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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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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의 천재 영웅 슈퍼스타에서 배신자 악마로의 기막힌 추락 <디에고> 2020.01.15
  • 문학적 철학적 신화적 질문들을 던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나의 마더> 2019.06.21
  •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줄여야 하는 이유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2018.04.16
  •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본 에코니즘(1) 2018.04.06
  • 열일곱 소녀 가장을 위협하는 강대국의 강력함 <윈터스 본>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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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과 죽음의 운명, 그 속박을 풀 수 있을까? <줄리에타> 2016.12.16
  • <나는 전설이다> 종말이 휩쓸고 간 자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4) 2015.03.04
  •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8) 2015.01.14

최고의 천재 영웅 슈퍼스타에서 배신자 악마로의 기막힌 추락 <디에고>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1.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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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디에고>


다큐멘터리 영화 <디에고> 포스터. ⓒ워터홀컴퍼니(주)



전설 또는 레전드라 일컬어지는 스포츠 스타 중 여전히 현역에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현역이라 함은 선수뿐만 아니라 코치나 감독 등으로 경기를 함께 하는 이라 말할 수 있을 텐데,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내기 힘들다. 대부분, 현역 실무직에서 물러나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것이다. 와중에, 여전히 전 세계를 누비며 감독으로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설이 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디에고 마라도나. 


그는 선수로서의 현역에선 일찍 물러나 30대 중반부터 감독 생활을 했는데, 빛을 보진 못한 케이스이다. 아예 빛을 볼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일까, 지난 2017년부터 하위권 팀들을 도맡고 있다. 그는 어딜 가든, 어느 팀을 맡든, 여전히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다. 2018년 당시 멕시코 2부 리그 도나도스 데 시날로아를 맡은 이야기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날로아의 마라도나>로 만들어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현역 시절부터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던 극단의 단어들 '신'과 '악마', '영웅'과 '배신자' 등이 지금도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여기 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천재 3부작 중 마지막 <디에고>이다. 그의 지난 두 작품은 <세나: F1의 신화>와 <에이미>이다. 일찍 세상을 뜬 두 명의 천재 전설에 이어, 여전히 세상을 뒤흔드는 한 명의 천재 전설을 내보이는 것이다. 지난 2008년 선보인 <축구의 신: 마라도나> 이후 10여 년만에 나온 마라도나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 역시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특징이 고스란히 내보여지는데, 오로지 옛 영상 자료와 얼굴 없는 현 목소리로만 구성했다. 자료로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것이다. 


'디에고'와 '마라도나'


다큐멘터리 <디에고>는 '디에고'로서의 마라도나와 '마라도나'로서의 디에고를 모두 보여주려 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디에고는 빈민가 출신의 수줍음 많고 다정한 남자인 반면 마라도나는 최고의 축구 선수로 미디어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슈퍼스타이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이라면 디에고였을 테지만, 대부분의 이들에게 그는 마라도나였다. 


마라도나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을 증명하듯 일찍이 10대 중반에 충격적인 프로 데뷔로 아르헨티나를 뒤흔들었다. 10대 후반에는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서 원맨쇼로 나라를 우승시키고 본인은 최우수선수로 뽑혔는데, 약관 20세부터는 이미 남미의 왕이었다. 당연한 수순인듯 그가 향한 곳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당연한듯 당시 최고 이적료를 경신한다. 


기대에 호응하듯 엄청난 퍼포먼스를 펼쳤지만, 질병으로 고생하고 악질적인 태클로 선수생활 자체가 끝장날 위기에 처한다. 몇 개월의 피나는 재활 후 돌아온 그는, 여전한 퍼포먼스를 펼치는데 여전한 악질적 태클로도 고생한다. 결국 참지 못한 마라도나는,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세리아 A는 당대 최고의 리그로 유벤투스, 인테르, AC 밀란 등 유럽을 호령하는 클럽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리그 우승 한 번 없는 하위권의 그렇고 그랬던 팀 나폴리. 마라도나 신화가 시작되어 끝난 곳, <디에고>가 천착한 때와 장소이기도 하다. 


마라도나의 삶이 곧 그의 나폴리 시절


작품은 보여준다. 마라도나의 삶이 곧 마라도나의 나폴리 시절이라고 말이다. 1984년 이적 후, 1986~87 시즌부터 믿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축구는 축구장 위의 11명과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 그리고 팬들이 함께 하는 거라고 하지만, 마라도나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모든 관심과 기대가 그에게 쏠렸고, 그는 '무대' 위에서 완벽히 소화해냈다. 나폴리는 1986~87 시즌 사상 최초의 1부 리그 우승을 일구고 다음 해와 다다음 해에는 준우승 그리고 1989~90 시즌 다시 우승을 차지한다. 1988~89 시즌에는 전무후무한 유럽대항전 UEFA컵을 따냈다. 


자타공인 마라도나의 나폴리 시절 나폴리의 퍼포먼스는 100% 마라도나에 의한 것이리라. 더 위대한 건, 나폴리 사람들이 마라도나를 말 그대로 '신'으로 추앙했던 건, 축구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의 그의 인기이다. 나폴리라는 축구클럽은 제처두고서라도, 나폴리라는 도시 자체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천대받고 또 꺼려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 입성해 축구 열기를 수직 상승시켰고 도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시를 하나로 묶어 사회, 경제, 문화를 풍성하게 했으니, 마라도나는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하나 복권을 맞은 것과 다름 아니었다. 


신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추락할 운명이라고 했던가, 마라도나에게도 추락의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높이 올랐던 만큼 추락의 강도와 속도도 매우 강하고 빨랐다. <디에고>는 그 순간을 1990년 준결승전이라고 전한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절정기 마라도나의 당연한 원맨쇼에 힘입어 우승했었는데, 이번 이탈리아에서도 다시 한 번 높이 오를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준결승전 상대가 하필 이탈리아에 장소는 나폴리... 운명의 장난인 건지, 누군가의 소행인 건지. 


