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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살인'에 해당되는 글 16건

제목 날짜
  • 실상을 대면해 '마약과의 전쟁'의 잘못된 방향성을 고찰하다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2020.08.07
  • 1980년대 미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 헨리 리 루커스의 황당무계 미스터리 <살인자의 고백> 2020.01.20
  • 어른이 덜 된 인격체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 결과는? <폭스캐처> 20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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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미국과 아웃사이더 가해자를 들여다보다 <인 콜드 블러드>(2) 2018.03.05
  • 옐로 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선 그 폭력의 자화상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2017.10.16
  • 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2017.10.05

실상을 대면해 '마약과의 전쟁'의 잘못된 방향성을 고찰하다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8. 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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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포스터.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 중 하나로 치는 <브레이킹 배드>,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화학 교사가 남겨질 가족들의 앞날을 위해 졸업한 제자와 함께 마약을 제조·판매한다는 이 이야기는 자타공인 마약을 소재로 한 콘텐츠 중 최고 중 최고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시즌 동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평단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한테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 인기는 프리퀄 스핀오프 <베터 콜 사울>로 이어져, 2015년부터 2021년까지 6 시즌 동안 이어져 큰 인기를 끌며 종영될 예정이다. 속편 영화 <엘 카미노>도 나왔다. 


2015년, 또 하나의 걸출한 마약 콘텐츠가 나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나르코스>가 그것으로, 콜롬비아의 악명 높은 전설적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일대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물이다. 시즌 3까지 이어졌고, 시즌 4부턴 <나르코스: 멕시코>로 바뀌어 올해 두 번째까지 나왔다. 멕시코 카르텔의 창시자 '미겔 앙헬 펠릭스 가야르도' 이야기를 다룬다. 넷플릭스는 이 작품의 대대적인 인기를 발판 삼아 마약 콘텐츠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음에 분명하다. 이후 넷플릭스에서 '리얼' 마약 콘텐츠가 쏟아져 나와 하나 같이 괜찮은 반응을 얻는다. 


넷플릭스의 리얼 마약 콘텐츠 중 하나가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이다. 세계 마약 산업의 핵심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멕시코와 콜롬비아와 페루의 카르텔 내부와 마약 제조 및 판매 현장을 직접 들여다본 결과물인 이 작품, 영국 특수부대 출신으로 10년간 아프카니스탄 마약왕을 추적했던 '제이슨 폭스'라는 사람이 연출하고 또 주연으로 분했다. 2018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소개되었으니, <나르코스>의 인기에 힘입은 결과라 아니할 수 없겠다. 목숨 걸고 실제를 들여다본 결과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약 제국' 멕시코를 가다


1화는, '마약 제국'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멕시코. 카르텔 내부에 연락책이 있는 현지 기자를 통해 시날로아 카르텔의 근거지인 쿨리아칸으로 향한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카르텔로, 그들 덕분에(?) 쿨리아칸은 멕시코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경찰 수보다도 많은 10만 명 넘게 마약 산업에 종사하는지라, 일면 아주 잘 통제되어 있지만 또 아주 위험하기도 하단다. 


폭스는, 그곳에서 시날로아 카르텔 경계를 지키는 현지 사령관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게로'로 통하는 가장 무자비한 암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무사히 살아나온(!) 그는, 조직원을 통해 마약 밀매의 실제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텍사스 교도소로 가 전직 청부살인업자를 만나 카르텔이 어떻게 조직원을 살인자로 키우는지 이야기를 들어본다. 밤중엔 DEA(마약단속국) 요원을 따라 카르텔 간의 소소한(?) 전쟁으로 사지가 절단된 채 길가에 버려진 시신을 대면하기도 한다. 


많은 돈을 벌기에 화려한 삶을 사는 마약상들을 우러러 보며 수많은 이가 조직원이 되고자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잡혀 가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사는 그들이기에, 실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한편으론, 매일같이 이상할 것도 놀랄 것도 없는 '미친 짓'이 일어나는 그곳을 당국이 제재하기 힘들기에 멕시코 마약 단속은 요원해 보인다. 반영구적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마약 수출항' 콜롬비아를 가다


2화는, '마약 수출항'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콜롬비아. 카르텔 내부에 연락책이 있는 현지 기자를 통해 콜롬비아 최대의 항구 도시로 콜롬비아에서 나오는 코카인의 절반 이상이 밀수되어 전 세계로 향하는 부에나벤투라 항과 콜롬비아 카르텔의 근거지인 메데인으로 향한다. 콜롬비아는 전 세계 마약 산업이 시작되는 곳으로, 지상 최대의 코카인 거래소이기도 하단다. 


폭스는, 마약 밀수업자의 밀수 현장을 밀착 취재한다. 그런가 하면, 한 청부살인업자를 만나 함께 '청부 살인하는 법'(!)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의 속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도 되지 않고 공감도 되지 않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다. 카르텔의 명령 때문에, 자신이 살고자 남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가 만나는 이는 콜롬비아 말라가 해군 사령관, 그는 카르텔이 마약을 밀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방법을 보여준다. 그건 다름 아닌 '잠수함'이었다. 


마지막으로, 폭스는 메데인으로 가서는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함께 콜롬비아 메데인을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약 조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일명 '뽀빠이'를 만난다. 그는 붙잡혀 23년간 복역하고 나온 직후로, 여전히 동네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가 가난에 찌들고 위험했던 동네를, 부유하고 위험한 동네로 탈바꿈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보기에 그곳과 그는 공포와 폭력과 위험의 대상일 뿐이지만, 내부에서 보기에 그곳과 그는 통제를 통해 동네를 안전하고 부유하게 만든 은인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카르텔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이들을 포섭한다. 군말 없이 충실하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를 수행할 이들이기 때문이다. 반문할지 모른다, 왜 죽음을 무릎쓰느냐고 말이다. 가난하더라도 죽음과 눈 맞추며 살아가지 않는 게 낫지 않느냐고. 그들은 답한다, 가난도 가난이지만 지금 이대로의 삶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말이다. 똑같이 위험하다면, 이왕이면 가난보다 부유한 삶이 낫지 않겠는가고.


