며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대신, 영화 자체가 가진 힘 때문에 종종 다시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와 비슷하다고 할까. 이 영화로 지도자의 덕목을 엿볼 수도 있고, 믿음이란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으며, 치료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이 영화가 채택한 소재와 주제가 갖는 힘이 엄청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이 영화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다. 다름 아닌 '지도자의 덕목'이다. '조지 6세가 로그와 더불어 믿음과 끈기로 말더듬이 장애를 극복하는 휴먼 스토리'라는 큰 이야기 이면에 있는 여러 이야기들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이 이 영화를 찾게 만든 이유일 테다. 


조지 6세, 그는 어렸을 때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교정'을 당했다고 한다. 안짱다리를 교정하기 위해 부목을 착용했고 왼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잡이로 교정해야 했다. 또 유모의 방치로 위염을 앓기도 했다고. 그 때문에 말을 더듬었는지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왕이 되기에는 힘든 겉모양(?)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치열한 고민과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조금 더 국민에게 다가 갔던 것이다. 오히려 콤플렉스가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위압감과 오만함을 털어내주었다. 


언어 치료사 로그의 존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학위도 없고 당연히 정식 언어 치료사라는 타이틀도 없는 로그를 실력 하나로 뽑아 가까이 하는 대범함을 지닌 조지 6세. 그는 지극히 자신의 진심을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하기 위해 치료를 받았다. 로그는 그의 말더듬이를 치료하려고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안'부터 치료하고자 했다. 말더듬 장애의 근원을 찾는 게 맞다고 본 것이다. 고로 여기서 부각되는 건 '목소리'겠지만, 중요한 건 '진심'이겠다. 목소리는 진심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조지 6세의 진심은 무엇일까. 


"왕은 국민을 대변하기 때문에 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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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이, 목소리, 웰메이드, 일회용, 조지 6세, 지도자, 진심, 치료, 킹스 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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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근원에 맞서 희망을 외치는 휴먼 스토리 <몬스터>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7. 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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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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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만화책, 몬스터, 서사, 슬픔, 요한, 우라사와 나오키, 인간, 치료, 텐마, 포용,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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