나폴리는 격정에 휩싸인다. 나폴리에서의 마라도나는 말 그대로 신, 하지만 이탈리아인에게 축구는 역시 말 그대로 신이기에 이탈리아 대표님의 승리와 높은 곳으로의 행보는 당연한 것이었다. 결과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승리. 이후 거짓말처럼 이탈리아 전역의 마라도나를 향한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그는 한순간 신에서 악마가 된다. 미디어, 사법당국, 세무당국 할 것 없이 그를 향해 집중 융단폭격을 날린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듯, 마라도나는 여성편력과 마약복용 등 수많은 스캔들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의 대상인 천재의 내면


마라도나는 천진난만하면서 좋지 않은 의미로 자유분방한 악동의 이미지가 강하다. 굳이 미디어에서 그를 끌어내리고자 만들어내지 않고라도 말이다. <디에고>가 포착해 잡아낸 면모가 바로 그 부분인데, '마라도나'는 슈퍼스타의 압박감을 잘 받아낼 수 있었지만 '디에고'는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디에고로서는 모든 생각을 잊고 놀고(여자도) 마시며(마약도) 풀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그만큼 올라갔으면 내려와도 괜찮지 않느냐 말할 수도 있겠다. 당연히 맞는 말인데, 거리를 두고 보면 그의 삶만큼 극단의 굴곡을 지닌 삶도 없다.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고 뜯고 즐기는 존재이자 무조건적인 존경과 추앙의 대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단순히 빈민가 출신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성공 스토리가 아닌, 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악마이자 배신자로 추락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라도나는 그만의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천재의 삶은 흥미의 대상으로 소비되어 외면만 보기 마련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천재가 갖는 흥미의 상(像)이 깨지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과감히 천재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했고 철저히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그럼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성공했을까? 성공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당시 자료만으로 전했기로서니 객관적이었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괜찮은 스토리텔링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 여한이 없었다 하겠다. 이 작품으로 비로소 마라도나 신화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었다. 마라도나가 만들고, 마라도나 아닌 이들이 파괴시킨 신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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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디에고, 마라도나, 미디어, 슈퍼스타, 신화, 악마, 영웅, 천재,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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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철학적 신화적 질문들을 던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나의 마더>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6.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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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나의 마더>


영화 <나의 마더> 포스터. ⓒ넷플릭스



인류가 완전히 멸망한 다음 날, 인류 재건 시설에서 인간 여자아이 한 명이 태어난다. 시설에는 63,000개의 인간 배아가 있는데, 로봇 하나가 모든 걸 관리한다. 태어난 인간 아이의 양육도 그의 몫, 로봇은 '엄마'가 되고 인간 여자아이는 '딸'이 된다. 시간이 지나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고 13867일이 지났다. 그런데 딸은 10대 중반에 불과한 듯하다. 수십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엄마와 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무엇보다 딸은 엄마의 다방면에 걸친 완벽한 교육으로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다. 나아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까지 낱낱이 짚고 넘어간다. 이보다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딸은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모든 게 옳다는 엄마의 '바깥 세상은 위험하다'는 말만 있을 뿐이다. 


호기심 발동이 의심과 맞물려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는 찰나 굳게 닫힌 바깥 문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봇 총에 맞아 생명이 위급하니 시설 내로 들여달라는 부탁이었다. 바깥 세상은 위험하고 또 인간은 없다는 엄마를 향한 의심이 현실로 발현되는 순간이다. 돌이킬 수가 없다. 딸은 엄마 몰래 외부인을 시설 내부로 들인다. 외부인은 로봇인 엄마를 경계하며 인간인 딸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엄마는 위험한 밖으로의 길을 당연히 반대한다. 딸은 엄마와 외부인의 상반된 주장에 갈팡질팡한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어떤 생각과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종말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나의 마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인류와 문명 멸망 이후를 그렸다. 종말 이후라고 해두자. 으레 생각하기 쉬운 모습은, 더 이상 발달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세상과 정반대의 황폐하기 그지없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황폐와 거리가 먼데, 종말 이후 완벽히 보호되는 재건 시설이 주된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여,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날것' 대신 종말 이후 하고도 머나먼 미래의 새로운 첨단 '최신식'이 주를 이룬다. 종말로 세상이 후퇴한 게 아니라 전진했다는 느낌을 주는데, 주체가 인간이 아닌 로봇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를 SF 장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테다. 반면, 가령 <매드맥스> 시리즈도 종말 이후를 다루지만 SF 장르라고 하긴 힘들다. 


나아가, 영화는 문학적 철학적 신화적 질문을 던진다. 인류를 재건하고 인간 딸을 기르며 시설 안과 밖을 철저히 차단하는 로봇 엄마, 엄마에 의해 철저하게 완벽한 인간으로 교육받지만 다 클 때까지 시설 밖으로 나갈 생각도 행동도 못 하는 인간 딸,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시설 내부로 찾아온 여러모로 미심쩍은 인간 외부인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A부터 Z까지 모든 게 철저히 상징성을 띤다. 


반전에의 복선들


영화는 SF 장르와 미스터리 스릴러의 교묘한 합으로 진행된다. 한정되고 비밀이 많은 공간, 두 명의 인간과 한 개의 로봇, 진실을 두고 얽히고설킨 세 개체. 잔혹한 육체파 스릴러도 치밀하게 직조된 심리 미스터리도 아닌,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와중에 곳곳에 암초처럼 흔적을 남긴 반전에의 복선들이 재미 요소가 되겠다. 


요컨대, 인류 멸망 1일차에 인간 여자아이 한 명이 태어나는데 13867일 차에 불과 10대로 보이는 여자아이만 있을 뿐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39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의문이 드는 와중에, 바깥 세상에는 모든 인간이 멸망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39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외부인이 나타난다. 가장 큰 반전의 복선이 사실상 영화 초반에 드러나는 것인데, 영화를 감상하는 데 하등 방해가 되진 않는다. 


여자 외부인이 나타났을 때 우린 그녀의 정체가 아닌 딸의 안위에 시선이 가 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에서 스릴러로 장르가 교묘히 변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똑똑하기 그지없는 딸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될까?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될까? '로봇' 엄마와 '엄마' 로봇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문학적, 철학적, 신화적 질문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어구가 등장한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누가 봐도 명백히 새는 데미안과 다름 아니고 데미안은 영화 속 딸과 다름 아니다. 그녀는 비록 로봇의 손에 키워졌지만 인간에의 본능으로 알을 깨고 나오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스토리는 '오디세우스'이다. 10년 간의 트로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 다시 10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모험을 겪은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영화에서는, 인간의 파렴치한 욕망을 보다못한 로봇이 인류를 멸망시켜버리고 완전한 신 인류를 재창조해 자기 입맛대로 키운다. 하지만 인간의 본능은 어찌하지 못하기에, 인간 딸은 알을 깨고 나오지만 다시 돌아온다. 이 '돌아오는 이야기'는 딸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테다. 