'마약 실험실' 페루를 가다


3화는, '마약 실험실'이라는 부제가 붙여진 페루. 현지 기자를 통해 페루 내 모든 코카인의 공급처인 '브라엠'으로 향한다. 안데스 산맥에 있는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페루는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지로, 대부분이 영국으로 밀수된다고 한다. 그 공급망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삶을 들여다본다. 그들이 길러 가공하면 카르텔이 전 세계로 수출한다고 한다.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를 통해 제이슨 폭스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메시지에 가장 맞닿아 있다. 지난 두 화로 자극적인 실상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면, 이번으로 보다 궁극적인 실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폭스는, 태반이 마약의 원료로 쓰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코카잎을 재배하는 농부들을 만나보고 그렇게 재배된 코카잎을 코카인으로 가공하는 현장을 마약조직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나같이 들려오는 말은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였다. 틀린 말이기도 하지만,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거대하고도 거대한 카르텔 마약 산업의 한없이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이 아닌다. 그곳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일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어 폭스가 찾아간 곳은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군사 기지, 브라엠 지역 마약 퇴치를 전담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실제 작전을 따라가 보는데, 허접하기 짝이 없는 작전 상황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리고 이어진 하나마나한 작전, 엄청나다고도 할 수 있는 부대를 이끌고 덮친 곳이 수없이 널린 조그마한 마약 제조 기지였던 것이다. 폭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마약 산업과 카르텔 일망타진은 허망한 꿈으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 허무맹랑한 작전이었다. 


마약과의 전쟁, 잘못된 방향성


폭스는 말한다. 마약과의 전쟁은 '방향성'이 잘못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무기와 군대에 쏟아붓지만, 사실 진짜 마약과의 전쟁은 '빈곤'과의 전쟁이다. 마약 산업에 일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달리 선택권이 없다. 달리 기회나 희망이 없으니, 그냥 눈앞에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카르텔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카르텔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폭스의 당찬 주장을 100% 받아들일 순 없지만 확실히 궁금한 건 있다. '방향성'이라는 것 말이다. 그럼, 정부 당국은 무엇을 원하고 또 하고 있는가? 분명 많은 돈과 인력과 공력을 쏟아부어 마약과의 전쟁에 있어 결코 소홀함이 없을 텐데, 마약 산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으니 말이다. 악순환으로, 마약 산업이 번창한 곳은 나라의 관심이 가닿지 않을 테고 그곳의 사람들을 더욱 가난해질 테며 자연스레 마약 산업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마약 산업이 계속 번창하고 당국이 점점 더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마약 산업을 근절하는 궁극적이고도 근본적인 방법론을 제시할 순 없을 테다. 대신,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의 문제 제기는 달성했다고 본다. 가짜 아닌 진짜를 내부에서 들여다보며 실상과 실체를 대면했으니,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도 되었을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카르텔과의 전쟁이 아니라 빈곤과의 전쟁이어야 한다는 점,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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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코스, 돈, 리얼 나르코스 리포트, 마약, 멕시코, 빈곤, 살인, 카르텔, 콜롬비아, 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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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 헨리 리 루커스의 황당무계 미스터리 <살인자의 고백>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 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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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살인자의 고백>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살인자의 고백> 포스터. ⓒ넷플릭스



1983년 미국 텍사스주. 두 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헨리 리 루커스, 그의 입에서 세상을 뒤집을 만한 말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그는 자신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으로, 찰스 맨슨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다양하고도 잔인한 수법으로 지난 수 년간 600명 이상의 여성을 죽였다고 주장 혹은 실토한 것이다. 이후 언론의 대활약으로 그는 전국구 스타가 된다. 


텍사스주 경찰은 전담반을 꾸린다. 당시 텍사스 레인저 전설이라 불렸던 짐 바우트웰이 전담반을 이끌며 루커스를 전담 마크했다. 그야말로 수많은 미제 사건을 단번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석연치 않은 점은 있었다. 루커스는 IQ 80도 되지 않는 낮은 지능,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모친에게 학대를 받은 경험, 끝내 모친을 죽여 복역한 경력, 정신병원 수감 이력까지 갖추었다. 


더불어, 비록 루커스가 술술 훑는 사건 당시의 세밀하고도 치밀한 일들은 누구나 믿을 만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일시와 장소들의 말도 안 되는 비약이 경찰과 레인저 아닌 관계자들의 의심을 샀다. 그런가 하면, 루커스는 대하는 사람에 따라 말을 바꾸기도 했다. 자신을 연쇄살인범이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죽이지 않았다고도 한 것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루커스는 왜 오락가락하는 것일까. 


1980년대 미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 헨리 리 루커스 미스터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살인자의 고백>은 1980년대 미국을 뒤흔든 또 하나의 연쇄살인범 헨리 리 루커스를 둘러싼 황당무계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물론, 지금에 와서 돌아보아 황당무계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그 사건과 그는 당시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악질 연쇄살인사건과 연쇄살인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무엇보다 그의 실토로 수많은 미제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다. 즉, 미국 사법체계 역사상 최고의 '승리'.


작품은 <푸드 주식회사>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로버트 케너 감독이 탐사전문기자 타키 올덤과 함께 만들었는데, 사실 주 대상으로 삼는 건 헨리 리 루커스가 아닌 경찰로 대변되는 미국 사법체계이다. 수없이 많은 유명 연쇄살인범이 있어왔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인데, 왜 하필 헨리 리 루커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여담으로, 헨리 리 루커스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헨리: 어느 연쇄살인범의 초상>은 <세븐> <싸이코> <조디악> <양들의 침묵> <살인의 추억>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연쇄살인범 영화 중 하나로 뽑히는데, 존 맥노튼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너무나도 높은 수위로 3년간 개봉하지 못했다고 한다. 루커스를 맡은 이는 드라마 <워킹데드>의 멀 딕슨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욘두로 잘 알려진 마이클 루커였다. 


허언증과 기억 과대증 환자 루커스와 막장 관료주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헨리 리 루커스는 심각한 허언증과 기억 과대증 환자였다. 그는 말하기 좋아했고 기억을 잘했다. 처음에는 수사관들이 관심을 갖고 잘 챙겨주는 데에서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일종의 행복을 느낀 그는, 희대의 발언 이후에 쏟아지는 전국적인 언론의 관심과 할리우드 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명성에 희열을 느꼈을 테다. 행복한 희열에 취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거기에, 수많은 미제 사건을 해결하여 자신들의 명성과 명예를 드높일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다가옴을 느낀 전국의 수사관들이 루커스를 찾았다. 특히 텍사스 레인저 전담반은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동시에 더 높일 야망에 들떠 있었다. 그들은 눈과 귀를 닫고, 마음의 소리까지 덮어둔 채, 루커스를 철저히 이용한다. 이미 형을 산 어머니 살해를 제외한 1건의 살해 혐의만 명백히 밝혀진 그에게 600건이 넘는 미제 여성 살인 사건의 연쇄살인범 누명을 뒤짚어씌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텍사스 레인저를 관리하는 치안국 총책임자를 비롯한 사법체계 당국에 있었다. 그들은 루커스의 거짓말과 경찰의 야망을 눈감아주면서 거기서 떨어지는 크나큰 콩고물을 앉아서 받아먹으려 한다. 한편으론 그들의 수작에 의심을 두기 시작한 검찰의 어느 검사장을 철저히 제압한다. 그야말로 막장 관료주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루커스도 수사관도 사법체계도 아닌, 진짜 문제는 '진짜 범인'


작품은 헨리 리 루커스의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희대의 발언 후 전국적으로 확장되는 연쇄 미제 살인 사건의 전말과 함께 그 이면에 도사린 치졸한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조리 연쇄 미제 살인 사건의 전말로 쏠렸고 또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쏠릴 수밖에 없지만, 작품 자체의 시선은 이면의 이야기로 향한다. 그리고 우린 아이러니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때 작품은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아이러니란 다름 아닌 헨리 리 루커스에 있다. 그는 명명백백한 살인자이다. 어머니를 살해해 복역한 전력이 있거니와, 부인할 수 없는 여성 살인 사건의 범인이다. 죽어 마땅한 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수백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건 또 다른 이야기여야 한다. 물론 어떻게 보든 그는 살인자이기에, 살인자라면 많이 죽이든 조금 죽이든 죽일 놈인 건 매한가지이기에, 그를 대하는 데 혼란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이성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라 하겠다. 그는 수백 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아니다. 


