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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전에 패하고 말았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가 있은 후, 조선과 왜국이 내통할지도 모른다는 명나라 조정의 의심도 풀어졌다. 이후 조선 조정은 왜국의 동태를 걱정하여 국방에 밝은 사람을 뽑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방비하게 한다.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했으며, 병영을 새로 쌓거나 더 늘려 수축하게 하였다. 이처럼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달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 혹시 모를 전란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데에서 터져 나온다. 그건 바로 오랜 전에 4군 6진 개척으로 북방을 안정시키고 쓰시마 정벌로 왜구 침략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져, 태평성대의 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의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더보기
임진왜란 직전: 황윤길과 김성일은 왜 반대되는 말을 했을까? 1592년, 조선을 대혼란으로 빠뜨리는 대 사건이 일어난다. '임진왜란' 이후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수탈당하고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받는다. 조선 개국 200년만에 들이닥친 최대의 위기였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 수난을 이겨냈을까. 우리는 이 임진 국난의 자세한 내막을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란 이름은 의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선조 때 명재상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쓴 것으로, 임진왜란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서애 유성룡은 이순신의 어릴적 친구로, 임진왜란 당시 사내정치의 희생양이 된 이순신을 물심양면 도왔다. 하지만 그도 정치를 하는 입장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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