간악한 반전 스포일러가 될 테지만 아니 이미 위에서 내보였지만, 극장용 아닌 누구나 한 달 무료인 넷플릭스용이라는 점을 감안해 말하고자 한다. 결국 승리자는 로봇 엄마가 된다. 인간의 본능 뒤 본능까지 '사려깊게' 캐치하여 빅 픽쳐를 그린 로봇, 딸로 하여금 모든 진실을 알게 해놓고선 돌아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녀는 그곳에서 모든 간악한 진실을 알고선 더욱더 바깥을 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비록 로봇의 통제를 더 이상 직접적으로 받지 않겠지만, 개인으로서가 아닌 인류 전체가 밖으로부터 로봇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평평한 스토리라인임에 분명하지만, 그래서 자못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반드시 한 번 이상 보게 되는 여운과 궁금증을 남긴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긴 힘들겠으나 결말까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에 한 번 더 봐야 하고, 그 해석에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에 한 번 더 봐야 하며, 쉽진 않겠지만 재미가 없진 않을 게 분명하기에 한 번 더 봐야 한다. 


재미 없으면 그 자리에서 다장 떼려치워버리기도 하지만, 재미 있으면 몇 번이고 돌려볼 수 있는 넷플릭스 콘텐츠에 제격인 듯하다. 한편 <카타카> <엑스 마키나> <컨택트> 등 '생각하는 SF'와 결을 같이 하니 따로 챙겨두어 두고두고 볼 만하다. 필자의 해석보다 훨씬 더 새롭고 다채롭고 들어맞는 해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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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줄여야 하는 이유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8. 4.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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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오랫동안, 그러니까 결혼을 하기 전까진 식단으로만 본다면 채식주의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 당연히 주식은 쌀밥, 주반찬은 국(김치찌개, 된장찌개, 미역국 등)과 김치류였다. 가끔, 특식으로 삼겹살이나 닭볶음탕, 소갈비를 먹었다. 아주 가끔, 몸보신 용으로 곰탕을 먹었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한국인의 보편적 식습관일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상당한 육식이 함께 하지만, 보다 훨씬 상당한 채식이 함께 한다. 결혼을 하고 몇 개월 정도 아내의 친정에 얹혀 살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가족이었다. 아내는 본인 가족의 주식은 쌀밥이 아닌 고기 또는 면이고, 주반찬은 그때그때 다르다고 했다. 


서양식에 가까운 식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간 평생 먹었던 고기에 버금가는 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매일이 고기, 넓은 의미의 육식이었다. 대신 나만큼은 쌀밥을 아예 안 먹을 수 없으니 소량의 쌀밥을 함께 먹었다.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경험, 나의 식문화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이제 독립해 둘만 살아가는 지금, 여전히 나의 아내는 쌀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쌀밥이 주식은 아니다. 반면, 나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예전 식습관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고기는 육식은 나의 영원한 갈망 대상이다. 고기를 먹으면, '정말 잘 먹었다'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고 심지어 내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고기를 엄청 찾지는 않지만 고기를 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메디치)은 나를 포함해 모든 비(非)금식자를 위한 책이다. 


육식의 시작, 육식의 신화, 육식의 경향


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육식을 주체로 놓고 육식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오히려 부정적에 가까운 생각의 발현을 내보인다. 인류는 왜 육식을 끊을 수 없는지 사실상 육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기정사실화 해놓고, 인류의 육식에의 필연적 욕망을 수백 만 년 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들여다본다. 


저자는 우리 조상이 250만 년 전에 육식 식단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먹잇감을 사냥할 도구가 있었고, 소화시킬 몸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갑작스런 기후변화가 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강수량이 줄어 식물들은 줄어든 대신, 동물들은 증가했다. 한편, 지금도 초식동물이 가끔 육식을 하는 것처럼 그저 칼로리를 보충하기 위해 육식을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식은 인류가 사회적 동물인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식물을 얻는 것보다 고기를 얻는 게 훨씬 더 힘들다는 걸 알고난 후, 육식은 칼로리 보충용이 아닌 권력에의 표상과 힘의 상징이 된 것이다. 육식이 주는 칼로리의 열량이 채식보다 훨씬 더 크다는 단순한 이유도 물론 존재한다. 


이는 비단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아시아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고기의 섭취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선진국=서양=육식'의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육식이 있다는 자못 웃기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


최근 들어, 건강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진 듯한 느낌이다. 한편으론 인권에 버금가는 동물권리에의 이유를 들어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고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너무 더럽고 잔인해 먹을 수 없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작 주변에서는 찾기 힘들거니와,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도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내 안에, 인류의 안에 250만 년 전에 시작된 고기를 끊지 못하는 DNA가 있다는 것과 상관없이, 지금 인류가 비록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채식주의를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고기를 쉽게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


미국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책은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여러 이유가 더 있다고 말한다. 육류 관련 협회는 육류 생산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육류가 더 많이 소비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하며 수수료로 먹고 사는데, 정부 시책과 맞물려 시행되는 그들의 어마어마한 홍보는 사람들의 인식까지 지배할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광고는 물론 과학자들을 동원, 학술적으로까지 접근하여 우리의 가슴과 마음 깊숙이까지 육식에의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만들어진 신화'를 차치하고서라도 고기가 주는 직접적이고 '만들어지지 않은 맛'에의 욕망을 인간 누구도 저버릴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감칠맛과 지방의 조합이 환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건 우리 몸에 내재된,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가장 어쩔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건강과 미래 후손의 세상이다. 이런 식의 육식이라면 단적으로, 여전히 심장 질환과 암 질병 발생률에 지대한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에 엄청난 아픔을 초래하는 가축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에 대기 및 수질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안길 것이다. 


저자는 크게 위의 두 이유로 육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육식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 길이 너무나 길고 험하다는 걸 잘 알기에,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게 아닌 육식을 줄여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린 것이다. 매우 적절하고, 매우 마음에 드는 결론이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육식을 많이 하면 몸에 좋을 게 없지만 최소한은 섭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있는지라, 그 인식에 완벽히 부합한다. 


육식을 끊을 수도 없겠지만, 끊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채식주의를 하는 건 자유지만, 채식주의를 강요하고 육식주의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다. 물론, 그 반대의 행위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여러 방면에서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대립하는 양 면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취합하여, 실현 가능한 절충안을 내는 방법'에 박수를 보내며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그 취지에 공감하며 따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육식 연대기'라는 이 책의 부제와 다른 또 다른 부제를 붙이고 싶다. '육식을 줄여야 하는 이유'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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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미국, 신화, 육식, 지구,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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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본 에코니즘

오래된 리뷰 2018. 4.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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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모노노케 히메>로 환경을 생각해보다


<모노노케 히메> 포스터. ⓒ월트 디즈니 코리아



북쪽과 동쪽 사이의 어디쯤 에미시 일족이 사는 마을에 재앙신이 출물한다. 차기 족장 '아시타카'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을 날려 물리치지만 오른팔에 재앙신의 각인이 새겨져 죽을 운명에 처한다. 마을의 무녀 히이님으로부터 서쪽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재앙신의 출몰도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시타카는 서쪽으로 여정을 떠난다. 중간에 만나게 된 지코보, 그는 지코보에게 사정을 털어놓는데 지코보는 그에게 서쪽 끝에 있는 '사슴신'과 신들의 숲 이야기를 해준다. 