작품은 여기서 시선을 선회한다. 루커스도, 수사관도, 사법체계도 아닌 수백 명의 여성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 말이다. 그들이 서로 말 맞춰 전국을 들었다놨다 하는 사이 진짜 범인은 자유롭게 길을 활보하고 다녔을 것이다. 전국이 이 말도 안 되는 사기극에 속아 넘어간 사이에 말이다. 범인 혹은 범인들은 그 사이에도 범죄를 저지렀을지 모른다. 헨리 리 루커스가 잡혀 마음 놓고 있는 사이에. 


포커스가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헨리 리 루커스 사건의 핵심이 보인다. 수사는 범인을 잡았다는 자아도취를 위한 것이 아닌 즉, 자신들의 수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피해자를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루커스 또한 일면 사법체계의 피해자로 보이고 그 또한 자신을 피해자라고 선을 긋지만, 그도 이 사기극의 주요인물이라는 걸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아니었다면 성립되지 않았을 사기극 말이다. 마지막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범죄 다큐멘터리는 역시 믿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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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누명, 사법체계, 살인, 살인자의 고백, 수사관, 연쇄살인범, 텍사스 레인저, 헨리 리 루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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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덜 된 인격체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 결과는? <폭스캐처>

오래된 리뷰 2019. 10.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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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폭스캐처>


영화 <폭스캐처>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1990년대 후반, 뉴욕 풍경을 흑백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뉴욕 크루즈>로 성공을 거두며 커리어를 시작한 베넷 밀러 감독, 2000년대 중반에 장편 영화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뉴욕 대학교 시절 학우였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함께 한 <카포티>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등으로 유명한 천재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충격적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였다. 이 영화로 필립은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를 비롯 미국 전역의 주요 상을 석권한다. 최고의 조연 배우로 유명한 그이지만, 이 영화로 최고의 주연 배우가 되었다. 


6년 만에 베넷 밀러가 들고온 영화는 <머니볼>으로, 역시 실화가 바탕인데 미국 메이저리그 만년 꼴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의 이야기를 전한다. 기존 선발 방식을 탈피하여 오로지 데이터로만 의존해 기적을 만들어낸 빌리 빈을 브래드 피트가 연기했다. <카포티>처럼 <머니볼>도 주연배우가 꽃을 피웠는데,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후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후보에 오르는 등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인정받았다. 


다시 3년 만에 <폭스캐처>로 역시 실화를 영화로 선보인 베넷 밀러, 이 작품 역시 출연 배우들에게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게 하였다. 앞선 두 작품이 한 명을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다르게 이 작품은 세 명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스티브 카렐과 마크 러팔로와 채닝 테이텀이 그들이다. 앞의 두 명은 커리어에서 유일무이하게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채닝 테이텀은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스타에서 명명백백 연기파 배우로 다시 포지셔닝할 수 있었다. 그러는가 하면, 베넷 밀러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마크와 데이브, 그리고 듀폰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마크 슐츠,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다음 올림픽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에겐 형 데이브 슐츠가 있는데, 그 또한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로 영웅적 대접을 받고 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도 있다. 이에 반해 마크는 혼자서 변변치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훈련은 함께 하는 그들이지만, 마크에겐 미묘한 질투와 시기심과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다. 


어느 날 마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 최대 재벌 가문 중 하나인 듀폰 가문의 상속자 존 E. 듀폰이었다. 그는 마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자신의 레슬링 훈련팀 '폭스캐처'로 합류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마크는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기 싫어 필라델피아로 향하지만, 마크의 제안을 데이브는 거절한다. 그렇게 마크로서는 믿기 힘든 대우를 받고 시작한 훈련, 덕분인지 1987년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존과 마크는 더욱 돈독해진다. 


존은 코카인 권유를 받아들이기도 한 마크, 이후 그는 술도 마시고 훈련도 게을리하는 등 이전에 없던 행동을 일삼는다. 존은 마크와 친해질대로 친해졌기에 이를 두고볼 뿐이었지만, 어느 날 엄마한테서 레슬링을 포함해 이것저것 한 소리를 듣고 나서 곧바로 마크를 찾아가 심한 말로 화를 내고는 데이브를 데려온다. 이미 틀어진 존과 마크, 데이브와 마크. 좋은 관계의 존과 데이브도 틀어질 것인가?


어른이 덜 된 인격체의 충격적 실화


영화 <폭스캐처>는 충격적 실화를 가져온 사례로, 으레 그렇듯 영화에선 충격 실화가 도구이자 수단으로 작용할 뿐 정작 중요한 건 과정에 있다. '존 E. 듀폰'이라고 검색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실화인 만큼 사건의 전말을 밝혀도 된다고 판단, 존이 데이브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의견이 분분할 만한 사항인데, 도대체 왜 존은 데이브를 죽였을까. 


우선 데이브와 마크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선 이곳저곳을 떠돌며 함께 컸기에, 그 우애의 모습이 여타 형제와는 달랐을 거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존은 군수산업으로 번영을 이룩한 지역의 대저택에서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볼 때 어릴 때부터 친구 하나 제대로 없었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상 그를 제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엄마가 그를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 


어른이자 성숙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 존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마크와 데이브를 통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전리품으로 엄마에게 인정을 받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며 한편 데이브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크의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존은 자신이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싶어 했다. 