한편, 타타라바 마을은 '에보시'의 탁월한 지도 아래 여자들은 철을 생산하고 남자들은 그 철로 쌀을 거래해 오는 등의 체계로 작지만 탄탄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안정되고 지속적이고 잘 돌아가는 마을을 위해 근처 숲뿐만 아니라 사슴신이 사는 신들의 숲까지 파괴하고자 한다. 아시타카에게 저주를 내린 재앙신도 사실 에보시의 총에 맞아 죽어간 멧돼지신이었던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여자들뿐 아니라 나병 환자한테도 차별없이 대하는 마을이 아닌가. 


모노노케 히메 '산'은 들개신과 함께 숲에서 살아가며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 타타라바 마을의 에보시를 죽이려 한다. 그녀는 아시타카와도 얽히는데, 아시타카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였거니와 어쨌든 아시타카는 타타라바 마을로 대표되는 다분히 '인간' 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산도 인간인 만큼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순 없다. 아시타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꿈꾼다. 과연 그의 바람은 이뤄질까. 


에코니즘과 페미니즘 사이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영원히 남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일본 현지에서 당대 최고의 흥행과 비평을 거머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자그마치 1984년작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에코니즘(자연주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일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시대극이다. 


일본 특유의 원령 신화, 일본의 원주민 아이누 신화와 북방계 샤머니즘 신화 등이 혼합된 복합적 일본 신화 체계를 가져다 놓았는데,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는 해석 작업도 활발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면, 일본 신화보단 에코니즘이 더 정면에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편, 에코니즘과 더불어 영화가 추구하는 큰 틀은 페미니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미투·위드유 운동이 활발한 와중에 유독 일본에서만 잘 되지 않고 있다지 않은가. 그런 일본의 중세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나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타타라바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 에보시는 물론, 핵심 물품인 철을 만드는 이들 모두 여자이다. 남자들도 물론 그 철을 가지고 쌀로 거래를 해오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자인 에보시가 진두지휘를 하고 여자들도 전쟁에 참여한다. '자연'의 입장에서 본 '인간'을 상징하는 타타라바 마을을 무작정 매도할 수도 무작정 적대시할 수 없게 만든다.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그 와중에, 그 사이에 에코니즘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을 통합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영화 속에서 페미니즘을 행하는 인간들이 정작 에코니즘은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시타카는 이 둘의 공존을 홀로 외롭게 외치고 있고 말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에코니즘은 큰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연을 사랑하자' 따위의 단순한 개념도 아니다. 


우선, 자연(신)은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 그래서 터전을 다시 찾기 위해 인간과의 전쟁을 이어간다. 설령 그 전쟁이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에 인간도 손놓고 있을 순 없다. 그들도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른다. 


이 폭력의 순환은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네 지구를 보자.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전, 아니 인간이 농경혁명으로 정착하여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하기 전과 비교해 살 만한 곳이 되었는가? 그렇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터전이 확립되고 인간을 위한 문명이 들어서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정립되고 있다.


반면,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가.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겨 왔고 빼앗기고 있으며 빼앗길 예정이다.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자연환경'이라는 말은 옛말, 촌스러운 말이 되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 아니, 전쟁을 하면 공평하겠지만 이건 일방적인 학살 수준이다. 


진정한 에코니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월트 디즈니 코리아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사슴신은 얼핏 인간인 아닌 자연의 편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에겐 회생과 죽음의 능력이 공존하는데, 이른바 '대자연'이라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천재지변이 인간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자연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자연이 건네는 회생과 죽음의 섭리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답이라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자연, 각자의 절대적인 사연 때문에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치라면 이치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 따윈 없다. 인정 후에, 함께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개념 탑재가 수순인 것이다. 그 자체로, 인간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에 인간에게 유리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원래대로 돌려놓자'는 일차원적인 개념도 안 된다. 그건 다분히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 위주의 생각이다. 여기엔,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자연환경의 입장과 개념과 생각이 필요하다. 주체가 '인간' 또는 '자연'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함께 할 건 함께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게 입장이 없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자연의 입장을 추측하고 재단한 뒤 실행에 옮겨버린다.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인간 입장일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에코니즘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는 탁월하다. 


만화로서만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만화이기에 오히려 유치하지 않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인간의 입장과 생각만큼 자연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멧돼지와 들개가 말을 하고 또 신이기도 한, 황당하고 낯설지만 그러하기에 오히려 매우 설득력 있는 진정한 에코니즘의 방증이라 하겠다. 


에코니즘에 대해 말할 땐 더 이상 '우린' 또는 '인간'으로 시작하는 구호를 내지 말자. 물론 그것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거기에 최소한의 의미 부여는 하되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 이 대자연에는 우리 인간만이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연도 있다. 우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인간과 자연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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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모노노케 히메, 미야자키 하야오, 신화, 에코니즘, 인간, 자연, 페미니즘

  • 2018.04.0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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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소녀 가장을 위협하는 강대국의 강력함 <윈터스 본>

오래된 리뷰 2018. 3.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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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윈터스 본>


영화 <윈터스 본> 포스터. ⓒCJ 엔테테인먼트



2010년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배우를 뽑자면 '제니퍼 로렌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1990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하더라도 올해 서른이 채 되지 않되었다. 10대 중후반에 TV로 데뷔한 그녀는, 10대 후반에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곧바로 승승장구의 길을 간다. 


경력 초반의 연기로 전 세계의 인정을 받은 후 상업영화를 넘나들었는데, <엑스맨> 시리즈와 <헝거게임>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두 강력한 2010년대 흥행 시리즈로 그녀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사이사이 알찬 시간을 보냈는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 <조이> 등으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에서 주조연상을 놓치지 않았다. 


북미에서 2010년에 개봉한 <윈터스 본>은 그녀를 이 자리에 있게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엄연한 명감독들의 등용문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세계 유수 영화제들에서 좋은 모습을 선 보인 이 영화는, 제니퍼 로렌스의 제니퍼 로렌스에 의한 제니퍼 로렌스를 위한 작품이 되었다. 