'욕구하는 자기의식'에서 '인정하는 자기의식'에로의 이행을 뜻하는 '인정투쟁'은 자기의식 발전과정에서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단계인데, 존은 여전히 욕구하는 자기의식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몸은 커서 어른이 되고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도 알지만, 유독 엄마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숙고하게 하는 영화의 힘


영화는 유명한 실화에 내제된 고난위의 심리철학 명제를 감독 특유의 절제·관조 스타일로 들여다보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존이 엄마 눈치를 보며 대표급 선수들 앞에서 잘 하지도 못하는 레슬링 기술을 선보일 때의 그 절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함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묘한 탄성과 함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숙고를 하게 하는 게 이 영화의 힘이다. 자신을 인정해줄 사람 한 명 없다는 외로움, 그럼에도 그 외로움을 견디고 다른 누군가를 인정해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어른, 세상의 쓴맛·단맛을 알게 되었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 어렸을 때고 다 자랐을 때고 아무도 알려주는 이 없었을 때의 어려움 등.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여, 영화의 세 주인공 중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인물은 존 E. 듀폰이다. 누구도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누구나 그였고 그일 수 있으며 그가 될 수 있다. 겉으론 한없이 정적인 인물인 그는, 속으론 한없이 들끓며 무언가가 계속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끝엔 무엇이 남았을까. 무엇이 남았어야만 할까. 무엇이 남아 있길 바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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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들은 이상해. 잔인한 구석이 있어." <비뚤어진 집>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9.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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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비뚤어진 집>(Crooked House)


영화 <비뚤어진 집> 포스터. ⓒ(주)팝엔터테인먼트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는 말년에 일본 번역가에게 본인의 10대 작품을 직접 골라 답장을 보낸다. 그녀가 쓴 80여 편의 작품 중 10편만 선정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을 텐데, 이후 그 목록은 애거서를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레퍼런스가 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선정한 10편은 꼭 봐야 한다던지, 10편을 시작으로 애거서를 접한다던지, 그녀의 10편이 아닌 본인만의 10편을 정해본다던지. 


그중에서도 애거서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단 한 편이 존재할 텐데, 의외로 그녀의 최전성기인 1920~40년대의 끝자락인 1949년에 내놓은 <비뚤어진 집>이 그 작품이다. 참고로, 저 10편에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오리엔탈 특급 살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 누구나 알 만한 최고의 작품들이 속해 있다. 그녀는 <비뚤어진 집>을 선정하면서 '탐구하기 매우 흥미로웠던 어떤 가족에 대한 연구'라는 이유를 건넸다.


지난 2017년 애거서의 10편 목록에 속한 두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하나는 <오리엔탈 특급 살인>으로 그야말로 대단한 캐스팅으로 주목을 모았지만 평작 수준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흥행했고 후속편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도 당해년도에 상륙해 외국 평작 치곤 나쁘지 않은 흥행을 달성했다. 다른 하나가 바로 <비뚤어진 집>으로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평작 이하의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탈리아에서 최초 선보이고 본고장인 영국에선 극장에 달렸지만 북미에선 인터넷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한국에 2년 만에 상륙했다. 


이상한 가족들


영화는 어떤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주사를 놓아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애리스티드 레오니데스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다. 그리스 출신의 이민자로 레스토랑과 호텔 사업으로 큰 돈을 만지며 명사가 된다. 일찍 부인과 사별한 그는 젊은 미국인 브랜다와 재혼한다. 그런 그가 하룻밤새 죽었고, 장손녀 소피아가 집안 내 사람에 의한 타살을 의심하며 연인이었던 사립탐정 찰스 헤이워드에게 수사 의뢰를 한다. 사인은 에세린, 당뇨병 환자였던 애리스티드에게 누군가가 인슐린이 아닌 에세린을 주사했다는 것이었다. 


찰스는 곧 레오니데스 저택으로 향해 수사를 진행한다.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만나기 시작한다. 애리스티드 입장에서 처제 에디스, 손녀 조세핀, 손자 유스터스, 아들 필립과 로저, 며느리 마그다와 클레멘시, 가정교사 브라운과 유모, 그리고 둘째 부인 브렌다. 소피아가 찰스에게 건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우리 가족들은 이상해. 잔인한 구석이 있어. 잔인함의 면면도 서로 달라. 그게 너무 불안해." 


변호사를 통해 재산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상속된다는 내용의 최종 유언장을 확인하는 찰스,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와중에 서명을 했다지만 정작 서명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재산 상속의 주요 수혜자는 브렌다가 되는 것이었다. 사건의 초점이 안 그래도 가족들 대부분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었던 브렌다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의 전말은 또 다른 유언장의 존재와 사고와 살인이 잇따르면서 전혀 생각할 수 없던 국면으로 치닫는데...


추리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재미


영화 <비뚤어진 집>은 훌륭하기 그지없는 원작을 평작 수준으로 각색해 내보인 작품이다.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팬들은 환호할 일이지만, 왜 2년 만에 한국에 상륙해 극장에서 선보이는지 그 이유를 알기 힘들다. 전형적인 넷플릭스 해외 배급용 작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만의 미덕이 존재할 테니 들여다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다. 


가장 먼저 굳이 하나의 미덕을 대라고 하면, 배우들에 있다. 가족을 이루는 수많은 배우들이 저마다 캐릭터에 맞게 완벽에 가까운 성향을 선보이는 와중에, 주인공 격인 이디스 역의 글렌 클로즈와 브렌다 역의 크리스티나 헨드릭스와 마그다 역의 질리언 앤더슨이 눈에 띈다. 그들의 개성이 그나마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런가 하면 찰스 역의 맥스 아이언스와 소피아 역의 스테파니 마티니도 튀지 않고 제 몫을 해낸다. 


아무래도 찰스와 함께 가족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추리와 수사를 하게 된다. 사실 그는 후반부까지 제대로 된 추리와 수사는커녕 이리저리 흔들리고 갈피를 못 잡고 중심 없이 어리바리할 뿐이다. 하여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추리에 뛰어들게 하는데, 정황상 브렌다로 시선이 몰리지만 가족 모두가 용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통속인 듯도 하다. 브렌다를 제외한 모두가 말을 맞추고 찰스를 속인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물론 이는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이다. 즉, 의외로 직접 참여하는 재미도 있다. 


막대한 부와 집단 사이코패스화


<비뚤어진 집>의 원제는 'Crooked House'이다. 겉으로 내보이기에 '비뚤어진 집'이라는 제목이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집 보다는 '가족'이 비뚤어진 보다는 '뒤틀린'이 정확하다 하겠다. 집 자체가 비뚤어진 게 아니고 가족들이 뒤틀린 것이니까. 하지만 '뒤틀린 가족'이라고 하면 너무 다 내보이는 듯하니 한꺼풀 더해 '비뚤어진 집'이라고 명명할 것일 테다. 


이 레오니데스 가족은 뒤틀려 있다. 다름 아닌 애리스티 드가 쌓은 막대한 부 때문이다. 그는 그 돈을 못난 아들들을 위해 전적으로 쓰지 않았는데 아들들은 심히 못마땅해왔던 것이다. 며느리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손자 유스터스의 말을 들어 보면 애리스티드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가족들의 인생을 쥐고 통제하는 괴물같은 사람이었죠. 가학증에 자만으로 똘똘 뭉친. 당연한 결과예요." 손녀 조세핀의 대답도 걸작이다. 할아버지를 잃어 슬프겠냐는 찰스의 말에 "그다지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발레를 못하게 하셨거든요. 소질이 없대요."