아빠의 실종, 가장이 된 열일곱 소녀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미국 중남부 미주리주 오자크 산골에 사는 열일곱 살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 분), 그녀는 정신적으로 아픈 엄마와 어린 두 남매를 책임지고 있다. 아빠는 가석방 중이고 말이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선 아빠가 다시 약을 만드는 것 같다고 하며,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보석금으로 집과 땅을 저당잡고 종적을 감춰버렸다고 알린다. 


아빠를 찾아 재판에 출두하게끔 해야 집과 땅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리는 길고 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아빠와 친한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 집을 직접 찾아다니며 아빠의 종적을 쫓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커녕 친척들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아빠가 이미 죽었음을 인지한다. 


리로서는 어떻게든 무조건 아빠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 그런 리의 행동을 심히 못 마땅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그녀에게 심한 위협을 가한다. 그때 나타난 삼촌 티어드롭 돌리(존 호키스 분), 마음을 돌려 리의 사투를 도우며 함께 한다. 아빠의 실종, 나아가 죽음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리는 아빠를 찾아내어 집과 땅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까. 


강대국의 강력함이 독이 되는 이면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영화는 과연 이곳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인가 하는 의구심이 아주 강하게 들 정도의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은 얼핏 나라의 힘이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인 듯하다. 소규모의 목축업이나 마약 제조를 제외하면 도무지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는, 무(無) 경제활동으로 일관하는 폐허의 마을이 아닌가. 


와중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국가의 존재는 한 가족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다. 강력함이라는 자장 안에서, 강력함의 영향력을 체화시켜주는 것이 아닌 몸소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국가 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 즉 다른 국가뿐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들에게도 소위 그 강력함을 내보인다.


이 영화의 가난한 배경이 보여주는 세계 최대강국 미국의 이면은, 단순히 그 강력함에 반하는 가난이라는 이면뿐만 아니라 그 강력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이면인 것이다. 그걸 감당하는 자가 하다못해 장대한 기골의 영웅적인 중년 남성이 아니라 나이 어리고 여리디 여린 열입골 살의 소녀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차라리 신화적 존재


영화 <윈터스 본>의 한 장면. ⓒCJ 엔테테인먼트



제니퍼 로렌스가 어색함 없이 흔들림 없이 신인티 없이 완벽하리 만치 연기한 리 돌리는, 영웅적 존재가 아닌 신화적 존재에 가깝다. 영웅이라는 게 신화적 존재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신화적 존재란 좀 더 상징적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이 거대한 국가와 마을이라는 존재에 뚝심 있는 저항을 하지만, 그 어떠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 그럴 영웅적 힘과 지능이 뒤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해내야 하기에 진실 찾기가 아닌 생존에 포커스를 맞춘 반면, 그들은 그녀의 생존이 아닌 진실 찾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라는 길을 시도하고, 생존하기 위해 어린 동생들에게 총 쓰는 법을 가르치고, 야생 다람쥐를 사냥해 직접 손질하게 하는 건, 영웅적 스토리와는 거리가 먼, 차라리 신이 내린 시련을 성장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이겨나가는 신화적 스토리에 가깝다. 그건 미국 신화일까, 반(反)미국 신화일까. 


영화는 리의 영웅적 스토리를 포기함으로써 자연히 미스터리 스릴러도 함께 포기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스토리 성격상 드라마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일 게 분명해 보이지만, 실상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주 조금 가미된 드라마이다. 그래서 일면 굉장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아니 거의 반드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윈터스 본>이 개봉한 지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그 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건, 제니퍼 로렌스라는 배우의 발견뿐만 아니라 그녀가 분한 리 돌리의 가족을 향한 피나는 나아감 덕분일 것이다. 나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어른들로부터, 가난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려는 그녀의 사투는, 그 양상이 어떻든 진지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두 번 더 보면 영화가 더 명확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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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향한 여러 '미스'들로 박근혜 시대를 엿보다 <미스 프레지던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1.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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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프레지던트>


평범한 '박사모'를 들여다본다. ⓒ인디플러그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세대에게 옛날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 당신들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그보다 살 만해졌지만 엄청난 고생을 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후자의 끝은 박정희 또는 전두환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을 추모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았지만, 흠모의 기운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또 하나 명백했던 건, 모두 평범하다는 것. 


작년 이맘때 축제 같은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 갔었다. 한번은 너무 일찍 도착해 시청 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어르신들의 행진에 휩쓸릴 뻔했다. 박사모 집회였던 것 같은데, 어느 어르신께서 아내와 나에게 박근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우린 당황했지만 그분은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분은 매우 평범해 보였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박정희가 쓰러진 10월 26일에 개봉해 시작부터 모종의 의미부여를 행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박사모 회원 세 명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는 알고 싶기는커녕 쳐다보기도 싫은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이 진정 바뀌고자 한다면 알아야 하는 그들의 이야기. 


박정희와 육영수를 영원한 은인으로 모시는 그들


평범한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평생의 은인으로 모신다. ⓒ인디플러그



그들은 청주에 사는 조육형 씨와 울산에 사는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다. 조육형 씨는 매일 아침 의관을 정제하고 박정희 사진에 절을 올리며 국민교육헌장을 외운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가난을 철퇴하여 지금에 이를 수 없었다는 생각, 자신으로 하여금 새마을운동에 앞장서 가난 철퇴 선봉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고마움, 박정희를 향한 감사는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도리다.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도 박정희를 향한 마음이 조육형 씨와 같다. 배고픔을 해결해준 고마운 분, 인간답게 살게해준 감사한 분. 육영수를 향한 마음도 이에 못지 않다. 천사같은 모습에 천사같은 마음씨를 지닌 그녀의, 천사같은 행동들은 그때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 그 자체다. 총탄에 쓰러진 두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 누가 뭐라 하든 박정희와 육영수는 마음속 영원한 은인이다. 


그들에게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 박근혜는 한 가족이나 다름 없다. 가족이라면 그 어떤 일을 저질러도 편이 되어줄 수 있거니와 편이 되어야 한다는 정서의 일환으로,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박근혜를 편든다. 거기에 어떤 고뇌나 갈등도 없다. 그건 일종의 종교,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는 숭배의 대상, 박근혜는 한가족이자 동정의 대상이다. 


미스 프레지던트. myth, mis, miss


제목 <미스 프레지던트>는, 박정희 신화와 잘못한 나쁜 대통령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디플러그



박정희는 한국근현대사의 절대적 인물이다. 어느 누구도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그 그늘이 한국에 드리우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화적(myth)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박정희 신화는 그가 죽은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린 끊임없이 그 신화를 파헤쳐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우상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분명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그의 후광을 업고 당선되었던 박근혜, 수많은 불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치명적으로 배신한, 잘못한(mis) 대통령이었다. 영화가 제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두 번째다. 그들은 나쁜(mis)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그리워(miss)한다. 박근혜가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려지고 구속 수감 중임에도 그들은 박정희와 육영수를 향한 그리움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를 향한 마음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들을 향한 마음이 변한다는 건, 곧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박정희와 육영수를 숭배하고 그들과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잘못된 대통령을 뽑아 잘못을 저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 건, 모두 자신들의 삶을 긍정하려는 것이다. 그들을 진정 숭배한다기보다 그 험난한 시절을 헤쳐나온 자신들의 업적을 지켜내려는 것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세대들도,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기울여야 한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의 의미


아무 개입없이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디플러그



영화엔 어떤 입장도 없어 보인다. 감독이 <트루맛쇼> <MB의 추억> <쿼바디스>를 연출해 풍자의 끝을 보여준 김재환 감독이기에 상당히 의아하다. 감독이 보기에 이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주인공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동안 그가 풍자의 대상으로 택한 이들은 미디어, 현직 대통령, 교회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했기에 풍자를 했던 게 아닐까. 


반면, 조육형 씨와 김종효, 최순옥 씨 부부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물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여 역사를 바꾸는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할 수 있겠지만, 미디어, 대통령, 교회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소명을 다하려 했던 것일 테다. 다만, 앞서 내놓았던 작품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란이 예상된다. 


힘있는 자들을 향한 명백한 풍자는,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 또는 당사자들에게 몰매를 맞을 우려가 있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예견된 수순이다. 반면, 이 영화처럼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힘있는 자들을 편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는 행위는 자못 이해가 안 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에서도 환영을 못받거니와 모두에게 지탄을 받을 게 자명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잘 알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속깊이 들어보고 들여다봄으로써 거대한 통합의 물꼬를 트려는 의도.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국을 위해 한몸 희생한(?) 김재환 감독. 그렇지만, 이 영화 하나로 그 갈등의 골이 얕아지기는커녕 더 깊어질 수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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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운명, 그 속박을 풀 수 있을까? <줄리에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12.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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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줄리에타>


<줄리에타> 포스터의 두 여인은 사실 한 명이다. 젊을 때의 줄리에타와 중년의 줄리에타. 젊은 줄리에타를 분한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손색이 없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는 로렌조와 함께 마드리드의 삶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한 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베아, 베아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딸 안티아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만에 듣게 된 딸의 소식에 줄리에타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취소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딸을 향한 사죄의 시작인 양. 


스페인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줄리에타>는 줄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와 편지를 쓰는 현재가 교차되는 형식을 취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줄리에타가 있고 감독은 줄리에타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여성' '사죄' '욕망' 등과 과거와 현재, 문학과 신화가 뒤엉켜 상당히 복잡다단한 이 영화는, 상징으로 표출되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야기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주요 줄기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삶에서 이런 층위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 여성도, 회상 속 20~40대 여성도, 그렇다고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처럼 '여성'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이 중에 하나인 바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싶다. 


줄리에타를 따라다니는 삶과 죽음의 운명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평생 줄리에타를 따라다닐 운명 말이다. 그녀는 그 속발을 풀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때는 1980년대, 대학에서 고전문학 강사로 있는 젊은 줄리에타, 난해한 패션의 소유자이지만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 그녀, 야간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녀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난 나이든 남자가 말을 건다. 너무 싫었던 줄리에타는 그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한 후 레스토랑 칸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아내를 몇 년 동안 간호해 왔다는 소안. 거기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줄리에타. 


얼마 후 일어나게 된 끔찍한 사고, 줄리에타가 무시한 나이든 남자가 자살을 한 것. 줄리에타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곧 소안과의 육체적 관계로 해소한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후 받게 된 소안의 편지로 그를 찾아가고 그들은 곧 함께 한다. 기차에서의 관계로 얻게 된 아이 안티아도 함께. 기차에서 겪은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혀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비극은 그녀를 빗겨가지 않는다.


영화 초반,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대비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그 둘이 줄리에타의 삶을 따라다니며 곧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바, 기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차는 일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곳에서 타에 의해 정해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바, 운명적 요소가 굉장히 진하다. 줄리에타도 그 운명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열차는 그녀를 계속 따라 다닌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유추해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시작된 운명의 문이 거기 있다. 문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 알겠는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줄리에타는 운명이 선사한 지독히 속박에 갇혀 헤어나기 힘들어 하고 있다. 로렌조가 보낸 구원의 손길도 어쩌지 못한다. 스스로만 풀 수 있을 뿐.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모녀 관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모녀 관계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줄리에타에겐 누워 지낸 지 오래된 엄마가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아빠도 있다. 그리고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게 된 여자도 있다. 줄리에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데 아빠와 여자의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습도 목격한다. 역겨움을 느끼는 줄리에타, 하필 그때 즈음에 소안이 예전 아내가 아팠을 적에 그의 절친 아바와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싸늘하게 소안을 물리는 줄리에타, 소안은 어부로서 할 일을 하러 나가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 소안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줄리에타는 옛날 기차에서의 죽음이 겹쳐 죄책감이 되살아난다. 어느새 큰 안티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어린 안티아에게 삶을 위탁하다시피 하는 신세를 진다. 참으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는 정신을 차린 줄리에타. 어린 안티아는 이제 다 커서 18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줄리에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덥친 건, 그녀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잃음'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는 간신히 회복한 그녀를 또다시 후려친다. 이번엔 딸의 독립으로. 그녀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현재는커녕 과거에 머무르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개인적으로 <줄리에타>에서 기억에 남는 부부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다. 자신으로 인해 저질러 졌다고 믿는 두 명의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줄 정도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딸 안티아다. 우연치 않게 홀모 밑에 살았다는 딸의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선 안 될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다. 일반적인 엄마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다. 딸의 인생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진 최선의 사랑이자 모성애다. 하지만 딸에게는 최악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엄마에게 돌아가 빙퉁그러진 모성애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엄마와 딸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생각하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하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묵'은 갈수록 영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침묵은 '잠적'으로 확대된다. 잠적은 곧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어떤 인생이 남아 있나.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시스가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10년 만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한 것처럼, 줄리에타도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고는 재회할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패션, 그럼에도 그녀가 '고전문학' 강사인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했다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드러나는 부분인데 그녀가 강의하는 내용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율리시스' 이야기. 