모두가 선망해 마지 않는 대저택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뒤틀린 심사는, 아무나 가질 수 없겠지만 정작 그런 환경을 가지게 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무시무시한 감정일 듯하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집단적으로 사이코패스화되는 것이다. 원작은 기가 막힌 분위기 조성과 개성 어린 캐릭터 조성과 예상 못한 전개 및 반전으로 이를 훌륭하게 표현해냈지만, 영화는 그에 비해 전체적으로 상당히 루즈했다. 사건과 사고와 반전 등이 다분히 '신사적'이었던 것도 한몫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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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의 김혜자에 의한 김혜자를 위한 영화 <마더>

오래된 리뷰 2019. 9.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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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봉준호의 <마더>(Mother)


영화 <마더>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정확히 10년이 되었다. <기생충>으로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선 봉준호 감독이 영화 <마더>를 내놓은 때가. 봉준호의 작품 중 최고의 흥행작은 <괴물>이고,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작품은 <기생충>이며,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지만, 진정한 대표작은 그의 유일무이한 청소년 관람불가 <마더>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 관람불가이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기 짝이 없기에 <마더>는 봉준호 작품 중 넷플릭스 오리지널 <옥자>를 제외하곤 가장 낮은 흥행 스코어를 기록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에겐 유례 없을 극찬을 받았지만, 관객들에겐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호불호가 갈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300만 명이 넘는, 청소년 관람불가치곤 준수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봉준호의 힘인가, 영화의 힘인가. 


봉준호의 영화, <마더>라는 영화는 자타공인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를 받아들이기가 쉽진 않았을 테다. 그곳이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신경을 갉아먹는 듯, 긴장과 불안이 쌓이는 듯, 어두워지는 듯. 누군가는 흥미롭게, 누군가는 불편하게 대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불편한 만큼 흥미로웠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엄마는 아들의 누명을 벗길 수 있을까


아들 도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 혜자는 시골 읍내에서 약재를 판다. 도준이 스물여덟 살임에도 많이 어리바리하고 어리숙해서 그런가 싶다. 그날도 도롯가에서 친구 진태와 있다가 지나가는 차량에 부딪혀 쓰러졌는데, 진태가 도준을 꼬득여 득달같이 따라가 깽판을 친다. 다음 날 도준은 진태와 자주 가는 동네 술집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나와서 어느 여고생을 어슬렁어슬렁 쫓아간다. 그러다가 여고생의 반격에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온동네가 뒤집힌다. 도준이 쫓아갔던 여고생이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곧 수사에 착수했고 정황상 도준을 용의자로 체포한다. 반 강요로 도준의 자백을 받아내고는 수사를 끝내버린다. 하지만 혜자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한없이 착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아들 도준이 살인을 저지를 리가 없다. 사실 온동네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도준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혜자는 변호사를 선임하지만 형량을 최소한으로 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직접 수사를 시작하는 혜자는 진태를 용의자로 본다. 하지만 덜미를 잡혀 돈까지 뜯기고는 오히려 그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계속 진행한다. 실마리가 될 만한 건 도준의 정확한 기억 그리고 살해당한 여고생 아정이 남긴 핸드폰 등이다. 과연 혜자는 아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길 수 있을까? 


김혜자, 그리고 과잉과 모호


<마더>는 극중 혜자로 분한 배우 김혜자의 김혜자에 의한 김혜자를 위한 영화다. 물론 많은 주조연들이 너나없이 훌륭한 연기를 펼치지만 모두 혜자를 거쳐가고 받혀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한국 어머니 상'의 한 전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녀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처절하고 처연한 모습에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다. 


혜자의 과도함은 비단 혜자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에 걸쳐 있다. 과하면 넘친다고 했던가, 흘러 넘친 과잉은 극점으로 모였다가 흩어져 모호함을 남긴다. 영화가 추구하는 바이기도 할 텐데, 과잉이 남긴 모호함과 함께 관객들을 속이는 한편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관객들과 함께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의지의 피력인 듯하다. 이는 누군가에겐 흥미로 다가갈 테고 누군가에겐 피로로 다가갈 테다. 


봉준호의 연출력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모호함조차 정확하고 섬세하게 직조해내어 많은 보기 중 하나를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닌 두세 가지 보기 중 하나를 생각해야 하게 한다. 하여 보다 더 어렵고 흥미롭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듯 의식하지 않게 되는 배경 미장센에도 한없는 정확성과 미세함을 부여했을 테다. 그렇기에 후반부의 극단적 반전이 충격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아이러니까지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 분위기는 봉준호의 두 번째 연출작 <살인의 추억>과 맞닿아 있다. 마더(Mother)의 머더(Murder, 살인)의 추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에서 일어난 살인, 누명을 쓴 듯한 용의자, 풀리지 않는 의문,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캐릭터와 미장센 등. 10년이 지나 <기생충>까지 이어지는 '살인의 추억' 시리즈의 중간 다리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냈다고 할까. 


인간 군상을 엿보다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요목조목 집어볼 생각은 없다.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직접 보고 느끼고 생각한 뒤 도출해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출하고 싶은 함의는 '인간'이다.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에만 머무르지 않는 인간 그 자체.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어 불멸이 된 케이스가 참으로 많다. 역사에 오랫동안 남을 캐릭터들인데, 정작 영화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캐릭터를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보이지 않곤 하기 때문이다. 반면 캐릭터가 우리 자신과 다름 없이 느껴지거나 주위에서 흔히 볼 이와 다름 없이 느껴진다면, 비록 그 캐릭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만 머무르지 않지만 오히려 영화도 함께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더>의 혜자가 그렇다. 주지했듯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어머니 상의 한 단면 그 자체다. 그런가 하면, 여타 주조연들도 특별하다기 보다 평범하기 그지없다. 최소한의 영화적 의미를 담기 위해 특이할 뿐이다. 아마 모든 인간들이 서로가 서로를 특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 군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엿보는 재미는 특별하다. 처음엔 공감이 일고 나중엔 감탄이 샘솟는다. 봉준호 감독이 해왔던 작업물들이 하나같이 그렇다. 평범함과 특이함이 특별함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그의 모든 영화들에서 만끽할 수 있다. <마더>는 그중에서도 출중하기 그지없는 결과물로서, 한국영화계에서도 한 시대의 정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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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살인범 커플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는 '인간사냥꾼' <하이웨이맨>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4.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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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하이웨이맨>


영화 <하이웨이맨> 포스터. ⓒ넷플릭스



보니와 클라이드, 대공황과 금주법의 시대인 1930년대 초 미국에서 '활약'한 연쇄강도 및 살인범 커플이다. 1932년 초부터 1934년 중반까지 12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 희대의 살인범 커플이 유명한 건 희망도 미래도 없는 당대에 맞섰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당대를 향한 적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상황에서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대리만족의 개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이들의 짧지만 굵은 이야기는 훗날 수없이 많은 콘텐츠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심지어 비디오게임까지, 그중에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1967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일명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선구자적 존재로, 이후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의 노출이 전에 없이 용인되기에 이르렀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장을 연 영화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에 관한 또 다른 영화가 우리를 찾아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하이웨이맨>으로, <블라인드 사이드> <세이빙 MR. 뱅크스> <파운더> 등으로 나름의 탄탄한 이야기를 선보여왔던 존 리 행콕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쫓았던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프랭크 해머와 매니 골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체가 범죄자 아닌 범죄자를 쫓는 사람들인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 해머와 골트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텍사스 레인저 출신 해머와 골트. 영화 <하이웨이맨>의 한 장면. ⓒ넷플릭스



1934년 미국 텍사스 이스텀 교도소 농장, 보니와 클라이드는 수감자 몇 명의 탈옥을 돕는다. 여론은 교도소에 부정적이게 되었고, 텍사스주 당국은 곧바로 반응한다. 지난 2년 동안 잡을 수 없었던 악랄한 살인자들을 잡기 위해, 해체된 '인간사냥꾼' 텍사스 레인저 역대 최고라 일컫는 프랭크 해머(케빈 코스트너 분)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공식 직책 '고속도로 순찰대원' 즉 하이웨이맨으로 수락한다. 그는 곧 역시 전 텍사스 레인저 매니 골트(우디 해럴슨 분)와 접촉해 함께 행동한다. 


이젠 과거의 명성에 비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해머와 골트, 정식 파견된 젊은 FBI에게 무시당하고 보니와 클라이드를 눈앞에서 높치는 등 안팎으로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와중에 보니와 클라이드는 경관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후 여전히 그들을 신성시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여론은 상당히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이 하이웨이맨들에게 힘이 실린 것이다. 


해머는 그들의 여정을 연구하여 함정을 파고는 추적대를 결성해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함정으로 오게된 보니와 클라이드, 추적대는 그들을 향해 백 수십 발의 총을 난사한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그 자리에서 죽어, 2년에 걸친 범죄 행각은 처참하게 막을 내린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시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머와 골트가 대조를 이룬다. 


시대 조류를 막기 위해 소환된 구시대 유물


정부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기 위해 구시대 유물 소환을 결정한다. 영화 <하이웨이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 실화를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주지했듯 주체가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해머와 골트인 게 특이점이다. 그들에 대해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선보여 왔지만, 일찍이 그들을 죽인 추적대를 다룬 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건 보니와 클라이드였지, 그들을 죽인 해머와 골트는 아니었다. 


19세기 말까지 텍사스를 위시한 미국 서부는 일명 '서부 개척 시대'로 '무법 시대'와 다름 아니었다. 이 시기 무법자들을 추적해 사살하는 '인간사냥꾼'이 바로 텍사스 레인저였다. 해머와 골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로 최강의 살상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서부 개척이 끝나고 미국은 서부에도 이성과 법을 들인다. 텍사스 레인저는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아야 했던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며 당대 누구보다 막강한 명성을 떨친 1934년 현재에서, '인간사냥꾼' 카우보이 텍사스 레인저는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보니와 클라이드는 금주법과 대공황으로 불안하고 불만 있고 대다수를 대변하는 현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비록 그 방법은 살인이었지만 '서민을 털고 죽이는' 은행만 턴다는 로빈 후드적 신화를 밑바탕으로, 시대의 조류였다. 


당국은 통제하지 못할 시대의 조류를 막기 위해 구시대의 유물을 소환한 격이다. 구시대의 유물, 즉 '보수'는 제 몫을 해내고 '진보'는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진보로 해머와 골트를 보수로 보는 건 매우 단편적이고 거친 비유이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국은 해체된 텍사스 레인저를 소환해선 안 되었었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 못한 아쉬움


<하이웨이맨>의 미덕은 보니와 클라이드 실화에서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해머와 골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정도에서 그칠 공산이 크다. 사실 해머와 골트라는 특수한 캐릭터를 가지고 특수한 의미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한국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신구 캐릭터의 대립과 조화에도 불구하고 당대 공권력의 구멍을 신랄하게 까발리지도 못했고, 미국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항상 한 발 늦는 노인 보안관 벨과 영화 곳곳에 나오는 노인들을 통해 운명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복잡다단하게 숨기면서 드러내지도 못했다. 


해머와 골트처럼, 실제로도 최고의 자리(아카데미 수상)와 최악의 자리(골든 라즈베리 수상)를 오간 적이 있는 케빈 코스트너와 우디 해럴슨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긴 하다. 60대 중반과 50대 말에 위치한 그들의 나이를 감안할 때, 현재로서는 한창이지만 연기한 85년 전 1934년 당시로선 완전히 '가버린' 세대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그들의 가버린 신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의한 뛰어난 감과 신념을 부각시키고자 한 듯하다. 종종 터져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실망과 함께. 하지만 그조차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못한 채, 전체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게 구성되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운명론적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처럼, 이 영화는 충분히 존재론적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는다. 훨씬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린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1934년 미국이 대공황으로 크게 휘청일 때 금주법으로 역행하고 살인을 살인으로 막는 인간사냥꾼을 고용하며 역행했듯, 이해하지도 수긍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시대를 역행하려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비단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신체적으로 '노(老)'한 이들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주류한 이들만도 아니다. 하찮은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 자신만의 영위를 이어나가려는 이들일 것이다. 그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건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가 아니고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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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레이놀즈표 엽기코믹액션의 시작 <더 보이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8.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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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 보이스>


영화 <더 보이스> 포스터. ⓒ조이앤시네마



2016년 성인들을 위한 슈퍼히어로 무비 <데드풀>, 화끈한 드립들로 R등급의 신기원을 쓰며 전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주인공 데드풀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는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간간히 액션을 찍다가 2011년 <그린 랜턴>의 대대적인 흥행과 비평 양대 폭망으로 슈퍼히어로계에 입문하지 못했었다. 