율리시스는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여신 칼립소를 만나 살다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10년 만에 아들과 재회한다. 영화에서 소안은 줄리에타와 만나 살지만,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줄리에타는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루는 이 영화에서 '율리시스' 모티브는 단연 정점이다.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녀들이 재회한다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또다시 불행해지기 싫을 테니까.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12분 마다, 12시간 마다, 12일 마다, 최소한 12개월 마다는 재회하는 우리들은 어떨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까? 잘 알고 싶어나 할까? 상실을 경험해야 슬픔을 알까. 


줄리에타를 응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와 딸을 응원한다.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 아니다, 사랑과 모성애는 엄마만, 여성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모든 인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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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사죄, 삶, 신화, 엄마, 여성, 욕망, 운명, 율리시스, 죽음, 줄리에타, 페드로 알모도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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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종말이 휩쓸고 간 자리에... 혼자 남겨진 나는?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5. 3. 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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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



<나는 전설이다> 표지 ⓒ황금가지



지난 2012년 수많은 키워드들 중에서도, 전 세계를 휩쓴 것은 '종말'이었다. 고대 마야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에서 끝나는 것을 보고, 종말론자들이 지구의 종말을 주장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5년이고 지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종말이 실현되었다면? 그래서 모두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면? 


이런 상상력을 두고 펼쳐지는 소설은 많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원조 격이 있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황금가지). 1954년에 출간되어 60년 여의 역사를 가진 이 소설은, 아직까지도 SF 공포 소설의 전설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런데 SF 공포라니? 


거기엔 이유가 있다. 이 소설은 흡혈 좀비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오락 소설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소설은 정상과 비정상, 신화와 현실, 존재가치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나 혼자 살아남았지만, 나 아닌 다른 '종족'이 존재한다. 그게 흡혈 좀비인데, 어쨌건 소설 속 주인공이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정상'적인 존재는 나 하나 뿐이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소설 <나는 전설이다>


2007년 12월에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영화 <지상최후의 남자>(1964), <오메가맨>(1971)에 이어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원작으로 했다. 극 중 주인공은 로버트 네빌로, 원작과 같았다. 과학자라는 설정은 달랐지만. 핵전쟁으로 전 인류가 멸망하고, 어쩌다보니 네빌 혼자만 살아남는다. 아마도 특수한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추측하면서. 이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중요한 존재가 있다. 흡혈 좀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개'라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는 애초에 개도 같이 살아남는다. 나중에 그 개가 자신을 위해 흡혈 좀비에게 물려 좀비화되어 가는데, 네빌은 어쩔 수 없이 개를 죽인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진 네빌은 막무가내로 흡혈 좀비에게 덤비고, 죽을 고비에서 알 수 없는 이에게 구출이 된다는 전개이다. 


반면에 소설에서는 네빌 혼자이다. 미칠 듯한 고독과 외로움, 분노와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의 모습을 절절히 그려내며, 영화와 완전히 다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히키코모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던 중 '정상'적이라고 생각이 되는 개를 만나게 되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뿜어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감동의 쓰나미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만나게 되는 '정상'적인 인간 여자의 설정은 비슷하다. 단지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의 고리가 완전히 다를 뿐. 영화에서 네빌은 '정상'적인 인간을 만났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토리 라인으로 끌고 가면서, 그가 만들고 있던 백신을 흡혈 좀비가 코앞까지 쳐들어오는 기막힌 타이밍에 완성한다. 그는 백신을 그 여자에게 주어 탈출시키고 자신은 흡혈 좀비와 폭사한다. 그 여자에게는 아이가 있었는데, 같이 살아남은 자들의 도시로 간다. 네빌은 그들에게 백신을 주고 앞날을 준 '영웅'이자 '전설'이 된 것이다. 


반면 소설은 어떤가? 인간 여자로 인해 충격적인 반전에 점점 다가간다. 인간 여자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주인공 로버트 네빌의 내적 갈등은 반전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그동안 그만의 공간이었던 집안에 이질적인 존재가 침입해 평화를 깨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을 느낀다. 이에 네빌은 그녀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녀를 검사하려 하는데... 그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종말과 시작 사이에서 전설이 되다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어쨌든 전설이 된다. 하지만 결코 영화에서처럼 '영웅'의 이미지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구시대 '신화'와 '전설'에서의 전설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그녀의 정체이다. 그녀는 일종의 '신인류'였던 것이다. 그 종족은 변종 흡혈귀로, 갑자기 등장해 흡혈 좀비를 죽이고 이 세상 '유일'의 생존자였던 로버트 네빌도 죽여 버린다. 


소설에서 '전설'의 의미는 여기서 보여 진다. 로버트 네빌이 낮에 돌아다니며 흡혈 좀비 때문에 밤에는 집구석에 박혀 있을 때 그는, 많은 연구를 통해 흡혈 좀비가 결코 '전설'이 아닌 눈앞에 보이는 '현실'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며 극도의 고독과 외로움으로, 차라리 저 '더럽고' '무식하고' '괴물 같은' 흡혈 좀비의 무리에 끼고 싶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고귀한 존재가 어떻게 저 더러운 괴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네빌이 여자에 계략에 의해 잡혀간 '신인류'의 도시. 그곳에서는 어떨까? 네빌은 과연 '고귀한 존재'일까? 아니다.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속했던 '인류'의 종말과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신인류'의 시작을 보면서. 자신이야말로 이들에게 '이방인'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신화에나 나올 법한 '전설'적인 존재라는 것을. 


수백만 년 전, 기후 변화나 운석 충돌로 한 인류가 종말을 기하고 새로운 인류가 나왔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가 아니고 말이다. 그때 종말을 기했던 인류의 마지막 남은 한 존재가, 수많은 신인류의 모습을 보고 느꼈을 감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본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그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과 오버랩 되었다. 경외, 두려움,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렇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벌이고 천형이었다. 자신들이 끼고 살아가야 하는 질병보다도 더 흉측한 존재였던 것이다.