이후 액션으로 선회한 레이놀즈는 <데드풀>로 인생 캐릭터를 만나기 직전 그에 버금갈 만한, 아니 그 밑바탕이 되는 캐릭터 또는 영화를 만난다. 2015년 작 <더 보이스>가 그 영화인데, <데드풀>의 그것 즉 유머러스한 코믹과 엽기적으로 잔인한 범죄 액션이 나름 훌륭한 조화를 이룬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다가, 비슷한 느낌의 <데드풀> <킬러의 보디가드> <데드풀 2>의 성공에 힘입어 역시 비슷한 느낌의 영화로 포지셔닝되어 뒤늦게 발굴된 케이스라 하겠다. 말인즉슨, 믿고 보는 라이언 레이놀즈표 R등급 코믹범죄액션이라 하겠다. <킬러의 보디가드>가 1년 만에 무삭제판으로 재개봉하여 힘을 보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영화 <더 보이스> 한 장면. ⓒ조이앤시네마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핑크톤을 메인 컬러로 하는 세간 제작 업체 Milton Fixture and Faucet에 운송부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제리(라이언 레이놀즈 분), 회계부 피오나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파티에서 좋은 느낌을 받아 데이트 신청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막상 그녀는 그닥 좋아하는 느낌이 아니지만 제리는 개의치 않는다. 


제리는 고양이 워스커스, 개 보스코와 함께 산다. 그런데 그들이 제리에게 말을 건다. 워스커스는 상스러운 말, 욕과 함께 그의 부정적인 폐부를 건드리고, 보스코는 제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진지한 말로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고 한다. 제리는 이러저리 휘둘리는 와중에, 정신과에 주기적으로 상담을 가지만 처방된 약을 먹지 않는다. 


한편 제리는 피오나에게 차인 후 우연히 다시 피오나를 만나는데 실수로 그녀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이후 그가 그녀를 처리하는 건 결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살인마의 그것.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제리는 피오나의 목만 따로 냉장고에 보관하면서 그녀가 걸어오는 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냉장고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운데요. 사람을 죽여주세요!'


선한 의지의 악한 행동


영화 <더 보이스> 한 장면. ⓒ조이앤시네마


 

<더 보이스>는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작품이다. 그녀가 누구인가. 기념비적인 그래픽노블 <페르세폴리스>의 작가이자,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감독이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만화축제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세계 최고의 영화제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라이언 레이놀즈의 전성기에 가려 감독의 특이하고 특별한 이력이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최소한으로라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렬하고 아찔하고 역동적이고 자못 황당한 만화를 그려왔던 그녀가 연출한 영화이기에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레이놀즈는 그녀를 만나 자신의 캐릭터를 찾은 게 아닐까. 


영화는 엄마의 정신분열증을 이어받아 평생을 살아온 제리의 이야기다. 그에겐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리는데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는 선과 악이 명백히 구분되어진 목소리들이다. 그는 어릴 때 당했던 또는 행했던 일의 엄청난 트라우마로 그 목소리들 중 어느 하나를 반드시 따라야 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그가 행하는 걸 그는 선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행하는 실제는 대부분 악이다. 


영화의 겉은 정신분열증 이야기이지만 속은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에 가깝다. 누구나 수많은 목소리를 듣고 목소리와 싸우고 목소리에 동조한다. 그건 누구나가 힘들어 하는 선택의 순간들이 아닌가. 


정신분열증의 훌륭한 표본


영화 <더 보이스> 한 장면. ⓒ조이앤시네마



그동안 수많은 콘텐츠를 통해 수없이 많은 정신분열증 증세들이 소개되었고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진중하기 짝이 없어 그들이 행하는 잔인함 또는 순수한 행동은 한없이 잔인하게만 다가오거나 이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순진무구의 모순으로만 다가왔다. 


이 영화는 잔인한 와중에 엽기적인 코믹으로 정신분열증세를 잘 표현해냈다. 한없이 귀여운 얼굴과 몸짓으로 무시무시한 욕설을 내뱉는 고양이나 헤벌죽한 얼굴로 꼬리치며 다가와 진중한 말씀(?)을 해주시는 개, 그리고 목만 남은 채로 요구하고 조언하는 희생자들...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미친' 제리의 증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나 회사 건물이 약을 먹지 않을 때는 핑크빛과 알록달록 네온빛으로 빛나는 모습이나, 깔끔하고 밝고 향기로운 집안이 약을 먹고 나서는 본래의 칙칙하고 더럽고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구역질 나게 만드는 집안이 되는 변화는 따로 또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정신분열증세의 훌륭한 표본이다. 


라이언 레이놀즈의 B급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더 보이스>. 이제라도 한국에 소개되어 그 기원을 조금이나마 늦게나마 알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기기묘묘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극단에 처한 상황들을 눈쌀 찌프리면서도 코믹하게 바라보는 재미를 느껴보시기를. 아울러 라이언 레이놀즈의 B급 전성기가 계속되길 기대해본다. 그가 미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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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이스, 라이언 레이놀즈, 살인, 선과 악, 엽기코믹, 정신분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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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과 아웃사이더 가해자를 들여다보다 <인 콜드 블러드>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8. 3.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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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인 콜드 블러드> 표지 ⓒ시공사



1959년 11월 15일, 미국 서부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클러터 일가족 네 명이 근거리에서 엽총에 맞아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모두 밧줄에 묶여 있었으며 각기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단서를 찾기 힘들었던 바 확실한 증거를 찾기 힘든 완전범죄에 가까웠다. 


캔자스 주에서 명성이 자자한 클러터의 집인 만큼 범인들이 훔쳐간 게 엄청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집에서 없어진 건 고작 4~50달러의 현금과 라디오, 만원경 따위였다. 이 믿기지 않는 살해 동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범인의 자백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이에 범인들은 캔자스 주로 다시 돌아오는 모험을 저지르는데...


한편, 홀컴 마을은 이 사건 이후 범인이 잡힐 때까지 서로 못 믿고, 무서워서 죽을 만큼 서로 겁주는 흉흉한 동네가 되었다. 몇몇은 마을을 떠났고,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전에 없이 철두철미하게 집을 지키려 했다. 캔자스 주 수사국에서 가든시티 책임자이자 서부 캔자스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앨빈 애덤스 듀이는 이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일찍이 본 적도 없는 극악한 사건,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 유명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저자 트루먼 카포티는 클러터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난 1959년 11월 어느 날 '뉴욕 타임스'의 짤막한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껴 직접 조사하기 위해 친구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 저자)와 함께 홀컴으로 향한다. 이후 6년 만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 작품을 내놓았으니 <인 콜드 블러드>다. 


이상적인 희생자, 아웃사이더 가해자


저자는 마치 창조한 듯한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인 희생자 클러터 일가를 다루는 데 작품 초중반을 할애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살해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캔자스 주에서 보기 드물게 존경받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클러터 일가, 그들은 왜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그렇지만 카포티는 그들 희생자보다 가해자인 딕과 페리에게 천착한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학창 시절을 보냈음에도 평생 범죄를 저질러 왔던 딕, 그에 반해 불우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풍부한 감수성을 유지했지만 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페리. 


딕은 몰라도 페리야말로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의 살인에는 사회적 맥락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체로키 인디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정체성, 작은 키에 유독 짧은 다리의 신체, 거기에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기까지 하는 장애인. 그야말로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저자는 나름 중립을 지키며 죽은 사람들, 죽인 사람들, 죽인 사람들을 쫓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그밖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감수성과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료와 인터뷰를 혼합해, 지극히 주관적인 논픽션을 내놓았지만, 그와 철저히 닮은 듯한 페리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보는 이들도 페리에게 끌리고 일말 일순간 동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지가 50년이 지나는 동안, 페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범죄자를 등장시킨 콘텐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이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내용. 이 괴물을 만든 이는 누구인가,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 무작정 동조하기도, 그렇다고 무작정 방치하고 무시하기도 힘들다. 이 책의 위대한 점이 바로 그 부분을 굉장히 다양한 관점과 소견과 견해와 감정을 혼합해 쉽게 풀 수 없게 했다는 점일 테다.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논픽션 노블'로 들여다보는 1960년대 미국


<인 콜드 블러드>는 저자와 맞닿아 있는 페리를 들여다보며 객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집합체 사회 안에서의 개인을 끄집어내어 경종을 울리는 한편, 1950~60년대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사회 자체에 경종을 울린다. 일면 평화로운 시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나 베트남전쟁 사이의 화려한 시대, 중산층이 비상하고 히피문화가 활황하는 와중 냉전 한복판에서의 세계 최강대국 미국.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시대, 이 사회를 저자는 홀컴이라는 작은 마을로 수렴시켜, 명망 높은 한 가족에 닥친 끔찍한 사태가 온 동네를 휩쓸어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일면 단단해 보였던 사회의 구조물은 실상 아주 부실한 구조로 쌓아올려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갈팡질팡 어쩌질 못한다. 


카포티는 이 책을 오로지 사실만으로, 또는 완전한 픽션만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논픽션 노블'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면서 거짓으로 진실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모순이 공존하는 이와 같은 책을 쓴 이유는, 페리로 대표되는 개인과 홀컴으로 대표되는 사회를 복합적으로 효과있게 그러면서 임팩트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개인-사회-시대라는 전체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부터, 삶-죽음이라는 핵심 가치의 개념을 지나, 살인-수사-사형이라는 범죄 특성상의 전문 개념까지 아우르다 보니, 살아가다 맞닦드리는 생각의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 작품으로만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 콜드 블러드>의 부제는 '일가족 살인사건과 수사과정을 다룬 진실한 기록'이다. 우선,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뤘다. 범죄소설의 외형이다. 다음으로 '수사'과정을 다룬다. 개인과 사회를 들여다보는 개념의 일환이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기록이다. 아웃사이더 저자에 의한 아웃사이더 페리를 위한,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오가는 기록이다. 이 책과 함께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 <카포티>를 보면 더 많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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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 살인, 아웃사이더,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카포티
  • BlogIcon 空空(공공)
    2018.03.06 17:54 신고

    미드 크리미널마인드에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 BlogIcon singenv
      2018.03.06 17:58 신고

      오랜만입니다~ 공수래공수거님^^ 그 유명한 미드군요. 그 시작이 <인 콜드 블러드>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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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선 그 폭력의 자화상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7. 10. 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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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표지 ⓒ민음사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언론과 신문의 최고 명예와 같은 '퓰리처상'이 조셉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100년 넘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 언론과 신문의 최악 수치와 같은 '옐로저널리즘'이 퓰리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역시 100년 넘게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옐로저널리즘은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로 돈을 벌려는 자들을 일컫는데, 자본주의 팽창의 폐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의 언론을 이용한 광고 수집에 언론들이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론들끼리의 경쟁에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기사를 보낼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옐로저널리즘은 개인을, 사회를, 나라를, 시대를 속절없이 망쳐버리기도 한다. 한 개인을 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이 1975년 내놓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옐로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 그 폭력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인을 부른 옐로저널리즘 폭력


카타리나 블룸은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저녁 7시 4분경에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르곤 놀란 뫼딩에게 자수한다. 자신이 12시 15분경에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다고 말이다. 곧 수사가 시작되었고, 시간을 거슬러 2월 20일 수요일에 당도한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성실하고 한편 적막하게 사는 평범한 여성. 2월 20일 저녁 볼터스하임 부인 집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 참석한다. 그녀는 오직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자와 춤을 추었고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녀의 집은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괴텐이라는 자가 은행강도이자 살인범으로 수배되고 있던 자였기 때문. 


목요일 오전 경찰은 카타리나 집을 급습한다. 하지만 괴텐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곧 카타리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고 당연한듯 옐로저널리즘에 의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공표된다. 그것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형태로.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마수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로 뻗는다. 괴텐을 진정 사랑했던 카타리나는, 사랑을 얻고자 명예를 잃는 선택을 한다.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그녀에게 '명예'라는 게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차이퉁>지와 <존탁스차이퉁>지는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마치 그녀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도 한 짓을 저지르게끔 몰아간 것 같다. 카타리나가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것과 퇴트게스 기자가 카타리나를 옐로저널리즘 기조의 기사로 갈갈이 찢어발긴 것, 어느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


카타리나의 '잃어버린 명예'는 '인격'과 다름 아니다. '인격살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 체(體)를 살해한 것이다. 비록 육체적 살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육체 안에 자리잡은 인격의 살인은 사실 인간 자체의 살인과 다르지 않다. <차이퉁>과 <존탁스차이퉁>이 '표현의 자유'와 '무지'를 앞세워 카타리나를 향해 던진 돌은 명백히 살인자의 돌이었다. 


이 책의 부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인간을 자본에 종속된 하수인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고의를 빙자한 무지의 소산인 언어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어떤 식의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혹, 책에서 카타리나가 저지른 폭력의 원인과 결과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다. 


작가가 저격하는 대상은, 결코 <차이퉁>, <존탁스차이퉁>을 비롯한 옐로저널리즘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말을 비틀고 사실을 날조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기사를 날리려 해도, 최소한의 기본 바탕이 되는 말, 언어가 있어야 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소문, 삶 자체를 의심하는 경찰의 수사 및 조사,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 이 모든 게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범접할 수 없는 강물을 이룬다. 


이 책은 긍극적으로 그런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에게 화살을 쏘아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 위엔 옐로저널리즘의 탄생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 체제 따위가 아닌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풍요에 가려 절대로 볼 수 없는 정신적 폐허 말이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비단 카타리나뿐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잃어버린 명예이기도 하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고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는 한 사람, 카타리나 블룸에게 일어난 사건. 아주 다반사로 일어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나한테 일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건의 주인공은 당연히 누구라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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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0.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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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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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ㅇ니디언, 공감, 미국, 백인, 살인, 설원, 슬픔, 아픔, 윈드 리버, 이해, 테일리 쉐리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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