로버트 네빌은 이 땅의 신인류를 내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돼야 할 아나테마(가톨릭에서의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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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신인류, 신화, 영웅, 이방인, 좀비, 현실, 흡혈귀
  • BlogIcon 空空(공공)
    2015.03.04 09:37 신고

    영화의 원작이로군요
    전 이런 장르는 별로 라서 ..
    소설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ㅎ

    • BlogIcon singenv
      2015.03.08 17:57 신고

      원작은 좀비 소설이라고 느끼기 힘들었어요ㅎㅎ 생각과는 다를 거라 확신합니다~

  • BlogIcon 조아하자
    2015.03.04 15:19 신고

    이런 소설이 실제라고 생각하면 무서울듯... 물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ㅠㅠ

    • BlogIcon singenv
      2015.03.08 17:57 신고

      정말 무섭죠ㅠ 상상만 해도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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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5. 1.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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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더좋은책

고 스티브 잡스가 남긴 명언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인문에 관한 말을 소개해본다.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함께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그것과 바꾸겠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말함일까? 바로 '인문'이다. 역사의 길이 남을 최고의 CEO였던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술을 '인문'과 바꾸겠다는 것은, 그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


"애플은 변함없이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최고의 기술은 인문에서 비롯된다. 바야흐로, 인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문'이란 무엇인가? 한자로 '사람인'과 '글월문'.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학문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이 인문학에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 인문학을 요즘 들어 많이 찾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스펙을 강조했던 기업에서 그 어느 때 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왜 그런 것일까? 인문학에 그들이 원하는 게 있을까?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문학은 (줄임)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 코드를 제공해주게 된다. 문화 트렌드와 콘텐츠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재생산 해내는 데 있어 과거에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나 향유하는 것으로 여겼던 인문 지식이야말로 더없이 중요한 문화의 기초공사였던 것이다."(5쪽)


여기에 인문학의 실용성이 많이 강조되면서 특히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에 거는 기대는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그 무엇의 본질이 '인문학'에 있다. 


다들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알았다. 그런데 어디서 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그 방대한 콘텐츠들을 어느 시간에 섭렵해야 하는지 막막함이 밀려올 것이다. 물론 수많은 인문교양서들이 이미 시중에 나와 있다. 그 중엔 기초 상식을 전하는 서적도 있고, 전문적 지식을 전하는 서적도 있다. 


하지만 산발적이거나 한 분야의 지식에 치우쳐 있어, 인문 교양 초심자에게는 맞지 않은 책이 대부분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에 어느 정도 깊이도 있고, 어렵지도 않으면서 체계적으로 기초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책을 냈다고 한다. 


이 책은 크게 6가지 주제로 나눠진다. '심리학', '회화', '신화', '역사', '철학', '글로벌 이슈'. 짧게 소개해본다. 


심리학 - 무의식으로 새로운 해석의 차원을 연 프로이트, 심리학의 아버지 분트에서부터 

현대 심리학의 대세인 인지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찰 실험법과 심리학 베스트셀러를 소개.

회화 - 각 유파 간의 인과관계를 추적, 인상파부터 현대 회화까지 소개. 빈 분리파도 소개.

신화 - 그리스신화를 다루었다. 올림포스 12신과 전쟁 영웅들만 정리. 계보를 정리했다.

역사 - 유럽사를 중심으로 역사적 인과관계를 다루었다.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으로 연결.

철학 - 고대 철학자부터 현대의 거장까지 각 철학의 주요 쟁점들을 이해하기 쉽게 다루었다. 

논쟁이 어려운 철학자들도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덧붙여 소개한다. 

글로벌 이슈 - 세계화, 신자유주의, 환경, 종교 및 지역 분쟁들을 소개해 현대 문제 이해.


인문학의 기본이 되는 지식들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책 속을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이란 무엇인가? 자아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이를 조정하는 의식이라면, 자기는 의식 또는 자아와 집단 무의식까지를 포함한 무의식 전부를 통합하는 핵심을 말한다.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자기실현으로, 인간의 삶은 바로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융의 이런 생각들을 가장 유사하게 담아낸 책을 하나 소개한다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될 것이다. - 1장에서


유명한 심리학자 융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이론이다. 저자는 이를 유명한 베스트셀러로 희석시키고 있다. 그 이론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익숙한 텍스트로 이해하고 나서 관련된 이론을 접한다면 한층 알기 쉬울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은 그 이론 자체의 실효성 문제다. 정말 그 이론이 현실에도 잘 반영되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래퍼의 곡선은 현실과 다르게 그려졌다. 1980년부터 1984년 사이에 미국은 1인당 평균소득이 4% 증가하였지만 세수는 줄었다. 결국 레이건 정부는 재정 적자와 달러화 강세로 인한 무역 적자가 겹쳐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경쟁력이 약한 기업들은 도산했고, 인수 합병에 대한 규제가 없어지면서 기업의 독점 현상이 늘어났다. 독점 현상을 경계하던 그들이 독점 현상을 키운 꼴이 된 것이다. - 7장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쟁점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역시 단순한 이론 텍스트의 열거 보다는 실례를 들어 알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인문의 바다에 푹 빠지기 전, 기초적이지만 필수적인 부분을 알고 싶으신 분들께 알맞은 책이 될 것 같다. 자기계발이나 심리 치유 서적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사람들에게 힘을 지고 치유하고 있지만 정작 돌아서면 남는 게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인문서를 접해보는 게 어떠한가. 최소한 이 정도 인문 지식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인기에 힘입어 2권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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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글로벌 이슈, 신화, 심리학, 역사, 인문교양서, 인문학,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철학, 회화
  • BlogIcon 늙은도령
    2015.01.14 13:49 신고

    인문학 열풍....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초가 됐으면 참 좋을 듯한데.......

    • BlogIcon singenv
      2015.01.14 21:48 신고

      지금은 인문학이 변질되어서 말이죠...ㅠ

  • BlogIcon 질풍이슈
    2015.01.14 17:50 신고

    방송에서 인문학 강의를 몇 번 본적이 있는데 바로 채널 돌려버렸다는...ㅋㅋ
    저도 인문학에 관심을 좀 가져야겠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1.14 21:50 신고

      사실 인문학은 고전을 통해서만 제대로죠.
      이 책은 그냥 참고상으로만 ㅋㅋ

  • BlogIcon 조아하자
    2015.01.14 23:27 신고

    솔직히 인문학 책들 중에 내용적으로 별로인 책들도 많죠. 저도 이 책은 읽어봤는데 이 책 정도면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1.18 17:53 신고

      베스트셀러인 이유가 있겠죠^^

  • BlogIcon 할말은 한다
    2015.01.16 00:44 신고

    아 책을 읽은지 언제인지 ㅠㅠ
    늘 TV만 보니 머리가 멍청해지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1.18 17:54 신고

      아, 책만 본다고 해서 뭐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ㅋㅋ
      책 본다고 뭐가 되는 양 껄렁거리는 사람이 은근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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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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